[창조가&혁신가 | 오석송 메타바이오메드 회장] 뻔뻔할 정도로 긍정적으로 도전하라
[창조가&혁신가 | 오석송 메타바이오메드 회장] 뻔뻔할 정도로 긍정적으로 도전하라
치아 가운데엔 대롱 모양의 빈 공간이 있다. ‘치근관’이란 부위다. 신경 치료를 하려면 이곳을 메워야 한다. 메타바이오메드는 여기에 들어가는 치근관 충전재 분야 세계 1위 기업이다. 세계 시장의 22%를 차지한다. 이 회사엔 또 다른 글로벌 제품도 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인체에 흡수되는 수술용 실인 생분해성 봉합사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개발했다. 메타바이오메드는 의료시장의 틈새시장을 공략해온 강소기업이다. 세계 100여 개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2015년 매출 405억원 가운데 93%인 370억원을 수출로 올렸다. 히든챔피언을 만들어 낸 오석송 메타바이오메드 회장은 “여기까지 오는데 참 길이 험했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두 번 사업에 실패하며 자살까지 시도했던 경험이 있다. 그는 “궁지에 몰리다 보니 뻔뻔할 정도로 긍정적인 생각만 한다”며 “아예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업에 매달렸다”고 말했다.
선린상고 출신의 오 회장은 금융권으로 간 동창들과 달리 일반 기업을 선택했다. 일을 배워 나중에 사업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1970년대 대기업이던 대주산업 경리부장으로 일하다 1986년 치과 의료 소재를 만드는 미국계 회사 한국슈어프로덕트로 자리를 옮겼다. 관리이사로 지내던 1989년 회사가 노사분규로 문을 닫았다. 미국 경영진이 사업을 포기하고 떠난 것이다. 오 회장은 노조를 설득하는 동시에 미국 경영진과 인수 협상을 벌였다. “집부터 팔았습니다. 저축 통장도 모두 정리했고요. 전재산을 투자해 회사를 인수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지요.”
그는 노조도 회사가 문을 닫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조의 요구는 갈수록 거세졌다. 162개 조항을 놓고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노조에 밀려 회사를 포기했다. “내 회사가 생긴 지 3개월 만이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아직 희망은 있었습니다. 충전재 글로벌 인맥이 있었습니다. 제품만 만들면 어떻게든 판매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치과 충전재의 가능성을 확신한 그는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현지인과 합자 회사를 세우고 곧장 공장을 건설했다. 하지만 준비가 너무나 부족했다. 제품 불량률이 높았다. 인도네시아산 제품을 구입하는 곳도 찾기 어려웠다. 결국 친척과 지인들에게 빌린 자금마저 모두 날린 그는 빈털터리로 한국에 돌아왔다. 사업을 시작한 지 3년 만의 씁쓸한 귀국이었다. 신용불량자가 된 그는 인맥마저 잃었다. 갈 곳 없던 그는 신경안정제 30알을 들고 아버지 산소로 향했다. “소주를 퍼 마시며 통곡하다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났는데 ‘추워 죽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추위도 못 견디면서 죽음을 쉽게 생각한 내 자신이 우스웠습니다. 산을 내려오며 다시 도전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댄 언덕은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그의 소식을 들은 친구 일곱 명이 연대 보증을 서준 덕에 동부 신용금고에서 5000만원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청주 모충동 건물 지하에 60평 사무실을 냈다. 아주머니 12명이 손으로 충전재를 만들면 차에 싣고 물건을 팔러 다녔다. 사장·경리·운전기사·작업반장·영업사원 역할까지 1인 5역을 했다. 다행히 예전 미국 바이어에게 물품을 넘길 수 있었다. 거래처가 생기자 회사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1995년 6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근관치료용 제품을 등록했다. 매출이 늘자 그는 신제품 개발에 눈을 돌렸다. 꾸준히 제품을 개선한 덕에 2000년 3월 근관충전재 개발에 성공했다. 제품은 같은 해 미국 FDA 승인을 받았고, EU의 제품안전인증인 CE마크를 획득했다. 이 제품으로 메타바이오메드는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달성한다.
1998년 오 회장은 우연한 기회에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냈다. 전북대 학생들에게 강연하는 자리였다. ‘포기하지 말고, 될 때까지, 끝까지 도전하라’는 강연에 김학연 전북대 섬유공학과 교수가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 김 교수는 몸 안에서 녹는 수술실을 연구하고 있었다. 의기투합한 그들은 함께 제품 개발을 시작했다. 당시 생분해성 봉합원사 기술력을 가진 기업은 세계에서 단 6곳뿐이었다. 한국에선 삼양만 만들고 있었다. 1999년 개발을 시작해 2001년 생명공학 관련 분야 공장 및 기술연구소를 준공했다. 연구는 2002년 결실을 맺었다. 치주 질환용 생체분해성 유도조직 재생막 및 그 제조방법에 관해 특허를 출원하고 생산을 시작했다. “특허를 내고 오는 길인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굴지의 대기업들이 자리 잡은 시장에 무명의 한국 중소기업이 도전장을 던졌으니까요. 뻔뻔하게 달라붙어서 어떻게든 팔아야 했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만든 제품을 담은 가방을 양손에 들고 독일 등 세계 곳곳에서 열린 의료기기 전시회를 다녔다. 직접 판매처 관계자들을 만나 명함을 건넨 다음 제품을 소개했다. 지금까지 오 회장이 쌓은 항공사 마일리지는 350만 마일에 달한다. 견고했던 세계 시장의 문은 독일에서 열린 한 의료 소재 박람회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독일의 의료기기 기업 비브라운 관계자가 메타바이오메드의 제품을 인상깊게 살펴봤다. 작은 회사지만 품질이 좋다는 평가도 매겼다. 비브라운은 독일에서 유일하게 생분해성 봉합사 생산기술을 보유한 회사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시작됐다. 미군에게 봉합사를 공급해온 비브라운에도 비상이 걸렸다. 부상자가 늘며 수요가 폭증했는데 공급량이 크게 부족했다. 비브라운이 메타바이오메드에 제품 주문서를 보낸 배경이다. 김해동 비브라운 코리아 대표는 “메타바이오메드는 깐깐한 독일 심사를 통과한 기업”이라며 “첫 거래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거래하며 신용을 쌓아온 좋은 파트너”라고 소개했다. 2015년 메타바이오메드 생분해성 봉합원사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10%를 뛰어넘었다.
최근 메타바이오메드는 치과 의료 소재와 생분해성 봉합사 중심의 사업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생체 재료와 의료기기 등의 개발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기술 개발에 성공한 제품으로 척추 시술용 일회용 경막외내시경카테타가 있다. 2014년 국내 식약처 인증 및 CE를 획득했고, 터키에 수출을 시작했다. 중국 진출을 위해 CFDA인증도 진행 중이다. 2017년 중국 판매가 목표다. 이 제품은 일회용 제품을 사용해 감염확률이 낮다 꼬리뼈 부근을 절개해 내시경을 삽입하는 방식이라 수술에 비해 시술이 간편하고 회복이 빠르다. 일회용내시경카테타 관련 제품인 저가형 카테타, 레이저를 장착한 제품군도 개발 중이다. 오 회장은 “헬스케어산업이 추구하는 가치관은 안전하고 편리하게 환자의 고통을 치유하는 기술 개발”이라며 “고령화 사회에 임박한 지금,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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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린상고 출신의 오 회장은 금융권으로 간 동창들과 달리 일반 기업을 선택했다. 일을 배워 나중에 사업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1970년대 대기업이던 대주산업 경리부장으로 일하다 1986년 치과 의료 소재를 만드는 미국계 회사 한국슈어프로덕트로 자리를 옮겼다. 관리이사로 지내던 1989년 회사가 노사분규로 문을 닫았다. 미국 경영진이 사업을 포기하고 떠난 것이다. 오 회장은 노조를 설득하는 동시에 미국 경영진과 인수 협상을 벌였다. “집부터 팔았습니다. 저축 통장도 모두 정리했고요. 전재산을 투자해 회사를 인수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지요.”
그는 노조도 회사가 문을 닫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조의 요구는 갈수록 거세졌다. 162개 조항을 놓고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노조에 밀려 회사를 포기했다. “내 회사가 생긴 지 3개월 만이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아직 희망은 있었습니다. 충전재 글로벌 인맥이 있었습니다. 제품만 만들면 어떻게든 판매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고교 친구의 연대보증으로 재기
그가 마지막으로 기댄 언덕은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그의 소식을 들은 친구 일곱 명이 연대 보증을 서준 덕에 동부 신용금고에서 5000만원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청주 모충동 건물 지하에 60평 사무실을 냈다. 아주머니 12명이 손으로 충전재를 만들면 차에 싣고 물건을 팔러 다녔다. 사장·경리·운전기사·작업반장·영업사원 역할까지 1인 5역을 했다. 다행히 예전 미국 바이어에게 물품을 넘길 수 있었다. 거래처가 생기자 회사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1995년 6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근관치료용 제품을 등록했다. 매출이 늘자 그는 신제품 개발에 눈을 돌렸다. 꾸준히 제품을 개선한 덕에 2000년 3월 근관충전재 개발에 성공했다. 제품은 같은 해 미국 FDA 승인을 받았고, EU의 제품안전인증인 CE마크를 획득했다. 이 제품으로 메타바이오메드는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달성한다.
1998년 오 회장은 우연한 기회에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냈다. 전북대 학생들에게 강연하는 자리였다. ‘포기하지 말고, 될 때까지, 끝까지 도전하라’는 강연에 김학연 전북대 섬유공학과 교수가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 김 교수는 몸 안에서 녹는 수술실을 연구하고 있었다. 의기투합한 그들은 함께 제품 개발을 시작했다. 당시 생분해성 봉합원사 기술력을 가진 기업은 세계에서 단 6곳뿐이었다. 한국에선 삼양만 만들고 있었다. 1999년 개발을 시작해 2001년 생명공학 관련 분야 공장 및 기술연구소를 준공했다. 연구는 2002년 결실을 맺었다. 치주 질환용 생체분해성 유도조직 재생막 및 그 제조방법에 관해 특허를 출원하고 생산을 시작했다. “특허를 내고 오는 길인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굴지의 대기업들이 자리 잡은 시장에 무명의 한국 중소기업이 도전장을 던졌으니까요. 뻔뻔하게 달라붙어서 어떻게든 팔아야 했습니다.”
이라크 전쟁 덕에 세계 시장 진출
최근 메타바이오메드는 치과 의료 소재와 생분해성 봉합사 중심의 사업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생체 재료와 의료기기 등의 개발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기술 개발에 성공한 제품으로 척추 시술용 일회용 경막외내시경카테타가 있다. 2014년 국내 식약처 인증 및 CE를 획득했고, 터키에 수출을 시작했다. 중국 진출을 위해 CFDA인증도 진행 중이다. 2017년 중국 판매가 목표다. 이 제품은 일회용 제품을 사용해 감염확률이 낮다 꼬리뼈 부근을 절개해 내시경을 삽입하는 방식이라 수술에 비해 시술이 간편하고 회복이 빠르다. 일회용내시경카테타 관련 제품인 저가형 카테타, 레이저를 장착한 제품군도 개발 중이다. 오 회장은 “헬스케어산업이 추구하는 가치관은 안전하고 편리하게 환자의 고통을 치유하는 기술 개발”이라며 “고령화 사회에 임박한 지금,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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