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듯 닮지 않은 두 사람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사람
보수적인 대처와 달리 메이 총리는 소수 특권층보다는 다수를 위한 정책을 실시하겠다고 공언해 1975년 보수당 대표 선두주자 키스 조셉이 궁지에 몰린 현직 에드워드 히스 총리에 맞설 만한 강단이 없다고 물러나자 그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가 대신 도전하기로 했다. “우리 진영에서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 당신이 안 한다면 내가 하겠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그 비주류 후보 마거릿 대처는 훗날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자리에 올라 전후 시대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영국 지도자가 된다. 영국이 대처에 이어 두 번째로 보수당 소속 여성 정치인 테레사 메이를 총리로 맞았다. 두 여성의 비교가 안이한 발상이긴 하지만 그만한 의미는 있을 듯하다.
영국 정치는 여전히 계급의식이 지배한다. 대처와 메이 모두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 정부 보조금을 받는 대입시 대비 중등학교) 출신으로 보수당을 장악한 사립학교 출신들에 대한 도전을 상징한다. 두 사람 모두 출세지향적인 영국 중산층의 가치와 기대(선거 승리에 결정적인 변수)를 구현한다. 명문교 이튼스쿨 출신인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에게는 없는 자질이다.
두 여성 모두 총리에 오르기 전 장관을 맡아 결단력과 회복력을 과시했다. 대처는 교육부 장관 시절 취학아동 대상의 무상 우유급식을 중단해 ‘우유 도둑(Milk Snatcher)’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 정치 경력을 쌓았다. 메이의 행정부 경력은 더 인상적이다. 상당수 정치 지도자 후보들을 몰락시킨 불가능에 가까운 내무부 수장을 맡아 장수했다.
내무부 장관 시절 메이는 완고함과 끈기로 명성을 쌓았다. 메이의 ‘버티기(digging her heels in)’ 이미지는 이젠 대처의 ‘핸드백질’(handbagging, 항상 핸드백을 들고 다니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 데서 유래)만큼이나 악명 높다. 그러나 대처는 사교적이었던 반면 메이는 다소 외톨이형으로 알려졌다. 자신에게는 영국 정계의 오염된 공기를 피하는 능력이 있다며 그것을 총리직 수행에 적합한 특유의 자질로 자랑스럽게 과시한다. 원내에 측근 그룹이 없지만 여러 해 동안 중요한 곳에서 조용히 지지기반을 구축해 왔다는 관측도 있다. 선거구 만찬에서 연설하고 열성당원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다져왔다. 메이는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과 마이클 고브 전 법무장관과 달리 실제로 기회가 왔을 때는 기막히게 냄새를 맡는, 대처처럼 노련한 정치인이다.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대처와 메이 모두 근대화의 기수로 자리매김했다. 보수당이 쇠퇴하는 케인즈 컨센서스에 집착할 동안 대처는 일찍이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지지했다. 반면 메이는 대처 유산의 폐해를 남들보다 먼저 인식하고 동료 보수당원들에게 더 온정적 보수주의를 받아들여 ‘고약한 당(nasty party)’의 이미지를 씻어내자고 촉구했다. 메이는 이를 위해 2005년 자신이 설립한 ‘위민2윈(Women2win)’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여성 보수당 의원들을 더 많이 규합하기도 했다. 대처는 각료 회의에서 유일한 여성임을 즐겼으며 그로 인해 다른 여성을 거의 각료로 승진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메이는 여성을 다수 요직에 앉힐 가능성이 크다.
메이는 정실 자본주의를 배척하고 소수 특권층보다는 다수를 위한 정책을 실시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는 그녀가 대처와는 전혀 다른 보수주의자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대처도 1975년 대기업의 독점, 국가 (그리고 당시 노조)에 맞서 국민의 이익을 보호하겠다고 비슷한 약속을 했다. 그러나 올해의 영국은 1975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메이는 대다수 보수파와 마찬가지로 국민투표로 드러난 세계화의 승자와 패자 간의 분열을 시급히 봉합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다. 특히 보수파가 노동당의 약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대처는 지도자 자리에 섰을 때 높은 톤의 목소리로 놀림을 받았다(저음으로 말하는 과외를 받기도 했다). 노동당 진영에선 ‘자신감 없는 병아리’라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나 메이는 1975년의 대처보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더 높으며 영국 사회도 그때보다 여성 지도자에 더 익숙해졌다. 이 두 가지 요인은 메이가 필시 더 큰 존경을 받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지 ‘더 선’은 그녀가 하이힐로 경쟁자들을 짓밟는 이미지를 1면에 올려 메이의 당선 소식을 알렸다. 이 같은 사실은 여성 지도자를 묘사할 때 신문업계의 구태가 쉬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흥미롭게도 두 여성의 한 가지 공통분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깊은 기독교 신앙이다. 대처의 부친은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반면 메이의 부친은 성공회 성직자였다. 철의 여인 대처의 확신과 결단력은 틀림없이 기독교적인 가정교육에서 비롯됐다. 메이도 분명 이 같은 특성을 의식적으로 모방하려 할 것이다.
영국은 나라가 불안할 때 풍랑을 헤쳐나가는 영국호의 키를 강인한 여성들에게 맡기는 경향을 보인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처 모두 어려운 시기에 권력을 잡았다. 메이는 다른 총리 경쟁 후보들과 달리 극심한 국론분열 후 단합을 이루겠다고 약속하면서 여론의 흐름을 정확히 판단했다. 영국은 사립학교 논쟁과 남성 우월주의 태도로 분열됐다. 여러 모로 볼 때 구식의 교외 주택지구 보수주의자인 메이야말로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감일지도 모른다.
- 엘리자 필비
[ 필자는 킹스칼리지런던의 역사가이며 ‘신과 미세스 대처(God and Mrs Thatcher)’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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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려졌다시피 그 비주류 후보 마거릿 대처는 훗날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자리에 올라 전후 시대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영국 지도자가 된다. 영국이 대처에 이어 두 번째로 보수당 소속 여성 정치인 테레사 메이를 총리로 맞았다. 두 여성의 비교가 안이한 발상이긴 하지만 그만한 의미는 있을 듯하다.
영국 정치는 여전히 계급의식이 지배한다. 대처와 메이 모두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 정부 보조금을 받는 대입시 대비 중등학교) 출신으로 보수당을 장악한 사립학교 출신들에 대한 도전을 상징한다. 두 사람 모두 출세지향적인 영국 중산층의 가치와 기대(선거 승리에 결정적인 변수)를 구현한다. 명문교 이튼스쿨 출신인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에게는 없는 자질이다.
두 여성 모두 총리에 오르기 전 장관을 맡아 결단력과 회복력을 과시했다. 대처는 교육부 장관 시절 취학아동 대상의 무상 우유급식을 중단해 ‘우유 도둑(Milk Snatcher)’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 정치 경력을 쌓았다. 메이의 행정부 경력은 더 인상적이다. 상당수 정치 지도자 후보들을 몰락시킨 불가능에 가까운 내무부 수장을 맡아 장수했다.
내무부 장관 시절 메이는 완고함과 끈기로 명성을 쌓았다. 메이의 ‘버티기(digging her heels in)’ 이미지는 이젠 대처의 ‘핸드백질’(handbagging, 항상 핸드백을 들고 다니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 데서 유래)만큼이나 악명 높다. 그러나 대처는 사교적이었던 반면 메이는 다소 외톨이형으로 알려졌다. 자신에게는 영국 정계의 오염된 공기를 피하는 능력이 있다며 그것을 총리직 수행에 적합한 특유의 자질로 자랑스럽게 과시한다. 원내에 측근 그룹이 없지만 여러 해 동안 중요한 곳에서 조용히 지지기반을 구축해 왔다는 관측도 있다. 선거구 만찬에서 연설하고 열성당원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다져왔다. 메이는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과 마이클 고브 전 법무장관과 달리 실제로 기회가 왔을 때는 기막히게 냄새를 맡는, 대처처럼 노련한 정치인이다.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대처와 메이 모두 근대화의 기수로 자리매김했다. 보수당이 쇠퇴하는 케인즈 컨센서스에 집착할 동안 대처는 일찍이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지지했다. 반면 메이는 대처 유산의 폐해를 남들보다 먼저 인식하고 동료 보수당원들에게 더 온정적 보수주의를 받아들여 ‘고약한 당(nasty party)’의 이미지를 씻어내자고 촉구했다. 메이는 이를 위해 2005년 자신이 설립한 ‘위민2윈(Women2win)’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여성 보수당 의원들을 더 많이 규합하기도 했다. 대처는 각료 회의에서 유일한 여성임을 즐겼으며 그로 인해 다른 여성을 거의 각료로 승진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메이는 여성을 다수 요직에 앉힐 가능성이 크다.
메이는 정실 자본주의를 배척하고 소수 특권층보다는 다수를 위한 정책을 실시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는 그녀가 대처와는 전혀 다른 보수주의자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대처도 1975년 대기업의 독점, 국가 (그리고 당시 노조)에 맞서 국민의 이익을 보호하겠다고 비슷한 약속을 했다. 그러나 올해의 영국은 1975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메이는 대다수 보수파와 마찬가지로 국민투표로 드러난 세계화의 승자와 패자 간의 분열을 시급히 봉합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다. 특히 보수파가 노동당의 약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대처는 지도자 자리에 섰을 때 높은 톤의 목소리로 놀림을 받았다(저음으로 말하는 과외를 받기도 했다). 노동당 진영에선 ‘자신감 없는 병아리’라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나 메이는 1975년의 대처보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더 높으며 영국 사회도 그때보다 여성 지도자에 더 익숙해졌다. 이 두 가지 요인은 메이가 필시 더 큰 존경을 받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지 ‘더 선’은 그녀가 하이힐로 경쟁자들을 짓밟는 이미지를 1면에 올려 메이의 당선 소식을 알렸다. 이 같은 사실은 여성 지도자를 묘사할 때 신문업계의 구태가 쉬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흥미롭게도 두 여성의 한 가지 공통분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깊은 기독교 신앙이다. 대처의 부친은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반면 메이의 부친은 성공회 성직자였다. 철의 여인 대처의 확신과 결단력은 틀림없이 기독교적인 가정교육에서 비롯됐다. 메이도 분명 이 같은 특성을 의식적으로 모방하려 할 것이다.
영국은 나라가 불안할 때 풍랑을 헤쳐나가는 영국호의 키를 강인한 여성들에게 맡기는 경향을 보인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처 모두 어려운 시기에 권력을 잡았다. 메이는 다른 총리 경쟁 후보들과 달리 극심한 국론분열 후 단합을 이루겠다고 약속하면서 여론의 흐름을 정확히 판단했다. 영국은 사립학교 논쟁과 남성 우월주의 태도로 분열됐다. 여러 모로 볼 때 구식의 교외 주택지구 보수주의자인 메이야말로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감일지도 모른다.
- 엘리자 필비
[ 필자는 킹스칼리지런던의 역사가이며 ‘신과 미세스 대처(God and Mrs Thatcher)’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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