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잘 아는 일해야 성공한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일해야 성공한다”
토니 고, 미국에서 성공한 색조 화장품 회사 ‘닉스 코스메틱’을 로레알에 매각하고 선글라스 사업에 또 뛰어들어 “학창 시절 어머니께서 화장을 못 하게 해서, 책가방에 비누와 화장품을 늘 챙겨갔어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립스틱을 바르고 아이라이너로 눈꼬리를 그렸죠. 수업이 끝나면 (화장을 지우기 위해) 세수를 하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점심 사 먹을 돈을 아껴서 립스틱 하나를 겨우 장만했죠.”
토니 고(고미영·43)의 아메리칸 드림은 이처럼 ‘화장품’이 원동력이었다. 그녀는 올해 포브스의 ‘미국에서 자수성가한 여성 부자(America’s Richest Self-Made Women)’ 순위에서 57위를 차지했다. 로스엔젤레스(LA)에 사는 그녀의 성공 비결을 전화로 들었다.
“프리틴(preteen·10~12세)이라고 하죠? 제가 1986년 대구에서 살다 미국에 갔을 때가 딱 그 정도 나이에요. 국민학교 마치고 바로 갔으니까. 아, 지금은 국민학교가 아니라 초등학교라고 하죠? 저 다닐 때는 국민학교라고 했어요.”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토니는 미국에 갔을 때만해도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고 털어놨다. “물론 하이, 헬로우, 예스, 노 같은 기본적인 영어는 했죠. 아주 어릴 때는 언어와 문화를 스펀지처럼 흡수해요. 성인이 됐을 땐 내가 아는 영어를 기술적으로 통역(translation)하면 되니까 차라리 더 수월하죠. 저 같은 경우는 이중고(double whammy)를 겪은 셈이죠.”
토니는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0대 때는 어머니 몰래 학교에서 화장을 하고 백화점에서 값비싼 화장품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소녀였다. 주말과 방학때마다 그녀는 LA 다운타운에서 향수·화장품 도매업을 하는 어머니 고상미 씨를 도우며 ‘내 사업’에 대한 꿈을 키웠다.
샤넬·랑콤 같은 비싼 화장품을 살 형편이 안 됐던 그녀는 늘 드러그스토어(대형 상점)에서 저렴한 제품을 샀지만 만족도는 크게 떨어졌다. “빨간색 립스틱은 밝고 생기 있는 톤이 아니었고, 파란색 아이섀도는 원하는 색이 나오질 않았어요.” 이 같은 경험은 ‘샤넬 수준의 품질을 가진 드러그스토어 제품을 직접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토니는 화장품 시장을 다각도로 분석한 끝에 고품질의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 틈새시장을 발견했다. 하지만 다시 언어가 큰 장벽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잘한다고 생각했던 영어가 사업을 하면서 한계에 부닥쳤어요. 언어는 문화에요. 미국에 갔지만 한국 드라마 보고, 한국 책을 보고, 한국 음식을 먹었죠. 몸은 미국에 있는데 한국 문화에 젖어 있었던 거죠. 그런데 비즈니스를 하려면 일단 미국 사람이랑 친해져야 하거든요. 저는 그 선을 넘지 못했던 거죠. 몇 마디 하다보면 할 얘기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사는 방식을 완전히 바꿨어요.”
그 뒤로 한국 드라마 시청을 중단하고 밤마다 어릴 때 읽던 영어 동화책을 사서 큰 소리로 읽으며 발음 교정에 나섰다. 그녀는 미국인과 대화를 잘 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특유의 딱딱하고 뻣뻣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긴장하지 않는(relax) 것이 중요해요. 웃는 얼굴도 긴장을 풀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도움이 돼죠.”
토니는 글린데일 커뮤니티 칼리지를 중퇴하고 1999년 25세에 부모에게 빌린 25만 달러로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회사가 바로 닉스 코스메틱스(이하 닉스)다. LA에 작은 사무실에서 닉스가 처음 판매한 상품은 아이라이너와 립펜슬로 개당 가격은 1.99달러였다. 당시 인기를 끌던 미국 색조화장품 브랜드 어반디케이(Urban Decay) 제품의 5분의 1 가격이었지만 품질이 좋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출시 첫해 4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2000년대 초반 닉스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색조화장품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TV·잡지 광고 외에는 소비자에게 제품을 알릴 방법이 많지 않았던 과거와 달리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 다양한 홍보 채널이 생긴 덕분이다. 닉스는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 등을 통해 제품의 광고와 마케팅을 하고 그 비용을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많은 뷰티 블로거, 유튜버 등이 값싸고 질 좋은 닉스 제품을 소개해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미국의 대표적인 뷰티전문 매장인 ‘세포라’와 ‘얼타 뷰티’ 매장 수백 곳에도 입점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백화점 고객이 드러그스토어의 화장품 제품으로 눈을 돌리면서 닉스의 매출이 크게 증가했다. 대기업 로레알이 5억 달러에 인수한 2014년 닉스의 매출은 1억2000만 달러였고 직원은 250명에 달했다. 당시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160만 명으로 로레알보다 300배 많았다.
닉스를 로레알에 넘길 때만 해도 토니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해변에서 여유롭게 칵테일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닉스를 매각하기까지가 재밌었지 막상 팔고나니 허무하고 슬픈 기분이 들더라고요. 삶에 가치를 더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면서 더 열심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닉스의 큰 성공으로 2억6000만 달러의 부를 일궜지만 토니는 또 다시 창업에 나섰다. 두 번째 사업 아이템을 고민하던 그녀는 선글라스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좋아하고 것 중에서 선택했습니다. 먹는 걸 하자니 제가 하던 업종과 많이 달랐고, 신발이나 옷을 팔자니 사이즈가 너무 많았죠. 한 가지 사이즈로 판매할 수 있는 걸 찾아보니 선글라스가 남더라구요. 제가 원래 선글라스 마니아였거든요.”
토니는 선글라스를 100여 개 갖고 있었는데, 모두 유명 브랜드 제품으로 개당 가격은 300달러가 넘었다. 모두 색상이 검은색 계열이었고 디자인도 대부분 비슷했다. 그는 닉스처럼 고품질의 선글라스를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기로 하고, 지난 3월 LA에서 선글라스 회사 ‘퍼버스(Perverse Sunglasses)’를 창업했다. 다양한 색상의 선글라스를 40~60달러에 출시했다. 그녀는 “퍼버스의 품질은 150달러짜리 선글라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잘 아는 일을 해야 성공한다”고 말했다. “100%도 아니고 1000% 알아야 합니다. 전 여자이고 화장품 소비자이며 화장을 아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한테 왜 그렇게 화장을 진하게 하냐고 물어요. 저는 되묻죠. ‘화장품을 파는 사람이 화장을 안하면 누가 하겠어요’라고 말이죠. 돈을 벌기 위해 비즈니스에 뛰어들려는 사람은 말리고 싶어요. 즐겨야 성공합니다.”
포브스가 발표한 ‘미국에서 자수성가한 여성 부자’ 60인에 한국계 여성 3인이 포함됐다. 이들은 어린 나이·여성·동양인 3대 핸디캡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장진숙(포에버21 공동창업자): 장 씨가 의류업에 도전한 건 “주유소에서 일하면서 보니까 좋은 차 끌고 다니는 사람은 다 의류업하더라”는 남편의 말 때문이었다. 그 얘기는 그만큼 의류업자가 많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장 씨는 어린 두 딸의 더렵혀진 옷을 자주 갈아입히면서 “세탁비도 만만찮은데 값싼 일회용 옷은 없을까”라는 생각에서 ‘포에버21’을 착안했다. 그녀의 도전은 패스트 패션의 신호탄이었다.
타이 리(SHI CEO):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던 타이는 대학에서 생물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수업시간에 쓰기와 말하기를 해야 하는 전공은 절대 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왜일까? “최고의 점수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영어를 전공해 나쁜 점수를 받느니 잘하는 과목으로 학점을 더 잘 받고 싶어서다. 이민자로서 미국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었다.
토니 고(퍼버스 CEO): 1인 창업자 토니는 “사장 겸 비서에 창고 정리와 물건 배달까지 모두 다했다”고 한다. 창업 2년 째 접어들면서 직원 두 명을 고용했다. 하지만 직원 월급과 사무실 임대료 주고 정작 자신은 단돈 1센트도 안 가져갔다. ‘투자’라는 목표 때문이다. 그녀는 “2년 간 무보수 사장으로 일하고 남는 돈은 100% 재투자했다”고 말했다. 유명 브랜드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제품의 경쟁력 ‘품질’을 최대로 끌어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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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고(고미영·43)의 아메리칸 드림은 이처럼 ‘화장품’이 원동력이었다. 그녀는 올해 포브스의 ‘미국에서 자수성가한 여성 부자(America’s Richest Self-Made Women)’ 순위에서 57위를 차지했다. 로스엔젤레스(LA)에 사는 그녀의 성공 비결을 전화로 들었다.
“프리틴(preteen·10~12세)이라고 하죠? 제가 1986년 대구에서 살다 미국에 갔을 때가 딱 그 정도 나이에요. 국민학교 마치고 바로 갔으니까. 아, 지금은 국민학교가 아니라 초등학교라고 하죠? 저 다닐 때는 국민학교라고 했어요.”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토니는 미국에 갔을 때만해도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고 털어놨다. “물론 하이, 헬로우, 예스, 노 같은 기본적인 영어는 했죠. 아주 어릴 때는 언어와 문화를 스펀지처럼 흡수해요. 성인이 됐을 땐 내가 아는 영어를 기술적으로 통역(translation)하면 되니까 차라리 더 수월하죠. 저 같은 경우는 이중고(double whammy)를 겪은 셈이죠.”
토니는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0대 때는 어머니 몰래 학교에서 화장을 하고 백화점에서 값비싼 화장품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소녀였다. 주말과 방학때마다 그녀는 LA 다운타운에서 향수·화장품 도매업을 하는 어머니 고상미 씨를 도우며 ‘내 사업’에 대한 꿈을 키웠다.
샤넬·랑콤 같은 비싼 화장품을 살 형편이 안 됐던 그녀는 늘 드러그스토어(대형 상점)에서 저렴한 제품을 샀지만 만족도는 크게 떨어졌다. “빨간색 립스틱은 밝고 생기 있는 톤이 아니었고, 파란색 아이섀도는 원하는 색이 나오질 않았어요.” 이 같은 경험은 ‘샤넬 수준의 품질을 가진 드러그스토어 제품을 직접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토니는 화장품 시장을 다각도로 분석한 끝에 고품질의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 틈새시장을 발견했다. 하지만 다시 언어가 큰 장벽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잘한다고 생각했던 영어가 사업을 하면서 한계에 부닥쳤어요. 언어는 문화에요. 미국에 갔지만 한국 드라마 보고, 한국 책을 보고, 한국 음식을 먹었죠. 몸은 미국에 있는데 한국 문화에 젖어 있었던 거죠. 그런데 비즈니스를 하려면 일단 미국 사람이랑 친해져야 하거든요. 저는 그 선을 넘지 못했던 거죠. 몇 마디 하다보면 할 얘기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사는 방식을 완전히 바꿨어요.”
그 뒤로 한국 드라마 시청을 중단하고 밤마다 어릴 때 읽던 영어 동화책을 사서 큰 소리로 읽으며 발음 교정에 나섰다. 그녀는 미국인과 대화를 잘 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특유의 딱딱하고 뻣뻣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긴장하지 않는(relax) 것이 중요해요. 웃는 얼굴도 긴장을 풀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도움이 돼죠.”
토니는 글린데일 커뮤니티 칼리지를 중퇴하고 1999년 25세에 부모에게 빌린 25만 달러로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회사가 바로 닉스 코스메틱스(이하 닉스)다. LA에 작은 사무실에서 닉스가 처음 판매한 상품은 아이라이너와 립펜슬로 개당 가격은 1.99달러였다. 당시 인기를 끌던 미국 색조화장품 브랜드 어반디케이(Urban Decay) 제품의 5분의 1 가격이었지만 품질이 좋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출시 첫해 4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2000년대 초반 닉스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색조화장품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TV·잡지 광고 외에는 소비자에게 제품을 알릴 방법이 많지 않았던 과거와 달리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 다양한 홍보 채널이 생긴 덕분이다. 닉스는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 등을 통해 제품의 광고와 마케팅을 하고 그 비용을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많은 뷰티 블로거, 유튜버 등이 값싸고 질 좋은 닉스 제품을 소개해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미국의 대표적인 뷰티전문 매장인 ‘세포라’와 ‘얼타 뷰티’ 매장 수백 곳에도 입점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백화점 고객이 드러그스토어의 화장품 제품으로 눈을 돌리면서 닉스의 매출이 크게 증가했다. 대기업 로레알이 5억 달러에 인수한 2014년 닉스의 매출은 1억2000만 달러였고 직원은 250명에 달했다. 당시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160만 명으로 로레알보다 300배 많았다.
닉스를 로레알에 넘길 때만 해도 토니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해변에서 여유롭게 칵테일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닉스를 매각하기까지가 재밌었지 막상 팔고나니 허무하고 슬픈 기분이 들더라고요. 삶에 가치를 더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면서 더 열심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닉스의 큰 성공으로 2억6000만 달러의 부를 일궜지만 토니는 또 다시 창업에 나섰다. 두 번째 사업 아이템을 고민하던 그녀는 선글라스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좋아하고 것 중에서 선택했습니다. 먹는 걸 하자니 제가 하던 업종과 많이 달랐고, 신발이나 옷을 팔자니 사이즈가 너무 많았죠. 한 가지 사이즈로 판매할 수 있는 걸 찾아보니 선글라스가 남더라구요. 제가 원래 선글라스 마니아였거든요.”
토니는 선글라스를 100여 개 갖고 있었는데, 모두 유명 브랜드 제품으로 개당 가격은 300달러가 넘었다. 모두 색상이 검은색 계열이었고 디자인도 대부분 비슷했다. 그는 닉스처럼 고품질의 선글라스를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기로 하고, 지난 3월 LA에서 선글라스 회사 ‘퍼버스(Perverse Sunglasses)’를 창업했다. 다양한 색상의 선글라스를 40~60달러에 출시했다. 그녀는 “퍼버스의 품질은 150달러짜리 선글라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잘 아는 일을 해야 성공한다”고 말했다. “100%도 아니고 1000% 알아야 합니다. 전 여자이고 화장품 소비자이며 화장을 아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한테 왜 그렇게 화장을 진하게 하냐고 물어요. 저는 되묻죠. ‘화장품을 파는 사람이 화장을 안하면 누가 하겠어요’라고 말이죠. 돈을 벌기 위해 비즈니스에 뛰어들려는 사람은 말리고 싶어요. 즐겨야 성공합니다.”
[박스기사] 아메리칸 드림 여성 3인방
포브스가 발표한 ‘미국에서 자수성가한 여성 부자’ 60인에 한국계 여성 3인이 포함됐다. 이들은 어린 나이·여성·동양인 3대 핸디캡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장진숙(포에버21 공동창업자): 장 씨가 의류업에 도전한 건 “주유소에서 일하면서 보니까 좋은 차 끌고 다니는 사람은 다 의류업하더라”는 남편의 말 때문이었다. 그 얘기는 그만큼 의류업자가 많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장 씨는 어린 두 딸의 더렵혀진 옷을 자주 갈아입히면서 “세탁비도 만만찮은데 값싼 일회용 옷은 없을까”라는 생각에서 ‘포에버21’을 착안했다. 그녀의 도전은 패스트 패션의 신호탄이었다.
타이 리(SHI CEO):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던 타이는 대학에서 생물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수업시간에 쓰기와 말하기를 해야 하는 전공은 절대 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왜일까? “최고의 점수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영어를 전공해 나쁜 점수를 받느니 잘하는 과목으로 학점을 더 잘 받고 싶어서다. 이민자로서 미국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었다.
토니 고(퍼버스 CEO): 1인 창업자 토니는 “사장 겸 비서에 창고 정리와 물건 배달까지 모두 다했다”고 한다. 창업 2년 째 접어들면서 직원 두 명을 고용했다. 하지만 직원 월급과 사무실 임대료 주고 정작 자신은 단돈 1센트도 안 가져갔다. ‘투자’라는 목표 때문이다. 그녀는 “2년 간 무보수 사장으로 일하고 남는 돈은 100% 재투자했다”고 말했다. 유명 브랜드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제품의 경쟁력 ‘품질’을 최대로 끌어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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