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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화학과 메디톡스는 왜 ITC로 갔나] 빠른 소송절차에 증거제출 요구권 갖춰

[LG화학과 메디톡스는 왜 ITC로 갔나] 빠른 소송절차에 증거제출 요구권 갖춰

美 법원 대신 존재감 커져… 국내 기업엔 불리할수도
미국 워싱턴 소재 국제무역위원회
배터리 기술 관련 지적재산권을 둘러싼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글로벌 소송전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US International Trade Commission, 이하 ITC)의 예비결정으로 무게추가 급격히 기울었다. ITC는 지난 2월 14일(현지시간)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이 2차전지 영업기밀을 침해했다’고 제기한 소송에서 SK이노베이션의 조기패소판결(Default Judgement)을 결정했다. 아직 공식적인 최종판결이 아니라 예비 결정이지만 업계에선 사실상 승부의 무게추가 기울었다고 보고 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소송이 주목받는 이유는 ITC에서 진행된 한국 기업(한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기업)간 분쟁이기 때문이다. 통상 글로벌 기업의 특허 소송은 그들이 진출한 시장 곳곳에서 진행하는데 두 회사는 한국 법원, 미국 법원, 그리고 ITC에서만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두 회사가 ITC를 찾은 이유가 일반적인 초국적 기업들의 특허권 다툼과는 맥락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증거 훼손하면 ‘조기 패소’ 가능성 높아
LG화학 측은 ITC에 영업기밀 관련 소송을 제기한 이유에 대해 “법원에 비해 소송절차가 빠르고, 증거 보존의 의무 등으로 증거 은폐를 어렵게 만드는 절차를 갖춰 명명백백히 사실관계를 밝힐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LG화학은 영업기밀 유출과 관련해 동일한 내용으로 델라웨어주 지방법원에서도 소송을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소송을 준비하는 무게추는 ITC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ITC가 훨씬 빠른 소송절차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ITC의 소송절차가 빠른 이유는 ITC가 사법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행정적 처분’을 통해 미국의 무역 불이익을 막으려고 만들어진 기구인 만큼 조사가 빠르게 진행된다. 조사를 개시하면 45일 내에 조사완료 목표일을 설정하도록 돼 있는데 이 기간이 짧게는 1년, 길어도 18개월에 불과하다. 국내외 법원 등에서 길게는 3년 이상이 걸리는 경우가 있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빠른 판결이다.

절차적으로도 차이가 있다. 국내 기업들이 집중하는 것은 ITC의 절차에 마련된 ‘디스커버리 제도’다. 법정에서의 증거개시 절차에 해당하는데, ITC는 제시된 사건 관련 자료를 양 측이 모두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증거의 보전이 중요하다. 증거를 보전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훼손한 경우 패소할 수 있다. ITC가 SK이노베이션에 조기패소를 선언한 이유도 이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11월 LG화학은 ITC에 SK이노베이션이 7개 계열사 프로젝트 리더들에게 자료 삭제 요청 메모를 보내고, 75개 관련 조직에 삭제지시서를 발송한 내역을 근거로 “전사차원에서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증거인멸 행위를 해온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며 조기패소 판결을 요청한 바 있다.

이 때문에 ITC의 소송에선 우리나라 법원에서 가질 수 없는 증거들을 확보하기도 한다. 메디톡스가 보툴리눔톡신 균주 도용 의혹으로 대웅제약을 한국 법원과 ITC에서 각각 제소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런 상황이 잘 드러난다. 메디톡스가 전체 염기서열을 제출할 것을 요구해도 국내 재판에선 영업비밀을 이유로 이를 거부해왔던 대웅제약은 ITC에는 이 자료를 제출했다. 이 때문에 국내 재판과 ITC 재판은 다른 방식으로 사실 관계를 따질 수밖에 없었다. ITC는 전체 염기서열 분석 보고서를 토대로 비교할 수 있게 된 반면, 국내에선 간접적인 ‘포자 감정법’을 진행했다. 법원은 지난해 11월 6일 공판에서 양 사에 ITC 재판부에 제출한 자료의 임의 제출을 요구했는데, 두 회사는 최근 공판까지 이를 제출하지 않았다.

오성환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는 “ITC는 특허침해와 관련해 피해사실 규명을 위해 필요한 자료인데도 이를 공개하지 않는 경우 소송에 불리하게 작용시키는 경향이 강하다”며 “기업 입장에서는 패소하기 싫으면 자료를 제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ITC는 사법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인 손해배상을 명할 수는 없지만 시급한 ‘수입금지’ 명령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특히 미국 법원이 특허사냥꾼 소송 남발 등의 문제로 특허권에 대한 사용금지 명령을 제한적으로만 적용하는 상황에서 ‘수입 금지’ 판례를 빈번히 적용하는 ITC의 소송에 집중하는 추세다. LG화학과 메디톡스 역시 미국에 판매를 노리는 경쟁 제품에 빠른 ‘수입금지 조치’를 취하기 위해 ITC를 찾은 것으로 여겨진다.

LG화학과 메디톡스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글로벌 시장에서 ITC를 통한 특허분쟁은 늘어나고 있다. ITC가 조사하는 특허침해 관련 사건 수는 2006년 60건에서 2011년 126건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2017년엔 102건이 조사됐다. ITC를 통한 소송의 중요도는 점차 커지고 있다. 오 변호사는 “기업의 입장에서 ITC는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 시장에 가장 빠르고 확실한 수입금지 조치를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여겨질 것”이라며 “대개 판단 결과가 빨리 나오는 만큼 다른 국가에서 이어지는 법원의 판단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애플 판매금지 판결에 美 대통령 거부권 행사도
ITC의 역할 확대가 우리나라 기업들에겐 긍정적이진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ITC는 어디까지나 자국민 보호를 위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2013년 애플과 삼성전자간 특허침해 다툼이 대표적인 사례다. 2013년 ITC는 애플의 아이폰4 등 제품이 삼성전자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판매 금지 판정을 내렸는데, 당시 미국 행정부가 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다. 사실상 ‘사문화’ 됐던 조항을 25년 만에 발동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해 삼성전자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에는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ITC는 또 2011년 12월에는 대만 HTC 스마트폰 일부 기종에 대해서도 애플의 특허를 침해했다고 판단, 미국 내 수입 금지조치를 내리는 등 강경한 판결을 내렸지만 미국 기업 제품의 판매 금지에 대해선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다. ITC는 2007년에도 퀄컴이 브로드컴 특허를 침해했다고 판결했으나 퀄컴 칩을 장착한 휴대폰의 미국내 판매에 대한 금지 조치는 기각했다. 최원목 이화여대 교수는 “ITC의 존재 목적 자체가 자국 산업과 이익의 보호이기 때문에 이 기관의 영향력이 커지는 게 다른 나라 기업에게 유리할 순 없다”고 짚었다.

한국지식재산연구원(KIIP)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경우 일부 대기업들은 ITC 분쟁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에 진출한 일부 중견기업 등은 그렇지 못하다”며 “ITC 절차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현지 대리인을 선임하는 것이 필수”라고 지적했다.

- 최윤신 기자 choi.yoon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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