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를 강타한 제약 마케팅의 '선각자' 이경봉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⑰]
한약과 양약 결합, 소화불량 치료제 '청심명보단'으로 인기몰이
인력거 광고에 '거미표' 상표 등으로 차별화
1938년 8월 1일자 잡지 [삼천리]에는 고려약제사회(高麗藥劑師會, 현 대한약사회의 모체) 회장 이경봉(李庚鳳)의 발언이 실렸다. 현대어로 바꿔 소개한다. “의약의 본래 사명은 사회구성원 각자가 건강과 능률과 행복을 최대 이상으로 누리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어떠한 결함이 있을 경우는 변혁·시정하고, 건강의 복지 증진과 질병의 치료·예방에 필요한 적극적 노력이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반도 약업계의 과거를 보건대 약제사가 희소했기 때문이겠지만 너무도 무책임하고 노력이 부족했던 관계로 여간한 결함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일반 소비 대중에게 신용을 잃어 업계의 융흥(隆興)을 볼 수가 없었다. 이후로 책임 있는 약제사가 증원될 터이니 점차 개량되고 향상될 줄 알거니와, 광고와 내적 효력이 동일하도록 우리도 가일층 고심하고 정성껏 제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소비 대중에게 유익함은 물론 외래품까지도 능가할 정도로 독특한 세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조선의 약업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실력 있고 책임감 있는 인력을 충원하고, R&D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약효가 광고한 만큼이라도 실질적인 효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든다면, 장차 수입 약품을 능가할 정도의 위상을 확보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잡지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자. 이경봉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이경봉 씨는 38년이란 역사를 가진 청심보명단(淸心保命丹)을 제조하는 본포(本鋪, 본점)인 제생당(濟生堂) 약방의 현 주인이다. 24세 때에 약학 전문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나온 후 형식주의보다 내용주의, 일시주의보다 영구주의 아래 일심분란하게 업계에 정진한 매우 온후, 독실하고 규모적으로 된 분이다. 이런 주인을 가진 제생당 약방이니만치 머지않아 동양에서 손꼽을만큼 거대한 존재가 될 줄로 믿는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유일한 약학교육기관인 ‘경성약학전문학교(京城藥學專門學校)’는 1930년에 설립됐다. 따라서 알려진 바대로 1903년경 세워진 제생당의 창립자가 이경봉이라면 24세에 약학 전문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것은 말이 맞지 않는다. 경성약학전문학교의 전신인 조선약학강습소가 1915년에 세워졌으니, 1915년을 대입한다고 해도 12살에 제생당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그동안 이경봉은 (공식적인 기록은 없고 소설 등의 형태로) 1909년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전해져 왔다. 하지만 잡지가 발간된 1938년 현재 제생당의 주인이자 고려약제사회 회장으로 살아있으니 틀린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경봉의 생애를 정확하게 규명해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진 않겠지만, 한국 약학사의 중요한 인물이니만큼 보완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아무튼 이경봉은 잡지에 소개된 대로 ‘청심보명단’을 만들었다. 당시 조선에는 서양 약품으로 말라리아 치료제인 금계랍(퀴닌)과 구충제인 회충산(산토닌)이 들어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을 결합한 일본의 약품 인단(仁丹), 용각산(龍角山), 건위고장환(健胃固腸丸), 오타위산[大田胃散], 건뇌환(健腦丸), 정로환(正露丸) 등도 줄줄이 수입되었다.(한국에서 인단을 본떠 은단을 만들었고, 기침가래약인 용각산, 소화제이자 위장약인 오타위산, 지사제인 정로환 등은 지금도 익숙하다) 이를 본 이경봉은 한약과 양약을 결합하여 소화불량 치료제인 ‘청심보명단’을 만든다. 마음을 맑게 해주고 목숨을 지켜준다는 뜻으로, 1897년 민병호가 만든 활명수(活命水, 우리가 지금도 마시는 까스활명수, 바로 그 제품이다)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신약으로 자리 잡았다. 이어 이경봉은 청심보명단을 체계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약방인 제생당을 세웠는데, 동화약방(同和藥房), 화평당(和平堂)과 더불어 조선 제약계를 삼분하게 된다.
인력거에 ‘청심보명단’ 광고판…‘개화’ 마케팅
또한 그는 직접 판매에 나서기도 했다. 멀쑥한 양복에 세련된 구두를 신고, 고급 가죽가방을 든 채 그즈음 개통한 경인선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기차 손님들에게 서양 의학지식을 동원해 약을 세일즈했다. 양복과 기차는 개화(改化), 즉 근대화를 상징한다. 청심보명단에 ‘개화’의 이미지를 입힌 것으로, 경인선 기차를 타고 청심보명단을 사는 것을 ‘개화’와 동일시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다. 덕분에 사람들은 내가 개화된 사람임을 내세우기 위해서라도 청심보명단을 구매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경봉은 1900년대 후반부 조선에서 호열자(콜레라)가 유행하자, 청심보명단이 특효약이라는 소문을 냈다. 허위과장 광고이기는 하나 효과는 폭발적이었다. 총독부에서 거부당하기는 했지만 ‘거미표[蛛票]’라는 이름으로 상표권을 등록하고 특허 신청을 하기도 했다. 상품을 독점 판매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청심보명단이 인기를 끌자 ‘청신보명단’ 등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같은 효능을 내세운 제품이 많이 등장했는데 ‘거미표’라는 상표를 덧붙여 차별화를 꾀한 것이다.
이같은 노력으로 이경봉은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수 있었다. 제생당도 본사를 인천에서 서울 남대문으로 옮기고, 전국 13도에 지점망을 갖추는 등 크게 성장한다. 요컨대 이경봉은 시대의 흐름을 읽어 제품을 만들고 그것을 소비자의 욕망과 결부시킨 것이다. 또한 제품에 긍정적이면서 차별화된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경쟁력을 확보했다. 여기에 더해 남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과감하면서도 혁신적인 마케팅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후 이경봉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탓에, 이 성공이 일시적인지 지속적인지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이상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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