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경제
워시 취임 속 흔들리는 월가…채권의 반란 [특파원 리포트]
- 고유가·재정적자 확대 우려에 美 장기채 투매
30년물 금리 금융위기 직전 이후 최고
“금리 인상 가능성까지” 시장 분위기 급변
[김상윤 이데일리 뉴욕 특파원] 미국 금융시장에서 한동안 사라졌던 오래된 단어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s). 정부가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하거나 중앙은행이 물가를 잡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 채권 투자자들이 국채를 투매해 금리를 끌어올리며 시장 스스로 경고를 보내는 현상을 말한다. 1980~1990년대 미국 정치권과 중앙은행을 떨게 했던 그 단어다.
한동안 이 말은 거의 사어(死語)처럼 취급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돈을 끝없이 풀었고, 코로나19 때는 아예 헬리콥터에서 현금을 뿌리듯 재정을 살포했다. 그런데도 물가는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시장은 어느 순간부터 미국 정부가 아무리 빚을 늘려도 결국 연준이 다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금리는 낮았고 ▲달러는 강했고 ▲미국 기술 기업들은 세상을 지배했다. 채권 자경단이라는 존재는 마치 냉전 시대 유물처럼 잊혀졌다.
하지만 시장은 가끔 오래된 기억을 불쑥 되살린다.
지난 5월 19일 뉴욕채권시장에서 미국 30년 만기 국채금리는 장중 5.189%까지 치솟았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숫자만 놓고 보면 단순한 금리 상승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월가가 긴장하는 이유는 금리 수준 자체보다 금리가 오르는 방식 때문이다. 시장이 미국 정부와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향해 동시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번 금리 급등의 출발점은 중동이었다. 미국과 이란 간 충돌이 길어지면서 국제유가는 다시 배럴당 100달러(약 15만950원)를 넘어섰다. 월가는 본능적으로 1970년대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전쟁과 유가 급등, 그리고 인플레이션의 귀환. 물가가 오르기 시작하면 중앙은행은 결국 긴축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고, 긴축은 언젠가 경제를 흔든다. 시장은 이 오래된 공식을 다시 계산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미국 경제가 예상보다 너무 강하다는 데 있다. 소비는 꺾이지 않고 고용도 견조하다. 몇 달 전만 해도 월가의 기본 시나리오는 “경기 둔화→연준 금리 인하”였다. 기술주 랠리도 사실상 그 믿음 위에서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 시장은 점점 다른 쪽을 보고 있다. ▲유가는 뛰고 ▲재정적자는 커지고 ▲경기는 생각보다 더 버틴다. 그러자 채권시장은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연준이 정말 금리를 내릴 수 있는 상황인가.”
“연준이 정말 금리를 내릴 수 있나”…월가의 질문이 바뀌었다
워시는 오랫동안 비교적 비둘기파 성향으로 분류됐다. 그는 연준이 지나치게 높은 금리를 유지해 왔다고 비판했고, 인공지능(AI)에 따른 생산성 혁신이 장기적으로 더 낮은 금리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문제는 시장이 지금 정반대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채권시장은 오히려 “금리를 더 오래 높게 유지해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연준 내부 분위기도 달라지고 있다. 최근 연준 위원들 사이에서는 “당분간 금리 인하는 어렵다”는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는 다음 정책 방향이 인상이 될 가능성까지 언급한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언제 얼마나 빨리 금리를 내릴까”를 고민하던 시장이 이제는 “혹시 다시 올리는 것 아닌가”를 걱정하는 쪽으로 이동한 셈이다.
이 지점에서 채권시장은 정치와 충돌하기 시작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줄곧 금리 인하를 원해왔다. 그는 높은 금리가 미국 경제를 억누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트럼프는 공개적으로 연준을 압박해 왔다. 하지만 시장은 정치가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일 때가 많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통령이 금리 인하를 강하게 압박할수록 장기금리는 더 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시장이 “연준이 정치에 흔들린다”고 판단하면 채권 투자자들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게 된다. 미국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더 큰 위험 프리미엄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준금리를 내리더라도 실제 시장금리는 오히려 더 높아질 수 있다.
대통령보다 무서운 시장…워시 앞에 놓인 첫 시험대
이것이 채권시장이 무서운 이유다. 중앙은행은 단기금리를 결정할 수 있지만 장기금리는 결국 시장이 정한다. 그리고 시장은 때로 대통령보다 훨씬 냉정하다.
지금 미국 장기금리가 위험한 이유는 단순히 높은 수준 때문이 아니다. 상승 속도가 너무 가파르다. 천천히 오르는 금리는 시장이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계단식 급등은 다르다. 투자자들은 갑자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감각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이미 미국 경제 곳곳에서는 금리 부담이 다시 드러나고 있다. 모기지 금리가 오르면 주택시장은 식는다. 자동차 대출과 신용카드 금리가 뛰면 소비는 흔들린다. 기업들도 차입 비용이 커지면 투자 계획을 늦춘다. 결국 장기금리는 월가의 숫자놀이로 끝나지 않는다. 실물경제 전체를 천천히 조여온다.
특히 기술주에는 치명적이다. AI 열풍 속에 미국 기술 기업들은 거의 끝없이 상승해 왔다. 하지만 기술주의 본질은 미래 기대다. 금리가 오르면 미래 수익의 현재 가치는 낮아진다. 최근 나스닥이 흔들리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다. 시장은 지금 AI보다 금리를 보기 시작했다.
미국은 오랫동안 ‘예외적인 나라’였다. 빚을 늘려도 괜찮았고, 돈을 풀어도 달러는 흔들리지 않았다. 전 세계 자금은 결국 미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시장은 가끔 그런 믿음이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지금의 장기금리 급등은 단순한 채권시장 변동이 아니다. 미국 경제가 누려온 특권에 대한 아주 작은 균열일 수도 있다.
월가에서는 요즘 이런 말이 나온다. “이제 시장은 연준보다 채권시장을 더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채권시장은 지금 막 취임한 새 연준 의장을 향해 첫 번째 경고장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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