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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와 나눔으로 ‘진짜 부’ 일군 장석보 집안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⑩]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전라북도 김제군(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에 위치한 ‘금구신명학교(金溝新明學校)’가 폐교당했다. 반일(反日) 교육이 행해지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학교를 설립한 장태수(張泰秀, 1841~1910)는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24일간의 단식 끝에 눈을 감는다. 그는 “내가 두 가지 죄를 지었다. 나라가 망하고 군주가 없는 데도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불충을 범한 것이요, 이름이 적의 호적에 오르게 되었는데도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선조를 욕되게 하였으니 불효를 저지른 것이다. 내가 이 같은 죄를 지었으니 진즉에 죽었어야 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가문의 큰 어른이자 종증조부 장태수의 순절을 본 장현식(張鉉軾, 1896~1950)은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다. 그는 조선민족대동단의 운영 자금을 지원하였고, 젊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의 재정 50%를 책임졌다. 1000석 규모의 농장을 학교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각종 교육 사업에 많은 돈을 희사하였으며,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지원하다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   장석보 네 아들의 재산 증식 비결…‘선택과 집중’, ‘신뢰’     장태수와 장현식, 김제의 부자 장석보(張石輔, 1783~1844)의 자손이다. 장태수는 장석보의 손자이고, 종손인 장현식은 5대손이다. 각각 순국지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건국훈장 독립장,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두 사람은 모두 교육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경주 최 부잣집처럼 튼튼한 재정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 장태수와 장현식이 교육 사업을 벌일 수 있었던 데엔 장석보와 네 아들이 쌓은 부가 토대가 됐다.   인동 장씨 금구파인 장석보 일가는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낀 장기건이 김제 금구면에 낙향하면서 대대로 터전을 잡고 살아왔다. 그러다 장석보 대에 이르러 번성하게 된다. 그는 넉넉한 인품과 부지런함으로 재산을 일궜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고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했다. 양반이건 봇짐장수건 차별하지 않아서 ‘노잣돈이 떨어지면 장씨 집에 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장석보의 네 아들 장한방, 장한진, 장한규, 장한두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잘 이어받았고 덕분에 장석보 가문은 두터운 인망을 쌓을 수 있었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양반이자 큰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으로부터, 6·25한국전쟁 때 공산군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장석보 이래 축적해 온 신뢰 자본 덕분이었다.   그런데 장석보가 재산을 모으긴 했지만, 그가 죽고 아들 사형제가 상속받았을 때만 해도 큰 부자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토지가 많았다지만 네 명이 나눠 가지면서 개별로 본다면 중농(中農) 수준에 불과했다. 자, 그렇다면 이들 사형제는 어떻게 재산을 불린 것일까? 사형제는 매년 돌아가며 한 사람의 논밭을 경작하는 데 힘을 모았다. 올해 맏이네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면 내년은 둘째, 그다음은 셋째, 또 그다음은 넷째가 하는 식이다. 4년마다 로테이션을 돈 것이다. 무릇 한 사람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에는 한정이 있다. 한데 농사를 지으려면 자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어차피 품삯을 주고 노동력을 사야 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대신 가족 구성원들의 힘을 모아 ‘선택과 집중’에 나선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인적·물적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여함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해도, 나 혼자 내 논밭을 경작하는 것에 비해 수입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4에서 4를 생산하다가, 1에서 4를 생산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외부인에게 인건비를 지급할 필요가 없으므로 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부의 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     혼자 농사를 지을 때보다 여력이 있으므로 품질 향상에도 신경 쓸 수 있다. 삶에도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3년간 쉬는 휴경지는 풋거름 작물을 심는 등 지력을 보존하여 생산성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관리하기 쉬운 작물을 심어서 부수입을 올릴 수도 있었다. 로테이션을 통한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사형제의 재산은 점점 불어났다.   물론 이 같은 방식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내가 다른 형제의 농사에 최선을 다한 만큼, 다른 형제들도 내 농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줄 거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누가 혼자서 욕심을 부리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거라 서로를 신뢰해야 한다. 함께 농사를 지어야 하는 논밭에는 대충 임하면서 자기 논밭만 신경 쓰고, 따로 돈 벌 궁리만 한다면 이들 형제의 ‘선택과 집중’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인을 고용했을 때보다도 훨씬 못한 결과가 나오고 만다. 따라서 장석보의 아내이자 사형제의 어머니 홍씨 부인은 형제간의 이견을 조율해주며 서로 믿고 의지하도록 엄히 가르쳤고, 이후에도 그 역할을 종부들이 맡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   초과 이익은 어려운 집에…시대 앞선 ‘부의 재분배’     그러나 이 같은 조치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족의 숫자가 적고 형제의 형편이 비슷할 때는 괜찮다. 손자 세대, 증손자 세대로 내려가면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가구 수도 많아진다. 살림살이도 집집이 차이가 벌어진다. 자연스레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서로를 무조건 믿는다는 것도 어려워진다. 이에 장석보 가문은 ‘의장(義庄)’을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의장이란 문중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전답이다. 주로 문중의 제사 비용을 충당하는 데 쓰인다.     그런데 쌀 40석에서 시작한 의장이 점점 불어나 200석이 되고 급기야 1000석 규모에 도달하자, 장씨 가문은 이를 ‘부의 재분배’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매년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문중 제사를 주관하는 유사(有司)로 선발하고, 의장에서 발생하는 초과 이익을 갖도록 한 것이다. 요즘 방식으로 말하면 재단의 자산은 일정액으로 고정해두고, 자산을 통해 얻은 사업 소득 및 이자를 유사에게 몰아준 셈이다. 덕분에 장석보의 후손 30여 가구는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게 되었고 문중의 단합 또한 유지될 수 있었다.   요컨대 장석보 가문은 구성원의 힘을 결집함으로써 부를 일궜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로테이션을 통한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펼쳤고, ‘의장’을 통해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일가를 화합했다. 장태수와 장현식의 교육 사업에 문중이 합심해 자금을 각출한 것도 이 같은 노력의 결과이다. 한 대만 내려가도 기업이 찢어지고, 서로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다가 오히려 재산이 줄어드는 오늘날의 부자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신뢰과 김준태 아들 사형제 장현식 김제 이들 사형제 장석보 선택과 집중 부의 재분배 김준태 칼럼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⑩ 1611호(20211115)

2021-11-20

제주 출신 김만일, 군마 헌납으로 ‘사업보국’ 실천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⑨]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 가면 김만일(金萬鎰, 1550~1632)이라는 인물의 묘가 있다. 그의 묘비에는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숭정대부는 종1품 품계이고, 동지중추부사는 종2품, 오위도총부 도총관은 정2품이다. 실제로 직무 활동은 하지 않은 명예직이었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장관급에 해당한다. 그야말로 최고위직에 올랐던 것이다.     ━   개국공신 김인찬의 후손…위기 때마다 군마 기부   도대체 김만일이 어떤 인물이기에 이처럼 화려한 이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조선 조정은 왜 머나먼 섬사람에 불과한 그를 각별히 예우한 것일까? 김만일의 선조는 조선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진 김인찬이다. 공신 중에서도 으뜸가는 공신이었으니 그의 집안도 번성할 법 하지만 여러 풍파를 겪었던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 김인찬의 셋째 아들 김검룡이 제주도까지 내려와 정착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그의 가문이 태종 이방원의 집권에 반대했기 때문에 탄압받았다는 설이 있다). 이 김검룡의 직계후손이 바로 김만일이다.   김만일은 대규모 말 목장을 경영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명나라의 영락제가 조선에서 진상한 제주마를 ‘천마(天馬)’라고 불렀을 정도로 제주마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조정에서 말을 징수해 가는 양이 막대했다. 숙종 때 제주목사 이형상이 올린 장계를 보면, 국영 목장의 경우 말 사육자 한 사람당 연 10필의 말을 거둬갔다(민영 목장에서도 말을 세금으로 받았다).     말이 죽으면 그 값에 해당하는 책임을 물었으니 이를 충당하기 위해 가족을 노비로 파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또한, 관리와 아전들이 말을 빼앗아 착복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육지로 가져가면 매우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으니 한 몫 단단히 챙기자는 속셈이었다.   상황이 이와 같으니 김만일 역시 말 목장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애로가 되었던 것은 말을 수탈하다 못해 종마로 쓸 암말까지 빼앗아 가는 것이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건이 제주도 유배시절에 지은 [제주풍토기]를 보면, 김만일은 우수한 종마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그 눈에 상처를 내어 앞을 못 보게 만들거나, 가죽과 귀에 상처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의 사업을 지키기 위한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이에 김만일은 승부수를 던진다. 조정에 말을 자발적으로 헌납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만일이 처음 말을 바친 것은 1594년(선조 27) 임진왜란의 와중이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군마가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제주도의 사영(私營) 말 목장 주인들이 말을 모아 바쳤고, 김만일도 말 2백 필을 내놓았다. 다만, 이때는 국가적 위기 상황으로, 조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요청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한데, 김만일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말 헌납을 계속했다. 1600년, 전후 복구 및 구휼사업 진행에 쓰라며 말 5백 필을 자진하여 내놓았다. 1620년(광해군 12) 조정에서 명나라에 조공할 말 2백 필을 요청했을 때도 오히려 3백 필을 더해 5백 필을 헌납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1627년 정묘호란 직후 김만일은 다시 말 5백 필을 바쳤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나라에서 꼭 필요로 하는 말을 자발적으로 기부해주니, 조정으로서도 김만일에게 부채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김만일에게 계속 벼슬을 내려주었는데 종국에는 명예직이기는 하나 재상의 지위인 종1품 숭정대부에까지 오르게 된다(지중추부사에 임명됐을 때는 짧지만 실제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은 고을 수령에, 손자는 변장(邊將)에 제수됐다. 자손 대대로 종 6품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의 벼슬을 맡는 특혜도 주어졌다. 제주도를 지배하는 제주목사가 정3품, 김만일의 거주지인 정의현(의귀리)의 현감이 종6품이니, 제주도에서는 김만일과 김만일 집안을 감히(?) 건드릴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됐다.     ━   종마 보존에 필사적…조정 헌납으로 강력한 보호막   조정에서 김만일을 대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1618년(광해군 10) 9월 25일, 국가의 말 목장 관리 실태를 확인하기 위하여 파견된 양시헌이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며 김만일과 그의 아들 3명을 체포해 형벌을 가하자 광해군이 격노했다. “양시헌이 어떤 자인지 모르겠으나 김만일에 대하여 어찌 조정에 아뢰지도 관찰사에게 보고하지 않고 제멋대로 형벌을 가할 수가 있는가. 김만일은 이미 2품의 직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동지중추부사의 실직까지 지낸 사람이다. …… 게다가 암말은 비록 한 필이라도 바다를 건너게 하지 말라고 하교했는데, 어떻게 감히 천여 필의 암말을 한 번에 뽑아낼 수 있단 말인가. 양시헌을 파직한 뒤 그의 죄를 심문하라. 양시헌을 차출한 책임자도 문책하라.”   김만일은 말의 번식량을 늘리고 우수한 종마를 보존하기 위해 암말을 지키는 데 필사적이었다. 앞서 일부러 말의 눈을 멀게 만들기도 했다고 소개한 바 있다. 조정에서도 이러한 김만일의 취지를 이해하고 암말의 제주도 밖 유출을 금지하였는데, 이때 양시헌이 암말의 징발을 요구하고 김만일이 이에 따르지 않자 형벌을 가한 것이다. 하급 관료인 양시헌이 조정의 명을 어긴 것도 문제지만 자기 마음대로 2품계의 김만일에게 형을 가했으니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전후 복구와 국방력 강화를 위해 말이 필요했던 조정은 김만일로부터 말 1천 필을 징발하고자 했다. 그러자 인조가 너무 많다며 절반을 줄이라고 지시한다. 비변사에서 “김만일의 말이 무려 1만 필이나 되는데, 이 나라에서 태어나 나라 땅에서 나는 풀을 먹으며 자라났으니 모두 국가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10분의 9를 가져다 사용해도 불가한 것이 없는데 하물며 만에서 천을 취하는 것이 문제이겠습니까?”라고 하였지만, 인조는 듣지 않았다. (김만일은 이때 말 5백 필을 무료로 헌납한다.)   생각해보라.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나라에서 필요한 물품을 자진해서 기부한 사람이 있다. 대가를 받고 판매할 때도 이윤을 남기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지만, 기꺼이 포기했다. 어디 그뿐인가? 손해를 감수하고 나라에서 요청한 양보다 항상 더 많은 양을 내놓았다. 조정으로서는 당연히 고마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최상의 예우를 다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된다.     기부자가 홀대받는 사회에선 더 이상의 기부를 찾아보기 힘들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김만일에게 손해이기만 했을까? 물론 김만일에게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숭고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동시에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관리들의 수탈에서 벗어나고, 핵심 사업을 보존하기 위해, 헌납을 통해 강력한 보호막을 얻은 것이다. 대대로 산마감목관을 세습하는 큰 이권까지 얻었으니, 단기적인 손해로 장기적인 이익을, 좋은 일로써 좋은 결과를 얻은 사례라 할 수 있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공인호 기자 kong.inho@joongang.co.kr사업보국 김준태 김만일 집안 조정 헌납 조선 조정 1608호(20211101)

2021-10-31

300년 번영한 경주 최 부잣집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⑧]

      흔히 부자(富者)는 삼대를 가지 못한다고 한다. 부를 일구기도 어렵지만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 10대가 넘도록 큰 부자였던 집안이 있다. 마지막 대에 이르러서도 망한 것이 아니라 대규모 기부를 통해 스스로 부를 해체했다. 교동법주로도 유명한 경주 최 부잣집 이야기다.     ━   조선 역사에 스며들어 있는 최씨 가문의 전통     최 부잣집의 여정은 조선 중기의 무인 최진립으로부터 시작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던 그는 인조 대에 이르러 공조참판, 삼도 수군통어사를 역임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노구를 무릅쓰고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해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최진립은 천석 정도의 재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약 30만평), 자식에게 집안에 천석 이상의 곡식을 들여놓지 말라 당부했다고 한다. 소작료를 많이 받지 말고 주위에 베풂으로써 재산을 늘리지 말라는 것이다.     아들 최동량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했다. 개령현감, 용궁현감 등의 벼슬을 지낸 그는 시비법과 이앙법을 도입해 소출을 획기적으로 늘렸지만, 소작료를 대폭 줄여줌으로써 재산을 현 상태로 유지했다. ‘부잣집’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손자인 최국선에 이르러서다. 그는 적극적인 농업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도 “재물은 거름과 같아서 나누면 농작물을 잘 자라게 하지만 쌓아두면 악취를 풍긴다”는 신념이 있었다. 흉년이 들면 쌀을 빌려 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하고 창고의 곡식을 내어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했다. 죽기 직전에는 “내가 빌려준 것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라며 담보 문서를 모두 불태웠다.   이후 4대인 최의기는 가업을 확장하면서도 근검절약하고 이익에 얽매이지 않았다. 교동으로 터전을 옮긴 9대 최세린은 흉년이 들 때마다 대량의 곡식을 내어놓았으며, 10대 최만희도 그의 도움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굶주린 사람들을 대규모로 구제하면서도 혹시 부족한 점이 없는지를 염려하곤 했다.     사업 수완과 자산 운용 능력이 뛰어났던 11대 최현식은 가문의 재산을 더욱 크게 늘렸는데, 그 역시 어려운 사람을 돕고 구제하는 일에 아낌이 없었다. 그 덕분일까? 당시 남부지방을 휩쓸며 부자들을 약탈하던 활빈당(대규모 무장 농민 집단)이 경주를 공격하자, 이웃 농민은 물론 부랑자, 걸인까지 몰려와 최 부잣집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마지막 부자인 12대 최준은 이웃을 돕는 조상들의 선행을 계속 이어감과 동시에 상해 임시정부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민족 자본을 활성화하기 위해 대구은행과 백산상회 설립에도 참여한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 대구대학(지금의 영남대학교)을 건립하고 전 재산을 대학 재단에 기탁한다. 300년에 걸친 실로 숭고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   300년 이어간 가문의 부, 6개 가훈이 원동력   최 부잣집은 어떻게 이러한 정신을 계속 간직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많은 재산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 원동력으로 최 부잣집의 가훈이 잘 알려져 있다. 소개하는 자료에 따라 가훈의 항목은 3개, 6개, 7개로 다양한데, 여기서는 가장 유명한 6개를 기준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옛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아서 가훈이 만들어진 정확한 시점을 알 수가 없다)     첫 번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과거시험을 보라는 것은 학문을 닦아서 그것을 검증받으라는 의미이고 양반 네트워크에 포함되라는 뜻이다. 가문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소양이 있어야 하며, 양반 신분을 유지해야 관(官)이나 지역 유지들과의 관계를 원활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것은 관직에 나서지 말라는 말이다. 권력을 탐하다가 몰락하거나, 정치 싸움에 휘말려 피해를 보지 않도록 경계한 것이다.   두 번째, “재산을 만석 이상 모으지 마라.” 최진립이 남긴 유훈과 같은 맥락이다. 최 부잣집은 3대 최국선 대에 이르러 만석꾼이 되었다. 토지에서 거둬들이는 쌀의 소출량이 만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유한 토지가 확대될수록 소출량도 늘어나야 한다. 한데 최 부잣집은 토지가 늘어도 만석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에 맞춰 소작농으로부터 받는 소작료를 줄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최 부잣집의 소작료는 매우 싼 편이었는데, 재산이 늘어날수록 소작료가 추가로 인하되니, 소작농들이 최 부자가 더 큰 부자가 되도록 열심히 일하는 이색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이익을 독점하지 않고 공유함으로써 지주와 소작농 간의 상생을 가져온 것이다.   세 번째,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흉년은 토지를 증식하기 쉬운 때다.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려워진 사람들이 자신의 전답을 싼값에 내놓기 때문이다. 이럴 때 매입하면 당연히 큰 이윤을 남길 수 있겠지만, 최 부잣집은 이를 금기로 여겼다. 남들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자기 배를 채우면 필시 원한을 남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에서 사방 백 리면 영천, 울주, 포항을 포괄하는, 경상북도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최 부잣집이 부를 축적한 것은 혼자 잘나서가 아니다. 지역민들의 도움과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지역에서 최소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관심을 갖는 것이 부자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책무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 “며느리들은 시집온 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게 하라.” 이 말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며느리에게만 검소함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최 부잣집 역대 가장들의 공통적 특징이 ‘검소’, ‘검약’이다. 장차 안살림을 책임져야 할 며느리에게 처음 3년 동안 이러한 최 부잣집의 정신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는 의미다. 마지막 여섯 번째,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우리 전통에서는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집에서 묵어가고, 그런 사람을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최 부잣집의 나그네 접대 규모는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동시에 100명이 넘는 손님이 묵는 일도 있었다. 접대비용으로 연간 천석을 소모했다고 한다. 이는 따뜻한 인심을 보여준 측면도 있지만, 나그네를 통해 전국 각지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상 6개의 가훈을 통해, 우리는 10대에 걸친 만석꾼 [최 부잣집]의 힘은 권력을 탐하지 않고, 근검하고 절약하며, 정보를 중시함으로써 얻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지 않고, 이익을 공유했으며, 아낌없이 베풂으로써 부자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한 데서 비롯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대 가장들이 이 가훈을 힘써 실천했기 때문에 300년 동안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이며, 수많은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고, 부가 사라진 지금에도 여전히 존경받는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이용우 기자 lee.yongwoo1@joongang.co.kr

2021-10-17

상계 좌지우지한 점쟁이 김자명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⑦]

      조선 인조에서 효종 대에 이르기까지 한양의 상계(商界)를 좌지우지하던 인물이 있다. 시각장애인에 점쟁이였던 김자명(金自鳴)이다. “(한양의) 남북시장에서 모두 김자명의 돈으로 장사를 했으니, 김자명이 돈을 풀면 저자에 돈이 흔하고 그가 돈줄을 죄면 도성 안의 물건값이 달라지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하 직접 인용 표시는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   그런데 아무리 김자명의 점치는 실력이 유명하고 복채가 비싸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한양의 상계를 장악할 정도의 자본력을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김자명은 큰 부자였던 역관 이형장의 재산을 가로챔으로써 종잣돈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을 오가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형장은 김자점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 직전에 김자명이 이형장의 점괘를 뽑아 준 적이 있었는데 앞으로의 운세가 깜깜하여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죽는다는 뜻이었다. 김자명은 “지금껏 그대의 뒷배가 되어주던 귀인이 이제는 그대를 해치는 재앙이 될 것”이라며 경고했다고 한다. 이형장은 인조 말기의 최고 실력자 김자점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했는데, 바로 그 김자점으로 인해 발목이 잡힌다는 것이다. 놀란 이형장이 어떻게 해야 액운을 벗어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김자명은 “혹시라도 꼬투리를 잡히면 안 되니, 평소 모아둔 금은보화를 ‘신당(神堂)’에 숨겨 놓으시오. 그러면 조정에서도 이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고 그대도 이내 곤란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오.”라고 답한다. 압수수색을 당해 부정하게 축적한 재물이 발견되면 더욱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니, 미리 찾기 힘든 곳에다 감춰두라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벌어졌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실각한 김자점은 당시 조정에서 논의되었던 ‘북벌(北伐)’ 계획을 청나라 사신에게 누설했다.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위상을 되찾고 눈엣가시였던 산림(山林)을 제거하기위해서였다. 하지만 김자점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영의정 이경석과 예조판서 조경이 책임을 떠안고 의주 백마산성으로 귀양을 감으로써 사건이 무마되었기 때문이다(청나라 사신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기도 했다).     이때 김자점의 사주를 받아 북벌 계획을 누설한 사람이 이형장으로, 청나라 사신이 귀국하자마자 체포된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전 재산을 궤짝에 담아 몰래 김자명이 점을 치는 신당으로 옮겨왔다. 남편이 자신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김자명에게 맡기라고 했다면서 말이다. 김자명이 이 재산을 꿀꺽한 것인데, 본인은 “나라에 알렸다가는 자기도 연루될까 두려웠다.”라고 변명하지만, 이후의 행적으로 볼 때 재물에 대한 욕심이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귀양을 가거나 관노가 된 이형장의 일가를 도와줘야 했을 것이다. 이형장과 얽힐까 봐 걱정됐다고 하더라도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몰래 도와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김자명은 이렇게 얻은 재산에다 복채 수입과 고리대 이자 수익을 더해 막강한 자금을 확보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김자명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기만과 협잡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산지와 시장의 시세 차이가 큰 물품, 오래 보관할 수 있으며 양반이나 부자들이 주로 찾는 상품을 독점했다. 예컨대 곶감이 막 생산되었을 때는 가격이 싸다. 김자명은 곶감을 모두 사들여 창고에 보관한 후 꽁꽁 묶어 두었다. 사람들이 명절 차례상을 준비하고 수정과를 만들려는데 곶감을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로 인해 가격이 몇 배나 폭등하니 김자명은 그제야 상품을 내어놓는다.   그런데 그가 단순히 사재기만으로 돈을 번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자기 뜻대로 상황을 조작했다. 우선 돈을 꾸러 온 상인에게 올해 곶감을 사면 운수가 대통할 거라는 점괘를 준다. 더불어 자금을 듬뿍 보태 자신이 시키는 대로 곶감을 모두 사들이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하면 신통한 점쟁이 김자명이 곶감을 점지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상인들은 너도나도 곶감을 사겠다며 달려들게 된다. 이때 김자명이 넌지시 제안한다. 자기가 돈을 빌려줄 테니 많이 사들이라고. 채무를 상환할 때도 돈 대신 곶감으로 하면 된다고. 넙죽 받아들인 상인은 이내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가격을 기준으로 상환할 곶감 물량을 정했는데, 김자명의 싹쓸이로 인해 가격이 크게 올라버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주요 산지의 곶감이 모두 씨가 말라버린 상태여서 전국 구석구석을 찾아다녀야 했다. 김자명은 사람들을 속여 몇 배의 이득을 거두고, 본인이 놓쳤던 곶감까지 모두 거둬들이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   불과 1대 만에 무너진 김자명의 욕심     이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김자명은 자신의 점치는 능력을 다양하게 악용했다. 혼인날을 받으러 온 사람에게 폐백에 쓸 밤과 대추는 부정을 타지 않은 물건을 써야 한다며, 넌지시 자신이 물건을 대는 상점을 추천한다. “고부간에 뜻이 맞으려면 폐백에 정성이 있어야 하네. 소문내지 말고 조용히, 내일 아침 동쪽 어느 건어물 전에 가서 밤과 대추를 사게. 기운이 좋은 물건을 파는 곳이니 효험이 있을 걸세. 부정을 탈 수 있으니 절대로 값을 깎아서는 안 되네.” 과연 소문이 안 날까? 저 상점이 물건이 좋다며 삽시간에 퍼질 것이다. 또한, 과거시험 답안지로 쓸 ‘명지(名紙)’는 반드시 어느 지물전에서 사야 행운이 따른다는 점괘를 주기도 한다. 그러면 너도나도 그 지물전으로 몰려가 종이를 사느라 금세 동이 나게 마련. 상황이 이와 같으니, 김자명의 가게가 큰돈을 벌었을 뿐 아니라, 상인들도 너도나도 김자명을 찾아와 자기 가게를 잘 봐달라며 뒷돈을 바치고 아부하게 된다.     하지만 정도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돈을 모으느라 정신이 팔렸기 때문일까? 그는 아들 교육에 실패했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외아들이 돈을 펑펑 써대 집안이 흔들릴 정도였다. 더는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김자명이 기와집도 팔고 비단옷도 벗어버린 채 점치는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장사에 나서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김자명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은 버릇을 고치지 못한 채 흥청망청하다가 이리저리 떠돌며 밥을 구걸하는 처지로 전락했다고 한다. 불과 1대 만에 망해버린 것이다.   이상 김자명은 큰 부를 일궜다는 점에서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사례다. 점을 치는 능력이 그저 점쟁이라는 직업 안에서만 머물렀다면 그는 단지 부유한 정도였을 뿐, 수도 한양의 상계를 뒤흔드는 위치에까진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미래예측능력을 상업에 접목함으로써 시너지를 발휘한 것이다. 시장 상황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효과도 가져왔다. 다만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기만하고, 작은 이익에 집착하여 쪼잔하게 행동한 점은 그가 가진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아들 교육을 잘못시킨 탓이 크긴 하지만, 만약 그가 선을 지키며 미래예측능력과 상업을 접목했다면, 불과 1대 만에 몰락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

2021-10-04

포삼 상인 임상옥의 ‘통 큰 승부수’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⑥]

      “의주에 살았던 임상옥이 재물을 잘 늘렸다. 양국의 이익을 움켜쥐고 왕실처럼 부(富)를 누렸으니, 북경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이름을 거론한다”     구한말 황현이 쓴 [매천야록]의 한 대목이다. 조선과 청나라 무역을 장악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죽은 지 50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는 임상옥(林尙沃, 1779~1855).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임상옥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20여년 전 [상도]라는 소설과 동명의 드라마를 통해서다. 올곧은 성품과 뛰어난 상재(商材)를 지닌 주인공이 시련을 딛고 성장하는 이야기가 많은 이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한데 여기서 다뤄진 내용에는 허구가 많았다. 상인의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하려 했던 탓인지, 다른 사람의 일화들까지 임상옥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임상옥이란 인물의 가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는 명실상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거상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문일평이 쓴 [조선명인전]의 ‘임상옥’편에 따르면 임상옥은 국경도시 의주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나라와의 국경에 자리한 덕분에 그는 자연스레 국제무역에 관심을 두게 된다.     임상옥의 젊은 시절은 순탄치 못했다. 그가 스물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었는데, 그 후 빚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가세가 빈곤하여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상업 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처지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부친상을 당했는데도 생계를 위해 장사에 나서야 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   헐값에 넘기지 않고 불 지르는 승부수 띄워     그러던 임상옥이 10년 후에는 수백 칸의 대규모 저택을 지을 정도로 부자가 된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로 ‘포삼(包蔘, 포장한 홍삼)’ 무역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된 홍삼은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조선 조정은 1797년 홍삼 무역을 공식 승인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자 하였는데, 임상옥이 다른 만상(灣商, 대청 무역에 종사한 의주 상인) 5명과 함께 홍삼 무역을 관장하게 된다.     이때 임상옥은 독점권을 따내기 위해 호조판서 박종경에게 접근했다고 한다. 순조의 외삼촌이자 국가 경제를 총괄하는 박종경이 모친상을 당하자 백지 어음(문일평의 기록에는 4000냥이라고 되어 있다. 쌀값을 기준으로 오늘날로 환산하면 약 3억원 정도다)을 부의금으로 내서 호감을 샀다는 것이다. 뇌물을 통한 정경유착이니 칭찬할 만한 일은 못 되겠지만, 통 큰 승부였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포삼무역을 담당했던 상인 6명 중 오직 임상옥만이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청나라 상인들과 벌인 치킨게임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임상옥이 사신단을 따라 북경에 당도했을 때(조선은 개인의 사무역을 금지하고, 사신단을 통한 공무역만 허용했다) 청나라 상인들이 조직적으로 짜고 아무도 임상옥이 가져온 홍삼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사신단이 머무는 기한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기다리면 어쩔 수 없이 헐값으로 넘기리라 생각한 것이다. 체류 기간 안에 홍삼을 팔지 못하면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조선 상인의 처지를 악용한 것이다. 청나라 상인들은 이 방식으로 이미 많은 재미를 본 바 있었다.   하지만 임상옥은 그들의 간계에 넘어가지 않았다. 청나라 상인들을 불러 모은 임상옥은 가져온 홍삼을 폐기하겠다고 선언한다. 상인들이 설마 그러겠냐며 코웃음을 치자 임상옥은 포삼 상자를 모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깜짝 놀란 상인들은 앞다퉈 불을 끄고 자신에게 홍삼을 팔라며 사정했다고 한다. 청나라 상인들의 경쟁에 홍삼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임상옥은 10배 가까운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조선 홍삼이 인기였다. 그러나 수요보다 공급이 한참 부족하여 부르는 게 값이라 할 정도로 귀했다. 조선에서 비싸게 내놓는다 해도 홍삼만 구한다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홍상 거래가 불발된다면 청나라 상인들에게도 큰 손해였다. 한데 상인들은 배짱을 내민 것이다. 기한 내 무조건 물건을 팔아야만 하는 임상옥이 불리한 처지니, 담합하여 밀어붙인다면 그가 양보할 거라고 생각했다.     임상옥은 그와 같은 예상을 뒤집고 강하게 반격한 것이다. 무릇 치킨게임에서 승리하려면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 상대방이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일 필요도 있다. 그럼으로써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다. 충돌할 경우 양쪽 다 피해를 보는 상황이라면, 미치광이 전략(Madman Strategy)을 구사하는 사람이 이기고, 두려워서 먼저 회피하는 사람이 지게 된다. 임상옥은 이러한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대청 홍삼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임상옥에게는 운도 따랐다. 1810년 130근이었던 홍삼 수출량이 1823년 1000근, 1832년 8000근이 되는 등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성장기에 홍삼 수출을 주도했고, 청나라 상인들까지 굴복시켰으니 그에게 재물이 쏟아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즈음 임상옥의 집에는 은덩이와 비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밑에서 회계 업무를 보는 서기가 70명이었고, 한 번에 손님 700명을 대접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재산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   나라 위해 재산 기부하며 안위 챙겨     이렇게 돈이 많아지면 그것을 노리는 사람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임상옥을 몰락시키면 그의 막대한 재산을 빼앗을 수 있다는 생각에 온갖 트집과 모함이 난무했다. 더욱이 임상옥의 뒤를 봐주던 박종경도 실각한 상황이었다. 이에 임상옥은 나라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안전을 보장받았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정부군에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의병을 모아 직접 맞선 것이다. 굶주리는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1만 냥을 나라에 기부하였고, 몇 년 후에는 수재의연금으로 다시 수천 냥을 내놓았다.     당시 비변사가 올린 계사에 따르면, 평안도에서 재난을 당한 가구의 대부분이 그가 낸 의연금에 의지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임금이었던 순조는 “재물을 가벼이 여겨 구휼을 위해 내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매우 가상하다. 조정에서는 임상옥의 공을 어떻게 기릴 것인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임상옥에게는 곽산군수, 구성부사(구성부사는 절차상의 이유로 취소된다)와 같은 실직이 내려졌는데, 상인이 큰 공을 세우더라도 명예직만 받았던 관례에 비하면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임상옥이 평안도민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그를 통해 민심을 다독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올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후에도 임상옥은 공공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선의에 의한 행동이었는지, 철저히 계산한 행동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를 지켜준 든든한 보호막이 되었음은 분명하니까. 요컨대 전략적인 투자와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배포, 아낌없는 나눔이 거상 임상옥을 만든 성공비결이라 말할 수 있다.      ※ 김준태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

2021-08-29

역관 변씨 가문의 흥망성쇠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③]

  연암 박지원이 지은 [허생전]을 보면, 서울에서 제일가는 부자인 변씨가 등장한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허생이 찾아와 “내가 무엇을 좀 해보려고 하는데 집이 가난해 돈이 없소. 그대가 만냥을 빌려줄 수 있겠소?”라고 요청하자, “좋소!” 하고는 주저 없이 만냥을 내줬다(당시 쌀값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36억원 정도다). 놀란 사람들이 “어찌 누군지도 모르는 자에게 만냥이나 되는 거금을 빌려주십니까?”라고 물으니, 변씨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남에게 무언가를 얻고자 할 때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의지를 거창하게 떠벌리고, 자기가 믿을 만한 사람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낯빛은 비굴하여 같은 말을 반복하기 일쑤다. 한데 이 손님은 비록 차림새가 남루하지만 말에 군더더기가 없다. 눈빛이 당당하며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가 재물이 없어도 만족하는 자임을 뜻하는 것이니, 그가 시도한다는 방법 역시 범상치 않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허생전]은 소설이고 허생 또한 가상의 인물이지만, 이 변씨는 실존했다. 역관(譯官)으로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에 올랐던 변계영(卞繼永)이 모델이다. 그는 중국에 자주 드나드는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 중국에 가서 고급비단을 사다가 국내 상인들에게 이윤을 붙여 파는 식이다. 그런데 변계영을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거부로 만든 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투자였다. 허생과 변씨의 일화는 허구이나, 실제로도 변계영은 사업자금을 빌려주길 즐겨 했다. 싹수가 보이는 인재가 있으면 허생에게 그랬듯 조건을 달지 않고 전폭적으로 후원해주었다. 그렇게 성공한 인재들이 변계영 재산을 늘리는데 일조한다.   변계영이 쌓은 부는 그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변계영 아들로 역시 역관이었던 변응성(邊應星)은 아홉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 넷째와 다섯째 아들이 한학(중국어) 역관, 여섯째와 일곱째 아들이 몽학(몽골어) 역관, 여덟째와 아홉째 아들이 왜학(일본어) 역관이 됐다. 역관 가문으로서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조선이 상대하는 모든 외국과 무역할 수 있는 위치가 된 것이다. 더욱이 형제가 협력한다면 중계무역(中繼貿易)도 가능해진다. 변씨 가문은 청나라의 비단을 일본에 가져다 팔고, 일본의 은을 청나라로 가져오는 등 대청-왜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   손수 장부 폐기해 외부 리스크 없애     이처럼 한 가문이 잘나가게 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질시를 받게 된다. 더구나 변씨 가문은 중인 계급이었으니 양반들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다. 또 당시 시대 환경에서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밀접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반대 세력과는 척을 지게 된다. 이는 가문의 앞날에 큰 리스크였다. 변응성의 아홉째 아들이자 변씨 가문의 3세대를 대표했던 변승업(卞承業)은 이 문제를 고심한다.   본래 변씨 가문은 서인을 후원했다. 한데 현종 때의 예송 논쟁 이후 서인과 남인의 대결이 극단으로 치닫자, 변승업은 남인의 금고 역할을 했던 인동 장씨 집안과 사돈을 맺는다. 변씨 가문과 더불어 조선 역관의 양대 축이었던 장씨 가문은 장현(張炫)이라는 걸출한 역관을 배출했다. 중국을 오가며 외교 전선에서 활약한 장현은 거대한 재부를 일궈 ‘국중거부(國中巨富)’, 나라의 큰 부자로 불렸다.     장현의 종질녀가 그 유명한 장희빈이다. 변승업은 맏아들 변이창을 장현의 딸과 혼인시켰다. 변승업의 여섯 째 형 변승준의 손자와 손녀도 장씨 집안과 결혼했다. (변계영의 조카사위 윤성립이 장희빈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덕분에 남인 집권기에도 변씨 가문은 무사하게 된다.   변승업이 말년에 50만냥(약 1800억원)에 이르는 채권 장부를 불태워버린 것도 주목할 만하다. 1709년(숙종 35), 변승업의 노환이 깊어지자 아들들은 “시일을 오래 끌면 좋지 않으니 꿔준 돈을 그만 거둬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채권을 정리해야지, 돌아가신 후에는 자칫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채권이 아니라 현금으로 유산을 상속받고 싶은 마음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변승업은 고개를 저었다. “한양에 사는 사람들 중 내 돈을 빌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갑자기 돈을 회수하겠다니, 이들의 명맥을 하루아침에 끊으려 하느냐?”     변승업은 손수 채권 장부를 폐기하고, 앞으로 이 돈에 대해 거론하지 말며 절대 돌려받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는 말한다. “내가 보건대, 권세가 있거나 재물을 모은 사람 중 삼대를 넘기는 이가 없었다.     지금 이 돈을 흩어 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우리 집안에 재앙이 닥칠 것이다.” 높은 이자를 붙인 것도 아니고, 자기가 빌려 준 돈을 반환 받는 것인데 굳이 포기할 필요가 있냐 싶겠지만, 이는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심사숙고한 결정이었다.     빚을 탕감해줌으로써 사람들의 질시에서 벗어나고 민심을 얻으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돈을 갚기 싫어하는 자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생각해보라. 한다 하는 사람들이 변승업에게 돈을 빌렸다. 그런데 막상 갚으려니 아깝다. 변승업이야 노회한 거물이니 맞상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변승업의 아들들이야 만만할 터이다. ‘변승업이 죽고 나면 걱정할 게 뭐가 있는가. 우리가 손을 잡고 변씨 가문을 몰락시킨다면 이 돈을 갚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런 마음을 품게 된다. 역사 속에서 이렇게 몰락한 부자가 한 둘이 아니다. 변승업은 차제에 그 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가문의 안위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   대대로 지켜온 가문, 내부 싸움으로 몰락     그렇다면 변승업 이후 변씨 가문은 어떻게 됐을까. 역관으로서 삼대가 연이어 당상관에 오르며 ‘국중거부’가 된 이 집안은 얼마가지 않아 쇠락하고 만다. 변승업이 죽고 25년 뒤인 1734년(영조 10), 예조판서 이사철은 영조에게 변승업의 뒤를 잇기 위한 후손들의 싸움이 인륜의 변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아뢴다. 이후 변씨 가문은 점점 몰락의 길을 걸었다. 변승업의 노력으로 외부의 리스크는 막았지만, 내부의 분열로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상 변씨 가문의 사례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 돈은 사람이 벌어다 주는 것이다. 좋은 인재를 발견했다면 과감히 투자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둘째,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 변승업의 방식이 꼭 정답은 아니겠지만, 자신의 편을 만들고 적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돈을 아끼느라 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내부 단속이다. 외부의 공격보다는 내부의 분열로 붕괴되는 일이 훨씬 더 많다는 것,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 김준태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컬럼니스트

20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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