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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와 나눔으로 ‘진짜 부’ 일군 장석보 집안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⑩]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전라북도 김제군(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에 위치한 ‘금구신명학교(金溝新明學校)’가 폐교당했다. 반일(反日) 교육이 행해지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학교를 설립한 장태수(張泰秀, 1841~1910)는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24일간의 단식 끝에 눈을 감는다. 그는 “내가 두 가지 죄를 지었다. 나라가 망하고 군주가 없는 데도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불충을 범한 것이요, 이름이 적의 호적에 오르게 되었는데도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선조를 욕되게 하였으니 불효를 저지른 것이다. 내가 이 같은 죄를 지었으니 진즉에 죽었어야 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가문의 큰 어른이자 종증조부 장태수의 순절을 본 장현식(張鉉軾, 1896~1950)은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다. 그는 조선민족대동단의 운영 자금을 지원하였고, 젊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의 재정 50%를 책임졌다. 1000석 규모의 농장을 학교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각종 교육 사업에 많은 돈을 희사하였으며,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지원하다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   장석보 네 아들의 재산 증식 비결…‘선택과 집중’, ‘신뢰’     장태수와 장현식, 김제의 부자 장석보(張石輔, 1783~1844)의 자손이다. 장태수는 장석보의 손자이고, 종손인 장현식은 5대손이다. 각각 순국지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건국훈장 독립장,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두 사람은 모두 교육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경주 최 부잣집처럼 튼튼한 재정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 장태수와 장현식이 교육 사업을 벌일 수 있었던 데엔 장석보와 네 아들이 쌓은 부가 토대가 됐다.   인동 장씨 금구파인 장석보 일가는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낀 장기건이 김제 금구면에 낙향하면서 대대로 터전을 잡고 살아왔다. 그러다 장석보 대에 이르러 번성하게 된다. 그는 넉넉한 인품과 부지런함으로 재산을 일궜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고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했다. 양반이건 봇짐장수건 차별하지 않아서 ‘노잣돈이 떨어지면 장씨 집에 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장석보의 네 아들 장한방, 장한진, 장한규, 장한두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잘 이어받았고 덕분에 장석보 가문은 두터운 인망을 쌓을 수 있었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양반이자 큰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으로부터, 6·25한국전쟁 때 공산군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장석보 이래 축적해 온 신뢰 자본 덕분이었다.   그런데 장석보가 재산을 모으긴 했지만, 그가 죽고 아들 사형제가 상속받았을 때만 해도 큰 부자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토지가 많았다지만 네 명이 나눠 가지면서 개별로 본다면 중농(中農) 수준에 불과했다. 자, 그렇다면 이들 사형제는 어떻게 재산을 불린 것일까? 사형제는 매년 돌아가며 한 사람의 논밭을 경작하는 데 힘을 모았다. 올해 맏이네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면 내년은 둘째, 그다음은 셋째, 또 그다음은 넷째가 하는 식이다. 4년마다 로테이션을 돈 것이다. 무릇 한 사람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에는 한정이 있다. 한데 농사를 지으려면 자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어차피 품삯을 주고 노동력을 사야 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대신 가족 구성원들의 힘을 모아 ‘선택과 집중’에 나선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인적·물적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여함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해도, 나 혼자 내 논밭을 경작하는 것에 비해 수입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4에서 4를 생산하다가, 1에서 4를 생산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외부인에게 인건비를 지급할 필요가 없으므로 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부의 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     혼자 농사를 지을 때보다 여력이 있으므로 품질 향상에도 신경 쓸 수 있다. 삶에도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3년간 쉬는 휴경지는 풋거름 작물을 심는 등 지력을 보존하여 생산성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관리하기 쉬운 작물을 심어서 부수입을 올릴 수도 있었다. 로테이션을 통한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사형제의 재산은 점점 불어났다.   물론 이 같은 방식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내가 다른 형제의 농사에 최선을 다한 만큼, 다른 형제들도 내 농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줄 거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누가 혼자서 욕심을 부리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거라 서로를 신뢰해야 한다. 함께 농사를 지어야 하는 논밭에는 대충 임하면서 자기 논밭만 신경 쓰고, 따로 돈 벌 궁리만 한다면 이들 형제의 ‘선택과 집중’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인을 고용했을 때보다도 훨씬 못한 결과가 나오고 만다. 따라서 장석보의 아내이자 사형제의 어머니 홍씨 부인은 형제간의 이견을 조율해주며 서로 믿고 의지하도록 엄히 가르쳤고, 이후에도 그 역할을 종부들이 맡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   초과 이익은 어려운 집에…시대 앞선 ‘부의 재분배’     그러나 이 같은 조치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족의 숫자가 적고 형제의 형편이 비슷할 때는 괜찮다. 손자 세대, 증손자 세대로 내려가면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가구 수도 많아진다. 살림살이도 집집이 차이가 벌어진다. 자연스레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서로를 무조건 믿는다는 것도 어려워진다. 이에 장석보 가문은 ‘의장(義庄)’을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의장이란 문중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전답이다. 주로 문중의 제사 비용을 충당하는 데 쓰인다.     그런데 쌀 40석에서 시작한 의장이 점점 불어나 200석이 되고 급기야 1000석 규모에 도달하자, 장씨 가문은 이를 ‘부의 재분배’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매년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문중 제사를 주관하는 유사(有司)로 선발하고, 의장에서 발생하는 초과 이익을 갖도록 한 것이다. 요즘 방식으로 말하면 재단의 자산은 일정액으로 고정해두고, 자산을 통해 얻은 사업 소득 및 이자를 유사에게 몰아준 셈이다. 덕분에 장석보의 후손 30여 가구는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게 되었고 문중의 단합 또한 유지될 수 있었다.   요컨대 장석보 가문은 구성원의 힘을 결집함으로써 부를 일궜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로테이션을 통한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펼쳤고, ‘의장’을 통해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일가를 화합했다. 장태수와 장현식의 교육 사업에 문중이 합심해 자금을 각출한 것도 이 같은 노력의 결과이다. 한 대만 내려가도 기업이 찢어지고, 서로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다가 오히려 재산이 줄어드는 오늘날의 부자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신뢰과 김준태 아들 사형제 장현식 김제 이들 사형제 장석보 선택과 집중 부의 재분배 김준태 칼럼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⑩ 1611호(20211115)

2021-11-20

300년 번영한 경주 최 부잣집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⑧]

      흔히 부자(富者)는 삼대를 가지 못한다고 한다. 부를 일구기도 어렵지만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 10대가 넘도록 큰 부자였던 집안이 있다. 마지막 대에 이르러서도 망한 것이 아니라 대규모 기부를 통해 스스로 부를 해체했다. 교동법주로도 유명한 경주 최 부잣집 이야기다.     ━   조선 역사에 스며들어 있는 최씨 가문의 전통     최 부잣집의 여정은 조선 중기의 무인 최진립으로부터 시작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던 그는 인조 대에 이르러 공조참판, 삼도 수군통어사를 역임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노구를 무릅쓰고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해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최진립은 천석 정도의 재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약 30만평), 자식에게 집안에 천석 이상의 곡식을 들여놓지 말라 당부했다고 한다. 소작료를 많이 받지 말고 주위에 베풂으로써 재산을 늘리지 말라는 것이다.     아들 최동량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했다. 개령현감, 용궁현감 등의 벼슬을 지낸 그는 시비법과 이앙법을 도입해 소출을 획기적으로 늘렸지만, 소작료를 대폭 줄여줌으로써 재산을 현 상태로 유지했다. ‘부잣집’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손자인 최국선에 이르러서다. 그는 적극적인 농업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도 “재물은 거름과 같아서 나누면 농작물을 잘 자라게 하지만 쌓아두면 악취를 풍긴다”는 신념이 있었다. 흉년이 들면 쌀을 빌려 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하고 창고의 곡식을 내어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했다. 죽기 직전에는 “내가 빌려준 것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라며 담보 문서를 모두 불태웠다.   이후 4대인 최의기는 가업을 확장하면서도 근검절약하고 이익에 얽매이지 않았다. 교동으로 터전을 옮긴 9대 최세린은 흉년이 들 때마다 대량의 곡식을 내어놓았으며, 10대 최만희도 그의 도움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굶주린 사람들을 대규모로 구제하면서도 혹시 부족한 점이 없는지를 염려하곤 했다.     사업 수완과 자산 운용 능력이 뛰어났던 11대 최현식은 가문의 재산을 더욱 크게 늘렸는데, 그 역시 어려운 사람을 돕고 구제하는 일에 아낌이 없었다. 그 덕분일까? 당시 남부지방을 휩쓸며 부자들을 약탈하던 활빈당(대규모 무장 농민 집단)이 경주를 공격하자, 이웃 농민은 물론 부랑자, 걸인까지 몰려와 최 부잣집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마지막 부자인 12대 최준은 이웃을 돕는 조상들의 선행을 계속 이어감과 동시에 상해 임시정부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민족 자본을 활성화하기 위해 대구은행과 백산상회 설립에도 참여한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 대구대학(지금의 영남대학교)을 건립하고 전 재산을 대학 재단에 기탁한다. 300년에 걸친 실로 숭고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   300년 이어간 가문의 부, 6개 가훈이 원동력   최 부잣집은 어떻게 이러한 정신을 계속 간직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많은 재산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 원동력으로 최 부잣집의 가훈이 잘 알려져 있다. 소개하는 자료에 따라 가훈의 항목은 3개, 6개, 7개로 다양한데, 여기서는 가장 유명한 6개를 기준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옛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아서 가훈이 만들어진 정확한 시점을 알 수가 없다)     첫 번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과거시험을 보라는 것은 학문을 닦아서 그것을 검증받으라는 의미이고 양반 네트워크에 포함되라는 뜻이다. 가문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소양이 있어야 하며, 양반 신분을 유지해야 관(官)이나 지역 유지들과의 관계를 원활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것은 관직에 나서지 말라는 말이다. 권력을 탐하다가 몰락하거나, 정치 싸움에 휘말려 피해를 보지 않도록 경계한 것이다.   두 번째, “재산을 만석 이상 모으지 마라.” 최진립이 남긴 유훈과 같은 맥락이다. 최 부잣집은 3대 최국선 대에 이르러 만석꾼이 되었다. 토지에서 거둬들이는 쌀의 소출량이 만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유한 토지가 확대될수록 소출량도 늘어나야 한다. 한데 최 부잣집은 토지가 늘어도 만석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에 맞춰 소작농으로부터 받는 소작료를 줄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최 부잣집의 소작료는 매우 싼 편이었는데, 재산이 늘어날수록 소작료가 추가로 인하되니, 소작농들이 최 부자가 더 큰 부자가 되도록 열심히 일하는 이색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이익을 독점하지 않고 공유함으로써 지주와 소작농 간의 상생을 가져온 것이다.   세 번째,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흉년은 토지를 증식하기 쉬운 때다.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려워진 사람들이 자신의 전답을 싼값에 내놓기 때문이다. 이럴 때 매입하면 당연히 큰 이윤을 남길 수 있겠지만, 최 부잣집은 이를 금기로 여겼다. 남들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자기 배를 채우면 필시 원한을 남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에서 사방 백 리면 영천, 울주, 포항을 포괄하는, 경상북도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최 부잣집이 부를 축적한 것은 혼자 잘나서가 아니다. 지역민들의 도움과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지역에서 최소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관심을 갖는 것이 부자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책무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 “며느리들은 시집온 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게 하라.” 이 말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며느리에게만 검소함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최 부잣집 역대 가장들의 공통적 특징이 ‘검소’, ‘검약’이다. 장차 안살림을 책임져야 할 며느리에게 처음 3년 동안 이러한 최 부잣집의 정신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는 의미다. 마지막 여섯 번째,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우리 전통에서는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집에서 묵어가고, 그런 사람을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최 부잣집의 나그네 접대 규모는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동시에 100명이 넘는 손님이 묵는 일도 있었다. 접대비용으로 연간 천석을 소모했다고 한다. 이는 따뜻한 인심을 보여준 측면도 있지만, 나그네를 통해 전국 각지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상 6개의 가훈을 통해, 우리는 10대에 걸친 만석꾼 [최 부잣집]의 힘은 권력을 탐하지 않고, 근검하고 절약하며, 정보를 중시함으로써 얻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지 않고, 이익을 공유했으며, 아낌없이 베풂으로써 부자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한 데서 비롯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대 가장들이 이 가훈을 힘써 실천했기 때문에 300년 동안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이며, 수많은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고, 부가 사라진 지금에도 여전히 존경받는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이용우 기자 lee.yongwoo1@joongang.co.kr

2021-10-17

상계 좌지우지한 점쟁이 김자명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⑦]

      조선 인조에서 효종 대에 이르기까지 한양의 상계(商界)를 좌지우지하던 인물이 있다. 시각장애인에 점쟁이였던 김자명(金自鳴)이다. “(한양의) 남북시장에서 모두 김자명의 돈으로 장사를 했으니, 김자명이 돈을 풀면 저자에 돈이 흔하고 그가 돈줄을 죄면 도성 안의 물건값이 달라지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하 직접 인용 표시는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   그런데 아무리 김자명의 점치는 실력이 유명하고 복채가 비싸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한양의 상계를 장악할 정도의 자본력을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김자명은 큰 부자였던 역관 이형장의 재산을 가로챔으로써 종잣돈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을 오가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형장은 김자점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 직전에 김자명이 이형장의 점괘를 뽑아 준 적이 있었는데 앞으로의 운세가 깜깜하여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죽는다는 뜻이었다. 김자명은 “지금껏 그대의 뒷배가 되어주던 귀인이 이제는 그대를 해치는 재앙이 될 것”이라며 경고했다고 한다. 이형장은 인조 말기의 최고 실력자 김자점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했는데, 바로 그 김자점으로 인해 발목이 잡힌다는 것이다. 놀란 이형장이 어떻게 해야 액운을 벗어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김자명은 “혹시라도 꼬투리를 잡히면 안 되니, 평소 모아둔 금은보화를 ‘신당(神堂)’에 숨겨 놓으시오. 그러면 조정에서도 이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고 그대도 이내 곤란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오.”라고 답한다. 압수수색을 당해 부정하게 축적한 재물이 발견되면 더욱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니, 미리 찾기 힘든 곳에다 감춰두라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벌어졌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실각한 김자점은 당시 조정에서 논의되었던 ‘북벌(北伐)’ 계획을 청나라 사신에게 누설했다.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위상을 되찾고 눈엣가시였던 산림(山林)을 제거하기위해서였다. 하지만 김자점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영의정 이경석과 예조판서 조경이 책임을 떠안고 의주 백마산성으로 귀양을 감으로써 사건이 무마되었기 때문이다(청나라 사신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기도 했다).     이때 김자점의 사주를 받아 북벌 계획을 누설한 사람이 이형장으로, 청나라 사신이 귀국하자마자 체포된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전 재산을 궤짝에 담아 몰래 김자명이 점을 치는 신당으로 옮겨왔다. 남편이 자신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김자명에게 맡기라고 했다면서 말이다. 김자명이 이 재산을 꿀꺽한 것인데, 본인은 “나라에 알렸다가는 자기도 연루될까 두려웠다.”라고 변명하지만, 이후의 행적으로 볼 때 재물에 대한 욕심이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귀양을 가거나 관노가 된 이형장의 일가를 도와줘야 했을 것이다. 이형장과 얽힐까 봐 걱정됐다고 하더라도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몰래 도와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김자명은 이렇게 얻은 재산에다 복채 수입과 고리대 이자 수익을 더해 막강한 자금을 확보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김자명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기만과 협잡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산지와 시장의 시세 차이가 큰 물품, 오래 보관할 수 있으며 양반이나 부자들이 주로 찾는 상품을 독점했다. 예컨대 곶감이 막 생산되었을 때는 가격이 싸다. 김자명은 곶감을 모두 사들여 창고에 보관한 후 꽁꽁 묶어 두었다. 사람들이 명절 차례상을 준비하고 수정과를 만들려는데 곶감을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로 인해 가격이 몇 배나 폭등하니 김자명은 그제야 상품을 내어놓는다.   그런데 그가 단순히 사재기만으로 돈을 번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자기 뜻대로 상황을 조작했다. 우선 돈을 꾸러 온 상인에게 올해 곶감을 사면 운수가 대통할 거라는 점괘를 준다. 더불어 자금을 듬뿍 보태 자신이 시키는 대로 곶감을 모두 사들이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하면 신통한 점쟁이 김자명이 곶감을 점지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상인들은 너도나도 곶감을 사겠다며 달려들게 된다. 이때 김자명이 넌지시 제안한다. 자기가 돈을 빌려줄 테니 많이 사들이라고. 채무를 상환할 때도 돈 대신 곶감으로 하면 된다고. 넙죽 받아들인 상인은 이내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가격을 기준으로 상환할 곶감 물량을 정했는데, 김자명의 싹쓸이로 인해 가격이 크게 올라버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주요 산지의 곶감이 모두 씨가 말라버린 상태여서 전국 구석구석을 찾아다녀야 했다. 김자명은 사람들을 속여 몇 배의 이득을 거두고, 본인이 놓쳤던 곶감까지 모두 거둬들이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   불과 1대 만에 무너진 김자명의 욕심     이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김자명은 자신의 점치는 능력을 다양하게 악용했다. 혼인날을 받으러 온 사람에게 폐백에 쓸 밤과 대추는 부정을 타지 않은 물건을 써야 한다며, 넌지시 자신이 물건을 대는 상점을 추천한다. “고부간에 뜻이 맞으려면 폐백에 정성이 있어야 하네. 소문내지 말고 조용히, 내일 아침 동쪽 어느 건어물 전에 가서 밤과 대추를 사게. 기운이 좋은 물건을 파는 곳이니 효험이 있을 걸세. 부정을 탈 수 있으니 절대로 값을 깎아서는 안 되네.” 과연 소문이 안 날까? 저 상점이 물건이 좋다며 삽시간에 퍼질 것이다. 또한, 과거시험 답안지로 쓸 ‘명지(名紙)’는 반드시 어느 지물전에서 사야 행운이 따른다는 점괘를 주기도 한다. 그러면 너도나도 그 지물전으로 몰려가 종이를 사느라 금세 동이 나게 마련. 상황이 이와 같으니, 김자명의 가게가 큰돈을 벌었을 뿐 아니라, 상인들도 너도나도 김자명을 찾아와 자기 가게를 잘 봐달라며 뒷돈을 바치고 아부하게 된다.     하지만 정도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돈을 모으느라 정신이 팔렸기 때문일까? 그는 아들 교육에 실패했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외아들이 돈을 펑펑 써대 집안이 흔들릴 정도였다. 더는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김자명이 기와집도 팔고 비단옷도 벗어버린 채 점치는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장사에 나서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김자명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은 버릇을 고치지 못한 채 흥청망청하다가 이리저리 떠돌며 밥을 구걸하는 처지로 전락했다고 한다. 불과 1대 만에 망해버린 것이다.   이상 김자명은 큰 부를 일궜다는 점에서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사례다. 점을 치는 능력이 그저 점쟁이라는 직업 안에서만 머물렀다면 그는 단지 부유한 정도였을 뿐, 수도 한양의 상계를 뒤흔드는 위치에까진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미래예측능력을 상업에 접목함으로써 시너지를 발휘한 것이다. 시장 상황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효과도 가져왔다. 다만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기만하고, 작은 이익에 집착하여 쪼잔하게 행동한 점은 그가 가진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아들 교육을 잘못시킨 탓이 크긴 하지만, 만약 그가 선을 지키며 미래예측능력과 상업을 접목했다면, 불과 1대 만에 몰락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

2021-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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