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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110주년·김정일 80주년’ 북한, 생일정치 문 열까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전 세계는 오미크론 변이의 확산으로 코로나19 시대가 연장된 가운데 2022년을 맞았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보기에 여러모로 독특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북한이 1월 5일 동해상으로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한해를 시작한 것도 이색적이다. 전 세계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방역에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코로나가 아닌 뉴스로는 북한 미사일 발사가 가장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홍보에 능한 모습이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다음날인 6일 “전날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 발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김정은의 생일인 1월 8일을 사흘 남겨두고 북한은 축포를 발사한 것인가. 어쨌든 한국과 일본은 물론 전 세계미디어에서 북한의 신년 벽두 미사일 발사는 흥미로운 뉴스를 제공했다.     ━   ‘거리두기는 없다’ 화려했던 북한의 신년맞이   북한의 독특한 모습은 이뿐이 아니다. 신년 전야 평양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중앙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해 12월 31일 오후 11시부터 올해 1일 새벽까지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새해맞이 행사를 진행했다.   행사는 광장에 설치된 무대에서 ‘2022 신년 경축공연’으로 시작해 자정이 지나 새해가 되자 국기게양대에서 인공기 게양식으로 이어졌으며, 축포 발사로 평양 하늘을 불꽃으로 장식하면서 마무리됐다. 전체 과정은 조선중앙TV를 통해 생중계됐다.   경축 공연이 벌어진 무대 위에는 여성 6중창 ‘친근한 우리 원수님’과 남성 4중창 ‘벼 가을 하러 갈 때’ 등이 이어졌다. 공연하는 가수들 뒤로 ‘사회주의 승리를 위하여’ ‘주체’ 등의 구호를 적은 화면이 펼쳐졌다.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우리 당의 위민 헌신의 여정 위에 꽃 펴난 인민의 행복과 기쁨을 노래한 남성 독창과 여성 방창 ‘행복의 내일’, 남성 4중창 ‘벼 가을하러 갈 때’, 여성 독창과 남성 방창 ‘바다 만풍가’, 혼성 중창 ‘정말 좋은 세상이야’ 등은 자력으로 전면적 부흥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는 내 조국의 자랑 찬 모습을 감명 깊게 보여줬다”라고 자평했다.   평양 김일성광장은 평양 한복판, 대동강 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강 건너 주체사상탑을 마주 보고 있는 북한의 심장부다. 열병식이나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주목할 점은 광장의 규모와 수용 인원이다.   1954년 조성된 이 광장은 7만5000㎥의 면적으로 최대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1일 조선중앙통신에 보낸 사진이나 조선중앙TV가 방영한 내용을 보면 광장에 주민들이 빼곡하게 서서 행사를 지켜봤다. 의자는 없었다. 주민들은 두꺼운 방한복 차림에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다만 광장에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거리두기는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무대 위의 공연자들은 누구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어린이 중창단도 나와서 노래하고 춤을 췄지만, 마스크는 쓰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은 1월 5일에는 연말에 나온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4차 전원회의 결정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한 평양시 궐기대회를 김일성광장에서 진행했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6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이 송신한 사진과 조선중앙TV의 영상을 보면 이날 행사에도 인파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역시 방한복과 마스크 차림이었으며 거리두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마디로 빽빽하게 광장을 채웠다.   궐기대회 참석자들 사이사이에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4차 전원회의 결정을 철저히 관철하자’ ‘당중앙 따라 천만리’ ‘과감한 투쟁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전면 재발전을 위한 토대를 강력히 다지자’ ‘위대한 우리 국가의 부강발전과 우리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더욱 힘차게 싸워나가자’ 등의 구호가 적힌 고정 펼침막이 보였다. 참석자들은 사이사이에서 북한 국기와 붉은 깃발을 들고 흔들었다.     ━   코로나19 격랑 속에서도 독자노선 걸어온 북한   대형 고정 펼침막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위대한 수령님 탄생 110돐 위대한 장군님 탄생 80돐을 맞는’이란 문구가 위에, ‘올해를 혁명적 대경사의 해, 새로운 승리의 해로 빛내이자’라는 글이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중간에는 김일성 탄생지인 평양 만경대와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백두상 밀영 사적의 사진과 함께 볏단을 든 여성 농부, 훈장을 목에 걸고 설계도를 들고 있는 신사복 차림의 남성, 작업복을 입고 안전모를 쓴 채 왼손에는 붉은기를 오른손에는 호루라기를 든 남성의 사진이 실렸다. 배경으로 도시와 고층건물, 공장의 모습이 보였다.   이 두 행사는 코로나19가 확산을 시작한 직후인 2020년 1월 국경을 폐쇄하고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근 북한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 우선, 지난해 12월 31일과 올해 1월 5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거의 10만 명이 모여 대형 행사를 벌였다는 사실은 북한의 코로나19 상황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사실 북한은 코로나19의 방역과 관련해 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나라로 꼽힌다. 2019년 12월 첫 보고가 나온 이래 2년 이상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의 확진자를 발표하거나 세계보건기구(WHO)에 보고한 적이 없는 유일한 국가다.   공식적으로는 코로나19 확진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그동안 북한이 내놓은 다양한 분야의 데이터가 신빙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서방이나 국제기구는 북한 당국의 ‘제로 코로나’ 발표를 믿지 않는다.   NK뉴스에 따르면 WHO는 1월 3일 발표한 상황보고서에서 북한이 지난해 12월 9~23일 1492건의 코로나19 추가 검사를 했으나 양성은 한 건도 없었다는 보고를 전했다. WHO는 북한에서 지금까지 이뤄진 누적 검사가 4만9941건이라고 명시했다.   평양의 김일성 광장에서 닷새 간격으로 10만 명이 모여서 대형 축하‧정치 행사를 벌였지만, 이들 중 코로나19 검사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자신감인지 만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북한은 ‘우리식’으로 코로나 시대를 사는 셈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2020년 12월부터 전 세계에서 이뤄지고 있는 코로나 백신 접종도 북한에선 공식적으론 한 건도 없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아프리카 에리트레아와 함께 전 세계에서 두 나라밖에 없는 코로나19 백신 미접종국이다.   국제사회는 그동안 코로나19와 관련해 북한에 의료 키트를 제공하거나 백신을 배정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다. 2021년 3월 국제 백신 공동구매 프로그램인 코백스(COVAX)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199만 2000회분을 북한에 배정하고 이 가운데 170만4000회분을 5월까지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협의 과정에서 북한이 공급 백신 종류를 둘러싼 이견으로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세한 협의 내용이나 북한의 요구는 즉각 공개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자체 개발한 아데노바이러스 전달체 백신인 스푸트니크 V 백신을 북한에 유상 지원하기를 원했지만, 북한이 무상 지원을 요구하면서 공급이 이뤄지지 않았다.     ━   WHO 의료물자 받으며 누그러진 북한의 태도   국제아동기금(유니세프)은 2021년 9월 북한이 자국에 배정된 중국산 백신 297만 회분을 다른 나라에 재배정해도 된다고 알려왔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7월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기자간담회에서 북한이 코백스에 아스트라제네카가 아닌 다른 백신의 지원 가능성을 타진했으며, 중국산 백신은 불신해 도입을 주저하고 있다고 했던 내용을 확인해주는 발표다.   이를 종합하면 북한은 아데노바이러스 전달체 백신인 아스트라제네카나 러시아산 스푸트니크 V 백신보다 m-RNA 백신인 화이자나 모더나 제품을 원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화이자 백신은 영하 60~80도의 초저온에서, 모더나는 영하 20도에서 냉동 보관해야 한다.   이에 비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영상 2~8도에서 보관해 비교적 콜드체인 유지가 용이하다. 북한의 현재 전력 사정이 전국적으로 콜드체인을 유지하면서 코로나 백신을 접종할 수 있는 상황인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코백스는 2021년 11월 30일 북한에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473만4000회분을 제공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북한 측의 반응은 즉각 알려지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백신 사정이 좋아지면서 코백스를 통해 북한에 배정되는 백신의 물량이 갈수록 넉넉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발표다.   북한이 지난해 코백스로부터 배정받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673만 회분이 넘는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2020년 북한 인구는 2578만 명으로 추산된다. 통계청 북한통계 포털에 따르면 북한의 0~20세 인구가 600만 명이나 이 정도 분량이면 20세 이상 인구의 약 30%에게 1회 접종할 수 있는 분량이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2회를 접종해야 하므로(부스터샷 제외) 이 정도 분량이면 15%에게 접종을 마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일단 백신 지원을 받기로 하면 코백스는 물론 유니세프와 같은 국제기구과 국제적십자위원회 같은 인도주의 기관, 한국 정부 등이 나설 수밖에 없다. 북한의 코로나 백신 접종은 어느 나라보다 빨리 진행될 수도 있다. 콜드체인 마련이 어려우면 냉장차를 대거 보낼 수도 있다. 북한이 접종을 시작만 한다면 의외로 짧은 시간에 빠른 속도로 접종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완고하게 나라의 문을 걸어 잠갔던 북한의 태도도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다. 2021년 10월 7일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WHO와 다른 유엔기구가 지원한 긴급의료세트를 받기로 하고 관련 화물을 싣고 중국 랴오닝(遼寧) 성다롄(大連) 항에 머물고 있던 선박의 남포항 입항을 허가했다.   국제기구의 인도주의 물자가 평양 당국이 봉쇄한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간 것은 처음이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북한이 국경 통제를 조금씩 풀고 국제사회와 교류와 교역을 하고 싶어 하는 신호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북한의 실제 보건의료 사정이 심각함을 보여주는 징후로도 볼 수 있다.     ━   ‘김일성과 김정일 탄생의 상징성’ 변화 필요한 북한의 2022년   이런 상황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2022년이 북한 정권에 상당히 중요한 해라는 사실이다. 김일성(1912~1994년)탄생 110주년이자 김정일(1942~2011년) 탄생 80주년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은 태양절, 김정일 생일인 2월 16일은 광명성절이라고 부르면서 국경일로 쇤다.   생일이야 매년 오지만 주목할 점은 올해가 이른바 ‘꺾인 해’라는 사실이다. 북한은 5나 0으로 끝나는 주년을 특히 중시해왔다. 같은 기념일이라도 그해에 유난히 성대하게 축하 행사를 치러왔다.   주민들도 뭔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김정은 국방위원장으로선 호주머니를 털어서라도 뭔가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 미사일과 핵으로 외부를 위협할 수는 있지만, 경제 사정이 어려운 국민을 다독거릴 수는 없다.   통계청 북한 통계 포털에 따르면 북한의 2020년 국내총생산(GDP)은 34조7000억원(약 315억 달러), 1인당 GDP는 137만9000원(약 1253달러)이다. (1달러 1100원으로 계산) 코로나로 국경을 완전히 닿는 극약처방으로 코로나바이러스의 침입은 어느 정도 피했을지 모르지만, 경제난은 피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 때문이라도 2022년 북한은 변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 2020년 1월부터 나라의 문을 꽁꽁 닫고 은거에 들어갔던 북한이 코백스 백신 등을 외부로부터 공급받고 주민들에게 대대적으로 접종할 수 있다. 그다음 단계는 국경을 열어 중국 등에서 축하 행사에 쓸 식량과 선물용 물품 등을 대대적으로 들여와 푸는 일이다. 가장 긍정적인 전망이다.   문제는 북한 정권이 가장 중시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과 관련한 꺾인 해는 활용하기에 따라 독도 될 수 있고 약도 될 수 있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경우 북한은 가용 자산을 총동원해 한국과 국제사회에 도전장을 내밀 수도 있다.   미국도 미‧중 경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위협, 이란과의 이란핵합의(JCPOA) 재개를 위한 협상 등으로 북한에 눈을 돌릴 여유가 적다. 게다가 올해 11월에는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의 하반기 국정운영의 동력을 좌우할 중간선거가 열린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백신 접종을 받아들이고 국경을 개방하도록 국제사회가 외교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2022년 남북한은 상호 협력하고, 국제사회는 북한 주민의 생존을 위한 다각적인 협력을 할 수 있는 해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구호나 퍼포먼스가 아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생존기회를 북한 주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기회는 머리를 맞대고 만드는 것이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생일정치 인사이트 평양 김일성광장 남성 4중창 미사일 발사

2022-01-13

멸공·반공…신세계 주주들 떨게하는 ‘정용진의 입’ [유통가 인사이트]

      “여기 대한민국에 공산당 좋아할 사람 있나요? 철부지 애도 아니고 대세가 미국으로 기운 것도 아닌데 기업가가 할 말을 어떻게 다하고 삽니까. 중국의 본격 대응을 받아 주주 불안을 야기할 필요가 있나요? 그냥 일기장에 써놓는 것이 좋지 않은지…” (신세계 주주가 멸공 논란이 확산되자 남긴 글)   ‘정용진표’ 신세계가 중국과 베트남 사업에 등을 돌리는 것일까. 팔로워 수 73만명. 재계 대표 인플루언서로 통하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개인 SNS에 연일 반공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나는 공산주의가 싫다”, “멸공”, “승공통일”, “반공반첩”. 최근 몇일간 정 부회장의 개인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된 단어들이다.     특히 반복적으로 등장한 멸공은 공산주의자를 멸한다는 뜻. 정 부회장이 이 단어에 중국 국가주석인 시진핑 사진을 게재하고 정부의 대중 정책을 비판하면서 신세계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   브레이크 없는 ‘멸공’ 행보…중국 의존도 미미    그가 ‘반공’을 놓고 단단히 뿔이 난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 5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멸공 게시물이 삭제되면서다. 그는 이날 숙취해소제 사진 한장을 찍어 올리면서 “끝까지 살아남을테다”, “멸공!!”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았고, 인스타그램 측에서는 해당 글을 삭제 조치했다. 신체적 폭력 및 선동에 관한 인스타그램 가이드라인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다.       정 부회장은 이 사실을 알고 즉각 항의했다. 그동안 멸공 단어가 포함된 게시물이 40여개가 넘고 멸공 관련 다른 사용자 글이 1000여건이나 된 상황에서 왜 특정게시물만 지워진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해당 내용이 기사로까지 언급되자 다음날 인스타그램은 입장문을 내고 문제의 게시물을 복원시켰다.     단순 삭제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 했지만 정 부회장은 되레 ‘멸공’류 게시물을 더 적극적으로 게재하면서 브레이크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반공반첩’이라는 간판의 고깃집 방문을 예고하기도 하고, 검찰이 자신의 휴대폰 통신내역을 조회했다면서 ‘통신 자료 제공 내역 확인서’를 올리기도 했다. 통신 자료 관련 게시글에는 “이 나라가 공산주의”, “멸공” 등 정 부회장을 지지하는 3만여개의 댓글이 달렸다. 다른 게시글 댓글에도 “소신 발언”, “지지한다” 등의 긍정적 반응이 주를 이룬다.     일각에선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특히 신세계 주주들은 혹시 정 부회장의 거침없는 발언이 중국과 베트남 관련 사업에 영향을 끼쳐 주가를 떨어뜨리지 않을까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일부에선 신세계백화점, 이마트, 면세점, 신세계인터내셔날 등 주요 계열사에 대한 불매운동을 시작하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물론 신세계그룹의 중국 의존도는 다른 기업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다. 이마트의 경우 1997년 중국에 진출했지만 2013년부터 영업 적자가 이어지자 2017년 중국에서 사업을 완전 철수했다. 백화점과 면세점도 중국 내에선 별도의 사업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계열사 중 정 부회장의 동생인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이 이끄는 사업은 중국과 연관돼 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화장품 브랜드로 중국에 진출해 있고, 국내 면세사업 역시 중국인 매출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한 주주는 “애플과 테슬라도 큰손인 중국 눈치를 보면서 경영하는데 시진핑 기사까지 메인으로 들고 왔다는 건 오너가 공과 사 구분을 못하는 것아니겠냐”며 “신세계가 앞으로도 국내 내수로만 먹고 살자는 말밖에 더 되겠냐. 면세점은 앞으로 장사를 안 할 생각이냐”면서 맹비난을 쏟아냈다.    또 다른 주주도 “지난 10년간 이마트 주가는 하락했고 신세계 주가는 횡보했다”면서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고 마치 정치권 후보처럼 지지받는 것으로 상황을 즐기면서 관심받는 것보다 신세계그룹에 투자하는 투자자들과 직원들을 위해 힘써달라”고 지적했다.     사업적인 부분을 차치하고라도 주주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부분은 “오너가 SNS에 공개적으로 내는 발언으론 매우 경솔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한 그룹을 이끄는 수장의 SNS는 개인적인 공간으로 규정짓기에도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대기업 오너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무게감이 있는 지는 역설할 필요가 없다. 재계 11위, 수십만명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는 정 부회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는 '반공'을 강조하지만 정작 그의 발언이 신세계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반신세계'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봐야 할 것이다.  김설아 기자 kim.seolah@joongang.co.kr서소문 인사이트 정용진 신세계 정용진 신세계그룹 멸공 게시물 주주 불안

2022-01-07

프랑스·필리핀·일본·브라질… 2022년 선거가 바꿀 세계는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대한민국은 올해 3월 9일 새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선거에 대한 관심이 높다. 2022년에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 곳곳에서 굵직한 선거가 열린다. 선거의 해인 2022년, 글로벌 사회는 어떤 변화의 흐름을 탈지 주목된다.     ━   프랑스, 중도우파 공화당이 명예회복 성공할까   굵직한 선거로 4월 10일(결선투표는 4월 24일)의 프랑스 대통령 선거가 있다. 프랑스는 현직인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집권당인 ‘레퓌블리크 앙마르쉐’를 제외한 다른 주요 정당 대부분에서 대선 후보를 확정했다. 마크롱은 당연히 재선 도전이 유력하지만 “대선 후보가 아닌 대통령으로 일을 더 하겠다”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출마 선언을 보류하고 있다.   이번 선거는 2017년 대선에서 전통의 기존 좌·우파 정당을 기득권 정당으로 모조리 침몰시키고 좌우를 넘어서겠다는 젊은 에마뉘엘 마크롱을 대통령에 앉힌 유권자들의 혁신 물결이 계속될지가 가장 큰 관심사다. 마크롱은 자신의 새로운 정당인 레퓌블리크 앙마르쉐를 앞세워 의회도 장악했다.   이에 따라 당시 선거에서 몰락했던 중도우파, 중도좌파, 그리고 극우파와 극좌파는 올해 대선으로 어떤 전략으로 설욕에 나설지도 관심거리다. 프랑스에서 관심을 끄는 정당이 전통의 프랑스 우파 대표인 공화당(LR)이다.   지난 2017년 대선에선 유권자들이 기득권‧제도권 정당에 반기를 들고 좌우 모두를 경원하는 바람에 결선 투표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치욕을 당했다. 그런 공화당이 이번에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쇄신하고 나왔다.     중도우파 정당 사상 처음으로 여성을 대선후보로 선출한 것이다. 발레리 페크레스가 그 주인공이다. 페크레스는 후보 당선 직후 여론 조사에서 마크롱 대통령 다음으로 앞서가고 있다. 결선 투표에 진출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프랑스에서 2021년 12월 이뤄진 여론조사 중에서 조사 대상이 1만928명으로 가장 많은 입소스(Ipsos) 조사(7~13일)에 따르면 마크롱 대통령이 24%로 2위를 지키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이 중도 우파의 페크레스가 17%로 2위라는 사실이다. 지금 결과대로라면 마크롱과 중도 우파의 페크레스가 결선 투표에서 맞붙을 수 있다.   주목할 점은 페크레스가 수도 파리와 인근을 관할하는 수도권인 일드프랑스의 주지사라는 사실이다. 일드프랑스는 프랑스 본토를 이루는 광역지방자치단체인 레지옹(주) 18개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고 경제력이 가장 강하다.   인구는 1230만 명에 이르고 프랑스 본토 면적의 2.2%의 지역에 인구의 18.8%가 산다. 지역총생산(GRP)는 1조570억 달러로 레지옹 가운데 1위다. 1인당 GRP는 6만100유로(7만1900달러)로 역시 레지옹 중 1위다.   물론 수도권도 마크롱 지지가 강하고 좌·우파와 극우‧극좌가 고루 분포하고, 대선과 주지사 선거는 별개인 게 사실이다. 게다가 수도권은 부유한 파리와 가난한 교외 지역으로 나뉘어 프랑스의 양극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구 밀집지역을 배경으로 둔 만큼 대선에서도 어느 정도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 주목할 점은 중도우파 정당인 공화당이 이번 선거에 필사적이라는 사실이다. 공화당은 당 내부적으로 강경·온건파로 나뉘는데 온건파인 페크레스는 경선 1차 투표에서 2위였으나, 2차 투표에서 강경파인 에릭 시오티 하원의원을 20%포인트가 넘는 득표율 차이로 눌렀다.   공화당으로 상징되는 프랑스 우파는 제5공화국을 이룬 샤를 드골과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등 쟁쟁한 대통령을 배출했다. 그런 공화당에서 온건파 후보가 결선 투표에서 큰 차이로 후보 자리를 따낸 것은 이번 대선에서 중도우파로서 극우와 차별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당의 극우화를 막겠다는 당원들의 의지일 수도 있다.   독특한 점은 2021년 12월 5일 창당된 새로운 극우 정당인 레콩퀘스트(R!‧재정복) 소속 에릭 제무르가 15%로 3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전통의 극우정당으로 프랑스 극우 정치를 이끌어온 국민연합(RN‧국민전선(FN)에서 2018년 개명)의 마리 르펜 후보를 근소한 차로 눌렀다.   르펜은 14.5%를 차지했다. 르펜은 지난 2017년 대선에서 1차 선거 2위로 결선투표에서 마크롱과 맞붙었지만 현재로썬 중도 우파는 물론 같은 성향의 극우파 제무르에게도 밀린 것이다.   극우 세력에서도 인물 교체 바람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제무르와 극우파들의 지지를 양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둘을 합치면 극우세력은 여전히 1차 투표에서 30% 정도의 고정 지지층을 확보한다는 이야기다.   그린피스 활동가 출신으로 유럽생태녹색당 소속의 환경주의자인 야니크 자도 유럽의회 의원은 8.8%의 지지율을 얻고 있다. 극좌 정당인 ‘불복하는 프랑스’를 이끄는 장뤽 멜랑송도 8.5%의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다. 멜랑송은 사회당에서 더욱 강력한 좌파 정책을 내걸고 별도 정당을 창당해 상당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전통의 중도좌파 정당인 사회당(PS)이다. 사회당 소속 안 이달고 파리 시장은 4.5%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사회당은 자당 소속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임기 말인 2016년 좌파로부터는 배신자, 우파로부터는 무능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지지율이 4%로 추락한 이후 좀처럼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는 셈이다. 전통 프랑스 좌파의 현주소다.   결국 4월의 프랑스 대선은 마크롱 바람으로 상징되는 혁신의 바람을 계속 이어갈지가 관심사다. 이념적 도그마에서 벗어난 실용주의를 앞세우는 마크롱은 대선을 앞두고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을 앞세우며 인공지능(AI), 전기자동차 등 과학기술을 통한 혁신 경쟁의 재점화를 선언했다. 미래를 끌고 갈 것인지, 이념의 기치를 높이 들지가 2002년 프랑스 대선의 핵심이다.     ━   필리핀, 대통령 자녀가 대통령·부통령 취임 가능성 높아     5월 9일의 필리핀 대선은 이 나라의 정치가 얼마나 거대 정치가문에 좌우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국민에 밀려났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가문이 이번 대선을 통해 복귀와 명예 회복을 노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크다.   필리핀 대선을 앞두고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1917~89년, 재임 1965~86년) 전 대통령인 외아들인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64)가 여론조사에서 계속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은 부친의 이름은 물론 정치적 자산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봉봉’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마르코스는 가문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고향인 북일로코스의 부지사(1980~83년)와 주지사(1998~2007년)를 지낸 뒤 이곳을 지역구로 하는 하원의원(2007~2010년)과 상원의원(2010~2016년)을 지냈다.   봉봉이 이 지역에서 계속 선출직에 당선하면서 마르코스 가문은 ‘국민에 쫓겨난 독재자 집안’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2022년 필리핀 대선은 마르코스 가문이 다시 대통령궁을 차지하면서 정치적 재기를 넘어 명예 회복까지도 할 수 있는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봉봉은 지난해 12월 1일부터 엿새 동안 2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펄스아시아의 필리핀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53%의 지지율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고 12월 23일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마르코스의 지지율은 펄스아시아가 여론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높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과 대립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온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이 2위를 차지했지만 봉봉과 한참 차이가 나는 20%에 불과했다. 배우이자 방송인 출신인 프란시스코 도마고소 마닐라 시장이 8%로 뒤를 이었다. 필리핀의 복싱 영웅으로 국내외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매니 파키아오 상원의원이 같은 8%를 나타냈다. 현직인 두테르테는 필리핀 헌법에 따라 연임할 수 없이 이번에 대선 출마가 불가능하다.   대신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카르피오(43) 다바오 시장이 부통령 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지지율 45%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사라는 부통령 후보 등록 직후 마르코스와 러닝메이트를 선언했다.   이들이 이번 선거에서 당선하면 필리핀 사상 최초의 전직 대통령 자녀가 대통령과 부통령에 나란히 취임하게 된다. 대통령 가문의 자녀들이 정치적으로 제휴해 시너지를 내면서 권력을 계속 누리는 ‘2세 동맹’이다. 필리핀은 여러모로 족벌 정치 체제라는 지적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됐다.     ━   친선외교 강화와 전쟁 개헌의 갈림길에 선 일본     7월에는 일본 참의원 선거가 있다. 2021년 10월 4일 취임해 10월 22일의 총선에서 선거 전과 동일한 284석을 확보하면서 선방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력을 보여주는 무대가 되는 선거다.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기시다는 안정적인 의석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장기 집권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자민당 내 1·2위 파벌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아베파와 아소 다로(麻生太朗) 전 총리의 아소파의 입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독자적인 자신의 정치를 할 길도 어느 정도 만들 수 있다.   기시다 총리는 아베나 아소와 달리 외교에서 이웃나라들과 친선과 교류·협력을 강조하는 비둘기파로 분류된다. 하지만 기시다가 더욱 힘을 얻기 위해 이 부분에서 양보하고 아베나 아소와 힘을 합쳐 보수 강평파의 오랜 꿈인 개헌을 이루고 전쟁할 수 있는 일본으로 한걸음 나갈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정치적 환경과 상황에 좌우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혼란의 중동국가 레바논은 3월에 총선에 예정됐지만 연기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선거를 제대로 치를 정도의 정치력도, 국민 신뢰도, 치안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선거 일정이 제대로 진행되는 것만으로도 행정력이 제대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   ‘좌파가 돌아온다’ 룰라 당선 가능성 높은 브라질     남미 브라질에선 10월 2일(결선투표를 한다면 10월 30일) 대통령 선거와 상·하원 선거를 치른다. 1억4600만 명의 유권자들이 투표를 기다리는 거대한 선거다. 이번 선거에선 좌파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76세·2003~2010년 재임)의 정치적 복귀가 관심을 모은다. 현직인 우파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다. 흘러간 권력의 복귀와 좌파 세력의 정치적 복권이 핵심 관심 사안이다.   브라질은 2022년 전 세계의 눈이 몰리는 지역이다. 10월 대선을 앞둔 브라질에선 좌파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지키고 있어 재선이 유력하다. AP통신에 따르면 현지 여론조사업체 다타폴랴의 12월 13~16일 조사 결과 좌파인 룰라가 1차 투표에서 47~48%를 얻을 것으로 전망됐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지지다.   룰라는 21~22%를 확보한 우파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크게 앞질렀다. 우파에서 그의 대안으로 평가 받는 세르지우 모루 전 법무장관은 9% 확보에 그쳤다. 3666명을 대상으로 조사(오차범위 ±2%포인트)해 16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다. 브라질 좌파는 조금만 더 힘을 모으면 결선투표를 벌이지 않고 1차 투표에서 룰라가 바로 당선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금속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로 좌파 노동자당 소속인 룰라는 2002년과 2006년 대선에서 연거푸 승리해 8년을 집권했다. 2016년 그의 후계자인 지우마 호세프 당시 대통령이 권력 남용 혐의 등으로 탄핵되면서 좌파 정권이 무너졌다.   룰라 자신도 퇴임 뒤 뇌물과 돈세탁 등의 혐의로 1심과 2심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법원이 2심 재판의 유죄 판결만으로 피고인을 수감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하면서 지난 2019년 11월 8일 수감 580일 만인 석방돼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 뒤 2021년 3월에는 연방대법원으로부터 지난 2018년 부패 혐의로 선고받았던 징역 12년형이 무효라는 최종 판결을 받으면서 기사회생했다. 앞선 판결은 룰라에게 유죄를 선고하도록 판사들과 검사들이 담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공정성이 문제가 되면서 논란을 불렀다.   결국 룰라의 부패 혐의는 정치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룰라는 정치적으로, 사법적으로 복권이 됐다. 이런 룰라 전 대통령이 내년 대선에서 당선하면 7년 만에 부활하게 된다. 중남미 최대 국가인 브라질에서 좌파인 룰라가 당선하면 중남미에 핑크타이(좌파 도미노)를 이룰 가능성이 있다.   룰라는 과거 집권 당시 빈곤층에 대한 위생‧교육‧안전‧기회 제공 등에 치중하면서 빈곤 인구를 줄여 양극화를 완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업 정책에서도 균형을 유지해 브라질 경제의 고속성장을 이끌었다.   룰라는 빈곤과 부패, 그리고 혼란이 그치지 않는 브라질에서 하나의 희망으로 간주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 없이 재판과 수감으로 오랫동안 발목이 잡혔던 과거 대통령이 다시 돌아오는 회전문 대선이라는 평가를 할 수도 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우파의 희망으로 대통령에 당선했으나 권위주의적인 행동과 코로나19의 위험을 무시하는 행동을 비롯한 갖가지 비상식적인 기행으로 인기를 잃어갔다.   브라질은 코로바19 팬더믹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감염률을 보인 나라의 하나가 됐으며, 보우소나루 대통령 본인도 확진 판정을 받고 격리됐다. 여러모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비슷한 특징을 보여 ‘브라질의 트럼프’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결국 그의 정치적 신뢰도는 크게 추락해 10월 대선에서 좌파 룰라에게 정권을 빼앗길 가능성이 커진 상황에 처하게 됐다.     ━   미국 중간선거 앞두고 아프간 전쟁 멍에 쓴 바이든      11월 8일은 미국의 조 바이든의 1기 하반기 명운을 가를 중간선거(상·하원 의원선거)가 열린다. 미국 정치에서 중간선거는 일반적으로 대통령이 소속한 집권당에 불리하게 진행돼 왔다. 이번 중간선거에서도 민주당이 상원과 하원에서 계속 우위를 유지할지가 관심사다. 현재로썬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낮다고 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철군에서 보여준 혼란과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 하락은 바이든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코로나로 인한 인력난이 부른 미국의 물류난, 물가 상승도 국민의 불만을 불러왔다.   급기야 ‘레츠 고 브랜든(Let’s go Brandon)’이라는 밈이 미국 전역과 인터넷 상에서 돌며 바이든 때리기, 조롱하기가 미국민의 ‘국민 스포츠’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NBC 방송이 미국의 인기 자동차 대회인 나스카에서 유력 선수인 브랜든을 인터뷰하는 동안 인근에서 관객들이 바이든을 욕하는 구호를 외쳤는데, 방송 기자가 이를 ‘레츠 고 브랜든(Let’s go Brandon)’이라고 돌려서 전하는 바람에 반민주당, 반바이든 국민의 비웃음을 샀다. 이런 민심 상황을 극복하고 올해 11월 8일 중간선거에서 바이든이 얼마나 선전할지는 미국뿐 아니라 국제정치에서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일본 인사이트 중도우파 정당 대통령 선거 프랑스 대통령

2022-01-04

칠레 보리치 당선인이 소환한 아옌데의 추억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남미 칠레가 12월 19일 치른 대선 결선투표에서 35세의 ‘밀레니얼 세대 정치인 가브리엘 보리치가 당선했다. BBC에 따르면 후보 중 극좌파로 분류되는 보리치는 55.87%를 득표해 44.13%를 얻은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55) 후보를 10%포인트 이상 앞섰다. 35세는 칠레에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이다.     ━   ‘좌향좌’ 예고한 보리치 “칠레 신자유주의 무덤 될 것”   보리치는 좌익 성향의 정당연합인 아프루에보 디그니다드(AD‧존엄 찬성) 소속이다. AD는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강조하는 민주사회주의 성향의 정당으로, 개량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보다 더욱 왼쪽에 위치한다.   카스트는 극우 포퓰리즘과 민족주의 성향의 정당연합인 기독교사회전선(PLR) 소속이다. 결과적으로 이번에 대선에 나온 정당이나 정당연합 중 가장 오른쪽과 왼쪽 세력이 2차에서 격돌한 것이다.   1차 투표에서 47.3%였던 투표율은 결선 투표에서 55.6%로 뛸 정도로 이번 대선은 국민의 뜨거운 참여를 이끌어냈다. 결선투표에 참여한 유권자는 827만 명으로 1차 때의 702만 명보다  120만 명이나 더 많았다.   7명의 후보가 나온 대선 1차 투표에선 극우와 극좌 성향의 후보가 1,2위를 차지하고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가 대거 몰락했다. 카스트 후보가 27.91%로 1위를, 보리치가 25.82%로 2위를 각각 차지했다. 보리치는 이처럼 1차 투표에선 카스트에게 밀렸지만, 결선투표에서 역전했다. 결선투표에서 좌파가 단합한 것은 물론, 1차 투표에서 냉담했던 유권자까지 투표소로 몰린 셈이다.   1차 투표에서 중도좌파인 인민의 당(PDG)의 프랑코 파리시는 12.81%, 중도우파와 극우파의 중간인 칠레 포데모스 마스(ChP+‧칠레 우리는 더 많이 한다)의 세바스티안 시셸은 12.79%를 각각 득표했다.   중도에서 중도좌파 성향의 신자유계약(NPS)의 야스나 프로보스테는 11.60%, 민주사회주의‧환경주의‧페미니즘을 내세운 좌파 포퓰리즘 정당인 진보당(PRO)의 마르코 엔리케오미나미는 7.60%, 칠레공산당을 승계한 공산주의 정당인 애국주의동맹(UPA)의 에두아르도 아르테스는 1.46%를 각각 얻어 바닥권을 머물렀다.   대선과 함께 치른 총선에선 칠레 포데모스 마스가 53석, 보리치 당선인이 소속한 아프루에보 디그니다드가 37석, 신자유계약이 37석, 기독교사회전선이 15석, 인민당이 6석을 각각 얻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보리치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최저임금 인상과 연금 개편, 의료 시스템 정비, 교육 개혁, 국영 리튬 회사의 설립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런 보리치는 대선 기간 내내 “그동안 칠레가 신자유주의의 요람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무덤이 될 것”이라며 대대적인 ’좌향좌‘ 경제‧사회 개혁을 예고했다.   그 결과 빈부 격차와 소득 불평등에 불만이 높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보리치는 2011년 고등교육 개혁을 요구하는 대학생 시위를 주도하다 정치에 뛰어들어 하원의원에 선출됐다.   주목되는 것은 WSJ이 그런 보리치의 모습에서 남미 최초로 선거로 당선했던 마르크스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1908~1973년, 1970~73년 집권)을 떠올린 것이다. WSJ은 “보리치가 아옌데 이후 가장 좌파적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   과감한 진보정치 펼쳤던 아옌데, 보리치 비추는 거울   보리치 당선인과 비교된다는 아옌데는 어떤 인물이며 어떤 정책을 폈는지를 살펴보면 보리치가 추구하려는 정치적 지향을 파악할 수 있다. 아옌데는 오랫동안 죽음과 어두움으로 점철됐던 칠레 현대사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아옌데는 1970년 11월 중남미에서 최초로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한 좌파 정치인이다. 아옌데의 좌파 정권을 1973년 9월 미국의 지원을 음양으로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국방부 장관이 군사쿠데타로 무너뜨리면서 칠레의 정치적 비극이 시작됐다.   소아과 의사 출신인 아옌데는 1970년 9월 대통령 선거에서 칠레사회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며,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공산당의 대선 후보였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후보 단일화를 이뤄 좌파 대중연합의 나섰다.   아옌데는 우파 국민당의 호르헤 로드리게스 후보와 팽팽한 접전 끝에 36.6%를 득표해 승리했다. 35.4%를 득표한 로드리게스와의 표차가 3만9338표에 지나지 않은 초박빙 선거였다. 과반 득표자가 없어 헌법에 따라 의회 투표를 거쳐 아옌데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칠레에서 대선결선 투표는 2012년 도입됐다.   그렇게 집권한 아옌데가 과감하게 진보정치를 펼쳤다. 외국자본을 추방하고 구리광산과 금융업체를 비롯한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다. 토지의 4분의 1에서 5분의 1을 국유화했다. 그렇게 확보한 재정으로 교육을 확대하고 빈곤층에 일자리를 만들어줬다.   어린이에게는 우유를 무료로 급식했다. 정부 재원으로 극빈자들에게 식료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가동됐다. 이런 프로그램 덕분에 영양실조 환자는 17%가 줄었다.   5만5000명의 자원봉사자를 가난한 남부에 보내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오랫동안 사회의 아웃사이더였던 원주민을 사회에 통합하는 교육‧연금 등 프로그램도 도입됐다.   12만 채의 주택 건설에 나서면서 대규모 고용을 촉진했고, 이를 위해 고용된 건설노동자들에게 사회보장을 제공했다. 빵 가격을 고정하고, 원가에 연동한 전기요금 인상 계획을 철회했다.   블루컬러를 위한 최저임금은 1971년 첫 분기에 56%를 인상했다. 같은 시기 화이트컬러의 평균 임금은 23%가 올랐다. 이를 통해 화이트컬러와 블루컬러의 평균임금 격차가 1970년 49%에서 1971년 35%로 줄었다.   1971년 평균임금이 22.3%가 올랐음에도 인플레이션율은 1970년 36.1%에서 1971년 22.1%로 오히려 줄었다. 중앙정부 지출은 36%가 증가해 국내총생산(GDP)의 21%에서 27%로 늘었다.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3년 동안 공공주택 건설은 매년 평균 5만2000채에 이르렀다.     ━   경제정책 실패에 쿠데타로 최후 맞은 아옌데   경제원칙을 무시한 조치로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가격 통제에서 많은 문제가 생겼다. 대표적인 것이 수요-공급의 법칙을 무시하면서 생긴 공급과 물자 부족 현상이 전국으로 파급됐다. 슈퍼마켓의 선반은 텅 비었다.   인플레이션이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가격을 고정하고, 급여를 올리면 국민이 풍요롭게 살 것이라는 아옌데의 확신은 경제법칙 앞에 무력화했다. 생필품인 쌀, 콩, 설탕, 밀가루를 거래하는 암시장이 곳곳에서 판을 쳤다. 토지 몰수 등을 추진한 아옌데의 경제정책에 토지 소유주와 고용주들, 사업가들, 소상인들, 공무원들이 대대적으로 반발했다.   시기도 좋지 않았다. 베트남전쟁에 개입한 미군이 1969년부터 병력 감축에 들어간 데 이어 1973년 1월 27일 북베트남 등과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월 19일 베트남 전쟁 종전을 선언했다. 3월 29일엔 미군이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구리가 필요한 포탄과 탄약의 수요가 급감하면서 구릿값이 폭락했다.   칠레는 지금도 세계 최대의 구리 생산국이다. 미국 지질 서베이에 따르면 2020년 전 세계의 구리 생산량은 2000만t로 그 중 칠레에서 570만t이 나왔다. 생산량 2위인 페루가 220만t, 3위인 중국이 170만t, 민주콩고공화국(DRC)이 130만t, 미국이 120만t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물량이다.   칠레는 구리 매장량도 세계 1위로 2억t에 이른다. 현재 칠레 전체 산업의 10%를 광업이 차지하고, 광업 생산액의 90%를 구리에서 얻는 칠레 경제의 특성상 구릿값 폭락을 경제 불안을 부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1973년이 되자 인플레율이 140%로 치솟았다. 해외투자가 끊겼는데, 정부 지출이 늘었기 때문이다. 경제는 –5.6%의 역성장을 기록하며 뒷걸음쳤으며, 정부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파는 군사 쿠데타를 부추겼다. 미국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은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이를 지원했다. 아옌데 본인이 임명한 국방부 장관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주도했다.   아옌데는 쿠데타가 시작된 직후 대통령 관저인 모데나 궁에서 라디오 생방송으로 국민에게 작별 연설을 전했다. 아옌데는 그 암울한 순간에도 희망을 강조했다. “내 나라의 노동자들이여, 나는 칠레와 그 운명에 대한 신념이 있습니다. (중략) 이 어둡고 쓰라린 순간은 극복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자유인들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위대한 시대가 다시 열릴 것입니다.”   쿠데타군은 도주로를 열어주겠다고 아옌데를 회유했지만, 그는 연설 직후 경호원들에게 투항을 지시하고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AK-47 자동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 소총에는 ‘방법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은 친구 살바도르에게, 피델로부터’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무장혁명으로 정권을 탈취한 카스트로가 선거로 당당히 정권을 차지한 동지에게 보낸 글이었다.   아옌데 지지자들은 그의 자살을 믿지 않았다. ‘직접 소총을 들고 쿠데타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쿠데타 병력이 체포한 뒤 총살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아옌데는 ‘순교자’로 받들어졌다. 하지만 민주화가 이뤄진 뒤 재조사에서도 아옌데는 달아나지 않고 대통령으로서 스스로 최후를 맞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렇게 자신의 신념을 위해 스스로 희생한 아옌데는 칠레가 민주화되고 피노체트 일당이 군사정권 당시의 반인륜적 범죄로 단죄되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1990년 민주화 이후 칠레는 아옌데의 정책을 다시 실시하는 대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복지를 가미한 새로운 정책으로 경제발전과 사회통합을 이뤄가고 있다. 아옌데의 분배 중심 정책은 오히려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에서 계승됐다. ‘아옌데 시즌2’가 본국인 칠레가 아닌 베네수엘라에서 펼쳐진 것이다.     ━   민주화 뒤 겉은 안정, 속은 곪았던 칠레   중도 정책을 취한 칠레는 경제는 어느 정도 안정됐지만 속으로 곪아왔다. 전체인구의 1%인 부유층이 전체 국부의 25%를 소유하면서 빈부 격차가 심화했다. 이는 2019년 대규모 시위로 표출됐다. 2019년의 칠레 대형 시위는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한때 경제 발전과 민주화 모두에서 남미의 모범으로 평가받던 칠레가 2019년 11월 16~17일 세계 21개국 정상이 참여해 수도 산티아고에서 열릴 예정이던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시위 사태로 취소했기 때문이다. 세비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10월 30일 APEC 정상회의 취소를 발표했다.   칠레가 야심차게 준비해왔던 다자외교 행사를 취소할 정도로 급박한 형편이 된 외형적인 이유는 공공 지하철 요금 인상에 따른 국민의 시위사태였다. 그해 10월 25일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인 120만 명이 수도 산티아고에 몰리고 사망자가 20명에 이르는 등 칠레는 민란 수준의 통제 불능 시위 사태를 겪었다.   그 배경으로 ‘고인물 권력’을 지목할 수 있다. 칠레는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의 좌파 정권은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73~81 군사정권, 1981~89 권위주의 민간정부 대통령)가 쿠데타로 이를 전복했다. 하지만 칠레 국민은 끈질긴 투쟁으로 1989년 피노체트 정권을 몰아내고 이듬해 민주화를 이뤘으며 이후 안정과 민주화, 경제 성장을 구가해왔다.     ━   보리치, ‘그들만의 정치’에 신음하는 칠레 구할까   문제는 2006년 이후 좌·우파 회전문 권력으로 부정부패와 정권의 독선을 감시할 건전한 비판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칠레는 대통령이 중임은 할 수 있지만, 연임은 할 수 없다. 한 정치인이 대통령을 연속 두 차례 지낼 수는 없지만, 한 임기를 쉬면 그다음 선거에 다시 나올 수 있다. 칠레에선 이 제도를 이용해 좌·우파에서 같은 인물이 대통령을 번갈아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좌파에선 미셸 바첼렛(2006~2010년, 2014~2018년 재임), 우파에선 세바스티안 피녜라(2010~2014년, 2018년~현직)가 이렇게 대통령을 맡아왔다. 그러자 문제가 발생했다. 유권자를 겁내지 않는 고인물 권력층이 형성됐으며, ‘우리끼리 정치’ ‘그들만의 정치’가 판치기 시작했다.   피녜라의 우파 정권의 경우 지난 정권의 마지막 법무장관이 현 정권에서 외무장관을 맡는 등 좁은 인재풀에 고위 공직이 기득권층의 자리 돌리기로 메워졌다. 결국 정치는 소수 엘리트 정권의 파당 정치에 빠졌고, 정치와 정책은 진영 논리에 빠졌다. 이들은 정치인과 대중 간의 괴리를 불러왔다.   결국 이번 시위 사태를 부른 지하철 요금 인상은 도화선일 뿐 실제 원인은 대중과 좌우 기득권층의 해묵은 대립인 셈이다. 지하철 요금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하자 경제 장관이 “조조할인을 이용하라”고 막말을 하면서 사태에 기름을 부은 것도 민심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권력’의 실체를 보여준 사례로 지목된다.   결국 국민을 겁내지 않고 쉽게 권력을 차지한 정치인들이 국민의 목소리 듣지 않고 자신들이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다 끝내 분노한 대중으로부터 대규모 시위라는 강펀치를 맞은 셈이다. 결국 APEC 취소에 이른 칠레 민란 배경은 ‘고인물 권력’인 셈이다.   이 시위로 피녜라 대통령은 2020년 10월 25일 ‘새 헌법을 원하는가’와 ‘누가 새 헌법을 제정해야 하는가’를 각각 묻는 국민투표를 했다. 그 결과 투표자의 78.28%가 새 헌법을 원했으며, 78.99%가 의회와 제헌 기구가 혼합하는 대신 제헌의회를 구성해 헌법을 새로 작성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에 따라 지난 5월 15~16일 제헌의회 선거가 이뤄져 43.43%의 투표율로 155석의 의석 중 중도좌파 바모스 포르 칠레가 37석(20.6%), 좌익 성향의 아프루에보 디그니다드가 28석(18.7%), 무소속연합인 인민리스트(16.2%)가 26석,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리스타 델 아프루에보가 25석(14.5%), 비중도 무소속이 11석(8.3%), 기타 무소속이 11석(15.5%)을 각각 얻었다.   좌도 우도 독단으로 새 헌법을 제정하기 힘든 분포다. 이런 분포의 제헌의회는 7월 4일 개원해 새 헌법을 제정하고 있다. 내년 7월에 제정이 완료되면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될 예정이다.   보리치 당선인은 칠레의 고질적인 경제 양극화를 치유하면서 제헌 과정을 관리해야 하는 책무를 떠맡았다. 보리치가 3월 취임하고 새 헌법이 7월 이후 확정되는 2022년은 칠레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한 해가 될 수밖에 없다. 청년 대통령 보리치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인사이트 당선인 남미 칠레 대선 결선투표 가브리엘 보리치

2021-12-25

외교에서 파열음 내는 자칭 외교전문가 바이든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미국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외치에서 계속해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미 연방상원 외교위원장 출신으로 자타가 공인한 ‘외교전문가’인 바이든이 대통령에 취임한 첫해인 올해 외치에서 의외로 삐걱거리는 모습이다. 베이징 겨울 올림픽에 대한 정치적 보이콧(boycott·거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 무산, 이란과의 이란핵합의(JCPOA) 복귀 협상 지지부진, 예멘 내전 지원 중지를 둘러싼 사우디아라비아 무기금수로 인한 중동 수니파 국가들의 싸늘한 시선 등 바이든의 외교적 실책은 그치지 않고 있다. 기존 서방 국가와의 형식적인 동맹 강화를 제외하고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사안이 미‧중 경쟁이 가속하는 가운데 바이든이 주도한 베이징 겨울 올림픽에 대한 정치적 보이콧이다. 정치적 보이콧은 올림픽에 선수단은 대회에 파견하지만, 그간 관행적으로 보내오던 정부나 정치권 사절단은 파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   효과 검증되지 않은 미국의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카드   바이든은 11월 15일(현지시각)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3시간 20분 동안 화상 정상회담을 하며 대만과 위구르 등의 사안을 놓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그 직후 2022년 베이징에서 열리는 겨울 올림픽에 미국이 외교적 보이콧을 검토 중이라는 말이 나왔다. 12월 6일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이 브리핑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의 지속적인 신장 위구르 소수민족 학살과 반인도 범죄 등을 고려해 베이징 겨울 올림픽과 패럴림픽에 어떠한 공식적‧외교적 대표단도 보내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하면서 미국의 베이징 겨울 올림픽 외교적 보이콧을 공식화했다.   미국이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하자 미국의 동맹국들이 줄지어 동참하고 있다. 8일엔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가 의회에서 “장관이나 정부 인사가 베이징 올림픽에 참석하지 않아 ‘사실상’ 외교적 보이콧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호주가 동참하면서 대중국 안보 동맹인 오커스(AUKUS‧미국‧영국‧호주) 전체가 힘을 합쳤다. 뉴질랜드에 이어 캐나다도 동참하면서 미국의 군사 동맹 및 정보 공유 네트워크인 파이브아이즈(Five Eyes: 미국‧영국‧호주‧뉴질랜드‧캐나다)의 모든 회원국이 행동을 통일했다.   이 가운데 호주는 동맹 차원을 넘어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중국과 관계가 악화했다. 외교적 갈등을 벌인 뒤 중국이 호주산 와인‧쇠고기‧석탄 등을 수입 금지하면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중국은 호주산 석탄 수입 금지 뒤 자국산 석탄 생산 감소 등으로 전력 생산에 차질을 빚어 산업체의 가동 중단 사태를 빚었다. 이 때문에 중국이 외교적 문제를 경제를 무기로 풀려다 외려 역풍을 맞았다는 비판이 있었다.   호주는 오커스를 결성하면서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추진 잠수함 기술을 이전받기로 하면서 중국과 새롭게 각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와 기존 계약했던 디젤 잠수함 계약을 파기하면서 프랑스와 미국, 프랑스와 호주가 새롭게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를 추진한 것은 중국을 억제하려는 미국과 호주의 강력한 의지가 뒷받침됐기 때문으로 분석할 수 있다.   미국 백악관은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중국의 인권 탄압을 저지르는 상황에서 베이징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국제정치의 ‘규범’보다 ‘도덕률’을 앞세운 셈이다. 뉴질랜드는 자국의 정치적 보이콧이 이러한 중국의 인권문제가 아닌 코로나19를 비롯한 안전상 이유에 무게를 실은 조치라고 주장했다. 미국 주도의 동맹 행동 통일에 동참은 하지만 중국과 각을 질 이유는 없다고 판단한 셈이다.   이처럼 베이징 겨울 올림픽에 대한 정치적 보이콧은 동맹국을 결집하는 효과 외에는 역효과가 더 많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올림픽에 대한 정치적 보이콧은 인류의 축제를 정치에 이용한다는 비난을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럽의 미국 동맹국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중국을 비난해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중국의 인권이 글로벌 차원의 문제이긴 하지만 이를 이유로 올림픽 가치를 침해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의 인권문제를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정치적 보이콧으로 해결하거나 완화하는 것은 기대난망이다. 그야말로 미국이 인권 침해 국가인 중국에 압박을 가했다는 홍보를 위한 일회성 이벤트 정도의 의미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올림픽 보이콧, 그것도 선수단 자체를 파견하지 않는 전면 보이콧으로도 의도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사례도 없다. 외려 비난만 자초하고 부작용만 불렀을 뿐이다. 당하는 나라 입장에선 잠시 명성에 먹칠을 할 뿐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부르거나 큰 망신을 부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   세 차례에 걸친 올림픽 보이콧의 잔혹사   올림픽 보이콧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사실 올림픽에선 외교적 보이콧은 이번이 처음이고, 과거에는 아예 불참하는 전면 보이콧이 크게 세 차례 있었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 때는 27개국이 불참했다. 당시 뉴질랜드가 반인륜적인 아파르트헤이트(흑백 인종 분리) 정책으로 국제 제재를 받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서 경기를 치른 게 문제였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뉴질랜드의 몬트리올 대회 참가를 금지하지 않자 상당수 아프리카 국가와 이라크 등이 올림픽에 등을 돌렸다. 결국 보이콧에 동참한 29개국을 뺀 92개국 6084명만 참가해 대회가 열렸다.   1980년 모스크바 대회는 1956년 이후 가장 적은 80개국 5179명 참가에 그쳤다. 소련이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의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이 올림픽 보이콧을 주도했다. 인권 외교를 앞세웠던 카터 대통령이지만 동서 냉전 상황에서 올림픽을 정치에 이용해 미국은 물론 서방 진영 거의 전체의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도록 했다.    결국 한국을 포함해 서방 진영 66개국이 불참했다. 참가국 중에서도 13개국은 국기 대신 올림픽기를 앞세웠고, 3개국은 국가올림픽 위원회기를 들고 각각 입장했다. 소련에 대한 무언의 시위였다. 소련은 끝없는 소모전 끝에 1989년 2월 아프가니스탄을 떠났다. 천문학적인 군사비로 인한 재정난은 공산주의 체제의 근본 모순과 함께 1991년 12월 25일 소련이 몰락한 원인의 하나로 꼽힌다.   이어 열린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선 반대로 소련이 보복 보이콧에 나섰다. 하지만 북한·아프가니스탄·베트남 등 14개국만 소련의 올림픽 보이콧에 동조했을 뿐이다. 로스앤젤레스 대회엔 140개국 6829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소련으로선 초라한 외교 실적이다. 당시 경제난과 무슬림 국가인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국제사회에서 세력이 밀린 소련의 현실만 각인시켰을 뿐이다.   이처럼 몬트리올·모스크바·로스앤젤레스 대회는 올림픽을 정치로 얼룩지게 한 행사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런 이벤트로 보이콧 주도 세력이 바라는 정치적 목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올림픽을 정치적 제스처 기회로 활용해 전 세계에 자신들이 원하는 홍보를 했을 뿐이다. 보이콧은 결국 홍보 행사였던 셈이다.   이어 열린 1988년 서울 대회는 오랜만에 전 세계가 모두 함께한 올림픽으로 평가된다. 서울올림픽이 역사상 가치가 있는 대회인 이유다.   올림픽을 테러의 볼모로 잡는 불행한 사건도 있었다. 1972년 뮌헨 대회는 중동의 모순과 폭력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당시로선 적지 않은 72개국 7170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지만, 대회 기간 중 비극적인 뮌헨 참사가 터졌다.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인 검은 9월단의 무장대원들이 선수촌에 침입해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인질로 잡았다가 전원을 살해했다. 경기는 인질극이 시작되면서 전면 중단됐으나 사건이 종료되자 재개돼 폐막식까지 마쳤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올림픽을 계속해야 한다는 인류의 의지를 보여준 대회로 평가된다.   주목할 점은 바이든이 베이징 겨울 올림픽 정치적 보이콧의 깃발을 올려놓은 직후인 12월 9일 첫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주관했다는 사실이다. 이 정상회의는 한국·일본을 비롯한 110개국이 참석한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들이 모이는 거대한 회의다. 중국과 러시아 등 권위주의 체제에 맞서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함과 단결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대회를 여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이 정상회의는 반중‧반러 국제행사가 됐다.     ━   바이든, 러시아 마음을 사는 대신 중국의 불만을 사다   바이든은 12월 7일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화상 정상회담을 열고 치열한 설전을 주고받았다. 바이든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경우 초강경 대응에 나설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푸틴은 우크라이나 긴장 사태의 원인을 러시아에만 돌리지 말라며 맞받아쳤다. 이는 미국 주도의 군사동맹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러시아와 국경을 2000㎞나 맞댄 우크라이나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비난하면서 이를 철회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바이든은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해상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인 노르트스트림2를 폐쇄할 수 있다는 위협으로 푸틴을 압박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동맹국인 독일의 반발을 살 수 있는 사안이다. 유럽은 최근 신재생 에너지의 불안정으로 대체 발전소 연료인 천연가스의 가격이 오르고, 원자력으로 다시 눈을 돌리는 등 에너지 믹스의 전환기를 맞고 있다.   바이든과 푸틴은 121분간 정상회담을 하며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 백악관은 “명확하고 직접적이며 솔직한 대화가 오갔다”고 발표했다. 직접적이고 솔직한 대화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에 대한 심각한 비난이 오갔음을 의미하는 외교적 수사다. 뉴욕타임스(NYT)는 “냉전 시대의 동서 정치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바이든은 오랫동안 중국과 힘을 합쳐왔던 러시아를 중국에서 분리하려고 시도했지만 지난 6월 미‧러 정상회담에 이어 12월 7일 화상 정상회담에서도 우크라이나 사태를 두고 팽팽히 맞섰을 뿐이다. 어디에서도 바이든의 외교적 실력은 찾기 힘들다.   주목할 점은 바이든이 베이징 겨울 올림픽 정치적 보이콧의 깃발을 올려놓은 직후인 12월 9일 첫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주관했다는 사실이다. 이 정상회의는 한국·일본을 비롯한 110개국이 참석한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들이 모이는 거대한 회의다. 중국과 러시아 등 권위주의 체제에 맞서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함과 단결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대회를 여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이 정상회의는 반중‧반러 국제행사가 됐다.   이를 여는 목적은 미국 국내정치에는 지난 1월 6일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회를 점거하면서 미국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지적을 불식하고, 대외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돌아왔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미·중 전략 경쟁에서 세력을 과시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민주주의 정상회의는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공약이다. 취임 11개월 만에 실행에 옮겼다. 바이든의, 바이든에 의한, 바이든을 위한 국제 행사로 볼 수 있다. 바이든은 이 정상회의에서 기본적 자유와 법치·인권·젠더·평등으로 무장한 민주주의가 세계적 도전과제에 맞서기에 더 적합하다는 주장을 펼치는 걸 노렸지만 이를 계기로 미국과 중국‧러시아와의 간극과 갈등을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눈에 띄는 것이 대만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중국의 반대에도 대만이 이 회의에 초청받았다는 사실이다. 중국이 불쾌감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폴란드처럼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았지만, 미국에 필요한 나라도 이번 대회 참가국에 포함됐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를 두고 “대회가 개막도 하기 전에 손쉬운 비판 거리를 안겼다”고 지적했다.    이 회의에는 국가 정상은 물론 시민사회단체와 민간기업의 수장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석한다. 세계 민주주의 포럼이자 반중‧반러 심포지엄인 셈이다. 이젠 시민단체와 민간기업도 미‧중 경쟁에서 편을 골라야 할지 모르는 시대가 됐다.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는 심각한 갈등 시대를 예고하다. 이 행사가 끝난 뒤 미국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G7 외교부 장관 회의를 거쳐,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을 방문해 반중 전선 강화를 시도할 예정이다.     ━   사우디·UAE는 무기 수입선 다변화 나서   미국은 중동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셰일가스 생산으로 에너지를 자립하게 된 미국으로선 중동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이 감소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전환 과정이 매끄럽지 못해 미국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 8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재앙적인 철군과 대피 사태를 겪은 데 이어 바이든의 대선 공약인 이란과의 이란핵합의(JCPOA) 복귀 협상도 트럼프 대통령 시절 일방적으로 탈퇴했던 미국이 경제 제재부터 풀어 먼저 신뢰와 성의를 보여 달라는 이란의 완강한 입장에 막혀 진퇴양난에 빠져있다.   인도주의 참상을 보여주는 예멘 내전도 바이든은 취임 직후인 2월부터 이 전쟁에 주도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지원 중단과 외교적 해결을 촉구하고 무기 금수 조치까지 취했지만 아무런 변화를 이끌지 못하고 있다. 예멘의 후티 반군이 발사한 탄도미사일 공격을 수시로 받는 사우디아라비아는 미사일 요격용 미사일 물량을 확보하려고 러시아 등 다양한 나라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주도의 수니파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아랍에미리트(UAE)는 병력을 대거 빼는 바람에 미국의 무기 금수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제재와 미 의회에서의 무기 수출 승인 지연 등을 겪으면서 호된 시련을 경험했던 UAE는 한국에서 탄도미사일 요격용 미사일인 천궁2 도입을 추진하고 프랑스에서 라팔 성능개량형 F-4 모델 80대와 카라칼 수송 헬기 12대 등의 구매계약을 하는 등 무기 수입선 다변화에 나서고 있다.    이는 프랑스가 2004년 라팔 수출에 나선 이래 최대 규모의 계약이다. 미국이 사실상 손을 뗀 중동에 프랑스가 새롭게 진출하는 모양새다. 이에 따라 미국은 그동안 중동 국가들을 자국 편으로 묶어두는 데 요긴하게 사용했던 무기 수출과 제공 전략에서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게 됐다.   외교전문가라는 바이든 행정부 시대에 미국의 외교는 갈수록 혼미에 빠지고 있다. 바이든은 내년 중간선거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고의 외교 전략가라는 블링컨 국무장관과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은 바이든 행정부를 이러한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시킬 것인가.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외교전문가 인사이트 정치적 보이콧 베이징 올림픽 외교적 보이콧

2021-12-14

천궁-II로 바라본 격변의 중동과 한국의 기회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중동에서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항공기와 크루즈 미사일은 물론 고속으로 날아오는 탄도미사일도 떨어뜨릴 수 있는 한국산 요격 미사일인 ‘천궁-II’를 중동국가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하게 됐다는 소식이다.   UAE 국방부는 11월 16일(현지시각) 트위터 공식 계정에서 “한국산 중거리 지대공 미사일(M-SAM)을 구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계약 규모는 35억 달러(약 4조1370억원) 상당”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인 액수까지 공개하면서 무기 구매 내용을 밝히는 것은 이례적이다. UAE에는 그만큼 절실한 구매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   2017년부터 시작한 천궁-II UAE 수출의 막전막후    UAE가 수출 계약을 하겠다는 무기체계는 ‘천궁-II’라는 게 한국 국방부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UAE가 사가겠다는 ‘천궁-II’는 도대체 어떤 무기체계인가. 중거리 지대공 대공미사일(M-SAM)로 분류되는 이 무기체계는 최대 사거리 40㎞로, 그 범위 안에 들어온 적 항공기와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다. 사격통제소, 다기능레이더, 3대의 발사대 차량 등으로 1개 포대를 이룬다. 발사대 하나 당 8발의 요격 미사일을 탑재한다. 한국판 패트리엇 미사일로 볼 수 있다. 통상 적 항공기 격추는 다른 무기체계에 맡기고, 가격이 훨씬 비싼 ‘천궁-II’는 탄도미사일을 떨어뜨리는 데 배치하는 게 기본이다.   ‘천궁-II’는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주도해 LIG넥스원 등과 공동 개발했다. 항공기 격추용 지대공 미사일 ‘천궁’의 개량형으로 탄도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어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 체계의 중추를 맡고 있다. 5년에 걸쳐 개발됐으며 2018년 생산에 들어갔다. 2020년 11월 한국군에 인도돼 전력화가 이뤄졌다.   국내에서 개발하거나 군이 납품받는 무기 체계는 국방기술품질원(기품원)의 시험과 검사를 받는다. 올해 7월과 8월 ADD의 안흥시험장에서 ‘천궁-II’를 이용해 탄도미사일과 항공기를 떨어뜨리는 시험을 한 결과 모두 표적에 모두 명중했다는 것이 국방부의 설명이다. 요격 무기체계의 핵심인 명중률에서 합격점을 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UAE는 새로운 무기체계인 ‘천궁-II’를 어떻게 알고 이토록 신속하게 구매를 추진한 것일까. 여기에는 비밀이 있다. 시간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그해 12월 9~12일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UAE를 방문했다. 형식적으로는 2011년부터 UAE에 파견돼 UAE 군인들을 훈련 중인 한국군 군사훈련협력단, 일명 아크 부대를 격려 방문하는 게 임무였다. 아크 부대는 특수작전 교육·훈련 파견대로, 육군 특수전사령부에 배속돼 있지만, 합동참모본부의 지휘·통제를 받는다. 특수전·대테러전·해상작전 등을 교육한다. 임 당시 실장은 아크 부대 방문에 이어 레바논에 들러 현지에 파병된 동명부대를 격려한 뒤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임 실장의 방문 목적에는 비밀이 하나 포함돼 있었다. 2017년 12월 26일 중앙일보는 당시 임무를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 정부가 아랍에미리트(UAE) 정부와 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포함한 첨단무기체계 분야에서 방산 협력 강화를 추진 중이라고 25일 UAE 수도 아부다비 현지에서 접촉한 소식통이 전했다”   이 소식통은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 체계의 하나로 개발 중인 ‘미사일 요격 시스템’의 UAE 현지 테스트를 포함한 양국 국방 협력 논의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군은 북한 미사일 도발 위협과 관련해 ▶발사 전에는 킬체인(한국형 공격형 방위 체계) ▶발사 이후에는 KAMD를 통한 요격 ▶미사일 타격 피해 이후에는 KMPR(대량응징보복) 등 3축 체계의 조기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3축 체계 가운데 KAMD는 저층에서 요격하는 미국산 패트리엇 시스템(PAC-2·PAC-3 등)과 국산 지대공(地對空)미사일(M-SAM, 천궁 개량형), 중·고도에서 저지하는 장거리 지대공미사일(L-SAM)로 구성된다.   이 중 KAMD와 관련해서 한·UAE 간 협력이 가능한 분야로는 고도 20~40㎞에서 적의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지대공 미사일(M-SAM)이 꼽힌다. KAMD의 핵심 무기 체계인 데다 지난달 한국 방위산업추진위원회에서 양산에 돌입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고도 60㎞까지 방어하는 장거리 지대공 미사일은 2022년을 목표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어 아직 초기 단계다.   아부다비 현지 소식통은 특히 “한국·UAE 간 미사일 방산 협력은 거의 막바지”라며 “한국이 추진하는 KAMD의 핵심인 요격 미사일의 현지 테스트를 UAE에서 하는 논의가 물살을 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미사일 시험장은 UAE의 넓은 사막지대보다 좁고, 인근 주민들의 소음 피해도 우려되지만, UAE는 입지가 좋고 미국산 요격 미사일인 패트리엇의 실제 운용 경험도 풍부하다”고 밝혔다.   요격 미사일과 관련해 정부 핵심 관계자도 “중거리 지대공 요격 미사일은 국내 시험단계만 거쳤다”며 “UAE에서 적외선 센서 테스트 등을 받게 되면 해외 진출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방산업체의 관계자는 “정부가 요격 미사일의 성능 테스트 등을 UAE와의 핵심 방산협력 차원에서 추진하는 것은 맞다”며 “다만 현재 진행 상황이 어디까지 왔는지는 파악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중동 국가와의 방산협력은 특히 민감한 사안이어서 양국 정부가 공식 확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지난 11월 4일 UAE를 방문했던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귀국 사흘 뒤인 7일 중거리 지대공 미사일을 양산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수정했다. 당초 송 장관은 “요격 미사일보다는 공격용이 중요하다”며 “중거리 지대공 미사일 등의 양산을 재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가 시기적으로 UAE 방문 이후 입장을 선회했다”고 말했다.     ━   예멘 내전이 도화선 된 천궁-II UAE 수출   천궁-II의 UAE 수출은 이처럼 지난 2017년부터 추진된 것으로, 이번 구매계약 추진 발표는 당시 보도를 새삼 확인해준 것이 됐다. UAE에 요격미사일 시험장을 건설하는 방안과 관련, 사막으로 이뤄진 UAE 서부와 남부의 넓은 무인지대는 요격미사일 시험과 성능 평가에 유리한 입지로 평가됐다. 그 뒤 개발이 완료되고 성능시험과 전력화까지 마치면서 본격적인 수출 궤도에 오르게 됐다. 그 과정에서 UAE는 천궁의 가치를 확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UAE 지대공 미사일 사업에서 한국이 이스라엘과 경쟁해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쉽게 확인할 수도 없다. UAE는 지난해 이스라엘과 수교하고 올해 초 대사를 교환했지만, 이스라엘과는 경제 협력과 유전 경비 등을 담당할 보안업체와의 협력에 치중하는 분위기다. 이스라엘산 무기를 살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과 본격적인 군사협력에 들어갈 경우 자칫 중동 지역에서 과격파나 무장단체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UAE와 한국은 2009년 한국형 원전 APR-1400 도입 계약을 맺으면서 가까워졌다. UAE 서쪽 바라카에 4기의 원전을 건설하는 계약이다. 2018년 3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1호기가 준공돼 전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UAE는 원전 보유국이 됐으며, 장기적으로 탈탄소 녹색 산업 혁명을 위한 초석을 놓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기술력, 추진력, 생산성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바라카 1호기는 세계원전 건설 사상 드물게 원래 예정된 예산에서 추가 없이, 원래 잡았던 시간 일정에서 차질 없이 완성된 원전으로 기록된다.   그렇다면 UAE는 왜 한국산 원전에 이어 한국산 요격 미사일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일까. 여기에도 뿌리 깊은 사연이 있다. UAE는 2015년 4월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예멘 내전에 참전했다.   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와는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아랍에미리트와는 떨어져 있다. 예멘에선 이슬람 수니파인 압둘라 만수르 하디 대통령이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후티 반군에 밀리자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UAE는 이집트·쿠웨이트 등과 함께 수니파 연합군을 조직해 내전에 뛰어들었다.   이로써 예멘 내전은 내전을 넘어 국제 분쟁으로 비화했으며, 주민들에겐 인도주의적 재앙으로 이어지고 있다. 예멘 내전에서 폭격과 전투 등으로 민간인을 포함해 1만 명 정도가 숨지고 수백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840만~1300만 명이 아사 위기에 처했다는 게 외신들의 보도다.   유엔은 예멘이 지난 100년 이래 인류가 처한 최악의 기근을 겪고 있다고 우려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을 봉쇄하고 기아를 전술의 하나로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미국의 후버 연구소는 2015년 12월 사우디가 하루 2억 달러의 전비를 지출하고 있다고 추산했다. 그중에는 예멘 후티 반군의 탄도미사일 공격을 차단하는 요격 미사일 운용도 포함된다. 실제로 후티 반군은 이란에서 공급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탄도미사일을 사우디아라비아로 수시로 발사하고 있다. 후티 반군이 발사한 탄도미사일이 국경에서 1200㎞ 떨어진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 공항 근처까지 날아왔다가 패트리엇 미사일에 의해 요격됐다. 지금도 리야드 상공에선 수시로 하늘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게 관계자의 전언이다. 사우디아라비아군의 패트리엇 미사일이 후티 반군이 발사한 탄도 미사일을 요격하는 소리가 아니면 그런 소리가 하늘에서 들릴 가능성이 희박하다.     ━   미국 무기 수출 금지 공백 메운 한국산 무기     후티 웹사이트는 “UAE에 한국이 짓고 있는 200억 달러짜리 원전을 겨냥해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는 내용을 올리기도 한다. 선전술의 일부지만 UAE로서는 위협에 대항할 수 있는 다양한 방어 시스템을 충분히 갖출 필요가 있다.   페르시아만(아라비아만) 건너 이란의 탄도미사일 전력도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를 위협하는 주요 요인이다. 게다가 사우디아라비아 유전의 상당수와 UAE 유전의 대부분은 이 바다에 있는 해상 유전이다. 2019년 9월 14일 새벽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시설 두 곳이 드론 공격을 받아 마비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브카이크 탈황시설과 쿠라이스 유전이 10대로 알려진 드론 떼의 자폭 공격으로 손상되면서 이 나라의 석유 생산 규모는 일시 반 토막이 났다. 시장 가격 1만 달러(약 1200만원) 남짓한 드론 10대가 중동 최대 산유국의 석유 생산에 상당한 타격을 가한 것이다.   미사일의 타깃에는 대도시나 원전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와 UAE의 해상유전도 포함된다. 현지 관계자에 따르면 이 지역에선 점점이 흩어진 섬 사이로 인공 섬을 건설하고 파이프를 연결해 원유를 채취, 운송, 정유하고 있다. 만일 이 지역에 미사일이 떨어지면 자칫 유전 지대가 불바다가 되거나 상당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날 가능성이 크다.   이란의 전력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이란이 도발할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대응 전력을 갖출 수밖에 없다. 요격 미사일 수요가 제기된 이유다.   게다가 사우디아라비아는 후티 반군의 탄도미사일 공격을 미국산 패트리엇 계열의 요격미사일로 차단해왔는데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뒤 무기 수출을 막고 있다. 예멘에서 벌어지는 인도주의 참상을 해결하기 위해선 전쟁부터 멈춰야 한다는 게 미국의 주장이다. UAE는 무기 금수 대상은 아니지만, 패트리엇 미사일을 비롯한 미국산 무기를 마음껏 사들일 수 없다. 미국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공급받을 수 있다.   UAE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도 한국산 ‘천궁-II’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 한국으로선 국제 전략적 이유나 지정학적 가치의 하락 등으로 중동에 관심이 줄어든 미국을 대신해 중동에 첨단기술 제품 공급자로 등극할 기회다. 미사일뿐 아니라 한국산 고등훈련기인 T-50과 이를 개량한 초음속 다목적 경공격기 FA-50, 한국산 헬기인 수리온·마린온, 구축함·잠수함·고속정 등을 공급할 기회다. 그뿐만 아니라 주요 시설 안전을 위한 보안시스템·CCTV·무인감시장치 등 다양한 수요가 있다.    중동에는 천문학적인 국방과 보안 수요가 있지만, 자체 생산 능력은 떨어진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왕세자가 2019년 6월 방한했을 당시 ADD를 비공개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이 연구소를 통째로 사 갈 수 있을까”라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체 연구개발로 기술력도 배양하고, 미 행정부의 간섭이나 미 의회의 승인 없이 필요한 무기체계를 마음껏 확보하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 새로운 시대가 한국 앞에 대기하고 있는 셈이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인사이트 글로벌 한국형 미사일방어 탄도미사일과 항공기 지대공 미사일

2021-12-04

기시다 총리의 '자기 정치' 시동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64) 총리는 조기에 자기 색깔 정치의 시동을 걸 것인가. 기시다는 9월 29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67) 전 총리의 적극적인 지지와 파벌 간의 밀실 합의를 바탕으로 27대 총재로 당선했다. 당시 1차 선거에서 예상을 뒤집고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곧이어 열린 경선 투표에서 고노 다로(河野太郎·58) 전 외상을 257대 170으로 눌렀다. 1차 투표 1위와 결선 투표 압승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아베의 집념이 바탕이 됐다는 게 정설이다.     ━   기시다 총리, 취임 후 중의원 선거도 자민당 압승 이끌어     10월 4일 총리에 취임한 기시다는 총리 선출 뒤 한 달도 되지 않은 10월 31일 열린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압승을 이끌었다. 전체 465석 가운데 과반인 261석(이전 276석)을 단독으로 확보해 1당 독주 체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자민당이 중의원의 모든 상임위원회에서 위원장 자리를 독식하는 것은 물론 위원의 과반을 장악할 수 있는 ‘절대 안정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 자민당의 연립 여당 파트너인 공명당의 32석을 합치면 293석으로 중의원 전체 의석의 63%를 차지한다. 여기에 기존 11석에서 이번 선거에서 40석으로 의석을 늘린 극우 성향의 일본 유신회가 가세하면 개헌 가능성인 3분의 2를 가뿐하게 넘긴다.   이번 총선은 기시다 총리의 정치적인 성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기시다는 임기 종료를 며칠 남긴 중의원을 관례대로 해산하면서 연 기자회견에서 이번 중의원 해산과 선거의 의미를 ‘미래 선택 해산’ ‘미래 선택 선거’로 이름 붙였다. 해산과 선거에 의미를 붙이는 것은 일본 정치의 전통이다. 그러면서 기시다는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과 ‘(경제의) V자 회복’을 위한 해산과 선거라는 설명을 붙였다.   기시다는 중의원 선거의 핵심 공약으로 대책과 격차 해소를 중심으로 한 경제 공약, 그리고 적 기지 공격 능력 확보라는 외교·안보 강화를 내걸었다. 코로나19는 어느 정권이든 앞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외교·안보 강화 공약은 전전임 아베와 전임 스가 요시히데(菅義偉·72) 전 총리의 정책이지만, 경제에선 분배를 강조하며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했다. 성장에 중점을 두면서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강조했던 아베노믹스와 선을 긋고 차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맞선 제1 야당 입헌민주당은 ‘(자민당) 일강 정치의 종식’을 선거의 목표로 내세웠다. 2012년 12월 아베의 총리 이후 아베가 사실상 총리로 만들다시피 한 스가와기시다에 이르기까지 10년 가까이 계속된 자민당 연속 집권의 폐해를 부각한 것이다.   입헌민주당과 공산당·국민민주당·레이와신센구미·사민당 등 일본의 5개 야당은 선거연합을 이뤄 지역구 289개 가운데 200개 이상에서 후보를 단일화하며 자민당과 공명당으로 이뤄진 집권 연정에 대항하려고 했다. 이들은 선거연합은 이뤘지만 국민민주당이 다른 야당과 달리 평화 헌법 개정과 자위대 합법화 등에서 이견을 보여 정책 연합은 하지 못했다. 국민민주당은 원래 입헌민주당과 한 뿌리였지만, 과거 이 문제로 입헌민주당과 결별한 정당이다. 이렇게 분열을 누출한 야당은 소비세 인하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유권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 이번에 당선한 중의원의 평균 연령이 일본 정당 중 유일하게 60세를 넘는 노쇠하고 반대파가 적지 않은 공산당과 손을 잡으면서 중도 유권자의 이탈을 불렀다는 평가도 나온다.   결국 일본 야권은 입헌민주당 96석, 공산당 10석, 국민민주당 11석, 레이와신센구미 3석, 사민당 1석 등 121석을 얻는 게 그쳤다. 자민당이 이번 중의원 선거에서 단독으로 과반수인 262석을 얻고 집권 연정 파트너인 공민당의 32석을 합하면 294석의 거대 세력을 확보한 것과 대조된다.       ━   아마리 간사장 지역구 낙마…외무상 자리에 하야시 임명   총선 승리로 기염을 토한 기시다 총리는 파벌의 전열을 정비하면서 일본 정계의 킹메이커로 자리 잡아온 아베 총리에 사실상 도전장을 던졌다. 그동안 자민당 간사장으로 당내 2인자였던 아마리 아키라(甘利明·72)가 지역구에서 야당 신인에게 밀려 패배하고 비례대표로 구제되면서 간사장 자리를 내놓은 게 기시다에겐 절호의 기회가 됐다. 집권당 간사장이 지역구에서 낙선한 첫 사례다. 아마리는 아베 전 총리와 아소 다로(麻生太郞·81) 전 총리와 함께 ‘3A’로 불리며 자민당의 실세로 군림해왔다. 지역구 낙선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은 아미리가 물러나면서 기시다는 아베를 필두로 한 3A의 정치적 압박에서 조기에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66) 외무상이 후임 간사장을 맡으면서 외무상 자리가 비었다. 기시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기시다는 후임으로 자신의 파벌 소속인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60) 전 문부과학상을 임명했다.     하야시 신임 외무상은 기시다가 총리를 맡으면서 물러난 자민당 파벌인 고치카이(宏池會)의 좌장이다. 일본 자민당의 파벌은 좌장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게 관례인 만큼 기시다파는 하야시파가 됐다. 이번 총선 전까지 기시다파는 소속 국회의원(중의원+참의원) 숫자에서 자민당 내 5위 파벌이었지만, 이번 총선으로 3위로 올라섰다.     총선 전에는 아베 전 총리가 속한 호소다파(細田派·중의원 61명+참의원 35명=96명), 아소파(麻生派·42+13=55), 다케시타파(竹下派·32+20=52), 니카이파(二階派·37+10=47), 기시다파(岸田派·34+12=46), 이시바파(石派派·15+1=16), 이시하라파(石原派·중의원만 10) 등의 분포였다. 이번 총선으로 기시다파는 50명(중의원 38+참의원 12)을 확보해 호소다파(55+34=89)와 아소파(38+13=51)에 이어 자민당에서 3위의 파벌이 됐다. 기시다는 자신의 파벌을 물려받은 야심만만한 정치인 하야시를 외무상에 임명해 내각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더욱 굳혔다.     기시다가 아마리 간사장의 낙마와 모테기의 승계로 외무상 자리가 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자신의 후계 파벌 수장인 하야시를 임명한 것은 정치적으로 도전이다. 거기에는 내각에서의 기시다파 세력 확대, 하야시라는 인물의 전면 부상, 그리고 아베가 추구해온 외교 정책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야시의 외무상 기용으로 기시다 내각의 구성은 기시다파 4명(총리 자신 제외), 호소다파 4명, 다케시다파 3명, 아소파 2명, 이나이파 2명, 무파벌 2명, 연립 파트너인 공명당 1명의 비율이 됐다. 기시다파의 각료가 최대 파벌이자 킹 메이커인 아베가 소속한 호소다파와 같아진 것이다, 기시다파는 외무상과 총무상, 농림수산상, 그리고 올림픽·백신담당상 등 실질적인 힘을 가진 자리를 차지했다.      ━   하야시 외무상, 중의원 당선…총리로 가는 첫 관문 통과     게다가 하야시는 평화와 동북아시아 선린을 추구하는 기시다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한·일 관계나 일·중 관계 개선을 주장해온 인물이다. 아베와 아소가 필생의 과업으로 생각하는 평화헌법 개정이나 재해석을 통한 전쟁할 수 있는 일본, 자위대의 정식 군대화 등에는 별 관심이 적은 인물이다. 아베의 길과 기시다의 길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다.     하야시는 정치적인 야심이 큰 인물이다. 5선 경력의 참의원인 그는 총리가 되겠다는 정치적 야심을 숨기지 않아왔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진로를 확실히 잡았다. 지난 8월 내년 7월까지 임기가 남은 참의원을 사퇴하고, 10월 31일의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당당히 지역구(일본 용어 소선거구)에 출마해 당선하면서 중의원으로 말을 갈아탔다.   하야시는 2008년 후쿠다(福田) 내각에서 방위상을, 2009년 아소(麻生) 내각에선 경제재생정책상을, 2012년 제2차 아베 내각에선 농림수산상과 문부과학상을 각각 지내면서 각료로서 풍부한 국정 경력을 쌓았다. 일본에서 총리가 되려면 현실적으로 중의원이 돼야 하는데. 이를 위해 첫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하야시는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 뒤 미쓰이(三井)물산에서 회사원 생활을 하다 1995년 참의원으로 첫 당선해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중의원으로 11선을 한 하야시 요시로(林義郞·1927~2017)가 부친인 세습 정치인이다. 하야시 요시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 내각에서 후생상으로 입각했다.   그런 하야시를 기시다가 외무상으로 중용하면서 아베 총리와는 관계가 냉랭해졌다. 우선 기시다는 하야시를 야마구치(山口) 3구에 공천했다. 원래 그 지역구를 맡았던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78) 전 관방장관은 은퇴했다.   주목할 점은 야마구치가 아베의 정치적 고향이라는 사실이다. 아베는 야마구치 4구, 아베의 친동생인 기시노부오(岸信夫) 방위상은 야마구치 2구다. 그런데 야마구치는 인구가 줄면서 다음 중의원 선거에서 4개의 지역구를 3개로 줄이기로 확정됐다. 아베의 지역구인 4구와 하야시의 지역구인 3구가 통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두 사람은 차기 선거에서 지역구 공천을 놓고 불편한 관계에 처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야마구치에서 아베의 부친과 하야시의 부친은 서로 경쟁하던 관계였다. 아베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1924~1991)과 하야시 외무상의 부친인 하야시 요시로(林義郞·1927~ 2017)는 과거 중선거구제 시절 야마구치 1구에 나란히 출마해 득표율 1위를 놓고 경쟁한 적이 있다. 그 뒤 일본 선거 제도가 소선거구제가 되면서 하야시의 요시로가 아베 신타로에게 지역구를 넘기고 비례 대표 의원이 됐다.     11월 10일 외무상에 취임한 이날 취임 기자회견에서 “한·일 관계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며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야시는 “북한에 대한 대응을 비롯해 일·한, 일·미·한의 협력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해서 일본의 일관된 입장에 기반해 한국의 대응을 요구하겠다”며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징용문제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국가간 약속을 지키는 것은 국가간 관계의 기본”이라는 기존 입장을 반복하면서도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한국에 요구하겠다”고 말해 적극적으로 대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기시다는 외무상 시절 한·일 위안부 합의를 성사시켰다. 그런 기시다의 의지가 실린 하야시 외무상이 앞으로 한‧일 관계에서 어떤 돌파구를 마련할지 주목된다.     한·일 관계와 중일 관계를 개선할 경우 기시다 내각은 아베의 입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안보 정책을 추구할 수 있다. 분배를 강조한 경제정책과 함께 이웃나라와의 협력을 강조하는 외교까지 이룬다면 기시다는 아베의 입김에서 확실히 벗어나 자기 색깔의 정치를 본격화할 수 있다.     이는 강경 일변도의 아베 측 입김에서 벗어나 평화와 이웃나라들과의 선린을 중시한 기시다파의 전통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기시다 총리와 하야시 외무상이 이를 이룰 수 있으면 기시다의 장기 집권과 하야시가 총리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     한편, 2020년 9월 총리에서 물러나 막후 실력자로서 스가나 기시다 등을 총리로 올리는 데 일조한 아베 전 총리는 11일 자민당 최대 파벌인 호소다(細田)파의 회장에 취임했다. 이로써 호소다파는 아베파로 불리게 됐다. 호소다파의 좌장이던 호소다 히로유키(細田博之) 파벌 회장이 10일 중의원 의장에 취임하면서 파벌을 떠나게 되자 아베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건강 문제를 이유로 총리에서 물러난 뒤 1년 2개월 동안 막후 정치만 하던 아베는 이로써 자민당의 공식 실력자의 한 명으로 등장하게 됐다. 아베가 향후 정국 운영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할 신호탄이다. 이로써 앞으로 일본에선 기시다 총리와 아베 전 총리 간의 치열한 정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일본 정계와 자민당의 리더십과 영향력을 둘러싼 기사다-아베 대전이 한일 관계와 일본 정국에 상당한 회오리바람을 몰고 올 전망이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채인택 채인택 칼럼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글로벌 인사이트 기시다 총리 기시다 후미오 총리 하야시 하야시 요시마 하야시 신임 외무상 기시다 정치 아베 총리 1610호(20211108)

2021-11-13

누리호 발사…후발국 미국이 이긴 미·소 우주 개발 경쟁의 교훈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10월 21일은 한국 우주항공 역사에서 길이 기억될 날이다. 로켓 엔진의 설계에서부터 제작·시험·발사운용까지 모두 순수 국내 기술로 완성한 한국형 3단 발사체 누리호(KSLV-ll)가 전남 고흥군 나로우주센터에서 이날 오후 5시에 발사됐다.   누리호는 이날 오후 5시 1단 로켓 점화와 발사에 이어 오후 5시 2분 7초엔 고도 59㎞에서 1단 로켓이 분리되고 2단 로켓이 점화했고, 오후 5시 5분 53초엔 고도 191㎞에서 탑재물인 위성모사체를 보호하기 위해 덮은 페이로드 페어링이 분리됐으며, 오후 5시 4분 34초엔 258㎞ 상공에서 2단 로켓이 분리되고 3단 로켓이 점화했다. 여기까지는 완전히 성공적인 비행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3단 로켓 엔진은 원래 521초 동안 연소해야 하는데 46초 모자란 475초만 연소했다. 오후 5시 15분엔 목표 고도인 700㎞에 이르자 3단 로켓에서 탑재물인 ‘더미 위성(모사체 위성)’을 분리했지만 모사체의 속도가 계획했던 초속 7.5㎞에 이르지 못하고 6.7㎞에 그쳤다. 결국 충분한 추력을 얻지 못해 모사체를 궤도에 올리지 못했다.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원인이 밝혀졌다. 공기가 없는 우주에서 연소해야 하는 로켓 엔진은 연료와 산화제를 가압 시스템을 통해 엔진에 주입하는데 3단 로켓에서 산화제가 샌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연소가 46초 일찍 종료됐다. 엔진과 주입 시스템은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로우주센터는 내년 5월 재발사에서 모사체 위성을 무사히 궤도에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기술로 세계를 주도하는 나라의 반열에   이번에 모사체 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최종 과정을 제외한 로켓의 전 발사 과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한국은 사실상 우주발사체 기술 보유국이 됐다. 한국은 APR-1400을 비롯한 한국형 원자로, 메모리 반도체, 휴대전화, 자동차와 함께 전 세계에 기술력을 증명했다.   자체 기술로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린 것은 1957년 러시아의 R-7과 1958년 미국의 주피터 7호, 1965년 프랑스의 디아망, 1970년 일본의 람다 4S-5, 중국의 창정(長征) 1호(CZ-1), 1980년 인도의 SLV-3호에 이어 세계 일곱 번째다. 우주발사체 기술은 모든 나라가 안보상 이유로 다른 나라와 공유하지 않고 철저히 보안에 붙이기 때문에 발사체를 쏘아 올렸다는 사실 자체로 기술력을 증명한다. 그 뒤에는 과학기술자들의 고뇌와 땀이 배어있다.     사실 우주발사체를 비롯한 우주 프로그램의 본질은 냉전 시대 소련과 미국의 기술 경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작은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하면서 시작됐다. 스푸트니크는 러시아가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의 이름에도 붙여졌다.   미국은 ‘스푸트니크 충격’에 빠졌다.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이 무너진 건 물론이고 심각한 안보 위협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의 발사체가 스푸트니크처럼 우주 공간을 거쳐 미국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중은 패닉에 빠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 총사령관을 지낸 당시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년, 재임 53~61년)에겐 정치적인 위기였다.   소련은 연속적으로 미국에 충격을 가했다. 그해 11월 3일 소련은 개를 탑승시킨 위성을 발사해 인류 최초로 생명체를 우주궤도에 올렸다. 귀환 시스템이 없었기에 이 개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지만 이를 통해 인간 우주여행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최초 우주인인 가가린의 우주여행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된 소중한 희생이었다. 모스크바 시내에 유기견으로, 연구원들이 데려와 ‘작은 곱슬’이라는 뜻의 쿠드랴브카로 불렀다. 라이카는 허스키와 비슷한 잡종견의 비공식 종명이다. 전 세계에 라이카로 알려졌으며, 그를 기리는 기념 우표도 발행됐다. 모스크바 우주연구단지에 동상이 들어섰다.     오랫동안 로켓 기술을 개발해왔던 미국도 이에 대응해 그해 12월 6일 뱅가드 TV-3을 발사했지만, 중간에 폭발했다. 해를 넘긴 1958년 1월 31일에야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주노 1호 로켓에 실어 발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스푸트니크에 이은 역사상 두 번째 위성 발사국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혁신으로 역전을 노렸다. 우선 1958년 7월 29일 우주·항공 분야 장기계획을 위한 우주항공국(NASA·나사)을 설립했다. 미국은 나사 창설을 계기로 우주항공 분야는 물론 과학기술 전반에 걸쳐 연구·개발 투자를 대폭 늘렸으며 정책과 행정도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학자와 엔지니어는 물론이고 학생도 미국으로 데려와서 장학금을 주고 과학기술을 가르치고 연구시켰다.   그런 미국에 소련은 파상 공세를 펼쳤다. 유인 우주선 발사로 재차 일격을 가했다.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1934~68년)이 R-7 로켓에 실린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인류 최초로 무중력 상태의 우주권에 진입했다. 그는 아무런 조작도 하지 않고 우주선 안에 앉은 채 1시간 48분 동안 지구를 일주하고 귀환했다. 가가린이 기자들 앞에서 “지구는 푸른 빛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 미국인들은 얼굴이 새파래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스푸트니크 쇼크에 이어 가가린 패닉을 겪어야 했다. 가가린은 인류 최초 유인 우주비행 성공으로 인류 우주개척사만 새로 쓴 게 아니었다. 소련은 이를 통해 미국과의 헤게모니·과학기술·군사력 경쟁에서 한동안 우위를 점했다.     소련이 인류 최초의 우주발사체를 쏘아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리고, 유인 우주비행을 성공시킨 영광의 뒤에는 권력자의 과학기술에 대한 무지와 편견, 그리고 의심을 견딘 항공우주 과학기술의 개척자인 세르게이 코롤료프(1907~66년)의 고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소련의 1세대 로켓 과학자인 코롤료프는 이미 1930년대에 액체 로켓을 시험 발사하고 개발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는 1937~39년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자원 낭비’ 혐의로 감옥에 갇혔으며,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6년간 중노동에 시달렸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간신히 풀려나 전쟁 수행용 항공기 개발 업무에 투입됐다가 종전 뒤에야 우주비행 개척에 나섰다.       ━   미·소, 나치의 V-2 로켓 관련 기술자 확보 경쟁 벌여   로켓을 개발하다 자원을 낭비했다고 숙청됐던 코롤료프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생환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에 패배한 나치 독일이 로켓 무기를 개발해 영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면서 위력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치는 한정된 군사력·경제력·자원으론 전쟁을 수행하려면 첨단 비밀무기를 개발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해 초 군 복무 중이던 과학기술자 4000여 명을 차출해 독일 북부 발트해 연안의 페네뮌데 로켓연구소에 보냈다.   이들은 사거리 320㎞짜리 탄도미사일 V-2(Vergel tungswaffe-2·보복무기 2호) 로켓을 개발했다. 세계 최초로 실전 또는 실무에 사용된 로켓이다. 나치는 독일 중부 노르트하우젠의 로켓 공장에서 종전까지 5200기를 생산해 상당수를 벨기에·영국·프랑스 등을 공격하는 데 사용했다.   그런데 당시 독일 군사연구협회 직원인 베르너 오젠베르크는 사상 검증이 끝난 과학기술자 명단을 작성해뒀다. ‘오젠베르크 리스트’로 불리는 이 명단은 우연히 종전 직전 독일 서부 본 대학의 화장실에서 발견돼 연합군 손에 들어갔다. 미국은 종전 직후 이 명부를 바탕으로 독일 과학자들을 데려오는 ‘페이퍼클립 작전’을 수행했다.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를 비롯한 독일 로켓 과학자 127명이 1945년 6월 1진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에 입국했다. 7명의 합성 연료 기술자와 86명의 항공기술자가 뒤를 이었다. 전쟁 내내 연합군을 골탕 먹였던 암호·통신 전문가 24명도 합류했다.   처음엔 1년 계약직으로 미국 땅을 밟았던 이들은 곧 미국 시민이 돼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1946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로 미국은 모두 1600여 명의 독일 과학기술자를 데려와 미국인으로 만들고 두둑한 급료를 지급하고 연구를 시켰다. 이를 통해 로켓은 물론 제트기·통신·암호·합성연료 등 다양한 분야의 옛 독일 기술을 흡수했다. 10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신기술 특허와 아이디어도 얻었다.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1946년부터 ‘오소아비아힘 작전’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수천 명의 독일 전문가를 소련으로 데려가 군사 기술을 얻어냈다. 미국이 독일 과학자들을 자국민으로 받아들인 데 비해 의심이 많은 공산국가 소련은 주요 프로젝트를 외국인에게 맡기지 않았다. 기술 흡수가 어느 정도 끝난 1951년까지 이들을 독일에 돌려보냈다. 귀국 전 1년 정도 연구에서 손을 떼도록 조치해 최신 정보에서 멀어지게 했다. 테크 기업에서 퇴직 인사를 1~2년간 급여를 주면서 쉬게 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브라운의 조수였던 헬무트 그뢰트루프를 비롯한 250명의 로켓 기술자가 소련으로 강제로 옮겨졌다. 페네뮌데 연구소 인력의 상당수는 미국이 차지했지만, 로켓 공장은 소련 몫이었다. 소련은 이를 통째로 뜯어 스탈린그라드 동남쪽 카푸스틴야르에 로켓 연구소를 세웠다. 그뢰투르프는 여기서 소련 과학자 코롤료프와 함께 V-2 로켓을 복제해 소련 최초의 로켓인 R-1을 만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오랫동안 축적된 코롤료프의 노하우가 큰 역할을 했다. 초기 미국과 소련의 로켓 경쟁에서 소련이 앞선 원동력은 바로 코롤료프 것이다.     R-1은 소련 핵미사일과 우주개발의 모태이자 원천이 됐다. 코롤료프가 1957년 5월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 로켓을 개발해 발사했기 때문이다. R-7은 그해 10월 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우주 공간에 쏘아올려 미국을 경악하게 했다. 유리 가가린을 지구 궤도에 올린 것도 이 로켓이었다. 당시는 소련이 잠시나마 미국을 과학기술로 눌렀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미·소 우주개발 경쟁은 1991년 소련이 몰락할 때까지 계속됐다.   코롤료프는 소련의 우주 영광을 이끈 주인공이다. 그의 삶과 업적은 무지·편견·아집으로 과학자를 탄압해 국가발전을 저해한 독재자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코롤료프는 1966년 암 수술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존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미국 정보기관도 그의 이름을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다.   코롤료프와 소련 우주선들은 과학기술을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면 국익을 해친다는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그는 소련 최고 지도자들이 묻힌 크렘린 벽 무덤에 안장됐다. 지난 4월 12일 가가린의 세계 최초 유인 우주여행 60주년을 기념해 크렘린 벽의 가가린 무덤을 찾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은 가가린의 무덤과 함께 코롤료프의 묘도 함께 찾아 헌화했다. 가가린은 소련 우주개발의 겉보기 모델이었고, 코롤료프는 숨은 핵심이었음을 현재의 지도자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 개척의 문을 연 것은 소련이지만 미국도 신속하게 대응했다. 바로 그해 5월 5일 미국의 앨런 셰퍼드가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우주권에 진입했다. 이듬해인 1962년 2월 20일엔 미국의 존 글렌이 미국인으로선 처음으로 지구 궤도를 선회했다. 미국은 일회성 대응에 그치지 않고, 과학기술 국력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뒤 반전의 도전장을 내밀었다. 아이젠하워가 나사 창설과 수학·과학 교육 개혁으로 이룬 토대 위에 젊은 대통령 존 F 케네디 대통령(1917~63년, 재임 1961~63년)이 우주 개척의 꿈을 제시했다. 케네디는 1962년 9월 12일 텍사스주 휴스턴의 라이스대에서 국가 우주계획 주제로 연설하면서 우주 개척의 의지를 드러냈다.   케네디는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인 텐징 노르가이의 에베레스트 정복과 1927년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비행을 예로 들며 인류가 도전정신으로 문명을 발전시켰음을 강조하며 아폴로 계획의 인류사적인 의미를 강조했다. ‘쉬워서가 아니라 어려워서 달에 도전한다’는 케네디의 사자후는 미국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마침내 케네디는 1963년 5월 25일 의회 연설에서 공식 우주 출사표를 던졌다. 케네디는 “1960년대 말까지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지구로 무사히 귀환시키는 것”을 국가적 목표로 공식적으로 제시했다. 소련의 우주 기술을 단박에 뛰어넘는 대담한 아폴로 계획은 이렇게 시작됐다.     소련도 미국의 도전장에 대응했다. 1965년 3월 18일엔 소련의 알렉세이 레오노프가 인류 최초의 우주 유영을 한 데 이어 1966년 2월 3일엔 무인우주선 루나 9호를 달에 착륙시켰다.     그런 가운데 미국의 아폴로 프로젝트는 비극으로 시작했다. 1967년 1월 27일 지상 훈련 중이던 아폴로 1호에서 화재가 발생해 내부에 타고 있던 거스그리섬 선장과 에드워드 화이트, 로저채피 등 3명의 우주비행사가 목숨을 잃었다. 아폴로 계획의 희생자이자 인류 우주 도전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 나사는 고난을 극복하고 아폴로 4~6호는 무인비행으로, 7~10호는 유인 비행으로 인간을 달에 보내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가 성공적으로 달에 착륙하면서 목표를 이뤘다. 달 착륙은 이러한 의지와 끈기, 그리고 집념의 결과일 것이다.     미국은 아폴로 계획에 따라 1972년까지 인간을 모두 6차례 달에 보냈다. 아폴로 13호가 중간에 사고가 났지만, 우주인들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국 외에 달에 인간을 보낸 나라는 5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없다. 미국의 보복은 강력했다. 교언영색의 말이나 정신 승리 구호, 또는 일회성 대응 대신에 미국 자체를 과학기술에 친숙한 미래지향적인 테크 국가로 혁신했다. 그런 노력의 열매는 지금도 세계 경제를 미국의 테크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우주개발 경쟁은 현재도 진행 중인 글로벌 주도권 다툼의 한 형태다.       ━   나로도의 꿈은 현재진행형   고흥 나로도에서 솟아오른 대한민국 기술입국의 원대한 꿈도 현재진행형이다. 로켓 발사 완벽 성공을 위해 묵묵히 달리는 과학기술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들은 과거 옛소련과 미국이 했던 것처럼 필사적인 노력으로 우리의 운명을 우리 손으로 개척하고 있다. 우주는 우리의 미래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미국 인사이트 우주발사체 기술 사실상 우주발사체 사실 우주발사체 1608호(20211101)

2021-10-31

코로나 풀리며 전 세계가 물자 부족으로 골머리, 해법은?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글로벌 공급 부족이 가속화하고 있다. 애초 에너지 수요 급증에 따라 에너지 가격 상승과 공급 부족이 발생했지만, 이젠 거의 전 분야에서 공급 부족이 심화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식량 생산·공급까지도 모자라지면서 동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가난한 나라에서 기아가 확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1월 25일의 추수감사절과 12월 성탄 특수를 앞두고 장난감·의류의 공급 부족과 물류 정체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선물 없는 명절’을 맞을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미국 일부 지역에선 심지어 화장지도 재고가 줄고 있다. 화장지를 비롯한 각종 생필품에 커피를 비롯한 기호품까지 공급 부족이 심각하다.       ━   위드코로나로 촉발된 ‘퍼펙트 스톰’   에너지 수급 불안정에 따른 정전 사태도 레바논을 비롯한 일부 한계 국가를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 게다가 반도체 칩의 부족으로 반도체가 필수적인 각종 전자제품은 물론 자동차까지 생산과 공급에 차질이 예상된다. 중국은 석탄 부족에 따른 전력난으로 산업체 가동 중단 사태를 맞으면서 경제가 타격을 받고 있다. 전력난은 반도체 생산 차질과 종이 부족까지 유발하고 있어 파장은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글로벌 공급 부족 현상의 핵심 원인으로는 2년이 다 돼가는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공급 부족, 위드코로나 확산에 따른 수요 증가와 관련 기대감의 상승, 그리고 인력 부족 등에 따른 물류 대란을 꼽을 수 있다. 거기에 산업현장과 시장 감당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일부 국가의 무리한 그린 경제화도 요인으로 지적된다. 이런 인재에 더해 이상 기후로 인한 일부 지역의 자연재해도 한몫하고 있다.     문제는 이 요인들이 대부분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펜데믹은 이미 8분기에 걸쳐 계속되고 있는 익숙한 상황이다. 이에 따른 수요와 공급의 동시 부족은 상당 기간 변수가 아닌 상수로 작용해왔다. 방역에 따른 인력 수급 부족도 마찬가지다.     위드코로나는 이미 지난해 12월 시작된 코로나 백신 접종이 2021년 들어 궤도에 오르면서 지난 상반기부터 올해 가을쯤 시작될 것으로 예상됐다. 이에 따른 글로벌 수요 증가도 당연히 예상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예측되던 상황이 한꺼번에 도래하면서 문제가 눈덩이처럼 커졌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수요와 공급, 코로나라는 천지인 삼박자가 우연히 다 맞아떨어지면서 글로벌 공급 부족 현상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화했다.     글로벌 공급 부족 현상은 포스트 팬데믹 시대의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 퍼펙트 스톰은 원래 기상학 용어로 ‘발생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들이 우연히 겹치면서 증폭돼 발생하는 기상 사태’를 가리킨다. 개별적으로는 큰 타격을 주지 않는 요인들이 우연히 동시에 발생해 서로 결합하면서 예상 밖의 엄청난 위력을 갖게 되는 자연 현상이다. 주로 드문 기상 현상이 서로 결합하면서 발생한 강력한 폭풍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의미로도 쓴다.     퍼펙트 스톰은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2008년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글로벌 경제가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올랐다. 그 후 개별적으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요인이 복수로 동시에 터지면서 영향력이 대대적으로 증폭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2011년 6월에는 월가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론자로 ‘닥터 둠(Doctor Doom)’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미국 뉴욕대의 누리엘 루비니 교수가 글로벌 경제가 2013년 퍼펙트 스톰을 겪을 것으로 예측하면서 이 용어는 더욱 유명해졌다. 루비니 교수는 2013년이 되면 유럽 발 재정위기로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에서 일부 국가가 이탈하고, 미국 경제의 거품이 붕괴하면서 성장이 둔화하며,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경제성장률도 함께 하락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당시 그는 미국 경제가 단기간에 걸쳐 성장세를 기록한 뒤 곧바로 다시 불황에 빠지는 더블딥(W자형 불황)을 우려했다. 더블 딥의 대표적인 원인으로는 소비 침체와 정부 지출 확대에 따른 과도한 재정적자,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지나치게 빠른 자금 회수 등이 꼽힌다. 기업이 생산량을 늘리면서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비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다시 경기가 침체하는 현상이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려도 경제는 소비 부족으로 충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재정적자만 늘어난다. 아울러 지나친 자금 공급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로 이자율을 높여 돈을 회수하면 경기가 다시 불황에 접어들 수 있다. 루비니의 부정적인 예측은 미국 연방준비의 대처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재정위기 극복 노력 등으로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   가장 큰 피해 지역은 아프리카 빈곤국, 식량부족 우려     결국 당시엔 각국이 필사의 대처로 퍼펙트 스톰을 어느 정도 예방했다. 하지만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상황을 2년 가까이 겪은 지금, 새로운 포스트 코로나 경제가 시작되면서 글로벌 공급 부족 현상이 예기치 못한 퍼펙트 스톰으로 등장하고 있다.     가장 문제가 식량 부족으로 제대로 먹지 못하는 기아 사태다.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케냐는 심각한 가뭄으로 인한 식량부족 사태 등 국가적 위기를 겪으면서 지난 9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나라 기후는 우기인 3~6월과 나머지 건기로 나뉘는데 지난 2년간 우기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 농사를 망쳤다. 비가 내리더라도 폭우로 이어져 농작물이 떠내려갔다. 이런 이상 기후로 농작물 생산량이 70~90%나 줄었다. 가축도 먹을 풀이 없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이동이 제한되면서 원조 식량 배분에도 지장을 초래했다. 이런 현상은 인근의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그리고 고(故) 이태석 신부가 활동했던 신생국 남수단 등 아프리카의 상당수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개발원조(ODA) 정책의 하나로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아프리카·중동 등에 지원하는 한국산 쌀 공급을 늘려야 할 이유다.     아일랜드의 국제인도주의단체 컨선월드와이드가 10월 16일 발표한 2021 세계기아지수(Global Hunger Index) 보고서를 보면 소말리아가 기아 분야에서 ‘극히 위험’ 국가로, 예멘·중앙아프리카공화국·차드·콩고민주공화국·마다가스카르가 ‘위험’ 국가로 지목됐다. 대부분 정치적 분쟁과 코로나19를 동시에 겪은 나라다. 컨선월드와이드와 세계기아원조는 기아 해결을 위한 국제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2006년부터 세계기아지수를 발표하고 있다.     소말리아는 영화 ‘모가디슈’의 배경으로 수십 년 동안 내전을 겪은 데 이어 가뭄 등 자연재해에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최악의 기아 국가로 지목됐다. 이 나라에선 영양결핍 인구 비율이 59.5%이며, 5세 미만 아동 사망률은 11.7%에 달해 나이지리아와 더불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 아이들은 굶고 병들어서 목숨을 잃고 있다. 악명을 떨쳤던 소말리아 해적 활동이 최근에는 잠잠해지고 있지만 코로나19 등으로 상황이 악화하면서 다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아덴만에 파병된 한국 청해부대도 기본 임무는 소말리아 해적으로부터 한국 선박을 지키는 일이다.     브라질은 1세기 만의 심각한 가뭄으로 올해 커피 생산량 급감이 예상된다. 올해 커피 생산은 자연 주기적으로도 줄어들 예정이었지만 여기에 서리 및 가뭄에 따른 수확 감소로 인해 품귀현상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고 BBC방송이 보도했다. 더불어 해상 화물 운송료 증가와 컨테이너 부족 등이 겹치면서 브라질 커피는 심각한 공급난을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브라질은 세계 최대 원두 수출국이기 때문에 브라질의 커피 공급난은 전 세계 카페에서 판매되는 원두와 이로 추출한 커피음료의 가격 상승은 물론, 커피를 원료로 한 다양한 가공식품의 공급량과 가격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브라질의 가뭄은 전력난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WP)는 브라질 전기 생산에서 수력 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 올해 가뭄에 따른 수자원 부족은 이 나라 에너지 공급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도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2019년 브라질의 에너지 소비구조는 석유 38%·수력 29%·재생에너지 16%·천연가스 11%·석탄 5%·원자력 1% 순이다. 이에 따라 가뭄은 수력 발전량을 줄이고 국가 전체 에너지 수급에도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다. 브라질 정부는 국민에게 절전을 호소하고 있으며, 상황이 악화하면 전기를 시간제로 배급할 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브라질 에너지 장관은 정부 기관에 에너지 사용을 20% 줄이라고 지시했다.     세계적인 산유국으로 아프리카 대륙 최대의 천연가스 매장량을 자랑하는 나이지리아도 액화천연가스(LPG) 부족 사태를 겪고 있다고 BBC방송이 보도했다. 나이지리아 국내 LNG 가격은 공급 부족으로 지난 4월에서 7월 사이 60%가 치솟았으며, 이에 따른 가격 장벽이 높아지며 수많은 주민이 가스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결국 수많은 가정과 식당은 가스 대신 숯과 화목 등을 연료로 사용하고 있다. 가스 가격 상승의 이유 중 하나로는 글로벌 공급 부족이 꼽힌다. 나이지리아는 에너지 수출국이지만 정유 관련 시설이 충분하지 않아 LNG를 비롯한 완제품은 수입에 의존한다. LNG 사태는 나이지리아 법정통화인 나이라의 가치 하락과 정부의 LNG 세금 신설 등으로 더욱 악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환경은 물론 주민 건강도 우려된다고 BBC는 지적했다.       ━   레바논 에너지 부족사태, 예고된 인재(人災)     동지중해 중동국가로 오랫동안 경제적·문화적 번영을 구가하며 ‘중동의 진주’로 불렸던 레바논은 최근 심각한 전력난과 식수난까지 겹치면서 국가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레바논은 온갖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 대표적인 포스트 코로나 시대 퍼펙트 스톰 국가로 꼽힌다. 레바논은 1943년 독립 당시 맺은 국민대협약과 1979년 내전 종식을 위한 타이프 합의에 따라 마론파 기독교와 수니파 이슬람·시아파 이슬람·드루즈교 신자 등이 권력을 각각 분할해 겉으로는 종교·종파별 정치적 균형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런 권력 나눠먹기는 무책임 행정으로 이어져 정부는 각종 위기 앞에 무능한 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정부 마비로 이어졌다. 2020년 8월 4일에는 베이루트 항구에 보관 중이던 2750톤 이상의 질산암모늄이 대폭발하면서 항구 기능이 마비됐으며,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과 복구 작업에서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BBC는 레바논이 식수와 의약품 그리고 연료 부족의 우려가 크다고 보도했다. 레바논은 지난 18개월 동안 경제 위기를 겪어왔으며, 그 결과 인구의 4분의 3이 가난으로 내몰아 넣었다는 지적이다. 자국 화폐가치 하락과 생필품 가격 상승 등으로 국민은 현재의 정치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대규모 시위로 표출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이런 상황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정부는 연료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화력 발전소 운영을 중단했으며, 이 때문에 전력 공급이 줄어 수시 정전은 물론 하루 중 상당 시간을 전기 없이 사는 신세가 됐다. 상당수 국민은 석유로 가동하는 사설 발전회사나 가정용 발전기에 의존하고 있다. 사설 발전회사는 암거래 등으로 확보한 기름을 바탕으로 고가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병원 등 필수 시설은 정전에 대비해 발전기를 가동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비용 상승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레바논의 이슬람 시아파 무장 정파 헤즈볼라를 지원해온 이란은 최근 석유를 실은 유조선을 베이루트에 보내 정치적인 지원을 시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아파 시위대에 괴한이 총격을 가해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국내 상황이 더욱 혼잡해지고 있다.     이미 지난 8월 유엔의 레바논 인도적 지원 조정관인 나야트 로치디는 “수백만 명이 겪고 있는 보건의료 부문에 대한 연료 위기와 식수 공급 문제를 깊이 우려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을 정도다. 그런데도 마비된 정부는 뚜렷한 조처를 하지 않고 있다. 한때 금융·유통·관광업으로 번영을 구가했던 레바논은 코로나19와 글로벌 공급 부족, 그리고 정치적 위기까지 겹치면서 국제사회의 대표적인 실패국가로 자리 잡고 있다.     더욱 문제는 코로나19가 쉽사리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백신 접종 이후에도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재감염이 확산하고 있다. 인구 대부분이 백신을 접종해 항체를 형성하면 코로나19가 진정될 것이라는 희망은 새로운 변종의 출현과 돌파 감염의 확산 등으로 인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거기에 백신 접종 뒤 코로나19 사망률이 떨어지고 있다는 이유로 전 세계적으로 위드코로나 시기에 접어들면서 글로벌 경제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인류는 이미 백신 접종과 치료제 보급을 비록한 코로나19 대응과정에서 자국 우선주의가 얼마나 만연하고, 보건과 방역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악용되는지를 목격했다. 앞으로 위드코로나를 통한 경제 회복 과정에서 글로벌 사회가 얼마나 자국 이기주의를 앞세워 각축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코로나 세계 글로벌 공급 퍼펙트 스톰 에너지 수급 1607호(20211018)

2021-10-23

판도라 페이퍼스가 보여주는 부패권력의 추악한 두 얼굴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전세계의 수많은 군주·왕족, 정치 지도자, 기업인, 저명인사들이 조세 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세금 회피·탈루를 시도하거나 재산을 은닉했다는 폭로가 또다시 나오면서 충격을 주고 있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10월 3일 이 같은 내용의 ‘판도라 페이퍼스’를 공개하면서 지도자들의 도덕성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ICIJ는 1997년 설립돼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둔 독립 글로벌 네트워크다. 100여 국가의 280명 이상의 탐사보도 기자와 100개가 넘는 미디어 조직으로 이뤄졌다. 이 조직은 영국의 BBC방송과 일간지 가디언, 프랑스의 르 몽드, 미국의 워싱턴포스트(WP), 독일의 쥐트도이체차이퉁, 노르트도이처룬트풍크(NDR) 방송, 인도의 인디언 익스프레스, 스위스의 존타크스차이퉁 등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2008~2011년 담배산업의 실상을 탐사보도하면서 활동에 들어갔다. 건강보다 돈을 앞세우는 담배산업의 이면에 대한 적나라한 보도와 비판은 전세계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조직이 전세계에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명성을 얻은 것은 2016년 4월 조세회피처인 파나마의 금융업체 자료인 ‘파나마 페이퍼스’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다. 이를 통해 세계적인 정치인, 기업인이 역외 지역에서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세금을 회피하고 자금 세탁을 하는 한편 은밀하게 재산을 숨겨왔음을 생생하게 고발했다. 당시 보도는 전세계에 충격을 안긴 것과 동시에 탐사보도와 데이터저널리즘의 위력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이들의 폭로 저널리즘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심지어 도덕적 지도자들에 대한 가면 벗기기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보도에 전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이어 2017년에는 파라다이스 독일 쥐트도이체차이퉁이 입수한 파라다이스 페이퍼스를 함께 분석해 보도하면서 다시 한번 충격을 줬다.      ━   ‘파나마 페이퍼스’ 이어 ‘판도라 페이퍼스’ 파문     10월 3일 폭로된 ‘판도라 페이퍼스’도 전세계를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이번 판도라 페이퍼스에 공개된 ICIJ의 역외 탈세 탐사보도 자료는 분량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전세계 14개 금융회사에서 유출된 1190여만 건의 금융정보로, 3테라바이트 분량이다. 3테라바이트는 통상 2기가 정도인 극영화 1500편 이상에 해당한다.     판도라 페이퍼스는 분량면에서 2016년 파나마 페이퍼스와 2017년 패러다이스 페이퍼스를 넘어선다. 파나마 페이퍼스는 2.6테라바이트 분량의 문서 1150만 건이었고, 파라다이스 페이퍼스는 1.4테라바이트 분량의 문서 1340만 건이었다. 이 방대한 데이터를 전세계 117개국 언론인 600여명이 참가해 파헤쳤다. 그야말로 데이터 저널리즘의 개가다.      문건에 등장하는 인물의 숫자도 경악할 수준이다. 보고서에 이름이 올린 전·현직 정치인이 336명이나 된다. 여기에는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안드레이 바비시 체코 총리, 우후루 케냐타 케냐 대통령, 기예르모 라소 에콰도르 대통령 등 전·현직 국가원수와 정부 수반 35명이 포함됐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번에 공개된 판도라 페이퍼스엔 대부분 국가가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중남미의 전직 정상이 11명이나 무더기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파마나는 리카르도 마르티넬리, 에르네스토 페레스 발라다레스, 후안 카를로스 바렐라 등 전직 대통령 3명이 함께 이름을 올렸다. 콜롬비아는 세사르 가비리아와 안드레스 파스트라나, 엘살바도르는 알프레도 크리스티아니와 프란시스코 플로레스 페레즈 등 각각 2명의 전직 대통령이 등장한다. 호라쇼카르테스 전 파라과이 대통령, 페드로 파블로쿠친스키 전 페루 대통령, 포르피리오 로보 전 온두라스 대통령도 등장했다.    대화와 타협, 협상과 양보를 통한 연립정권 구성이 필요한 내각책임제와 달리 일단 대선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임기 내내 당선인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승자독식제도(the winner-take-all)’에 따라 부패하기 쉽고 견제받기 쉽지 않은 대통령제의 폐단이 고스란히 나타났다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게다가 중남미 국가는 한결같이 부유하지 않는 나라인데, 지도층이 이렇게 세금을 줄이려고 탈법을 일삼는 행동을 보였다는 점에서 이번 판도라 페이퍼스의 폭로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명목 금액 기준 2021년 전망치에 따르면 전·현직 대통령의 탈선이 드러난 중남미 국가들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상당히 작다. 그나마 교역이 발달한 파나마가 1만3690달러로 유일하게 1만 달러를 넘을 뿐 페루 6678달러, 콜롬비아 5753달러, 파라과이 5146달러, 엘살바도르 4031달러, 온두라스 2586달러의 가난한 나라들이다. 그런데도 전직 대통령들은 조세회피지에 페이퍼컴퍼니를 여러 개 설립해 세금을 회피하거나 자금을 은닉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남미에선 현직 대통령도 3명이나 이름을 올렸다. 칠레의 세바스티안 피녜라, 에콰도르의 기예르모 라소, 도미니카공화국의 루이스 아비나데르가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기업인 출신으로 공직인 대통령이 되면서는 이런 일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번 공개를 계기로 부패, 돈세탁, 글로벌 조세 회피 등 여러 의혹을 받아 정치적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유럽의 안도라·리히텐슈타인·모나코,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남태평양의 마셜제도·나우루·바누아투 등을 자금 투명성 공개 비협조국으로 분류해왔다. 일부 국가는 관련 법령을 통과했지만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평가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적반하장·내로남불형 정치인이 많이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체코의 안드레이 바비시 총리다. 탈세와 부패 척결을 내세워 정치 권력을 잡았던 바비시 총리는 조세 회피지의 여러 페이퍼컴퍼니로 2200만 달러(261억원)의 자금을 빼돌려 프랑스에 대저택을 매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바비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재산을 모은 ‘체제 전환 부호’다. 과거의 공산 당적을 시장경제 전환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다. 그런 그는 시민단체 ‘불만 있는 시민들의 행동(ANO)’을 만들고 2012년 이를 ‘ANO 2011’이라는 정당으로 전환했다. 좌파와 우파를 아우르는 포괄정당으로 중도주의·자유주의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좌파 계열의 포퓰리즘 정당이라는 평가다. ANO와 ANO2011는 부패방지와 정치인의 면책특권 폐지를 앞세워 기존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를 모으고 실업 대책과 교통인프라 확대 등 생활 공약을 앞세웠다. 기존 정치인의 부패와 불투명성, 특권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힌 인물이 정작 자신은 역외 지역의 페이퍼컴퍼니를 이용해 세금을 줄이고 자금을 은닉했다가 들킨 셈이다.     ━   부패 척결 외치던 바비시 총리도 조세 회피   바비시는 체코슬로바키아 시절 1980년 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으로 공산당이 몰락하자 체코의 프라하로 이주해 정착했다. 2013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 기독교민주동맹 등과 연립정권을 이루면서 2014~2017년 제1부총리와 재무장관을 맡아 정부 재정을 책임졌다. 2017년 총선에서 ANO2011이 제1당이 되면서 그해 12월 총리가 됐다. 바비시는 이번 폭로가 연말 총선을 앞두고 자신을 압박하려는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프리카 케냐의 우후루 케냐타 대통령도 “모든 공직자의 자산은 국민이 그 적법성을 물을 수 있도록 대중에게 공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산공개의 투명성을 강조해온 정치인이다. 이처럼 겉으론 공직자 재산 공개의 투명성을 강조하면서 뒤로는 조세 회피지에 적어도 7개의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3000만 달러(약 350억원)가 넘는 비밀 재산을 보유해왔다.    그는 1963년 독립한 케냐의 초대 대통령 조모 케냐타(1889~1978년, 64~78년 재임)의 아들이다. 2013년 첫 당선했으며, 2017년 재선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2003~2013년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2009~2012년 재무장관을, 2008~2013년 부총리를 지냈다. 재무장관으로 나라 살림을 책임진 국가원수가 역외 지역을 이용한 것은 도덕성에 큰 흠결로 지적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떤 자금이기에 그런 곳을 이용했느냐는 추궁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제르바이잔의 2대 세습 대통령에 비하면 약과다. 아버지인 게이다르 알리예프(1923~2003년, 재임 1993~2003년)에 이어 2003년 10월부터 대통령을 맡은 일함 알리예프는 2008년·2013년·2018년 대선에 당선해 4선을 기록하고 있다. 2017년 부통령직을 신설해 부인 메흐리반 알리예바를 그 자리에 앉혔다. 세습에 이어 족벌체제를 이룬 셈이다.   주목할 점은 아제르바이잔이 세계적인 산유국이라는 사실이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자료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은 2020년 하루 69만3880배럴의 원유를 생산한 세계 22위의 산유국이며, 1인당 하루 원유 생산은 8만5710배럴로 세계 14위다.       ━   아제르바이잔 알리예프 2세 런던 건물 대거 매입     이렇게 아제르바이잔은 산유국으로 명성이 높지만 1000만 국민은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명목 금액 기준 2021년 전망치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883달러 수준이다.     이번 폭로에 따르면 알리예프는 부동산 가격이 비싸기로 유명한 런던 중심지의 건물을 대거 사들였는데, 아예 거의 블록 하나를 다 산 것으로 드러났다. 알리예프 대통령이 족벌정치를 펼치고, 역외 지역을 이용해 재산을 해외에 빼돌린 것을 보면 가난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견제받지 않는 독재정치는 부패를 부르고 부패로 국부가 빠져나가면서 국민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역시 권력은 견제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도자들의 세금 회피 기법도 흥미롭다. 한때 세계 좌파의 희망이었던 변호사 출신의 전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2017년 빅토리아 시대 건물을 직접 사는 대신 이를 보유하고 있던 버진아일랜드 등록 업체를 아예 인수했다. 이런 기법을 통해 약 5억원의 세금을 아낀 것으로 드러났다. 블레어는 물론 부인 셰리도 변호사다. 자신들의 지식을 이렇게 탈법적인 사익을 위해 활용했고, 이런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점에서 국민의 실망감을 짐작할 수 있다.     2000년부터 러시아를 지배해온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가까운 여성을 앞세워 모나코의 불법 자산과 관련됐다는 의혹을 받는다. 역외 지역을 이용해 부동산을 취득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이와 함께 이탈리아의 마피아, 독일의 슈퍼모델 클라우디아 시퍼도 역외 지역을 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역외 지역 이용에는 정치 지도자와 유명인사, 마피아가 따로 없는 셈이다.     요르단의 국왕 압둘라 2세는 최소 36개의 역외 유령회사를 통해 미국 캘리포니아 말리부와 워싱턴, 영국 런던 등 전 세계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지역에서 모두 합쳐서 1억600만 달러(1258억원)가 넘는 14개 저택을 손에 넣었다. 압둘라 2세 국왕은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와 같은 쿠라이시족에 속한 집안인 하심 가문 출신이다. 하심 가문은 오랫동안 ‘두 개의 성지의 수문장(열쇠지기)’이라는 종교적인 직책을 맡아 이슬람 성지인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와 메디나를 지배했다. 7세기부터 시작한 오랜 가문의 명예가 1300년이 지난 지금 타격을 받는 상황이 된 셈이다.     판도라 페이퍼스에 대해 압둘라 2세 국왕은 즉각 “특이하지도 부적절하지도 않다”고 항변했다. 법적으로 따지면 국왕인 자신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릴 일은 없다는 자신감이 드러난다.     물론 다른 지도자들도 법적으로 따지면 무사히 넘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도자들이 역외지역 조세 회피처를 이용해 유령회사로 불리는 페이퍼컴퍼니를 세웠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충분히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대중과 지도자 사이의 괴리도 더욱 깊어간다. 이 간극을 제대로 메우지 않으면 전 세계는 새롭게 정치적·사회적·도덕적 갈등이 심화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셈이다. 문건의 이름이 판도라인 이유일 것이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2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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