汎삼성家 ‘3세 시대’ 본격 연 이재현 제일제당 회장
汎삼성家 ‘3세 시대’ 본격 연 이재현 제일제당 회장
| 이재현 제일제당 회장 | 1995년 세계경제포럼(WEF)은 그 해의 차세대 지도자로 이재현(42) 제일제당 당시 부사장을 뽑았다. 그가 WEF의 주목을 받은 것은 미국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신화를 만들어낸 프로듀서 제프리 카젠버그 등과 영상 소프트 업체인 드림웍스를 설립, 영상산업에 진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내의 한 피자집에서 이들과 만나 투자협상을 벌였다. 동양에서 온 권위주의적인 타입의 오너 경영인을 떠올렸던 이들에게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30대 젊은이는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3억 달러 상당의 드림웍스 지분 30%를 넘기고 제일제당을 대주주로 받아들였다. 드림웍스 투자로 제일제당은 식품·의약품 제조업체라는 창립 이래의 경직된 이미지를 벗고 종합 엔터테인먼트사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격의없이 사람을 대하는 이재현 제일제당 회장의 스타일은 임직원들과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제일제당은 99년 대기업으로는 최초로 자율복장제를 도입한 데 이어 2000년 직급 호칭을 없앴다. 그 후로 회장 이하 전 임직원이 서로 직급 빼고 이름만 ‘아무개님’이라 부른다. 회사 안에서의 그의 공식 호칭도 은행 객장 같은 데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재현님이다. 기자가 홍보실에 요청해 받은 관련자료의 제목도 ‘이재현님의 기업문화론’이었다. 호칭은 이를 사용하는 사람과 그 대상이 되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다. 호칭의 사회학이랄까? 그 역시 상대방에 대한 호칭이 바뀌면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 행태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상하간의 수직적인 커뮤니케이션도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변한다는 것. 그에 따라 조직원간에 자연스레 오픈 마인드가 되고 의사소통이 활발해진다고 주장한다. 제일제당은 사내 전화번호부도 직급 없이 가나다순으로 돼 있다. 전화 통화를 할 때도 직급 빼고 아무개님으로 호칭하다 보니 상급자들도 하급자들을 존중하게 됐다. 상대방의 직급을 일일이 파악하고 있지 않는 한 실수를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직급 호칭이 없어진 뒤로 그룹 안에 상호존중의 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변화가 의식의 개혁에 상승작용을 한다는 그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파격적인 기업문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죠. 사고의 유연함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회사 업무에 임하자는 겁니다.” 이회장의 직급호칭 파괴의 변이다. 내년에 창립 50돌을 맞는 제일제당은 삼성그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기업이다. 역사가 긴 만큼 기업문화가 보수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제일제당이 보수적이라는 인식에 이회장은 동의하지 않는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진출해 메이저 소리를 듣고 있고, 특히 이를 일군 주역들이 과거 설탕을 만들거나 육가공 분야에 종사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변화에 둔감한 조직이라면 이런 변신을 꿈꿀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설탕 장사를 하다 영화판에 뛰어든 대표적인 CJ맨이 이강복 CJ엔터테인먼트 사장이다. 99년 7월 초 이재현 당시 제일제당 부회장은 식품 수출과 원료 조달 업무를 맡고 있던 그에게 엔터테인먼트 사업본부장을 맡으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SK 등 굴지의 재벌 기업들이 영상산업에서 손털고 나갔는데 이 바닥이 과연 밑빠진 독인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지 판단해 보라”고 했다. 판을 엎을 것인지 계속 투자할 건지 판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꼬박 일주일을 숙고한 끝에 자리를 옮긴 그는 최민식과 전도연이 주연한 ‘해피 엔드’로 두달 만에 대박을 터뜨렸고, ‘공동경비구역 JSA’ 등의 흥행 성공에 힘입어 3년이 채 안 된 지금 영화판의 ‘마이더스 손’이자 큰손이 돼 있다. 이 회사는 지난 2월 영화사로는 처음으로 코스닥에도 진입했다. 미디어(m네트·푸드채널·NTV)와 신유통(CJ39쇼핑·CJ GLS)에의 진출도 이회장의 작품이다. 영상산업의 전망이 불투명해 누구도 CJ엔터테인먼트에 투자하려 들지 않을 때 리스크를 안고 개인적으로 투자한 그는 그 후 구설수에 올랐다. 제일제당의 엔터테인먼트 사업부문을 이 회사에 넘기고 신주인수권을 넘겨받았다 막대한 시세차익을 남기게 되면서 참여연대 등으로부터 ‘부도덕한 오너’로 몰린 것. 당시 제일제당은 공정거래법상의 출자총액 제한 규정에 묶여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연간 누적적자는 1백억원에 달했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뒤따랐다. 지난 4월 그는 CJ엔터테인먼트를 통해 6백여만주의 신주를 액면가(1천원)에 사들일 수 있는 신주인수권을 모두 소각하겠다고 밝혔다. 발표 날의 주가를 기준으로 무려 1천억원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다른 재벌 총수들과 달리 두고두고 시비의 대상이 될 신주인수권을 포기한 것이다. 참여연대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가장 바람직한 해결방안”이라며 “제일제당과 CJ엔터테인먼트의 소액주주들에게 혜택을 주는 한편 시장의 불신을 해소하고 경영의 책임성을 높이는 조처”라고 환영했다. 애널리스트들도 이로써 기업의 투명성이 한 단계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그가 도입한 플렉서블 타임제도 제일제당의 바뀐 기업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요즘은 근무시간 플렉서블 타임제에 맞춰 점심시간도 플렉서블하게 운용하고 있다.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이던 점심시간이 없어진 대신 11시 30분부터 1시 30분까지 두 시간의 점심시간 코어타임제를 운용하고 있지만, 점심을 언제 먹을지는 생체 리듬과 업무 스케줄에 맞춰 각자 결정한다. 이회장은 앞장서서 리드하는 타입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형이다. 나아가 그게 자신의 몫이고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분야별로 훌륭한 CEO(최고경영자)들을 영입하고 이들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내 스타일이죠. CJ의 임직원들에게서 창의와 도전을 끌어낼 수 있는 기업문화를 만들어내고, 이를 위해 회사 분위기를 바꿔가는 것도 내 일입니다. 회사 내 호칭 같은 것도 위가 변해야 뿌리를 내릴 수 있죠.” 창의와 도전은 정직·팀워크·존중·고객 등과 함께 제일제당의 여섯 가지 가치(CJ 밸류즈)에 속한다. CEO의 요건으로 그는 네 가지를 꼽는다. ▶국제화 마인드 ▶비전과 전략 ▶과업 수행자(executer)로서의 실행력 ▶오픈 마인드. 다른 재벌 2, 3세들과 달리 고대 법대를 나온 국내파로 졸업 후 미국계인 씨티은행에 2년여 근무한 게 유일한 ‘해외 이력’인 그가 말하는 국제화 마인드는 외국어 구사능력과는 거의 무관하다. “요즘 수퍼마켓이나 백화점에 가면 정말 다양한 국적의 제품들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경쟁상대가 더 이상 국내 기업이 아니예요. CJ의 내수 비중이 높다고 국제적인 흐름을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이죠. 우리 시장에서도 다국적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만큼 그들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국제화 마인드가 필수입니다.” 몇년 전 인구에 회자된 공익광고 ‘당신의 경쟁상대는 어느 나라 누구입니까’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CJ가 ‘커런트 자키(current jockey)’가 돼야 한다는 사령탑으로서의 메시지다. 그는 또 비전과 전략이 없는 사람은 매니저지 CEO가 아니라고 말한다. 과업수행자란 전통적인 경영자의 역할이다. 경영자는 교수나 컨설턴트 같은 이론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픈 마인드는 다른 세 가지 요건의 기반이 되는 말 그대로 마인드이다. 어떤 일도 CEO 혼자서는 할 수 없고 조직이 공유해야 하는데,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야만 진정한 공유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그의 오픈 마인드는 회의 진행 스타일에서 잘 드러난다. 회의 때 그는 남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다른 임원의 의견에 대해 노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말하면 끝까지 듣고 나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측면을 지적해 줬는데, 다른 임원들의 생각은 어떠냐”며 토론을 이끌어내는 식이다. 그가 의전엔 질색인 것도 이런 오픈 마인드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2000년 봄 이재현 당시 부회장이 혼자 로스앤젤레스에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거래처 사람들과 만나고 있는데 현지 주재원이 나타났다. 뒤늦게 알게 돼 “죄송하다”는 그에게 이부회장은 “나는 내 일을 하고 여러분은 여러분 일을 하는 것”이라며 의전을 사양했다. 귀국 후 그는 임원회의에서 “불필요한 의전에 신경쓰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는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린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도 부담스러워 한다. 이 점에서 그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과 닮았다. 그는 삼성 비서실 출신인 손병두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백년에 한 번 나오는 경영의 귀재로 추앙하는 이병철 회장의 장손이다. 이 때문에 ‘리틀 이병철’이라는 애칭도 있다. 1백68㎝에 마른 편인 그는 할아버지의 양복을 그대로 입을 만큼 생전의 이회장과 체격도 비슷하다. 이병철 회장은 83년 여름 그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입사시험을 치러 씨티은행에 들어간 사실을 뒤늦게 알고 “재현이에게 왜 남의집살이를 시키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2년 만에 제일제당으로 옮긴 그는 경리부·관리부에서 경영 수업을 한 뒤 92년 말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로 발령을 받지만, 이듬해 여름 제일제당 상무로 복귀한다. 그에 앞서 삼성은 제일제당을 포함해 일부 계열사들을 매각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가 삼성전자에 ‘입성’했을 때 삼성 내부에서는 장손의 후계자 ‘등극’ 여부에 촉각을 곧두세웠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병철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과는 숙질간. 이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보다 여덟살 위로 그와는 경복고 동문이기도 하다. 93년 말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 전 회장이 펴낸 두 권의 책(「수상록-묻어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은 이재현 회장과 삼성과의 갈등의 기폭제가 됐고, 결과적으로 제일제당의 독립을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는 생전의 이병철 회장이 살던 서울 장충동 집에서 어머니 손복남 여사, 동갑나기 부인 김희재씨와 함께 살고 있다. 10대인 딸·아들은 해외 유학 중. 할머니 고 박두을 여사도 2000년 1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 집에서 그와 살았다. 박여사의 장례식 땐 오랜 세월 은둔생활을 해온 그의 아버지 이맹희 전 회장도 모습을 드러냈고, 그가 상주 역할을 했다. 나서지 않는 그의 처신은 일찍이 그룹 후계문제를 둘러싼 가족간의 갈등을 보며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지난해 여름 매경이코노미가 경제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재벌총수·후계자 경영능력 평가 서베이에서 박용만 두산 사장과 함께 후계자 부문 공동 1위를 했다. 분야별로는 경영능력·혁신성·인사 공정성·경영실적 등에서 1위를 했고, 도덕성·상속 투명성·국제화 마인드·e비즈니스 능력 등의 분야에서는 2위로 평가됐다. 지난 2월 그의 회장 취임으로 汎삼성家엔 3세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그보다 다섯살 위인 한솔그룹 조동길 회장이 있지만, 그는 이병철 회장의 장녀인 이인희 고문의 막내아들이다. 더욱이 제일제당은 삼성의 첫 제조업체로 삼성그룹사에 획을 그은 기업이다. 96년 제일제당은 독자적인 그룹으로의 출범을 알리며 2010년 10대 그룹으로 도약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후 5년여, CJ39쇼핑 인수 등 사업다각화에 주력해 그룹의 형태를 갖추었고, 핵심역량의 월드클래스화 등 안정화로 나아가고 있다. 지난 4월 주주 지분변동 조사업체인 미디어에퀴터블에 따르면 자산 기준 재계 17위인 제일제당의 시가총액은 현대·금호를 제치고 재계 6위이다. 2010년이면 이회장의 나이 지천명(知天命·50)이다. 제일제당이 명실상부하게 재계 10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지는 상당 부분 오너 경영인으로서의 그의 경쟁력에 달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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