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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디스카운트 키운 중복상장…해법은 차등 규율 [대신경제연구소 ESG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자회사 중복상장을 둘러싼 논의가 자본시장 제도개선의 화두로 떠올랐다. 모회사가 이미 상장된 상태에서 알짜 사업을 떼어 자회사로 따로 상장할 때마다 모회사 주가가 흔들리고 기존 일반주주가 손실을 본다는 문제의식이다. 동일한 사업가치가 모회사와 자회사에 중복 반영되고, 모회사·자회사·지배주주 사이에 이해상충이 구조적으로 내재된다는 점에서 이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요인으로 지목돼 왔다.수치도 이를 뒷받침한다. IBK투자증권의 분석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상장사가 보유한 다른 상장사 지분의 시가총액 비중은 한국이 약 18%로, ▲일본(4.38%) ▲대만(3.18%) ▲미국(0.35%)을 압도한다. 국내 실증연구를 보면 자회사 상장 계획이 공시되는 시점에는 ‘가치 현재화’ 기대로 모회사 주가가 일시적으로 약 1% 오르지만, 상장일 전후로는 음(-)의 누적초과수익률이 나타나고, 상장 후 6개월까지의 보유수익률은 약 -10.8%로 손실이 깊어진다. 모회사의 주가순자산비율(PBR)도 자회사 상장을 계기로 약 1.59에서 1.07로 떨어진다. ▲이익의 더블카운팅▲보유 지분의 유동성·수익환원 제약 ▲지배주주의 사적이익 추구가 겹쳐 모회사의 구조적 저평가를 낳는다.분할 자체가 문제 아냐…유형별로 결과 달라져여기서 흔히 빠지는 오해가 ‘모든 분할, 모든 자회사 상장은 나쁘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물적분할 자체는 사업부문별 전문화와 자금조달 효율화를 통해 중장기 기업가치를 끌어올린다. 한 분석에서는 분할 전후 기업가치 지표가 약 1.88에서 2.26으로 20% 넘게 상승했다. 해외의 자회사공개(equity carve-out)와 스핀오프 역시 주가에 긍정적이거나 중립적인 영향을 주고, 국내 인적분할도 마찬가지다. 분리되는 회사의 주식이 기존 주주에게 지분비율대로 배분돼, 주주가 자회사 가치를 누리기 때문이다.시장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대상은 ‘분할’이 아니라 ‘모회사 일반주주에게 가치 귀속을 보장하지 않는 자회사 별도 상장’이다. 문제는 구조조정이 모회사 주주에게 비용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설계·실행된다는 데 있다.2021년부터 2025년까지 국내에서 신규 상장된 기업 가운데 최대주주 역시 상장사인 경우를 모회사 주가 상대수익률 기준으로 분해해 보면, 전체 평균은 6개월 기준 +1.4%로 오히려 소폭 플러스였다. 그러나 유형별로 구분하면 결과가 달라진다. 물적분할로 자회사를 상장한 모회사는 -21.5%로 크게 하락한 반면, 물적분할이 아닌 방식(기존 법인 인수·현물출자 등)으로 상장한 법인은 +7.1%를 기록했다. 상장시장에서도 코스피 모회사는 -10.7%였지만 코스닥 모회사는 +18.4%로 뚜렷한 플러스였다.즉, 음(-)의 충격은 ‘물적분할형’과 ‘코스피 모회사’에 집중된다. 핵심 사업이 주주 동의 없이 분리·상장되며 가치 이전 우려가 가장 첨예한 영역이다. 반대로 독립 법인을 인수해 상장하거나 코스닥에 올리는 경우엔 부정적 효과가 잘 관찰되지 않거나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보인다. 모든 자회사 상장을 한 묶음으로 규율하는 것은 데이터가 보여주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 해외의 답은 ‘사전 금지’가 아니라 ‘사후 규율’해외 사례도 유사하다. 미국은 모자회사 동시상장을 금지하지 않는 대신 지배주주가 있는 ‘지배기업’(controlled company)에 대해 사후 책임법리와 시장규율로 일반주주를 보호한다. 델라웨어 회사법은 이해상충 거래에 ‘완전한 공정성’(entire fairness) 심사를 적용하되, 독립적 특별위원회 승인과 소수주주 다수동의(MoM) 같은 보호장치를 갖추면 입증책임을 덜어주는 식으로 바람직한 절차를 유도한다. 증권거래소는 지배기업의 지배구조 위험을 공시하게 해 시장이 가격에 반영하도록 하고, 세제는 주주에게 가치가 직접 귀속되는 분리 방식을 우대한다. 진입을 막기보다 잘못된 설계에 사후적으로 무거운 책임을 지우는 모델이다.정부가 2026년 3월 발표한 신규 중복상장 ‘원칙 금지·예외 허용’ 기조는 그동안 누적된 폐해를 고려하면 이해할 만한 출발점이다. 다만 사전적 진입규제가 지나치게 강하면 정상적인 자금조달과 사업 구조조정까지 위축시킬 수 있다. 제도의 무게중심은 ‘일률적 금지’가 아니라 ‘유형별로 정교하게 설계된 거래소 정책과 가이드라인’에 둬야 한다. 첫째, 한국거래소의 상장심사 단계에서 물적분할형처럼 가치 이전 우려가 큰 유형과 독립 법인 인수형처럼 우려가 작은 유형을 차등화해 심사 강도와 보호장치 요건을 달리 적용해야 한다. 둘째, 모회사 주주총회 동의·신주인수권 부여·현물배당 등 일반주주 보호장치는 상장 규모와 이해상충의 크기에 비례해 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셋째, 사전 진입규제만으로는 이미 형성된 중복상장 구조나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사안의 이해상충을 통제하기 어려운 만큼 지배주주의 일반주주에 대한 충실의무와 실효적 사후 구제라는 규율을 병행해야 한다. 넷째, 주주에게 가치가 직접 돌아가는 인적분할·스핀오프형 분리에는 세제·절차적 유인을 부여해 시장이 스스로 바람직한 방식을 택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중복상장 문제의 해법은 ‘하느냐 마느냐’의 이분법이 아니다. 모든 자회사 상장을 죄악시하는 순간, 시장은 가치를 높이는 구조조정마저 잃는다. 해법은 유형을 정밀하게 구분하고 위험이 큰 유형에는 강하게, 작은 유형에는 약하게 차등화된 규율을 적용하는 데 있다. 일률적 금지는 단순하지만 부정확하고, 유형별 가이드라인은 복잡하지만 정밀하다. 필요한 것은 후자다.

2026.07.12 10:00

4분 소요
홍명보의 사과가 남긴 것…브랜드는 패배보다 태도로 무너진다 [허태윤의 브랜드스토리]

전문가 칼럼

세상에 축구처럼 특별한 상품이 또 있을까. 특히 전세계 예선을 거쳐 엄선된 강팀이 실력을 겨루는 월드컵은 말할 필요가 없다. 개최국의 시차 때문에 어떤 시간에 열려도, 경기를 보기위해 알람을 맞추고 일어난다. 아니, 잠들지 못한다. 개막 몇 주 전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조 편성표를 외우고, 상대 팀 전력을 검색하고, 낯선 나라의 도시 이름을 발음해 본다. 어떤 이는 연봉을 털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간다. 휴가를 쓰고, 사표를 내고, 카드빚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90분 경기를 눈앞에서 보려 한다. 광고 한 번 하지 않았는데 전 국민이 같은 시간에 같은 화면 앞으로 모인다. 경기장 밖이라도, 다른 나라에서 열려도 그 현장의 경험을 나누기위해 광장에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마케팅 교과서를 다 뒤져도 이만한 몰입은 없어보인다.마케팅에는 '관여도'(involvement)라는 말이 있다. 소비자가 그 대상에 마음을 얼마나 깊이 거는가를 재는 척도다. 치약 같은 상품은 관여도가 낮다. 아무 브랜드나 집어도 그만이다. 자동차나 집은 관여도가 높다. 그래서 오래 고민하고 크게 건다. 그렇다면 국가대표 축구는 어디쯤일까. 관여도의 꼭대기, 그 너머다. 돈을 걸고, 시간을 걸고, 잠을 걸고, 끝내 감정을 통째로 건다. 이긴 날엔 모르는 사람과 얼싸안고, 진 날엔 며칠을 앓는다. 이토록 깊이 마음을 거는 상품은 세상에 흔치 않다.그래서 국가대표 축구는 스포츠이기 이전에 하나의 브랜드다. 변방의 축구 후진국에서 일약 세계 4강을 경험한 우리가 가진 가장 거대한 브랜드다. 누구도 회원으로 가입한 적 없는데 전 국민이 팬이고, 세대를 건너 물려받은 마음으로 지어진 자산이다. 이런 브랜드는 돈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한번 금이 가면 돈으로도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브랜드의 진짜 얼굴은 무너질 때 나온다그 브랜드가 지금 흔들린다. 단순히 졌기 때문이 아니다. 멕시코·남아프리카공화국·체코와 한 조, 험하지 않은 조였다. 체코를 잡고 출발했지만 멕시코와 남아공에 내리 졌다. 1승 2패. 그것도 국제축구연맹(FIFA·피파) 랭킹이 한참 아래인 남아공에 0-1로 패했다. 본선이 48개국으로 늘어난 무대에서 조차 토너먼트를 밟지 못했다. 그러나 더 깊은 상처는 점수판이 아니라 그 뒤에 있었다. 협회장과 사령탑이 동시에 사라졌고, 컨트롤 타워는 비었다. 당장 9월 A매치도 또 임시 감독으로 치러야 할 판이다. 협회엔 대책이 없었고, 그 빈자리의 한가운데에 감독 한 사람이 희생양으로 세워졌다.브랜드는 패배로 무너지지 않는다. 패배를 다루는 방식으로 무너진다. 그리고 지금의 방식이라면, 이 거대한 브랜드가 다시 광장을 붉게 물들이기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잘나갈 때의 얼굴은 누구나 비슷하다. 브랜드를 오래 들여다본 사람은 안다. 브랜드의 진짜 얼굴은 호황에 나오지 않는다. 박수가 쏟아질 때 모든 브랜드는 근사한 말을 하고, 그 말들은 서로 닮아 있다. 차이가 드러나는 건 일이 틀어졌을 때다. 리콜이 터지고 사고가 나고 고객이 등을 돌리는 순간, 바로 그때 그 브랜드가 평소 무엇을 품고 있었는지 민낯으로 드러난다.1982년 미국에서 누군가 타이레놀에 독극물을 넣어 사망 사고가 났다. 존슨앤드존슨의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회사는 제품을 즉시 회수했다.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해명보다 사람의 안전을 앞세웠다. 그 결정이 타이레놀을 살렸다. 위기가 도리어 신뢰의 증거가 된 드문 사례다.우리에겐 반대의 기억이 더 많다. 2013년 남양유업은 대리점에 물건을 떠넘긴 녹취가 공개되자 사과 회견을 열었지만, 그 자리가 오히려 분노를 키웠다. 고개는 숙였는데 사람들이 듣고 싶던 말은 없었고, 잘못의 구조를 인정하는 대신 덮으려는 표정이 먼저 읽혔다. 불매운동은 회견 뒤에 더 거세졌다. 이듬해 터진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도 다르지 않았다. 사과문은 정중했다. 그러나 그 정중함 뒤에서 사람들은 진심이 아니라 매뉴얼을 읽었다. 형식은 완벽한데 태도가 비어 있었고, 대중은 그 빈자리를 정확히 알아챘다.사과에는 두 개의 층이 있다. 형식과 태도다. 형식은 문장과 표정, 그리고 절차이고, 태도는 그 아래 흐르는 마음이다. 형식은 며칠이면 만든다. 홍보팀이 다듬고 변호사가 검토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과문이 나온다. 그러나 태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쌓아온 것이 그 순간 새어 나올 뿐이다. 사람들은 형식을 읽는 게 아니라,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태도를 읽는다. 12년 전, 토씨까지 똑같았던 한마디이번 홍명보 감독의 말도 그랬다. "모든 책임은 감독인 나에게 있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가 12년 전에도 똑같이 말했다는 데 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1무 2패로 주저앉았을 때도 책임을 자기에게 돌렸다. 같은 문장이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돌아온 순간, '책임'이라는 단어는 무게를 잃는다. 반복된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절차가 된다.부임할 때 그는 "저는 저를 버렸습니다"라고 했다. 비장하다. 그런데 주어가 전부 '나'다. 내 책임, 내 명예, 나의 헌신. 여기에 공감의 핵심이 있다. 팬이 묻던 것은 감독의 명예도, 그의 자기희생 서사도 아니었다. '우리가 느낀 실망을 당신은 아느냐'였다.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을 물었는데, 그는 '나'의 책임으로 답했다. 주어가 어긋난 것이다. 공감의 실패는 대개 마음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주어가 자기에게 고정돼 있어서다. 브랜드도 같다. 위기의 순간 기업은 "우리가 이만큼 노력했다"고 말하고, 소비자는 "내가 이렇게 느꼈다"를 듣고 싶어 한다. 주어가 '우리'에 머무는 한, 아무리 진심을 담아도 그 말은 상대에게 도착하지 않는다. 공감은 마음의 양이 아니라 주어의 방향이다.브랜드가 사랑받는 이유는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무너지지 않는 브랜드는 없다. 끝내 곁에 남는 브랜드는 실패한 적 없는 브랜드가 아니라, 실패를 잘 견딘 브랜드다. 넘어진 자리에서 변명 대신 진심을 꺼내고, '나'가 아니라 '당신'을 먼저 부른 브랜드다.국가대표 축구라는 거대한 브랜드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전 국민을 팬으로 둔 자산이 한 번의 패배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 회생에 걸리는 시간은, 점수판이 아니라 태도가 결정한다. 사과문은 하루면 쓴다. 그러나 그 사과가 신뢰가 될지 조롱이 될지는 그동안 쌓아온 태도가 정한다. 잘나갈 때 만든 말은 다 비슷하다. 무너질 때 꺼내는 한마디가, 그 브랜드의 전부다.

2026.07.11 10:00

4분 소요
럭셔리 브랜드를 만든 특별한 고객들 [이윤정의 언베일]

전문가 칼럼

럭셔리 브랜드에 “고객이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과 취향을 갖춘 이 시대의 오피니언 리더”라는 답이 돌아올 것이다.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이들이 럭셔리 브랜드의 고객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위와 같은 정의는 ‘판매 대상’으로서의 고객을 뜻한다. 몇몇 브랜드에는 설립 초기부터 역사를 함께 해온 특별한 고객이 존재한다. 브랜드에 영감을 주고 공감하며 브랜드가 성장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운 이들이다.에르메스의 첫 번째 고객은 말필자가 ‘에르메스’(Hermes)를 취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주 들었던 표현 중 하나는 “우리의 첫 번째 고객은 말(馬)입니다”라는 것이었다. 궁금증은 에르메스의 역사를 살피면서 해소됐다.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에 의해 설립된 브랜드는 마구 공방에서 출발했다. 당시 에르메스의 고객은 ▲왕족과 귀족 등 마차 소유주 ▲기병 장교 ▲승마 애호가 등이었다. 실상 에르메스가 만든 제품의 소비자는 말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말이 에르메스의 기술력을 키운 주인공일까.말은 매우 예민한 동물이다. 가죽이 조금만 거칠어도 상처가 나고 얹힌 무게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움직임이 저하되곤 한다. ▲안장 ▲굴레 ▲마차용 하네스 등 몸에 닿는 모든 것이 불편하면 경기력이 저하될 정도다. 에르메스는 처음부터 최고급 가죽을 선별하고 정밀한 재단을 통해 완벽하게 손으로 봉제된 편안한 제품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원칙은 다양한 제품에 반영됐다. 버킨이나 켈리 백에 적용된 새들 스티치(saddle stitch)도 원래는 승마용 장비 제작 기술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사를 알고 나면 에르메스의 로고에 담긴 말과 마차의 의미가 저절로 와 닿는다. 에르메스는 말과 관련된 용품을 제작하는 일 외에도 지속적으로 ‘소 에르메스’(Saut Hermes)라는 국제 승마 대회를 후원 중이다. 몇 년 전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소 에르메스 경기를 관람했다. 당시 비단결 같은 갈기를 지닌 아름다운 말의 자태뿐 아니라 경기 후 애프터 파티에 모인 VIP(귀빈)들이 들고 온 수많은 버킨과 켈리 백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웨이팅 리스트가 몇 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전 세계에서 다채로운 버킨이 한자리에 모인 모습이 선명히 떠오른다. 정장 아닌 ‘제냐’를 만든다남성복의 대명사인 ‘제냐’(Zegna)의 초창기 고객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다. 제냐의 최초 고객은 ‘재단사’(tailor)였다. 제냐는 1910년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의 트리베로에서 에르메네 질도 제냐가 작은 울 공장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창립자의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단을 만드는 일’이었다. 실제로 제냐는 초창기 수십 년 동안 고급 원단 업체로 유명세를 떨쳤다. 일반 소비자도 원단을 까다롭게 고르지만 재단사의 세심함은 그 이상이다. 그들은 ▲원사의 품질 ▲직조 밀도 ▲원단 탄성 ▲재단의 용이성 ▲내구성 등을 꼼꼼하게 살핀다. ▲영국 ▲이탈리아 ▲미국 등의 고급 재단사(테일러)는 고객에게 “제냐의 원단으로 슈트를 만들었다”는 점을 판매 전략으로 삼았다. 국내의 유명 테일러도 위 멘트를 자주 사용했다. 그만큼 남성의 슈트에서 원단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제냐는 일관된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필리에라’(Filiera)라는 시스템을 갖췄다. ‘필리에라’는 원자재 조달부터 직물 생산, 완제품 디자인 및 유통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전 밸류 체인을 수직 통합하는 구조다. 1968년부터 직접 남성복을 만들기 시작한 제냐는 그간 최고경영자(CEO)와 금융계 부호 등의 슈트로 명성을 떨쳤다. 영화 ‘거짓 혹은 진실’(Nothing but the Truth)에서 기자 레이첼 암스트롱은 정치 거물인 알버트 번사이드에게 “Nice Suit.”(정장이 멋지네요)라고 말한다. 알버트는 “That’s not a suit. It’s a Zegna.”(이건 그냥 정장이 아니라 제냐입니다)라고 답한다. 테일러를 위한 최고의 원단을 만들어온 제냐의 정체성을 잘 드러낸 대사다. 현재 제냐는 아티스틱 디렉터인 알레산드로 사토리의 지휘 아래 럭셔리 레저 웨어로도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다. 원단에 진심인 로로피아나원단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브랜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로로피아나’(Loro Piana)다. 로로피아나 가문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양모와 직물을 거래하는 상인이었다. 1924년 피에트로 로로 피아나가 현재의 회사를 설립한 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에 최고급 울과 캐시미어 원단을 공급하며 명성을 쌓았다. 로로피아나는 40년 이상 몽골의 목축 공동체와 협력해 최고급 캐시미어를 확보했다. 로로피아나의 주요 소재로 유명한 ‘비큐나’(vicuna)는 캐시미어보다 훨씬 가늘고 부드러우며 생산량이 극히 적어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천연 섬유 중 하나다.비큐나는 안데스 산맥에 사는 야생동물로 흔히 ‘신의 섬유’라고 불린다. 로로피아나는 1994년 페루 정부 및 안데스 지역 공동협의체와 협약을 맺고 살아있는 비큐나에서 채취한 섬유만을 사용하는 보호 프로그램을 시작할 정도로 비큐나에 진심이다. 탁월한 원단을 바탕으로 로로피아나가 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로로피아나가 ‘조용한 럭셔리’의 대표 주자로 부상한 계기도 원단의 우수함 때문이다. 수많은 제품을 경험한 상류층에게 결국 중요한 요소는 ‘편안한 착용감’이다. 로고나 디자인이 아니라 입었을 때의 촉감이 급을 나누는 것이다. 필자는 로로피아나를 잘 몰랐던 시기에 우연히 스카프를 구입한 적이 있다. 피부에 착 감기는 느낌이 좋아서 애용하는 제품이다. 부자들에게는 일상의 아이템이 될 수밖에 없는 요소다.에르메스와 제냐 그리고 로로피아나의 고객은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브랜드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예민하고 직업 정신이 투철한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과정이 오롯이 제품에 반영돼 현재의 인기를 만들었으니 첫 번째 고객은 후원자라 해도 무방하다.

2026.07.05 09:00

4분 소요
부의 흐름 가를 핵심 변수는 [새로 나온 책]

산업 일반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 중동 지정학 리스크, 인공지능(AI) 기술의 급격한 발전까지. 세계 경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거시경제 전문가 오건영 신한 프리미어 패스파인더 단장이 신간 ‘부의 갈림길’을 출간했다.이 책은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 환경 속에서 투자자들이 반드시 주목해야 할 다섯 가지 핵심 변수를 중심으로 앞으로의 투자 방향을 제시한다. 단기적인 투자 기법이나 유행을 좇기보다 세계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이해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산을 바라보는 통찰을 담았다는 점이 특징이다.첫 번째 파트에서는 전쟁 이후 달라질 세계 무역과 공급망 재편을 조망한다. 두 번째 파트는 양극화가 심화되는 K자 경제 속에서 성장 산업과 침체 산업을 구분하고, 세 번째 파트에서는 연준 의장 교체 가능성과 통화정책 변화가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을 분석한다. 이어 AI 혁명이 경제와 산업, 투자에 미칠 영향을 다양한 시나리오로 풀어내고, 마지막으로 미국 달러의 미래와 글로벌 자산시장 변화를 전망한다.오건영 단장의 강점인 스토리텔링도 책 전반에 녹아 있다. 복잡한 거시경제 이론을 일상적인 사례와 역사적 사건에 빗대 쉽게 설명해 경제 초보자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어려운 경제 현상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내는 그의 강의는 60만명이 넘는 구독자와 수천만 회의 누적 조회수를 기록하며 큰 호응을 얻고 있다.단기 투자 기술보다 큰 흐름을 읽는 데 초점을 맞춘 이 책은 파편화된 뉴스 너머 세계 경제의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혼돈의 시장 속에서 자산의 방향을 다시 점검하고 싶은 독자에게 새로운 부의 지도를 제시한다. 집밥력유튜브 채널 '홀썸모먼트'의 홀썸 작가가 건강한 집밥을 위한 142가지 레시피를 담았다. 초가공식품과 밀가루, 설탕은 줄이고 신선한 홀푸드를 중심으로 구성했으며, 마파두부와 토마토 코코넛 치킨 카레, 삭슈카, 수프, 스튜 등 다양한 메뉴를 소개한다. 대부분 5단계 안팎의 간단한 조리법으로 바쁜 일상에서도 쉽게 실천할 수 있다. 저자는 특정 식단을 강요하기보다 체질과 생활 습관에 맞춘 '내 몸 중심' 식사를 제안하며, 식단 일지와 당 섭취 기록지 등 실천 부록도 함께 수록했다.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물리학자 김상욱이 인간과 사회, 우주를 바라보며 던지는 28가지 질문과 통찰을 담았다. 저자는 자연법칙처럼 변하지 않는 진실이 우리의 삶과 사회에도 존재하는지 탐구하며, 인간 본성과 욕망, 역사와 문명, 의미와 가치의 본질을 살펴본다. 모방과 편견,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사랑과 죽음, 국가와 문명의 흥망을 과학적 시선으로 풀어내고, 마지막에는 인간만이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내는 존재임을 이야기한다. 복잡한 시대를 이해하는 새로운 사고의 기준을 제시하는 인문 교양서다. 의약품 살인사건약과 독의 경계를 실제 사건으로 풀어낸 과학 교양서다. '우유주사'로 알려진 프로포폴 사건과 수면제 범죄, 감기약 성분 오남용 사례 등을 통해 치료제가 어떻게 범죄의 도구가 되는지 살펴본다. 약화학자인 저자는 프로포폴과 비타민A, 멀미약 등 익숙한 의약품의 작용 원리와 위험성을 알기 쉽게 설명하며, 신약 개발과 제약산업의 이면, 의약품을 둘러싼 사회적 책임까지 함께 짚는다. 추리소설처럼 흥미로운 전개 속에서 약의 양면성을 이해할 수 있는 과학 교양서다.

2026.07.05 08:00

2분 소요
‘열번 중 아홉번은 실패한다’…‘유니클로’에서 찾은 버티는 힘[CEO의 서재]

“처음에는 유니클로라는 글로벌 브랜드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다룬 일반적인 경영서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 야나이 다다시라는 이름, 일본 최고의 부자, 전 세계 3600여 개 매장을 거느린 패션 기업. 그 수식어들만 보면 이 책이 눈부신 성공담을 정리해놓은 책처럼 보인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이 책의 진짜 매력은 성공담보다 실패의 이야기에 있었다.”스기모토 다카시가 쓴 ‘유니클로’는 유니클로 창업주 야나이 다다시가 아버지에게 고향의 작은 양복점을 물려받은 뒤 오늘날의 유니클로로 키워낸 40년 일대기를 담은 책이다. 단순한 기업 경영서의 틀을 넘어 한 편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처럼 읽힌다는 평을 받는 이 책은, 지방의 작은 회사에서 출발해 수많은 시행착오와 방황, 조직 내부의 갈등, 해외 진출 실패를 겪으며 조금씩 자기만의 길을 찾아갔다는 점을 솔직하게 보여준다.양준규 컬쳐히어로 대표는 LG와 카카오에서 다양한 서비스를 담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2015년 컬쳐히어로를 창업했다. 컬쳐히어로는 레시피 중심의 푸드 콘텐츠에서 시작해, 현재는 ‘우리의식탁’을 통해 콘텐츠와 커머스를 결합한 푸드 콘텐츠·커머스 플랫폼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300만 구독자와 230만 앱 다운로드를 기반으로 성장해왔지만, 그 과정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밀키트 ▲커머스 ▲브랜드 협업 ▲자체 상품 기획 등 새로운 시도를 하나씩 더해가며 다양한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다. 최근에도 셰프 IP비즈니스, 라이브커머스 솔루션, K푸드 수출 등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유니클로를 읽으며 유니클로라는 글로벌 브랜드의 결과보다, 그 뒤에 있었던 실패와 변화의 시간, 고객을 이해하며 사업을 다듬어온 과정에 더 깊이 공감했다고 말했다.사업을 하다 보면 우리는 성공한 회사의 결과만 보게 된다. ▲매출 ▲기업가치 ▲글로벌 진출 ▲창업자의 카리스마 같은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실제로 회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훨씬 더 지저분하고 불확실하고, 때로는 초라한 시간의 연속이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숨기지 않고 보여준다. 미국 진출에서 싸늘한 반응을 마주했고 영국에서 낸 매장 21개 중 16개를 닫아야 했으며 아동복 사업은 전면 철수했다. 야나이 다다시 본인의 말처럼 “열 번 시도하면 아홉 번은 실패한다.” 양 대표는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더 배울 점이 많았다고 밝혔다. 특히 좋았던 부분은 유니클로의 성공이 어떤 하나의 천재적인 아이디어나 한 번의 행운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모든 성공에는 운이 필요하다. ▲시장의 타이밍 ▲고객의 변화 ▲시대적 흐름 같은 것은 사람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양 대표는 “중요한 것은 그 운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는 힘, 그리고 운이 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을 만큼 준비돼 있는가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플리스 재킷 2600만장 판매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은 수많은 실패 끝에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읽어낸 결과였다.유니클로는 실패할 때마다 그냥 버틴 것이 아니라, 계속 바꾸고 배웠다. 아동복 브랜드가 실패하자 그것을 키즈 라인으로 흡수했고, 도심형 1호 매장이 폐점하자 타깃 고객을 다시 정의해 2호점을 열었다. "실패했다고 낙심하며 뚜껑을 덮어버리면 반드시 똑같은 실패가 반복된다"는 야나이 다다시의 말이 그래서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버틴다는 것은 가만히 참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배우면서 형태를 바꿔 살아남는 것에 가깝다.양 대표에게 이 책은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책이라기보다 ‘실패를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경영을 하다 보면 답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 반드시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막연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계속 배우고 고치면서 버티는 힘이다. 화려한 성공 공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패를 통과하는 태도이고, 운이 올 때까지 무너지지 않는 체력이다. 유니클로는 그 점을 아주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2026.07.0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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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있는데 세금 낼 돈이 없다…상속 준비는 지금부터 [스페셜리스트뷰]

전문가 칼럼

필자는 공익적 차원에서 몇 년째 상속인을 대상으로 상속세 상담을 무료로 진행 중이다. 최근 부동산 대책으로 상속세 납부의 현실을 상속인에게 전달하면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많이 느낀다. “아버지 집 한 채면 충분히 세금 내고도 남을 줄 알았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서울에 있는 집은 24억원, 통장에 든 현금은 1억원 남짓. 상속세는 정해진 기한 안에 현금으로 내야 하는데 그 기한이 6개월이다. “그럼 집을 팔면 되죠”라는 대답에 한 가지를 더 말씀드려야 했다. “요즘은 그 집을 사 줄 사람을 찾는 것부터가 일입니다.”예전에는 부동산이 많으면 ‘부자’라고 불렀다. 상속세가 나와도 집을 팔면 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택 제도로 인해 그 단순한 해법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 자산은 분명 많은데 정작 그 자산을 지킬 현금이 없는 가정. 상담하면서 매주 마주하는 풍경이다. 2026년 현재 부동산은 있는데 현금이 없는 가정에서 상속세가 어떻게 가족을 흔드는지, 그 충격을 미리 막을 방법은 무엇인지 정리해 보겠다.“집 한 채뿐”은 착각…‘급매의 악순환’ 시작될 수도상담을 시작하면 대다수가 “저희는 집 한 채밖에 없어서 상속세는 별로 안 나올 거예요”라고 말한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대부분의 고인은 평생 검소하게 살았고, 명품을 두른 것도 아니고, 외제차를 굴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상속세는 그분이 얼마나 알뜰하게 살았는지를 보지 않는다. 사망 당시 남겨진 재산이 얼마인지에 대한 숫자만 본다. 문제는 그 숫자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커져 버렸다는 점이다. 20~30년 전 대출 끼고 산 집 한 채를 오래 들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 날 그 집이 20~25억이 됐다. 집값은 몇 배 상승했지만 월급은 그만큼 오르지 않았다. 자산만 보면 자산가인데, 현금 흐름은 여전히 대중교통과 에코백을 들고 다니는 중산층이다. 통계청·한국은행·금융감독원이 함께 내는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우리 가구 자산에서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실물자산 비중은 70%를 넘지만 금융자산은 4분의 1 안팎에 그친다. 돈이 집에 묶여 있고 통장은 가볍다는 뜻이다.서류상으로는 분명 자산가인데, 생활은 평범한 사람을 나는 ‘평범한 부자’라고 부른다. 평범한 부자야말로 상속세 앞에서 가장 위험하다. 진짜 부자는 현금도 많지만, 평범한 부자는 부동산만 있고 현금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상속세는 ‘사망한 날의 재산’을 기준으로 계산한다. 상속세를 막연히 무서워만 하면 대비가 안 된다. 계산 구조를 한 번만 따라가 보면 의외로 흐름이 보인다.상속세는 크게 네 단계에 걸쳐 정해진다. 먼저 피상속인이 남긴 재산을 모두 더해 상속재산가액을 잡은 뒤 피상속인의 채무와 공과금, 장례비 등을 빼고 상속공제를 적용한다. 자녀만 있을 때 흔히 쓰는 일괄공제가 5억원이다. 배우자가 살아 있다면 최소 5억원에서 실제 상속받은 금액에 따라 최대 30억원까지 배우자공제가 가능하다. 공제를 빼고 남은 과세표준에 세율을 곱한다. 세율은 10%에서 시작해 최고 50%까지 올라가는 누진 구조다. 실무에서는 배우자가 함께 상속받으면 10억원 안팎, 배우자가 없으면 약 5억원까지는 세 부담이 크지 않은 편이다. 최근 서울에 20억대 아파트 한 채만 있어도 이 선을 넘는 가정이 부쩍 늘었다. 부동산을 물려받으면 상속세만 부담해야 하는 게 아니다. ▲상속취득세 ▲등기비용 ▲감정평가비 ▲세무신고비용 등도 비용으로 계산해야 한다.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상속세는 신고와 납부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거주자가 사망하면 상속이 개시된 달의 말일부터 6개월 이내에 신고하고 세금을 내야 한다. 세무서는 유족이 집을 팔 때까지, 형제끼리 합의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자산이 부동산이든 현금이든 정해진 날짜에 ‘현금’으로 내야 한다. 문제는 부동산은 장부상 자산이지만 6개월 안에 저절로 현금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이제는 ‘집 팔아 세금 내기’도 쉽지 않다. 예전 상담에서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조언이 “정 안 되면 집을 팔아 세금을 내자”였다. 요즘은 이 말을 쉽게 못 한다. 정부의 대출 규제 때문이다.수도권·규제 지역에서는 주택 가격에 따라 주택담보대출 한도가 차등 적용된다. 지난 6월 29일 기준 ▲시가 15억원 이하 6억원 ▲15억원 초과~25억원 이하 4억원 ▲25억원 초과는 2억원까지로 묶여 있다. 상속받은 서울 아파트가 20억대일 경우 집을 사려는 사람은 대출이 4억원선에서 막혀 자기 돈을 16억원 넘게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상속인은 6개월 기한에 쫓겨 마음이 급한데 정작 매수자는 잔금을 마련하지 못해 거래가 안 된다. 결국은 값을 깎아야 거래가 성사된다. 세금을 내려고 ▲집을 내놓고 ▲팔려니 집값을 깎고 ▲깎으면 가족이 지키려던 소중한 상속 재산이 그만큼 사라진다. ‘급매의 악순환’이다. 세금 한 번 내자고 평생 모은 집을 제값보다 한참 싸게 넘기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부동산은 자산이지만, 상속세 납부기한 안에 제값으로 현금이 되어 주지는 않는다. 이 점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연부연납·물납 만능 아냐…상속 부담 낮추는 ‘종신보험’“한 번에 못 내면 나눠 내는 제도가 있다던데요?” 맞다. ▲분납 ▲연부연납 ▲물납 등의 제도가 있지만 만능 안전판은 아니다. 연부연납은 상속세를 최대 10년에 걸쳐 나눠 내는 제도다. 담보를 제공해야 하고 매년 가산금 성격의 이자가 3.1% 붙는다. 결국 빚을 내 세금을 납부하는 셈이다. 부담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뒤로 미뤄지고 이자가 더해질 뿐이다.납부할 세금을 마련하기 힘든 경우에는 연부연납 제도를 활용할 수밖에 없는데 전체적인 상속세 부담이 커지기 시작하자, 요즘 연부연납 신청은 거의 필수가 되는 상황이다.물납은 현금 대신 부동산 등으로 세금을 내는 제도인데 아무 부동산이나 받아 주지 않는다. 요건이 까다롭고, 받아 준다고 해도 평가액이 시세보다 낮게 잡히는 경우가 많다. 가장 아끼던 부동산을 헐값에 나라에 넘기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이런 제도는 ‘급할 때 쓰는 비상구’이지, ‘준비를 대신해 주는 장치’가 아니다. 가장 마음 편한 길은 처음부터 낼 돈을 현금성 자산으로 마련해 두는 것이다.상속세는 돈 문제로 끝나지 않고 가족 관계까지 흔든다. 특히 상속 재산이 부동산 한 채에 몰려 있을 때 그렇다.집은 하나인데 자녀가 셋일 경우 누군가는 그 집에 들어가 살고 싶고, 누군가는 팔아서 현금으로 나누고 싶다. 세금은 형제가 함께 내야 하는데 한 명은 여유가 있고 한 명은 당장 낼 돈이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부터 대화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집을 가졌으니 세금은 네가 더 내라” “나는 현금이 없으니 못 낸다” 하는 식이다. 평생 우애 좋던 형제도 세금 앞에서는 표정이 돌변한다.이때 가족 모두가 함께 쓸 수 있는 현금이 따로 마련돼 있다면 어떨까. 그 돈으로 세금을 먼저 처리하고, 집을 어떻게 할지는 그다음에 차분히 의논할 수 있다. 현금은 민감한 상속 분쟁의 불씨를 끄는 소화기 역할을 한다. 상속 설계에서 ‘납부 재원’을 따로 준비해 둬야 하는 이유다.솔직히 필자는 ‘종신보험’을 마냥 좋게만 보던 사람이 아니었다. 수익률만 따지면 아쉽고, 보험료 부담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종신보험을 ‘투자상품’으로 보지 않고 ‘상속세 낼 현금을 미리 만들어 두는 장치’로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종신보험의 핵심은 피보험자가 사망했을 때 보험금이 나온다는 점이다. 상속이 시작되는 시점에 상속인 손에 현금이 쥐어진다. 부동산은 팔려야 현금이 되고, 예금은 미리 있어야 하고, 대출은 심사를 통과해야 현금이 된다. 사망보험금은 요건만 갖추면 바로 현금화할 수 있다. 6개월이라는 기한을 떠올리면 이 시점의 차이는 절대 작지 않다. 이 현금은 상속세 납부 재원이자 남은 배우자의 생활비, 부동산 급매를 막는 방패이면서 형제간 정산 자금이 된다.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부분은 계약자·피보험자·수익자를 누구로 두느냐에 따라 세금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자녀가 계약자이자 수익자이고 부모가 피보험자일 때 보험료를 실제로 자녀가 본인 소득으로 납입했다면 사망보험금은 ‘본인이 낸 보험료로 받는 본인 돈’으로 상속재산에 포함되지 않을 수 있다.부모가 본인을 피보험자로 두면서 보험료까지 본인이 부담했다면 사망보험금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 간주상속재산으로 보고 상속세가 매겨질 수 있다. 계약자는 자녀인데 보험료를 실제로는 부모가 대신 내 준 정황이 드러나면 자녀에게 증여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같은 종신보험이라도 누가 계약하고 누가 보험료를 냈는지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이라는 의미다. 종신보험은 세금을 없애 주는 상품이 아니라 세금을 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상품이다. 절세를 노린 계약 구조가 가능한 경우라 하더라도 핵심은 ‘마법 같은 절세’가 아니라 ‘가족이 집을 지킬 현금을 미리 확보하는 일’이다. 상속세 계산·가입 시점 등 따져봐야…세무 검토 필수여기까지 읽고 “그럼 당장 가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잠깐 멈추길 권한다. 종신보험도 분명한 한계와 주의점이 존재한다. 그걸 모르고 가입하면 오히려 손해다.무엇보다 끝까지 낼 수 있는 보험료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상속세를 막자고 감당하기 어려운 보험료를 떠안으면 정작 지금의 생활이 흔들린다. 보험 설계보다 상속세 시뮬레이션이 먼저다. 우리 집 예상 상속세가 얼마인지, 가족의 현금으로 어디까지 감당되는지를 먼저 따져 봐야 ‘얼마짜리 현금 장치가 필요한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순서가 바뀌면 필요 이상으로 큰 보험에 들거나 정작 모자란 만큼은 준비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가입 시점도 중요하다. 연령과 건강 상태에 따라 가입 자체가 제한되거나 보험료가 크게 높아질 수 있어 준비는 빠를수록 선택지가 넓다. 계약자·피보험자·수익자 구조와 보험료를 실제로 누가 내느냐 하는 문제는 설계사의 설명만 듣고 결정하면 위험하다. 같은 보험이라도 이 구조에 따라 세금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만큼 반드시 세무 검토를 함께 받아야 한다. 종신보험은 ▲사전증여 ▲유언 ▲상속재산 분할 ▲배우자공제 ▲연부연납 등 다른 카드와 함께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한다. 보험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되기보다는 보험이 전체 상속 설계안에서 ‘현금 담당’을 맡는다고 보면 된다.상속은 언젠가 일어나는 일이지만, 준비는 오늘부터 할 수 있다. 거창한 컨설팅 없이 집에서 몇 가지만 차분히 따져 봐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다.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보유한 부동산의 현재 시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막연한 기억 속 가격이 아니라 최근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 그 시가를 손에 쥐고 나면, 예상 상속세를 대략이라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일괄공제 5억원을 제외하고, 배우자가 있다면 추가 공제를 5억원 더 뺀다. 남은 금액에 누진세율을 떠올려 보는 정도만으로도 우리 집 상황이 어느 구간에 있는지 감이 잡힌다.그다음이 진짜 중요한 단계다. 가족이 지금 가진 현금과 금융자산만으로 세금을 낼 수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이때 부동산을 제외하고 ‘6개월 안에 바로 쓸 수 있는 돈’만 따로 세어 봐야 한다. 여기서 부족한 금액이 바로 우리 가족이 준비해야 할 숙제다. 부동산을 팔지 않고도 돈을 마련할 방법이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종신보험이 적합한지, 적합하다면 계약 구조는 어떻게 짜야 세금 문제가 생기지 않는지를 세무사와 보험 전문가에게 함께 상담하기 바란다. 앞서 말했듯 한쪽 설명만 듣고 결정하면 위험하다.상속세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 자산 구조 속에서 이미 시작된 문제다. 진짜 문제는 세금이 얼마냐가 아니라 세금을 낼 현금이 있느냐다. 부동산을 가족에게 온전히 남기고 싶다면, 집을 지킬 현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종신보험은 그 준비를 현실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대표적인 도구다. 상속세가 걱정되는 부동산 자산가라면 지금부터 예상 상속세와 보험 설계를 함께 검토하길 권한다. 집은 팔면 사라지지만, 미리 마련해 둔 현금은 그 집을 지킨다. 필자는 세무법인 리치 대표세무사로 상속·증여와 부동산 자산관리 분야를 전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연세대 법무대학원에서 조세법 석사를 취득했다. ‘부의 이전’ ‘기초부터 세금까지 가상화폐 완전정복’ 등 20여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현재 유튜브 ‘재테크 말하는 두꺼비 세무사’를 운영하고 있다.

2026.07.04 08:00

8분 소요
운전자 없는 도시가 온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지난 3월 필자는 강남에서 심야 자율주행 택시가 유료화됐다는 뉴스를 봤다.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운전대를 잡지 않는 안전요원만 탄 채 강남 일대 20㎢를 누비는 택시. 누적 탑승 7700건 넘게 사고가 한 건도 없었다고 한다. 서울시는 올 하반기 상암에서 아예 운전석이 비어 있는 로보택시를 시범 운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기사를 읽으며 떠오른 것은 기술에 대한 감탄이 아니었다. '저런 차가 많아지면, 과연 서울은 지금과 같은 모습일까.' 알고리즘의 편향과 플랫폼이 삼키는 골목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변화라면 자율주행차는 눈에 보이는 변화다. 어떻게 변할까? 어떤 모습이 돼 있을까.실험이 끝나고, 일상이 시작되다국내에서도 기업들이 자율주행 플랫폼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다. 강남 심야 로보택시를 운영하는 SWM 역시 관련 기술 고도화에 나서며 실증 운행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한국은 아직 완전 무인 로보택시를 상용으로 운영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전국 30여 개 시범운행지구에서 자율주행 서비스가 운행되고 있고, 상암과 강남 등 일부 구역에서는 레벨4 수준의 완전자율주행을 목표로 한 실증도 시작됐지만, 현행법은 여전히 시험운전자 탑승을 전제로 하고있다. ‘무인’이라는 말을 붙이기엔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은 좀 다르다. 미국에서는 구글 자회사 웨이모(Waymo)가 일부 대도시에서 운전석이 비어 있는 로보택시를 상용 운영하고 있다. 서비스는 아직 도시 내 제한된 구역에서 이뤄지지만, 주당 수십만 건의 승차가 이뤄질 만큼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도쿄와 런던 진출도 예고돼 있다. 중국에서는 바이두의 아폴로 로보택시가 충칭과 우한 등지에서 수백만 건의 무인 승차를 기록하고 있다. 이제 자율주행은 어디선가의 '실험'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의 '일상'이 되고있다.미국의 법학자 B. W. 스미스와 M. 완슬리는 올해 도시정책 매체 ‘바이털 시티(Vital City)’에 흥미로운 분석을 내놨다. 로보택시가 장기적으로 보행자와 자전거 이용자의 안전을 높이고, 버스가 끊긴 심야나 노선이 닿지 않는 외곽의 이동권을 넓히며, 주차 수요를 줄여 도시의 땅을 자동차로부터 되찾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이 원하는 대로 규제를 풀어주기만 해서도, 안전이 불안하다며 기술 자체를 막아버려서도 이 미래는 오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도시행정과 정치가 기술에 조건을 달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주차장과 스프롤, 두 얼굴의 자율주행미국의 일부 도시에서는 도심부 토지의 평균 20~26%가 지상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디트로이트나 라스베이거스처럼 30%를 넘는 도시도 적지 않다. 서울은 주차 공간 대부분이 건물 지하에 묻혀 있어 지상에서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주차 인프라가 도시 구조를 규정한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아파트 단지 설계의 상당 부분이 주차 대수 확보에 맞춰지고, 건축비의 적지 않은 비율이 지하 주차장 공사에 들어간다. 그런데 로보택시처럼 한 대의 차가 여러 승객을 돌아가며 태우는 방식이 보편화되면 이 구조가 흔들린다. 차가 한자리에 세워져 있을 이유가 줄어들고, 도심 한복판에 지금처럼 많은 주차 공간이 필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도시가 주차장에 내줬던 땅이 다른 가능성을 향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율주행의 도시 효과를 오랫동안 추적해온 캐나다 빅토리아 교통정책연구소(Victoria Transport Policy Institute, VTPI)의 토드 리트먼의 분석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정책 기조에서는 자율주행이 확대되면 도시의 외연을 팽창시킬 가능성이 높다. 교통이 편해지면 도시는 계속 확장되기 때문이다. 1960년대 고속도로가 미국의 교외화를 촉진했듯, 자율주행이 21세기판 스프롤(sprawl)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확장의 혜택과 비용이 고르게 나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금 강남 심야 로보택시가 보여주는 풍경이 그 단서다. 서비스는 승차 수요가 많고 도로 여건이 좋은 강남에서 먼저 시작됐다. 수요가 적은 외곽이나 고령 인구가 많은 동네, 심야 대중교통이 정말로 절실한 지역은 뒷순서로 밀린다. 자율주행이 가져다줄 편리함이 클수록, 그 편리함에 먼저 닿는 곳과 끝까지 닿지 않는 곳의 격차도 함께 벌어질 수 있다.기술은 달리는데, 도시는 준비됐나샌프란시스코에서는 자율주행 로보택시가 교차로에서 멈춰 서거나 소방차·구급차 통행을 막았다는 논란이 반복돼 왔다. 교통 신호나 통신망이 마비되는 상황에서 로보택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도시 전체의 교통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다. 자율주행 시스템이 ▲전력 ▲신호 체계 ▲응급 서비스라는 도시의 다른 인프라와 엉켜 있을 때, 한쪽이 흔들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뉴욕에서는 주지사가 로보택시 시범 법안을 내놨다가 논란에 밀려 철회했고, 연방 의회에서는 도시와 주의 자율주행 규제권을 선점하려는 법안이 올라왔다. 기술을 허용할 권한이 도시에 있는지, 연방에 있는지, 아니면 기업 자율에 맡겨야 하는지를 두고 정치적 쟁투가 벌어지고 있다.한국 사정은 또 다르다. 세종시가 자율주행 빅데이터 관제센터를 짓고 광역 버스 노선을 깔았지만, 아직은 안전요원과 운전원이 함께 타야 한다. 법이 완전 무인 상용화까지는 열어주지 않은 셈이다. 강남의 심야 택시도, 상암의 무인 로보택시도, 제도가 열어주는 만큼만 갈 수 있다. 도시 인프라는 한번 깔리면 수십 년을 간다. 지금 그리는 도로와 주차장이 자율주행 시대에도 쓸모 있으려면, 제도의 시계가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아야 한다. 자율주행은 단순히 교통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로를 바꾸고, 주차장을 바꾸고, 사람들이 어디에 사는지를 바꾸고, 결국 도시의 모양을 바꾼다. (다음 편에 계속)

2026.07.04 07:00

4분 소요
실손보험 분쟁, 형사수사로 풀 일인가 [김기동의 이슈&로(LAW)]

전문가 칼럼

보험사기는 분명 척결해야 할 범죄다. 교통사고를 위장한 고의 충돌, 허위 입원, 방화를 가장한 재물 손괴, 이런 사기는 선량한 다수의 보험료를 끌어올리고, 보험 시스템 전체를 좀먹는다. 금융감독원 통계에 따르면 2024년 보험사기 적발 금액은 1조1502억원으로, 3년 연속 1조원을 돌파했다.그런데 지금 현장에서 벌어지는 수사의 실상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필자가 검사로 재직했을 당시부터 경찰이 수사하는 보험사기 사건 중 상당수는 실손보험 관련 사건이었다. 최근 몇 년간 특정 치료 유형을 겨냥한 수사가 파도처럼 전국을 휩쓸었다.‘보험사 태만’이 가입자 책임이 돼선 안돼 백내장 수술의 경우, 수술 후 병원에 머문 시간이 짧다거나 입원 치료의 필요성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실질적 입원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앞세워 수만 명의 보험금 청구가 보험사기로 고소됐다. 무릎 줄기세포 치료(BMAC·골수 흡입 농축물 주사)는 국가가 신의료기술로 인정한 시술임에도, 입원 필요성이 없다는 보험사의 판단을 근거로 피의자가 양산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다.이 사건들에는 반복되는 하나의 패턴이 있다. 보험사는 신상품을 출시하면서 보험금 지급 범위를 약관에 명확히 특정하지 않은 채 광범위하게 판매한다. 초기엔 별다른 제동 없이 보험금을 지급하다가, 청구 건수가 급증해 손해율이 악화되면 기다렸다는 듯 보험사기 혐의 고소를 남발하기 시작한다. 형사사건화가 되면 그 이후는 보험금 지급 거절과 기지급금 반환 소송이 뒤따른다. 성실하게 보험료를 납부해 온 가입자들이 하루아침에 피의자 신세가 된다.백내장 사태가 단적인 예다. ‘계속하여 6시간 이상 체류’라는 기준은 2021년 4세대 실손보험 약관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보험사들은 이 기준을 2016년 약관 변경 이전 가입자에게까지 소급 적용하며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원래 약관 어디에도 없던 기준을 사후적으로 들이밀며, 수십 년 전 체결한 계약에 기초한 가입자의 정당한 청구마저 사기로 몰아간 것이다. 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나온 사례도 있었지만, 그사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사와 재판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무릎 줄기세포 치료 분쟁도 구조는 다르지 않다. 정부가 2023년 7월 신의료기술로 공식 인정한 BMAC 시술에 대해 보험사들은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거나 심사를 보류했다. 또 보험사가 지정한 자문의의 검토를 받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 보험금 심사 자체를 진행하지 않겠다는 사례가 빈발했다. 보험업계 자료에 따르면 골수 무릎주사 관련 실손보험 청구 건수는 신의료기술 인정 이후 반년 만에 30여 건에서 856건으로, 보험금 지급액도 9000만원에서 34억원으로 폭증했다. 건수로는 약 28배, 지급액으로는 약 37배에 달하는 전례 없는 급증세에 보험업계는 즉각 위기감을 느꼈고, 그 시점에 수사가 시작됐다.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것이 진짜 ‘사기’인가. 대부분의 사건에서 본질은 ‘입원치료' 등 보험약관에 기재된 보험금 지급 요건에 해당되는지 여부다. 계약 해석상 다툼에 가깝고, 민사소송을 통해 해결할 성격의 문제다. 사기죄의 본질은 기망(欺罔), 즉 상대방을 적극적으로 속여 재산상 이익을 편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 사례들에서 환자 대부분은 의사의 권유로 치료를 받고 그 치료비를 청구했을 뿐이다. 허위 진단서를 꾸미거나 받지 않은 치료를 받은 것처럼 서류를 조작한 것이 아니다.보험사에는 심사 절차가 있다. 진료기록 등을 사전에 제출받아 검증했다면 충분히 걸러낼 수 있었던 유형이다. 보험사의 부실한 심사로 보험금이 지급된 경우까지 피기망자의 착오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보험사의 태만을 사후적으로 가입자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공권력은 신뢰 복원에 쓰여야 한다긍정적인 움직임도 있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취임 직후 금융소비자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밝힌 데 이어, 금감원 앞에서 시위 중이던 백내장 실손보험금 민원인들과 직접 면담하고 일부 사안에 대해 보험사에 재검토를 요청했다. 규제기관의 수장이 민원 현장에 직접 나섰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행보다. 이를 계기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분쟁이 불거진 뒤에 수습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보험상품 판매 단계에서부터 보험금 지급 범위와 제한 조건을 소비자에게 명확히 설명하도록 보험사에 대한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법이다.수사 자원은 무한하지 않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력이 실손보험 관련 고소 사건 처리에 쏠리는 사이, 보이스피싱 피해자, 전세사기 피해자, 폭력 피해자들의 사건 처리가 밀린다. 민생을 위한 수사 서비스가 왜곡되는 것이다. 민사 분쟁의 성격이 강한 실손보험 청구 문제는 금융감독원의 분쟁조정, 약관 명확화, 보험사 자체 심사 강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약관의 불명확성이나 지급 기준의 사후 변경에서 비롯된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기관이 고소장 각하 등으로 수사권 발동을 자제하는 것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법과 계약은 신뢰 위에 선다. 약관이 불명확한 채로 계약이 체결되고, 분쟁이 생기면 형사고소로 이어지는 구조가 반복되는 한, 그 신뢰는 회복되지 않는다. 공권력은 그 신뢰를 복원하는 데 쓰여야지, 민사적 분쟁의 해결 수단으로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

2026.07.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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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컨시북스, ‘2027 이로운 수학 모의고사 Original’ 출간…실전형 문항 엄선

- 최신 수능 출제 경향 반영…미적분·확률과 통계 선택과목 수록- 단계별 풀이 해설 제공…실전 문제 해결력 강화 하이컨시북스가 202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수학 영역 대비를 위한 실전 모의고사 교재 '2027 이로운 수학 모의고사 Original 2회분'을 출간했다고 밝혔다.최근 수능 수학은 킬러문항이 배제되는 대신 준고난도 문항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검증된 문제를 통해 실전 감각과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학습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실제 출제 경향을 반영한 실전형 모의고사에 대한 수험생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2027 이로운 수학 모의고사 Original 2회분'은 기존 이로운 모의고사 시리즈 가운데 우수 문항을 선별해 최신 수능 출제 경향에 맞춰 재구성한 교재다.교재에는 실제 수능과 유사한 형태의 모의고사 2회분을 수록했으며, 선택과목으로 미적분과 확률과 통계를 모두 포함해 다양한 수험생이 활용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또 실제 수능 시험지 형식과 OMR 답안지를 함께 제공해 실전 환경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으며, 해설에는 정답뿐 아니라 문제 접근 방법과 핵심 사고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해 학습 효과를 높였다.저자는 "실전에서 도움이 되는 문항을 선별해 효과적인 학습 경험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며 "기존 시리즈 가운데 완성도가 높은 문항을 엄선해 최신 수능 경향에 맞게 재구성한 만큼 실전 감각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하이컨시 관계자는 "최근에는 새로운 문제를 많이 푸는 것보다 검증된 문항을 통해 실전 연습을 하고자 하는 수험생들이 늘고 있다"며 "이번 교재가 실전 대비에 최적화된 학습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교재는 시대인재북스 공식 홈페이지를 비롯해 교보문고와 예스24 등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구매할 수 있다.한편 '2027 이로운 수학 모의고사 Original'은 이로운 수학 모의고사 시리즈의 첫 번째 교재로, 이후 실전 난도를 높인 'Final' 편도 순차적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2026.07.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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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생 이동이 보여주는 입시의 출발점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중·고등학교 진학을 고려한 학군지 이동은 대체로 초등학교 시기에 집중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학교 입학 이후 사실상 입시 경쟁이 시작되는 만큼, 중학교 진학을 앞둔 시점에서 전입·전출 움직임이 본격화하는 흐름이다. 초등학교 단계의 이동은 단순한 주거지 변경을 넘어 향후 중학교 배정과 고등학교 진학 여건을 함께 고려한 선택으로 해석할 수 있다.2025년 한 해 동안 전국 6280개 초등학교의 전입자 수에서 전출자 수를 뺀 순유입 규모를 시도별로 보면 인천이 1222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서울 834명, 대구 728명, 대전 275명, 부산 223명, 충남 128명, 충북 92명 순이었다.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7개 지역에서 초등학교 순유입이 발생했다. 이들 지역은 학군 수요나 주거 개발, 교육 인프라에 대한 기대가 맞물리며 초등학생 자녀를 둔 가구의 이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서울 초등생 순유입 전환특히 서울은 2024년 188명 순유출에서 2025년 834명 순유입으로 돌아섰다. 직전년도와 비교하면 순유입자 수가 1022명 증가한 셈이다. 서울의 경우 학령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군지를 중심으로 교육 수요가 다시 유입되는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반대로 전입자 수보다 전출자 수가 많은 순유출 지역은 경기가 1339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경북 696명, 경남 514명, 울산 275명, 강원 105명, 세종 95명, 전북 88명, 전남 60명, 광주 45명, 제주 34명 순으로 집계됐다. 총 10개 지역에서 초등학교 순유출이 나타났다. 순유출 지역에서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가구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난 것으로 풀이된다.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순유입이 가장 많았던 지역은 강동구였다. 강동구는 1752명의 순유입을 기록했다. 이어 강남구 1331명, 양천구 848명, 서초구 795명, 노원구 193명, 송파구 163명 순이었다. 서울에서는 이들 6개 구에서 전입자 수가 전출자 수를 웃돌았다. 순유입 지역 상당수가 기존에 교육 수요가 높거나 학군지로 인식돼 온 곳이라는 점에서, 학군을 겨냥한 이동 수요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반면 서울 25개구 중 순유출이 발생한 지역은 19곳이었다. 강서구가 542명으로 가장 많았고, 영등포구 471명, 구로구 420명, 은평구 348명, 동작구 300명, 성동구 293명, 관악구 282명, 서대문구 260명, 중랑구 246명 순이었다. 이어 성북구 221명, 금천구 183명, 마포구 149명, 도봉구 146명, 중구 118명, 강북구 98명, 용산구 94명, 종로구 36명, 동대문구 36명, 광진구 5명으로 집계됐다. 서울 안에서도 자치구별로 초등학생 이동 방향이 뚜렷하게 갈린 셈이다.서울에서 순유입이 발생한 강동구와 강남구, 양천구, 서초구, 노원구, 송파구는 대체로 교육특구로 꼽히는 지역이다. 특히 강동구는 2024년 749명에서 2025년 1752명으로 순유입 규모가 크게 늘었다. 새로운 학군지로 부상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존 강남·서초·양천 중심의 학군 수요가 유지되는 가운데 강동구로도 수요가 확산되는 흐름이 확인된 것이다.강남구의 변화도 눈에 띈다. 강남구의 초등학교 순유입은 2024년 2575명에서 2025년 1331명으로 1244명 줄었다. 내신 9등급제가 5등급제로 바뀌면서 학교 내신 부담이 완화됐음에도 대표 교육 학군지인 강남구의 초등학교 순유입이 많이 감소한 것은 이례적인 흐름으로 볼 수 있다. 내신 5등급제에서는 상위 10% 안에 들지 못할 경우 상위 34% 구간까지 포함되는 2등급으로 내려갈 수 있어 주요 상위권 대학 진입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강남구 진입이 곧 입시 경쟁에서의 우위를 보장한다고 보기 어려워진 점도 학부모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과도한 부동산 가격 부담으로 강남권 진입장벽이 높아진 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과열된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을 여지도 있다. 전체적으로 서울 25개구에서는 학군지로의 순유입 흐름이 이어지고 있지만, 강남구 한 곳으로 집중되는 경향은 다소 약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일시적 현상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나, 높은 부동산 부담을 고려하면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학군 선호는 여전하지만, 비용 부담과 경쟁 강도까지 함께 따지는 선택이 늘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강동구 전국 1위…새 학군지 이동도 본격화2025년 전국 시군구 기준 초등학교 순유입이 가장 많았던 지역은 서울 강동구로 1752명을 기록했다. 이어 서울 강남구 1331명, 인천 서구 1060명, 대구 수성구 997명, 서울 양천구 848명, 서울 서초구 795명, 인천 연수구 766명, 경기 광명시 624명, 경기 평택시 539명, 대전 서구 514명 순이었다. 상위 10개 지역에는 서울 4곳, 인천 2곳, 경기 2곳, 대전 1곳, 대구 1곳이 포함됐다. 수도권 주요 지역과 전통 교육도시가 동시에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점도 눈에 띈다.초등학교 시기 전출입은 중·고등학교 진학을 겨냥한 이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향후 학군지 형성을 가늠할 수 있는 주요 지표가 될 수 있다. 전체 흐름을 보면 기존 학군지로의 이동은 계속되고 있으며, 동시에 새로운 학군지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도 나타나고 있다. 초등학교 이동 흐름은 단기간의 인구 이동을 넘어 지역 교육 경쟁력과 주거 선호 변화를 함께 보여주는 지표로도 볼 수 있다.학령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학교 내신 경쟁에 유리한 고등학교는 학생 수가 많은 학교로 특정될 수 있다. 이에 따라 해당 학교 진학을 위한 이동 현상도 커질 수 있다. 초등학교 전출입 흐름은 해당 지역 중·고등학교 경쟁력과도 맞물리는 중요한 변수다. 학령인구 감소가 이어질수록 경쟁력 있는 지역으로의 집중 현상은 더 강해질 수 있다. 다만 부동산 가격 부담 등으로 진입장벽이 높은 지역에서는 향후 변화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으며, 새로운 학군지로의 이동과 분산 흐름 역시 나타날 수 있다.

2026.06.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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