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비트코인이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이후, 거시경제 지표의 불안정과 과도한 레버리지 투자의 청산이 겹치며 가상자산 시장은 큰 폭의 조정을 겪고 있다. 마침 같은 시기에 미국의 물가 안정 기조가 강화되고, 주식시장 역시 조정 국면에 들어서면서 가상자산과 주가가 동시에 흔들리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필자에게 “가상자산 가격이 이렇게 조정을 받는데 계속 투자해도 괜찮겠느냐”는 질문이 부쩍 많아졌다. 가상자산 관련 업무를 취급하는 변호사인 필자에게는 쉽게 답하기 곤혹스러운 질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종종 ‘글로벌 금융 지도자 회의’라는 유튜브 영상을 한 번 참고해 보라고 권하곤 한다.위 유튜브 영상은 지난 10월 28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최고경영자(CEO)들이 모여 인공지능(AI)·달러·디지털자산 등 산업과 금융의 미래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담고 있다. 블랙록·JP모건·골드만삭스·HSBC·KKR·블랙스톤·퀄컴·인텔 등 글로벌 금융회사와 빅테크 기업 CEO들의 발언이 생생하게 소개된다.제도권 들어온 가상자산…바뀐 게임의 규칙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CEO 래리 핑크다. 블랙록은 2024년 말 기준 약 11조5000억달러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국가들의 국내총생산(GDP)을 웃도는 규모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같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은 물론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전 세계 주요 우량 기업들의 주요 주주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업 경영의 핵심 화두가 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개념 역시 블랙록이 투자 기준으로 제시하며 확산된 바 있다.
그는 “자산이 토큰화되는 시대의 초입에 있다”며 주식, 채권, 부동산 등 거의 모든 실물자산(RWA, Real World Asset)이 디지털 토큰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에 따르면 거래 속도는 빨라지고 비용은 획기적으로 낮아지며, 고가 자산에 대한 접근성도 크게 개선된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두고 기술이 ‘금융의 배관(plumbing)’을 바꾸고 있다고 표현했다.미국 최대 은행 JP모건의 CEO 제이미 다이먼의 발언 역시 주목할 만하다. JP모건은 그동안 가상자산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입장을 유지해 왔지만, 그는 최근 “블록체인, 스테이블코인, 스마트 계약 등 기술 자체는 현실이며, 향후 더 나은 거래와 고객 서비스를 위해 사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 발언 이후 JP모건은 이더리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미국 단기 국채 등에 투자하는 토큰화 머니마켓펀드(MMF) ‘MONY’를 출시했다.가상자산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견지해 왔던 세계 2위 자산운용사 뱅가드 역시 최근 입장을 바꾸었다. 12월부터 자사 플랫폼에서 비트코인, 이더리움, XRP ETF 등의 거래를 허용한 것은, 가상자산이 더 이상 주변부 자산이 아니라 전통 금융자산과 동일한 틀 안에서 평가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변화다. 미국 통화감독청(OCC)도 12월 은행이 가격 변동 리스크 없이 고객 주문을 중개하는 가상자산 매매 서비스를 공식 허용하면서, 은행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이처럼 미국 정부와 월가는 디지털자산을 금융 제도의 일부로 빠르게 편입시키고 있다. 특히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제도화는 디지털자산 시대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라 할 만하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법적 근거가 되는 지니어스 액트(GENIUS Act)는 올해 7월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입법이 완료되었고, 빠르면 내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올해 8월 미 하원을 통과해 내년 초 상원 통과가 예상되는 클래리티 액트(Clarity Act)는 가상자산 시장의 가장 큰 리스크였던 규제 모호성을 해소하는 핵심 법안이다. 이 법안은 가상자산을 발행 초기부터 ‘증권’과 ‘상품’으로 구분해 규율하며, 특정 주체의 지배력이 낮아 탈중앙성이 높은 코인은 상품으로 분류해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관할하도록 하고 있다. 이로써 월가의 대형 기관투자자들도 법적 불확실성 없이 가상자산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제도화와 기관 수용이 곧바로 가격 상승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가상자산 시장은 ‘새로운 투자자산으로 인정받아 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기대와 인지도 상승이 가격을 끌어올려 왔다. 가격 아닌 생존 문제...10년 후 살아남을 디지털자산은그러나 이제는 상당 부분 제도적 지위가 확립되면서, 가상자산 역시 금리·유동성·경기 여건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정상적인 금융자산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 최근의 가격 조정은 가상자산에 대한 신뢰 하락이라기보다는, 미국의 물가 안정 기조와 주식시장 조정 국면 속에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재평가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가상자산은 여전히 변동성이 큰 자산이며, 시장 형성 초기 단계라는 점에서 단기적인 가격 전망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이 인간의 편익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금융 시스템을 재편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따라서 5년, 10년 뒤의 세상은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AI와 로봇이 지금 사람이 수행하는 업무의 상당 부분을 대체하고, 완전자율주행 차량과 에어택시가 일상화될 가능성도 크다. 법조계 역시 방대한 종이 기록이 사라지고, 상당수 서면이 AI에 의해 작성되는 구조로 변화할 것이다.금융과 결제·송금 시스템 역시 블록체인과 디지털자산을 기반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물건의 주문과 결제는 AI 에이전트가 디지털자산으로 처리하고, 카드 수수료와 같은 고비용 구조는 유지되기 어려워질 것이다. 해외 송금은 몇 초 만에 이뤄지고, 은행 계좌가 없는 사람도 금융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이러한 변화 속에서 가상자산 시장의 성장은 ‘막연한 기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자산과 어떤 기술이 실제 금융 인프라로 자리 잡을 것이냐’의 문제로 바뀌고 있다. 이제는 ‘가상자산 시장 전체’에 투자하는 시대가 아니라, 가상자산 안에서 무엇이 살아남고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를 선별해야 하는 시점이다.따라서 10년 후 가상자산 시장이 지금보다 훨씬 더 커져 있을 것이라는 전망은 과도하지 않다. 다만 그 성장은 균등하지 않을 것이며, 변화의 방향을 읽고 준비하는 사람만이 다가올 미래의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다.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