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CONOMIST

오피니언

오피니언

‘5극 3특’ 국가 재설계의 골든타임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은퇴하면 번잡한 서울을 떠나 조용한 시골에서 살자.” 은퇴를 앞둔 50대 후반의 남편들이 흔히 하던 말인데, 요즘 이런 얘기를 했다가는 ‘세상 물정 모른다’며 아내의 매서운 질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병원 갈 일이 많은데, 지방을 가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지방의 의료 환경은 서울·수도권과는 차이가 큰 게 사실입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진료권별 의료 이용 데이터 분석 결과’에 따르면 2024년 인구 1만명당 의사 수가 가장 적은 곳은 15.56명의 충남북부권이었는데, 이는 가장 많은 서울권(경기·인천 포함, 30.14명)의 절반 수준입니다. 다른 지방도 별반 차이가 없는데, 충북권 15.97명, 강원권 17.08명, 제주권 18.36명, 경남서부권 18.54명으로 서울권보다 적었습니다. 진료 과목별 격차는 더 심각한데, 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를 표시한 1차 의료기관(의원급)이 서울권에는 2736곳이 있는 반면 충남북부권에는 10분의 1 수준인 250곳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환자가 뺑뺑이를 돌다가 진짜 위급한 상황을 맞는 일이 서울보다 지방에서 더 자주 벌어지고, 임산부가 아기를 낳기 위해 머나먼 서울권으로 원정 출산을 떠나는 모습이 일상이 된 것이겠지요.자산·부동산 격차는 좌절감마저 들게 합니다. 국가데이터처 등의 ‘2025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역별 가구당 평균 자산은 서울이 8억3649만원으로 전국 평균보다 무려 2억7000만원 가량 높았던 반면, 전국 꼴찌인 전라남도는 3억6754만원으로 서울의 절반도 안 됐습니다. 집값 양극화는 극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요, 국토교통부의 실거래가 통계(2025년 12월 기준)에 따르면 서울 압구정 신현대 8차 한 채의 값(85억원)으로 경북 칠곡 전용 32㎡(1100만원)를 무려 770채나 살 수 있었습니다. 지방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차고 넘치고, 실제로 서울권으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지방은 소멸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통계청·지방소멸지수 분석을 종합하면 229개 기초자치단체 중 절반 이상이 ‘소멸 위험 지역(0.5 미만)’으로 분류됩니다. 부산광역시도 2024년 광역시 중 처음으로 ‘소멸 위험 지역’에 들어선 것으로 분석됐는데, 지방 소멸이 농촌·군 단위를 넘어 대도시로 확산하고 있는 겁니다.서울권으로 모든 것이 집중되는 ‘일극 체제’가 더 공고해지는 상황에서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지역이 함께 성장해야 국가도 지속 가능해집니다. 이에 이재명 정부는 전국을 5개 권역과 3개 특별지역으로 나눠 지역 균형 발전과 초광역 협력을 추진하는 ‘5극 3특 국가 균형 성장 전략’에 힘을 싣고 있습니다. 수도권 중심의 일극 체제를 넘어 권역별 성장 거점을 만들고, 지역의 특성을 살려 국가 전체 성장을 견인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여러 지방자치단체들도 호응하며 기대를 키우고 있습니다.다만 5극 3특이 구조만 화려한 ‘지도 위 프로젝트’로 남지 않으려면 권한과 재정, 인재, 성과 평가가 함께 설계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한 번의 선언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지방 소멸의 시계는 멈추지 않습니다. 중앙과 지방, 정치와 민간이 머리를 맞대고 현실적인 해법을 실행에 옮겨야 할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26년 병오년이 대한민국이 불균형의 늪을 벗어나, 지역과 국가가 함께 숨 쉬는 ‘국가 재설계’의 원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26.01.04 06:00

3분 소요
수시 6회 지원의 그늘…서연고 등록 포기, 다시 최고치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2026학년도 대입 수시모집에서도 이른바 '서연고'(서울대·연세대·고려대) 최초 합격 이후 등록을 포기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집계됐다. 서연고 수시에서 최초 합격하고도 타 대학 중복 합격 등의 사유로 최종 등록을 하지 않은 인원은 총 2415명으로 나타났다. 수시는 최대 6회 지원할 수 있어 복수 합격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일부 대학에서 등록 포기가 불가피하게 나온 것이다.서연고 포기 규모 최고치서연고 수시 등록 포기 규모는 최근 5년 사이 최고치다. ▲2022학년도 2246명 ▲2023학년도 2213명 ▲2024학년도 2087명 ▲2025학년도 2369명에 이어 ▲2026학년도에는 2415명으로 집계됐다.대학별로 보면 연세대는 1025명이 등록을 포기해 수시 선발 인원 2215명 대비 46.3%에 달했다. 고려대는 1259명으로, 수시 전체 선발 인원 2703명 대비 46.6%였다. 서울대는 131명이 등록을 포기했으며, 수시 선발 인원 2207명 대비 비율은 5.9%로 나타났다.계열별로는 인문계열에서 서울대 등록 포기 인원이 18명으로, 해당 계열 수시 선발 인원 대비 2.5%였다. 연세대는 489명(45.1%), 고려대는 577명(47.9%)이 인문계열에서 등록을 포기했다. 자연계열에서는 서울대가 112명(8.2%), 연세대가 524명(48.5%), 고려대가 669명(46.3%)으로 집계됐다. 세 대학을 합산하면 인문계열 등록 포기 인원은 1084명, 자연계열은 1305명으로 자연계열에서 등록 포기가 더 많았다.서울대 인문계열 합격 이후 등록을 포기한 사례는 인문계열로 선발하는 한의대에 동시 합격해 최종 선택을 서울대 인문계열 대신 한의대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연세대와 고려대 인문계열 합격생 일부도 한의대 등과 동시 합격하거나, 서울대 또는 연세대·고려대 내에서 상호 희망 학과에 최종 합격한 곳을 택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서울대 자연계열에서 등록을 포기한 학생들은 전국 의대·치대·한의대·약대 등 이른바 의료 계열에 중복으로 합격해 서울대를 내려놓았을 가능성이 대부분이라는 해석이 제기된다. 연세대·고려대 자연계열 합격생 가운데서도 의약학 계열 또는 서울대 등에 함께 합격하면서 이탈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다.의대도 등록 포기가 확인됐다. 연세대 수시 의대 합격생 가운데 28명이 등록을 포기했는데, 이는 수시 선발 인원 63명 대비 44.4%다. 고려대는 수시 의대 합격생 67명 중 39명이 등록을 포기해 비율이 58.2%로 집계됐다. 연세대와 고려대 의대 합격생의 등록 포기는 대체로 서울대 의대 중복 합격에 따른 이탈일 가능성이 크다는 추측이 나온다. 반면 서울대 의대는 수시 합격자 가운데 등록 포기자가 1명도 없었고, 5년 연속 ‘등록 포기 0명’ 흐름이 이어졌다. 학과별 포기 비율 살펴보니연세대는 학과별로도 등록 포기 비율이 높은 곳이 나타났다. 융합인문사회과학부(HASS)는 수시 선발 인원 180명 가운데 80명이 등록을 포기해 비율이 61.5%에 달했다. 최초 합격자의 절반 이상이 빠져나간 셈이다. 아시아학전공은 12명으로 선발 인원 대비 60.0%, 아동가족학과는 10명으로 58.8%였다. 경영학과도 수시 합격생 102명 중 52명(51.0%)이 등록을 포기했고, 경제학부 역시 72명 중 36명(50.0%)이 등록을 포기한 것으로 집계됐다.연세대 자연계열에서도 이탈 규모가 컸다. 첨단컴퓨팅학부는 수시 합격생 89명 가운데 66명이 등록을 포기해 비율이 74.2%로 나타났다. 전기전자공학부는 94명 중 67명(71.3%), 화공생명공학부는 등록 포기 비율이 66.0%로 집계됐다.고려대 역시 학과별 등록 포기 비율이 높은 곳이 확인됐다. 인문계열에서는 정치외교학과가 33명으로 선발 인원 대비 71.7%를 기록했다. 경영대학은 126명(62.1%), 경제학과는 48명(60.0%)이 등록을 포기했다. 자연계열에서는 물리학과 21명(67.7%), 기계공학부 54명(67.5%), 전기전자공학부 87명(66.4%), 반도체공학과 18명(64.3%), 컴퓨터학과 50명(63.3%)이 등록 포기 인원으로 제시됐다.서울대도 일부 학과에서 등록 포기자가 발생했다. 인문계열에서는 윤리교육과가 2명으로 비율 15.4%였고, 자연계열에서는 에너지자원공학과 5명(23.8%), 응용생물화학부 6명(23.1%), 첨단융합학부 20명(13.5%)이 등록을 포기한 것으로 나타났다.수시는 학생부교과·학생부종합·논술전형으로 구성되며, 이 가운데 거의 90% 이상이 학생부교과·학생부종합전형이라는 점이 함께 제시됐다. 이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학교 내신 성적이 당락을 좌우하는 구조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서연고급 대학에서 수시 합격자 중 등록 포기 비율이 ‘수시 6회 지원에 따른 중복 합격’ 구조 속에서 특정 학과에서는 등록 포기가 70%를 넘기도 하는 만큼, 내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수시 합격을 사실상 ‘독식’하는 양상이라는 해석도 덧붙었다.현행 내신 등급 체계는 상위 4%까지 1등급, 11%까지 2등급, 23%까지 3등급으로 구분된다. 최소 2등급 이내에 들어갈 때 여러 대학에 복수 합격하는 구도가 형성된다. 특히 상위 11% 진입 여부가 상위권 대학 합격에서 절대적 변수가 되는데, 이 11%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학교 학생 수가 많아야 유리하다.2028학년도 대입(현 고1)부터는 상위 10%까지 1등급, 34%까지 2등급으로 매겨지는 5등급제로 전환된다는 점도 강조됐다. 상위 10% 1등급에 들어야 서울권 주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학생 수가 많은 학교로 쏠림 현상이 더 심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2026.01.04 06:00

4분 소요
"우리도 챗GPT 도입했는데...", 왜 혁신 아이디어 안 나올까 [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저희 회사도 생성형 인공지능(AI)를 도입했습니다. 직원들이 업무 시간은 줄었다고 하는데, 왜 정작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씨가 말랐을까요?.” 최근 만난 한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하소연이다. 그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전사적 AI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기대했던 게임 체인저로서의 성과 대신 직원들의 복사 붙여넣기 실력만 늘었다고 토로했다. 이것은 비단 이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맥킨지, 골드만삭스 등 유수의 기관들이 AI가 가져올 장밋빛 생산성을 예고했지만, 현장의 리더들이 느끼는 체감은 다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인지적 외주화' 덫에 걸리다인지과학의 관점에서 진단하자면, 우리 조직은 지금 인지적 외주화의 덫에 걸려 있다. 인간의 뇌는 본능적으로 에너지를 아끼려 한다. AI가 보고서를 요약해주고 이메일 초안을 써주면, 우리 뇌는 정보 처리 과정을 생략한다. 이를 인지적 외주화라 부른다. 이런 문제는 기업이 AI 도입의 목적을 오직 효율과 비용 절감에만 맞출 때 발생한다. 직원들이 AI에게 '이 회의록 요약해줘' '보고서 초안 써줘'라고 맡기고 그 결과물을 검토 없이 수용하는 순간, 조직의 사고 근육은 퇴화하기 시작한다. 각 직무마다 정보를 씹어 먹고 소화해서 통찰을 만들어내던 과정이 사라지고, 그저 정보를 유통하는 파이프라인으로 전락하는 셈이다.수억원을 들여 도입한 AI가 당신의 직원을 똑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버튼을 누르는 기계로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혁신이 아니라 퇴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답을 찾아야 할까.나는 최근 지도한 연구를 통해 그 실마리를 발견했다. 국내 대표 제조기업인 포스코의 사내 AI 대화 로그 78만건을 분석한 결과, 전통적인 제조업 현장에서 AI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일부만 예를 들자면, 직무 숙련도에 따라 AI를 다르게 쓰는 현상을 관찰했다. 저숙련 직원에게 AI는 역량의 격차를 줄여주는 평준화 도구였다. 반면, 고숙련 전문가에게 AI는 복잡한 문제를 더 깊게 파고들게 도와주는 전략적 지렛대로 쓰이고 있었다. 인사·보건 등 개발 직군이 아닌 직원들이 AI를 이용해 코드를 짜고 업무를 자동화하는 움직임, 이른바 시민 개발자 현상도 관찰됐다.저숙련 직원의 격차 감소와 고숙련 전문가를 위한 지렛대, 둘 중 어느 쪽이 포스코에게 더 중요할까? 직무 능력을 평준화하거나 효율화하는 게 목적인지, 아니면 좀 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도전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쓸 것인지, 조직에서 선택이 필요한 상황이다. 어찌 보면 둘 다 필요하다. 하지만 포스코 사례가 보여주는 진정한 미래 가능성, 장기적 성장의 동력은 후자, 즉 고숙련 전문가의 심화 활용과 시민 개발자의 새로운 도전에 있다. 평준화는 출발선이지만, 확장이야말로 목적지다. 퇴보와 혁신의 갈림길이 지점에서 조직 차원의 메타인지가 필요하다. 메타인지가 개인의 사고 과정을 인식하고 조절하는 능력이라면, 조직의 메타인지는 조직 전체가 AI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그 방향이 조직의 목표와 일치하는지를 끊임없이 모니터링하고 조정하는 능력이다. 앞서 언급한 인지적 외주화는 바로 이런 메타인지가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부작용이다.AI를 맹목적으로 믿고 의존하는 대신, AI 활용의 결과가 조직의 지능을 높이는지 아니면 갉아먹는지 냉철하게 파악하고 전략적으로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지적 외주화의 해독제이자 조직의 생존 전략이다.우리 사회는 개인 차원에서 메타인지의 중요성을 오랫동안 강조해왔다. 그런데 이제 메타인지는 AI라는 두 번째 지능을 개인이나 조직이 장착하는 과정에서 더 큰 도전 앞에 서있다. 생성형 AI의 역사는 불과 3년 남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간 발표된 여러 연구들은 생성형 AI를 활용하면서 개인과 조직의 비판적 사고·창의성·소통 역량이 감소되고 있음을 경고한다. 즉, 구성원 및 조직이 AI에 기대어 생각하지 않는 기계로 퇴보할 것인지, 아니면 두 번째 지능을 발판 삼아서 놀라운 혁신가로 진화할 것인지,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남들이 하니까 우리도 한다는 식의 유추적 사고로는 이 거대한 갈림길을 온전히 지날 수 없다. 우리 조직의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AI라는 새로운 지능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는 제1원칙 사고가 필요하다.AI로 아낀 시간, 재투자에 써라구성원의 기존 R&R(역할과 책임)에 어떻게 AI를 접목할 것인지 고민하는 기업이 많은데, 이는 상당히 아쉬운 사고 전략이다. 이런 사고로는 기존 R&R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렇게 질문을 바꿔보자. '우리 조직의 모든 R&R을 다 지워버린다고 가정할 때, AI라는 새로운 컴포넌트를 포용해서, 조직 전체의 R&R을 어떻게 기초부터 재설계할까?' 이는 개인 차원에서는 이런 질문이 된다. '당신이 조직 내에서 이제껏 맡고 있던 R&R을 모두 지워버리고, AI를 접목해서 자신의 R&R을 새롭게 설계한다면, 당신의 R&R은 무엇인가?' 이렇게 근본을 흔드는 제1원칙 사고 전략을 써야한다.R&R의 재설계를 어떻게 접근할지 난감하다면, 이렇게 생각해 봐도 좋다. AI 전환은 구성원 각각에게 단순히 툴(Tool)을 부여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AI로 아낀 시간을 재투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줘야 한다. 대다수 기업은 AI를 통해 기존 업무 프로세스의 시간을 단축하려 한다. 그렇게 해서 인력을 감축하는 전략에 집중하는 것이다. 반복 업무를 줄여 시간을 버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아낀 시간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다. 미뤄왔던 신규 시장 탐색을 시작하고, 우리 조직의 역량 밖이라 여겼던 기술적 도전을 AI와 함께 시도하며, 우리 조직이 가진 핵심 강점을 AI를 통해 압도적으로 증폭시켜야 한다.예를 들어, 데이터 분석을 AI에게 맡겨 시간을 벌었다면, 그 시간에 고객의 숨은 욕망을 읽어내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기획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지능과 인공지능이 결합하여 만드는 증강 지능의 본질이다.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뇌를 확장하는 파트너다. 포스코의 현장 엔지니어들이 설비 문제를 AI로 즉각 해결해 시간을 아낀 것처럼 비효율을 제거하고, 비개발직군이 코딩에 도전해 시민 개발자가 된 것처럼 AI를 안전한 실패의 파트너로 활용하게 해야 한다. 또한 고숙련 전문가들이 AI를 통해 단순 업무가 아닌 심도 있는 분석에 집중했던 것처럼, 인간의 고유 역량을 증폭시켜야 한다. AI는 왜 필요한가...냉철한 답변 필요해이런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 내려면, 우리에게는 어떤 리더십이 필요할까? AI 시대의 리더십은 좋은 질문을 구상하는 능력과 AI가 내놓은 결과물에서 새로운 맥락을 읽어내는 통찰력으로 재편된다. 리더가 질문을 멈추고 AI의 답에 안주하는 순간, 그 조직은 AI가 학습한 과거의 데이터, 즉 평균의 함정에 갇히게 된다. 혁신은 평균에서 나오지 않는다. 실패를 용인하고, AI와의 협업을 통해 얻은 작은 성공들을 공유하며, 조직 전체의 지능을 높이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역사를 돌아보자. 전기가 발명됐을 때, 단순히 증기기관을 전동 모터로 바꾼 공장은 망했다. 공장의 레이아웃과 작업 방식을 전기라는 새로운 에너지에 맞춰 재설계한 기업만이 살아남았다. AI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사람을 줄이고 비용을 깎는 용도로만 AI를 쓴다면, 당신의 기업은 2026년에 가장 효율적으로 망해가는 기업이 될 것이다. 지금 당신의 조직이 AI를 통해 사고를 외주화하고 있는지, 아니면 사고를 확장하고 있는지, 조직의 R&R에 근본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냉철하게 답해야 할 시점이다.그렇다면 내일 당장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첫째, 이번 주 안에 당신 조직의 AI 활용 현황을 점검해보자. 구성원들이 AI로 절약한 시간을 어디에 재투자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일찍 퇴근하거나 다른 단순 업무로 채우고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한 달 안에 소규모 실험 프로젝트를 시작해보자. 한 팀을 선정해 AI로 아낀 시간의 30%를 신규 시장 탐색이나 혁신 과제에 의무적으로 투입하고, 그 결과를 측정해보면 좋겠다.우리는 이제 AI라는 두 번째 지능을 곁에 두고 살아가게 됐다. 거대한 지능의 파트너와 제대로 악수할 준비가 필요하다. 비용 절감이라는 얕은 늪을 건너, 지능 확장이라는 드넓은 바다로 나아갈 시점이다. 첫 걸음은 지금, 당신의 결단에서 시작된다.김상균 경희대 경영대학원 AI비즈니스전공 주임교수(인지과학자) 필자는 연세대 인지과학 박사로, 현재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AI비즈니스전공 주임교수(정년트랙 정교수)로 재직 중이다. 갤럭시코퍼레이션 고문을 비롯해 CJ나눔재단, 마인즈그라운드, 게임문화재단, 롯데이노베이트 등 다수 기업·기관의 사외이사와 자문교수로 활동했다. KBS·EBS·JTBC·tvN 등 주요 방송에 출연해 AI·미래교육·기술사회 이슈를 대중에 소개했으며, 정부·대기업 컨설팅과 2000회 이상 강연을 진행했다. 『메타버스』, 『초인류』, 『휴머노이드』 등 AI·메타버스 분야 저서를 다수 집필했다.

2026.01.02 07:00

6분 소요
고환율이 던진 질문, 한국경제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스페셜리스트 뷰]

은행

2026년은 고환율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우리 앞에 놓인 한 해가 될 것이다. 원·달러 환율이 1달러당 1500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2025년 한 해만 놓고 보더라도 환율은 1350원대에서 1480원 부근까지 넓은 폭으로 움직였다. 시장에서는 최근의 환율 수준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월간 평균 최고 구간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단기적 상승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변동폭과 지속성이 예사롭지 않다. 이 정도라면 기업의 투자 계획과 가계의 소비 패턴을 동시에 흔드는 ‘고환율 시대’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한국은행이 수입물가와 소비자 물가 상승, 중소 수출기업의 부담 확대를 동시에 우려하며 경계 수위를 높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환율 국면의 배경…금리 차를 넘어선 구조적 요인들이번 원화 약세를 단순히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고금리 기조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물론 정책금리 기준으로 보면, 한국과 미국의 금리차는 여전히 의미있는 수준이다. 미국 정책 금리가 한국보다 1%포인트(p) 이상 높은 상태가 이어지면서, 달러 자산의 상대적 매력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환율 국면의 특징은 금리 차 외에도 달러 수요를 구조적으로 키우는 요인들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대표적인 요인은 대미 투자 확대다. 최근 한미 관세 및 투자 협상 결과에 따라 한국은 향후 10년간 최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 조성을 약속했고, 여기에 더해 선박·방산·에너지 분야에서 추가로 1000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일본 역시 미일 협정을 통해 5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고, 유럽연합도 미EU 합의에서 6000억 달러 수준의 투자 계획을 제시했다. 이는 향후 수 년동안 한국·일본·EU의 제조업 금융 자본이 지속적으로 달러를 매입해 미국 실물 프로젝트로 이동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글로벌 차원에서 달러 수요가 구조적으로 고착되는 배경이라 할 수 있다.국내 자본 흐름도 원화 약세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른바 ‘서학개미’로 불리는 개인투자자들의 해외 주식 투자가 빠르게 늘었다. 2025년 11월 중순까지 개인투자자의 해외주식 순매수는 300억 달러를 넘어섰고, 투자 대상의 상당 부분은 미국 빅테크와 인공지능(AI) 관련 종목에 집중됐다. 해외 주식과 채권을 포함한 해외 증권투자 잔액은 1조2140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국내에서 벌어들인 원화를 달러로 바꿔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흐름이 상시화되면서, 외환시장에서는 달러를 사려는 수요가 구조적으로 우위에 서는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이처럼 대내외 구조적 요인까지 겹치면서 최근의 원화 약세는 무역시장 보다는 자본과 투자의 흐름이 달러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의 한 단면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실제로 한국의 수출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사상 최대 수준을 기록했고, 무역수지도 흑자를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환율이 약세를 보인다는 것은 ‘수출은 잘 되는데 자본계정에서는 달러가 빠져나가는 나라’라는 새로운 리스크가 부각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고환율이 작동하는 경제적 경로와 기업 활동 영향고환율이 기업 활동과 국민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기본적인 환율이 경제에 미치는 경로들을 하나씩 짚어볼 필요가 있다.우선, 구매력 평가 관점을 살펴보자. 장기적으로 환율은 각국의 물가 수준 차이를 반영한다. 물가 상승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나라의 통화 가치는 하락하는 것이 구매력 평가의 이론적 귀결이다. 문제는 최근 한국의 상황이 다소 역전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달러 표시 기준으로 국제 원자재 가격은 안정되거나 하락했지만, 원화 약세로 인해 원화 기준 수입가격은 오히려 상승하고 있다. 실제로 10월 수입물가지수는 전월 대비 1.9% 상승했다. 국제유가가 하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 환율이 한 달 사이 2% 이상 오르면서 수입가격을 끌어올린 결과다. 이번 국면에서 ‘물가가 오르니 환율이 약해지는’것이 아니라, ‘환율이 약해져 물가를 밀어 올리는’ 경로가 작동하고 있다.둘째, 환율 전가 효과 측면이다. 환율 변동이 기업의 생산비와 최종 판매 가격에 얼마나, 그리고 얼마나 빠르게 반영되는지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가격 경쟁이 치열한 수출 구조를 갖고 있어 환율 상승분이 최종 가격에 완전히 전가되지 못하는 ‘부분 전가’ 특성을 보여 왔다. 그러나 원자재와 부품을 수입해 국내에서 가공하는 중소·중견 기업의 경우 상황은 다르다. 환율 상승분을 자체적으로 흡수하기 어려워 비용 부담이 고스란히 실적에 반영된다. 한국은행과 재정경제부가 원화 약세를 수입물가를 거쳐 생산자 물가와 소비자 물가로 이어질 압력이 커졌다고 경고하는 배경이 바로 이 경로다.세 번째는 소위 ‘J-커브 효과’라는 것이 있다. 이론적으로는 환율 상승이 수출 경쟁력을 높여 무역수지를 개선해야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이미 체결된 계약과 고정된 물량 탓에 가격만 먼저 반응하고 물량 조정은 지연된다. 그 결과 무역수지가 일시적으로 악화될 수 있다. 최근 한국의 무역수지는 흑자를 유지하지만, 미국향 수출은 관세 인상 여파로 일부 산업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철강과 석유화학처럼 미국과 유럽 의존도가 높은 업종은 환율 효과를 충분히 누리지 목하고 있다. 즉, 환율이 올랐다고 해서 모든 수출 기업이 단기적으로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게 된다.네 번째는 대차대조표 효과를 보자. 달러로 부채를 지고 있는 원화로 수익을 내는 기업에게 환율 상승은 곧바로 부채 부담 확대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원화 가치가 10% 하락하면 동일한 달러 부채의 원화 환산액은 10% 늘어난다. 대기업들은 외화 조달 비중을 줄이고 환헤지 비율을 높여왔지만, 중견·중소 기업이나 해외 프로젝트 파이낸싱에 노출된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이 최근 한국 기업을 평가하면서 환차손과 이자 비용 증가를 주요 리스크로 지목하는 이유가 바로 이 경로다. 국민 일상과 한국 경제에 남는 과제이러한 다양한 경로들을 한국 현실에 대입해 보면 위험의 윤곽이 보다 분명해진다. 기업 측면에서는 수출 대기업과 중소 및 내수기업 간의 격차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와 자동차처럼 달러 매출 비중이 높은 업종은 환율과 가격 상승의 이중 효과를 누리고 있다. 반면 원자재를 수입해 국내에서 가공 하는 기업, 달러 차입 비중이 높은 기업은 원가와 금융 비용이 동시에 상승하며 마진 압박에 직면하고 있다.국민 일상에서도 고환율의 영향은 이미 체감되고 있다. 수입물가는 지난 2025년 7월부터 11월까지 연속 상승했고, 연간 기준으로도 플러스로 전환됐다. 국제 원자재 가격이 안정된 상황에서 나타난 변화라는 점에서 환율의 영향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2.4% 수준으로 기록했는데 농산물과 석유류, 수입 가공식품의 기여도가 높다. 장바구니 물가·외식비·물류비가 동시에 오르는 이유가 바로 고환율이라는 것이다.여기에 해외여행·유학·송금 비용 부담도 커졌다. 같은 2000달러라도 환율이 1300원일 때와 1500원일 때의 체감 차이는 크다. 해외 주식 투자까지 겹치면서 달러는 소비와 투자 전반을 관통하는 필수 경제 변수로 자리 잡고 있다. 개인의 해외 주식 순매수가 연간 300억 달러를 웃도는 상황에서, 달러가 국내를 떠나 장기간 해외 자산에 묶이는 구조가 고착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지금 한국에서 가장 현실적인 위험 시나리오는 세 가지다. 첫째, 수입물가로 이어지며 실질 소득을 잠식하는 경로다. 만약 임금 상승속도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체감 경기 악화는 불가피하다. 둘째, 중소 및 내수기업의 대차대조표 리스크 확대다. 환율과 금리가 동시에 부담으로 작용할 경우 고용과 투자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셋째, 대규모 대미 투자에 따른 장기적 달러 수요 증가는 환율 상향 변동성을 구조적으로 키울 가능성이 있다.기업과 가계의 대응을 위해서, 우리는 결국 기본적인 것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기업은 환위험 관리의 기본전략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가계 역시 고환율을 일시적 현상이 아닌 환경 변화로 인식하고, 해외 소비와 투자에서 쏠림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정책 당국의 역할은 더 중요하다고 본다. 단기적 변동성과 완화도 필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과제는 한국경제를 ‘만성 약세 통화’ 구조로 고착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성장 잠재력과 생산성, 인구 구조와 재정 기반이 약해지면 환율은 결국 이를 반영하게 된다. 지금의 환율을 단순한 외부 충격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고환율은 분명히 불편하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그래서 빨리 없애고 싶은 충동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환율은 동시에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비추어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수출에만 의존해 온 성장 방식에서 벗어나 내수와 서비스, 혁신 역량을 키우고 해외 투자와 국내 투자 간의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면 환율은 다시 안정의 영역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한국 경제는 고환율 시대를 피하기만 할 것인지, 아니면 더 강한 경제로 가는 계기로 삼을 것인지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필자는 서강대에서 경제학 학사와 석사 과정을 거친 뒤, 미국 위스콘신대 매디슨 캠퍼스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국제무역을 주요 연구 분야로 삼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25년에는 한국국제통상학회 제30대 회장을 맡아 학술 교류와 국제통상 연구의 확산에도 힘쓰고 있다.

2025.12.29 11:00

6분 소요
인구절벽 앞, ‘핀란드의 역설’이 가리키는 새로운 성장의 길 [스페셜리스트뷰]

산업 일반

세계 경제는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과거의 경제 위기들이 금융 시스템의 붕괴나 일시적인 수요 쇼크에서 기인했다면, 지금 우리가 마주한 위기는 훨씬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성격을 띤다. 바로 ‘인구통계학적 한계(demographic limitations)’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와 노동 인구의 감소는 더 이상 단순한 사회 현상이 아니다. 이는 지속 가능한 성장 자체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구조적 역풍으로 작용하고 있다. 더 적은 수의 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부양 인구를 떠안아야 하는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수준의 경제적 번영과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점점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다.인구통계학적 위기와 생산성의 수수께끼이러한 절박한 현실 앞에서 경제학 교과서가 제시하는 해법은 비교적 명확하다. 노동 투입량이 줄어든다면, 노동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21세기의 우리는 그 생산성 향상의 열쇠가 ‘디지털 기술’에 있다고 믿어왔다. ▲인공지능(AI) ▲로보틱스 ▲빅데이터 ▲블록체인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기술들이 인구 감소의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성장의 동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였다.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당혹스러운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글로벌 생산성 역설'(Global Productivity Paradox)이다. 지난 십수 년간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기술에 대한 투자는 천문학적인 규모로 이뤄졌다. 기업들은 앞다퉈 디지털 전환(DX)을 외쳤고, 각국 정부는 스마트 국가 건설을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의 핵심 척도인 총요소생산성(TFP)은 정체돼 있거나, 심지어 뒷걸음질 치고 있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왜 경제 통계는 그만큼의 성장을 보여주지 못하는가. 이 질문은 더 이상 학술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인구 절벽 앞에 선 각국 정부와 기업에게 이는 생존이 걸린 시급한 과제가 됐다.이번 기고는 이 역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례인 ‘핀란드’를 분석함으로써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세 가지 주장을 제시한다. 첫째, 디지털 투자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둘째, 우리가 목격하는 생산성 역설은 실체라기보다 착시에 가깝다. 셋째,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와 노동 인구 감소라는 구조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성장 엔진이자, 이 역설에 대한 명확한 해법으로서 ‘디지털 성장 원칙'(Digital Growth Principle, DGP)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디지털 성장 원칙은 ▲AI ▲로보틱스 ▲3D 프린팅 ▲블록체인 경제를 비롯한 차세대 신기술에 대한 집중 투자가 인구 감소 시대의 핵심 성장 메커니즘이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이 논의가 갖는 핵심적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선진국 정책 입안자들에게 미시경제적 성과가 거시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가속화할 수 있는 검증된 정책 모델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 경제를 위한 새로운 성장 프레임워크로서 디지털 성장 원칙의 가능성을 구체화했다는 데 있다. 전략적인 디지털 투자가 정보기술 인프라 격차에서 비롯된 글로벌 양극화를 완화하고, 경제적 수렴을 촉진하는 핵심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다.핀란드의 역설: 완벽한 디지털 국가의 멈춰 버린 성장판왜 하필 핀란드인가. 핀란드는 이 분석을 위한 가장 완벽한 테스트 베드다. 핀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인 동시에, 전 세계에서 가장 디지털 친화적인 나라로 꼽히기 때문이다.핀란드는 정부 주도의 강력한 전략 아래 '설계 기반 디지털'(Digital by Design) 국가로 탈바꿈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발표하는 디지털경제사회지수(DESI)에서 핀란드는 2018년부터 2023년까지 6년 동안 무려 네 차례나 1위를 차지하며 압도적인 디지털 역량을 과시했다. 핀란드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지출 비중은 지속적으로 3%를 상회하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최상위권에 해당한다. 또한 핀란드 정부는 'AI 기본과정'(Elements of AI)이라는 혁신적인 무료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전 국민의 1% 이상에게 인공지능의 원리를 교육하는 등 인적 자본의 디지털화에도 막대한 투자를 이어왔다.상식적으로라면 이러한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와 혁신 역량은 폭발적인 경제 성장으로 이어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핀란드의 거시경제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지난 수년간 핀란드의 연간 GDP 성장률은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고, 2023년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며 경기 위축을 겪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생산성 지표다. 2021년 팬데믹 이후의 일시적 기술적 반등을 제외하면, 핀란드의 연간 총요소생산성(TFP) 성장률은 0%대에 머물거나 오히려 감소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세계 1위의 디지털 경쟁력을 갖춘 나라가 왜 경제 성장에서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가. 이 극명한 불일치, 즉 핀란드의 생산성 역설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디지털 투자는 생산적인가.’ 혹은 우리가 디지털 기술의 경제적 효과를 과대평가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거시 지표의 표면을 넘어, 기업이라는 미시경제의 현장으로 깊숙이 들어가 봤다.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진실: 디지털성장원칙(DGP)의 입증거시 통계가 보여주는 ‘평균의 함정’을 피하고자, 2010년부터 2023년까지 핀란드 기업들의 방대한 패널 데이터를 분석했다. 목적은 인구 감소 시대에 디지털 투자가 생산성 향상을 이끄는 핵심 메커니즘이라는 디지털 성장 원칙을 실증적으로 검증하는 데 있었다. 디지털 성장 원칙은 인공지능, 로보틱스, 블록체인 등 신기술에 대한 집중 투자가 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견인한다는 명제를 전제로 한다.그러나 기업 수준에서 생산성을 분석하는 작업은 통계적으로 절대 단순하지 않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난관이 존재한다. 첫째는 ‘관찰되지 않는 이질성’의 문제다. 어떤 기업의 성과가 디지털 투자 때문인지, 아니면 데이터로 포착되지 않는 경영진의 역량 때문인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둘째는 ‘동태성’의 문제다. 기업의 생산성은 어느 한 시점에 갑자기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축적된 역량과 성과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는다. 셋째는 ‘내생성’의 문제다. 디지털 투자가 생산성을 높이는 것인지, 아니면 생산성이 높은 기업이 여유 자금을 활용해 디지털 투자를 늘리는 것인지 인과관계를 명확히 식별하기 어렵다.기존의 단순한 분석 기법으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으며,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편향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본 분석에서는 최신 계량경제학 기법인 '시스템 일반화 적률법'(System GMM)을 도입했다. 이 방법론은 변수들의 과거 값을 도구 변수로 활용함으로써, 경영진의 능력이나 역인과 관계와 같은 통계적 잡음을 제거하고 디지털 투자의 순수한 효과를 식별할 수 있게 해준다.분석 결과는 매우 분명했다. 통계적 잡음을 제거하자 디지털 투자의 진정한 위력이 드러났다. 핵심 발견은 다음과 같다. 기업의 디지털 자본 집약도, 즉 총자산 대비 디지털 기술 및 소프트웨어 자산의 비중이 1%포인트 증가할 때, 해당 기업의 총요소생산성(TFP)은 약 3.5%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이 결과는 통계적으로 매우 유의미할 뿐 아니라, 경제적 의미 또한 상당하다. 통상적인 물적 자본 투자나 노동 투입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수준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디지털 투자에서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디지털 성장 원칙이 단지 이론적 가설에 그치지 않고, 기업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강력한 성장 엔진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디지털 투자는 절대 실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업 단위에서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었다.역설의 해부: 기술의 실패가 아닌 ‘변환의 실패’미시(기업) 수준에서는 3.5%라는 강력한 생산성 향상이 확인되는데, 왜 거시(국가) 수준의 통계는 0% 성장을 가리키고 있을까. 이 둘 사이의 간극, 즉 ‘미시–거시 간 단절'(Micro–Macro Disconnect)이 바로 핀란드 생산성 역설의 실체다. 이 단절은 기술 자체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미시적 성과가 거시적 지표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요인들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를 ‘변환의 실패'(Translational Failure)라고 부른다.첫 번째 원인은 '집계와 확산'(Aggregation and Diffusion)의 문제다. 디지털 혁신의 혜택은 경제 전반에 균등하게 분포되지 않는다. 앞서 확인한 3.5%의 생산성 향상 효과는 디지털 기술을 선도적으로 도입한 소수의 ‘선도 기업’에 집중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경제의 다수를 차지하는 ‘후발 기업’들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에 머물러 있거나, 기술 도입 과정에서 비용·인력·역량의 한계에 직면해 있다. 소수의 선도 기업이 아무리 빠르게 성장하더라도, 다수의 후발 기업이 제자리에 머문다면 국가 전체의 평균 생산성은 개선되기 어렵다. 문제는 혁신의 부재가 아니라, 혁신의 확산 속도에 있다.두 번째 원인은 ‘길고 가변적인 시차'(Long and Variable Lags)다. 디지털 기술과 같은 범용 기술은 도입 즉시 생산성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공장에 인공지능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해서 다음 날 바로 생산성이 상승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 도입 이후에는 조직 구조의 재편, 인력 재교육, 업무 프로세스 전반의 재설계 등 이른바 ‘보완적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 핀란드의 디지털 전환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 거시적 성과를 수확하기까지는 아직 상당한 숙성 기간이 필요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제이(J) 커브의 바닥을 통과하고 있는 단계에 있을지도 모른다.세 번째 원인은 ‘측정 오류'(Measurement Error)다. 이는 현재 사용되는 경제 통계의 구조적 한계와 직결돼 있다. 오늘날의 GDP와 생산성 지표는 20세기 제조업 경제를 기준으로 설계됐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리적 재화의 수량은 비교적 정확하게 측정하지만, 디지털 경제가 창출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치는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예컨대 검색 서비스나 무료 메신저가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막대한 효용, 디지털 서비스의 품질 향상, 거래 속도의 증가나 위험 감소와 같은 요소들은 기존 통계에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핀란드 경제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영역에서 이미 상당한 성장을 이루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미래의 거울: 블록체인 경제가 보여주는 단절의 현장이러한 ‘변환의 실패’는 과거의 데이터 분석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현재 부상하고 있는 차세대 디지털 기술인 블록체인 경제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실시간으로 재현되고 있다. 분산원장기술(DLT), 스테이블코인,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는 앞서 언급한 집계와 확산의 문제, 시차의 문제, 그리고 측정 오류라는 세 가지 단절 요인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다.먼저 ‘확산의 실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세계 최대 컨테이너 운송사 머스크(Maersk)와 IBM이 주도했던 물류 블록체인 플랫폼 ‘트레이드렌즈'(TradeLens)를 들 수 있다. 이 플랫폼은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매우 높았다. 서류 처리 비용을 약 20% 절감하고, 배송 시간을 최대 40% 단축하는 등 기업 단위에서는 분명한 효율성 개선 효과가 확인됐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2022년 결국 서비스 종료라는 결말을 맞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생태계 내 다른 참여자들, 즉 후발 기업들을 충분히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것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지 못하면 거시적 성과는 사실상 0에 수렴한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측정 오류’의 문제는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 시스템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자(Visa)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시도하고 있는 스테이블코인(USDC) 기반의 기업 간 거래(B2B) 결제는 기존에 며칠씩 소요되던 국제 송금을 단 몇 초 만에 완료할 수 있게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산성 향상은 속도의 비약적 증가, 거래 리스크의 제거, 그리고 수수료 절감이다. 그러나 송금되는 금액, 즉 거래의 명목 가치 자체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GDP 산정 방식으로는 이러한 혁신적 효율성 개선을 거의 포착할 수 없다. 기업의 수행 업무 방식은 훨씬 효율적으로 바뀌었지만, 국가 통계는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시차의 문제’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프로젝트인 ‘mBridge’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주관한 이 프로젝트는 국경 간 결제 비용을 최대 50%까지 절감할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줬다. 기술적·미시적 잠재력은 분명히 확인됐지만, 이 성과가 실제 국가 경제의 생산성 지표로 반영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금융 규제의 정비, 기존 은행 시스템과의 통합, 국제 공조 체계 구축 등 국가 금융 인프라 전반의 재구성이 선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기술 역시 지금은 변환의 시차 구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한국과 디지털성장원칙 그렇다면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최근 핀란드 기업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연구는 생산성 역설이 기술의 한계가 아니라 집계와 확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착시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미시적 수준에서는 디지털 자본이 여전히 강력한 성장 엔진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디지털 자본 집약도가 1%포인트 증가할 때 기업의 총요소생산성(TFP)이 약 3.5% 상승한다는 분석 결과는 한국 경제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거시적 단면에서 보면 대한민국 역시 생산성 역설의 징후를 보인다. 한국은 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이 세계 1~2위를 다툴 만큼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반도체와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국가다. 그런데도 총계 수준의 TFP 성장률은 둔화하고 있다. 이는 디지털 투입과 생산성 산출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 단절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핀란드가 유럽 내에서도 최고 수준의 고령화 국가라면, 대한민국은 합계출산율 0.7명대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인구 절벽에 직면해 있다. 축소되는 노동력 환경에서 현재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근로자 1인당 생산성, 즉 노동생산성의 획기적인 향상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성의 비약적 증대는 현실적으로 디지털 전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대한민국에 디지털 성장 원칙은 단순한 경제 전략을 넘어 사회 계약을 유지하기 위한 ‘존립의 문제(Survival Issue)’로 재구성된다. 과연 이 원칙은 세계 최악 수준의 인구 절벽에 직면한 한국에서도 유효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에서의 효과는 핀란드를 상회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우선 투입 구조의 질적 수준 측면에서 한국은 뚜렷한 우위를 갖고 있다. 핀란드의 R&D 지출 비중이 GDP 대비 약 3% 수준이지만 한국은 4.9%를 넘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R&D 집약도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과 광케이블 침투율 등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는 디지털 자본이 생산성으로 전환되기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네트워크 효과가 강하게 작용하는 디지털 경제의 특성상, 이처럼 고도화된 인프라를 갖춘 한국에서는 디지털 자본의 생산성과 탄력성이 3.5%라는 수치를 충분히 상회할 가능성이 있다.실제로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미시적 실증 연구들 역시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과거 국내 제조업과 서비스업 기업 분석 결과에 따르면, 정보기술(IT) 자본의 한계생산성은 비(非) IT 자본보다 최대 8배 높게 나타난 바 있다. 또한 무형자산 중심 산업에서 노동생산성 성장의 60% 이상이 총요소생산성(TFP) 증가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소프트웨어와 데이터베이스와 같은 디지털 자산이 이미 한국 경제의 핵심 성장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이 직면한 인구통계학적 절박성은 디지털 전환의 한계 이익을 극대화하는 강력한 촉매로 작용할 것이다. 합계출산율 0.7명대라는 전례 없는 노동력 감소 국면에서 디지털 기술은 더 이상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노동을 근본적으로 대체하는 필수재로 자리 잡게 된다. 숙련된 인적 자본이 디지털 기술과 결합할 때 발생하는 시너지는 인구 감소의 역풍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생산성 도약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인구감소를 넘어서는 길핀란드의 사례는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남긴다. 이른바 생산성 역설은 디지털 기술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술의 잠재력이 거시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장통이며, 동시에 20세기형 통계 체계가 빚어낸 착시에 가깝다. 디지털 성장 원칙(Digital Growth Principle)에 따르면, 디지털 자본에 대한 투자는 기업 수준에서 이미 확실하고 강력한 보상을 제공하고 있다.따라서 정책 입안자와 기업 리더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디지털 투자의 효과를 의심하거나 주저할 것이 아니라, 미시적 성과가 거시적 성장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환의 실패’를 극복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다.선진국 경제에 있어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는 ‘혁신의 가속화’가 아니라 ‘혁신의 확산’이다. 정부의 지원 정책은 이미 잘하고 있는 소수의 선도 기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술 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과 전통 산업군을 대상으로 한 지원에 집중돼야 한다. 아울러 디지털 기술 도입이 실제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기술 그 자체에 대한 투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해당 기술을 운용할 인력을 양성하고, 조직 구조와 업무 프로세스를 변화시키는 ‘보완적 자산’에 대한 투자가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핀란드의 'AI 기본과정'과 같은 전 국민 재교육 프로그램은 인적 자본을 업그레이드함으로써 기술 확산의 시차를 단축하는 대표적인 모범 사례다. 더 나아가 디지털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경제 지표를 개발해, 우리가 창출한 가치를 제대로 측정하려는 노력 역시 병행돼야 할 것이다.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에게도 디지털 성장 원칙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선진국이 걸어온 산업화의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추격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디지털 인프라를 도로와 전기와 같은 핵심 공공재로 인식하고 과감하게 투자함으로써, 발전 단계를 건너뛰는 ‘립프로그'(Leap-Frog)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핀란드의 경험은 디지털 자본이 글로벌 경제에서 수렴(convergence)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보여준다.결론적으로 인구 감소는 피할 수 없는 미래다. 그러나 그것이 곧 경제 성장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이라는 강력한 성장 엔진은 이미 우리 앞에 준비돼 있다. 핀란드의 생산성 역설은 그 엔진을 어떻게 예열하고, 어떻게 국가 경제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연결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다. 기술을 믿고, 확산을 서두르며,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 이것이 인구 감소를 넘어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나아가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 바로 디지털 성장 원칙이다. 필자는 현재 영국계 글로벌 사모펀드 한국 대표를 맡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국제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런던정경대(LSE), 프랑스 파리 HEC, 미국 뉴욕대(NYU) 스턴 스쿨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MBA 과정을 마쳤다. 하버드 케네디 스쿨(Harvard Kennedy School)에서도 수학했다. 금융위원회 외신대변인으로 활동하며 정책 소통 경험을 쌓았고, 사우디아람코 코리아 임원을 역임하며 글로벌 에너지 및 투자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경영대학 및 블록체인융합학과 겸임교수로서 강단에 서고 있다.

2025.12.28 10:00

12분 소요
‘혼돈의 2025’ 터널을 지나 ‘재도약의 2026’으로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고물가’ ‘고환율’ ‘내수 부진’. 2025년 한국 경제를 짓눌렀던 그림자들입니다. 비상계엄·탄핵 정국이 끝나며 신정부가 출범하고 정치적 불확실성이 해소되면서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온기를 체감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2026년 새해에는 달라질까요? 기업들은 기대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생활밀접업종(도·소매업, 숙박·음식점업)과 제조업종에 종사하는 소상공인 800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소상공인 경영실태 및 정책과제 조사’에서 원자재비와 재료비 상승, 내수 침체 등에 따라 2026년 경영 환경이 올해와 비슷하거나(51.3%) 악화될 것(38.0%)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긍정적인 전망은 고작 10.8%였습니다. 대기업·중견기업들도 다르지 않았는데요, 한국경제인협회가 매출액 10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6년 기업 경영 환경 인식 조사’를 보면 응답 기업(150곳) 중 52.0%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고, ‘매우 어렵다’는 답변도 18.0%나 됐습니다. 기업들이 꼽은 경영 리스크 요인은 대내적으로 내수 부진 및 회복 지연(32.2%), 인플레이션 심화(21.6%), 금리 인하 지연 또는 인상(13.1%) 등이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환율 등 외환시장 변동성 확대(26.7%), 보호무역 및 수출 장벽 확대(24.9%), 세계경제 둔화 및 회복 지연(19.8%), 에너지·원자재 등 수입 물가 불안(15.3%) 순이었습니다. 기업들은 부정적 전망에 몸을 잔뜩 움츠렸습니다. 한국경제인협회의 ‘2026년 국내 주요 500대 기업 투자계획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59.1%는 2026년 투자계획을 수립하지 못했거나(43.6%), 투자계획이 없는(15.5%) 상태였습니다. 투자계획을 수립한 기업(40.9%) 중 53.4%는 투자 규모를 2025년과 비슷하게 유지할 예정이고, 33.3%는 줄일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기업의 투자 엔진이 식어 있는 한 한국 경제가 다시 활력을 되찾기는 쉽지 않습니다.기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가 발간한 ‘2026 경제大대망’에서 “새해에는 어둡고 긴 터널의 끝이 보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한국 경제가 상저하고의 완만한 경기 회복 추세를 보일 것”이라며 “경제 지표가 평균적인 수준으로 회귀하려는 본능적인 힘을 가지기 때문에 경제 성장률이 2025년 1% 내외에서 2026년에는 잠재 성장률 수준인 1%대 후반에서 2%대 초반 사이에서 상승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한마디로 2025년 워낙 나빴기 때문에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다만 반등의 속도는 매우 완만할 것으로 보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마저도 가능하기 위해서는 재정과 통화 정책이 손발을 맞춰 내수 경기의 활력을 가속해 고용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역시 지금으로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국정 기조로 내세운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구현하느냐가 향후 성장 경로를 좌우할 겁니다. 기업의 투자 결정을 제약해 온 각종 규제를 합리적으로 정비하고, 세제 지원을 통해 위험 부담을 감수할 유인을 부여하는 것이 정책 운용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경제가 혼돈의 2025년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한 만큼, 2026년 병오년에 다시 날아오르길 기원합니다.

2025.12.28 06:00

3분 소요
관광·마이스 시장 큰손으로 떠오른 세계 최대 인구대국 ‘인도’ [E-MICE]

전문가 칼럼

세계 최대인 14억6000만 인구 대국이자 세계 5대 경제 대국 ‘인도’가 관광·마이스(MICE) 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 세계 경제 성장률의 2배가 넘는 6~7%대 고성장을 등에 업고 해외여행은 물론 기업회의, 포상관광 등의 수요가 가파르게 증가하면서다. 글로벌 여행 전문 리서치회사 스키프트는 최근 “인도가 전 세계 아웃바운드(내국인의 해외여행) 시장의 수익성을 높이며 내수 침체로 수요와 소비가 준 중국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며 세계 제1의 ‘빅 마켓’ 중국에 버금가는 아웃바운드 수요를 갖춘 ‘이머징 마켓’으로 인도를 지목했다.인도정부관광부에 따르면 인도 국적 해외 출국자는 지난해 사상 처음 3000만명을 돌파했다. 2015년 사상 첫 2000만명 돌파 이후 정확히 10년 만이다. 지난 2023년 전년 대비 30% 급증하며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최대였던 2019년 기록을 4%가량 웃돈 해외 출국자는 지난해에도 11% 늘어 3089만명을 기록했다. 지난해 해외 출국자 사상 첫 3000만 돌파인도 아웃바운드 관광·마이스 수요의 가파른 증가세는 최근 수년간 이어진 고성장으로 가처분 소득이 늘어 소비 여력이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미국 상무부 산하 국제무역청(ITA)은 지난 4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인도 내 가처분 소득과 중산층이 늘면서 고환율과 고유가, 고물가의 악조건에서도 수요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인도는 코로나19 엔데믹 이후 최근 3년간 평균 8%가 넘는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세계 경제 성장률 3%(세계은행 기준)보다 2.5배 이상 높은 수치다. 지난 2022년 사상 최고인 9.7%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기록한 인도는 2023년과 2024년에도 각각 7.3%, 8.2%의 고성장을 이어갔다. 미국 상무부 국제무역청(ITA)은 보고서에서 “비즈니스 출장과 여가의 병행, 가족 동반 수요가 늘면서 인도 국민의 단기 여행 씀씀이가 늘고 있다”면서 “오는 2034년 인도 아웃바운드 관광·마이스 시장 규모가 550억달러(80조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인도가 아웃바운드 관광·마이스 시장의 이머징 마켓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앞으로 수요가 더 늘어날 여지가 높기 때문이다. 작년 기준 인도 전체 인구 중위 연령은 28세로 중국(40세)과 미국(39세) 중 가장 낮고, 이전보다 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2명대 출산율을 유지 중이다. 전체 인구 중 35세 미만 비중은 65%에 달한다. 미국 컨설팅 전문회사 맥킨지앤컴퍼니는 “주요 국가의 중위 연령보다 10년 이상 낮은 이들의 소득 수준이 정점에 이르는 오는 2040년 인도 아웃바운드 관광·마이스 수요는 연간 90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소비 여력을 갖춘 중산층도 빠르게 늘고 있다. 인도상공회의소연합(FICCI)에 따르면 현재 인도 중산층은 전체 인구의 25% 수준인 3억50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인구 7배와 맞먹는 숫자의 인도 국민이 큰 부담 없이 해외여행에 나설 정도의 경제력을 갖췄다는 얘기다. 현재 전체 인구의 6% 수준인 8000만명에 불과한 여권 소지자도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韓 기업·단체 마이스 수요부터 공략해야유엔 세계관광기구에 따르면 인도 관광객은 항공료와 숙박비 등 포함 해외여행 시 평균 1200달러 내외를 쓰는 일본과 중국 관광객 대비 적게는 2~3배에 달하는 비용을 지출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사니야 잔프레 스키프트 수석연구원은 지난 10월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에서 열린 ‘스키프트 글로벌 포럼’에서 “인도는 30분마다 백만장자가 탄생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산가들이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라며 “전체 인구의 중산층 비율이 오는 2031년 38%까지 늘면서 해외여행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빠르게 느는 인도 아웃바운드 관광·마이스 수요는 비행시간 2~3시간 이내인 UAE와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중동 국가가 빨아들이고 있다. 비행시간만 11~14시간이 걸리는 미국과 영국 외에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 태국이 연간 150만~170만명의 인도 관광객을 유치하며 수혜를 보는 상황이다. 최근엔 홍콩이 인도 국민에 대한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며 유치 경쟁에 가세했다.FICCI는 ‘인도 관광·여행시장 분석’ 보고서를 통해 “최근 20대 사이에서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 여행 수요가 늘고 있다”며 “이동거리와 시간이 길지 않고 종교나 음식 등 문화적으로도 친숙해 젊은 세대의 첫 자유 여행지로 인기를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한국은 빠르게 늘어나는 인도 아웃바운드 관광·마이스 수요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한국관광데이터랩에 따르면 지난 2016년 20만명에 육박하던 방한 인도 방문객은 지난해 약 18만명에 그쳤다. 방한 외국인 관광객 중 인도 관광객 비중도 간신히 1%를 웃돈다. 작년 기준 인도 전체 해외 출국자 중 차지하는 비중은 단 0.2%로 일본, 중국의 3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다. 인도 내 아웃바운드 관광·마이스 수요를 선점하려면 ‘항공 접근성’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비자 발급 절차를 간소화하고, 무비자 입국 허용보다 직항 항공편을 늘려 일정·가격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인도 출입국관리사무소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여행에 나선 인도 국민의 98%는 항공편을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로 베트남은 최근 직항 항공편 운항을 월 200편으로 늘리면서 작년 인도 관광객이 30배 넘게 급증했다. 현지 물가가 비싼 두바이와 싱가포르는 항공편을 늘리고 가격을 낮추는 방식으로 인도 아웃바운드 수요를 끌어들이고 있다. 이동시간이 긴 장거리 지역인 한국은 전략적으로 비즈니스 출장 등 마이스 수요 공략에 나서는 게 효과적이라는 게 현지 전문가의 조언이다. 전체 인도 아웃바운드 수요 중 비중이 적지 않은 데다 향후 개인 또는 가족을 동반한 휴양·레저 목적 여행으로 재방문 수요도 기대해 볼 수 있어서다. 안쿠시 니자완 FICCI 아웃바운드 관광위원회 위원장은 “지난해 비즈니스 목적 해외 출국자 461만명 가운데 아웃바운드 마이스 관광객은 절반에 가까운 200만여 명에 달했다”며 “꾸준한 경제 성장에 힘입어 기업·단체의 기업회의, 포상관광 수요가 늘면서 인도 내 아웃바운드 마이스 시장 규모는 오는 2031년 130억달러(약 19조원)까지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2025.12.27 08:00

5분 소요
‘공동체를 위한 경제’ 추구하는 로컬브랜드, 대전 ‘성심당’의 역설[허태윤의 브랜드 스토리]

전문가 칼럼

단 한 개의 도시에서 4개의 매장으로 3000개가 넘는 전국 프랜차이즈 매장을 거느린 공룡기업보다 이익을 더 많이 내는 빵집이 있다. 대전의 로컬 빵집 ‘성심당’의 이야기다. ‘대전에서만 빵을 판다’ 라는 원칙을 고수하며 70년을 이어오며 단 4개매장을 운영하는 이 빵집이 올린 경영성과는 놀라움을 넘어 신비롭다. 2024년 매출 1,937억원, 영업이익 478억원을 기록했다. 반면 수천개의 대리점을 운영하는 베이커리 프랜차이즈인 파리바게트, 뚜레쥬르의 2024년 영업이익은 각각 223억 원, 293억원이다.성심당의 ‘대전판매'는 원칙을 얼마나 철저히 지키는 가를 알 수 있는 해프닝이 있다. 성심당이 작년 서울에서 열린 ‘로컬 크리에이티브2024’라는 행사에 참석하면서, 당시 성심당 빵을 행사기간동안 서울에서도 맛볼 수 있다는 소비자들의 기대감이 높아졌다. SNS에서는 성심당 빵을 드디어 서울에서도 맛볼 수 있다는 글들이 엄청나게 올라왔다. 자신들의 기업철학을 알리고 빵을 소개할 수 있는 큰 행사였음에도 이 브랜드는 단칼에 “전시만 진행한다”는 공지를 올려 자신들의 원칙을 지켰다. 결국 서울의 성심당 마니아들은 성심당의 빵을 사기위해 KTX에 몸을 싣고 대전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1956년, 흥남철수 후 대전에 도착한 실향민 창업주가 한 신부의 도움으로 받은 밀가루 두포대로 시작 된 찐빵집은 어떻게 대한민국 베이커리 산업의 신화가 됐을까?문화 브랜딩의 교과서, 성심당옥스퍼드대 더글라스 홀트 교수의 문화 브랜딩 이론은 성심당의 성공을 설명하는 적절한 틀이다. 홀트 교수는 진정한 아이코닉 브랜드는 제품이 아닌 '문화적 아이콘'이 될 때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브랜드가 소비자들의 문화적 갈증과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를 형상화할 때 비로소 컬트적 충성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성심당의 임영진 대표가 강조하는 '성심당의 경영 방식은 EoC(Economy of Communion, 공동체를 위한 경제)'다. 단순히 빵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주위를 더 이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갈구해온 '따뜻한 자본주의', '상생의 경제'라는 문화적 이념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대기업 제빵 프랜차이즈가 획일화된 맛과 효율성만을 추구할 때, 성심당은 장인정신과 지역공동체라는 문화적 코드로 차별화에 성공했다.‘빵이 지역 경제와 사람의 공동체,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또 하나의 가치가 돼야 한다’는 성심당의 철학은 단순한 CSR을 넘어선다. 이는 브랜드의 존재 이유이자 신화가 됐다. 70년의 시간 동안 대전이라는 도시와 함께 호흡하며 쌓아온 '나의 도시, 나의 성심당'이라는 정체성은 어떤 마케팅 캠페인도 따라올 수 없는 진정성을 담고 있다.‘문화적캐즘’을 건너오게 만들다’성심당의 가장 탁월한 브랜딩 전략은 역설적이게도 '확장하지 않음'이다. 서울 진출 제안을 수차례 거절하고 "성심당 빵! 대전에서만 판매합니다"라는 원칙을 고수한다. 보통의 기업에서라면 기회 손실로 분류될 이 결정이 오히려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홀트 교수는 는 '문화적 캐즘(Cultural Chasm)'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서브컬처와 주류 시장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간극이다. 로컬 장인 빵집과 전국 프랜차이즈 사이, 소수의 열성팬과 대중적 인지도 사이에 놓인 이 캐즘을 대부분의 브랜드는 '건너가려' 한다. 전국 진출, 프랜차이즈 확장으로. 하지만 그 순간 로컬 브랜드의 고유한 장소성과 진정성은 희석된다.성심당은 캐즘을 건너가는 대신, 사람들이 캐즘을 건너오게 만들었다. "대전에 가야만 먹을 수 있다"는 제약이 오히려 브랜드 신화가 됐다. 튀김소보로 하나를 사기 위해 KTX를 타고 대전을 찾는 '빵지순례'는 이러한 전략의 결과물이다. 1,700원짜리 빵이 명품 핸드백처럼 '갖고 싶은' 대상이 된 것이다. 지난해 성심당을 찾은 고객의 수는 800만명이다. 그중 58%가 외지인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성심당은 로컬 브랜딩의 본질을 보여준다. 많은 기업들이 '로컬'을 마케팅 수사로 활용하지만, 성심당의 로컬은 다르다. 2012년부터 성심당은 자사 로고에 '大田(대전)'을 명시하기 시작했다. 이후 로고 디자인이 4차례 바뀌었지만, '대전' 표기만큼은 단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다. 60주년 앰블럼에는 "나의 도시, 나의 성심당"이라는 슬로건이 새겨졌다. 성심당 매장 인근에는 이곳 빵을 들고와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카페들이 등장하고, 주변 상권들은 '성심당 영수증 소지자 할인' 이벤트를 벌이며 성심당이 있는 중구 은행동 일대는 사실상 '성심당 타운'이 됐다. 로컬 브랜드로서 가치가 높아질수록 유통은 더욱 커져야 하는데, 성심당의 가치가 높아질수록 유통은 더욱 커지지 않았다. 이 역설이 성심당 브랜딩의 핵심이다. 진정한 로컬 브랜딩이란 무엇인가성심당은 또한 직원에 대한 투자로도 유명하다. 판관비 비율 21%는 업계 평균 40%에 비해 현저히 낮다., 마케팅 투자가 그만큼 적다는 말이다. 대신 성심당은 이익의 상당부분을 직원들에게 투자한다. 직원들은 그에 답하며 고객과의 최일선에서, 공장에서 브랜드의 이념을 실천한다. 이들에 대한 인사평가도 다른 기업과 다르다. 동료를 돕고, 휴일의 외부 봉사을 하며, 동료와의 갈등에서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었는가’와 같은 ‘사랑의 실천’이 고과의 기준이다. 브랜드의 이념을 직원들 개개인이 실천하며 고객경험에 투영하는 이들이야 말로 수억원의 돈을 들이는 연예인 모델보다 더 값진 브랜드 앰버서더들인 것이다한국의 지방 도시들이 사라지고 있다. 청년들은 서울로 떠나고, 구도심 상권은 쇠락한다. 대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대전은 성심당으로 인해 ‘노잼도시’에서 꿀잼 도시’로 변모했다. 주말이면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 개의 빵집이 도시 전체를 살렸다고 해도 과언아 아니다.성심당의 성공은 단순한 빵집의 성공이 아니다. 이것은 로컬 브랜딩이 지역소멸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진정한 로컬 브랜딩이란 무엇인가? 성심당은 세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장소성이다. 대전이라는 도시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대전을 브랜드의 핵심으로 삼았다. 둘째, 진정성이다. 70년간 한 자리를 지킨 역사가 한줄의 광고 카피가 아닌 실제 삶이다. 셋째, 공동체다.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겠다’는 철학이 대전 시민들과의 유대를 만들었다."성심당은 빵이 '모든 이를 만나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임 대표의 말처럼, 진정한 브랜딩은 상품이 아닌 문화에 초점을 맞출 때 완성된다. 성심당은 빵을 팔지 않는다. 대전이라는 도시의 자부심과 공동체의 가치, 그리고 따뜻한 자본주의의 가능성을 판다. 그것이 2025년에도 사람들이 KTX를 타고 성심당을 찾는 이유다.

2025.12.24 15:49

5분 소요
향후 가상자산 시장은 어떻게 될까 [김기동의 이슈&로(LAW)]

가상화폐

지난 10월 비트코인이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이후, 거시경제 지표의 불안정과 과도한 레버리지 투자의 청산이 겹치며 가상자산 시장은 큰 폭의 조정을 겪고 있다. 마침 같은 시기에 미국의 물가 안정 기조가 강화되고, 주식시장 역시 조정 국면에 들어서면서 가상자산과 주가가 동시에 흔들리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필자에게 “가상자산 가격이 이렇게 조정을 받는데 계속 투자해도 괜찮겠느냐”는 질문이 부쩍 많아졌다. 가상자산 관련 업무를 취급하는 변호사인 필자에게는 쉽게 답하기 곤혹스러운 질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종종 ‘글로벌 금융 지도자 회의’라는 유튜브 영상을 한 번 참고해 보라고 권하곤 한다.위 유튜브 영상은 지난 10월 28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최고경영자(CEO)들이 모여 인공지능(AI)·달러·디지털자산 등 산업과 금융의 미래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담고 있다. 블랙록·JP모건·골드만삭스·HSBC·KKR·블랙스톤·퀄컴·인텔 등 글로벌 금융회사와 빅테크 기업 CEO들의 발언이 생생하게 소개된다.제도권 들어온 가상자산…바뀐 게임의 규칙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CEO 래리 핑크다. 블랙록은 2024년 말 기준 약 11조5000억달러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국가들의 국내총생산(GDP)을 웃도는 규모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같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은 물론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전 세계 주요 우량 기업들의 주요 주주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업 경영의 핵심 화두가 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개념 역시 블랙록이 투자 기준으로 제시하며 확산된 바 있다. 그는 “자산이 토큰화되는 시대의 초입에 있다”며 주식, 채권, 부동산 등 거의 모든 실물자산(RWA, Real World Asset)이 디지털 토큰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에 따르면 거래 속도는 빨라지고 비용은 획기적으로 낮아지며, 고가 자산에 대한 접근성도 크게 개선된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두고 기술이 ‘금융의 배관(plumbing)’을 바꾸고 있다고 표현했다.미국 최대 은행 JP모건의 CEO 제이미 다이먼의 발언 역시 주목할 만하다. JP모건은 그동안 가상자산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입장을 유지해 왔지만, 그는 최근 “블록체인, 스테이블코인, 스마트 계약 등 기술 자체는 현실이며, 향후 더 나은 거래와 고객 서비스를 위해 사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 발언 이후 JP모건은 이더리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미국 단기 국채 등에 투자하는 토큰화 머니마켓펀드(MMF) ‘MONY’를 출시했다.가상자산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견지해 왔던 세계 2위 자산운용사 뱅가드 역시 최근 입장을 바꾸었다. 12월부터 자사 플랫폼에서 비트코인, 이더리움, XRP ETF 등의 거래를 허용한 것은, 가상자산이 더 이상 주변부 자산이 아니라 전통 금융자산과 동일한 틀 안에서 평가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변화다. 미국 통화감독청(OCC)도 12월 은행이 가격 변동 리스크 없이 고객 주문을 중개하는 가상자산 매매 서비스를 공식 허용하면서, 은행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이처럼 미국 정부와 월가는 디지털자산을 금융 제도의 일부로 빠르게 편입시키고 있다. 특히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제도화는 디지털자산 시대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라 할 만하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법적 근거가 되는 지니어스 액트(GENIUS Act)는 올해 7월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입법이 완료되었고, 빠르면 내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올해 8월 미 하원을 통과해 내년 초 상원 통과가 예상되는 클래리티 액트(Clarity Act)는 가상자산 시장의 가장 큰 리스크였던 규제 모호성을 해소하는 핵심 법안이다. 이 법안은 가상자산을 발행 초기부터 ‘증권’과 ‘상품’으로 구분해 규율하며, 특정 주체의 지배력이 낮아 탈중앙성이 높은 코인은 상품으로 분류해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관할하도록 하고 있다. 이로써 월가의 대형 기관투자자들도 법적 불확실성 없이 가상자산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제도화와 기관 수용이 곧바로 가격 상승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가상자산 시장은 ‘새로운 투자자산으로 인정받아 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기대와 인지도 상승이 가격을 끌어올려 왔다. 가격 아닌 생존 문제...10년 후 살아남을 디지털자산은그러나 이제는 상당 부분 제도적 지위가 확립되면서, 가상자산 역시 금리·유동성·경기 여건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정상적인 금융자산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 최근의 가격 조정은 가상자산에 대한 신뢰 하락이라기보다는, 미국의 물가 안정 기조와 주식시장 조정 국면 속에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재평가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가상자산은 여전히 변동성이 큰 자산이며, 시장 형성 초기 단계라는 점에서 단기적인 가격 전망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이 인간의 편익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금융 시스템을 재편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따라서 5년, 10년 뒤의 세상은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AI와 로봇이 지금 사람이 수행하는 업무의 상당 부분을 대체하고, 완전자율주행 차량과 에어택시가 일상화될 가능성도 크다. 법조계 역시 방대한 종이 기록이 사라지고, 상당수 서면이 AI에 의해 작성되는 구조로 변화할 것이다.금융과 결제·송금 시스템 역시 블록체인과 디지털자산을 기반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물건의 주문과 결제는 AI 에이전트가 디지털자산으로 처리하고, 카드 수수료와 같은 고비용 구조는 유지되기 어려워질 것이다. 해외 송금은 몇 초 만에 이뤄지고, 은행 계좌가 없는 사람도 금융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이러한 변화 속에서 가상자산 시장의 성장은 ‘막연한 기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자산과 어떤 기술이 실제 금융 인프라로 자리 잡을 것이냐’의 문제로 바뀌고 있다. 이제는 ‘가상자산 시장 전체’에 투자하는 시대가 아니라, 가상자산 안에서 무엇이 살아남고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를 선별해야 하는 시점이다.따라서 10년 후 가상자산 시장이 지금보다 훨씬 더 커져 있을 것이라는 전망은 과도하지 않다. 다만 그 성장은 균등하지 않을 것이며, 변화의 방향을 읽고 준비하는 사람만이 다가올 미래의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다.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

2025.12.24 07:00

5분 소요
정년연장 연내 입법화 표류…무엇이 문제인가 [정년연장의 역설]③

정책이슈

정년연장의 연내 입법화가 표류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 국정과제에도 포함돼 있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정년연장특별위원회를 가동해 방안 마련에 나섰음에도 말이다.정년연장 연내 입법화 무산되나정년연장 입법화가 표류하는 것은 ‘단계적 정년연장’의 구체적인 방법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수급개시 연령과 지금도 3년 차이가 나고, 오는 2033년에는 5년의 간격이 발생하는 제도적 불일치를 해결하는 단계 설정의 구체안이 문제인 것이다. 언제부터 시작해서 언제까지 끝나도록 단계를 설정할지에 따라 정년연장의 영향은 판이하다.현실적으로 노후 소득공백을 가장 빨리 줄이는 방안은 2027년부터 매년 1세씩 상향하는 방안(A안)이다. 영향권도 67년생부터 70년생으로 가장 좁다. 2028년부터 매년 1세씩 상향(B안)하면 67년생부터 71년생까지 1년씩 소득공백 축소가 늦어진다.2028년부터 2년에 1세씩 상향하는 C안(이른바 민주당 1안)의 소득공백은 67년생부터 74년생까지 발생하며, A와 B안보다 3~4년 더 길어진다.D안(유력하다는 민주당 2안)은 2029년부터 ‘3·3·2·2’ 간격으로 상향해 2039년 65세에 도달하는 방안이다. 이는 오는 2029년부터 3년에 1세씩 상향하는 E안(민주당 3안)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다. 지금부터 14~16년 걸리고, 78년생과 80년생까지 소득공백이 발생하는 방안을 정년연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차라리 정년연장 유예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다.노후소득 크레바스(직장에서 은퇴해 국민연금 등 공적소득이 시작되기 전까지 발생하는 소득공백 기간)로 인한 연간 소득감소액(정규직 평균 월임금 389만6000원 기준)은 D, E 안에서는 1억원을 넘어 소득공백 총량이 매우 크다. 2년 재고용 방안을 혼합하면 연금과 정년의 불일치로 인한 소득 크레바스의 보완정책으로 효과적이긴 하나 역시 D, E 방안으로는 역부족이다. 물론 희망자 모두가 다 채용되는 재고용 의무화 방안은 민주당 안에서 제시되지 않았다. 의무화가 아닌 재고용으로 인한 임금손실 감소 효과는 절반 이하로 봐야 한다. 원판이 안 좋으면 헐거운 보완책으로는 어림도 없다.시간을 이미 많이 흘려보냈다. 연내 입법화를 완수하되 정년연장에 걸맞은 방안을 도입하자. 유예에 가까운 안으로는 피해가 집중될 세대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광범위한 비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재고용 보완책은 필수적이지만 의무화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절반에 가까운 현재 기업이 이미 하니 만큼 상황을 개선하지 못한다. 정년연장 필수 불가결 올바른 길 찾아야우리가 정년연장을 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늙어서까지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라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노년층은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숙련도 경험도 건강도 갖췄지만 한계 일자리를 전전한다. 퇴직 연령인 60세가 지나도 국민연금이 지급되지 않는 국가 제도의 불합리성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나이가 들수록 더 힘들어질 것을 알면서도 감액을 감수하고 국민연금을 조기 수령하는 인구가 100만명이 넘었다. 그래서 주된 일자리에서 더 오래 머물게 해 근원적으로 노년 소득공백을 완화하는 정년연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물론 고민은 있다. 생산가능인구 감소가 어느 나라보다 빠르다지만, 아직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고 ‘할 만한 일자리’가 청년에게는 여전히 부족하다. 공공 부문에서는 총액인건비제와 경영평가제의 재정비가 필요하고, 민간 부문에서는 세대 상생 고용모델을 촉진하는 고용공시제 적용이 필수적이다. 세대 상생형 직무 공유 모델도 이제부터라도 자리 잡게 촉진해야 한다.노동자 소득 상위 20%는 오래 근무할수록 임금이 높아지는 호봉제 적용 비율과 비슷하다. 대기업과 공공 부문에서 법적 정년연장이 급격한 인건비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은 크다. 그 대응안으로 기업들은 고용연장 선택권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신규 입사에 준하는 재고용 방식과 기업의 선별 장치이다. 2000년대 초 이 방식을 선택한 일본은 노후 소득공백의 문제가 심각해서 재고용 의무화(희망자 모두)와 희망자의 3년 고용보장, 기존 임금 70% 권고를 채택했다.10년 안에 고령화 지수가 일본보다 높아지는 우리는 저들처럼 먼 길을 돌아올 여유가 없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예외 적용은 노동 전문가가 거론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합리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객관적 이유를 바탕으로 한 임금조정을 법에 명시하고 직무·시간·역할의 조정 기제를 촉진 및 확산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이제까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남 탓만 해온 책임을 통감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2025.12.21 15:00

3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