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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있는데 세금 낼 돈이 없다…상속 준비는 지금부터 [스페셜리스트뷰]

전문가 칼럼

필자는 공익적 차원에서 몇 년째 상속인을 대상으로 상속세 상담을 무료로 진행 중이다. 최근 부동산 대책으로 상속세 납부의 현실을 상속인에게 전달하면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많이 느낀다. “아버지 집 한 채면 충분히 세금 내고도 남을 줄 알았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서울에 있는 집은 24억원, 통장에 든 현금은 1억원 남짓. 상속세는 정해진 기한 안에 현금으로 내야 하는데 그 기한이 6개월이다. “그럼 집을 팔면 되죠”라는 대답에 한 가지를 더 말씀드려야 했다. “요즘은 그 집을 사 줄 사람을 찾는 것부터가 일입니다.”예전에는 부동산이 많으면 ‘부자’라고 불렀다. 상속세가 나와도 집을 팔면 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택 제도로 인해 그 단순한 해법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 자산은 분명 많은데 정작 그 자산을 지킬 현금이 없는 가정. 상담하면서 매주 마주하는 풍경이다. 2026년 현재 부동산은 있는데 현금이 없는 가정에서 상속세가 어떻게 가족을 흔드는지, 그 충격을 미리 막을 방법은 무엇인지 정리해 보겠다.“집 한 채뿐”은 착각…‘급매의 악순환’ 시작될 수도상담을 시작하면 대다수가 “저희는 집 한 채밖에 없어서 상속세는 별로 안 나올 거예요”라고 말한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대부분의 고인은 평생 검소하게 살았고, 명품을 두른 것도 아니고, 외제차를 굴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상속세는 그분이 얼마나 알뜰하게 살았는지를 보지 않는다. 사망 당시 남겨진 재산이 얼마인지에 대한 숫자만 본다. 문제는 그 숫자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커져 버렸다는 점이다. 20~30년 전 대출 끼고 산 집 한 채를 오래 들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 날 그 집이 20~25억이 됐다. 집값은 몇 배 상승했지만 월급은 그만큼 오르지 않았다. 자산만 보면 자산가인데, 현금 흐름은 여전히 대중교통과 에코백을 들고 다니는 중산층이다. 통계청·한국은행·금융감독원이 함께 내는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우리 가구 자산에서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실물자산 비중은 70%를 넘지만 금융자산은 4분의 1 안팎에 그친다. 돈이 집에 묶여 있고 통장은 가볍다는 뜻이다.서류상으로는 분명 자산가인데, 생활은 평범한 사람을 나는 ‘평범한 부자’라고 부른다. 평범한 부자야말로 상속세 앞에서 가장 위험하다. 진짜 부자는 현금도 많지만, 평범한 부자는 부동산만 있고 현금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상속세는 ‘사망한 날의 재산’을 기준으로 계산한다. 상속세를 막연히 무서워만 하면 대비가 안 된다. 계산 구조를 한 번만 따라가 보면 의외로 흐름이 보인다.상속세는 크게 네 단계에 걸쳐 정해진다. 먼저 피상속인이 남긴 재산을 모두 더해 상속재산가액을 잡은 뒤 피상속인의 채무와 공과금, 장례비 등을 빼고 상속공제를 적용한다. 자녀만 있을 때 흔히 쓰는 일괄공제가 5억원이다. 배우자가 살아 있다면 최소 5억원에서 실제 상속받은 금액에 따라 최대 30억원까지 배우자공제가 가능하다. 공제를 빼고 남은 과세표준에 세율을 곱한다. 세율은 10%에서 시작해 최고 50%까지 올라가는 누진 구조다. 실무에서는 배우자가 함께 상속받으면 10억원 안팎, 배우자가 없으면 약 5억원까지는 세 부담이 크지 않은 편이다. 최근 서울에 20억대 아파트 한 채만 있어도 이 선을 넘는 가정이 부쩍 늘었다. 부동산을 물려받으면 상속세만 부담해야 하는 게 아니다. ▲상속취득세 ▲등기비용 ▲감정평가비 ▲세무신고비용 등도 비용으로 계산해야 한다.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상속세는 신고와 납부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거주자가 사망하면 상속이 개시된 달의 말일부터 6개월 이내에 신고하고 세금을 내야 한다. 세무서는 유족이 집을 팔 때까지, 형제끼리 합의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자산이 부동산이든 현금이든 정해진 날짜에 ‘현금’으로 내야 한다. 문제는 부동산은 장부상 자산이지만 6개월 안에 저절로 현금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이제는 ‘집 팔아 세금 내기’도 쉽지 않다. 예전 상담에서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조언이 “정 안 되면 집을 팔아 세금을 내자”였다. 요즘은 이 말을 쉽게 못 한다. 정부의 대출 규제 때문이다.수도권·규제 지역에서는 주택 가격에 따라 주택담보대출 한도가 차등 적용된다. 지난 6월 29일 기준 ▲시가 15억원 이하 6억원 ▲15억원 초과~25억원 이하 4억원 ▲25억원 초과는 2억원까지로 묶여 있다. 상속받은 서울 아파트가 20억대일 경우 집을 사려는 사람은 대출이 4억원선에서 막혀 자기 돈을 16억원 넘게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상속인은 6개월 기한에 쫓겨 마음이 급한데 정작 매수자는 잔금을 마련하지 못해 거래가 안 된다. 결국은 값을 깎아야 거래가 성사된다. 세금을 내려고 ▲집을 내놓고 ▲팔려니 집값을 깎고 ▲깎으면 가족이 지키려던 소중한 상속 재산이 그만큼 사라진다. ‘급매의 악순환’이다. 세금 한 번 내자고 평생 모은 집을 제값보다 한참 싸게 넘기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부동산은 자산이지만, 상속세 납부기한 안에 제값으로 현금이 되어 주지는 않는다. 이 점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연부연납·물납 만능 아냐…상속 부담 낮추는 ‘종신보험’“한 번에 못 내면 나눠 내는 제도가 있다던데요?” 맞다. ▲분납 ▲연부연납 ▲물납 등의 제도가 있지만 만능 안전판은 아니다. 연부연납은 상속세를 최대 10년에 걸쳐 나눠 내는 제도다. 담보를 제공해야 하고 매년 가산금 성격의 이자가 3.1% 붙는다. 결국 빚을 내 세금을 납부하는 셈이다. 부담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뒤로 미뤄지고 이자가 더해질 뿐이다.납부할 세금을 마련하기 힘든 경우에는 연부연납 제도를 활용할 수밖에 없는데 전체적인 상속세 부담이 커지기 시작하자, 요즘 연부연납 신청은 거의 필수가 되는 상황이다.물납은 현금 대신 부동산 등으로 세금을 내는 제도인데 아무 부동산이나 받아 주지 않는다. 요건이 까다롭고, 받아 준다고 해도 평가액이 시세보다 낮게 잡히는 경우가 많다. 가장 아끼던 부동산을 헐값에 나라에 넘기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이런 제도는 ‘급할 때 쓰는 비상구’이지, ‘준비를 대신해 주는 장치’가 아니다. 가장 마음 편한 길은 처음부터 낼 돈을 현금성 자산으로 마련해 두는 것이다.상속세는 돈 문제로 끝나지 않고 가족 관계까지 흔든다. 특히 상속 재산이 부동산 한 채에 몰려 있을 때 그렇다.집은 하나인데 자녀가 셋일 경우 누군가는 그 집에 들어가 살고 싶고, 누군가는 팔아서 현금으로 나누고 싶다. 세금은 형제가 함께 내야 하는데 한 명은 여유가 있고 한 명은 당장 낼 돈이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부터 대화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집을 가졌으니 세금은 네가 더 내라” “나는 현금이 없으니 못 낸다” 하는 식이다. 평생 우애 좋던 형제도 세금 앞에서는 표정이 돌변한다.이때 가족 모두가 함께 쓸 수 있는 현금이 따로 마련돼 있다면 어떨까. 그 돈으로 세금을 먼저 처리하고, 집을 어떻게 할지는 그다음에 차분히 의논할 수 있다. 현금은 민감한 상속 분쟁의 불씨를 끄는 소화기 역할을 한다. 상속 설계에서 ‘납부 재원’을 따로 준비해 둬야 하는 이유다.솔직히 필자는 ‘종신보험’을 마냥 좋게만 보던 사람이 아니었다. 수익률만 따지면 아쉽고, 보험료 부담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종신보험을 ‘투자상품’으로 보지 않고 ‘상속세 낼 현금을 미리 만들어 두는 장치’로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종신보험의 핵심은 피보험자가 사망했을 때 보험금이 나온다는 점이다. 상속이 시작되는 시점에 상속인 손에 현금이 쥐어진다. 부동산은 팔려야 현금이 되고, 예금은 미리 있어야 하고, 대출은 심사를 통과해야 현금이 된다. 사망보험금은 요건만 갖추면 바로 현금화할 수 있다. 6개월이라는 기한을 떠올리면 이 시점의 차이는 절대 작지 않다. 이 현금은 상속세 납부 재원이자 남은 배우자의 생활비, 부동산 급매를 막는 방패이면서 형제간 정산 자금이 된다.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부분은 계약자·피보험자·수익자를 누구로 두느냐에 따라 세금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자녀가 계약자이자 수익자이고 부모가 피보험자일 때 보험료를 실제로 자녀가 본인 소득으로 납입했다면 사망보험금은 ‘본인이 낸 보험료로 받는 본인 돈’으로 상속재산에 포함되지 않을 수 있다.부모가 본인을 피보험자로 두면서 보험료까지 본인이 부담했다면 사망보험금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 간주상속재산으로 보고 상속세가 매겨질 수 있다. 계약자는 자녀인데 보험료를 실제로는 부모가 대신 내 준 정황이 드러나면 자녀에게 증여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같은 종신보험이라도 누가 계약하고 누가 보험료를 냈는지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이라는 의미다. 종신보험은 세금을 없애 주는 상품이 아니라 세금을 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상품이다. 절세를 노린 계약 구조가 가능한 경우라 하더라도 핵심은 ‘마법 같은 절세’가 아니라 ‘가족이 집을 지킬 현금을 미리 확보하는 일’이다. 상속세 계산·가입 시점 등 따져봐야…세무 검토 필수여기까지 읽고 “그럼 당장 가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잠깐 멈추길 권한다. 종신보험도 분명한 한계와 주의점이 존재한다. 그걸 모르고 가입하면 오히려 손해다.무엇보다 끝까지 낼 수 있는 보험료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상속세를 막자고 감당하기 어려운 보험료를 떠안으면 정작 지금의 생활이 흔들린다. 보험 설계보다 상속세 시뮬레이션이 먼저다. 우리 집 예상 상속세가 얼마인지, 가족의 현금으로 어디까지 감당되는지를 먼저 따져 봐야 ‘얼마짜리 현금 장치가 필요한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순서가 바뀌면 필요 이상으로 큰 보험에 들거나 정작 모자란 만큼은 준비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가입 시점도 중요하다. 연령과 건강 상태에 따라 가입 자체가 제한되거나 보험료가 크게 높아질 수 있어 준비는 빠를수록 선택지가 넓다. 계약자·피보험자·수익자 구조와 보험료를 실제로 누가 내느냐 하는 문제는 설계사의 설명만 듣고 결정하면 위험하다. 같은 보험이라도 이 구조에 따라 세금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만큼 반드시 세무 검토를 함께 받아야 한다. 종신보험은 ▲사전증여 ▲유언 ▲상속재산 분할 ▲배우자공제 ▲연부연납 등 다른 카드와 함께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한다. 보험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되기보다는 보험이 전체 상속 설계안에서 ‘현금 담당’을 맡는다고 보면 된다.상속은 언젠가 일어나는 일이지만, 준비는 오늘부터 할 수 있다. 거창한 컨설팅 없이 집에서 몇 가지만 차분히 따져 봐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다.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보유한 부동산의 현재 시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막연한 기억 속 가격이 아니라 최근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 그 시가를 손에 쥐고 나면, 예상 상속세를 대략이라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일괄공제 5억원을 제외하고, 배우자가 있다면 추가 공제를 5억원 더 뺀다. 남은 금액에 누진세율을 떠올려 보는 정도만으로도 우리 집 상황이 어느 구간에 있는지 감이 잡힌다.그다음이 진짜 중요한 단계다. 가족이 지금 가진 현금과 금융자산만으로 세금을 낼 수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이때 부동산을 제외하고 ‘6개월 안에 바로 쓸 수 있는 돈’만 따로 세어 봐야 한다. 여기서 부족한 금액이 바로 우리 가족이 준비해야 할 숙제다. 부동산을 팔지 않고도 돈을 마련할 방법이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종신보험이 적합한지, 적합하다면 계약 구조는 어떻게 짜야 세금 문제가 생기지 않는지를 세무사와 보험 전문가에게 함께 상담하기 바란다. 앞서 말했듯 한쪽 설명만 듣고 결정하면 위험하다.상속세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 자산 구조 속에서 이미 시작된 문제다. 진짜 문제는 세금이 얼마냐가 아니라 세금을 낼 현금이 있느냐다. 부동산을 가족에게 온전히 남기고 싶다면, 집을 지킬 현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종신보험은 그 준비를 현실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대표적인 도구다. 상속세가 걱정되는 부동산 자산가라면 지금부터 예상 상속세와 보험 설계를 함께 검토하길 권한다. 집은 팔면 사라지지만, 미리 마련해 둔 현금은 그 집을 지킨다. 필자는 세무법인 리치 대표세무사로 상속·증여와 부동산 자산관리 분야를 전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연세대 법무대학원에서 조세법 석사를 취득했다. ‘부의 이전’ ‘기초부터 세금까지 가상화폐 완전정복’ 등 20여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현재 유튜브 ‘재테크 말하는 두꺼비 세무사’를 운영하고 있다.

2026.07.04 08:00

8분 소요
운전자 없는 도시가 온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지난 3월 필자는 강남에서 심야 자율주행 택시가 유료화됐다는 뉴스를 봤다.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운전대를 잡지 않는 안전요원만 탄 채 강남 일대 20㎢를 누비는 택시. 누적 탑승 7700건 넘게 사고가 한 건도 없었다고 한다. 서울시는 올 하반기 상암에서 아예 운전석이 비어 있는 로보택시를 시범 운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기사를 읽으며 떠오른 것은 기술에 대한 감탄이 아니었다. '저런 차가 많아지면, 과연 서울은 지금과 같은 모습일까.' 알고리즘의 편향과 플랫폼이 삼키는 골목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변화라면 자율주행차는 눈에 보이는 변화다. 어떻게 변할까? 어떤 모습이 돼 있을까.실험이 끝나고, 일상이 시작되다국내에서도 기업들이 자율주행 플랫폼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다. 강남 심야 로보택시를 운영하는 SWM 역시 관련 기술 고도화에 나서며 실증 운행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한국은 아직 완전 무인 로보택시를 상용으로 운영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전국 30여 개 시범운행지구에서 자율주행 서비스가 운행되고 있고, 상암과 강남 등 일부 구역에서는 레벨4 수준의 완전자율주행을 목표로 한 실증도 시작됐지만, 현행법은 여전히 시험운전자 탑승을 전제로 하고있다. ‘무인’이라는 말을 붙이기엔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은 좀 다르다. 미국에서는 구글 자회사 웨이모(Waymo)가 일부 대도시에서 운전석이 비어 있는 로보택시를 상용 운영하고 있다. 서비스는 아직 도시 내 제한된 구역에서 이뤄지지만, 주당 수십만 건의 승차가 이뤄질 만큼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도쿄와 런던 진출도 예고돼 있다. 중국에서는 바이두의 아폴로 로보택시가 충칭과 우한 등지에서 수백만 건의 무인 승차를 기록하고 있다. 이제 자율주행은 어디선가의 '실험'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의 '일상'이 되고있다.미국의 법학자 B. W. 스미스와 M. 완슬리는 올해 도시정책 매체 ‘바이털 시티(Vital City)’에 흥미로운 분석을 내놨다. 로보택시가 장기적으로 보행자와 자전거 이용자의 안전을 높이고, 버스가 끊긴 심야나 노선이 닿지 않는 외곽의 이동권을 넓히며, 주차 수요를 줄여 도시의 땅을 자동차로부터 되찾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이 원하는 대로 규제를 풀어주기만 해서도, 안전이 불안하다며 기술 자체를 막아버려서도 이 미래는 오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도시행정과 정치가 기술에 조건을 달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주차장과 스프롤, 두 얼굴의 자율주행미국의 일부 도시에서는 도심부 토지의 평균 20~26%가 지상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디트로이트나 라스베이거스처럼 30%를 넘는 도시도 적지 않다. 서울은 주차 공간 대부분이 건물 지하에 묻혀 있어 지상에서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주차 인프라가 도시 구조를 규정한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아파트 단지 설계의 상당 부분이 주차 대수 확보에 맞춰지고, 건축비의 적지 않은 비율이 지하 주차장 공사에 들어간다. 그런데 로보택시처럼 한 대의 차가 여러 승객을 돌아가며 태우는 방식이 보편화되면 이 구조가 흔들린다. 차가 한자리에 세워져 있을 이유가 줄어들고, 도심 한복판에 지금처럼 많은 주차 공간이 필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도시가 주차장에 내줬던 땅이 다른 가능성을 향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율주행의 도시 효과를 오랫동안 추적해온 캐나다 빅토리아 교통정책연구소(Victoria Transport Policy Institute, VTPI)의 토드 리트먼의 분석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정책 기조에서는 자율주행이 확대되면 도시의 외연을 팽창시킬 가능성이 높다. 교통이 편해지면 도시는 계속 확장되기 때문이다. 1960년대 고속도로가 미국의 교외화를 촉진했듯, 자율주행이 21세기판 스프롤(sprawl)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확장의 혜택과 비용이 고르게 나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금 강남 심야 로보택시가 보여주는 풍경이 그 단서다. 서비스는 승차 수요가 많고 도로 여건이 좋은 강남에서 먼저 시작됐다. 수요가 적은 외곽이나 고령 인구가 많은 동네, 심야 대중교통이 정말로 절실한 지역은 뒷순서로 밀린다. 자율주행이 가져다줄 편리함이 클수록, 그 편리함에 먼저 닿는 곳과 끝까지 닿지 않는 곳의 격차도 함께 벌어질 수 있다.기술은 달리는데, 도시는 준비됐나샌프란시스코에서는 자율주행 로보택시가 교차로에서 멈춰 서거나 소방차·구급차 통행을 막았다는 논란이 반복돼 왔다. 교통 신호나 통신망이 마비되는 상황에서 로보택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도시 전체의 교통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다. 자율주행 시스템이 ▲전력 ▲신호 체계 ▲응급 서비스라는 도시의 다른 인프라와 엉켜 있을 때, 한쪽이 흔들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뉴욕에서는 주지사가 로보택시 시범 법안을 내놨다가 논란에 밀려 철회했고, 연방 의회에서는 도시와 주의 자율주행 규제권을 선점하려는 법안이 올라왔다. 기술을 허용할 권한이 도시에 있는지, 연방에 있는지, 아니면 기업 자율에 맡겨야 하는지를 두고 정치적 쟁투가 벌어지고 있다.한국 사정은 또 다르다. 세종시가 자율주행 빅데이터 관제센터를 짓고 광역 버스 노선을 깔았지만, 아직은 안전요원과 운전원이 함께 타야 한다. 법이 완전 무인 상용화까지는 열어주지 않은 셈이다. 강남의 심야 택시도, 상암의 무인 로보택시도, 제도가 열어주는 만큼만 갈 수 있다. 도시 인프라는 한번 깔리면 수십 년을 간다. 지금 그리는 도로와 주차장이 자율주행 시대에도 쓸모 있으려면, 제도의 시계가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아야 한다. 자율주행은 단순히 교통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로를 바꾸고, 주차장을 바꾸고, 사람들이 어디에 사는지를 바꾸고, 결국 도시의 모양을 바꾼다. (다음 편에 계속)

2026.07.0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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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손보험 분쟁, 형사수사로 풀 일인가 [김기동의 이슈&로(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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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사기는 분명 척결해야 할 범죄다. 교통사고를 위장한 고의 충돌, 허위 입원, 방화를 가장한 재물 손괴, 이런 사기는 선량한 다수의 보험료를 끌어올리고, 보험 시스템 전체를 좀먹는다. 금융감독원 통계에 따르면 2024년 보험사기 적발 금액은 1조1502억원으로, 3년 연속 1조원을 돌파했다.그런데 지금 현장에서 벌어지는 수사의 실상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필자가 검사로 재직했을 당시부터 경찰이 수사하는 보험사기 사건 중 상당수는 실손보험 관련 사건이었다. 최근 몇 년간 특정 치료 유형을 겨냥한 수사가 파도처럼 전국을 휩쓸었다.‘보험사 태만’이 가입자 책임이 돼선 안돼 백내장 수술의 경우, 수술 후 병원에 머문 시간이 짧다거나 입원 치료의 필요성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실질적 입원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앞세워 수만 명의 보험금 청구가 보험사기로 고소됐다. 무릎 줄기세포 치료(BMAC·골수 흡입 농축물 주사)는 국가가 신의료기술로 인정한 시술임에도, 입원 필요성이 없다는 보험사의 판단을 근거로 피의자가 양산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다.이 사건들에는 반복되는 하나의 패턴이 있다. 보험사는 신상품을 출시하면서 보험금 지급 범위를 약관에 명확히 특정하지 않은 채 광범위하게 판매한다. 초기엔 별다른 제동 없이 보험금을 지급하다가, 청구 건수가 급증해 손해율이 악화되면 기다렸다는 듯 보험사기 혐의 고소를 남발하기 시작한다. 형사사건화가 되면 그 이후는 보험금 지급 거절과 기지급금 반환 소송이 뒤따른다. 성실하게 보험료를 납부해 온 가입자들이 하루아침에 피의자 신세가 된다.백내장 사태가 단적인 예다. ‘계속하여 6시간 이상 체류’라는 기준은 2021년 4세대 실손보험 약관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보험사들은 이 기준을 2016년 약관 변경 이전 가입자에게까지 소급 적용하며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원래 약관 어디에도 없던 기준을 사후적으로 들이밀며, 수십 년 전 체결한 계약에 기초한 가입자의 정당한 청구마저 사기로 몰아간 것이다. 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나온 사례도 있었지만, 그사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사와 재판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무릎 줄기세포 치료 분쟁도 구조는 다르지 않다. 정부가 2023년 7월 신의료기술로 공식 인정한 BMAC 시술에 대해 보험사들은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거나 심사를 보류했다. 또 보험사가 지정한 자문의의 검토를 받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 보험금 심사 자체를 진행하지 않겠다는 사례가 빈발했다. 보험업계 자료에 따르면 골수 무릎주사 관련 실손보험 청구 건수는 신의료기술 인정 이후 반년 만에 30여 건에서 856건으로, 보험금 지급액도 9000만원에서 34억원으로 폭증했다. 건수로는 약 28배, 지급액으로는 약 37배에 달하는 전례 없는 급증세에 보험업계는 즉각 위기감을 느꼈고, 그 시점에 수사가 시작됐다.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것이 진짜 ‘사기’인가. 대부분의 사건에서 본질은 ‘입원치료' 등 보험약관에 기재된 보험금 지급 요건에 해당되는지 여부다. 계약 해석상 다툼에 가깝고, 민사소송을 통해 해결할 성격의 문제다. 사기죄의 본질은 기망(欺罔), 즉 상대방을 적극적으로 속여 재산상 이익을 편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 사례들에서 환자 대부분은 의사의 권유로 치료를 받고 그 치료비를 청구했을 뿐이다. 허위 진단서를 꾸미거나 받지 않은 치료를 받은 것처럼 서류를 조작한 것이 아니다.보험사에는 심사 절차가 있다. 진료기록 등을 사전에 제출받아 검증했다면 충분히 걸러낼 수 있었던 유형이다. 보험사의 부실한 심사로 보험금이 지급된 경우까지 피기망자의 착오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보험사의 태만을 사후적으로 가입자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공권력은 신뢰 복원에 쓰여야 한다긍정적인 움직임도 있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취임 직후 금융소비자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밝힌 데 이어, 금감원 앞에서 시위 중이던 백내장 실손보험금 민원인들과 직접 면담하고 일부 사안에 대해 보험사에 재검토를 요청했다. 규제기관의 수장이 민원 현장에 직접 나섰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행보다. 이를 계기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분쟁이 불거진 뒤에 수습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보험상품 판매 단계에서부터 보험금 지급 범위와 제한 조건을 소비자에게 명확히 설명하도록 보험사에 대한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법이다.수사 자원은 무한하지 않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력이 실손보험 관련 고소 사건 처리에 쏠리는 사이, 보이스피싱 피해자, 전세사기 피해자, 폭력 피해자들의 사건 처리가 밀린다. 민생을 위한 수사 서비스가 왜곡되는 것이다. 민사 분쟁의 성격이 강한 실손보험 청구 문제는 금융감독원의 분쟁조정, 약관 명확화, 보험사 자체 심사 강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약관의 불명확성이나 지급 기준의 사후 변경에서 비롯된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기관이 고소장 각하 등으로 수사권 발동을 자제하는 것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법과 계약은 신뢰 위에 선다. 약관이 불명확한 채로 계약이 체결되고, 분쟁이 생기면 형사고소로 이어지는 구조가 반복되는 한, 그 신뢰는 회복되지 않는다. 공권력은 그 신뢰를 복원하는 데 쓰여야지, 민사적 분쟁의 해결 수단으로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

2026.07.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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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생 이동이 보여주는 입시의 출발점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중·고등학교 진학을 고려한 학군지 이동은 대체로 초등학교 시기에 집중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학교 입학 이후 사실상 입시 경쟁이 시작되는 만큼, 중학교 진학을 앞둔 시점에서 전입·전출 움직임이 본격화하는 흐름이다. 초등학교 단계의 이동은 단순한 주거지 변경을 넘어 향후 중학교 배정과 고등학교 진학 여건을 함께 고려한 선택으로 해석할 수 있다.2025년 한 해 동안 전국 6280개 초등학교의 전입자 수에서 전출자 수를 뺀 순유입 규모를 시도별로 보면 인천이 1222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서울 834명, 대구 728명, 대전 275명, 부산 223명, 충남 128명, 충북 92명 순이었다.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7개 지역에서 초등학교 순유입이 발생했다. 이들 지역은 학군 수요나 주거 개발, 교육 인프라에 대한 기대가 맞물리며 초등학생 자녀를 둔 가구의 이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서울 초등생 순유입 전환특히 서울은 2024년 188명 순유출에서 2025년 834명 순유입으로 돌아섰다. 직전년도와 비교하면 순유입자 수가 1022명 증가한 셈이다. 서울의 경우 학령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군지를 중심으로 교육 수요가 다시 유입되는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반대로 전입자 수보다 전출자 수가 많은 순유출 지역은 경기가 1339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경북 696명, 경남 514명, 울산 275명, 강원 105명, 세종 95명, 전북 88명, 전남 60명, 광주 45명, 제주 34명 순으로 집계됐다. 총 10개 지역에서 초등학교 순유출이 나타났다. 순유출 지역에서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가구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난 것으로 풀이된다.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순유입이 가장 많았던 지역은 강동구였다. 강동구는 1752명의 순유입을 기록했다. 이어 강남구 1331명, 양천구 848명, 서초구 795명, 노원구 193명, 송파구 163명 순이었다. 서울에서는 이들 6개 구에서 전입자 수가 전출자 수를 웃돌았다. 순유입 지역 상당수가 기존에 교육 수요가 높거나 학군지로 인식돼 온 곳이라는 점에서, 학군을 겨냥한 이동 수요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반면 서울 25개구 중 순유출이 발생한 지역은 19곳이었다. 강서구가 542명으로 가장 많았고, 영등포구 471명, 구로구 420명, 은평구 348명, 동작구 300명, 성동구 293명, 관악구 282명, 서대문구 260명, 중랑구 246명 순이었다. 이어 성북구 221명, 금천구 183명, 마포구 149명, 도봉구 146명, 중구 118명, 강북구 98명, 용산구 94명, 종로구 36명, 동대문구 36명, 광진구 5명으로 집계됐다. 서울 안에서도 자치구별로 초등학생 이동 방향이 뚜렷하게 갈린 셈이다.서울에서 순유입이 발생한 강동구와 강남구, 양천구, 서초구, 노원구, 송파구는 대체로 교육특구로 꼽히는 지역이다. 특히 강동구는 2024년 749명에서 2025년 1752명으로 순유입 규모가 크게 늘었다. 새로운 학군지로 부상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존 강남·서초·양천 중심의 학군 수요가 유지되는 가운데 강동구로도 수요가 확산되는 흐름이 확인된 것이다.강남구의 변화도 눈에 띈다. 강남구의 초등학교 순유입은 2024년 2575명에서 2025년 1331명으로 1244명 줄었다. 내신 9등급제가 5등급제로 바뀌면서 학교 내신 부담이 완화됐음에도 대표 교육 학군지인 강남구의 초등학교 순유입이 많이 감소한 것은 이례적인 흐름으로 볼 수 있다. 내신 5등급제에서는 상위 10% 안에 들지 못할 경우 상위 34% 구간까지 포함되는 2등급으로 내려갈 수 있어 주요 상위권 대학 진입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강남구 진입이 곧 입시 경쟁에서의 우위를 보장한다고 보기 어려워진 점도 학부모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과도한 부동산 가격 부담으로 강남권 진입장벽이 높아진 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과열된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을 여지도 있다. 전체적으로 서울 25개구에서는 학군지로의 순유입 흐름이 이어지고 있지만, 강남구 한 곳으로 집중되는 경향은 다소 약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일시적 현상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나, 높은 부동산 부담을 고려하면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학군 선호는 여전하지만, 비용 부담과 경쟁 강도까지 함께 따지는 선택이 늘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강동구 전국 1위…새 학군지 이동도 본격화2025년 전국 시군구 기준 초등학교 순유입이 가장 많았던 지역은 서울 강동구로 1752명을 기록했다. 이어 서울 강남구 1331명, 인천 서구 1060명, 대구 수성구 997명, 서울 양천구 848명, 서울 서초구 795명, 인천 연수구 766명, 경기 광명시 624명, 경기 평택시 539명, 대전 서구 514명 순이었다. 상위 10개 지역에는 서울 4곳, 인천 2곳, 경기 2곳, 대전 1곳, 대구 1곳이 포함됐다. 수도권 주요 지역과 전통 교육도시가 동시에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점도 눈에 띈다.초등학교 시기 전출입은 중·고등학교 진학을 겨냥한 이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향후 학군지 형성을 가늠할 수 있는 주요 지표가 될 수 있다. 전체 흐름을 보면 기존 학군지로의 이동은 계속되고 있으며, 동시에 새로운 학군지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도 나타나고 있다. 초등학교 이동 흐름은 단기간의 인구 이동을 넘어 지역 교육 경쟁력과 주거 선호 변화를 함께 보여주는 지표로도 볼 수 있다.학령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학교 내신 경쟁에 유리한 고등학교는 학생 수가 많은 학교로 특정될 수 있다. 이에 따라 해당 학교 진학을 위한 이동 현상도 커질 수 있다. 초등학교 전출입 흐름은 해당 지역 중·고등학교 경쟁력과도 맞물리는 중요한 변수다. 학령인구 감소가 이어질수록 경쟁력 있는 지역으로의 집중 현상은 더 강해질 수 있다. 다만 부동산 가격 부담 등으로 진입장벽이 높은 지역에서는 향후 변화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으며, 새로운 학군지로의 이동과 분산 흐름 역시 나타날 수 있다.

2026.06.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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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커머스 플랫폼 수확기 도래…동남아 셀러들은 왜 남는 게 없나 [동남아시아 투자 나침반]

전문가 칼럼

이번에는 수백만 현지 소상공인들이 매일 마주하는 현실—동남아 이커머스 플랫폼 생태계로 시선을 돌리려 한다. 쇼피(Shopee)와 틱톡샵(TikTok Shop), 이 두 거대 플랫폼이 아세안 이커머스를 어떻게 재편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아세안 디지털 경제의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드러난다.2025년부터 동남아 이커머스 플랫폼들은 일제히 수수료를 올리기 시작했다. 쇼피는 지난해 1월 필리핀을 시작으로 태국·싱가포르·말레이시아·베트남까지 순차적으로 인상했고, 올해 2월에는 일부 시장의 판매자를 대상으로 기술지원비 명목으로 5%를 추가했다. 틱톡샵도 뒤지지 않는다. 베트남의 경우 지난해 초 2~3%였던 수수료가 올해 3월 기준 마켓플레이스 셀러 12.5%, 몰 셀러는 14.5%로 인상했다. 지난 5월에는 추가 조정까지 예고했다. 플랫폼 업계에서는 이를 ‘수확기’라 부른다. 수조 원의 보조금을 뿌리며 셀러와 소비자를 끌어모은 성장기가 끝나고, 적자를 감수하며 쌓아올린 시장 지배력을 이제 현금화하는 단계다.현지 셀러들의 불만은 수수료 숫자에 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구조다. 인터뷰에 응한 일부 셀러들의 설명에 따르면 플랫폼에 100에 등록한 상품이 각종 프로모션을 거쳐 90에 팔리고, 고객은 쿠폰을 써서 70에 산다. 6.6, 7.7 같은 더블데이가 월 매출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구조에서 실질 부담은 45~50%에 달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구매자가 배송비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플랫폼이 커버하고 그 비용을 판매자에게 전가되는 경우도 있다. 물류비도 소액처럼 보이지만 물건값 대비 만만치 않다. 100에 판 상품에서 셀러 손에 쥐어지는 것은 5에 불과하다는 증언이다. 틱톡샵은 여기에 또 하나의 층위를 얹는다. 숏폼과 라이브영상이 소비의 주류가 된 지금, 인플루언서 생태계 없이는 성장이 어렵다. 셀러가 인플루언서에게 설정하는 어필리에이트 수수료 하한선은 10%이며, 샘플 제공과 부킹피까지 더해지면 보이지 않는 비용이 또 쌓인다. 심지어 틱톡샵은 셀러에게 사전 통보 없이 상품에 할인을 적용하기도 한다. 원하지 않으면 셀러가 직접 수동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이렇게 플랫폼 수수료에 잡히지 않는 비용들을 전부 합산하면 셀러 마진은 사실상 소멸에 가깝다. 경쟁인 줄 알았는데 수수료 같이 올랐다 쇼피와 틱톡샵이 경쟁하는 동안 셀러들은 잠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양상이 바뀌었다. 한 플랫폼이 수수료를 올리면 다른 플랫폼이 따라 올리는, 마치 담합한 것 같은 흐름이 반복됐다. 동남아 이커머스 시장의 80% 이상을 쥔 두 플랫폼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면 셀러에게 실질적인 선택지는 없다. 셀러 마진이 줄면 결국 두 가지 결과 중 하나다. 상품 가격을 올려 소비자에게 전가하거나, 품질과 다양성을 줄여 플랫폼의 매력도 자체를 낮추거나. 어느 쪽이든 소비자도 영향을 피할 수 없다.지난 6월 베트남 정부가 수수료 투명성을 공개 촉구하고 베트남에서는 페이스북·잘로(Zalo) ·자사몰로 눈을 돌리는 탈플랫폼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지만, 쇼피가 SPayLater·SeaBank 등 핀테크 생태계로 구축해놓은 금융 락인(lock-in) 구조 앞에서 이탈은 말처럼 쉽지 않다. 쇼피를 떠나는 것은 판매 채널 하나가 아니라 결제·대출·금융 서비스 전체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플랫폼의 원래 약속은 단순했다. 정보를 정리하고, 좋은 제품을 찾아주고, 사기를 막고, 배송을 보장하는 것. 그러나 그 기능들은 이제 사회적 기능이 됐고, 플랫폼은 통제와 조작의 단계로 넘어갔다. 소비자가 자연스럽게 좋은 상품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비를 낸 상품이 노출되고 할인 행사가 구매를 유도한다. 셀러들 사이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제품을 만들 때의 공식이 '원가율 20%에 마케팅을 잘하자'가 됐는데, 그 마케팅의 실질이 결국 소비자를 속이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자조 섞인 고백이 현장에서 나온다. 한때 백화점 수수료 30%를 욕하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의 플랫폼은 그것보다 더 많이 가져가면서, 셀러와 소비자 간의 직접 소통마저 알고리즘으로 대체하고 있다.그러나 이 구조가 영원할 것이라 단언하기는 어렵다. AI에게 조건을 주고 상품을 찾아달라는 방식이 일반화되면, 소비자가 플랫폼 안으로 들어올 이유가 줄어든다. 광고비를 낸 상품만 우선 노출하는 구도는 AI 기반 검색 앞에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자체 팬덤을 기반으로 플랫폼 종속 없이 판매하는 인플루언서 모델도 균열을 만들고 있다. 다만 이 흐름이 기존 플랫폼을 단기에 대체하기는 어렵다. 당분간 동남아 이커머스는 플랫폼의 수확과 셀러의 저항이 교차하는 긴장 국면을 유지할 것이다.소규모 현지 셀러들이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이탈하면, 디지털 경제의 과실은 대형 브랜드와 플랫폼에만 집중된다. 오늘도 동남아의 수백만 소상공인들이 셀러센터 대시보드를 들여다보며 수수료를 계산하고 있다. 처음으로 온라인 장사를 시작한 베트남 어머니, 핸드메이드 제품으로 세계 시장을 꿈꾸는 인도네시아 청년이 그 화면 앞에 있다. 플랫폼의 수확이 이들의 몫을 계속 잠식한다면, 아세안 디지털 경제의 성장 스토리는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필자는 삼정 KPMG∙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한국벤처투자 등 23년이상 다양한 사업경험과 더불어 벤처캐피탈∙회계법인∙인프라∙스타트업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현재 싱가포르의 Hanbridge의 대표로 한국 중소∙벤처기업의 해외 진출 및 해외 자금 유치를 돕는 역할과 함께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생태계를 연계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26.06.2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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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도비의 자유를 꿈꾸는 시대의 ‘일’ [임홍택의 일로서기]

전문가 칼럼

최근 한 청년 대상 강연에서 "회사에 다니며 일하는 게 오히려 손해"라는 말을 들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급등하며 주변에서 손쉽게 큰돈을 버는 것에 비해 직장에 매여 전업으로 일하는 것이 커리어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하루를 소진하고 스트레스만 쌓는다는 것이다. 청년들이 취업을 기피하거나 그 가치를 낮춰 보는 데는 근로소득의 '시간 투자 대비 수익률'이 금융소득에 한참 못 미친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사실 청년 세대의 이러한 인식에는 눈뜨고 마주하기 힘든 냉혹한 현실도 자리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2026년 5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청년층(15~29세) 취업자는 1년 전보다 약 25만명 줄었다. 청년 고용률 역시 25개월 연속 내림세를 이어갔다.그들의 언어를 빌어 말하자면, 지금의 취업시장은 반갈 죽(‘반으로 갈라져서 죽어’의 줄임말) 되어 있다. 그런 와중에 ‘운이 좋게’ 주식 시장에 먼저 들어간 또래 친구들이 빠르게 돈을 벌어가는 현실 속에서, 이들의 시선은 과연 어디로 먼저 향하겠는가.물론 이런 인식이 청년 세대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우리 기성세대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요즘 회사 화장실은 오전 9시만 되면 으레 가득 찬다. 볼일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주식 거래창을 확인하러 온 직원들로 붐비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이는 목표 수익률을 달성하는 즉시 사표를 던지고 영화 속 노예 요정의 대사인 "도비는 자유예요!"를 외치며 조기 은퇴(파이어족)하겠다는 꿈을 품고 살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기반으로, 과연 다음 세대에게 "노동은 무의미하니 일을 포기하고 전업 투자자가 되라"고 조언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일은 오직 '돈을 버는 행위'로 의미가 축소되어 고착화됐다. 투입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 높은 보상을 주는 소위 '좋은 직장'의 문은 너무나 좁고, 대다수는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운 좋게 원하는 일자리를 얻는다고 해도 이내 실망감에 휩싸이곤 한다. 조직 생활 속 노동은 대개 ▲지루하고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며 ▲타인과의 갈등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좋은 일'을 향해 평생을 달음질하지만, 막상 그 일에 치이고 실망하며 좌절하는 모순이 반복된다.이러한 노동의 딜레마는 비단 지금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의 논픽션 작가 스터즈 터클이 1974년에 출간한 명작 ‘일’(Working)의 부제는 ‘누구나 하고 싶어 하지만 모두들 하기 싫어하고,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한 줄의 문장이야말로 우리가 일에 대해 느끼는 애증을 완벽하게 관통한다.터클은 45년간 보통의 미국 노동자들을 인터뷰하며, 일이 생계를 위한 고된 의무이면서도 동시에 자기 존중과 성취감을 얻는 모순된 장임을 기록했다. 저자는 일을 단순히 밥벌이 수단으로 격하시키지 않고, 인간이 일을 통해 어떻게 존엄성과 의미를 길어 올리는지 깊이 있게 고찰했다.이 책에서 영감받은 대학생 버락 오바마는 훗날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자기 일을 수행했다. 그리고 퇴임 후, 마침내 이 책을 모티브로 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일: 우리가 온종일 하는 바로 그것’을 직접 기획하고 내레이션을 맡았다.이 다큐멘터리는 좋은 일자리가 단순히 급여의 액수로만 정의되지 않고 ▲보수 ▲고용 안정성 ▲조직 내 존중감 ▲자율성 등이 복합적으로 고려될 때 완성된다고 말한다. 직급과 직종을 아우르는 구성을 통해, 일을 단편적인 경제 활동이 아닌 ‘삶 자체를 구성하는 핵심 축’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인간에게 일이 밥벌이의 수단인 점은 부인할 수 없는 대전제다. 그러나 제대로 해낸 일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존엄'이 있다. 나아가 일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정체성의 핵심이며, 공동체와 사회를 유지하는 구조적 연결점이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로서 거대한 사업을 이끌어가든, 가사 노동을 묵묵히 수행하든, 각자의 일은 사회 전체를 톱니바퀴처럼 작동시키는 귀중한 동력이 된다.결론적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이윤 추구를 넘어, 삶의 궤적을 그리며 타인과 사회에 연결되는 숭고한 방식이다. 나는 자신이 가진 역량을 세상과 연결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사회 속에서 당당히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과정을 ‘일로서기’ 라고 부르고자 한다.일로서기는 자기 힘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자립의 과정이자, 세상에 나라는 존재의 발자국을 남기는 유일한 방식이다. 각자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일을 통해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우뚝 서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일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성취다.물론 주식이나 가상 자산에 투자해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일확천금을 벌 수도 있다. 그러나 대박 신화의 이면에는 보통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비범한 운'이 작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삶을 온전하고 건강하게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비록 비범한 운이 내 삶을 비껴갈지라도 매일의 일상에서 무너지지 않고 자신만의 싸움을 묵묵히 이어 나가는 것이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탱하고,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우뚝 서게 만드는 자립의 힘. 그 힘은 다름 아닌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일' 속에 깃들어 있다.

2026.06.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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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은 '공장'이 아니라 '골목'이 만들었다 [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지난 60년 동안 한국의 지역 정책은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었다. 산업을 먼저 만들면 사람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고, 공공기관 153개를 혁신도시로 이전했다. 최근에는 반도체 단지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유치가 지방선거 공약의 단골 메뉴가 됐다.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역 불균형은 오히려 악화됐다. 수도권은 국토 면적 11.8%에 인구 50.6%, 국내총생산(GDP) 53%가 집중됐다. 229개 기초지자체 중 141곳(61.5%)이 소멸 위험에 처했다. 공공기관 이전으로 조성된 혁신도시는 주말마다 직원들이 수도권 집으로 돌아가 상권조차 형성되지 않는 유령도시라는 오명을 얻었다.왜 실패했는가. 지역 정책이 산업을 유치하는 데 집중하는 동안, 정작 산업이 자생적으로 탄생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드는 데는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업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시 안에서 만들어진다. 60년 지역 정책의 실패는 산업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도시 정책의 실패다.청년들이 서울을 떠나지 않는 이유도 일자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일자리가 있어도 살고 싶지 않은 도시라면 청년은 머물지 않는다. 서울은 살고 싶은 동네를 압도적으로 많이 보유한 도시다. 미국 도시경제학자 리처드 플로리다는 이 현상을 ‘일자리가 사람을 따라간다’고 정식화했다. 창조적 인재는 먼저 살고 싶은 도시를 선택하고, 그 안에서 일자리를 만든다. 지방이 이 격차를 좁히려면 일자리 유치보다 살고 싶은 동네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제인 제이콥스의 도시: 산업을 탄생시키는 환경그렇다면 산업을 만드는 도시란 어떤 도시인가. 1961년 미국 도시 활동가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이 질문에 답했다. 도시의 다양성과 혁신은 산업 유치가 아니라 도시 환경 자체에서 나온다. 제이콥스의 도시는 사람과 기업이 자발적으로 모여 새로운 산업과 문화를 창조하는 환경이다. 기존 기업을 수용하는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기업을 탄생시키는 공간이다.제이콥스는 이 환경의 물리적 조건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복합용도 ▲짧은 블록 ▲충분한 밀도, 그리고 ▲오래된 건물이다.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와 보스턴 노스엔드 같이 활력 있는 도시 지역을 귀납적으로 관찰한 결과다.처음 세 조건은 유동인구를 만드는 수요 측면의 조건이다. 복합용도란 주거·상업·업무·창작이 한 블록 안에 뒤섞인 상태다. 한 사람이 하루 동안 다양한 이유로 같은 거리를 오가게 만든다. 짧은 블록은 보행자가 골목을 가로질러 이동할 수 있게 해 우연한 만남과 발견을 늘린다. 충분한 밀도는 거리에 항상 사람이 있게 만들고, 그 사람들이 곧 서로의 소비자가 된다. 이 세 조건이 갖춰진 거리는 특별한 목적 없이도 걷고 싶어지는 곳이 된다.네 번째 조건, 오래된 건물은 공급 측면의 조건이다. 신축 건물은 자본 회수 비용이 높아 소규모 실험적 창업자를 수용하지 못한다. 프랜차이즈와 표준화된 고회전 업종만이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다. 오래된 건물만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소규모 창업자에게 문을 열어준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검증되기 전까지 수익을 내기 어렵고, 그 실험의 기간을 버텨낼 유일한 조건이 낮은 임대료다.네 조건이 함께 작동할 때 도시는 소규모 기업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환경이 된다. 전면적인 재개발은 이 네 조건을 한순간에 해체한다. 고밀도·슈퍼블록·단일 용도·신축 고층 건물로 채워진 도시는 유동인구를 줄이고 임대료를 높이며 소규모 건물의 공간 기획 가능성을 소멸시킨다. 브랜드를 잉태하는 골목은 사라지고 브랜드를 소비하는 거리만 남는다.크리에이터 타운: 골목상권의 현대적 정식화2000년대 이후 소상공인 브랜드 생태계로 성장한 성수동·홍대·이태원·연남동·연희동 등 서울의 골목상권이 바로 제이콥스 도시다. 정부가 설계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크리에이터와 소상공인이 낡은 건물과 좁은 골목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 낸 산업 생태계다. 성수동이 대표적이다. 준공업지역의 붉은 벽돌 공장과 수제화 공방이 밀집한 이 동네는, 임대료가 낮고 소규모 건물이 많았기에 2011년 대림창고를 시작으로 카페와 편집숍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니언·카멜커피 같은 카페와 에스팩토리·코소사이어티 같은 복합문화공간이 라이프스타일 상권을 형성했다. ▲가죽 공방 ▲재봉 기술자 ▲부자재 공급업자 ▲독립 디자이너가 한데 모인 분업 생태계 위에서 패션 브랜드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연희동도 마찬가지다. 단독주택과 저층 건물이 밀집한 주거 동네에 2003년 제니스커피하우스를 시작으로 카페가 들어오고, 노아스로스팅·폴앤폴리나 같은 로컬 카페와 베이커리와 유어마인드 같은 독립 서점이 뒤를 이으며 동네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건축 사무소 쿠움파트너스가 단독주택 재생 건축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낡은 주택을 주거와 상업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전환했다.지역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일어난다. 대전 성심당은 원도심 오래된 건물에서 시작해 지역 경제의 앵커로서 대전의 베이커리 산업을 견인한다. 강릉 테라로사와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는 명주동의 소규모 건축 환경 위에서 커피 산업의 생태계를 만들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오래된 건물과 소규모 건축물이 모인 동네라는 점이다. 제이콥스의 조건이 자연적으로 보존된 곳에서 산업이 탄생했다.지역발전에서 중요한 것은 성수동·이태원·홍대 등 골목상권 중 일부가 소비 공간을 넘어 산업을 잉태하는 크리에이터 타운으로 진입한다는 것이다. 크리에이터 타운은 도시 콘텐츠를 생산하는 크리에이터를 자체적으로 육성하는 도시 지역이다. 이 단계에서 골목상권은 브랜드 생태계·콘텐츠 생산지, 그리고 직주락(職住樂) 센터의 복합 플랫폼이 된다.이 전환을 주도하는 업종은 코워킹스페이스·메이커스페이스·복합문화공간 등 크리에이터들에게 업무와 작업 공간을 제공하고 그들의 커뮤니티를 지원하는 공간이다. 성수동의 헤이그라운드는 소셜벤처와 스타트업이 입주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코워킹스페이스로, 이 동네가 단순 카페 상권에서 크리에이터 타운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연희동의 어반플레이 연남장은 독립 브랜드와 크리에이터들이 팝업 스토어와 전시를 열고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동네의 콘텐츠 밀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크리에이터 타운의 형성에는 세 축이 필요하다. 첫째는 건축 환경이다. ▲저층 ▲오래된 건축물 ▲걷기 좋은 골목 ▲소규모 건물이 기반이다. 둘째는 콘텐츠와 브랜드다. 편집숍·카페·서점·공방 같은 독립 로컬 브랜드가 집적되어야 한다. 셋째는 크리에이터와 커뮤니티다. 예술가·공간 창업자·소셜벤처 같은 크리에이터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고 머무를 수 있는 생태계가 있어야 한다. 이 세 축 중 건축 환경이 선행 조건이다. 크리에이터가 모이고 브랜드가 탄생하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환경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 지역 소도시에서 크리에이터 타운이 형성되지 않는 이유크리에이터 타운의 가능성이 확인되면서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서울과 지방 모두에서 핵심 공약으로 등장했다. 당시 정원오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는 ‘서울형 브랜드 상권 육성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서울 상권 20곳을 ‘제2의 성수동’으로 육성하겠다고 공약했다. 전남·광주에서는 민형배 후보가 ‘글로컬 타운 30곳 조성’을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27개 시군구 원도심을 대상으로 성수동 모델을 지역 여건에 맞게 재설계해 적용한다는 구상이다. 두 공약은 크리에이터 타운이 더 이상 특정 지역의 자생적 현상이 아니라 도시 정책의 핵심 의제로 부상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제이콥스 도시의 조건들이 갖춰지지 않은 곳에 창작 거점을 만들어도 공간만 생길 뿐 생태계는 형성되지 않는다. 지방 소도시에서 크리에이터 타운이 자생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 가지 조건의 결핍 때문이다.첫째, 건축 환경의 파괴다. 지방 원도심은 1970~80년대 개발 과정에서 오래된 저층 건물들이 대거 철거되고 신축 상가와 아파트로 대체됐다. 남은 오래된 건물들도 재개발 압력과 공실 증가로 방치되고 있다. 제이콥스가 말한 공급 조건, 즉 낮은 임대료의 오래된 건물과 공간 기획이 가능한 소규모 건물의 집적이 해체된 것이다.둘째, 크리에이터 공급의 부재다. 서울의 크리에이터 타운은 홍대 미술대학, 이태원 외국인 커뮤니티, 성수동 한양대와 소셜벤처 커뮤니티처럼 크리에이터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로컬 스쿨과 커뮤니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방 소도시에는 이 역할을 하는 학교와 커뮤니티 생태계가 없다. 창업을 시도하려는 청년이 있어도 기술을 배우고 실험할 공간이 없고, 협력할 동료가 없다.셋째, 지역 고유 자원의 브랜드화 실패다. 지방 소도시는 서울에 없는 자원을 가지고 있다. 한옥·적산가옥·전통 공예·농수산물·역사 유산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자원들은 관광 상품으로 소비될 뿐 로컬 브랜드의 원천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있다. 보성의 차, 담양의 대나무, 강진의 도자기가 지역 크리에이터의 창작 기반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 지방 소도시의 상권은 서울과 똑같은 프랜차이즈로 채워지고, 지역만의 정체성을 잃는다.로컬 브랜딩 전략: 건축마을과 로컬 메이커스페이스지역에서 이 세 가지 결핍을 동시에 해소하는 전략이 건축마을과 로컬 메이커스페이스다. 건축마을은 크리에이터를 유인하는 물리적 환경을 만드는 전략이다. 한옥·적산가옥·단독주택이 밀집한 원도심형 건축마을은 이미 제이콥스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구역별 건축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건물주에게 설계비와 공사비를 지원해 가로의 역사성과 스케일을 보존하면서 신개축을 유도한다.실제 정책 사례로는 서울시의 휴먼타운 2.0을 들 수 있다. 노후 저층 주거지를 전면 철거하지 않고 개별 건물 단위로 신축·리모델링을 지원하되, 용적률·건폐율 완화와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결합해 동네의 스케일과 가로 특성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개별 건축 지원이 축적되면 동네 단위의 건축 환경 재생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이 모델을 지방 원도심에 적용할 때 건축마을이 된다.로컬 메이커스페이스는 크리에이터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로컬 스쿨이다. 핵심 원칙은 신설이 아닌 기존 시설의 연계다. 지역에 이미 존재하는 목공방·제빵학교·도예 공방·양조장 같은 시설들을 연결해 지역 고유 자원 특화 공동 작업장을 만드는 것이다. 프랑스의 제3의 장소(Tiers-Lieux) 프로그램은 2023년 기준 3000개소가 운영되며, 각 지역의 온실·양조장·철공소 같은 기존 시설을 공공 지원과 민간 운영으로 결합해 3년 내 자립하는 모델을 정착시켰다.전남·광주에 적용한다면 보성은 차·도예 공방, 담양은 대나무 공예, 강진은 도자기 스튜디오, 순천은 정원학교처럼 각 지역 자원에 특화한 메이커스페이스를 구축할 수 있다.건축마을과 로컬 메이커스페이스는 분리될 수 없다. 건축마을이 크리에이터를 유인하는 공간을 만들고, 로컬 메이커스페이스가 그 공간을 채울 크리에이터를 키운다. 두 전략이 결합할 때 비로소 지역 소도시에서도 크리에이터 타운이 형성될 수 있다.결론: 도시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제이콥스가 1961년에 보여준 것은 산업이 도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산업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오래된 건물, 소규모 건물, 그것들이 모여 형성한 분업 생태계는 낙후의 흔적이 아니라 혁신의 토양이다. 지역이 자체적인 산업을 원한다면 산업단지를 먼저 만들 것이 아니라 도시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지방 소도시에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답은 하나다. 청년이 살고 싶어 할 동네 하나를 먼저 만들어라. 일자리는 살고 싶은 동네가 만들어진 다음에 따라온다.로컬 브랜딩은 이 과정을 전략화한 개념이다. 잠재력 있는 동네에 그 지역 고유의 컨셉으로 공간과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 그 동네가 성수동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동네만의 무언가가 되는 것. 그것이 지역 경쟁력의 출발점이다.제이콥스가 1961년에 경고했던 실수를 60년 후의 한국이 반복할 이유는 없다.

2026.06.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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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폭락한 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 [홍춘욱의 경제프리즘]

전문가 칼럼

최근 주식시장의 흐름을 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33년간 이코노미스트로 일하며 한국 증시의 높은 변동성에 익숙해졌다고 자부했건만, 한 해의 절반이 가기도 전에 서킷 브레이커 4번 발동은 처음이다. 서킷 브레이커란 주식 가격이 8% 이상 하락할 때 모든 거래를 20분간 중단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것으로도 시장이 진정되지 않고 15% 이상 하락할 때에는 추가적으로 20분간 매매가 중지된다.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될 정도로 증시가 요동칠 때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이 쏟아지는데, 이때마다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당신은 평균회귀 투자자입니까, 아니면 추세추종 투자자입니까?.”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은 다음에야 조언을 시작한다. 투자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에서 적절한 대응법이 나오기 때문이다.손절 기준선은 어디인가먼저 ‘달리는 말에 올라타는’ 스타일인 추세추종 투자가 있다. ‘월가의 큰 곰’으로 불렸던 전설적인 투자자 제시 리버모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못 살 이유가 없고, 싸다는 이유로 주식을 못 팔 이유도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기업의 내재가치를 따지기보다 현재 시장이 상승장인지 하락장인지 그 ‘흐름’ 자체에만 집중한다는 뜻이다.추세추종 전략은 흐름을 잘 타면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지만, 시장의 추세가 꺾일 때 치명적인 손실을 입기도 한다. 실제로 제시 리버모어 역시 1937년 주식시장이 바닥을 다지던 시점에 공매도를 감행했다가 큰 손실을 입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따라서 추세추종 투자자에게는 기술적 분석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손절매’(Stop-Loss) 전략이 필수적이다. 추세가 끝났다고 판단되는 즉시 미련 없이 포지션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현재 시장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손절 기준선은 어디일까. 대개 투자자들이 시장의 강력한 상승에 흥분하여 레버리지를 극대화했던 주가 수준, 즉 ‘여기가 무너지면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는 레벨’이다. 예를 들어, ‘단일 종목 레버리지 ETF’ 출시 직전의 코스피 지수 레벨(7200pt 전후)이 중요한 지지선으로 부각될 수 있다. 물론 이는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며, 투자자 각자의 판단 잣대가 중요하다. 따라서 자신이 추세 추종 투자자라고 판단될 때에는 본인이 설정한 손절 레벨의 지지 여부를 판단하며 매매를 자제할 필요가 있다. 폭락장 속 내 투자스타일 찾기반면 가격이 결국 본연의 가치로 돌아온다고 믿는 ‘평균회귀’ 투자자라면, 전혀 다른 매매 패턴을 가져가야 한다. 평균회귀 투자자의 대표는 연기금이다. 연기금은 시장이 급등할 때 차익을 실현하고, 급락할 때 저가 매수에 나서는 ‘BLSH’(Buy Low·Sell High·저가매수 고가매도) 전략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실제 국민연금의 ‘과거’ 행적을 보면 이 흐름이 명확히 드러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국민연금은 시장이 공포에 질려 폭락할 때 30조원 이상을 순매수하며 주식을 쓸어 담았다. 그리고 시장이 회복된 2009년부터는 반대로 20조원 가까이 주식을 처분했다. 목표로 했던 주식 비중과 가치 레벨에 도달하자 매수를 멈추고, 주가가 오를 때마다 분할 매도하며 BLSH를 철저히 실행에 옮긴 것이다. 따라서 평균회귀 투자자라면 지금의 추가 하락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각자가 판단한 가치 레벨에 맞춰 저가 매수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필자는 주식시장의 이 두 양대 세력 중 ‘평균회귀’에 속한다. 연기금의 자산 배분 전략을 벤치마킹하여 꾸준히 분산 투자를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폭락장은 언제나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거울과 같다. 시장이 흔들릴 때 내가 공포에 질려 손절선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매수 타이밍을 재고 있는지 살펴보면 비로소 자신의 투자 성향이 드러난다. 본인이 어떤 스타일의 투자자인지 정확히 인지하는 것, 그것이 이 불안정한 시장에서 살아남아 성공적인 노후를 맞이하기 위한 첫걸음이라 생각된다.

2026.06.26 07:00

3분 소요
승강기 없는 20층 아파트, “걸어 다니라”는 말로 충분한가[순화동필]

산업 일반

최근 지어진 지 20년 안팎이 된 아파트 단지에서 승강기 교체공사가 활발하다. 승강기는 공동주택의 핵심 설비다. 고장이 나면 생활 불편은 물론 안전 문제로 이어진다. 노후 승강기는 부품 마모, 제어장치 노후화, 안전장치 미비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일정 시점이 지나면 교체나 보수가 필요하다.승강기 안전관리법은 설치검사를 받은 날부터 15년이 지난 승강기에 대해 정밀안전검사를 받도록 하고, 이후 3년마다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안전검사를 받지 않았거나 불합격한 승강기는 운행할 수 없다. 따라서 승강기 교체공사 자체는 공동주택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다.문제는 교체공사를 어떻게 하느냐에 있다. 한 동에 승강기가 1대뿐인 고층 아파트의 경우 사정은 심각하다. 승강기가 여러 대라면 일부를 정지하고 나머지를 운행할 수 있다. 그러나 승강기가 1대뿐이면 교체공사는 전면 중단을 의미한다. 15층, 20층, 25층 입주민은 공사기간 내내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별다른 대책 없이 “계단을 이용해 달라”고 안내하는 것만으로 충분한지 의문이다.공동주택에서 승강기는 단순한 편의시설이 아니다. 고층 세대에서는 주거생활의 필수적 접근수단이다. 특히 고령자, 장애인, 임산부, 심혈관·호흡기질환자, 영유아 동반 세대에게 운행 중단은 일상생활의 중대한 제약이 된다. 병원에 가야 하는 사람, 생수나 식료품을 운반해야 하는 사람, 아이를 안고 이동해야 하는 사람에게 매일 20층 계단을 이용하라는 것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안전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물론 공용시설 유지·보수 과정에서 일정한 불편은 입주민이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그 불편에도 한계가 있다. 저층 세대가 며칠간 계단을 이용하는 것과, 고층 세대가 장기간 대체조치 없이 계단 이용을 강제당하는 것은 다르다. 공사기간, 층수, 승강기 대수, 세대 구성, 고령자·장애인·환자의 존재 여부, 사전고지와 대체조치의 유무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특히 이동약자에 대한 고려는 중요하다. 공동주택은 생활공간이고, 누구에게나 안전하게 접근 가능해야 한다. 장애인이나 노인에게 20층 계단을 이용하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외출을 포기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다른 곳에서 단기 거주하면 된다는 주장도 가능하지만, 각 세대의 사정에 따라 강요할 수 있는 대안은 아니다. 승강기 교체공사는 입주민의 안전을 위한 것이지만, 공사 과정이 또 다른 안전위험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새 승강기로 바꾸는 동안 고령자와 장애인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환자가 병원 방문을 포기하며, 입주민이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면 안전을 위한 공사라는 명분과 배치된다. 지방자치단체의 역할도 필요하다. 승강기 교체는 개별 단지의 문제가 아니라 고층 공동주택이 일반화된 도시 주거안전의 문제다. 특히 1동 1승강기 구조의 노후 아파트는 계속 교체 시기를 맞이한다. 지자체는 승강기 전면 중단 공사에 관한 표준 지침을 마련하고, 이동약자 보호대책, 사전고지 기간, 응급대응체계, 물품 운반 지원 등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결국 핵심은 균형이다. 노후 승강기는 교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필요성이 입주민에게 모든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라고 요구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한 동에 승강기가 하나뿐인 고층 아파트에서 아무런 보완조치 없이 20층을 걸어 다니라고 하는 것은 관련 규정의 문제를 넘어, 기본적 생활과 안전의 문제다. 더 나아가 15년 또는 20년에 한 번씩 승강기 교체가 불가피한 관리 현실이라면 제도적 보완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 특히 한 동에 승강기가 하나뿐인 고층 공동주택의 경우, 장래의 교체공사 기간에도 입주민의 이동권과 안전이 보장될 수 있도록 대체 승강기나 보조 이동수단 설치를 의무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승강기는 멈출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입주민의 생활까지 멈춰서는 안 된다. “현행 규정대로 했으니 문제가 없다”는 말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공사 과정에서 입주민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러한 배려의 정도가 그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2026.06.22 13:49

3분 소요
‘스타벅스’와 ‘에릭 슈밋’에게 없었던 단 하나 [허태윤의 브랜드스토리]

전문가 칼럼

5월 15일, 미국 애리조나대학교 졸업식. 사막의 햇살 아래 검은 가운을 걸친 졸업생 수천명이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묘한 세대다. 챗지피티(GPT)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에 입학해, 졸업하는 그 순간 같은 기술에 일자리를 빼앗기는 첫 세대. 4년을 준비한 자리가 입사도 하기 전에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보며 사회로 나선다.그 앞에 선 연사가 하필 에릭 슈밋이었다. 구글을 십 년간 이끌고 '인공지능(AI) 시대의 설계자'로 불리는 일흔한 살의 거부(巨富). 그는 청년 시절을 회고하다 인공지능으로 화제를 옮겼다. 일자리가 증발하고 기후가 무너진다는 너희의 두려움은 '합리적'이지만, 그 흐름에 올라타 미래를 '함께 빚는' 사람이 결국 승자가 된다고.객석이 술렁였다. 야유가 터졌다. 슈밋은 멈칫하며 한발 물러섰다. "여러분이 무엇을 느끼는지 압니다. 두려움이 있다는 걸" 정확한 진단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것을 빚는 건 여러분 차례입니다" 야유는 바로 그 대목에서 가장 거세졌다.사흘 뒤, 서울. 스타벅스 코리아가 마케팅 판촉행사를 앱에 띄웠다. 5월 18일의 그 이름은 '탱크데이'.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가 나란히 걸렸다. 광주의 거리를 짓밟던 계엄군의 탱크, 그리고 1987년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두 기억이 한 문장 안에서 동시에 깨어났다. 40년이 지나도 그 5월은 많은 이에게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시간이다. 그룹의 회장은 두번에 걸쳐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고, 대표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충성 고객이 등을 돌렸고, 영문도 모른 채 매장을 지키던 일선 직원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한순간에 부정해야 했다. 급기야는 대통령까지 나서 해당 기업을 비난하며 관련자들은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광고문구 하나로 인해 우리나라 마케팅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한쪽은 못 봤고, 한쪽은 덮었다두 사건은 같은 듯 다르다. 스타벅스는 아예 보지 못했다. 전국민을 고객으로 둔 브랜드가 국민 정서에 정면으로 맞설 이유는 없으니, 고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서늘하다. 악의 한 점 없이도 일이 이렇게 커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오늘의 마케팅 환경이 부른 사고에 가깝다. 카피는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몇 초 만에 수십 개가 쏟아지고, 콘텐츠는 더 빨리 더 많이 세상에 나간다. 문제의 그 문구도 사람이 처음부터 쓴 것이 아니라 AI가 뽑은 여러 안 가운데 하나였다. 검토할 양은 폭증하는데, 그 말이 누구의 어떤 기억을 건드릴지 헤아릴 시간은 줄어든다. 기획부터 결재까지 네다섯 단계를 거쳤지만, 그 시스템과 피드백 루프 어디에도 '그 말을 받는 사람'을 대신할 한 사람이 없었다.슈밋은 반대다. 그는 두려움을 보았고 정확히 입에 올렸다. 다만 곧장 자기 낙관으로 덮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그 두려움을 끝까지 인정하는 순간, 그는 자기 일생의 작품을 부정해야 한다. 'AI 설계자'라는 자리가 그를 묶은 것이다. 화자가 자기 입장에 갇히면, 듣는 사람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일과 그 감정을 함께 느끼는 일은 전혀 다른 능력이다. 장소는 달라도 결론은 하나다. 한쪽은 시스템이, 다른 한쪽은 사람이 '받는 사람'의 자리를 비워뒀다.왜 똑똑한 조직과 노련한 리더가 이런 실수를 반복할까.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의 니컬러스 에플리 교수가 단서를 준다. 스물다섯 차례의 실험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뜻밖이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오랜 조언은 우리 기대만큼 정확하지 않다는 것. 남의 신발을 신은 척 상상하는 순간, 사람은 결국 자기 머릿속을 들여다볼 뿐이기 때문이다. 정확도를 높이는 길은 따로 있었다. 짐작하는 대신, 직접 묻고 듣는 것이다.함정은 자신감이다. 자기 짐작을 믿을수록 굳이 묻지 않는데, 그 자신감은 정확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지위가 높고 경험이 많을수록 덫은 깊어진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곧 세상이 보는 것이라 여기고, 시간에 쫓길수록 더 그렇게 판단한다. 무대 위의 화자와 결재선 맨 위의 경영자가 가장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감이 빠진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았다면, 공감이 자리를 지킬 때를 볼 차례다. 2020년 5월, 팬데믹으로 매출의 80%가 사라진 에어비앤비의 최고경영자(CEO) 브라이언 체스키는 직원 넷 중 하나, 1900명을 내보내야 했다. 슈밋의 청중이 두려워하던 바로 그 일을 그는 실제로 통보해야 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3000 단어가 넘는 그의 편지는 회사가 어쩌다 여기에 이르렀는지 숨김없이 설명했고, 결정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으며, 넉넉한 퇴직금과 1년 치 건강보험을 약속했다. 무엇보다 떠나는 이들이 새 일자리를 찾도록, 채용 담당자들이 열람할 '인재 명단'까지 만들었다. 해고된 직원들이 도리어 회사를 '가족'이라 불렀다. 똑같이 일자리를 말했는데, 한쪽은 야유를, 다른 한쪽은 감사를 받았다. 메시지가 아니라, 받는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먼저 헤아렸느냐의 차이였다. 바로 공감능력이다.다행히 공감은 타고나는 감수성이 아니라 설계할 수 있는 역량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가 공감을 '성공의 선행지표'라 부르며 개인의 천성이 아닌 조직의 규칙으로 옮겨 놓은 것도 그래서다.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메시지를 내보내기 전, 그 방 안에 받는 사람을 대신할 한 사람을 일부러 앉히는 것이다. "이 말이 누구를 다치게 할 수 있는가"를 묻는 반대 역할을 정해 두고, 표적이 될 사람들에게 실제로 한번 들려본다. 결재 단계를 늘리라는 말이 아니다. 탱크데이의 결재선은 이미 다섯 단계였다. 단계마다 빠져 있던 건 받는 사람의 의자 하나였다.두 사건이 가리키는 곳은 결국 하나다. 수용자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공감의 부재. 사고를 키운 건 AI도, 길어진 결재선도 아니다. 그 속도와 규모를 사람의 공감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답도 두 겹이다. 공감을 시스템에 박아 넣는 동시에, 사람 안에 길러야 한다. 그리고 그 부재가 가장 위험해지는 자리가 바로 무대 위, 결재선 맨 위, 마이크 앞이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자기 말이 곧 모두의 생각이라 믿기 쉽고, 그래서 듣는 사람의 자리를 가장 먼저 잊는다. 공감은 마케팅의 기술이기 이전에, 설득이라는 행위 전부의 토대다.브랜드가 세상에 내보내는 모든 메시지에는 보내는 쪽과 받는 쪽이 있다. 실패는 대개 보내는 쪽이 받는 쪽의 자리에 한 번도 앉아 보지 않을 때 일어난다. 다음 캠페인을, 다음 사과문을, 다음 축사를 내놓기 전에 던질 질문은 그래서 단순하다. 이 자리에, 정작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의 마음은 함께 앉아 있는가.

2026.06.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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