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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1등급의 벽, 서울과 지방 간극은 더 넓다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성적 상위권 학생 비율을 기준으로 할 때, 상대평가 과목인 국어·수학보다 절대평가 과목인 영어에서 지역 간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최근 4년간 수능 데이터를 보면, 영어는 1·2등급 구간 모두에서 서울과 지방의 성적 격차가 다른 과목보다 두드러졌다.현행 통합수능은 2027학년도를 끝으로 종료된다. 2022학년도부터 6년간 시행 중인 현 제도는 국어에서 ‘언어와 매체’ ‘화법과 작문’, 수학에서 ‘미적분’ ‘기하’ ‘확률과 통계’ 중 하나를 선택해 응시하는 방식이다. 미적분과 기하는 이과생이, 확률과 통계는 문과생이 주로 선택했다. 같은 원점수를 받아도 선택 과목에 따라 표준점수가 달라지는 구조 탓에, 이른바 ‘문과 침공’ 현상이라는 말이 생겼다.하지만 2028학년도 입시부터는 이 같은 선택과목이 사라진다. 수학 범위가 문과 기준으로 축소되고, 문·이과 구분 없이 사회·과학탐구 과목을 모두 응시해야 하는 형태로 바뀐다. 평가 체계는 현재와 동일하게 국어·수학·탐구는 상대평가, 영어는 절대평가를 유지한다.지역 간 편차 다른 상위권2022학년도부터 실시된 통합수능의 결과를 보면, 과목별로 상위권 학생 비율의 지역 간 편차가 다르게 나타난다. 고3 학생을 기준으로 상위 4% 이내 국어 1등급 학생 비율은 2022학년도 서울이 4.3%로 가장 높았고, 최저 지역은 1.4%로 격차는 2.9%p였다. 2023학년도에는 3.7%p, 2024학년도 3.5%p, 2025학년도 3.7%p로 비슷한 수준이 유지됐다. 17개 시도 중 최고 비율은 모두 서울이었다. 2등급 이내로 범위를 확대하면 격차는 7.4~8.5%p까지 벌어졌다.수학은 1등급 학생 비율의 지역 간 차이가 2022학년도 4.4%p, 2023학년도 5.1%p, 2024·2025학년도 각각 4.4%p였다. 2등급 이내에서는 10.2~11.0%p 격차가 나타났다.절대평가인 영어는 상대평가 과목보다 격차 폭이 더 컸다. 1등급 학생 비율의 지역 간 차이는 2022학년도 5.4%p, 2023학년도 7.0%p, 2024학년도 5.2%p, 2025학년도 5.9%p로 나타났다. 2등급 이내로 확대하면 14.9~16.6%p까지 격차가 벌어졌다.국어·수학은 상대평가 방식으로 매년 난이도에 관계없이 일정 비율의 등급이 정해지지만, 영어는 절대평가이기 때문에 난이도에 따라 등급 비율이 크게 요동친다. 이 때문에 절대평가 과목이 지역 간 격차를 줄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서는 상대평가 과목보다 격차를 키운 경우도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서울과 지방 간 단순 평균을 비교해도 흐름은 비슷하다. 국어는 2022~2025학년도 동안 1등급 구간에서 2.3~3.0%p, 2등급 이내에서 5.5~6.6%p의 격차가 발생했다. 수학은 1등급 구간에서 3.5~3.9%p, 2등급 이내에서 8.1~8.6%p였다. 영어는 1등급 구간에서 4.0~5.3%p, 2등급 이내에서는 11.0~11.9%p로 격차 폭이 가장 컸다. 절대평가의 변동성 우려결국 절대평가 과목이 지역 간 격차를 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시험 난이도에 따라 고득점자 비율이 급격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평가는 난이도와 상관없이 일정 비율의 등급을 보장하지만, 절대평가는 한 해의 출제 수준에 따라 1·2등급 비율이 크게 달라져 특정 지역이나 학교의 평균을 더 벌릴 가능성도 있다.전문가들은 “상대평가와 절대평가가 혼합된 현재의 수능 체제에서, 두 방식이 학교·지역 간 격차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고득점자 비율이 지역별 학력 수준의 차이뿐 아니라 출제 난이도와 맞물려 달라질 수 있는 만큼, 단순히 제도 변경만으로는 지역 불균형 해소가 어렵다는 것이다.2028학년도부터 새로운 수능 체제가 도입되지만, 또다시 ‘2032학년도 개편설’이 거론되고 있다. 현 초등학교 6학년이 치르게 될 차기 수능을 겨냥한 변화 논의가 이미 시작된 셈이다. 교육부는 수능 부담 완화라는 큰 틀을 유지하되, 지역·학교 간 격차 문제를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결국, 수능 체제가 어떻게 바뀌든 간에 ‘평가의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지역별 학력 격차를 좁히느냐 넓히느냐다. 절대평가의 취지가 성취 수준을 객관화하는 데 있다면, 실제로는 지역별 격차를 더 벌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제도 설계의 정교함이 요구된다.

2025.11.08 11:00

3분 소요
리더는 어떻게 혁신기업을 만드는가 [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혁신기업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강렬한 울림을 준다. 기존 산업의 판도를 뒤흔들고, 기술의 흐름을 바꾸며, 새로운 인재와 자본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자석 같은 존재다. 우리는 엔비디아·구글·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기업들을 보며 ‘혁신’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그들의 성공은 단순히 탁월한 기술력이나 운 좋은 시장 타이밍 때문만은 아니다. 혁신기업은 리더가 만들어낸 방향성과 문화, 실행 시스템, 그리고 리더 자신의 내면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성과와 건강한 조직, 둘 다 가능한가?"와 같은 질문이 놓여 있다.성과 중심 조직과 건강한 조직은 흔히 상충하는 가치로 여겨진다. 강한 압박과 성과 중심 문화가 결국 구성원을 소진시키고 조직을 망가뜨린다는 비판도 많다. 그러나 실제로 혁신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기업들을 보면 이 둘 간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독특한 조직 역학이 존재한다. 이들은 성과를 내려면 문화를 희생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건강과 성과가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를 설계해냈다.조직 건강을 단순히 '좋은 분위기'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맥킨지(McKinsey)는 건강한 조직을 “전략을 일관되게 실행하고,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며,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에너지를 발휘하는 상태”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건강한 조직은 단순히 구성원이 편안한 곳이 아니라 성과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근육이 잘 발달된 상태다.실제로 맥킨지의 전 세계 1000개 기업 분석에 따르면 조직 건강 점수가 상위 25%에 속하는 기업의 총주주수익률(TSR)은 하위 25% 기업보다 평균 3배 이상 높았다. 분위기가 좋아서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성과를 낼 수 있는 구조와 문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건강한 것이다.물론 문화에 정답은 없다. 산업의 특성·인재 구성·기업의 역사와 맥락에 따라 조직마다 성공 방정식은 다르다.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과 한국의 반도체 기업, 금융회사와 스타트업이 같은 방식으로 혁신을 이룰 수는 없다. 하지만 산업과 국가, 규모를 불문하고 혁신기업의 리더십에는 공통된 축이 존재한다. 그것은 ▲방향성을 끊임없이 소통하는 리더십 ▲성과와 문화의 균형을 유지하는 감각 ▲조직의 틀과 리더십 기준을 세우는 역량 ▲리더 자신의 내면을 관리하는 힘이다. 방향성을 끊임없이 소통하는 리더혁신기업의 리더는 무엇보다 조직의 나침반이다. 인공지능(AI) 시대를 견인하고 있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최고경영자)는 그 대표적 사례다. 1993년 설립된 엔비디아는 오랫동안 게임용 GPU(그래픽처리장치) 전문기업이었다. 하지만 젠슨 황은 10년 넘게 GPU가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인프라가 될 것이라는 비전을 흔들림 없이 제시해왔다.그의 리더십은 기술에 대한 집착과 선구적 투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 그리고 독특한 조직 문화에 기반한다. 초기 GPU 시장의 성공을 넘어 그는 병렬 컴퓨팅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인지하고 쿠다(CUDA)라는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엔비디아는 단순한 하드웨어 기업을 넘어 과학자와 개발자들이 GPU를 활용해 병렬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플랫폼 기업으로 진화했다. 신경망 기술의 부상 또한 예견하고 GPU를 AI 시대의 핵심 플랫폼으로 전환했으며, 이 전략은 AI 칩 시장에서 엔비디아를 독보적 위치에 올려놓았다.그의 리더십 스타일도 주목할 만하다. ‘30년 된 스타트업’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 그는 안일함에 젖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하는 조직 정체성을 강조했다. 실패를 숨기지 않고 솔직히 공유하는 ‘지적 정직성’(Intellectual Honesty)을 중시했으며, ‘T5T 이메일 문화’(Today’s Top 5 Things)를 통해 전 직원이 매일 핵심 업무와 통찰을 공유하는 소통 구조를 만들었다.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소통 문화는 혁신의 속도를 높였다.그는 주주 서한과 사내 미팅, 그리고 언론 인터뷰를 가리지 않고 같은 메시지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기술적 설명이 아니라 회사 전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그리는 서사였다. 덕분에 엔비디아는 전환점마다 조직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AI 가속기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다.이런 ‘방향성의 소통’은 생각보다 어렵다. 최고경영자가 100이라 생각하고 전달한 메시지는 중간관리층에서 약 30%씩 희석돼 최종 현장 구성원에게는 40% 수준만 전달된다. 실제로 다수의 조직 진단에서 경영진의 전략 방향성을 직원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비율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반대의 사례도 있다. 최근에 코칭을 수행했던 한 고객사 임원의 경우 “배경을 자세히 설명해주면 모두 이해할 것”이라 믿고 긴 설명을 반복했지만, 구성원들은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배경만 길게 나열하면 메시지는 오히려 흐려진다. 혁신 리더는 방향성을 두괄식으로 명확히 전달하고, 구조화된 스토리텔링으로 끊임없이 반복 소통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성과와 문화의 균형, 자전거 타기처럼혁신 과정에서 성과는 조직의 생명줄이다. 작은 성과가 없다면 구성원들의 열정은 쉽게 식고, 변화에 대한 불안은 증폭된다. 리더는 전략만 제시할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변화의 성공 가능성을 체감할 수 있는 작은 마일스톤을 만들어내고, 이를 조직 전체가 함께 축하하며 학습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런 경험은 구성원들에게 “이 길이 실제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다.SK하이닉스는 이런 방식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대표적 사례다. SK하이닉스는 2023년 메모리 업황 급랭으로 10여 년 만의 분기 적자를 기록했지만, 감산·투자조정과 동시에 고대역폭메모리(HBM) 중심의 제품 믹스로 전환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2025년에는 동적 RAM(DRAM) 매출 기준 분기 1위를 차지하거나 역전이 가시화될 정도로 경쟁구도가 흔들렸고, HBM 시장에선 일부 분기 70% 안팎의 점유율로 AI 메모리 리더십을 굳혔다. 세밀한 실행관리와 현장 리더십이 반복 가능한 ‘작은 승리’를 축적하며 조직의 속도를 끌어올린 결과다. 혁신은 거대한 한 번의 도약이 아니라 리더가 만들어낸 작고 반복되는 성취의 축적이다.물론 문화적 토대 없이 성과만 강조하는 조직은 오래 가지 못한다. 구글의 유명한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 연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창의적 문제 해결과 혁신이 가능해진다.하지만 지난 2016년 이후 조직문화를 강조해온 기업들의 사례에서는 최근 반대의 경우도 관찰된다. 심리적 안전감과 수평 문화를 잘못 이해하고 절대선처럼 추구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과도하게 ‘편안함’을 강조하는 문화에서는 의사결정이 느려지고 성과 기준이 흐려진다. 'Raising the bar'(더 높은 성과와 품질을 목표로 설정하기)의 문화가 사라지고 조직은 점점 평균에 안주하게 된다.심리적 안전감은 편안함이 아니라 도전이 가능한 환경이다.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의 몰입 이론(flow theory)도 이를 뒷받침한다. 익숙한 영역을 살짝 벗어난 과제가 주어질 때 인간은 몰입하고 성장한다. 조직문화는 전염성이 강하다. 성과 기준이 한 번 낮아지면 회복은 쉽지 않다. 혁신 조직은 심리적 안전감과 성과 압력이라는 두 축의 균형 위에서 유지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자전거가 넘어지듯 조직은 균형을 잃는다. 조직의 틀과 리더십의 기준을 세우는 힘혁신기업의 리더는 자유와 실험만 강조하지 않는다. 조직 전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틀’을 세운다. 최근 카카오와 네이버의 대비된 상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카카오는 성장기에 가장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문화를 자랑했다. 김범수 의장은 젊은 리더들의 성공욕구를 자극하고, 산하 조직들이 자율적으로 실험하도록 독려했다.그러나 그 성공욕구가 조직 공동체의 성취로 전환되는 구조는 부재했다. 명확한 윤리 기준과 리더십의 공통 규범이 없었고, 각 조직은 개인의 성취에 치우치거나 비윤리적 행동을 견제하기 어려웠다. 자유로움은 통합적 리더십의 부재 속에서 혼란의 씨앗이 됐다.반면 네이버는 실리콘밸리 기업들에 비해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내부 거버넌스와 의사결정 체계를 차근차근 구축했다. 외부에서 다양한 리더를 영입하면서도 네이버의 조직적 바운더리 안에서 움직이도록 했다. 사내독립기업(CIC) 체계 역시 이런 철저한 틀 위에 세워졌다.2015년 도입된 CIC 제도는 성장 가능성이 높은 조직에 자율성을 부여하되, 일정 수준에 이르면 독립시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모델이다. 네이버웹툰과 네이버파이낸셜이 대표적 성공 사례다. 최근 네이버는 5개의 CIC를 12개로 확대하고, AI 중심의 기술 패러다임 전환에 대응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이런 변화는 이전의 성공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네이버만의 조직 방정식을 만들어 가고 있는 사례로 보여진다. 리더의 내면이 조직의 한계다혁신 조직은 자율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리더가 불안하거나 확신이 없으면, 본능적으로 사람과 상황을 통제하게 된다. 이런 통제적 분위기는 빠르게 조직 전반에 전이돼 경직된 문화로 변한다.한 고객사 사례에서 새로 부임한 CEO는 조직을 전면적으로 혁신하고자 했다. 혁신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이해했지만, 조직의 변화는 머리로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단숨에 찾아오지 못했다. CEO는 옳은 방향성을 제시했지만, 구성원과의 정서적 연대와 신뢰를 충분히 구축하지 못한 채 변화를 밀어붙였다.CEO의 의견과 대치되거나 거스르는 의견에 대해 질책이 심해지자 구성원들은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리더는 누구보다 뛰어나기에 리더가 됐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자신과 같은 이해 수준에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방향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면서도, 독단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그것을 통해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가 조직 신뢰의 출발점이다.혁신기업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명확하고 반복적인 방향성의 소통 ▲성과와 문화의 균형 ▲조직의 틀과 기준을 세우는 리더십 ▲리더 자신의 내면 관리라는 네 가지 축이 함께 작동할 때 가능하다. 혁신기업들은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이 요소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구현해왔다. 문화에 정답은 없지만, 리더가 이 네 가지 축을 통해 자신만의 방정식을 세울 때 혁신기업은 탄생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 단 한가지만 꼽아달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오랫동안 다양한 기업들의 조직 혁신을 지원해온 경험상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CEO의 끊임없고 일관된 방향성 제시와 꾸준한 추진력이다.혁신은 우연히 ‘아래에서’ 솟아오르지 않는다. 강력한 톱-다운(Top-down) 리더십이 명확한 방향성과 ‘어디로 가야 하는지’(Where to go)를 일관되고 건강한 메시지로 지속적으로 전달하고, 그 뜻을 함께하는 리더십이 조직 내에서 재생산될 때 비로소 건강한 보텀-업(Bottom-up) 문화가 자생적으로 형성된다. 리더는 혁신기업의 방향을 제시할 뿐 아니라, 그 조직을 만들어내는 존재다.

2025.11.08 10:00

7분 소요
‘죽은 인터넷의 사회’가 미치는 파장은?[한세희 IT 칼럼니스트]

전문가 칼럼

간혹 소셜 미디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엄청나게 많은 게시물을 쉬지 않고 쏟아내는 사람을 본다. 하루 종일 모든 글에 댓글을 달며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일상 생활은 가능한지 의심이 들 정도로 활동이 많다. 이런 사람을 볼 때 혹시 사람이 아니라 ‘봇’(bot)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봇이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자동화된 소프트웨어 로봇을 말한다. 검색 엔진이 인터넷의 정보를 색인하기 위해 웹페이지에 보내 내용을 긁어오게 하는 ‘크롤러’(crawler)가 대표적이다. X (구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에는 예전부터 일정한 주제의 내용을 정기적으로 자동 게재하는 봇 계정이 많이 활동했다. 인터넷 활동에 과몰입한 사람을 봇이라 부르는 건 장난 섞인 비유지만, 우리가 인터넷에서 봇을 접할 확률은 계속 커지고 있다. 봇의 활동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AI 모델 학습을 위해 웹에서 콘텐츠를 긁어오는 ‘AI 크롤러’가 늘었다. 아카마이테크놀로지스 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 사이 AI 봇이 전체 자동화 트래픽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0% 이상 증가했다. 인터넷엔 사람보다 봇이 더 많아 언론사나 콘텐츠 기업 웹페이지에서 긁어온 내용으로 학습한 AI 모델이 이제 사용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즉각 정리해 제공하게 되면서, 검색을 통해 찾아오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기존 콘텐츠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이 무너지는 상황이다. 봇은 전자 상거래 사이트나 여행 사이트에서 쉴 새 없이 상품이나 가격 정보를 확인하기도 한다. 이런 정보를 이용해 가격이나 상품 구성을 조정하고, 심지어 한정판 제품이나 콘서트 티켓을 선점하는 등 반칙 또는 사기에 활용하기도 한다. 정보보호 기업 임퍼바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웹 트래픽에서 인간 활동이 차지하는 비율은 49%로 사상 처음으로 절반 밑으로 내려갔다. 봇의 활동이 전체 트래픽의 51%로 더 많았다. 더구나 온라인 비즈니스를 방해하거나 부당한 이익을 취할 목적으로 운영되는 ‘나쁜 봇’(bad bot)이 37%로 일반적인 ‘착한 봇’(14%)보다 2배 이상 많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가 인터넷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상호작용은 사람이 아니라 봇에 의한 것이고, 이미 사람은 인터넷에서 소외된 상태라는 이른바 ‘죽은 인터넷 이론’(Dead Internet Theory)이 새 힘을 얻고 있다. 인터넷은 이미 죽었나? 죽은 인터넷 이론은 2021년경 등장한 음모론이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보는 대부분의 콘텐츠는 AI와 봇이 만든 것이고, 우리가 사람이라 생각하며 대화하는 상대방은 실은 봇이라는 것이다. 인터넷은 이미 황폐한 공간인데, 각 개인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온라인에서 봇과 대화하며 상호작용의 ‘환상’에 빠져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음모론이긴 하지만, 가볍게 기각하기엔 왠지 그럴듯해 보인다. 요즘 들어선 더욱 그렇다. 최근 생성형 AI의 발전은 실제 사람과 구분하기 어려운 AI 봇이나 가짜 계정의 활용 가능성을 크게 높여주었다. AI가 실제 사람처럼 글 쓰고, 대화하고, 이미지와 영상을 만드는 판에 이들이 인터넷에서 사람 행세를 하고 다닌다 해서 우리가 구분할 수 있을까? 어차피 인터넷에선 랜선 너머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 이미 유튜브나 소셜 미디어엔 AI로 쇼츠 영상이나 블로그, 링크드인 콘텐츠 생성을 자동화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성공 인플루언서들의 콘텐츠가 넘쳐난다. 과거엔 소셜 미디어에서 전문적 지식이나 통찰, 흥미로운 최신 동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게시물을 보며 내공과 감탄을 느꼈다면, 이제는 어느 AI 모델을 써서 짜깁기한 내용일지가 먼저 궁금해진다.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를 넘기며 귀여운 아기나 아름다운 여성이 등장하는 영상을 보다가 문득 이들이 진짜 사람을 촬영한 것인지, 혹은 AI로 정교하게 생성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나 유튜브 크리에이터 영상에 표시된 ‘좋아요‘나 댓글은 진짜 사람이 와서 누르거나 쓴 것일까? 전자상거래 사이트에 붙은 리뷰는? 가짜 계정과 봇을 이용한 ‘좋아요’ 장사나 전용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포털 뉴스 댓글 공작의 전례들을 볼 때, 이러한 활동을 AI를 이용해 보다 고도화하는 시도가 활발할 것이란 점은 쉽게 예측 가능하다. 테크 산업의 거물들도 이런 의문에 뜻을 같이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일런 머스크는 트위터를 인수할 당시 당초 생각보다 ‘봇‘에 의한 트래픽이 크다며, 즉 가치가 고평가됐다며 인수 의사를 번복하기도 했다. 인수 후 X에 봇이 충분히 줄어들지 않았는지, 머스크와 앙숙인 샘 알트만 오픈AI CEO는 최근 AI 봇 확산에 우려를 표하며 “X에 대규모언어모델(LLM)이 운영하는 계정이 정말 많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계 최대 인터넷 커뮤니티 레딧 창업자 알렉시스 오헤니언도 “인터넷의 상당 부분은 이제 그냥 죽었다”고 말했다. AI가 만드는 멋진 신세계 AI 기술 확산과 함께 이런 추세는 더 강해질 것이다. 구글은 실제와 구분하기 어려운 영상을 만드는 ‘나노 바나나’ 모델을 이미 ‘제미나이’에 적용했다. 아마존은 상품 설명과 리뷰를 AI로 자동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메타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왓츠앱 등에 AI를 적용해 글이나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도록 했다. 향후 메타가 원하는 가상현실 기반 ‘메타버스’가 현실화된다면, 그 세계에서 나의 아바타가 만나는 다른 아바타들의 뒤엔 과연 실제 사람이 있을까? 모두가 아바타인 가상 세계 안에서 사람과 AI가 아무 구분 없이 섞여 지낸다 한들 특별히 어색하진 않을 듯하다. 더구나 AI는 더욱 설득력 있는 알고리즘으로 우리를 플랫폼에 붙잡아 둘 수 있다. 나에 맞춰 초개인화된 AI 페르소나를 가장 적절할 때 노출하는 AI 알고리즘을 상상해 본다. 플랫폼 기업의 이해관계에 맞춘 알고리즘의 물결에 단지 떠밀려 다닌다면, 확실히 인터넷은 죽은 곳이 될 터다.

2025.11.08 06:00

4분 소요
동남아시아 핀테크 열기, 그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동남아시아 투자 나침반]

전문가 칼럼

동남아시아의 핀테크 시장은 지금, 뜨겁다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활기를 띠고 있다.2025년 상반기 동남아시아에서 새롭게 유니콘 기업이 된 3개(시그넘(Sygnum), 튠즈(Thunes), 아쉬타(Ashita))중 시그넘과 튠즈가 핀테크 기업이다. 2024년 유일하게 유니콘이 된 타임그룹(tyme group) 역시 디지털 은행이다. 같은 기간 핀테크 스타트업들이 전체의 절반 이상 투자를 받았다. 이는 단순히 한 섹터의 성장세가 아니라, 자본의 선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2025년 상반기 동남아 스타트업 투자 흐름을 보면, 다른 분야에 비해 압도적인 투자를 받았다.동남아시아에서는 모바일 결제, 디지털 뱅킹, 국경간 송금, P2P 대출, 보험·투자 플랫폼이 폭발적으로 성장 중이다. 겉으로 보면 자본과 기술이 몰려든 결과 같지만, 그 밑바탕에는 금융포용(financial inclusion)의 공백이 있다. 전통 금융망이 닿지 않았던 지역, 즉 은행 계좌가 없거나 신용이력조차 없는 인구가 여전히 절반에 달하는 현실이 디지털 혁신의 실험장이 된 것이다.그럼 이 성장의 구조적 요인을 단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이 폭발의 또 다른 동력은 인구구조다. 동남아의 중위연령은 30세 안팎, 하루 평균 스마트폰 사용 시간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젊은 세대는 현금보다 QR코드, 지점 방문보다 모바일앱에 익숙하다.이들에게 금융은 ‘플랫폼의 기능 중 하나’일 뿐이다. 배달앱에서 결제를 하고, 모빌리티 앱에서 소액대출을 받으며, 커머스 플랫폼에서 보험을 드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생활 속 금융이 스며들었다. 금융은 이제 서비스의 끝단이 아니라 생활 습관의 인터페이스가 된 셈이다. 핀테크 성장의 또 다른 배경은 각국 정부가 펼친 규제완화와 테스트베드 정책이다.싱가포르의 MAS(통화청)는 세계 최초로 디지털은행 라이선스를 도입했고, 인도네시아는 큐리스(QRIS)라는 통합결제체계를 통해 핀테크 결제 시장의 폭발적 확대를 이끌었다. 말레이시아와 필리핀도 규제 샌드박스를 운영하며 혁신금융 실험을 제도권 안에서 보호했다.이러한 통제된 실험은 투자자에게 정책 신뢰를, 스타트업에게는 성장의 안전지대를 제공했다. 정부 주도의 정책 실험이 시장의 신뢰를 만들고, 신뢰가 다시 투자로 이어지는 순환이 형성된 것이다.하지만 핀테크로의 투자 몰림 현상에는 다른 원인도 있다.동남아시아에서 인공지능(AI), 로보틱스, 반도체 등 딥테크 분야에 대한 투자가 상대적으로 위축되면서, 단기 수익이 빠르게 확인되는 소비자 금융형 모델에 자금이 몰리는 것이다. 결국 이 현상은 기술의 질적 심화보다, 자본의 효율적 회수를 중시하는 속도 중심의 투자 생태계를 드러낸다.그러나 단기적 열기가 장기적 경쟁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AI·데이터 분석 등 딥테크 기술이 핀테크에 융합되는 2차 성장 단계(Second Wave)가 필수적이다.예컨대, 인도네시아의 고젝(GoTo)은 이미 AI 기반 신용평가 알고리즘을 도입하고 있으며, 싱가포르의 그랩(Grab)은 머신러닝을 활용해 이용자 행동 데이터를 바탕으로 맞춤형 금융상품을 제시한다. 기술이 금융의 효율성과 신뢰성을 함께 끌어올리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국 기업, 결합형 파트너십에서 기회 찾아야 이런 맥락에서 한국 기업의 역할은 단순한 시장 진출을 넘어 기술 결합형 파트너십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첫째, AI·데이터 분석 기술을 현지 금융 인프라에 접목해 ‘핀테크의 고도화’를 이끄는 모델이 유효하다. 예를 들어 한국이 강점을 가진 신용평가·리스크 관리·보안 솔루션은 동남아 금융당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술 분야다.둘째, 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에서 운영 중인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활용해 초기 실증사업(Pilot Project)을 추진함으로써, 금융과 기술이 결합된 레퍼런스를 확보할 수 있다.셋째, 핀테크 기업 간 협업을 통한 국경 간 결제(cross-border payments) 플랫폼 구축 역시 유망하다. 동남아 각국이 추진 중인 통합결제망(QRIS·PromptPay 등)은 한국의 기술과 결합할 때 안정성과 범용성을 높일 수 있다.결국 한국 기업이 동남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단기적인 시장 점유율보다 신뢰 가능한 기술 파트너로 자리 잡는 것이 핵심이다.균형의 기로에 서 있는 동남아 핀테크 시장 지금 동남아시아의 핀테크는 성장의 정점이 아니라 균형의 기로에 서 있다. 빠른 자본 회전이 가능하다는 장점 뒤에는, 기술 심화의 정체라는 리스크가 공존한다. 핀테크가 지속가능한 혁신으로 진화하려면, 단순한 금융 접근성 확대를 넘어 AI·데이터·보안 등 딥테크와의 융합이 필수적이다.자본은 속도를 원하지만, 기술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두 축을 연결하는 전략적 균형을 설계할 수 있다면, 동남아시아의 핀테크 열기는 단순한 거품이 아니라 새로운 금융 패러다임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 기업이 제공할 수 있는 기술력과 경험은, 동남아시아의 ‘빠른 성장’에 깊이를 더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2025.11.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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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향한 거대한 욕망의 두 불기둥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최근 돈을 향한 거대한 욕망의 불기둥 두 개가 솟아오르고 있는데요, 그중 하나는 국내 증시(이하 국장)에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국장의 코스피가 지난 10월 27일 사상 처음으로 4000선을 넘었는데, 2021년 1월 3000을 돌파한 지 4년 9개월여 만입니다. 윤석열 정부 때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 등 각종 정책을 쏟아내도 움직이지 않던 코스피는 지난 6월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3000선을 넘더니 4개월 만에 ‘4000 돌파’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습니다.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조롱까지 받던 국장은 미국·중국·일본 등 주요 32개국 42개 지수 중 수익률 1위까지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핫한 증시로 떠올랐습니다. 전문가들은 국장이 불장이 된 이유로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뿐 아니라 조선·방산·전력 등 비반도체 업체의 실적 개선, 이재명 정부의 증시 친화 정책과 글로벌 금리 인하가 맞물린 점 등을 꼽았습니다. 특히 정부가 ‘코스피 5000 시대를 열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을 실천하기 위한 정책을 일관성 있게 실행해 미장으로 향하던 투자자들을 국장으로 되돌리는 데 한몫 단단히 했다는 평가입니다. 정부와 여당은 경영계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이사의 충실의무를 확대하고 전자주주총회를 도입한 1차 상법 개정에 이어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를 주 내용으로 하는 2차 상법 개정안을 밀어붙이며 증시 활성화에 나섰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담은 3차 상법 개정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주가 조작하면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겠다”라는 이재명 대통령의 경고도 말로만 그치지 않고 부당이득의 최대 2배 과징금 부과, 불공정거래 시 원스트라이크 아웃제 도입 등 실제 행동으로 보여줬습니다. 제대로 불붙은 국장은 이번 기회에 주식으로 한몫 잡겠다는 욕망의 바다로 변하며 빚을 내서라도 베팅하려는 ‘빚투개미’가 급증하고 있는데요, 10월 1일 23조3458억원이던 신용거래융자 잔고가 4000선을 돌파한 10월 27일 1조원 이상 증가한 24조7766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최근 한미 관세협상 타결, 미중 정상회담 등으로 불장은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어서 빚투개미는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여 정부가 예의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욕망은 부동산 시장에서 들끓고 있는데, 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집값이 들썩이면서 집테크에 투자가 몰렸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주택담보대출(주담대) 한도를 6억원으로 제한한 6·27 대책, 고가주택 주담대 한도 축소와 서울 전역으로 규제 지역을 확대한 10·15 대책 등 강력한 주택시장 안정화 대책을 꺼내자 ‘왜 집을 못 사게 하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초기 규제보다는 “공급을 늘려 적정한 가격을 유지하도록 하겠다”는 말과는 다른 것이 아니냐는 불신의 시선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고, 여기에 고위공직자의 다주택 문제까지 불거지며 20가지가 넘는 부동산 정책을 쏟아내고도 집값을 잡지 못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과의 전쟁’이 떠오릅니다. 당시 ‘부동산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을 각종 세금으로 억누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해했지만, 결과는 정권마저 잃는 처참한 패배로 귀결됐습니다. 돈을 향한 욕망은 누른다고 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껏 봐왔습니다. 정부가 목표한 부동산 정책의 실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공급’이라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2025.11.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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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는 어떻게 세계 최강의 문화 브랜드가 됐나?[허태윤의 브랜드 스토리]

전문가 칼럼

파리, 밀라노, 뉴욕. 세계 패션의 중심지에서 지금 가장 주목받는 얼굴은 금발의 서구 모델들이 아니다. 블랙핑크, BTS, 뉴진스, 스트레이키즈 등 한국 아이돌들이 샤넬, 루이비통, 디올 같은 초일류 명품의 얼굴이 됐다.100년 전통의 유럽 명품 하우스들이 앞다퉈 K-팝 스타를 뮤즈로 선택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제 '문화 권력'의 중심이 동아시아의 작은 반도국가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석권하고, '오징어게임'이 넷플릭스 역사를 새로 쓰며, 불닭볶음면이 전 세계 식탁을 점령했다. 10여년 전만 해도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냐"고 묻던 서구인들이 이제는 한국어를 배우고, 김치를 담그며, 블랙핑크 콘서트 티켓을 구하기 위해 밤을 새운다. 이것은 우연일까? 아니다. 체계적인 브랜딩 전략이 만들어낸 21세기 최대의 문화 혁명이다. 한류가 일시적 유행을 넘어 세계 최강의 문화 브랜드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스토리가 브랜드가 되다한류 성공의 첫 번째 열쇠는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가장 세계적인 것'을 만들어낸 스토리텔링이다.'기생충'의 반지하. 세계 어디에도 없는 이 기묘한 주거 형태가 아카데미를 정복했다. 봉준호는 와이파이를 찾아 화장실에 쪽그리고 앉는 가족, 폭우에 변기물이 역류하는 집을 통해 21세기 자본주의의 잔인한 계급 구조를 폭로했다. 반지하라는 극히 한국적 공간이 '위로 올라가고 싶지만 올라갈 수 없는' 전 인류의 좌절을 대변한 것이다.'오징어게임'은 더 극단적이다. 456억 빚에 쫓기는 한국인들이 목숨을 걸고 구슬치기를 한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GDP 대비 106%로 세계 최고 수준. 하지만 황동혁 감독이 천재적이었던 것은 이 한국적 비극을 어린 시절 놀이와 결합시킨 점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뽑기 - 순수했던 놀이가 생존게임이 되는 아이러니. 전 세계 1억 1,100만 가구가 열광한 이유는 자신들도 매일 비슷한 생존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BTS의 '뱁새'는 한국의 '금수저, 흙수저' 신조어를 세계 청년들의 애국가로 만들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 - 이 토속적인 속담이 어떻게 빌보드를 울렸을까?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라는 뼈아픈 자조가 오히려 전 세계 청년들에게 위로가 됐기 때문이다. 한국의 '헬조선'이 프랑스의 '잃어버린 세대', 일본의 '사토리 세대', 미국의 '밀레니얼 푸어'를 하나로 연결했다.봉준호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말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한류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할리우드를 흉내 내지 않고 오히려 가장 한국적인 것에 천착했을 때, 인류 보편의 감정을 건드렸다. 압축성장의 부작용, 극한 경쟁, 양극화 - 한국이라는 '자본주의 실험실'에서 벌어진 극단적 현상들이 21세기 인류의 가장 정직한 거울이 된 것이다.한류의 두 번째 성공 비결은 디지털 플랫폼의 전략적 활용이다. 자본력의 한계를 기술과 창의력으로 극복했다. 2013년 무명으로 데뷔한 BTS는 방송 출연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들은 SNS를 단순한 홍보 도구가 아닌 '팬과의 일상 공유 플랫폼'으로 재정의했다. 새벽에 먹는 라면, 연습실에서의 실수, 멤버들 간의 사소한 대화까지 모든 것을 공개했다. 이는 기존 K-팝의 '신비주의' 전략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었다. 현재 BTS의 유튜브 구독자는 8160만명에 달한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이들이 만든 'SNS를 통한 진정성 있는 소통' 모델이 전 세계 아티스트들의 새로운 표준이 됐다는 점이다.이후 스트레이키즈, 세븐틴, 엔하이픈 등 모든 K-팝 그룹이 이 모델을 따랐고, 아리아나 그란데, 듀아 리파 같은 서구 아티스트들도 팬과의 일상적 소통을 강화하기 시작했다.아울러 웹툰 플랫폼의 성공, 틱톡과 K 팝의 시너지, 게임을 통한 문화전파, 넷플릭스를 활용한 콘텐츠 확산전략 역시 한류 브랜딩의 큰 역할을 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세 번째 성공 요인은 'K'가 단순한 원산지 표시를 넘어 '품질 보증 마크'가 됐다는 점이다. BTS, 블랙핑크,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 한류의 연속적 성공이 'K=고품질'이라는 인식을 강화했다. 실제로 2022년 한국 이미지 조사(문화체육관광부)에서 외국인들이 한국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1위가 'K-팝'(36.2%), 2위가 '혁신적 기술'(28.1%)로 나타났다. 문화적 성공이 국가 전체 이미지를 끌어올린 것이다.2020년 '기생충' 아카데미 수상 직후, 미국 아마존에서 'Korean' 태그가 붙은 제품 매출이 85% 증가했다. 짜파구리를 검색한 미국인들이 김치, 고추장, 심지어 한국산 프라이팬까지 함께 구매한 것이다. 이는 'K'가 개별 산업을 넘어 하나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가 됐음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CJ ‘비비고 만두’가 중국 만두보다 20% 비싸도 미국 시장 1위가 된 것, K뷰티 브랜드가중국시장에서 프리미엄브랜드로 포지셔닝 된 것 모두 'K=혁신+품질'이라는 브랜드 프리미엄 덕분이다.문화가 산업이 되다네 번째 성공 비결은 정부와 민간의 유기적 협업이다. 한류는 자연발생적 현상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20년 이상의 체계적 지원이 있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문화산업진흥기본법' 제정은 단순한 법률 제정이 아니었다. 문화를 '비용'이 아닌 '투자'로, '예술'을 넘어 '산업'으로 인식한 패러다임 전환이었다. "21세기는 문화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당시의 선언은 20년 후 현실이 됐다. 특히 주목할 점은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다. 정부가 팔 길이만큼 거리를 두고 지원한다는 의미로, 창작자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간접 지원하는 방식이다.파리, 밀라노, 뉴욕의 명품들이 K-팝 스타를 뮤즈로 모시는 시대. "한국이 어디냐"고 묻던 세계가 이제는 한국어를 배우고 김치를 담그는 시대. 이 놀라운 전환의 비밀은 무엇이었나? 한류는 네 가지 혁신으로 답했다.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로 인류 보편의 감정을 건드렸고(스토리의 힘), SNS로 팬과 친구가 되는 새로운 소통법을 만들었으며(디지털 혁명), 'K'를 품질의 상징으로 만들었고(브랜드 프리미엄), 문화를 예술이 아닌 산업으로 키웠다(전략적 지원).비단 이것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당신의 도시, 당신의 회사, 당신의 이야기에도 세계를 울릴 특별함이 있다. 한류가 증명한 것은 단 하나다. 21세기 최고의 수출품은 제품이 아니라 문화라는 것.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 되고,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 되는 시대가 왔다.이제 질문을 바꿔보자."당신의 문화는 어떻게 세계 최강의 브랜드가 될 것인가?"

2025.11.0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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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 우려로 시작한 ‘2025 오사카·간사이 엑스포’…최대 2600억 흑자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E-MICE]

전문가 칼럼

막대한 적자가 예상됐던 ‘2025 오사카·간사이 엑스포’가 대반전 드라마를 썼다. 개막 전부터 우려를 낳던 엑스포가 입장권, 기념품 판매 등으로 최대 280억엔(약 2623억원) 규모 흑자 행사로 마무리되면서다. 20년 전 아이치현 나카쿠데시(市)에서 열린 ‘2005 아이치 엑스포’가 올린 수익 140억엔(약 1312억원)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다. 물가 상승을 고려할 때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애초부터 적자가 기정사실로 여겨졌던 것에 비하면 예상을 뒤엎는 ‘반전’ 실적이다. 전체 방문객도 목표인 2820만명에 10% 모자란 2529만명에 그쳤지만, 앞서 열린 ‘2020 두바이 엑스포’의 2294만명을 10% 넘게 웃돌았다.입장권·기념품·F&B 등 판매로 1조3500억원 수입일본 오사카만(灣) ‘꿈의 섬’ 유메시마 인공섬에서 지난 4월 중순 막 오른 ‘2025 오사카·간사이 엑스포’가 지난 10월 13일 폐막식을 끝으로 184일 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1970년 오사카 엑스포 이후 55년 만에 다시 열린 엑스포에는 전 세계에서 158개국, 7개 국제기구가 참여했다. 인공섬 위에 조성된 축구장 217개 규모 총 면적 155만㎡ 크기 행사장에는 국가관, 주제관 등 모두 191개 전시관(파빌리온)이 설치돼 운영됐다.일본국제박람회협회에 따르면 오사카·간사이 엑스포는 입장권과 기념품, 식음(F&B) 판매로 최대 1440억엔(약 1조3500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총 1160억엔(약 1조1000억원) 규모 운영비를 충당하고도 25% 가까이가 남는 금액이다. 입장권은 손익 분기점인 1800만장을 훌쩍 뛰어넘는 2300만장 가까이 팔렸고, 마스코트 ‘먀쿠먀쿠’ 봉제인형 등 기념품도 800억엔(약 7500억원)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일본 정부는 엑스포 상징물인 그랜드 링과 전시관 건립에 들어간 2350억엔(약 2조2000억원) 외에 행사 현장 운영에 드는 1160억엔을 입장권, 기념품 판매로 조달할 계획이었다.이시게 히로유키 협회 사무총장은 폐막을 앞두고 가진 공식 브리핑에서 “하루 10만명 내외이던 방문객이 폐막을 앞두고 20만명까지 늘면서 입장권 판매가 막판 호조를 보인 덕분”이라며 “운영비도 긴축 운영해 계획보다 50억엔(약 470억원)을 절감했다”고 설명했다.오사카·간사이 엑스포 흑자 전환에는 ‘엔화 약세’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엑스포 기간 내내 이어진 엔저 기조가 비용 부담을 줄여 외국인의 일본 여행 수요를 늘린 동시에 해외 여행 부담이 커진 일본 국민의 발길을 국내 여행으로 돌려놨기 때문이다.지난해 아웃바운드(내국인의 해외여행) 수요가 이미 코로나19 사태 이전을 넘어선 한국과 달리, 일본은 지금도 85~90% 수준 회복세에 머물고 있다. 전체 1억2300만 인구 가운데 여권 소지자 비율도 17.5%로 2019년 대비 6%포인트(p) 떨어졌다. 반면 인바운드(외국인의 일본 여행) 관광객은 지난해 3687만명에 이어 올해 역대 최대인 4000만명 돌파를 목전에 둔 상태다.전체 엑스포 방문객 중 외국인은 ▲한국 ▲중국 ▲대만 등 아시아 지역의 방문이 늘면서 총 329만명을 기록했다. 당초 예상한 전체 10% 수준을 3%p 상회하는 수치다. 오사카부와 시는 내국인보다 씀씀이가 큰 외국인 방문객 비중이 늘면서 간사이 지역 전체가 최대 3조엔(약 28조원)에 달하는 직간접 경제효과를 누린 것으로 보고 있다. 최대 10조원 투입 ‘유메시마 2단계 개발’ 본격화엑스포에 앞서 개최한 ‘2020 도쿄올림픽’으로 막대한 빚만 떠안은 일본 정부는 엑스포가 적자 그늘에서 벗어나면서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1964년 도쿄올림픽과 1970년 오사카박람회 개최로 ‘경제대국’ 타이틀을 단 일본은 ‘부흥과 재건’을 목표로 올림픽과 엑스포 두 메가 이벤트를 유치했다. 하지만 애초 32조엔(약 302조원)의 경제효과를 기대했던 2020 도쿄올림픽이 코로나19 여파로 무관중 대회로 열리면서 4조엔(약 38조원)의 빚만 떠안았다.2025 오사카·간사이 엑스포가 목표에 근접한 성과를 내면서 엑스포장이 조성됐던 유메시마 인공섬 개발에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오사카부와 시는 지난 6월 엑스포장을 포함한 100만㎡ 부지에 대형 복합리조트와 호텔 등을 갖춘 마이스 복합단지를 조성하는 2단계 개발 계획을 확정했다. 최대 10조원을 투입하는 대형 프로젝트로 연내 마무리를 목표로 투자와 개발을 맡을 민간 사업자 선정에 들어간 상태다. 엠지엠(MGM), 오릭스 그룹이 유메시마 인공섬에 건립하는 일본 최초의 내국인 카지노가 포함된 복합리조트는 2030년 완공을 목표로 올 4월 착공했다.마사카즈 토쿠라 일본국제박람회협회장은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목표에 근접한 방문객, 흑자 달성 외에 가장 의미있는 성과는 엑스포 방문객 80%가 재방문 의사를 밝혔다는 점”이라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열린 엑스포 성과와 효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레거시(유산)를 이어가기 위해 정부와 학계, 산업계 전문가가 참여하는 평가위원회를 발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엑스포 상징 구조물 ‘그랜드 링’2025 오사카·간사이 엑스포의 상징 구조물 ‘그랜드 링’(Grand Ring)이 공공주택 자재로 재활용된다. 일본국제박람회협회는 엑스포장을 둘러싼 대형 목조 건축물 그랜드 링을 200m만 보존하고 나머지 해체한 자재를 이시카와현 스즈시에 무상 제공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사카에서 북쪽으로 약 320㎞ 떨어진 스즈시는 지난해 규모 7.6 강진에 이은 폭우로 도시 전체가 큰 피해를 입었다. 스즈시는 제공받은 그랜드 링 목재를 신규 건립 중인 공공주택 자재로 사용할 예정이다. 둘레 2025m, 직경 615m, 높이 20m 그랜드 링 건립에 들어간 비용은 총 344억엔(약 3250억원). 일본산 삼나무와 편백나무, 유럽산 적삼나무를 홈을 파 서로 교차 연결하는 전통 건축기법 ‘누키’(관공법)가 적용된 그랜드 링은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엑스포 기간 중엔 행사장으로 통하는 통로이자 쉼터, 전망대 역할을 했다.한편 일부 시민단체와 오사카대 등 간사이 지역 7개 대학 총장들은 “화합과 대화, 희망의 메시지가 담긴 그랜드 링을 보전해야 한다”며 오사카부와 시에 철거 재검토를 촉구했다. 그랜드 링을 설계한 건축가 소우 후지모토도 “철거는 큰 낭비이자 지속가능성을 추구한 엑스포 콘셉트과도 어긋난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2025.11.02 06:00

5분 소요
‘토큰증권 제도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김기동의 이슈&로(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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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자산(가상자산)이 금융 제도로서 빠르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 중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도입이야말로 디지털자산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미국 달러와 1대 1로 가치가 고정돼 있는 코인을 말한다. 가상자산 시장의 변동성을 보완하고, 디지털 금융 생태계의 결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개발됐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하는 근거 법률인 지니어스 액트(GENIUS Act)가 올해 7월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입법이 완료됐다. 하위법규가 마련되는 내년 이후 시행될 것이다. 1971년 닉슨의 금태환 포기 선언에 버금가는 ‘달러 체제의 변화’로 평가되고 있다.여전히 토큰증권 ‘출발 신호’ 기다리는 韓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네트워크 상에서 중개기관 없이 개인 간(P2P) 직접 거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존 은행 중심 금융 체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 24시간·저비용·즉시 결제가 가능하다. 모든 거래는 기록되고 영구히 남는다. 손쉽게 국경을 넘어 가치를 전송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달러를 소수점 이하로 쪼개 사용할 수 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도입을 가능하게 한 이러한 블록체인 기술의 유용성은 필연적으로 ‘자산의 토큰화’를 초래한다. 자산을 토큰화하면 실물자산의 소유권·수익권·지분 등을 디지털 토큰으로 전환하여, 블록체인 상에서 거래·이전·분할·증명할 수 있게 된다. 이미 해외에서는 ‘자산의 토큰화’가 기존 금융시스템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금융화할 수 있는 자산의 경계가 사라지고, 시장의 시간은 24시간으로 확장됐다. 국채·머니마켓펀드부터 부동산 조각투자에 이르기까지, 자산의 토큰화라는 거대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약 330억달러(약 47조원) 규모의 실물자산이 토큰화됐다. 세계 최대 자산 운용사인 미국의 블랙록은 ‘모든 자산의 토큰화’ 계획을 밝히고, 블록체인 머니마켓펀드로 유동성 시장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혁신은 거래소와 플랫폼으로 확산되고 있다. 코인베이스와 나스닥은 상장주식과 상장지수펀드(ETF)의 토큰화를 위해 SEC(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미국의 부동산 플랫폼 리얼티는 주택을 토큰화해 투자자에게 임대수익을 분배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금융 선진국도 토큰증권을 금융시스템으로 수용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 중이다. 영국 금융감독청(FCA)은 자산운용사들에 대해 자사 펀드를 토큰 형태로 발행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규제안을 내놨다. 프랑스 금융당국청(AMF)도 유럽 최초의 블록체인 기반 증권거래소 ‘LISE’ 운영 규칙을 공식 승인했다. LISE는 시가총액 5억 유로 이하 프랑스 중소기업(SME)의 주식을 토큰화해 개인 투자자가 디지털 지갑을 통해 직접 거래할 수 있도록 설계된 플랫폼이다. 이와 같이 세계는 이미 ‘토큰화된 경제권’으로 이행 중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제도의 출발선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다. 2023년 2월 금융위원회가 ‘토큰증권 발행·유통 규율체계 정비방안’(토큰증권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새로운 증권 유형인 ‘토큰증권’의 발행을 전면 허용한다고 밝혔다. 토큰증권은 ‘자산의 토큰화’의 하위 개념으로서, 특정 자산을 증권 형태로 토큰화하는 것을 말한다.토큰증권은 분산원장(블록체인)에서 발행한다는 점에서 전자증권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관련 법률의 제·개정이 이뤄지면 분산원장도 법이 인정하는 공적 장부가 된다. 올해 9월,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토큰증권 도입의 선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비상장주식과 조각투자 장외거래 플랫폼이 허용됐다. 그러나 정작 분산원장 관련 법안은 우선순위에 밀려 입법에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흐름 따라잡아야 할 이유토큰증권은 유동성이 닿지 않던 곳에 새로운 시장을 만든다. 또한 자산가가 아닌 일반인도 고액 자산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여 ‘투자의 민주화’를 촉진한다. 소상공인·스타트업의 자금조달에 활용될 수 있는 ‘공동수익권’이나 ‘비상장주식’과 같은 비정형적이고 유동성이 낮은 자산을 자본시장으로 편입시키는 금융 인프라로서의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정부 당국과 기존 국내 자본시장은 토큰증권의 활용범위에 대해서도 매우 보수적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의 상상력이다. 기술이 만든 신뢰를 제도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시대의 질문이다. 다행히 새 정부는 ‘토큰증권의 제도화’를 국정과제에 포함시키며, 법안 통과를 향한 추진력을 다시 끌어올리고 있다. 세계 금융 인프라가 블록체인 위에서 재구성되는 지금, 한국 자본시장이 이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다면 자칫 세계적 금융 혁신의 흐름에서 낙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입법 및 정책 당국의 열린 시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울러 기업에서도 ‘자산의 토큰화’에 대한 대비를 갖추어야 한다. 기존에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법무 및 회계·세무 리스크가 등장할 것이다. 변화를 읽고 준비하는 조직과 국가만이 미래를 주도할 수 있다.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

2025.10.3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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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정부가 민간 기업 CEO를 갈아치운 이유는?[한세희 테크&라이프]

전문가 칼럼

네덜란드에는 ‘비상 물자 공급법’(Goods Availability Act)이란 법이 있다.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 정부가 기업 이사회 결정을 무효로 만드는 등 강력하게 개입할 수 있게 하는 법이다. 네덜란드 같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법을 실행할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긴 어렵다. 그런데 냉전 시대 1952년 제정된 이 법이 70년만에 처음 실제 발동되는 일이 벌어졌다. 9월 말, 네덜란드 정부가 반도체 기업 넥스페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간 것이다. 중국인인 장쉐정 CEO도 해임하고 임시 CEO를 지명했다. 정부는 “넥스페리아 지배 구조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며 위급 상황에서 반도체 수급이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이 같은 조치를 취한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가 “매우 이례적”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70년만에 처음 발동된 비상 조치 넥스페리아는 네덜란드 네이메헌에 본사를 둔 토종 기업이지만, 주인은 중국이다. 2019년 중국 휴대폰 위탁 제조사 윙텍이 인수했다. 자동차와 가전 제품에 들어가는 범용 반도체를 주로 생산한다. 네덜란드 본사와 유럽 공장에선 설계와 전공정 제조를 담당하고, 중국 법인에서 패키징해 최종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식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전체 생산량의 80%가 중국에서 완성돼 출하된다. 넥스페리아는 중국 소유 기업이라는 점 때문에 최근 미국 정부의 제재 리스트에 올랐다. 미국 기업이 제재 리스트에 오른 기업과 거래하려면 미국 정부의 사전 허가를 얻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다. 사실상 국제 시장 퇴출이다. 미국은 제재를 벗으려면 장쉐정 CEO를 해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장 CEO는 유럽 본사와 중국 법인을 분리해 유럽측 독립성을 유지하기 원하는 정부 방침을 거부하고 화사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시도를 해 왔다. 본사에선 넥스페리아 반도체 핵심 지적재산권(IP)이 유출되고, 생산 시설 역시 대거 중국으로 이전될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이러한 갈등이 결국 비상 물자 공급법 실행이라는 결말로 이어졌다. 당연히 중국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중국 정부는 이 조치를 규탄하며 중국에서 생산되는 넥스페리아 최종 제품의 수출을 봉쇄했다. 넥스페리아 중국 법인은 “중국 자산의 안보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 현지 직원에게 네덜란드 본사 지시를 따르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중국 법인은 중국 기업으로서 독립적으로 운영될 것이란 선언이다. 넥스페리아 본사는 장 CEO가 “중국 법인이 이제 독립적으로 운영된다”거나 “넥스페리아가 월급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다”와 같은 거짓을 퍼뜨리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넥스페리아를 둘러싼 혼란에 세계 주요 자동차 기업들은 부품 수급난을 우려하고 있다. 넥스페리아는 일부 자동차용 범용 반도체 제품 시장에서 1~2위를 유지하고 있다.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한 제품은 아니지만, 수급이 안 된다면 자동차 제조 라인을 멈춰 세울 수 있다. 범용 부품 제조와 유통이 막혀 전체 자동차 생산에 차질을 빚었던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 넥스페리아 사태는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전쟁에 유럽이 동참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자유 무역에서 경제 안보로 유럽의 초점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네덜란드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요충지에 있다. 최첨단 미세회로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생산하는 세계 유일의 기업 ASML이 네덜란드에 있다. 애플 아이폰 프로세서와 엔비디아 인공지능(AI) 학습 칩을 위탁 생산하는 TSMC, 세계 1위 메모리 기업 삼성전자, CPU 대표 기업인 인텔 등이 ASML의 장비를 필요로 한다. 네덜란드 정부는 앞서 미국의 중국 반도체 제재에 동참, ASML EUV 장비의 중국 수출을 막는 등 중국과 거리를 두고 있다. 자국 대표 기업 ASML이 최대 시장 중국에서 입지가 약해지는 상황을 감수하고 내린 결정이다. 혁신에 뒤쳐진 대가넥스페리아 건은 70년 동안 한 번도 시행되지 않은 법률을 꺼내 직접 민간 기업 활동에 개입했다는 점에서 더욱 명시적으로 이 싸움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냉전 시대에도 적용하지 않은 법을 지금 끄집어 낼 정도로 현재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첨단 기술과 디지털 플랫폼을 둘러싼 미중 패권 경쟁이 과거 냉전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이는 징후이기도 하다. 글로벌 자유 무역과 분업, 공급망 의존을 통해 더 평화롭고 번영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질서를 맞이하고 있다. 앞서 영국도 안보를 이유로 웨일스 뉴포트에 있는 넥스페리아 생산 공장의 지분을 매각하게 한 바 있다. 프랑스도 중국 영향 아래 있는 반도체 기업에 비슷한 조치를 취한 적이 있다. 이런 조치는 중국 같은 전체주의 국가의 확장을 막고 자유 민주주의 블록을 지키려는 의도를 내세운다. 하지만 중국이 넥스페리아 통제를 강화하고 제품 수출을 막아 자동차 부품 공급망이 마비될 위험이 우려되는 것에서 보듯, 오히려 우려하던 공급망 안보 붕괴나 지적재산 유출을 더 빠르게 할 가능성도 있다. 세계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고, 그 결과는 거대한 블록으로 분열된 세계일 수 있다. 애초에 넥스페리아가 중국 자본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현재 이런 문제를 피할 수도 있었을까? 넥스페리아는 네덜란드 글로벌 전자 기업 필립스가 2006년 반도체 사업을 분리해 사모펀드에 매각하며 설립된 NXP에서 다시 2016년 분리돼 탄생한 회사다. NXP가 넥스페리아를 중국 정부 소유 기업이 낀 투자사에 넘겼고, 이를 다시 윙텍이 인수하며 중국 지배가 확고해졌다. 이를 되돌리기 위한 모험을 지금 네덜란드는 하고 있다.일찍이 1920년대 진공관을 생산했던 첨단 기업 필립스의 반도체 사업이 미국, 일본, 한국 등에 밀리면서 재무적 투자자에 넘어간 결과다. 혁신에 뒤쳐진 대가는 이런 식으로 치러진다.

2025.10.2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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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의 스타트업 해외 진출 지원…부모 손 잡는 ’하향식 지원’ 지양해야 [최화준의 스타트업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다 큰 성인이 부모 손을 붙잡고 해외로 여행을 간다면 얼마나 웃긴 일인가.”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글로벌 스타트업 생태계 전문가는 국내 스타트업이 기관 지원에 의존해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방식을 그렇게 비유했다. 그는 이런 해외 진출 방식은 한국 스타트업이 경쟁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글로벌 시장에 심어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한번 시장에 각인된 부정적 인상을 바꾸려면 한국은 미래에 더 많은 기회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스타트업 글로벌 교류는 상향식으로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를 경험한 해외 전문가들은 고질적 문제로 다단계 지원 구조를 꼽는다. 현 구조에서는 공적 영역과 같은 최상위 집단이 해외 진출 국가를 정하고 이에 맞추어 하위 관계 및 관련 조직들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일련의 행동들은 하향식(top-down)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긴 시간과 많은 자원이 소모된다.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는 스타트업 생태계의 변화하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점이다. 스타트업 생태계는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화한다. 현재 스타트업 생태계에 자리 잡은 하향식 다단계 지원 구조는 이러한 변화를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기에 알맞지 않다. 국내외 스타트업 생태계 전문가들은 대기업을 위한 생태계 구축 방식을 왜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도 적용하고 있는지 하나같이 의문을 보였다. 내부 체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국내 스타트업 지원 구조는 제조 대기업이 전유하고 있는 가치 사슬과 유사하다. 실제로 국내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 지원 구조와 대기업의 가치 사슬 구조 모두 상하청 갑을 관계로 얽혀 있다. 그들은 현재 다단계 형태의 가치 사슬에 여러 스타트업 지원 조직들이 생존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이 고착화되면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의 해외 진출은 유의미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조언했다.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창업자와 스타트업이 주도하는 상향식(bottom-up) 해외 진출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스타트업 생태계 지원 기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지원 부서일 뿐, 그들이 모든 것을 직접 운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해외 스타트업 생태계는 상향식 지원을 통해 글로벌 교류의 성공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스타트업은 더 높은 기업 가치와 더 많은 투자금 회수 기회를 찾아 자발적으로 미국으로 회사를 옮긴다. 유럽의 창업 선도국 에스토니아는 전자시민권(e-Residency)을 발급해서 디지털 노마드를 실현하려는 전 세계 창업자를 자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글로벌 금용 허브 싱가포르는 낮은 세금과 높은 글로벌 개방성을 앞세워 아시아와 유럽의 벤처 캐피털(VC) 기업과 창업자를 성공리에 유치했다. 이러한 해외 성공 사례들은 지원 기관에서는 제도적 유인책만을 제공하고, 스타트업 생태계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은 덕분에 나온 결과이다. 글로벌 교류를 추구하는 스타트업 행사 역시 창업자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글로벌 스타트업 행사 슬러쉬(Slush)는 핀란드 대학 창업 동아리의 소규모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스페인어권 최대 스타트업 행사 사우스서밋(South Summit)은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의 한 여성 창업자에 의해 출범되었다. 인기를 얻고 규모가 글로벌로 커지면서 이제는 공공 영역의 지원과 도움을 받고 있지만, 출발은 모두 스타트업 생태계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아이디어였다.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은 탐험가처럼일반 기업 생태계와 스타트업 생태계가 성장하는 방식은 다르다. 해외 진출 전략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업은 수요가 충분한 해외 시장을 선정하고 그곳에 거점을 마련한다. 이는 목표를 정해서 행동하는 사냥꾼과 같다. 반면 스타트업은 탐험가와 같다. 해외 진출의 목적은 진출 국가의 시장 잠재성을 알아보기 위함이다. 현지 시장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스타트업은 재빠르게 다른 국가로 눈길을 돌린다. 기회와 가능성을 포착해야 비로소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정복을 시작한다. 이처럼 해외 진출을 도모하는 스타트업은 즉시 접근 가능한 자원을 찾아 새로운 곳을 찾아 헤매는 탐험가와 같다.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스타트업 해외 진출 지원 기관의 역할은 베이스캠프 정도까지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글로벌 무대에서 성공을 거둔 대다수 한국 스타트업들은 해외 시장에 근거지를 차리고 자력으로 성장했다. 예를 들면 헬스케어 스타트업 눔, 채팅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센드버드, AI 애드테크 플랫폼 몰로코 등이 그 주인공이다. 모두 해외 시장에서 자생력을 보여주면서 유니콘으로 성장한 한국계 해외 스타트업이다. 스타트업에게 해외 진출 기회를 제공하고 채널을 확대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다. 지원 사격은 그 정도까지가 적절하다. 굳이 그들의 손을 붙잡고 나라 밖으로 나아가 함께 사냥까지 할 필요는 없다. 붙잡은 손을 놓아도 스타트업들은 스스로 알아서 탐험을 시작할 것이다. 누군가는 탐험을 단기간에 마치고 빈손으로 돌아올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긴 탐험 끝에 양손 가득 무엇인가를 들고 올 것이다. 무엇을 가져올지도 결국은 그들이 정할 일이다.

2025.10.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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