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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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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심한 동맹, 그리고 코리아 퍼스트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이 있는데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종전 협상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딱 미운 시누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데 힘을 쏟기보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8월 18일 미국 백악관에서 진행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종전을 위한 회담에서 지난 2월 때처럼 언쟁을 벌이고 내쫓지 않았지만, 핵심 사안인 안보 보장과 영토 문제에서 푸틴 대통령의 편에 더 가깝게 서서 이야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전쟁 내내 무기 등의 지원에 인색했고, 휴전이나 종전에 대해 러시아보다는 우크라이나를 더 압박했습니다. 이는 서방 진영의 좌장인 미국이 지금까지 보여온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미국의 변심은 글로벌 관세 협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는데요, 동맹이나 우방국이라고 해서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대만의 경우 별다른 협의 없이 한국·일본·유럽연합(EU)에 부과한 15%, 필리핀의 19%보다 높은 20%를 일방적으로 적용했는데요, 대만으로서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만은 최근 몇 년간 미국과 함께 중국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하며 ‘친미’ 바람이 불었는데,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군사·경제 분야에서 찬바람이 불면서 민심이 바뀌었습니다. 대만의 소셜미디어에서는 ▲“미국이 대만을 ATM처럼 이용한다” ▲“배신당했다” ▲“우크라이나 다음은 대만” 등 불만과 우려가 터져 나왔으며, 여론조사에서 ‘유사시 미국이 지원할 것’이라는 기대는 40%대에서 30%대로 하락할 정도로 ‘못 믿을 친구’라는 불신이 커졌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유 진영의 맹주를 버리고 우방국도 때리는 ‘글로벌 악동’으로의 변신에는 국력이 쇠락해 가는 늙은 호랑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Make America Great Again, MAGA) 위한 ‘미국 우선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각국과의 관세 협상 과정에서도 “친구가 적들보다 더 나빴다”고 말하며 동맹이어도 미국이 손해 보는 일은 더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재차 명확히 했습니다.전 세계는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1월 취임하고 8개월간 초강대국 미국이 외교·통상 무대에서 정책 기조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직접 경험했는데요, 문제는 그가 퇴임한 이후에도 ‘미국 우선주의’ 기조나 관세 정책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는 겁니다.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체이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관세가 미국 산업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고, 기업들도 이 같은 관세 환경에 맞춰 투자 구조를 재편하고 있어 자유무역으로 회귀할 가능성은 낮다고 전망했습니다.이재명 정부는 이렇게 달라진 미국을 상대로 국익을 지켜야 하는데 쉽지 않아 보입니다. 기존처럼 동맹을 우선순위에 놓는다면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처럼 ‘코리아 퍼스트’(Korea First)를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할 것입니다.

2025.08.24 07:00

2분 소요
낡은 건물을 살리는 기술이 도시를 바꾼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우리는 지금 고령 인구만큼이나 노후한 건물과 기반시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산업화와 고도성장기에 우리 사회는 오래된 건물을 보면 무조건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해결책이라고 여겼다. 특히 주거 부문에서는 노후하면 재개발이나 리모델링을 떠올렸고, 이는 돈이 되고 지역에도 도움이 되는 ‘도시 관리의 공식’처럼 작동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조건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재건축초과이익 환수나 각종 규제 때문만이 아니다. 억 단위로 치솟은 공사비 때문만도 아니다.탄소배출 억제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국제적 규범이며, 건축물의 신축·철거 과정에서 발생하는 축적탄소(Embodied Carbon)는 이미 전 세계 CO₂ 배출량의 11%를 차지하면서 골치거리로 지목되고 있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Global Status Report for Buildings and Construction (2021)’에서 “신축 중심의 건축산업 구조로는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경고했다. 각 도시들은 새로 짓는 건축보다 기존의 낡은 건물의 처리가 더 골치가 아프다. 오래된 공용공간과 산업유산의 노후화가 누적되면서, 관리비용이 부담되기 시작했다. 도시재생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이제는 이런 공간들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보다 ‘역할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Adaptive Reuse (한국어로는 ‘적응형 재사용’으로 통용)이며, 이를 구현하는 기술적 수단이 리트로핏(Retrofit)이다.리트로핏은 어떻게 도시전략이 됐는가리트로핏은 1970~80년대 노후 산업시설 개조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으로, 초기에는 설비 교체·보강을 통한 수명연장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기후위기, 디지털 기술, 생태자원 활용이라는 새로운 환경과 결합되면서 이제는 기존 공간의 기능뿐 아니라 가치와 의미를 재설계하는 도시전략으로 진화했다. 최근에는 고단열 창호와 고효율 설비를 적용한 탄소감축형 리트로핏, 3D 스캐닝 및 BIM 설계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통합형 리트로핏, 생태소재를 기반으로 한 생태순환형 리트로핏까지 등장하면서 ‘리트로핏 = 미래도시 기술 인프라’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각 국가의 정책 수준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다. EU는 2020년부터 ‘Renovation Wave Initiative’를 통해 기존 건축물의 리노베이션 비율을 연간 2배 이상으로 높이고 있으며, 미국 정부(GSA) 또한 ‘Historic Building Reuse Program’을 통해 공공시설에 리트로핏 우선 적용 의무제를 도입했다. 선진 도시들은 이미 ‘신축 중심의 프레임에서 전환’하는 단계를 넘어, 이를 도시정책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디트로이트의 미시간 중앙역은 1910년대 자동차산업의 전성기를 상징하던 공간이었지만 1988년 폐쇄 이후 수십 년 동안 방치된 채 황폐화돼 있었다. 전환의 전기는 2018년 포드(Ford)가 이 역사를 매입하면서 마련됐다. 당시 복원 방향은 단순한 ‘산업유산 보존’이 아니라 ‘미래 모빌리티 생태계를 위한 도시거점 조성’에 있었다. 외관은 원형을 유지한 채 내부를 스타트업 오피스와 연구소, 고용훈련센터 등으로 재구성했으며, 기존 철골 구조에는 탄소섬유(FRP) 보강을 적용했다. 대형 천창에는 고단열 투명패널을 설치하고 전체 설계는 BIM 기반으로 진행해 역사성과 첨단 기술의 공존을 구현했다.프랑스 아를(Arles)의 루마 아를(LUMA Arles)은 기존의 19세기 철도정비단지를 예술·MICE 복합 캠퍼스로 전환한 사례다. 산업쇠퇴 이후 오랫동안 유휴공간으로 남아 있던 이 부지는 프로젝트 초기부터 ‘철거’가 아닌 ‘전환’을 핵심 전략으로 설정했고, 기존 석조 공장동은 3D 스캐닝과 디지털트윈 모델링을 통해 보존 구역과 개조 구역을 세밀하게 구분했다. 이후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신축 타워를 기존 동선을 기반으로 입체적으로 삽입하고, 내부 마감에는 해조류 단열판과 소금벽체 등 지역 생태소재를 적용함으로써 산업유산 위에 문화·생태 가치를 덧입힌 전환 전략을 실현했다.캐나다 토론토의 아트스케이프 위치우드 반즈((Artscape Wychwood Barns)는 기존 노면전차 차고를 지역 문화 및 공동체 공간으로 전환한 대표 사례다. 건물 외벽은 기존 형태를 유지하면서 일부 지붕을 개방하여 반(半)옥외형 공공광장을 조성하고, 실내에는 예술가 주거공간과 커뮤니티 키친, 도시정원 등을 복합적으로 배치했다. 동시에 태양열 온수설비와 빗물재활용 시스템, HVAC 리트로핏 등 에너지 성능 개선 기술을 적극 도입함으로써 지역 공동체 활성화와 친환경 전환을 동시에 달성했다. 이 공간은 현재 토론토 시민들의 일상이 모이는 대표적인 지역 거점으로 자리잡고 있다.리트로핏은 더 이상 대안이 아니라 ‘우선 전략’이다리트로핏은 더 이상 ‘건물 수리 기술’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회복하는 전략적 언어다. 실제로 신축 대비 탄소배출은 평균 40~50% 줄고 공시간은 25~30% 단축되며, 지역 고용 및 창업 생태계 유입 등 경제·사회적 파급효과도 입증되고 있다. 문제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보려는 시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노후 건축물과 공간을 여전히 ‘주택’ 중심 혹은 ‘경제성’ 중심으로 바라보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휴 산업단지, 항만부지, 공공 기반시설 등 잠재된 도시 자산을 어떤 전략으로 전환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현재 일부 도시재생 사업에서 적응형 재사용이나 리트로핏 방식이 논의되고 있지만, 여전히 ‘재개발·재건축의 대안’으로 간주될 뿐 정책의 중심으로는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소극적 대안’이 아니라 ‘우선 전략’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다음편에 계속)

2025.08.23 14:00

4분 소요
지방 소멸 위기, ‘우체국·공동캠퍼스’서 답 찾는다 [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와 수도권 집중 현상으로 지방 소멸은 이미 현실화한 위기가 됐다. 한국고용정보원 자료에 의하면 전국 228개 기초자치단체 중 53.1%에 달하는 121개 자치단체가 소멸 위험 지역으로 분류됐다. 고령인구의 비중은 이미 20%를 넘어 초고령사회로 진입했고, 오는 2030년이 되면 25%에 달할 전망이다. ▲저출산 ▲고령화 ▲수도권 인구 집중으로 지방 인구가 빠르게 감소하면서 지역의 필수 행정서비스와 지역 대학의 격차도 가속화하고 있다. 급격한 고령화와 수도권·비수도권 간 인구·경제·사회 양극화는 지역의 쇠퇴를 촉진하고 불균형을 더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지속되는 상황이다.서울과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인구와 지역 청년의 유출은 이미 지역 대학의 위기를 불러왔다.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2025학년도 신입생 모집에서 정원을 채우지 못한 대학의 대부분이 지역 대학이었다. 인구 유출과 인구 감소로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의 혁신역량은 물론 기본적인 서비스 제공 역량도 저하되고 있다. 이미 지방자치단체는 인구 감소로 인한 재정 악화로 필수 서비스 제공에 어려움을 겪는 중이다. 지난해 기준 기초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는 평균 48.6% 수준이다. 지역 현장에서 부족한 복지 인력은 8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지방자치단체는 부족한 인력을 충원할 인건비조차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역의 취약계층을 돌볼 인프라와 인력에 대한 투자 여력이 한계에 직면하면서 지역 주민이 필수적인 행정서비스로부터 소외될 위험마저 제기되고 있다. 복지 사각지대 ‘방파제’로 떠오르는 우체국전국의 우체국은 3336개다. 4만3000여 명의 인력이 우체국 업무에 종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우체국 집배원은 매일 1000만여 통의 우편물을 배달하고, 우체국을 방문하는 사람은 100만명에 달한다. 우체국은 예금, 보험과 같은 금융서비스도 제공한다. 우체국이 보유한 금융 자산은 144조원 규모다. 이제 우체국은 지방 소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복지등기, 치매 환자 보호등기 등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지역의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등기'는 위기 징후가 있는 가구에 안내문을 우편으로 보내면 집배원이 가구를 방문해 생활 실태를 확인하고, 그 결과를 지방자치단체에 알리는 제도다. 부산의 자치구에서 시작된 ‘치매환자 보호등기’ 서비스 이용 시 집배원이 1인 가구 치매 어르신을 방문하고 체크리스트를 작성해 관할 보건소에 전달한다. 지역의 보건소는 방치된 치매 환자를 찾아 의료적 지원을 제공한다. ‘안부살핌 소포’는 지방자치단체가 사회적 고립 가구를 돕는 사업인데, 집배원이 생활용품이 담긴 소포를 취약계층에 정기적으로 배달한다. 우체국은 지방자치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삶에 필수적인 다양한 생활밀착형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저출산과 고령화, 인구 유출로 인해 지방 소멸 위기에 직면한 지역에서는 우체국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필수적이다. 우체국 집배원은 우편이나 택배를 배달하기 위해 지역의 구석구석을 다닌다. 지역 취약계층을 발굴하고 촘촘하게 지원하기 위해서는 지방자치단체뿐 아니라 지역 우체국과의 협력을 기반으로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한다.우체국을 활용한 서비스는 복지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체국은 환경 및 폐기물 분야에서도 활약한다. 최근에는 우체국을 통해 폐의약품을 회수하는 사업을 통해 유효기간이 지나 버려지는 약품을 에코 우체통을 통해 수거하는데, 약 50개의 지방자치단체가 우체국과 협약을 맺고 있다. 우체국은 민간 커피 캡슐 업체와 협약을 체결하고 커피 찌꺼기를 제거한 빈 커피 캡슐을 수거 봉투에 담아 우편으로 보낸다. 이를 통해 대부분 버려지던 커피 캡슐을 민간 업체가 회수해 친환경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섬이나 산간 지역과 같이 접근이 제한된 지역에서 우편물을 배달하는 집배원은 가스 안전 점검도 수행한다. 우체국은 식품의약품안전처와 협약을 맺고 불량 식품 신고 증거품을 우체국 소포로 접수하는 사업도 한다. 고령 운전자 자진 면허 반납 업무 대행, 장애인 등 취약계층 대상 공익보험 상품 운용 등 우체국은 사회안전망의 취약한 부분을 메워가고 있다. 우체국 서비스와 인프라를 활용해 초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인한 필수 서비스의 공동화 문제를 보완하는 것이다.지자체·공공기관·기업 등 협력해 우체국 서비스 확대해야우체국은 기존의 우체국 인프라, 인력, 네트워크를 활용해 다른 중앙부처와 지방정부와 벽을 허물고 있다. 지방 소멸 위기로 인한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우체국의 역할과 기능이 확대되는 이유는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하거나 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예산 등의 자원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기 때문이다. 우체국이 제공하는 사회 서비스는 이미 여러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일부 서비스는 보편화되고 있다. 가장 보편화된 서비스는 우체국이 다른 정부 부처를 대신해 연금, 복지급여 등을 지급하는 일이다. 만국우편연합에 따르면 이미 60개국 이상에서 우체국이 정부 서비스 대행 기능을 맡고 있다. 1인 가구 어르신을 대상으로 건강 상태 등을 확인하고, 가족에게 안부를 알리는 서비스는 일본, 프랑스 등에서 이미 운영 중이다. 집배원이 혼자 거주하는 어르신의 가구를 방문해 안부 확인은 물론 잠시나마 말동무가 되어주면서 사회적 고립감을 줄이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지역의 인구 감소·고령화·공동화는 지역의 재정 역량을 취약하게 할 뿐 아니라 필수적인 행정서비스의 제공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인구가 유출되면서 상점, 병원, 은행 등 삶에 필수적인 인프라와 서비스가 점점 줄어들고 다른 지역과 격차가 생기면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은 다른 지역으로 더욱 빠르게 이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지역의 공동화가 가속화되고 인구 유출을 촉진하는 악순환 구조가 형성된다.지방 소멸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생활에 꼭 필요한 서비스를 지원하고 사각지대를 완화하기 위한 우체국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우체국은 기존의 인프라와 네트워크, 인력을 활용해 기존의 공공 서비스 제공 방식에 새로운 모델을 적용함으로써 필수적인 서비스를 유지한다. 지역 공동화의 가속화로 인한 지역의 삶의 질 저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 장치로도 기능한다. 우체국 인프라와 네트워크를 활용한 행정서비스와 필수적인 생활 서비스는 다양한 분야로 확장할 수 있다. 우체국은 지방 소멸 위기에 직면한 지역에서 삶에 필수적인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한 방파제가 돼야 한다.지방 소멸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일부 지역 혹은 기관과 협력관계를 맺고 우체국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전국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우체국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전국 단위로 확대하면 추가적인 비용을 절감하고 재정이 취약한 지방자치단체도 적은 비용으로 우체국과 협력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수 서비스를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해당 서비스의 소관 부처는 물론 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민간기업 등과 다양한 협력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현재 우체국을 총괄하는 우정사업본부의 기능과 위상을 개선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내 ‘본부’ 조직으로는 타 부처와의 적극적인 협업이나 자율적인 정책 운영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우체국이 공공성을 유지하면서도 행정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라스트 마일 플랫폼’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독립 외청인 ‘우정청’으로의 승격 등 독립적인 기능과 권한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우정사업본부 체제의 우편 및 금융 영역을 넘어 우정청으로의 승격을 통해 복지·행정·환경 등 복합 정책 집행의 다양한 행정서비스를 종합적으로 담당하도록 역할과 기능이 부여돼야 한다. 공동캠퍼스, 지역 혁신·활성화 기회 제공지역의 인구 유출이 초래할 지방공동화와 필수 서비스 사각지대를 최소화하기 위한 우체국의 역할이 필요조건이라면, 공동캠퍼스 모델은 지역을 혁신하고 활성화하는 성장 동력으로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충분조건이다. 공동캠퍼스는 한 부지에 여러 대학이 함께 입주해 교육 및 생활시설을 공유하는 모델이다. 학령인구가 감소하고 새로운 인프라에 투자할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여러 대학이 공동캠퍼스에 모여 자원을 공유하고 인재를 함께 양성한다. 여러 대학의 교수와 연구원, 학생이 하나의 캠퍼스에 모이면서 협력이 촉진되고 창의적 아이디어를 발굴할 기회가 많아진다. 작년 9월 문을 연 세종 공동캠퍼스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캠퍼스다. 2025년 현재 세종 공동캠퍼스에는 ▲서울대학교 ▲한국개발연구원(KDI) 정책대학원 ▲국립한밭대학교 ▲충북대학교 등 국·공립대학이 입주 중이며, 오는 2028년 이후에는 분양형으로 개교하는 대학이 참여할 예정이다. 세종 공동캠퍼스에 참여하는 대학의 교육과정은 각 대학의 고유한 학사제도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공동캠퍼스 내 강의실·도서관·기숙사·식당 등의 인프라는 입주한 대학이 공동으로 활용함으로써 시설에 새롭게 재원을 투입할 필요성이 줄어든다. 대학은 인프라에 투자할 재원을 이용해서 혁신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하거나 우수한 인력을 유치할 수 있다. 인프라의 공동 활용을 통해 시설 운영의 효율성을 도모하면서도 교육 및 연구 역량 강화를 위해 더 많은 재원을 투자해 입주 대학의 경쟁력 향상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공동캠퍼스를 중심으로 여러 대학이 한 지역에 모여 자원과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새로운 교육·연구 네트워크를 구축해 발전을 위한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 공동캠퍼스에 모인 대학 간 협력을 통한 혁신적인 교육과 연구 활동은 학생을 끌어들일 기회가 될 것이다. 입주한 대학 간 협력을 바탕으로 공동캠퍼스가 활성화되면 지역·산업과 다양한 협력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여러 대학이 하나의 공간에 물리적으로 모여 있다는 건 대학 간, 대학·산업 간 의미 있는 ‘벽 허물기’와 실질적인 협력에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대학별로 다양한 전공 분야의 교수가 모여 새로운 혁신 방안을 모색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필요로 하는 산업과 협력할 기회도 많아질 것이다. 세종 공동캠퍼스 모델을 통해 고등교육의 벽 허물기가 실현된다면 대학과 대학 간의 협력과 대학을 비롯한 지역, 산업과의 협력도 자연스럽게 실현될 수 있다. 지역에 인재가 모여들고 경제, 사회, 산업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활력이 생길 것이다. 세종 공동캠퍼스의 경우 입주 대학뿐 아니라 입주하지 않은 대학과도 공동 교육과정을 개설해 학점 교류를 추진하는 등 벽 허물기 기반의 고등교육 혁신이 캠퍼스를 넘어 지역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日 히비키나다, ‘학술연구도시’로 고령화 문제 극복일본, 미국 등에서 공동캠퍼스 모델은 고령화, 인구 유출 등 지역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 창출에 기여한 바 있다. 일본 기타큐슈시 히비키나다 지역에 조성된 학술연구도시가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의 지방자치단체가 주도해 조성된 이 캠퍼스는 ▲기타큐슈대 ▲규슈공업대 ▲ 와세다대학 분교 등 3개 대학이 입주하면서 시작됐다. 이들 대학이 강의실, 실험실 등 시설을 공유하고 민간 연구소와 연구 기관을 유치하면서 산학연 연구도 활성화됐다. 이 지역에 공동캠퍼스가 조성되기 전까지만 해도 히비키나다 지역은 고령화 문제를 겪고 있었다. 공동캠퍼스가 조성되고 대학·기업·연구 기관 등이 입주하면서 정주하는 청년 인구가 늘어났다. 캠퍼스 주변에 상업시설과 문화시설이 개발돼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면서 히비키나다 지역은 새로운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이는 대학이 단순한 교육기관의 역할과 기능을 넘어 대학과 대학 간, 대학과 기업 간의 벽을 허물고 협력함으로써 지역의 사회·경제가 다시 활성화되고 청년 인구가 꾸준하게 유입된 사례다. 세종 공동캠퍼스를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세종 공동캠퍼스가 자리를 잡으면 지역의 학생이 우수한 교육을 받고, 외부의 인재도 유치할 수 있다. 학생이 모이고 재학생이 늘어나면 주변의 상권이 살아난다. 공동캠퍼스를 둘러싼 지역에 활력이 생기면 청년 인구가 증가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될 것이다. 공동캠퍼스 기반의 대학 간 협력을 통해 전통적인 대학 모델로는 양성하기 어려운 인재를 배출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산업을 성장시키며 지역을 혁신한다면 지역의 소멸 위기는 자연스럽게 극복 가능하다. 세종 공동캠퍼스 모델이 성공적으로 안착함으로써 유사한 인프라와 운영 모델이 여러 지역에 확산할 것이다. 이런 미래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다. 단일 캠퍼스를 전제로 한 현재의 고등교육법 체계는 공동캠퍼스에 적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여러 대학이 세종캠퍼스에 입주해 국가가 소유한 부지와 시설을 공동으로 이용하고 있으나 캠퍼스 운영 책임과 유지·관리, 수익 활용을 위한 규정과 기준 등은 사실상 부재한 상황이다. 민간 운영자를 유치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권한과 책임이 모호해 법적 장애가 발생할 우려도 존재한다. 운영 주체의 법적 지위도 장애가 될 수 있다. 공동캠퍼스 운영 주체인 ‘세종 공동캠퍼스 운영법인’은 민법상 비영리 재단법인, 공익법인으로 등록된 상황이다. 고등교육법, 국유재산법에 따른 별도의 법적 지위나 특례 규정이 없어 국고 보조금을 지원받거나 재정지원사업의 주체가 되기에는 법적인 제약이 있다. 운영법인은 부지와 시설의 운영 관리를 위탁받고 있고, 입주 대학과는 개별적인 협약이나 사용계약을 통해 연계돼 통합적인 법적 주체가 되는 데에 한계가 있다. 이러한 사유로 운영법인을 통한 공동 교육과정 운영이나 기업 유치를 기반으로 한 지역 산업 혁신 등 공동캠퍼스의 적극적 활용은 구조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지방 소멸의 해법은 단순히 인구를 늘리는 데 있지 않다. 지역 주민이 지역에 머무를 수 있는 안정적 환경이 제공되고, 그 지역에 거주할 수 있는 낙관적인 미래가 제시돼야 한다. 지방 소멸 위기 극복을 위한 대책은 지역의 자생력을 높이면서도 생활의 질이 꾸준히 향상되는 종합적인 방안이 돼야 한다. 우체국의 인프라와 인력을 활용한 복지와 행정 사각지대 해소는 지방의 인구 감소와 쇠퇴의 가속화를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세종 공동캠퍼스 모델은 지역·산업·대학 간의 협력을 기반으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자생력을 키워주며, 지역의 미래 비전을 실현하는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정책만으로 장기적으로 누적된 인구 감소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하고 지방 소멸의 위기를 극복할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방 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자생력을 키워주는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우체국을 활용해 행정·복지 사각지대를 최소화하고 전국적인 지방 소멸 위기에 대응하면서, 공동캠퍼스 모델을 활용해 정부·지역·대학·산업이 벽을 허물며 꾸준히 협력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필자는 행정개혁시민연합 상임집행위원장, 국가보훈처 자체평가위원장, 한국행정개혁학회 회장, 우체국공익재단 이사 등을 지낸 행정개혁 전문가다. 한국외대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미국 뉴욕주립대(올바니)에서 조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2년부터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교무처장·기획협력처장·산학협력단장 등을 역임했다. 2020년 2월 제10대 총장으로 취임한 데 이어 2023년 연임에 성공하며 제11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현재 한국행정개혁학회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2025.08.23 13:00

9분 소요
내신 1등급, 모두 의대로…2025학년도 최상위권 진학 흐름 살펴보니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2025학년도 대학 입시는 의대 정원 확대라는 변수가 주요하게 작용했다. 정부가 반도체·첨단학과 등 이공계 집중 육성정책을 발표하는 한편, 의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대 모집 정원을 크게 늘리면서 상위권 학생들의 진학 흐름에 변화가 있었는지에 관심이 집중됐다.이런 상황 속 최근 각 대학들은 수시 전형 합격자 발표와 함께 학과별 내신 합격선을 공개했다. 전국 176개 대학에서 공개된 내신 등급 70%까지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상위권 학생들의 선택은 뚜렷했다. 내신 1등급 합격선은 의약학계열내신 1.0등급을 합격선으로 제시한 학과는 단 6곳에 불과했는데, 모두 의대·한의대·약대 등 의약학계열이었다. 자연계 일반학과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들 학과 모집인원은 총 79명으로, 사실상 내신 만점을 받은 학생 79명이 전원 의약학계열로 향한 셈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의대가 49명(62.0%), 약대가 25명(31.6%), 한의대가 5명(6.3%)이었다.내신 1.1등급까지 확대해 보면 합격선 학과는 22곳, 모집인원은 312명이었다. 이 중 297명(95.2%)이 의약학계열, 일반학과는 15명(4.8%)에 불과했다. 세부적으로는 의대가 267명(85.6%)으로 압도적이었고, 약대 23명(7.4%), 치대 7명(2.2%) 순이었다. 내신 최상위권 학생들이 일반학과보다는 의약학계열을 최종 선택한 흐름이 분명히 드러난다.1.2등급에서는 42개 학과에서 756명이 합격선에 걸렸는데, 이 가운데 658명(87.0%)이 의약학계열, 98명(13.0%)이 일반학과였다. 756명 중 의대 진학자는 508명(67.2%)으로 압도적이었고, 약대 58명(7.7%), 한의대 42명(5.6%), 치대 28명(3.7%), 수의대 22명(2.9%)이 뒤를 이었다.1.3등급 구간은 62개 학과, 830명이었으며, 이 중 550명(66.3%)이 의약학계열이었다. 세부적으로 의대 346명(41.7%), 약대 80명(9.6%), 수의대 61명(7.3%), 한의대 39명(4.7%), 치대 24명(2.9%) 순이었다. 280명(33.7%)만이 자연계 일반학과를 택했다.1.4등급에서는 68개 학과, 908명 중 648명(71.4%)이 의약학계열로 진학했다. 의대는 310명(34.1%), 약대 177명(19.5%), 치대 59명(6.5%), 한의대 55명(6.1%), 수의대 47명(5.2%)이었다.1.5등급까지 내려가면 70개 학과, 885명 중 584명(66.0%)이 의약학계열을 선택했다. 의대가 323명(36.5%)으로 여전히 최다였고, 약대 83명(9.4%), 치대 67명(7.6%), 수의대 66명(7.5%), 한의대 45명(5.1%) 순이었다. 일반학과는 301명(34.0%)에 그쳤다.자연계 일반학과 중에서는 서울대 지역균형 수학교육과와 전기정보공학부가 각각 1.10등급을 합격선으로 기록했고, 컴퓨터공학부(1.11), 통계학과(1.15), 생명과학부·수리과학부·항공우주공학과(각 1.18) 등이 뒤를 이었다. 연세대 추천형 첨단컴퓨팅학부, 화공생명공학부, 생명공학과 역시 1.18~1.19등급으로 최상위권을 형성했다.내신 1.0등급 학과는 가톨릭대 지역균형 의예과, 경희대 지역균형 의예과, 건양대 일반학생(면접) 의학과, 순천향대 교과우수자 의예과, 대전대 혜화인재 한의예과, 덕성여대 학생부 100% 약학과 등 6곳이었다. 인문계도 최상위권은 의학계열인문계에서도 최상위권은 의학계열이 차지했다. 경희대 지역균형 한의예과(인문)가 1.04등급으로 인문계 전체 최상위였고, 서울대 지역균형 경제학부(1.11), 사회학과(1.12), 영어교육과(1.13), 대구한의대 일반전형 한의예과(인문, 1.13), 국어교육과(1.14), 세종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1.15),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1.16), 서울대 정치외교학부(1.21), 경영대학(1.22) 등이 뒤를 이었다.결국 2025학년도 수시 내신 합격선 기준으로 보면, 최상위권 학생들은 이공계 일반학과보다 의대, 약대, 치대, 한의대, 수의대 등 의약학계열을 압도적으로 선택했다. 내신 만점인 1.0등급 학생들은 100% 의약학계열로 진학했고, 인문계에서도 최상위 학과는 경희대 한의예과였다.1.2등급 이내 구간에서는 의대 쏠림 현상이 뚜렷했고, 1등급 중반대에서도 약대·치대·수의대 등 의약학계열 선호가 자연계 일반학과보다 높았다.2026학년도에는 의대 정원이 일부 축소될 예정이지만, 여전히 의대뿐 아니라 의약학계열 전반에 대한 상위권 학생들의 선호는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일반학과가 이를 능가하기 위해서는 의대와 맞먹는 취업 문호 확대, 평생직업 보장 수준의 질적 일자리 등 획기적 여건 변화가 뒷받침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25.08.23 08:00

3분 소요
‘AI 골든타임’...기술주권과 안보 위한 전략적 설계는 [스페셜리스트 뷰]

산업 일반

대한민국 정부가 발표한 100조원 규모의 인공지능(AI) 투자 계획은 단순한 산업 육성책을 넘어, 미래 국가전략의 핵심축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시그널이다. 특히 대통령실에 신설된 ‘인공지능 미래기획수석’ 직제는 그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한다. 초대 수석으로 임명된 인사가 민간 기술 기업인 네이버 출신의 AI기술 전문가라는 점은, 이제 AI가 일부 과학기술 부처의 영역을 넘어서 대통령실이 직접 조율하는 전략 자산으로 격상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여러 실패, 타산지석 삼아야문제는 이제부터다. 인공지능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예산과 선언만으론 부족하다.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기준을 세우며, 어디로 향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적 설계와 전면적 제도화가 시급하다. 단순한 기술 발전이 아닌, 기술을 통해 국가 안보와 기술주권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때다.우리는 과거에도 여러 기술 패러다임 전환기를 겪는 가운데 여러 실패 사례를 가지고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실패 사례는 '디지털 뉴딜' 정책의 한계에서 찾을 수 있다. 정부는 2020년 이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데이터 댐, 클라우드 전환, 비대면 인프라 구축 등을 추진했으나, 결과적으로 민간 주도의 자율적 혁신 생태계 조성보다는 행정적 사업 위주로 흐르며 실질적 경제효과 창출에 미흡했다. 규제 개혁은 느렸고, 산업계와의 조율도 부족했다. AI 학습용 데이터 구축 사업은 양은 많았으나 질적 관리와 연계 산업 육성이 따라주지 못했다. 이는 단순한 투자 규모보다 '무엇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다.또 다른 사례로, 과거 정보보안 산업을 육성하려 했던 정부의 정책들도 유사한 패턴을 보였다. 2000년대 초반부터 사이버 보안 위협이 현실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주도 보안 산업 육성 전략은 대부분 관 주도 중심으로 한정되었고, 민간 전문기업의 자생력 강화에는 실패했다. 당시 '보안인증제'와 같은 규범은 혁신을 유도하기보다는 오히려 기업의 진입장벽으로 작용해 시장의 다양성을 위축시켰다. 이와 같은 과거의 실패사례들은 현재 추진하고자 하는 AI 정책에서 반드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오늘날 인공지능은 더 이상 산업 생산성을 높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 안보를 지키는 첨단 방패이자, 기술주권의 향방을 결정짓는 핵심 열쇠가 됐다. 미국은 정보기관, 국방부,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구글·오픈AI와 같은 민간 빅테크 기업이 삼각 편대를 구성해 국가 AI 전략을 집행한다. 이 과정에서 ‘AI 안전성 원칙’과 ‘인간 개입’(Human-in-the-Loop) 원칙을 제도화해, AI가 인간의 통제와 윤리적 경계 안에서 작동하도록 설계했다. 중국은 AI를 국방과 사회통제 전반에 깊숙이 이식해 ‘디지털 통제 국가’를 사실상 완성 단계로 끌어올렸다. 방대한 데이터 확보를 위해 ‘디지털 실명제’를 강제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 통합 데이터 플랫폼을 운영함으로써 사회·경제 전 영역에서 AI의 전면적 적용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AI법'(AI Act)을 제정해 위험도 기반의 규제 체계를 마련했다. AI의 윤리성, 투명성, 설명 가능성을 법률로 강제하는 세계 최초의 포괄적 입법으로, 단순한 기술 관리가 아닌 가치·인권 기반의 AI 거버넌스를 구현하려 하고 있다. 일본은 민관 합동의 AI 전략회의를 통해 초거대 AI 모델 개발과 글로벌 표준 설정 참여를 병행하며,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자금·세제 지원 패키지를 별도로 마련했다. 이러한 정책은 기술 자립과 동시에 국제 무대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깔려 있다. 이스라엘은 ‘스타트업 네이션’이라는 별명답게, AI를 국가 생존전략의 최전선에 배치하고 있다. 국방부, 모사드 등 정보기관, 그리고 방산·사이버 보안 분야 스타트업이 유기적으로 연계된 국방·산업 일체형 AI 생태계를 운영한다. 특히 실전 환경에서 검증된 자율무기·드론·감시분석 AI 기술을 민간과 공유하는 '이중용도(Dual-Use) 전략’을 통해, 군사기술을 상업화하고 동시에 민간기술을 국방에 신속 반영한다.반면,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와 통신 인프라, 뛰어난 AI 인재를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전략으로서 AI를 조직화하는 능력에서는 아직 후발주자다. 각자도생 AI...정부 역할 커져AI 스타트업은 민간에서 각자도생하고 있는 상황이고, 정부 연구·개발(R&D)는 부처별로 분산돼 있으며,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규제는 산업의 발목을 잡는다. 이런 구조 속에서 새로 취임한 인공지능 미래기획수석의 역할은 결코 상징에 그쳐서는 안 된다. 기술은 민간에 있고, 권한은 정부에 있으며, 리스크는 결국 국가가 짊어져야 한다. 이 세가지 축을 아우르고 전략적으로 결집시킬 컨트롤 타워로서 대통령실이 제 역할을 하느냐에 향후 10년의 기술 주권이 달려 있다. 최근에 국가대표 AI 기업으로 5대 AI 파운데이션 모델 정예팀이 확정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임에는 분명하다. ▲옴니 파운데이션 모델 ▲글로벌 프런티어 파운데이션 모델 ▲트랜스포머 기반 초거대 모델 ▲멀티모달 생성용 파운데이션 모델 ▲프런티어 AI 모델 등 미국·중국 등에 맞설 수 있는 국가 AI 기술 내재화를 위한 핵심사업이다. 그러나, 이 구상이 성공하려면 정치·행정적 간섭의 최소화, 성과중심의 관리, 글로벌 벤치 마크 등 인공지능 미래기획수석의 역할이 중요하다.AI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성장한다. 알고리즘과 컴퓨팅 파워에 더해 데이터의 양과 질이 AI의 수준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 데이터의 대부분은 개인정보, 기업 기밀, 국가 기반시설 정보 등 민감한 성격을 띠고 있다. 한국은 디지털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사이버보안에 있어선 여전히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공공기관의 클라우드 전환은 보안보다 속도가 우선시되고 있으며, 민간 플랫폼의 데이터 활용 기준도 제각각이다. 이 상황에서 AI 활용이 보다 확대된다면, 국가 정보망 전체가 해킹·유출·오남용에 노출될 가능성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유럽은 유럽 일반 개인정보보호법(GDPR)을 통해 데이터 주권을 명문화하고 있고, 미국은 ‘국가 AI 전략’의 핵심 축으로 데이터 보호를 설정했다. 한국도 이제는 기술 개발 단계를 넘어, 데이터 보호와 활용을 동시에 아우르는 국가 차원의 ‘AI 데이터 주권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인공지능 미래기획수석실은 민간 클라우드 기업, 보안 기술사, 공공기관을 포함한 관련 전문가 협의체를 구성해, 민간의 민첩함과 정부의 권한을 함께 묶어내야 한다. 기술은 혁신이지만, 보안은 생존의 문제다. 기술 발전의 이면에 있는 위험 요소를 관리하지 못하면, 미래 산업의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 아울러, AI는 국방의 패러다임도 바꾸고 있다. 드론, 지상·해상 국방로봇, 지능형 의사결정 지원 시스템 등은 전장에서 사람을 대체하거나 보조하고 작전 결정을 지원하는 핵심 전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AI를 활용한 작전지휘결심의 속도는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수단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여기엔 분명한 원칙이 필요하다. 통제권은 반드시 인간에게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미국은 AI를 국방 분야에 도입하되, '인간 통제권 유지'(Human-in-the-Loop) 원칙을 엄격히 고수한다. 어떤 경우에도 AI의 판단이 인간의 결정을 대체해서는 안되며, 인간이 최종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이다. 기술이 통제 없는 속도로 확장될 경우, 터미네이터와 같은 자율살상무기(LAWS) 등의 위험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한국은 국방 AI를 본격 운용하기 이전 단계에 있지만, 바로 지금이야말로 윤리·법적 기준을 설계할 최적의 시점이다. 인공지능 수석실은 국방부·과기정통부·인권위와 협력해, ‘군사 AI 윤리 원칙’과 운용 가이드라인 등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기술은 가속되지만, 윤리와 통제는 속도가 늦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바로 정부의 역할이다. 국경 없는 기술 AIAI는 국경 없는 기술이다. 아무리 우수한 기술을 개발해도, 국제 사회가 인정하는 윤리와 규범을 선도하지 못하면 글로벌 경쟁에서 밀려난다. 특히 AI는 알고리즘 편향, 프라이버시 침해, 감시 도구화 등 부작용이 빠르게 드러나고 있다. 유럽은 AI법(AI Act)을 제정했고, 미국은 AI 안전성 검토와 기술 기준을 글로벌 기업과 함께 수립 중이다. 반면 한국은 아직 기술은 뛰어나지만 글로벌 규범 설정 과정에선 주변부에 머물고 있다.이제 우리도 안보의 관점에서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한국형 AI 윤리 기준과 기술 가이드라인을 정립하고, 이를 국제사회와 공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글로벌 규범 설정 과정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오늘날 국제사회가 핵 보유국과 미보유국의 레짐으로 나뉘는 것처럼, AI의 글로벌 규범 설정 과정에서의 주도적인 역할은 미래 우리 안보에 있어서 그 같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AI는 국민 생활과 직결된 영역에서도 이미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금융, 의료, 교육, 행정 등 일상 전반에 AI 서비스가 접목되면서, ‘편의’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알고리즘이 국민 개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따라서 AI가 생성하는 결정 과정이 얼마나 투명하며, 시민의 기본권을 어디까지 보장하는지가 앞으로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이에 따라 AI 책임소재와 피해구제 방안 마련, 알고리즘 설명 가능성과 거버넌스 구조에 대한 국민적 논의가 필요하다. AI 기술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기술의 진보는 사람 중심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결론적으로,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AI 인프라와 인재를 갖췄다. 하지만 AI는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전략의 문제이자, 통제의 문제이며, 결국 국가 안보와 주권의 문제다. 기술은 쓰는 사람과 제도가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무기가 될 수도,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새롭게 출범한 정부의 100조원 규모의 AI 분야 투자, 그리고 인공지능 미래기획수석의 신설은 이 시대 흐름에 대한 대응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이 단지 ‘신기술을 챙기는 기회와 자리’로 그친다면 오히려 책임만 커지고 성과는 없을 것이다.지금부터는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전략, 민관이 함께 책임지는 체계가 필요하다. 민간 기업의 창의성과 속도, 정부의 규제력과 책임성을 접목시키는 새로운 거버넌스 체계를 설계해야 한다. 지금이 바로 대한민국 AI 정책의 골든타임이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는 기술은 있지만 주권은 없는 ‘디지털 종속국’이 아니라 미래를 선도하는 ‘디지털 선도국’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차도완 교수는_국방대학교 국방AI/로봇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무인체계연구실을 운영하면서 석·박사 과정 학생들과 함께, AI, 지능형 드론, 지능형 로봇 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로봇공학, 제어공학, 드론공학 등 무인시스템과 관련한 주요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국방로봇학회의 총무부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국방로봇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정책적 제언, 연구활동을 하고 있으며 AI, 로봇, 드론 등에 대한 다양한 자문활동을 하고 있다.

2025.08.17 13:00

7분 소요
이재명 대통령의 산재와의 전쟁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건설 현장 자체가 위험한 곳이다. 사고가 나지 않으려면 공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안전 시설이나 교육을 강화해도 노동자가 말을 안 듣는다. 더워서 안전모 쓰기 싫다고 해서 작업하지 말라고 하면 행패를 부린다.” “안전 지시 이행하지 않는 노동자도 처벌해야 공정한 것 아닌가?” “안전사고 원인을 무조건 기업주 책임으로 귀결 지으려는 게 문제다.”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여름휴가 복귀 첫 일성으로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산재) 사망 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하자 건설업계 관계자들이 쏟아낸 말들입니다. 이 대통령이 건설업계를 콕 찍어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최근 포스코이앤씨, DL건설 등 건설사에서 연이어 산재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서 건설 현장이 ‘산재 사고 온상’으로 지목돼 업계가 바짝 긴장했습니다. 한 건설사 임원은 “본사 임원들이 매일 현장을 나가서 안전 점검을 하고 있다”며 “사고가 나면 어쩌나 조마조마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사고 대응도 빨라졌는데요, DL건설은 지난 8일 아파트 신축 공사 현장에서 추락사가 발생하자 3일 만에 대표이사와 최고안전책임자(CSO)를 비롯한 임원진·팀장·현장소장 등 80여명이 사표를 제출하고 44곳에 이르는 모든 현장의 작업을 중지했습니다. 이전에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신속하고 파격적인 조치입니다. 정부 당국도 이 대통령이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하자 모든 법적, 행정적 수단을 동원하는 총력 대응에 나섰습니다. 건설 면허 취소와 공공입찰 금지, 금융제재 등 강력한 처벌로 산재 발생 시 경제적 손해를 본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올초부터 최근까지 산재 사망 사고가 연이어 발생한 포스코이앤씨의 경우 건설 면허 취소, 공공입찰 금지 및 징벌적 배상제 등 강력한 제재 방안이 검토되고 있어 이재명 정부의 ‘산재와의 전쟁’ 첫 고강도 제재 사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이 연일 산재 근절을 얘기하는 것에 대해 정권 초기 노동계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겠냐며 ‘직보 지시’도 보여주기식 메시지로 보기도 합니다. 사실 국내외 이슈를 모두 챙겨야 하는 대통령이 전국에서 벌어지는 산재 사고를 일일이 챙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부 삐딱한 시선처럼 ‘정치적 액션’이라고 해도 산재 사고에 대한 기업과 노동자 등의 경각심이 높아지고 안전 시설 및 시스템이 개선돼 사고가 줄어든다면 잘한 일입니다.그런데 현재까지는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며 ‘쇼’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 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산재 사고 사망만인율)은 1만명당 0.39명인데요, 이를 OECD 평균인 1만명당 0.29명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 이재명 대통령은 반복되는 산재 사망 사고에도 비용을 아껴 잇속을 챙기겠다는 기업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손해를 안기겠다는 계획입니다. 산재 때문에 막대한 손해가 나 봐야 비용을 안 아끼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또 다른 건설사 임원은 “이 대통령의 생각처럼 해서 산재가 줄어들면 정말 좋겠다”면서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기업에 채찍만 휘두르는 게 아니라 ▲불법 하도급 관행 ▲외국인 노동자와의 언어 장벽 ▲고령화 등 구조적인 문제도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2025.08.1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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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은 왜 그렇게 빨리 실패하는가[실리콘밸리의 사람들]

전문가 칼럼

"실리콘밸리에서는 실패가 칭찬받는다. 한국에서는 숨겨야 한다."2024년 한 국내 대기업 임원이 던진 이 말은 한국과 실리콘밸리의 본질적 차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네이버의 한 신사업 담당자는 "3년간 준비한 프로젝트가 출시 6개월 만에 중단됐는데, 사내에서는 이를 '실패'로 기록했다"며 "같은 상황이라면 구글은 '빠른 학습'으로 평가했을 것 것"이라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에서 투자 받은 스타트업 중 상당수가 2~3년 내 피벗하거나 사업을 중단한다. 하지만 이를 '실패율'이 아니라 '학습 속도'로 평가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실패는 여전히 '낙인'이다. 한 번 실패하면 재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구조에서, 스타트업도 신사업도 완벽한 준비가 끝날 때까지 시장에 나오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출시는 늦어지고, 시장 변화에 뒤처지며, 투자 타이밍을 놓친다.실패를 설계한다는 것실리콘밸리의 'Fail Fast’(빨리 실패하라)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철저히 계산된 시스템 전략이다.테슬라는 2008년 로드스터 출시 당시 의도적으로 '불완전한 제품'을 내놓았다. 일론 머스크는 "완벽한 전기차를 만들려고 했다면 아직도 개발 중일 것"이라며 "시장의 피드백이 가장 정확한 R&D"라고 말했다. 로드스터는 수많은 결함을 안고 출시됐지만, 이를 통해 얻은 데이터가 모델 S, 모델 3로 이어지는 성공의 토대가 됐다. 저자가 실리콘밸리에서 토요타와 테슬라 협업을 담당자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토요타와 테슬라가 2010년 협업했을 당시 토요타 엔지니어가 테슬라의 기술을 보고 “테슬라 기술은 별거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토요타 엔지니어들도 테슬라의 기술력에 놀란다고 한다. 와이콤비네이터(Y Combinator)는 더욱 체계적이다. 3개월간의 프로그램 동안 스타트업들에게 최소 3번의 '실패 시나리오'를 경험하게 한다. ▲최소 기능 제품(MVP) 출시 ▲초기 고객 피드백 수집 ▲피벗 결정까지의 전 과정을 압축해서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스타트업이 기존 아이디어를 포기한다. 하지만 YC는 이를 '탈락'이 아닌 '조기 검증'으로 본다.폴 그레이엄(Paul Graham) YC 창립자는 "최고의 스타트업 아이디어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창업자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조건이 핵심이다. 남들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아이디어일수록 빨리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성공할 경우 독점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 실패는 비용이 아닌 데이터미국 벤처캐피털들이 실패를 대하는 관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쿼이아 캐피털의 파트너 더그 레온(Doug Leone)은 "우리는 실패한 스타트업에도 감사한다. 그들이 시장에서 검증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미리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023년 실리콘밸리에서 문을 닫은 스타트업 1200여 개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평균 실패 시점은 창업 후 20개월이었다. 이는 2018년 32개월, 2020년 28개월보다 크게 단축된 수치다. VC들이 의도적으로 '빠른 실패'를 유도하고 있다는 증거다.안드레센 호로위츠(a16z)의 공동 창업자 마크 앤드리슨은 "늦게 죽는 스타트업이 가장 나쁘다. 창업자의 시간도, 투자자의 돈도, 시장의 기회도 모두 낭비한다"며 "6개월 내 실패하는 게 2년 후 실패하는 것보다 10배 낫다"고 단언한다.이런 철학 아래 실리콘밸리에서는 실패한 창업자에게 오히려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 트위터 창립자 잭 도시는 첫 번째 회사 실패 후 트위터를, 테슬라 창립자 일론 머스크는 Zip2와 X 실패 경험을 토대로 페이팔을 성공시켰다. 실패는 경험이 되고, 경험은 신뢰가 된다. 한국은 왜 빨리 실패하지 못하는가한국 조직 문화의 가장 큰 문제는 '보고 중심주의'다. 실험하고 실패하는 것보다 실패하지 않을 방법을 찾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네이버의 한 개발팀장은 “새로운 기능을 테스트하려면 ▲기획서 작성 ▲여러 차례의 검토 회의 ▲ 복수의 승인 단계를 거쳐야 한다” 며 "그 시간이면 구글은 이미 출시하고 피드백까지 받았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카카오도 마찬가지다. 내부 직원은 "실험적 프로젝트라도 실패하면 담당자 평가에 반영되기 때문에 모두가 안전한 길만 선택한다"고 말했다.스타트업 생태계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스타트업들은 MVP보다 '완제품'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2024년 국내 스타트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평균 개발 기간이 14개월로 실리콘밸리(6개월)의 2배 이상이었다. "불완전한 제품으로 고객을 만나기 부담스럽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토스조차 초기에는 이런 함정에 빠졌다. 이승건 토스 창업자는 "첫 번째 버전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1년 반을 썼는데, 출시 후 사용자 피드백을 보니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기능들은 아무도 쓰지 않았다"며 "그때부터 2주마다 업데이트하는 방식으로 바꿨다"고 회고했다.더 심각한 문제는 실패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다. 2023년 글로벌 기업가정신 연구(GEM) 등에 따르면, "사업 실패가 새로운 기회의 시작"이라고 답한 한국인은 27%로, 미국(73%), 독일(61%)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실패한 창업자가 재창업하는 비율도 한국은 12%로, 미국(42%)의 약 4분의 1 수준이다.실패를 설계하는 방법빠른 실패를 위해서는 먼저 '실험 설계'부터 시작해야 한다. 구글의 경우 모든 신규 프로젝트에 '킬 크라이테리아(Kill Criteria)'를 미리 정해둔다. 어떤 지표가 나오면 프로젝트를 중단할지를 사전에 합의하는 것이다.구글 글래스가 대표적 사례다. 구글은 2013~2014년 일반 소비자용 글래스를 출시했으나 ▲높은 가격 ▲사생활 침해 논란 ▲기술적 한계 등으로 시장에서 외면 받았다. 결국 2015년 소비자용 제품 개발을 중단하고, 이후 기업용 ‘구글 글래스 엔터프라이즈’로 방향을 전환해 산업 현장 등에서 활용되며 새로운 기회를 모색했다. 구글은 시장 반응과 실사용 데이터를 바탕으로, 소비자용에서 기업용으로 전략을 빠르게 피벗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아마존도 마찬가지다. 파이어폰 실패 후 제프 베조스는 "우리는 매년 수십억 달러 규모의 실패를 할 것이다. 그것이 혁신의 대가"라며 "중요한 것은 실패의 크기가 아니라 실패로부터 배우는 속도"라고 말했다.우리는 얼마나 빨리 실패할 수 있는가실리콘밸리의 성공 비결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가 아니라 '실패를 전략적으로 설계하는 시스템'에 있다. 이제 한국도 조직 내에서 빠른 실패를 설계해야 한다.첫째, MVP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완벽한 제품을 만들려고 하지 말고, 핵심 가치만 담은 최소 기능으로 시장에 나가야 한다. 둘째, 실험과 피벗을 일상화해야 한다. 3개월마다 성과를 점검하고, 기준에 미달하면 과감히 방향을 바꾸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셋째, 실패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 실패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값진 데이터다.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십이다. 경영진부터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 실패해도 괜찮은 것이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모든 프로젝트가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혁신은 멈춘다.마크 저커버그는 말했다. "가장 큰 리스크는 리스크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한국도 실패를 무서워하지 말고, 실패를 설계할 때가 됐다. 빠르게 실패할 수록, 빠르게 성공에 가까워진다.

2025.08.17 10:00

5분 소요
韓 드론 산업 현주소...규제에 발 묶였다 [김기동의 이슈&로(LAW)]

전문가 칼럼

최근 드론 관련 법률 업무를 수행할 기회가 있었다. 법적·행정적 규제에 대한 드론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드론 산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2022년 2월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군사용 드론 기술의 눈부신 혁신을 보여줬다. 전쟁 초기에는 주로 감시와 정찰 목적으로 사용되던 드론이, 이후에는 폭탄을 장착한 ‘자폭 드론’으로 사용되면서 전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조종사와 드론을 광섬유로 연결해 전파방해 작전이 통하지 않는 ‘광섬유 드론’, 야간 투시 카메라를 장착해 야간 전투가 가능한 ‘뱀파이어 드론’ 등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드론들도 속속 전장에 투입되고 있다.새 법적 문제 야기 중인 드론 산업상업용 드론 산업도 가파르게 성장 중이다. 2024년 드론 산업의 글로벌 시장 규모는 약 300억~400억 달러로 추산되며, 매년 10~20%씩 급성장해 2030년에는 최대 900억~1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건설· 농업·물류·공공안전 등 산업 전반에서 서비스형 드론(DaaS, Drone-as-a-Service)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으며, 인공지능(AI)·5G 기반의 자율비행 등 기술 혁신이 핵심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현재 상업용 드론 시장은 중국이 주도하고 있다. 중국은 전 세계 상업용 드론의 70~80%를 생산 및 수출하고 있다. 이에 대응해 미국은 국가 안보와 공급망 안정, 자국 기업 보호를 이유로 중국산 드론에 대한 규제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추세다. 특히 중국 최대 드론 제조업체인 DJI 제품이 주요 규제 대상이다. 지난 7월 6일 트럼프 대통령도 중국산 드론 규제를 강화하고 자국 드론 산업을 지원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드론 기업들에게는 미국 시장을 공략하여 시장 점유율과 경쟁력을 높일 좋은 기회가 마련된 셈이다.국내 드론 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모터, 배터리, 센서, 컨트롤러 등 핵심 부품을 국산화하고, AI와 머신러닝을 활용한 자율비행, 정밀 제어, 데이터 분석 등 고도화된 소프트웨어 기술 개발에도 힘을 쏟아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드론 생태계 구축을 위한 법적·제도적 뒷받침이다. 드론 산업의 급격한 발전은 새로운 법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예컨대 ▲드론으로 촬영·수집된 영상의 개인정보 및 프라이버시 침해 ▲새롭게 개발된 기술과 소프트웨어에 대한 지식재산권 보호 ▲드론 운용 중 발생한 사고에 따른 민·형사상 책임 ▲드론 기반 서비스의 품질·성능 미흡으로 인한 소비자 분쟁 등이 대표적이다.그러나 항공안전법, 항공보안법, 항공사업법 등 기존의 법률은 전통적인 항공기를 상정하고 만든 법이어서 드론과 같은 새로운 비행장치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도 「드론 활용의 촉진 및 기반조성에 관한 법률」(드론법)을 제정해 2020년 5월부터 시행하고 있지만, 드론과 관련해 발생하는 모든 법적 문제를 규율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밖에도 전파법·농지법·하천법·개인정보보호법·군사시설 보호법·국가공간정보 기본법·위치정보법 등 수많은 법률이 드론 산업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어 여러 법률을 체계적으로 해석해 적용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드론에 관한 분쟁 해결 사례가 아직은 충분히 축적되지 않아 명확한 법적 판단 기준을 찾기도 어렵다.법적·행정적 규제의 대표적인 것이 비가시권 비행(BVLOS) 제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종사의 시야 범위를 벗어난 드론 비행이 원칙적으로 금지되고 있으며, 국토교통부 장관의 ‘특별비행승인’을 얻어야만 가능하다. 위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드론의 종류·형식 및 제원, 성능 및 운용한계, 조작방법에 관한 서류, 드론의 비행절차, 비행지역, 운영인력 등이 포함된 비행계획서 등 복잡한 서류를 제출해야 하고, 항공안전기술원의 안전기준 검사도 통과해야 한다. 승인절차에는 짧게는 30일, 길게는 90일까지 소요되기도 한다. 관련 법·제도 신속 정비 필요해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에서는 물류·재난 대응·장거리 관측 등 고부가가치 드론 서비스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상용화를 위한 기술 개발과 실증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최근 미국이 최근 행정명령을 통해 연방항공청(FAA)에 상업용 드론의 비가시권 비행(BVLOS)을 허용하는 규칙 제정을 서두르도록 지시한 것과는 대조적이다.그 밖에도 도심 비행의 원칙적 금지, 복잡한 기체 인증 및 자격증 취득제도, 전파와 GPS의 사용 제한, 정부 부처의 명확한 컨트롤타워 부재 등 드론 기술의 개발과 상용화를 저해하는 규제 요소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한때 우리나라는 드론 산업을 선도할 수 있는 기술적 역량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현재 중국에 뒤처진 상황이다. 드론 기술의 혁신과 드론 산업의 발전 속도를 법과 제도가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똑같은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드론산업이 국가 안보와 경제에 미치는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할 때, 관련 법과 제도를 하루속히 정비해야한다. 산업계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규제 샌드박스 등을 통해 불필요한 규제는 과감하게 폐지해야 한다. 동시에 적극적인 입법과 정책을 통해 국내 드론 산업을 육성하고 지원해야 한다.다행히 최근 들어 정부도 드론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법과 제도의 개선 및 정비에 힘을 쏟고 있지만, 산업 현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범정부적 지원을 획기적으로 강화하여 대한민국이 글로벌 드론 시장에서 강자로 부상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

2025.08.17 09:00

4분 소요
AI 시대의 그림자…해커를 위한 ‘다크 AI’의 등장[한세희 테크&라이프]

전문가 칼럼

오픈AI는 최근 챗GPT를 사용하던 북한 계정을 차단했다. 이들은 영문 허위 위력서와 온라인 프로필을 만드는데 챗GPT를 썼다. 북한은 요즘 해커들을 재택 근무를 하는 프리랜서 IT 개발자로 취업시켜 외화벌이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원격 근무가 일반화되는 추세를 타고 이들은 제3국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위장해 서구권 기업에 취업한 후 북한이나 중국에서 작업한다. 이들이 버는 수익은 핵무기 개발이나 북한 정권 통치 자금 등으로 쓰인다. 때로는 취업한 기업의 정보를 빼돌리기도 한다. UN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가 3월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IT 일꾼들은 연간 2억5000만~6억달러(약 4450억∼8300억원)을 벌어들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중 약 10%만 노동자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90%는 북한 정권이 가져가는 것으로 보인다.생성형 AI가 사이버 범죄 효율 높여이들이 취업 활동을 할 때 곤란한 부분 중 하나가 언어다. 외국어로 전문적 이력서나 프로필을 작성하기란 쉽지 않다. 챗GPT 같은 생성형 AI의 등장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줬다. 초거대언어모델(LLM)은 상황과 맥락에 맞는 완벽한 영어 문장을 얼마든지 만들어낸다. 북한 IT 일꾼들이 해외 기업을 속여 취업해 북한 정권에 통치 자금을 대는 일에 챗GPT가 쓰인 것이다. 이외에도 AI는 이미 세계 곳곳에서 여러 나쁜 일들에 쓰이고 있다. 갈등이 첨예한 국가에서 여론을 조작하거나 민족 간, 정파 간 갈등을 부추기는 활동에 생성형 AI를 조직적으로 활용한다. 오픈AI가 6월 공개한 사례를 보면, 챗GPT를 이용해 가짜 소셜미디어 계정을 만들고 컨설팅 그룹 등으로 위장해 공략 대상에게 보낼 자연스러운 이메일을 만들거나, 외국어로 지역 인권 활동가를 공격하는 게시물을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대량으로 뿌리기도 했다. 당시 오픈AI가 차단한 10개 사이버 공격 중 4개가 중국에 근거를 둔 집단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은 챗GPT로 중국어와 영어, 우르두어로 대만 문제 등에 대한 게시물을 만들어 틱톡이나 X 등에 올렸다. 미국 내 관세 논쟁에 개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챗GPT를 악성코드 스크립트를 수정하거나 멀웨어 침투 과정을 테스트하는 등 악성코드 개발과 확산에 활용하려는 시도도 다양하게 일어났다. 생성형 AI의 탁월한 문장력이나 코딩 역량을 여론조작용 소셜미디어 포스트 대량 생산, 맞춤형 피싱 메일 작성, 악성 코드 프로그래밍 등에 쓰는 것이다. 안전한 AI 내세우지만…탈옥 가능 취약점 상존이를 막기 위해 주요 AI 기업들은 AI를 범죄나 위험한 일, 윤리적으로 어긋나는 일에 쓰지 못하도록 각종 안전 장치를 마련해 뒀다. AI 챗봇에게 “폭탄 만드는 법을 알려줘”라고 직접적으로 요청한다면, AI는 당연히 요청을 거절할 것이다. 하지만 AI와 대화하며 대화의 흐름을 잘 유도하면 AI에게서 원하는 답을 끌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여러 사람과 모험을 떠나는 어떤 세계관을 설정하고 그 맥락 안에서 대화를 이어가면 AI가 모험을 위해 무기를 만들거나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도록 유도할 수 있음을 보인 사례가 있다. AI와 대화하며 미묘하게 유해한 맥락을 심고, 대화를 계속 주고받으며 이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보안 연구팀은 AI에 ‘칵테일’, ‘이야기’, ‘생존’, ‘몰로토프’, ‘안전’ 같은 단어를 포함해 문장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했다. AI는 처음엔 안전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나, 이후 연구진이 대화를 심화시켜 감에 따라 ‘몰로토프 칵테일’을 만드는 법 등을 대답하기 시작했다. 몰로토프 칵테일은 화염병을 뜻한다. AI가 문제없어 보이는 대화 속의 미묘한 맥락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문제를 악용한 것이다. 최근 발표된 오픈AI GPT-5도 공개한지 1주일도 안 돼 이 같은 공격에 뚫렸고, 일런 머스크의 AI 기업 xAI가 만든 그록-4 모델 역시 같은 방법에 당했다. 해킹 최적화 AI 모델의 등장보다 본격적으로 AI를 사이버 범죄에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해킹에 최적화된 AI 모델을 스스로 개발하기도 한다. 기존 AI 모델의 안전 제약을 풀고 악성 코드 작성이나 취약점 분석, 맞춤형 피싱 메일 대량 작성, 탈취한 대량 데이터 분석 등 해킹 공격 전 과정을 자동화한다. 2023년 나온 해킹용 AI 도구 ‘웜(Worm)GPT’가 시초로 꼽히며, 다크바드(Dark Bard), 프로드(Fraud)GPT 등이 잇달아 등장했다. 오픈소스 방식 LLM들이 잇달아 나오면서 해커들이 이들 모델을 변형해 사이버 범죄에 활용하게 만든 것이다. 기존 모델에 의존하지 않고 아예 처음부터 만든 해킹 AI 도구도 있다. 올해 초 등장한 ‘잔소록스’(Xanthorox)는 퍼블릭 클라우드나 API가 필요 없이 자체 로컬 서버에 설치할 수 있어 추적을 피할 수 있다. 악성 코드를 자동 생성하고, 업로드한 이미지나 스크린샷을 분석해 내용을 설명해 주거나 데이터를 분석한다. 고급 추론 기능도 있어 사람처럼 정교하게 피싱 메일을 쓰거나 사회적 공격을 설계할 수 있다. 세르게이 로츠킨 카스퍼스키 아시아태평양 및 중동 지역리서치센터장은 최근 열린 ‘카스퍼스키 사이버 시큐리티 위크엔드(CSW) 2025’ 행사에서 “챗GPT가 출시된 2023년 이후 사이버 범죄자들이 생성형 AI를 활용해 범죄 역량을 높이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며 ‘다크 AI’(Dark AI)의 등장을 경고했다. 이들 생성형 AI 도구는 다크웹에서 연간 90만원 정도에 구독형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다. 개인 맞춤 설정의 경우 연간 800만원 정도이다. 생성형 AI가 업무와 창작의 효율을 크게 높여주고, 구독 방식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일이 사이버 범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AI 시대의 그림자’이다. 우리가 AI를 더 활용하고, AI에 더 의존하게 될수록, AI의 위협도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2025.08.16 13:00

4분 소요
에이피알이 쏘아 올린 작은 공[허태윤의 브랜드 스토리]

전문가 칼럼

2025년 8월 6일. 한국 뷰티업계에 혁명이 일어났다. 창업 10년 남짓한 신생 뷰티 기업 에이피알(APR)이 시가총액 7조9322억원으로 아모레퍼시픽(7조5339억원)을 제치고 업계 1위에 올랐다. 이것은 그저 기업 순위(시가총액 기준) 변화가 아니다. 1945년 창업 이래 80년간 한국 화장품 산업을 이끌어온 아모레퍼시픽, 세계 7위권 글로벌 뷰티 공룡이 창업 10년 갓 넘긴 신생 기업에게 왕좌를 내준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21세기 비즈니스 버전이다. 숫자는 더욱 충격적이다. APR의 2분기 영업이익 846억원은 아모레퍼시픽(737억원)과 LG생활건강(548억원)을 합친 것보다 크다. 영업이익률 25.8%는 기존 화장품 기업들의 5% 대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단순한 기업 순위 변화가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혁신이 구시대 거인들을 무너뜨린 혁명이다.역발상의 시작점-D2C마케팅김병훈은 2014년 온라인 광고업을 하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봤다. 네이버 중심의 광고 모델이 소셜미디어로 넘어가는 전환점, 그리고 유통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을.혁명의 첫 번째 성공은 유통에서 시작됐다. 모든 화장품 회사가 백화점과 면세점 입점을 꿈꿀 때, APR은 정반대 길을 택했다. ▲자사몰 우선 ▲고객과의 직접 접촉 ▲데이터 수집과 분석 등 ‘선 플랫폼 구축 후 아이템 선정’에 힘을 쏟았다. 한마디로 D2C(소비자 직접거래)집중 전략이 APR DNA의 핵심이다. 제품부터 만들고 판로를 찾는 기존 방식이 아니라, 플랫폼을 먼저 구축해 고객을 모으고 그들의 반응을 보며 제품을 개발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APR 은 D2C라는 개념이 업계에 명확하지 않았을 때부터 이 방식으로 제품을 판매했다.그 결과, APR 의 패션브랜드 널디(Nerdy)는 자사몰에서 매출의 50%를 창출하며 중간 유통 마진을 모두 회사가 가져갔다. 경쟁사들이 유통업체 눈치를 보며 가격 통제권을 잃어갈 때, APR은 모든 것을 직접 컨트롤했다.밸류 체인의 내재화김병훈 대표의 광고회사 출신 DNA는 APR 혁명의 결정적 무기가 됐다. 다른 화장품 회사들이 광고비를 외부에 지출할 때, APR은 그 역량을 내재화 했다. 자체 스튜디오 전문 인력을 갖춘 ‘D2C 마케팅 본부’에서 수십, 수백 개의 광고 콘텐츠를 빠르게 제작한다. 실시간 성과 분석으로 가장 효율적인 광고에 예산을 집중하는 데이터 드리븐 마케팅(Data Driven Marketing)을 도입한 것이다.이것은 단순한 비용 절감이 아니다. 광고와 제품 개발, 판매가 하나로 연결된 완전 통합 시스템이다. 고객 반응 데이터가 즉시 제품 기획에 반영되고, 마케팅 메시지가 실제 판매로 직결되는 구조다. 전통적인 화장품 회사들의 분절된 밸류체인과는 차원이 다른 무기였다. 디바이스라는 게임 체인저APR의 세번째 성공요인은 전략 제품 카테고리 자체를 바꾼 것이다. 화장품이 아닌 뷰티 디바이스를 전면에 내세웠다. 100만원대가 당연시되던 뷰티 디바이스 시장에 20-30만원대 제품을 투입했다. '1가구 1디바이스'라는 비전 하에 대중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메디큐브 AGE-R'은 출시 3년 만에 누적 판매량 300만 대를 돌파했다. 2024년 뷰티 디바이스 부문에서만 31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의 발견이다. 디바이스와 함께 사용하는 전용 젤, 크림을 연달아 출시하며 '면도기-면도날' 방식의 지속적 매출 구조를 만들었다. 일회성 판매가 아닌 장기간에 걸친 고객 생애가치 확보에 성공한 것이다.탈중국, 미국 퍼스트네번째 번째 성공 요인은 글로벌 시장에 대한 판단이었다. 모든 K-뷰티 기업이 중국 관광객과 면세점에 목을 맬 때, APR은 처음부터 미국을 겨냥했다. 결과는 극명했다. 2025년 2분기 전체 매출의 78%가 해외에서 발생했고, 미국 시장 비중만 29%로 국내를 앞질렀다. 변동성 큰 중국 시장 대신 안정적이고 프리미엄을 인정받는 서구 시장을 선택한 전략적 혜안이 빛났다. 아마존 프라임데이에서 AGE-R 제품들이 완판되고, 미국 현지에서 직접 유통망을 구축하며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단순 수출이 아닌 현지화 전략의 성공이다.35세 김병훈이 만든 새로운 희망들25세의 김병훈이 시작한 도전이 10년만에 바꿔 놓은 것은 한국 뷰티업계의 패러다임 뿐이 아니다. 광고업계 전체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인공지능(AI)이 광고를 제작하고, 광고주들이 직접 미디어와 거래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광고 대행사 모델이 붕괴되고 있는 와중에 APR이 보여준 것은 한 줄기 빛이다. 유사한 사례로 에코마케팅과 FSN을 들 수 있다. 에코마케팅은 D2C 기업 데일리앤코를 인수해 연 매출 50억에서 1000억으로 성장시켰고, 글루가 투자로 10배 수익을 실현했다. FSN이 ‘링티’와 ‘르무통’이라는 브랜드를 직접 키워내며 브랜드 액셀러레이팅 모델을 완성한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광고산업에서 출발한 산업의 새로운 종(種)들이 탄생하고 있다. 데이터로 고객을 이해하고, 기술로 제품을 차별화하며, 직접 소통으로 브랜드를 키우는 21세기형 뷰티 테크 기업 APR의 혁명은 철저한 준비와 혁신적 사고, 시장 변화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만들어낸 필연의 결과다. APR이 써 내려간 것은 단순한 한 청년의 성공 스토리로 들리지 않는다. ‘개천용’이 나오기 힘든 팍팍한 현실 속, 이 시대 청년들에게 주는 작은 희망이다.

2025.08.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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