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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아 무너지는데 '세금 0%' 금융특구 만든다는 인니 [동남아시아 투자 나침반]

전문가 칼럼

이번에는 최근 논란이 거세지고 있는 인도네시아로 눈을 돌려보려 한다. 아세안 GDP의 3분의 1, 인구 2억 8000만의 시장이다. 그러나 올해 상반기 이 나라에서 벌어진 일은 '성장 스토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루피아는 지난 6월 달러당 1만8000루피아 선을 넘어서며 사상 최저권으로 밀렸다. 5월 초 심리적 마지노선이던 1만7400선이 무너진 지 불과 두 달 만이다. 외국인은 올해 들어 인도네시아 주식을 약 39억달러(5.9조원) 순매도했고, 자카르타종합지수는 한때 30% 가까이 빠졌다. 4월 외환보유액은 1462억달러(219조원)로 2년 만의 최저치다. 루피아를 방어하느라 달러를 쏟아부은 결과다. 피치는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원인은 복합적이다. ▲경상수지 적자 ▲유가 보조금 부담 ▲통화량 증가가 한꺼번에 겹쳤다. 강달러는 방아쇠였을 뿐, 총알은 안에 장전돼 있었다. 신용등급이 실제로 강등되면 조달금리가 오르고 통화가치가 더 밀리는 악순환에 들어선다.불씨는 무상급식(MBG)이었다. 학생과 영유아, 임산부 등 최대 8300만 명에게 매일 한 끼를 제공하겠다는 공약에 정부는 올해 335조 루피아(28조원)를 배정했다. 감당이 되지 않자 5월 268조 루피아(22조원)로 줄였지만, 삭감 후에도 국가 예산의 약 7%나 차지한다. 인프라와 보건 예산을 웃도는 규모다. 여기에 무상급식이 시작된 이후 식중독으로 1만6000여 명이 피해를 봤고, 지난 6월에는 국가영양청장이 급식 예산 비리로 체포됐다. 1분기 재정적자는 전년의 두 배 가까이 늘며 법정 상한인 GDP 대비 3% 룰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자카르타 대학가에서는 “나라가 파산으로 간다”는 구호가 나왔다. 재정 규율이 흔들리자 통화가 흔들렸고, 통화가 흔들리자 자본이 움직였다.돈이 떠나는 진짜 이유는 환율이 아니다씨티그룹·스탠다드차타드·HSBC의 인도네시아 법인은 지난 2년간 6억 4000만달러 (9600억원)를 본사로 송금했다. 같은 기간 순이익을 웃도는 규모다. 번 돈을 현지에 재투자하지 않고 빼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배경에는 프라보워 정부의 국가 주도 경제가 있다. 지난해 출범한 국부펀드 다난타라는 수백 개 국영기업을 관리하며 9000억달러(1350조원) 규모 자산을 굴린다. 다난타라가 100억달러(15조원) 대출을 조달하며 10개 은행에 참여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경계심은 더 커졌다. 투자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낮은 성장률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규칙이다. 성장률이 낮으면 밸류에이션을 낮추면 되지만, 규칙이 흔들리면 계산 자체가 불가능해진다.이미 투자한 기업들의 선택도 갈린다. 배당으로 이익을 앞당겨 회수하는 곳, 증설을 미루는 곳, 지분을 현지 파트너에게 넘기고 라이선스 계약으로 돌아서는 곳이 동시에 나타난다. 철수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뿐, 자본은 이미 조용히 짐을 싸고 있다.규제도 같은 방향이다. ▲국산부품사용비중(TKDN) ▲국가표준(SNI) ▲할랄 인증 의무화 등이 순차적으로 강화됐다. 부족한 세수 확보와 더불어 자원 수출국에서 제조업 국가로 올라서겠다는 방향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속도다. 투자를 결정한 뒤에 규칙이 바뀌면 산업정책이 아니라 리스크가 된다. 기후 변수도 얹혔다. 인도네시아 국가연구혁신원(BRIN)은 ‘고질라 엘니뇨’가 4월부터 본격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자바 북부 판투라 곡창지대가 타격을 받으면 쌀 수급과 물가가 흔들리고, 이는 다시 최저임금 인상 압력과 보조금 지출로 이어진다. 환율 방어에 쓸 여력을 또 한 번 갉아먹는 구조다. 농산물과 에너지 비중이 큰 업종은 하반기 가격 시나리오를 지금부터 다시 짜야 한다.인도네시아 의회는 발리를 유력 후보지로 하는 국제금융센터(IIFC) 설립 법안을 논의 중이다. ▲입주 기업 법인세 100% 감면 ▲외국 금융 전문가 소득세 사실상 0% ▲골든 비자 취득자의 비거주자 지위 ▲배당·투자수익 원천징수세 면제까지 담겼다. 혜택 기간을 최대 50년으로 하는 안도 나왔다. 목표는 60억달러(9조원) 유치, 싱가포르·홍콩·두바이를 정면으로 겨냥한 카드다.그러나 자본은 세율만 보고 움직이지 않는다. 싱가포르가 가진 것은 낮은 세금이 아니라 30년간 바뀌지 않은 규칙과 법원, 송금의 자유다. 한쪽에서 국가가 시장을 밀어내고 다른 쪽에서 0%를 제시하는 것은, 자물쇠를 잠그면서 열쇠를 파는 일에 가깝다. 한국 기업은 무엇을 할 것인가첫째, 환리스크는 손익이 아니라 자본구조에서 풀어야 한다. 루피아 매출에 루피아 부채를 매칭하고 현지 조달 비중을 높이는 편이 헤지보다 싸다. 둘째, 규제를 비용으로만 보지 말자. TKDN과 SNI, 할랄은 선제 대응한 기업에는 후발 경쟁자를 막는 장벽이 된다. 셋째, 다난타라와 국영기업이 경제의 관문이 된 이상 파트너십 구조 설계가 인허가보다 중요해졌다. 넷째, 발리 금융특구는 법안 통과와 시행령을 확인하기 전까지 ‘검토’의 영역에 두는 편이 낫다.인도네시아는 지금 어렵다. 그러나 위기는 늘 진입 가격을 낮추고, 2억8000만 명은 어디로 가지 않는다. 오늘도 인도네시아에서 환율표를 들여다보며 버티는 한국 기업들이 몇 년 뒤 가장 좋은 자리에 서 있기를 바란다.

2026.07.25 10:00

4분 소요
공포지수 하단의 상승, 쉽게 볼 일 아니다 [홍춘욱의 경제프리즘]

증권 일반

흔히 ‘공포지수’로 불리는 시카고옵션거래소 변동성지수(VIX)는 시장이 앞으로 예상하는 변동성을 반영한 지표로, 주식시장에서 일종의 ‘보험료’에 비유된다. 주식 투자자들은 시장이 갑자기 폭락할 때를 대비해 풋옵션을 매수한다. 풋옵션은 증시가 약세를 보일 때 가격이 상승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주가 하락에 대비한 ‘보험’을 드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시장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높아지면 위험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옵션 가격에 반영된 내재 변동성인 VIX도 높아진다. 반대로 시장이 안정을 되찾으면 옵션을 통한 위험 회피 수요가 줄어들고 VIX도 하락한다.평온한 시장? 쌓이고 있는 리스크 첨부된 ‘그래프’는 이런 관계를 잘 보여준다. 2025년 4월 트럼프 대통령이 주요 교역상대국에 상호관세를 부과할 때 VIX가 40을 넘기기도 했으나, 평상시에는 보통 10에서 20 사이를 오간다. VIX는 항상 등락을 반복하지만, 최근 몇 년간의 흐름을 보면 ‘가장 낮게 내려가는 바닥(하한선)’이 조금씩 위로 올라오고 있다.이는 ‘휴식기 심박수’가 높아진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푹 쉬고 있을 때의 심박수가 높아졌다면 몸에 어떤 변화가 생겼음을 짐작할 수 있듯, 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증시가 가장 평온할 때 VIX가 10 근처에서 움직였지만, 최근에는 시장이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며 호조를 보일 때도 VIX가 15 밑으로 잘 내려가지 않는다. 이는 시장이 가장 조용한 순간조차 밑바닥에는 잠재적 불안감이 깔려 있음을 뜻한다.VIX의 바닥이 올라간 원인은 크게 두 가지 가능성으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시장 구조의 변화다. 2022년 이후 이어진 고금리 환경과 함께 최근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와 옵션 거래가 크게 늘면서 투자은행 등의 헤지 거래도 증가했다. 이 같은 시장 구조 변화가 옵션 가격을 구조적으로 높이며 VIX의 하단을 끌어올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 경우라면 거시경제적 패러다임의 변화일 뿐, 시장 자체의 위기로 보기 어렵다.사실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두 번째 요인, 즉 잠재적 긴장의 누적이다. 겉으로는 시장이 평온해 보여도 수면 아래에서 리스크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신호일 수 있다. 과거에도 금융위기 이전 증시가 호황을 이어가던 시기에 VIX의 하단이 점차 높아졌다는 분석이 제기된 바 있다. 또 2021년에도 주가는 상승세를 이어갔지만 VIX의 하한선은 평소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했고, 이후 2022년 고물가·고금리 충격으로 시장 변동성이 크게 확대됐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투자자들의 경계심을 보여준 사례로 해석되기도 한다.출렁이는 시장, 어떻게 대응할까물론 VIX의 바닥이 상승했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폭락을 예단하고 공포에 질릴 필요는 없다. 다만 시장의 체질이 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다음과 같은 전략을 세워야 한다.무엇보다 ‘저변동성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앞으로는 시장이 예전보다 더 자주, 더 크게 출렁일 수 있으므로 이를 비정상적인 위기가 아닌 일상적인 환경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변동성이 확대되는 환경에서는 과도한 부채(빚투)나 특정 자산에 대한 집중 투자는 작은 충격에도 치명적인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충격을 견디고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자산의 일정 부분은 현금으로 보유하는 것이 유리하다. 마지막으로 VIX 하나만 보고 포트폴리오를 급격히 변경하는 것은 위험하다. 진정한 위기 신호는 VIX의 상승과 더불어 금리 급등이나 여타 불안 신호들이 동시에 들썩일 때 발생한다.최근 VIX의 바닥권이 높아진 현상은 시장이 호황 속에서도 긴장을 완전히 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다시 말해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옵션시장에서는 여전히 위험에 대비하려는 움직임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투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자산을 지키며 견딜 수 있는 체력을 마련해 두는 것이다.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2026.07.24 08:00

3분 소요
'모나리자'를 가져와도 예술일까…차용미술과 저작권의 경계 [백세희의 컬처&로(LAW)]

전문가 칼럼

차용미술(appropriation art)은 실제 사물 혹은 기존 예술품의 소재를 자기 작품 안에 들여오는 창작 행위이다. 포스트모던 미술의 한 형태로 널리 이용되고 있는데, 쉽게 말해 다른 사람 작품을 내 작품에 이용하는 예술 형태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니 완전히 새로운 개념도 아니다. 그 이전에도 있었다.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Mona Lisa>(1503~1505)는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 중 하나다. 이 작품은 400년이 흐른 뒤 마르셀 뒤샹의 (1919)에서 차용되었고, 살바도르 달리의 (1954), 앤디 워홀의 (1963) 등으로 재차용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의 미술작가들에 의해 차용되고 있을지 모른다.왜 이런 차용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현대미술에서의 차용은 기존의 미술사조, 즉 모더니즘이 강조했던 자율성과 독창성의 강박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산업은 이미 대량 생산 체제에 들어섰는데 미술이라는 것은 아직도 독창적이고 순수한 것을 가치로 삼고 있으니, 이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이런 설명도 깨나 구닥다리 해설이다. 요즘엔 하나의 문화 권력이 되어 버린 작가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미술 시장을 비판하기 위한 차용도 종종 보인다.본질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저작권 등 침해 가능성 차용미술은 전용미술, 도용미술 또는 전유미술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 중 ‘도용미술’이라는 표현은 다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명칭이야 어떻든, 이미 존재하는 작품 이미지의 상당 부분을 이용하면 표절 시비가 생길 수 있다. 그런데 몰래 숨기고 베끼는 표절과는 달리, 차용미술의 경우에는 대놓고 유명한 작품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말하는 오마주 또는 패러디에 가깝다.이러한 속성에서 차용미술은 필연적으로 차용의 대상이 되는 미술품(원작)의 전부 또는 일부가 새로운 작품(차용미술품)에 이용될 수밖에 없다. 저작권침해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저작재산권 중 복제권, 전송권 및 2차적저작물작성권의 침해가 문제된다. 원작을 비틀어 변형하기 때문에 저작인격권의 하나인 동일성유지권 침해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외에 상표법,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문제도 애매하게 걸쳐질 수 있다. 미국에서는 분쟁 빈번, 제프 쿤스의 재판이 대표적차용미술에 있어 원작가와 차용미술가 사이의 분쟁은 미국에서 빈번하다. 현대미술의 슈퍼스타들이 모이는 큰 시장이라 그런 것 같다. 대부분은 제소 전 화해로 마무리되지만 몇몇 사건들은 끝내 법원의 판단을 받기도 한다. 특히 제프 쿤스는 여러 차례 제소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Rosers v. Koons(1992)사건이다. 소송에 휘말린 작품은 남녀 한 쌍이 강아지 여덟 마리를 끌어안고 있는 <강아지 대열 String of Puppies>라는 제목의 조각 작품이다. 쿤스는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던 그림 카드에 인쇄된 사진작가 아트 로저의 <강아지들 Puppies>이라는 흑백사진 이미지를 차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쿤스는 로저의 저작권이 명시된 카드 뒷면은 찢어낸 후에 이를 이탈리아의 공예가들에게 보내 사진의 이미지대로 조각 작품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재판은 어떻게 되었을까? 쿤스는 작품의 의도가 현대 사회에서의 상품의 대량생산과 미디어 이미지들의 난립을 비판하기 위한 패러디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런 형태의 미술 창작 방식은 이미 매우 일반적이라고도 주장했다. 사진을 조각으로 즉 매체를 아예 바꾸었으며, 흑백 사진을 컬러 조각으로 채색하였고, 자세히 살펴보면 사진에는 없는 데이지 꽃을 등장시켰으므로 엄연히 다른 작품이라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쿤스가 로저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법원은 쿤스의 작품이 원작을 일부 갖다 쓴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작품 전체를 복제한 것으로 보았다. ‘공정이용’에 포섭될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국내에는 차용미술이 직접적으로 문제되어 판단된 하급심 및 대법원 판례가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타인의 저작물을 허락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면책 사항인 ‘공정이용’에 대한 법리를 이용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쿤스의 기여(?)로 미국에서는 그 요건과 적용례가 확립되었다. 우리나라 저작권법도 미국의 공정이용 요소를 채택하여 제35조의5에서 공정이용에 관한 일반 조항을 두고 있다. 공정이용은 타인의 저작물을 일정 요건 아래 동의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법리이다. 하지만 그 요건을 만족하는 것은 까다로운 편이다. 이용의 목적 및 성격, 저작물의 종류 및 용도, 이용된 부분이 저작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그 중요성, 저작물의 이용이 그 저작물의 현재 시장 또는 가치나 잠재적인 시정 또는 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예술의 영역에서 이런 요소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몇 퍼센트를 갖다 쓰면 그때부터 침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량적인 문제도 아니고, 미술계에서 인정받은 차용작품의 예술성이 과연 민사재판에서도 고려될 수 있는 요소인지도 애매한 문제다. 그런 측면에서 향후 차용미술의 공정이용에 대해 우리 법원의 판단이 나온다면 꽤나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다. 단, 이런 판단으로 예술가들끼리 분쟁이 없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백세희 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2026.07.19 10:00

4분 소요
창업가에게도 ‘노오오력’만 요구할 것인가 [최화준의 스타트업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국가대표 축구팀이 2026년 북중미월드컵에서 탈락한 후폭풍이 거세다. 국민들은 축구협회와 리더가 이번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보여준 과정에 크게 분노하고 있다. 교육 기관에서 창업을 가르치는 필자에게 이번 월드컵의 준비 과정과 국민들의 분노는 특별한 의미로 해석된다. 이번 사건은 잘못된 사회 시스템과 불신이 자리잡은 제도가 어떻게 개별 구성원을 망가뜨리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기성 세대는 말한다. 젊은 세대의 노력이 부족해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젊은 세대는 ‘노오오력’(노력만으로는 현실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청년들의 자조적인 의미를 담은 신조어)으로 안되는 일도 많다고 항변한다. 항변의 이면에는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분노가 있다. 적어도 이번 국가 대표팀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은 젊은 세대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축구 선수들은 4년에 한 번 열리는 월드컵 출전을 평생의 꿈으로 여긴다. 그들의 노력이 부족했을리 만무하다. 하지만 어른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제도와 시스템 속에서 선수들의 꿈은 손쉽게 아스러졌다. 어른들은 높은 자리에서 다음 월드컵 경기를 감상할 기회가 있겠지만, 선수들 대부분은 다음 월드컵에서 피치를 밟을 수 있는 기회를 기약하지 못한다. ‘벤처투자 계약문화 발전 선포식’-창업자 포용 시도 보여줘이번 국가 대표 선수들을 바라보면서 필자는 비슷한 연령대의 수많은 창업자들이 떠올랐다. 우리 사회는 청년 창업을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권리 보호에 우리 사회가 운영하는 시스템은 그만큼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스타트업 생태계를 연구하면서 청년 창업자들을 만나 인터뷰 할 기회가 많다. 이야기는 중 한 꼭지는 항상 그들의 하소연이다. ▲대기업의 기술 탈취 피해 ▲투자자의 연대 보증 요구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하는 금융 기관의 신용 대출 ▲백방으로 뛰어다녀도 해법을 찾기 어려운 산업 규제 등은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등장하는 고민 사항이다. 창업자들은 정부의 지원이 기업 초기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다른 성장 주기 지원에는 비교적 소홀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기업이 성장할수록 창업자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아지는데, 이를 창업자의 노력 부족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런 창업 환경 속에서, 얼마 전 중소벤처기업부가 제안한 ‘벤처투자 계약문화 발전 선포식’은 우리 스타트업 생태계가 창업자를 제도적으로 포용하려는 의미있는 시도이다. 스타트업은 투자금으로 성장한다. 돈을 빌리는 창업자 입장에서는 큰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이런 이유로 투자자와 창업자는 갑을 관계로 이어지고, 이따금씩 창업자가 불리한 불공정 계약이 이루어지곤 한다. 정부가 이번에 제안한 벤처투자 계약문화 발전 선포식은 창업자의 권리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노력한 결과로 보인다. 창업자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부분들이 상당히 반영되었다. 동시에 북미 지역에서 통용되는 벤처투자 제도를 일부 받아들이면서 글로벌 표준에 다가간 모습이다. 과거 글로벌화를 추진하던 스타트업들에게 국내 투자 관행이 반영된 계역서는 해외 진출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새로운 벤처투자 계약 제도는 글로벌화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모두의 창업’ 아이디어 유출 사건, 창업자 권리 보호 실패 사례 이에 반해 최근 발생한 ‘모두의 창업’ 아이디어 유출 사건은 정부 제도가 창업자 권리 보호에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정보 유출 피해자를 위해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았지만,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특히 ‘모두의 창업’은 기술 창업 아이디어 모집을 중심으로 진행된 만큼, 지원자들의 지적 재산권 피해는 단순히 금전적으로 환산하기 어렵다. 정부 지원 대책을 내놓았지만, 아이디어 유출 피해는 고스란히 창업자가 짊어져야 한다. 스타트업 생태계 관계자들은 이번 사건을 창업자 권리 보호에 소홀한 현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입을 모은다. 과거 초기 스타트업 육성에 방점을 찍었던 국내 창업 지원 제도는 최근 성장주기에 있는 기업 지원에도 힘을 쏟는 모습이다. 정부를 비롯한 스타트업 생태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연간 신규 창업 수는 100만개가 훌쩍 넘은 지 오래다. 그 동안 국내 신규 창업 기업들의 5년 창업 생존율을 30%대 초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창업 생존율 정체의 원인이 부족한 제도적 환경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창업자들의 성장 단계 진입을 도울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가 스케일업을 준비하고 있는 창업자들에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들의 노력이 결코 부족하지 않고, 그리고 그들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제도적 문제들 파악하고 창업 생존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이번 국가 대표 축구팀의 사태는 청년들에게 무작정 개인의 노력만을 강요하는 관행과 이를 묵인한 시스템에서 비롯됐다. 축구 선수들이 혼신의 노력으로 월드컵 경기 출전 기회를 잡는 것처럼, 창업자들도 모든 것을 바쳐 목표에 도달하고자 한다. 우리 창업 제도가 간섭은 하지 않되, 창업자를 보호하는 제도적 지원은 소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는 그동안 창업자의 능력과 노력에만 기대어 결과를 기대할 뿐, 창업자의 권리 보호에는 소홀하지 않았는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초기 창업 수치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성장 구간의 공백을 메우는 촘촘한 맞춤형 정책 실행이 시급하다. 그들의 성장을 도와줄 든든한 제도와 시스템이 필요하다. 언제까지 스타트업 생태계는 창업자들에게 노력이 아닌 ‘노오오력’을 요구할 것인가. 필자는 전남대 경영대학 교수로 창업생태계와 창업실패를 연구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과 창업생태계 현장을 모두 경험하고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창업생태계를 가까이 하면서 창업자들과 유연하고 창의적인 시각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6.07.19 10:00

4분 소요
데이터센터, 21세기 굴뚝 되나[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2025년 8월,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시 의회는 대형 데이터센터가 신청한 시 상수도 연결을 위한 부지 편입안을 만장일치로 부결했다. ‘프로젝트 블루’(Project Blue)라고 불리는 이 사업은 아마존과 연계된 인프라 개발사 ‘빌 인프라스트럭처’가 약 36만평 부지에 지으려던 데이터센터다. 완공되면 이 시설은 해마다 약 250만톤의 물을 써, 사막 도시 투손에서 물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고객이 되는 셈이었다. 주민들은 ‘기업의 물 강탈’이라며 이 사업을 조직적으로 반대했다. 사업자는 시 경계 밖 피마 카운티의 승인을 받아 물이 거의 안 드는 공랭식으로 바꿔 재추진 중이지만, 반발은 가라앉지 않았다.투손만의 일이 아니다. 2026년 1분기에만 미국에서 주민 반대로 막히거나 미뤄진 데이터센터가 75건, 약 1300억 달러에 이른다. 집계가 시작된 2023년 이래 분기 최고치이자 2025년 한 해와 맞먹는 규모다. 올해 3월 갤럽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71%가 자기 지역에 AI 데이터센터가 들어서는 것에 반대했다. 원자력발전소를 반대한다는 응답(53%)보다 높다. 미국인은 이제 원전보다 데이터센터를 더 꺼린다.데이터센터는 AI의 몸이다. 우리가 열광하는 두뇌(AI 모델)를 돌리려면 막대한 전기와 물과 땅을 먹는 몸이 어딘가에 서야 한다. 반대의 이유는 대부분 전기와 물이다. 댈러스 연방준비은행 분석에 따르면 기존 데이터센터는 이미 전국 도매 전기요금을 3~5% 끌어올렸고, 밀집 지역의 상승폭은 훨씬 크다. 미국은 데이터센터가 워낙 많은 전기를 빨아들이면서 그 지역 도매 전기가격이 오르고, 그렇게 오른 값은 결국 인근 주민의 요금 고지서에 반영된다. AI가 쓴 전기 값을 정작 옆에 사는 사람이 함께 떠안는 셈이다. 물도 마찬가지다. 서버를 식히느라 막대한 물을 증발시키니, 투손처럼 가문 지역일수록 두려움이 크다.일론 머스크의 xAI가 멤피스 일대에 세운 데이터센터 '콜로서스'는 전력망만으로 감당이 안 되자 부지에 가스터빈 수십 기를 허가 없이 돌렸다. 이 발전설비가 뿜을 질소산화물(NOx)은 연 1000톤을 넘어, 멤피스권 최대 산업 오염원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 굴뚝 아래 마을이 하필 박스타운(Boxtown), 발전소·쓰레기처리장 같은 혐오시설이 대를 이어 들어선, 남멤피스의 가난한 흑인 동네였다. AI의 편익은 온 세상이 나눠 갖는데 그 매연은 왜 이 동네가 마시는가. 미국은 이런 분노가 빠르게 조직화되면서 데이터센터에 반대하는 그룹은 49개 주 833개로 한 분기 만에 두 배가 됐고, 2026년 첫 6주에만 관련 법안 300여 건이 주의회에 올랐다. 데이터센터에 세제 혜택을 안기던 미국이, 이제 규제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이유다.데이터센터 끌어오려는 지자체들한국은 사정이 좀 다르다. 전력 기술검토를 신청한 데이터센터의 약 70%가 수도권에 몰렸는데, 정작 수도권 신청의 절반 이상은 전력을 댈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수도권은 이미 곳곳이 전쟁터다. 김포 구래동에서는 주민들이 소음과 냉각수 방류에 초고압선 전자파까지 들어 반대했고, 지자체가 착공신고를 반려했다가 행정심판에서 져 공사를 재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인허가를 받고도 첫 삽을 못 뜬 부지가 3분의 1을 넘는다. 데이터센터를 둘러싼 우려에는 근거가 분명한 것도, 아직 과학적으로 다투는 것도 있다. 그래도 공사가 멈추는 결과는 같다. 반면 지방에서는 정반대의 경쟁이 벌어진다. 2조5000억원 규모 ‘국가AI컴퓨팅센터’를 놓고 여러 지자체가 유치전을 벌였고, 지난해 전남 해남이 최종 입지로 확정됐다. 값싼 재생에너지와 넓은 부지가 결정적이었다. 정부는 비수도권 데이터센터의 전기 시설부담금을 절반으로 깎아 분산을 유도해 왔고, 2027년 시행되는 AI 데이터센터 특별법은 전력계통영향평가 특례와 재생에너지 직접공급, 데이터센터 특구까지 지방에 얹어 줄 참이다. 같은 시설을 두고 한쪽은 축출 운동이, 다른 쪽은 유치 경쟁이 붙는다. 지방 유치에는 지역 균형발전의 명분도, 산업 클러스터의 씨앗이 될 가능성도 분명하다. 문제는 그 명분에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내주는가'의 계산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청구서는 누구에게 오는가도시는 늘 ‘성장의 엔진이면서 동시에 기피시설’인 입지물과 씨름해 왔다. 19세기의 공장 굴뚝, 20세기의 발전소와 소각장과 송전탑이 그랬다. 21세기의 그 자리를 데이터센터가 잇는다. 도시계획은 이런 시설을 '지역이 원치 않는 토지이용(LULU·Locally Unwanted Land Use)'이라 부른다. 편익은 전국이 나눠 갖고, 비용은 그 시설이 들어선 동네가 떠안는다. 데이터센터 반대의 뿌리가 바로 이 ‘입지의 정치’다.AI 확산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데이터센터는 앞으로도 더 많이 필요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유치냐 반대냐가 아니라, 비용은 누가 지고 편익은 누가 갖느냐다. 한국은 전기요금이 전국 단일이라, 미국처럼 옆 동네 데이터센터가 내 요금을 곧장 올리지는 않는다. 대신 다른 얼굴의 청구서가 날아온다. 늘어난 전력을 대려면 송전선과 변전소를 새로 깔아야 하는데, 그 비용을 전 국민이 분담할지 유치한 사업자가 부담할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지방이 값싼 재생에너지와 넓은 부지, 냉각수를 내주고 무엇을 돌려받는지도 계약서에 적혀 있지 않다.미국 버지니아주는 올해 7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데이터센터가 쓰는 전력에 kWh당 1.1센트의 세금을 매겼다. 그 비용이 주민 요금으로 번지지 않도록 사업자에게 되돌리려는 실험이다. 우리도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법을 만들어 본 사람은 안다. 구호와 조문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지방에 데이터센터를 '유치하라'는 구호는 요란한데, 정작 무엇을 남기게 할지는 비어 있다. (다음에 계속)

2026.07.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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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가 헌신하지 않으면 사법정의는 실현될 수 없다 [김기동의 이슈&로(LAW)]

전문가 칼럼

“검찰청이 없어진다는데, 그럼 검사들은 무슨 일을 하게 됩니까.”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받는 질문이다. 10월부터 검찰청을 폐지하고 수사는 경찰청과 중대범죄수사청이 맡는다고 하니, 검사 출신인 필자에게 하는 질문이다. 형사사법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반인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래서 자세하게 설명하기도 어렵다.“검찰의 특수부와 강력부 같은 수사부서에서 하던 일이 중대범죄수사청으로 옮겨갈 뿐입니다. 검찰의 본래 기능은 그대로 남습니다.”이렇게 설명하고 넘어가지만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검찰의 본질적 기능은 무엇일까. 국가를 대신해 형벌권을 실현하는 것이다. 범죄자에게 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집행하고 이를 통해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 이러한 국가의 존재 이유는 형사재판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 재판을 국가를 대신해 담당하는 사람이 검사다.미국 검찰의 공소장 표지에는 ‘United States of America v. ○○○’라고 기재돼 있다. 법정에서도 검사는 ‘on behalf of the United States’ 또는 ‘representing the United States’라고 말한다. 검사가 개인 자격이 아니라 미합중국을 대표해 기소권을 행사한다는 의미다.기소 전 수사에 매몰된 ‘보완수사권 논쟁’검사가 국가를 대신해 기소했는데 무죄가 속출하면 어떻게 될까. 국가의 형사사법 시스템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만약 형사소송법 개정이 치밀한 검토 없이 이뤄진다면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막강한 변호인단을 갖춘 피고인과 싸우면서 유죄를 받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새로운 증거를 수집하고 제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보완수사 활동’이다.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완수사권 논쟁’은 기소 전 단계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핵심을 비껴간 것이다.미국 등 사법 선진국에서는 중요 사건의 공판 과정에 1차 수사를 맡은 사법경찰관이 참여하면서 검사를 돕는다. 무죄는 사법경찰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의견을 존중하고 검사가 요청하면 추가 증거 수집에 적극적으로 나선다.수사 초기부터 재판 확정까지 형사사법 절차 전 과정에서 검사와 사법경찰관의 협력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 이것이 보완수사권 논쟁의 진짜 핵심이 돼야 한다.뉴욕남부연방검찰청이 ‘테라·루나’ 사건과 같은 중요 사건을 수사하고 공판을 수행할 때 검사가 몇 명이나 투입될까. 한 명이다. 심지어 그 검사는 다른 중요 사건도 여러 건 맡고 있다. 한국이라면 검사와 수사관 수십 명이 몇 년씩 매달려야 할 사건이다.미국에서는 어떻게 가능할까. SEC(증권거래위원회)나 FBI(연방수사국)가 검사와 한 팀을 이루면서 실제 수사를 도맡아주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특별한 법률 조항도 없는데 이런 실질적 협력이 이뤄지고 있다.우리나라에서 법률적 근거 없이 검찰과 경찰 사이에 이런 협력이 가능할까. 수사 단계에서도 핑퐁식 사건 처리가 만연해 있는데 공판 단계에서 협력이 이뤄질 리가 만무하다. 보완수사권은 권한이자 일이고 책임이다보완수사권 논쟁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대목이 있다. 수사기록만 보고 기소하면 억울한 피의자를 걸러낼 수 없다. 수사기록 검토만으로 기소 여부를 결정하게 하면 나중에 잘못된 기소로 중대한 인권침해가 발생해도 검사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다.현재 일선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일선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관들은 "검사들에게 보완수사권을 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고 한다. 보완수사권은 권한인데 왜 검사에게도 주는 것이 맞다고 할까? 권한은 다른 말로 하면 일이고, 책임이기 때문이다.미국의 검사는 수사를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법 시스템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중요 사건에서는 검사가 대배심 절차를 통해 소환장과 영장을 발부받고 사법경찰관이나 혐의자, 증인을 불러 직접 이야기를 듣는다. 미국의 대배심 절차는 한국 검사의 대면 조사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보완수사권 논쟁이 어떤 결론에 이르든 억울한 피의자를 걸러내기 위한 이런 기능만큼은 남겨둬야 한다.그런 기능까지 없앤다면 검사에게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된다. 검사들은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보장되겠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지금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구속영장 청구 전 피의자 면담제도 ▲검찰시민위원회 ▲대검 수사심의위원회와 같은 제도를 실효적으로 작동시켜야 한다. 검사가 사법경찰관이나 사건 관계자들을 면담해 기소 여부를 가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불성실하고 무리한 사건 처리에 따른 책임을 물을 수 있다.필자가 로펌을 만든 지 4년이 조금 지났다. 그사이 우리 로펌 소속이던 우수한 변호사 세 명이 공직으로 진출했다. 인재를 놓쳐 로펌 입장에서는 손해이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다. 두 명은 검찰로, 한 명은 금융감독원으로 갔다.여전히 우수한 법조인들이 검찰로 향하고 있다. 인재가 모이는 조직은 희망이 있다. 그러나 검사라는 자리는 고되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리는 직업이 어찌 고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사기록을 샅샅이 살피고 당사자를 직접 불러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검찰 일선에서는 검사들이 대면 조사를 기피하는 경향이 팽배해 있다. 나라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검사들에게 사명감과 자긍심을 심어줘야 한다.법무부 장관의 지시로 한국 검사들도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말하도록 하면 좋겠다.“저는 ○○○ 검사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을 대리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검사가 자신의 일에 헌신해야 사법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그래야 국민이 범죄로부터 보호받고 편안해진다.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

2026.07.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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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디스카운트 키운 중복상장…해법은 차등 규율 [대신경제연구소 ESG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자회사 중복상장을 둘러싼 논의가 자본시장 제도개선의 화두로 떠올랐다. 모회사가 이미 상장된 상태에서 알짜 사업을 떼어 자회사로 따로 상장할 때마다 모회사 주가가 흔들리고 기존 일반주주가 손실을 본다는 문제의식이다. 동일한 사업가치가 모회사와 자회사에 중복 반영되고, 모회사·자회사·지배주주 사이에 이해상충이 구조적으로 내재된다는 점에서 이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요인으로 지목돼 왔다.수치도 이를 뒷받침한다. IBK투자증권의 분석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상장사가 보유한 다른 상장사 지분의 시가총액 비중은 한국이 약 18%로, ▲일본(4.38%) ▲대만(3.18%) ▲미국(0.35%)을 압도한다. 국내 실증연구를 보면 자회사 상장 계획이 공시되는 시점에는 ‘가치 현재화’ 기대로 모회사 주가가 일시적으로 약 1% 오르지만, 상장일 전후로는 음(-)의 누적초과수익률이 나타나고, 상장 후 6개월까지의 보유수익률은 약 -10.8%로 손실이 깊어진다. 모회사의 주가순자산비율(PBR)도 자회사 상장을 계기로 약 1.59에서 1.07로 떨어진다. ▲이익의 더블카운팅▲보유 지분의 유동성·수익환원 제약 ▲지배주주의 사적이익 추구가 겹쳐 모회사의 구조적 저평가를 낳는다.분할 자체가 문제 아냐…유형별로 결과 달라져여기서 흔히 빠지는 오해가 ‘모든 분할, 모든 자회사 상장은 나쁘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물적분할 자체는 사업부문별 전문화와 자금조달 효율화를 통해 중장기 기업가치를 끌어올린다. 한 분석에서는 분할 전후 기업가치 지표가 약 1.88에서 2.26으로 20% 넘게 상승했다. 해외의 자회사공개(equity carve-out)와 스핀오프 역시 주가에 긍정적이거나 중립적인 영향을 주고, 국내 인적분할도 마찬가지다. 분리되는 회사의 주식이 기존 주주에게 지분비율대로 배분돼, 주주가 자회사 가치를 누리기 때문이다.시장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대상은 ‘분할’이 아니라 ‘모회사 일반주주에게 가치 귀속을 보장하지 않는 자회사 별도 상장’이다. 문제는 구조조정이 모회사 주주에게 비용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설계·실행된다는 데 있다.2021년부터 2025년까지 국내에서 신규 상장된 기업 가운데 최대주주 역시 상장사인 경우를 모회사 주가 상대수익률 기준으로 분해해 보면, 전체 평균은 6개월 기준 +1.4%로 오히려 소폭 플러스였다. 그러나 유형별로 구분하면 결과가 달라진다. 물적분할로 자회사를 상장한 모회사는 -21.5%로 크게 하락한 반면, 물적분할이 아닌 방식(기존 법인 인수·현물출자 등)으로 상장한 법인은 +7.1%를 기록했다. 상장시장에서도 코스피 모회사는 -10.7%였지만 코스닥 모회사는 +18.4%로 뚜렷한 플러스였다.즉, 음(-)의 충격은 ‘물적분할형’과 ‘코스피 모회사’에 집중된다. 핵심 사업이 주주 동의 없이 분리·상장되며 가치 이전 우려가 가장 첨예한 영역이다. 반대로 독립 법인을 인수해 상장하거나 코스닥에 올리는 경우엔 부정적 효과가 잘 관찰되지 않거나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보인다. 모든 자회사 상장을 한 묶음으로 규율하는 것은 데이터가 보여주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 해외의 답은 ‘사전 금지’가 아니라 ‘사후 규율’해외 사례도 유사하다. 미국은 모자회사 동시상장을 금지하지 않는 대신 지배주주가 있는 ‘지배기업’(controlled company)에 대해 사후 책임법리와 시장규율로 일반주주를 보호한다. 델라웨어 회사법은 이해상충 거래에 ‘완전한 공정성’(entire fairness) 심사를 적용하되, 독립적 특별위원회 승인과 소수주주 다수동의(MoM) 같은 보호장치를 갖추면 입증책임을 덜어주는 식으로 바람직한 절차를 유도한다. 증권거래소는 지배기업의 지배구조 위험을 공시하게 해 시장이 가격에 반영하도록 하고, 세제는 주주에게 가치가 직접 귀속되는 분리 방식을 우대한다. 진입을 막기보다 잘못된 설계에 사후적으로 무거운 책임을 지우는 모델이다.정부가 2026년 3월 발표한 신규 중복상장 ‘원칙 금지·예외 허용’ 기조는 그동안 누적된 폐해를 고려하면 이해할 만한 출발점이다. 다만 사전적 진입규제가 지나치게 강하면 정상적인 자금조달과 사업 구조조정까지 위축시킬 수 있다. 제도의 무게중심은 ‘일률적 금지’가 아니라 ‘유형별로 정교하게 설계된 거래소 정책과 가이드라인’에 둬야 한다. 첫째, 한국거래소의 상장심사 단계에서 물적분할형처럼 가치 이전 우려가 큰 유형과 독립 법인 인수형처럼 우려가 작은 유형을 차등화해 심사 강도와 보호장치 요건을 달리 적용해야 한다. 둘째, 모회사 주주총회 동의·신주인수권 부여·현물배당 등 일반주주 보호장치는 상장 규모와 이해상충의 크기에 비례해 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셋째, 사전 진입규제만으로는 이미 형성된 중복상장 구조나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사안의 이해상충을 통제하기 어려운 만큼 지배주주의 일반주주에 대한 충실의무와 실효적 사후 구제라는 규율을 병행해야 한다. 넷째, 주주에게 가치가 직접 돌아가는 인적분할·스핀오프형 분리에는 세제·절차적 유인을 부여해 시장이 스스로 바람직한 방식을 택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중복상장 문제의 해법은 ‘하느냐 마느냐’의 이분법이 아니다. 모든 자회사 상장을 죄악시하는 순간, 시장은 가치를 높이는 구조조정마저 잃는다. 해법은 유형을 정밀하게 구분하고 위험이 큰 유형에는 강하게, 작은 유형에는 약하게 차등화된 규율을 적용하는 데 있다. 일률적 금지는 단순하지만 부정확하고, 유형별 가이드라인은 복잡하지만 정밀하다. 필요한 것은 후자다.

2026.07.1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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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의 사과가 남긴 것…브랜드는 패배보다 태도로 무너진다 [허태윤의 브랜드스토리]

전문가 칼럼

세상에 축구처럼 특별한 상품이 또 있을까. 특히 전세계 예선을 거쳐 엄선된 강팀이 실력을 겨루는 월드컵은 말할 필요가 없다. 개최국의 시차 때문에 어떤 시간에 열려도, 경기를 보기위해 알람을 맞추고 일어난다. 아니, 잠들지 못한다. 개막 몇 주 전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조 편성표를 외우고, 상대 팀 전력을 검색하고, 낯선 나라의 도시 이름을 발음해 본다. 어떤 이는 연봉을 털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간다. 휴가를 쓰고, 사표를 내고, 카드빚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90분 경기를 눈앞에서 보려 한다. 광고 한 번 하지 않았는데 전 국민이 같은 시간에 같은 화면 앞으로 모인다. 경기장 밖이라도, 다른 나라에서 열려도 그 현장의 경험을 나누기위해 광장에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마케팅 교과서를 다 뒤져도 이만한 몰입은 없어보인다.마케팅에는 '관여도'(involvement)라는 말이 있다. 소비자가 그 대상에 마음을 얼마나 깊이 거는가를 재는 척도다. 치약 같은 상품은 관여도가 낮다. 아무 브랜드나 집어도 그만이다. 자동차나 집은 관여도가 높다. 그래서 오래 고민하고 크게 건다. 그렇다면 국가대표 축구는 어디쯤일까. 관여도의 꼭대기, 그 너머다. 돈을 걸고, 시간을 걸고, 잠을 걸고, 끝내 감정을 통째로 건다. 이긴 날엔 모르는 사람과 얼싸안고, 진 날엔 며칠을 앓는다. 이토록 깊이 마음을 거는 상품은 세상에 흔치 않다.그래서 국가대표 축구는 스포츠이기 이전에 하나의 브랜드다. 변방의 축구 후진국에서 일약 세계 4강을 경험한 우리가 가진 가장 거대한 브랜드다. 누구도 회원으로 가입한 적 없는데 전 국민이 팬이고, 세대를 건너 물려받은 마음으로 지어진 자산이다. 이런 브랜드는 돈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한번 금이 가면 돈으로도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브랜드의 진짜 얼굴은 무너질 때 나온다그 브랜드가 지금 흔들린다. 단순히 졌기 때문이 아니다. 멕시코·남아프리카공화국·체코와 한 조, 험하지 않은 조였다. 체코를 잡고 출발했지만 멕시코와 남아공에 내리 졌다. 1승 2패. 그것도 국제축구연맹(FIFA·피파) 랭킹이 한참 아래인 남아공에 0-1로 패했다. 본선이 48개국으로 늘어난 무대에서 조차 토너먼트를 밟지 못했다. 그러나 더 깊은 상처는 점수판이 아니라 그 뒤에 있었다. 협회장과 사령탑이 동시에 사라졌고, 컨트롤 타워는 비었다. 당장 9월 A매치도 또 임시 감독으로 치러야 할 판이다. 협회엔 대책이 없었고, 그 빈자리의 한가운데에 감독 한 사람이 희생양으로 세워졌다.브랜드는 패배로 무너지지 않는다. 패배를 다루는 방식으로 무너진다. 그리고 지금의 방식이라면, 이 거대한 브랜드가 다시 광장을 붉게 물들이기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잘나갈 때의 얼굴은 누구나 비슷하다. 브랜드를 오래 들여다본 사람은 안다. 브랜드의 진짜 얼굴은 호황에 나오지 않는다. 박수가 쏟아질 때 모든 브랜드는 근사한 말을 하고, 그 말들은 서로 닮아 있다. 차이가 드러나는 건 일이 틀어졌을 때다. 리콜이 터지고 사고가 나고 고객이 등을 돌리는 순간, 바로 그때 그 브랜드가 평소 무엇을 품고 있었는지 민낯으로 드러난다.1982년 미국에서 누군가 타이레놀에 독극물을 넣어 사망 사고가 났다. 존슨앤드존슨의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회사는 제품을 즉시 회수했다.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해명보다 사람의 안전을 앞세웠다. 그 결정이 타이레놀을 살렸다. 위기가 도리어 신뢰의 증거가 된 드문 사례다.우리에겐 반대의 기억이 더 많다. 2013년 남양유업은 대리점에 물건을 떠넘긴 녹취가 공개되자 사과 회견을 열었지만, 그 자리가 오히려 분노를 키웠다. 고개는 숙였는데 사람들이 듣고 싶던 말은 없었고, 잘못의 구조를 인정하는 대신 덮으려는 표정이 먼저 읽혔다. 불매운동은 회견 뒤에 더 거세졌다. 이듬해 터진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도 다르지 않았다. 사과문은 정중했다. 그러나 그 정중함 뒤에서 사람들은 진심이 아니라 매뉴얼을 읽었다. 형식은 완벽한데 태도가 비어 있었고, 대중은 그 빈자리를 정확히 알아챘다.사과에는 두 개의 층이 있다. 형식과 태도다. 형식은 문장과 표정, 그리고 절차이고, 태도는 그 아래 흐르는 마음이다. 형식은 며칠이면 만든다. 홍보팀이 다듬고 변호사가 검토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과문이 나온다. 그러나 태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쌓아온 것이 그 순간 새어 나올 뿐이다. 사람들은 형식을 읽는 게 아니라,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태도를 읽는다. 12년 전, 토씨까지 똑같았던 한마디이번 홍명보 감독의 말도 그랬다. "모든 책임은 감독인 나에게 있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가 12년 전에도 똑같이 말했다는 데 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1무 2패로 주저앉았을 때도 책임을 자기에게 돌렸다. 같은 문장이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돌아온 순간, '책임'이라는 단어는 무게를 잃는다. 반복된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절차가 된다.부임할 때 그는 "저는 저를 버렸습니다"라고 했다. 비장하다. 그런데 주어가 전부 '나'다. 내 책임, 내 명예, 나의 헌신. 여기에 공감의 핵심이 있다. 팬이 묻던 것은 감독의 명예도, 그의 자기희생 서사도 아니었다. '우리가 느낀 실망을 당신은 아느냐'였다.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을 물었는데, 그는 '나'의 책임으로 답했다. 주어가 어긋난 것이다. 공감의 실패는 대개 마음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주어가 자기에게 고정돼 있어서다. 브랜드도 같다. 위기의 순간 기업은 "우리가 이만큼 노력했다"고 말하고, 소비자는 "내가 이렇게 느꼈다"를 듣고 싶어 한다. 주어가 '우리'에 머무는 한, 아무리 진심을 담아도 그 말은 상대에게 도착하지 않는다. 공감은 마음의 양이 아니라 주어의 방향이다.브랜드가 사랑받는 이유는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무너지지 않는 브랜드는 없다. 끝내 곁에 남는 브랜드는 실패한 적 없는 브랜드가 아니라, 실패를 잘 견딘 브랜드다. 넘어진 자리에서 변명 대신 진심을 꺼내고, '나'가 아니라 '당신'을 먼저 부른 브랜드다.국가대표 축구라는 거대한 브랜드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전 국민을 팬으로 둔 자산이 한 번의 패배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 회생에 걸리는 시간은, 점수판이 아니라 태도가 결정한다. 사과문은 하루면 쓴다. 그러나 그 사과가 신뢰가 될지 조롱이 될지는 그동안 쌓아온 태도가 정한다. 잘나갈 때 만든 말은 다 비슷하다. 무너질 때 꺼내는 한마디가, 그 브랜드의 전부다.

2026.07.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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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브랜드를 만든 특별한 고객들 [이윤정의 언베일]

전문가 칼럼

럭셔리 브랜드에 “고객이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과 취향을 갖춘 이 시대의 오피니언 리더”라는 답이 돌아올 것이다.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이들이 럭셔리 브랜드의 고객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위와 같은 정의는 ‘판매 대상’으로서의 고객을 뜻한다. 몇몇 브랜드에는 설립 초기부터 역사를 함께 해온 특별한 고객이 존재한다. 브랜드에 영감을 주고 공감하며 브랜드가 성장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운 이들이다.에르메스의 첫 번째 고객은 말필자가 ‘에르메스’(Hermes)를 취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주 들었던 표현 중 하나는 “우리의 첫 번째 고객은 말(馬)입니다”라는 것이었다. 궁금증은 에르메스의 역사를 살피면서 해소됐다.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에 의해 설립된 브랜드는 마구 공방에서 출발했다. 당시 에르메스의 고객은 ▲왕족과 귀족 등 마차 소유주 ▲기병 장교 ▲승마 애호가 등이었다. 실상 에르메스가 만든 제품의 소비자는 말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말이 에르메스의 기술력을 키운 주인공일까.말은 매우 예민한 동물이다. 가죽이 조금만 거칠어도 상처가 나고 얹힌 무게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움직임이 저하되곤 한다. ▲안장 ▲굴레 ▲마차용 하네스 등 몸에 닿는 모든 것이 불편하면 경기력이 저하될 정도다. 에르메스는 처음부터 최고급 가죽을 선별하고 정밀한 재단을 통해 완벽하게 손으로 봉제된 편안한 제품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원칙은 다양한 제품에 반영됐다. 버킨이나 켈리 백에 적용된 새들 스티치(saddle stitch)도 원래는 승마용 장비 제작 기술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사를 알고 나면 에르메스의 로고에 담긴 말과 마차의 의미가 저절로 와 닿는다. 에르메스는 말과 관련된 용품을 제작하는 일 외에도 지속적으로 ‘소 에르메스’(Saut Hermes)라는 국제 승마 대회를 후원 중이다. 몇 년 전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소 에르메스 경기를 관람했다. 당시 비단결 같은 갈기를 지닌 아름다운 말의 자태뿐 아니라 경기 후 애프터 파티에 모인 VIP(귀빈)들이 들고 온 수많은 버킨과 켈리 백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웨이팅 리스트가 몇 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전 세계에서 다채로운 버킨이 한자리에 모인 모습이 선명히 떠오른다. 정장 아닌 ‘제냐’를 만든다남성복의 대명사인 ‘제냐’(Zegna)의 초창기 고객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다. 제냐의 최초 고객은 ‘재단사’(tailor)였다. 제냐는 1910년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의 트리베로에서 에르메네 질도 제냐가 작은 울 공장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창립자의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단을 만드는 일’이었다. 실제로 제냐는 초창기 수십 년 동안 고급 원단 업체로 유명세를 떨쳤다. 일반 소비자도 원단을 까다롭게 고르지만 재단사의 세심함은 그 이상이다. 그들은 ▲원사의 품질 ▲직조 밀도 ▲원단 탄성 ▲재단의 용이성 ▲내구성 등을 꼼꼼하게 살핀다. ▲영국 ▲이탈리아 ▲미국 등의 고급 재단사(테일러)는 고객에게 “제냐의 원단으로 슈트를 만들었다”는 점을 판매 전략으로 삼았다. 국내의 유명 테일러도 위 멘트를 자주 사용했다. 그만큼 남성의 슈트에서 원단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제냐는 일관된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필리에라’(Filiera)라는 시스템을 갖췄다. ‘필리에라’는 원자재 조달부터 직물 생산, 완제품 디자인 및 유통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전 밸류 체인을 수직 통합하는 구조다. 1968년부터 직접 남성복을 만들기 시작한 제냐는 그간 최고경영자(CEO)와 금융계 부호 등의 슈트로 명성을 떨쳤다. 영화 ‘거짓 혹은 진실’(Nothing but the Truth)에서 기자 레이첼 암스트롱은 정치 거물인 알버트 번사이드에게 “Nice Suit.”(정장이 멋지네요)라고 말한다. 알버트는 “That’s not a suit. It’s a Zegna.”(이건 그냥 정장이 아니라 제냐입니다)라고 답한다. 테일러를 위한 최고의 원단을 만들어온 제냐의 정체성을 잘 드러낸 대사다. 현재 제냐는 아티스틱 디렉터인 알레산드로 사토리의 지휘 아래 럭셔리 레저 웨어로도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다. 원단에 진심인 로로피아나원단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브랜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로로피아나’(Loro Piana)다. 로로피아나 가문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양모와 직물을 거래하는 상인이었다. 1924년 피에트로 로로 피아나가 현재의 회사를 설립한 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에 최고급 울과 캐시미어 원단을 공급하며 명성을 쌓았다. 로로피아나는 40년 이상 몽골의 목축 공동체와 협력해 최고급 캐시미어를 확보했다. 로로피아나의 주요 소재로 유명한 ‘비큐나’(vicuna)는 캐시미어보다 훨씬 가늘고 부드러우며 생산량이 극히 적어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천연 섬유 중 하나다.비큐나는 안데스 산맥에 사는 야생동물로 흔히 ‘신의 섬유’라고 불린다. 로로피아나는 1994년 페루 정부 및 안데스 지역 공동협의체와 협약을 맺고 살아있는 비큐나에서 채취한 섬유만을 사용하는 보호 프로그램을 시작할 정도로 비큐나에 진심이다. 탁월한 원단을 바탕으로 로로피아나가 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로로피아나가 ‘조용한 럭셔리’의 대표 주자로 부상한 계기도 원단의 우수함 때문이다. 수많은 제품을 경험한 상류층에게 결국 중요한 요소는 ‘편안한 착용감’이다. 로고나 디자인이 아니라 입었을 때의 촉감이 급을 나누는 것이다. 필자는 로로피아나를 잘 몰랐던 시기에 우연히 스카프를 구입한 적이 있다. 피부에 착 감기는 느낌이 좋아서 애용하는 제품이다. 부자들에게는 일상의 아이템이 될 수밖에 없는 요소다.에르메스와 제냐 그리고 로로피아나의 고객은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브랜드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예민하고 직업 정신이 투철한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과정이 오롯이 제품에 반영돼 현재의 인기를 만들었으니 첫 번째 고객은 후원자라 해도 무방하다.

2026.07.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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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있는데 세금 낼 돈이 없다…상속 준비는 지금부터 [스페셜리스트뷰]

전문가 칼럼

필자는 공익적 차원에서 몇 년째 상속인을 대상으로 상속세 상담을 무료로 진행 중이다. 최근 부동산 대책으로 상속세 납부의 현실을 상속인에게 전달하면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많이 느낀다. “아버지 집 한 채면 충분히 세금 내고도 남을 줄 알았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서울에 있는 집은 24억원, 통장에 든 현금은 1억원 남짓. 상속세는 정해진 기한 안에 현금으로 내야 하는데 그 기한이 6개월이다. “그럼 집을 팔면 되죠”라는 대답에 한 가지를 더 말씀드려야 했다. “요즘은 그 집을 사 줄 사람을 찾는 것부터가 일입니다.”예전에는 부동산이 많으면 ‘부자’라고 불렀다. 상속세가 나와도 집을 팔면 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택 제도로 인해 그 단순한 해법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 자산은 분명 많은데 정작 그 자산을 지킬 현금이 없는 가정. 상담하면서 매주 마주하는 풍경이다. 2026년 현재 부동산은 있는데 현금이 없는 가정에서 상속세가 어떻게 가족을 흔드는지, 그 충격을 미리 막을 방법은 무엇인지 정리해 보겠다.“집 한 채뿐”은 착각…‘급매의 악순환’ 시작될 수도상담을 시작하면 대다수가 “저희는 집 한 채밖에 없어서 상속세는 별로 안 나올 거예요”라고 말한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대부분의 고인은 평생 검소하게 살았고, 명품을 두른 것도 아니고, 외제차를 굴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상속세는 그분이 얼마나 알뜰하게 살았는지를 보지 않는다. 사망 당시 남겨진 재산이 얼마인지에 대한 숫자만 본다. 문제는 그 숫자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커져 버렸다는 점이다. 20~30년 전 대출 끼고 산 집 한 채를 오래 들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 날 그 집이 20~25억이 됐다. 집값은 몇 배 상승했지만 월급은 그만큼 오르지 않았다. 자산만 보면 자산가인데, 현금 흐름은 여전히 대중교통과 에코백을 들고 다니는 중산층이다. 통계청·한국은행·금융감독원이 함께 내는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우리 가구 자산에서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실물자산 비중은 70%를 넘지만 금융자산은 4분의 1 안팎에 그친다. 돈이 집에 묶여 있고 통장은 가볍다는 뜻이다.서류상으로는 분명 자산가인데, 생활은 평범한 사람을 나는 ‘평범한 부자’라고 부른다. 평범한 부자야말로 상속세 앞에서 가장 위험하다. 진짜 부자는 현금도 많지만, 평범한 부자는 부동산만 있고 현금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상속세는 ‘사망한 날의 재산’을 기준으로 계산한다. 상속세를 막연히 무서워만 하면 대비가 안 된다. 계산 구조를 한 번만 따라가 보면 의외로 흐름이 보인다.상속세는 크게 네 단계에 걸쳐 정해진다. 먼저 피상속인이 남긴 재산을 모두 더해 상속재산가액을 잡은 뒤 피상속인의 채무와 공과금, 장례비 등을 빼고 상속공제를 적용한다. 자녀만 있을 때 흔히 쓰는 일괄공제가 5억원이다. 배우자가 살아 있다면 최소 5억원에서 실제 상속받은 금액에 따라 최대 30억원까지 배우자공제가 가능하다. 공제를 빼고 남은 과세표준에 세율을 곱한다. 세율은 10%에서 시작해 최고 50%까지 올라가는 누진 구조다. 실무에서는 배우자가 함께 상속받으면 10억원 안팎, 배우자가 없으면 약 5억원까지는 세 부담이 크지 않은 편이다. 최근 서울에 20억대 아파트 한 채만 있어도 이 선을 넘는 가정이 부쩍 늘었다. 부동산을 물려받으면 상속세만 부담해야 하는 게 아니다. ▲상속취득세 ▲등기비용 ▲감정평가비 ▲세무신고비용 등도 비용으로 계산해야 한다.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상속세는 신고와 납부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거주자가 사망하면 상속이 개시된 달의 말일부터 6개월 이내에 신고하고 세금을 내야 한다. 세무서는 유족이 집을 팔 때까지, 형제끼리 합의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자산이 부동산이든 현금이든 정해진 날짜에 ‘현금’으로 내야 한다. 문제는 부동산은 장부상 자산이지만 6개월 안에 저절로 현금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이제는 ‘집 팔아 세금 내기’도 쉽지 않다. 예전 상담에서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조언이 “정 안 되면 집을 팔아 세금을 내자”였다. 요즘은 이 말을 쉽게 못 한다. 정부의 대출 규제 때문이다.수도권·규제 지역에서는 주택 가격에 따라 주택담보대출 한도가 차등 적용된다. 지난 6월 29일 기준 ▲시가 15억원 이하 6억원 ▲15억원 초과~25억원 이하 4억원 ▲25억원 초과는 2억원까지로 묶여 있다. 상속받은 서울 아파트가 20억대일 경우 집을 사려는 사람은 대출이 4억원선에서 막혀 자기 돈을 16억원 넘게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상속인은 6개월 기한에 쫓겨 마음이 급한데 정작 매수자는 잔금을 마련하지 못해 거래가 안 된다. 결국은 값을 깎아야 거래가 성사된다. 세금을 내려고 ▲집을 내놓고 ▲팔려니 집값을 깎고 ▲깎으면 가족이 지키려던 소중한 상속 재산이 그만큼 사라진다. ‘급매의 악순환’이다. 세금 한 번 내자고 평생 모은 집을 제값보다 한참 싸게 넘기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부동산은 자산이지만, 상속세 납부기한 안에 제값으로 현금이 되어 주지는 않는다. 이 점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연부연납·물납 만능 아냐…상속 부담 낮추는 ‘종신보험’“한 번에 못 내면 나눠 내는 제도가 있다던데요?” 맞다. ▲분납 ▲연부연납 ▲물납 등의 제도가 있지만 만능 안전판은 아니다. 연부연납은 상속세를 최대 10년에 걸쳐 나눠 내는 제도다. 담보를 제공해야 하고 매년 가산금 성격의 이자가 3.1% 붙는다. 결국 빚을 내 세금을 납부하는 셈이다. 부담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뒤로 미뤄지고 이자가 더해질 뿐이다.납부할 세금을 마련하기 힘든 경우에는 연부연납 제도를 활용할 수밖에 없는데 전체적인 상속세 부담이 커지기 시작하자, 요즘 연부연납 신청은 거의 필수가 되는 상황이다.물납은 현금 대신 부동산 등으로 세금을 내는 제도인데 아무 부동산이나 받아 주지 않는다. 요건이 까다롭고, 받아 준다고 해도 평가액이 시세보다 낮게 잡히는 경우가 많다. 가장 아끼던 부동산을 헐값에 나라에 넘기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이런 제도는 ‘급할 때 쓰는 비상구’이지, ‘준비를 대신해 주는 장치’가 아니다. 가장 마음 편한 길은 처음부터 낼 돈을 현금성 자산으로 마련해 두는 것이다.상속세는 돈 문제로 끝나지 않고 가족 관계까지 흔든다. 특히 상속 재산이 부동산 한 채에 몰려 있을 때 그렇다.집은 하나인데 자녀가 셋일 경우 누군가는 그 집에 들어가 살고 싶고, 누군가는 팔아서 현금으로 나누고 싶다. 세금은 형제가 함께 내야 하는데 한 명은 여유가 있고 한 명은 당장 낼 돈이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부터 대화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집을 가졌으니 세금은 네가 더 내라” “나는 현금이 없으니 못 낸다” 하는 식이다. 평생 우애 좋던 형제도 세금 앞에서는 표정이 돌변한다.이때 가족 모두가 함께 쓸 수 있는 현금이 따로 마련돼 있다면 어떨까. 그 돈으로 세금을 먼저 처리하고, 집을 어떻게 할지는 그다음에 차분히 의논할 수 있다. 현금은 민감한 상속 분쟁의 불씨를 끄는 소화기 역할을 한다. 상속 설계에서 ‘납부 재원’을 따로 준비해 둬야 하는 이유다.솔직히 필자는 ‘종신보험’을 마냥 좋게만 보던 사람이 아니었다. 수익률만 따지면 아쉽고, 보험료 부담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종신보험을 ‘투자상품’으로 보지 않고 ‘상속세 낼 현금을 미리 만들어 두는 장치’로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종신보험의 핵심은 피보험자가 사망했을 때 보험금이 나온다는 점이다. 상속이 시작되는 시점에 상속인 손에 현금이 쥐어진다. 부동산은 팔려야 현금이 되고, 예금은 미리 있어야 하고, 대출은 심사를 통과해야 현금이 된다. 사망보험금은 요건만 갖추면 바로 현금화할 수 있다. 6개월이라는 기한을 떠올리면 이 시점의 차이는 절대 작지 않다. 이 현금은 상속세 납부 재원이자 남은 배우자의 생활비, 부동산 급매를 막는 방패이면서 형제간 정산 자금이 된다.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부분은 계약자·피보험자·수익자를 누구로 두느냐에 따라 세금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자녀가 계약자이자 수익자이고 부모가 피보험자일 때 보험료를 실제로 자녀가 본인 소득으로 납입했다면 사망보험금은 ‘본인이 낸 보험료로 받는 본인 돈’으로 상속재산에 포함되지 않을 수 있다.부모가 본인을 피보험자로 두면서 보험료까지 본인이 부담했다면 사망보험금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 간주상속재산으로 보고 상속세가 매겨질 수 있다. 계약자는 자녀인데 보험료를 실제로는 부모가 대신 내 준 정황이 드러나면 자녀에게 증여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같은 종신보험이라도 누가 계약하고 누가 보험료를 냈는지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이라는 의미다. 종신보험은 세금을 없애 주는 상품이 아니라 세금을 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상품이다. 절세를 노린 계약 구조가 가능한 경우라 하더라도 핵심은 ‘마법 같은 절세’가 아니라 ‘가족이 집을 지킬 현금을 미리 확보하는 일’이다. 상속세 계산·가입 시점 등 따져봐야…세무 검토 필수여기까지 읽고 “그럼 당장 가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잠깐 멈추길 권한다. 종신보험도 분명한 한계와 주의점이 존재한다. 그걸 모르고 가입하면 오히려 손해다.무엇보다 끝까지 낼 수 있는 보험료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상속세를 막자고 감당하기 어려운 보험료를 떠안으면 정작 지금의 생활이 흔들린다. 보험 설계보다 상속세 시뮬레이션이 먼저다. 우리 집 예상 상속세가 얼마인지, 가족의 현금으로 어디까지 감당되는지를 먼저 따져 봐야 ‘얼마짜리 현금 장치가 필요한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순서가 바뀌면 필요 이상으로 큰 보험에 들거나 정작 모자란 만큼은 준비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가입 시점도 중요하다. 연령과 건강 상태에 따라 가입 자체가 제한되거나 보험료가 크게 높아질 수 있어 준비는 빠를수록 선택지가 넓다. 계약자·피보험자·수익자 구조와 보험료를 실제로 누가 내느냐 하는 문제는 설계사의 설명만 듣고 결정하면 위험하다. 같은 보험이라도 이 구조에 따라 세금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만큼 반드시 세무 검토를 함께 받아야 한다. 종신보험은 ▲사전증여 ▲유언 ▲상속재산 분할 ▲배우자공제 ▲연부연납 등 다른 카드와 함께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한다. 보험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되기보다는 보험이 전체 상속 설계안에서 ‘현금 담당’을 맡는다고 보면 된다.상속은 언젠가 일어나는 일이지만, 준비는 오늘부터 할 수 있다. 거창한 컨설팅 없이 집에서 몇 가지만 차분히 따져 봐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다.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보유한 부동산의 현재 시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막연한 기억 속 가격이 아니라 최근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 그 시가를 손에 쥐고 나면, 예상 상속세를 대략이라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일괄공제 5억원을 제외하고, 배우자가 있다면 추가 공제를 5억원 더 뺀다. 남은 금액에 누진세율을 떠올려 보는 정도만으로도 우리 집 상황이 어느 구간에 있는지 감이 잡힌다.그다음이 진짜 중요한 단계다. 가족이 지금 가진 현금과 금융자산만으로 세금을 낼 수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이때 부동산을 제외하고 ‘6개월 안에 바로 쓸 수 있는 돈’만 따로 세어 봐야 한다. 여기서 부족한 금액이 바로 우리 가족이 준비해야 할 숙제다. 부동산을 팔지 않고도 돈을 마련할 방법이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종신보험이 적합한지, 적합하다면 계약 구조는 어떻게 짜야 세금 문제가 생기지 않는지를 세무사와 보험 전문가에게 함께 상담하기 바란다. 앞서 말했듯 한쪽 설명만 듣고 결정하면 위험하다.상속세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 자산 구조 속에서 이미 시작된 문제다. 진짜 문제는 세금이 얼마냐가 아니라 세금을 낼 현금이 있느냐다. 부동산을 가족에게 온전히 남기고 싶다면, 집을 지킬 현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종신보험은 그 준비를 현실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대표적인 도구다. 상속세가 걱정되는 부동산 자산가라면 지금부터 예상 상속세와 보험 설계를 함께 검토하길 권한다. 집은 팔면 사라지지만, 미리 마련해 둔 현금은 그 집을 지킨다. 필자는 세무법인 리치 대표세무사로 상속·증여와 부동산 자산관리 분야를 전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연세대 법무대학원에서 조세법 석사를 취득했다. ‘부의 이전’ ‘기초부터 세금까지 가상화폐 완전정복’ 등 20여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현재 유튜브 ‘재테크 말하는 두꺼비 세무사’를 운영하고 있다.

2026.07.0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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