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소비 시장의 유동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컸던 한 해였다. 예측할 수 있는 고정 소비 패턴은 흐릿해지고, ‘리퀴드 소비’(Liquid Consumption·유동성 소비)라는 거센 파도가 유통·소비재 시장 전반을 덮쳤다.소비자는 한때 열광했던 브랜드에 등을 돌리는 한편 가격 등 단편적인 조건만으로 구매를 결정하지도 않게 됐다. ▲경험 ▲효율 ▲취향 ▲건강 ▲친환경 ▲기술 등 다양한 가치를 동시에 고려하는 이른바, ‘육각형 소비 시대'가 열린 것이다.2025년은 국내 유통·소비재 산업에서 새로운 국면이 열렸던 분기점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한국 소비재의 세계화’가 현실화했고, K-컬처가 확산하면서 국내 브랜드는 글로벌 무대에서 눈에 띄는 존재감을 확보하게 됐다. 인공지능(AI)·데이터 기술의 고도화는 제품 개발에서 마케팅, 고객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밸류체인(가치사슬) 전반의 운영 방식과 의사결정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했다.불확실성과 새로운 기회가 동시에 솟구치는 유통·소비재 시장 환경에서 2026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가 읽어내야 할 신호는 무엇일까. 급변하는 소비의 파도 속에서 한국 유통·소비재 기업이 주목해야 할 주요 흐름을 ▲유통 ▲식품 ▲패션 ▲화장품 산업 순으로 짚어봤다.소비 회복세에도 업태별 성장 갈려유통업은 거시 소비 환경 변화에 직접적으로 영향받는 산업이다. 2025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소비자동향지수(CSI)와 소비자심리지수는 100선을 넘으며 반등세를 보였다. 해당 지수는 100을 기준으로 100보다 크면 ‘긍정적’, 100보다 작으면 ‘부정적’이라는 의미다. 새 정부의 대규모 추가경정예산(추경) 집행과 소비 쿠폰 지원 정책이 민생경제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결과로도 보인다. 정책 수혜 대상에 포함되지 못한 기업의 체감 효과는 제한적이었지만, 전반적인 시장 심리를 개선하는 데는 유효한 역할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2026년에도 정부의 재정 정책 기조가 유지될 가능성이 큰 만큼 민간 소비 회복 기반은 점진적으로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소비 환경 개선이 유통 산업 전반의 동반 성장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소비 회복의 혜택이 모든 업태에 동일하게 확산하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목표 고객층의 ▲소비 흐름 변화 ▲채널 간 경쟁 심화 ▲수익성 압박 ▲온오프라인 간 역할 재편 등 복합적 요인이 성장 경로를 갈라놓고, 유통업 세부 업태별로 미세한 온도차가 나타날 것으로 관측된다. 백화점은 우호적인 업황이 기대된다. 쇼핑에서 경험으로 소비 기준이 이동하는 흐름 속에서 백화점은 단순 판매 공간이 아니라 도시의 라이프스타일을 집약한 공간으로 변모하는 상황이다. 백화점이 힘을 주는 ▲프리미엄 식품관 ▲이색 팝업스토어 ▲체험형 공간 확대 등은 이러한 변화를 대표한다. 외국인 관광객 회복이라는 강력한 훈풍도 불어온다. 외국인 소비자는 내국인보다 1인당 지출 규모가 크고, 짧은 체류 기간 고액 소비에 집중하는 특성을 보인다. 외국인 소비자의 소비 행태와 백화점 마케팅이 결합한다면 업황 개선 폭은 더 커질 수 있다. 대형마트는 여전히 쉽지 않은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소비자가 누적된 고물가 부담 속에 생활비 절감을 위해 전략적 장보기를 선호하면서 창고형 할인점은 예외적으로 성장세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편의점은 근거리 구매 확산으로 최근 몇 년간 특수를 누려왔으나 최근 성장세 둔화가 감지된다. 이제는 생활밀착형 서비스 확장이나 건기식·비식품 중심의 고부가가치 상품 강화 등 체질 개선이 절실하다. 기업형 슈퍼마켓(SSM)은 접근성과 상품 다양성이라는 두 장점을 모두 갖춘 만큼, 대형마트와 편의점 사이의 틈새 수요를 흡수하며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전자상거래(이커머스)는 기술력이 곧 시장 지위를 결정하는 국면에 진입했다. 성장 속도는 둔화하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면서 이커머스 플랫폼의 본질적인 경쟁력은 데이터 품질과 신성장동력 확보에서 갈릴 전망이다. 이커머스 업계는 크로스보더(Cross-border) 비즈니스 등 신성장동력 발굴을 고민하는 동시에 양질의 소비자 데이터를 다층적으로 확보하고, AI 기술을 활용한 초개인화 마케팅에 주력하는 등의 시도를 고민해야 한다.식품 산업은 K-푸드의 글로벌 확산이라는 강력한 성장 동력을 확보했다. 수출은 규모와 지역 모두에서 확장세를 보이며 ▲냉동 간편식 ▲쌀 가공식품 ▲장·소스류 등 품목을 다각화하고 있다. 특정 수출국에 대한 의존도는 낮아지고 미국·유럽 등으로 수요 기반이 넓어지면서 산업의 구조적 안정성이 강화되는 모습이다. 주요 식품 기업은 커지는 K-푸드 글로벌 수요에 대응해 국내외 생산기지와 물류센터 확충, 글로벌 유통채널 입점 다변화를 추진해야 한다. 생산·유통망 확보를 위한 현지 기업 인수·합병(M&A) 등도 전략적 선택지로 고려할 수 있다. 내수에서도 변화가 포착된다. 여전히 식음료 물가가 전반적 물가보다 높게 유지되는 상황에서 소비자는 실속을 중시하는 태도를 이어가는 상황이다. 간편식·밀키트·자체 브랜드(PB) 제품의 강세가 지속되는 이유다. 건강을 추구하는 웰니스 흐름도 한층 더 뚜렷해졌다. 일상에서 건강·체중 관리 목적으로 웰니스 식품을 찾는 소비 트렌드가 계속되며, 웰니스는 이제 특별한 선택이 아닌 일상적인 식생활로 자리 잡는 모습이다. 실속형 소비와 건강을 지향하는 프리미엄 소비가 공존하는 이중적 소비 구조로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식품 기업은 비용 효율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고기능성 제품을 중심으로 프리미엄화를 병행해야 한다.
패션·뷰티, ‘인디 브랜드’ 부상패션 산업은 대표적인 경기민감형 산업이다. 물가 안정세에도 의류 소비 심리는 아직 완전한 회복 국면에 이르지 못하는 상황이다.국내 패션 물가는 지난 2023년 하반기 8.2%까지 급등하며 소비 부담을 키웠으나, 2025년 들어 2% 내외의 하향 안정세에 진입했다. 의류비 소비지출전망지수(CSI)는 지난 2025년 3분기부터 점진적인 회복 조짐을 보였다. 합리적 소비 기조가 강화되며 당장 필요하지 않은 의류 지출을 유보하려는 경향이 이어지면서 중장기적인 의류 소비 지출 확대 가능성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국내 시장 내부에서는 새로운 성장 흐름이 포착된다. 고물가 국면을 거치며 가격 대비 품질과 활용도를 중시하는 소비 성향이 강화하면서 중저가 제조·유통 일괄(SPA) 브랜드가 탄탄한 성장세를 보였다. 패션 수요는 협업 마케팅과 트렌드 대응력을 갖춘 브랜드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기반으로 한 인디 패션 브랜드는 개성적인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을 통해 특정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섬세하게 공략하며 입지를 넓혔다. 최근 러닝 열풍에 힘입은 애슬레저(Athleisure·일상 운동복) 시장의 확대는 기능성과 스타일을 동시에 충족하는 제품에 대한 수요로 이어지고 있다.패션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 시장을 둘러싼 환경은 낙관과 경계가 교차하는 국면에 놓였다. 핵심 수요국인 미국의 의류 소비는 점진적인 회복세가 예상되며 일부 긍정적인 신호가 나타나고 있으나, 이러한 흐름이 곧바로 주문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은 제한적이다. 미국 리테일 산업 전반에서 재고 최적화 기조가 여전히 유지되는 상황에서 실제 재고 보충 수요는 상당히 보수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통상 정책 변화도 주요 변수다. 원·달러 환율 상승은 수출 비중이 높은 국내 패션 OEM 업계에 단기적으로는 우호적인 여건을 제공하지만, 관세 부담 확대에 따른 수익성 저하 리스크도 상존한다. 환율 효과와 통상 리스크가 상쇄되는 환경에서 패션 OEM 업계는 전반적으로 제한적인 성장 흐름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국내 주요 바이어의 생산 거점 재편 움직임과 관세 정책 변화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요구되는 시점이다.화장품 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확고한 위상을 구축하고 있는 부문이다. K-뷰티의 글로벌 인지도 확대에 힘입어 지난 2025년 3분기 누계 기준 화장품 수출액은 전년 대비 15.5% 증가했다. 2025년 연간 수출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탄탄한 수요를 바탕으로 역대 최고 실적을 경신할 가능성이 크다. 수출 구조의 질적 변화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지난 2021년까지만 해도 중국이 국내 화장품 수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나 중국 비중은 점진적으로 낮아지고 일본·미국·유럽 등으로 수출 대상국이 빠르게 다변화하고 있다.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완화되면서 수출 구조의 안정성이 커지는 흐름은 2026년에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중소형 인디 뷰티 브랜드의 성장세 역시 중요한 변화로 꼽힌다. 글로벌 시장에서 개성과 스토리를 앞세운 인디 뷰티 브랜드가 주목받으면서 한국 화장품 산업 전반의 위상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구조적 변화 속에서 국내 화장품 OEM·제조자개발생산(ODM) 기업은 인디 브랜드 성장의 직접적으로 혜택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중장기적으로는 K-뷰티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유통·소비재 산업은 더 이상 기존의 예측과 대응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정치·자본·무역 질서의 재편과 기술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는 복합적인 전환기 속에서 트렌드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가치는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2026년은 붉은 말의 해인 병오년(丙午年)이다. 뜨겁고 역동적인 붉은 말의 이미지처럼 2026년은 정체보다 전환이, 관망보다 실행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흐르는 소비 속에서 변화의 방향을 읽고 새로운 시장 질서를 설계하는 기업만이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기회를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