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을 공들여 쌓은 기술도 빠져나가는 데는 몇 분이면 충분하다. 핵심 설계와 노하우가 국경을 넘는 순간 기업의 경쟁력은 추락하고 경쟁자는 도약의 발판을 얻는다.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조선 등 첨단산업으로 먹고사는 한국에는 더 치명적이다. 국가정보원도 방첩 활동을 통해 기술 유출 징후를 포착하고 있지만, 현행 법·수사 체계만으로 산업스파이를 찾아내고 처벌하기에는 빈틈이 있다. 2020년 이후 산업기술 해외 유출에 따른 국가 경제 피해 추산액은 약 23조원에 달한다. 는 핵심기술 유출이 기업 피해를 넘어 대한민국 경제 안보를 위협하는 현실을 추적하고 ‘산업스파이 가중처벌 특별법’이 필요한 이유를 짚어봤다. 핵심기술 하나가 빠져나간 대가는 혹독했다. 미국 에너지 기술 기업 아메리칸 슈퍼컨덕터(AMSC)는 중국 최대 풍력터빈 업체였던 시노벨을 주요 고객으로 두고 성장하던 기업이었다. 그러나 2011년 시노벨이 AMSC 자회사 직원을 포섭해 풍력터빈을 제어하는 핵심 소프트웨어의 소스코드를 빼돌리면서 상황이 급변했다.시노벨은 훔친 기술로 AMSC의 소프트웨어 없이도 풍력터빈을 가동할 수 있게 됐고 거래도 끊었다. 그 충격으로 AMSC는 주주가치 10억달러(약 1조4000억원) 이상을 잃고 직원 약 700명을 내보냈다. 기술 유출은 경쟁자가 수년간 쌓아야 할 기술과 시행착오를 단숨에 확보해 기술격차와 시장 경쟁 구도까지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특히 첨단산업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한 기업의 기술 유출이 수출과 일자리, 공급망 등 국가 경제의 손실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국내에서 ‘핵심기술을 지킬 강력한 보안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첨단산업 특화국 韓...기술 유출 타격 ‘심각’한국 경제의 첨단산업 집중도는 주요국 가운데서도 높은 수준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제조업 수출액 가운데 고도 기술 제조업 수출액 비중은 36.3%로 주요 7개국(G7) 평균(20.2%)의 약 1.8배를 기록했다.미국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이 올해 발표한 ‘해밀턴 지수’에서도 한국의 첨단산업 특화도는 2.17로 세계 2위를 기록했다. 독일(1.45), 일본(1.38)을 크게 웃돈다. 국내 기술 유출도 빠르게 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산업통상자원부 등의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핵심 기술 해외 유출 적발 건수는 2021년 9건에서 2025년 33건으로 4년 만에 3배 이상 증가했다. 2020년 이후 산업기술 해외 유출로 발생한 국가 경제 피해 추산액은 약 23조원에 달한다.
더 큰 문제는 23조원이라는 숫자조차 실제 경제적 손실을 온전히 보여주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기술의 미래 매출 ▲경쟁사가 단축한 개발기간 ▲원천기업이 잃게 될 시장점유율 등을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 산업은 과거 기술을 따라가는 추격자에서 이제는 앞서가는 선도자로 산업구조가 바뀌었다”며 “추격하던 입장에서 기술을 지켜야 하는 수성자의 입장이 된 만큼 산업기술 보호와 처벌 체계도 그에 맞게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韓 최고 형량 6년 4개월…美는 20년국내 기술유출 사건의 역대 최고 형량은 징역 6년 4개월이다. 삼성전자 18나노미터(㎚) D램 공정 기술을 중국 반도체 업체 창신메모리(CXMT)에 유출한 사건에 내려진 형량이다. 개발에 약 1조6000억원이 투입된 국가 핵심기술이 넘어갔고, CXMT는 이후 D램 양산에 성공했다.해외에서는 산업스파이에 훨씬 무거운 형을 선고한다. 미국에서는 중국 국가안전부(MSS) 정보요원 쉬옌쥔이 제너럴일렉트릭 에비에이션(GE Aviation)의 독점적인 항공기 엔진 복합재 기술 등을 탈취하려 한 혐의로 2022년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대만에서도 올해 티에스엠씨(TSMC)의 첨단 2나노 공정 관련 영업비밀을 불법 취득한 사건에서 핵심 피고인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됐다. 미국은 1996년 제정한 경제스파이법(EEA)을 통해 외국 정부나 기관 등에 이익을 주기 위한 영업비밀 탈취를 ‘경제스파이’ 범죄로 별도 규율한다. 대만도 2022년 국가안전법을 개정해 국가 핵심기술 영업비밀을 외국이나 중국 등 외부 세력을 위해 빼돌리는 행위를 ‘경제간첩죄’로 처벌하는 체계를 마련했다. 반면 국내에서는 산업기술보호법과 국가첨단전략산업법, 부정경쟁방지법 등에 관련 처벌 규정이 나뉘어 있다. 국가 안보 대응 차원에서 더 강력한 처벌 법안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존재하는 이유다.국내에서도 기술 유출을 ‘경제 안보’ 차원에서 다루기 위한 방어막은 강화되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국가핵심기술의 해외 유출을 경제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로 보고 관련 정보 수집과 방첩 활동을 통해 유출 징후를 포착하고 관계 기관과 대응해왔다. 오는 9월에는 이른바 ‘간첩법’으로 불리는 개정 형법도 시행된다. 간첩죄 적용 대상을 기존 ‘적국’에서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확대해 외국 정부 등이 개입한 국가기밀 유출에 대응할 법적 기반을 넓혔다.다만 개정 형법만으로 산업기술 유출 전반을 포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핵심기술이 형법상 ‘국가기밀’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 될 수 있고, 해외 민간기업으로 기술을 빼돌린 경우 간첩죄 적용이 어려울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박균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산업스파이 가중처벌 특별법’은 이런 사각지대를 겨냥한다. 국가핵심산업정보 유출을 배후와 목적에 따라 ‘경제간첩죄·경제이적죄·일반 경제이적죄’로 구분하고, 외국정부 등을 위한 유출은 무기 또는 7년 이상 징역과 10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법인에는 최대 200억원의 벌금을 부과한다. 국외범 처벌과 범죄수익 몰수·추징, 경제간첩죄 공소시효 25년, 미수와 예비·음모 처벌도 담았다. 기술유출을 기업 차원의 범죄를 넘어 국가안보 범죄로 별도 규율하겠다는 취지다.다만 법을 만드는 것만으로 기술유출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최승재 세종대 법학과 교수는 “형량을 계속 높이는 것보다 해외로 기술을 빼돌리는 행위를 어떤 범죄로 규율할 것인지, 현행법에서 빠져 있는 구성요건은 없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살인범의 형량을 아무리 높여도 범인을 잡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법 개정뿐 아니라 산업스파이를 실제로 얼마나 잘 적발하고 수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