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치료제 시장이 또 한 번 요동치고 있다. 주사제와 경구제 등 투약 편의성을 둘러싼 경쟁이 본격화한 데 이어, 최근에는 적응증 확대와 보험 급여 진입 여부가 시장 판도를 가르는 또 다른 핵심 변수로 부상하면서다.그동안 비만은 개인의 생활 습관 문제로 치부되며 의료적 개입의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그러나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GLP-1) 계열 치료제를 중심으로 약물 효과가 입증되면서, 비만을 장기적인 치료와 관리가 필요한 질병으로 바라보는 인식 전환이 본격화하고 있다. 특히 비만이 ▲심혈관질환 ▲제2형 당뇨병 ▲수면무호흡증 ▲지방간 질환 등 다양한 동반 질환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점이 주목받으며 비만 치료의 목적 역시 단순 체중 감소를 넘어 합병증 예방과 예후 개선으로 확장되는 추세다.전문가들은 향후 비만치료제 경쟁의 초점이 '얼마나 많이 빠지느냐'에서 '어떤 질병 적응증으로 공적 관리 체계에 먼저 편입되느냐'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급여 적용 여부에 따라 환자의 치료 접근성과 시장 규모가 구조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국내외 제약사, '적응증 확장 전략' 가속국내에서는 이미 변화가 시작됐다. 노보 노디스크의 비만치료제 '위고비'(성분명 세마글루타이드)와 동일 성분의 당뇨병 치료제 '오젬픽'은 지난해 10월 약제급여평가위원회(약평위)로부터 급여 적정성을 인정받아 급여 진입의 첫 관문을 통과했다. 비만치료제 계열 성분이 본격적으로 공적 보험 논의 테이블에 올라선 첫 사례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일라이 릴리의 ‘마운자로’(성분명 터제파타이드) 역시 당뇨병 치료 적응증으로 지난해 12월 약평위에서 급여 적정성을 인정받았다. GLP-1과 위 억제 펩타이드(GIP)를 동시에 겨냥하는 이중 작용 기전이 혈당 조절과 체중 감소 효과를 함께 입증하면서, 향후 비만 적응증으로의 확대 가능성에도 관심이 쏠린다. 향후 국민건강보험공단과의 약가 협상,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 심의를 거쳐 최종 급여 적용 여부가 결정된다.
글로벌 거대 제약회사가 시장을 선점한 가운데, 국내 제약사들은 적응증 확대와 차별화된 임상 전략으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한미약품은 GLP-1 계열 비만치료제 파이프라인을 앞세워 장기 지속형 제형과 부작용 개선에 집중하는 동시에, 비만을 넘어 당뇨병·대사질환 전반으로 적응증을 확장하는 전략을 추진 중이다. 단일 체중 감량 약물이 아닌, 비만·당뇨병·대사질환을 아우르는 ‘대사질환 치료 플랫폼’으로 키우겠다는 구상이다.HK이노엔과 종근당 등도 GLP-1 기반 후보물질을 개발하며, 비만뿐 아니라 당뇨병·지방간 질환 등 동반 질환 적응증을 염두에 둔 임상 전략을 병행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글로벌 기술 수출이나 공동 개발을 통해, 직접적인 블록버스터 경쟁보다는 특정 적응증과 기술 영역에서의 틈새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급여화는 비용 아니라 미래 의료비 줄이기 위한 투자"남가은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발간한 '비만치료제 패러다임의 전환' 리포트를 통해 "비만치료제 급여화 논의가 더 이상 미뤄져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남 교수는 “세마글루타이드와 터제파타이드는 기존 비만치료제 대비 월등한 체중 감량 효과는 물론, 심혈관질환 예방 효과까지 임상적으로 입증됐다”며 “최근에는 간질환과 신장질환 개선 효과에 대한 데이터도 축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이러한 혁신이 공공의료 체계로 흡수되지 못한 채 '시장 중심의 소비재 혁신'으로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실제로 지난해 위고비가 국내에 도입됐을 당시 비대면 진료 플랫폼을 통한 오처방·오남용 논란이 확산하며 사회적 문제로 번진 바 있다. 이에 대해 남 교수는 “비만 진료를 비급여 영역에 방치하고 시장에만 맡긴 구조적 실패”라며 “건강보험이 조정자 역할을 하지 못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이어 “급여 부재가 오히려 무분별한 처방과 접근성을 키우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그는 비만치료제 급여화의 의미를 단순한 약값 보조 정책으로 보지 않는다. 남 교수는 “급여 적용은 국가가 비만을 명확한 질병으로 인정하고, 공적 관리 체계 안으로 편입시키겠다는 선언”이라며 “치료 기준과 처방 가이드라인을 명확히 설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남용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라고 강조했다.해외 주요국은 이미 이러한 방향으로 정책 전환에 나서고 있다. 영국은 국립보건임상연구원(NICE) 기술평가를 통해 터제파타이드를 비만치료제로 승인했으며, NHS 잉글랜드는 올해 6월부터 임상적 필요도가 높은 환자군을 대상으로 단계적 급여화를 시작했다. 일본 후생노동성 역시 지난해 2월 세마글루타이드를 보험 급여 항목에 포함했다. 다만 급여 적용 대상은 체질량지수(BMI) 35㎏/㎡ 이상이거나, BMI 27㎏/㎡ 이상이면서 고혈압·당뇨병 등 동반 질환 2개 이상을 가진 환자로 제한하고, 반드시 전문의 처방과 정기 평가를 거치도록 했다.남 교수는 “해외 사례의 공통점은 무조건적인 급여 확대가 아니라, 고위험군 중심의 단계적 접근이라는 점”이라며 “우리나라 역시 급여 여부를 둘러싼 이분법적 논쟁을 넘어, 어떤 환자군부터 공적 관리 체계에 편입할 것인지에 대한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단기적으로는 재정 부담에 대한 우려가 있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심혈관질환·당뇨병 등 주요 합병증 발생을 줄여 건강보험 지출을 오히려 절감할 가능성도 크다”며 “비만치료제 급여화는 비용이 아니라 미래 의료비를 줄이기 위한 투자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