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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물방울’로 여백을 채우다

‘신의 물방울’로 여백을 채우다

▶이건희 회장이 방문한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 있는 샤토 무통로실드 와인 양조장.

지난 1월 25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만찬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이 만찬을 주재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회장님은 늘 새로운 와인을 맛보게 해주신다”고 덕담을 건넸다. 그러자 이건희 회장은 보고 있던 와인 리스트를 내려놓고 비서팀을 통해 와인을 주문했다. 이 회장이 찾은 와인은 신라호텔의 리스트에도 없던 프랑스 보르도 1등급 와인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 1982년산. 보르도 메독 지방의 1등급 와인으로 5대 샤토 중 하나다. 보르도 메독의 1등급 와인엔 샤토 라투르를 비롯, 샤토 무통로실드·샤토 라피트로실드·샤토 마고·샤토 오브리옹이 있다. 이건희 회장은 식사 때마다 와인을 빼놓지 않는 와인 애호가다. 프랑스 보르도의 또 다른 1등급 와인인 샤토 무통로실드의 현지 양조장을 직접 방문했을 정도다. 이처럼 와인에 대해 해박한 이 회장이 만찬장에서 샤토 라투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회장이 내놓은 와인은 샤토 라투르의 명성과 함께 생산된 해가 1982년산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와인 품질은 어느 해에 생산됐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보르도에서 1982년은 1961년과 더불어 와인 재배에 최적의 포도가 생산된 해로 손꼽힌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1982년산 샤토 라투르를 마신 후 100점 만점을 던지면서 “1961년산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라투르”라며 “입안에 남는 잔향은 영원할 듯 지속되며, 2040년까지 두고 마셔도 괜찮을 와인”이라고 극찬했다. 샤토 라투르 1961년산은 2004년 국내 와인 경매에서 560만원에 팔린 적이 있다. 1982년산은 200만원 안팎이라는 게 와인업계의 감정가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 1월 25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 만찬에 내놓은 샤토 라투르. 보르도 메독 지방의 1등급 와인이다.

샤토 라투르는 1855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처음 실시한 등급 분류에서 1등급으로 선정된 후 지금까지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라투르는 1등급 중에서도 가장 맛의 균형이 뛰어나 ‘특급 중의 특급’으로 불린다. 그 특유의 강건한 맛 때문에 강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들이 즐겨 마신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위한 만찬에 라투르 93년산을 내놓아 국내에선 사실 ‘김정일 와인’으로 더 유명하다.
구본무 회장은 개인 저장고도 잘나가던 라투르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영국의 주류 회사에 라투르의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품질이 형편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1982년산은 이런 힘든 상황 속에서 태어나 라투르의 건재를 만방에 알린 와인이다. 국내 한 와인업계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이 샤토 라투르를 내놓은 것과 관련, “최근 한국 경제가 어렵고, 내부적으로 경영권 문제로 힘들었던 강신호 회장에게 소신을 가지고 전경련을 이끌어 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샤토 라투르는 명품 와인답게 구찌그룹의 프랑수아 피노 회장이 소유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뿐 아니라 국내 재벌 총수들의 와인 사랑은 남다르다. 해외 유학파들이 대부분으로 와인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와인이 건강에도 좋다는 인식 때문이다. 당시 만찬의 주인공이었던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역시 소문난 와인 애호가. 직접 와인 사업에 뛰어들기도 한 강 회장은 프랑스 보르도 와인보다는 부르고뉴 지방 와인과 칠레 와인을 즐겨 마신다. 강 회장은 아들인 강문석 수석무역 부회장과 경영권을 놓고 갈등을 겪을 때도 와인만은 줄곧 수석무역이 수입하는 부르고뉴 와인과 칠레 와인을 마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회장이 좋아하는 칠레 와인은 발디비에소사가 포도 품질이 좋은 해에만 생산하는 카발로 로코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선호하는 캘리포니아 와인 ‘오푸스 원’.

그 아래 등급인 발디비에소도 즐겨 마시는 편이다. 부르고뉴는 프랑스에서 보르도와 함께 양대 와인 산지다. 보르도 레드 와인이 카베르네 소비뇽이라는 포도 품종을 기본으로 여러 품종을 블렌딩해 제조되는 반면, 부르고뉴의 레드와인은 피노누아라는 단일 품종으로 만들어진다. 피노누아는 환경에 민감해 재배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포도 품종. 하지만 이렇게 태어난 피노누아는 그 맛과 향이 오묘해 초보자보다는 와인 전문가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는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인 로마네 콩티가 바로 이 피노누아로 만들어진다. 강 회장과 함께 재계에서 알아주는 피노누아 매니어는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이다. 김 회장은 “재배 때 정성을 많이 들여야 하는 피노누아 와인을 좋아한다”며 “와인은 포도를 재배해 수확하고 숙성해 태어나는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곤지암 골프장에 개인 와인 저장고를 둘 정도로 와인을 좋아한다. 하지만 무조건 비싼 와인을 찾기보다는 대중적 와인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 회장이 좋아하는 와인 중 하나는 캘리포니아 와인 ‘오푸스 원(Opus One)’. 프랑스의 샤토 무통로실드와 미국의 와인회사 로버트 몬다비가 손잡고 만든 ‘작품 1번(op. 1)’으로 미국 최고급 와인이다. 싸구려 와인 산지로 알려져 있던 캘리포니아 이미지를 한번에 격상시킨 와인으로 한 병에 30만원이 넘는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와인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 회장은 애초 미국 와인을 즐겼지만 최근엔 누이동생 최기원씨의 권유로 이탈리아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 회장이 최근 와인 저장고에 ‘추가’한 와인들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에서 생산되는 사시카이아와 티냐넬로. 이탈리아 와인의 고급화를 선도한 와인으로 ‘수퍼 투스칸(Super Tuscan)’으로 불리는 와인들이다. 특히 사시카이아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와인으로 최근 빈티지도 한 병에 30만원이 넘는다. 티냐넬로는 이건희 회장이 명절 때 계열사 직원들에게 돌린 와인으로도 유명하다. 잘 잡힌 균형감과 달콤한 향이 인상적인 와인으로 한병에 10만원대다. 현대가(家)에서 와인을 좋아하는 총수는 세상을 떠난 고(故)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었다. 가끔씩 회사 근처 와인바를 들러 이탈리아 안티노리사의 와인인 ‘빌라 안티노리 로소’를 즐겨 마셨다고 전해진다. 4만원대 와인으로 생전의 소박했던 라이프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즐겨 마시는 크리스털 샴페인. 이 샴페인은 프랑스 현지에서도 부의 상징으로 불린다.

최근엔 부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와인에 입문했다. 현 회장은 출장 때를 제외하고는 서울종합과학대학원에서 운영하는 와인 강좌에 100% 출석률을 자랑할 정도로 와인 공부에 푹 빠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건강을 고려해 독주에서 와인으로 유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와인 업계에 ‘CJ가 와인 사업에 뛰어든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 회장은 특히 보르도의 1등급 와인인 샤토 라피트로실드와 남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다. 과거 미국 영화사 드림웍스 지분 인수를 위해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를 초대한 만찬에서 이 와인을 주문했던 것. 당시 만찬이 진행됐던 신라호텔 측에서 라피트로실드가 동나는 바람에 조선호텔 등 인근 특급호텔로 와인공수를 벌이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재계에서 와인 매니어라면 빠지지 않는 사람이 바로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다. 정 부회장이 좋아하는 와인은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산 와인. 정 부회장은 얼마 전 국내 수입업체를 통해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서 생산되는 캔달잭슨의 ‘카디널 1998년산’을 2박스나 주문했다. 소비자가로 한 병에 39만원짜리인 와인을 24병이나 주문한 것. 캔달잭슨의 캘리포니아 와인을 대표하는 와인 회사다. 정 부회장은 샴페인에도 조예가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부회장이 즐겨 마시는 샴페인은 프랑스 루이 로드레사가 만드는 ‘크리스털’. 러시아 황제를 위해 만들어진 이 샴페인은 프랑스 현지에서도 부의 상징으로 불린다. 제이 지(Jay Z), 퍼프 대디와 같은 뉴욕의 흑인 갑부 래퍼부터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과 할리우드 스타에게도 인기있는 샴페인이다. 로드레사의 사장인 프레더릭 루조는 한 인터뷰에서 힙합 가수들이 크리스털을 좋아하는 현상에 대한 질문을 받자 “사지말라고 할 순 없지 않겠느냐”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에 제이 지는 크리스털을 보이콧하기에 이르는 등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숨어 있는 샴페인이다.

이웅렬 회장은 보졸레 누보 팬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술이 약해 와인을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소장하고 있는 와인 컬렉션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 회장과 달리 대한항공 기내식 사업본부를 책임지고 있는 장녀 조현아 상무가 와인에 있어선 프로다. 보르도 와인 산지를 직접 다니며 공부할 정도로 와인을 좋아한다. 고급 와인뿐 아니라 가격 대비 품질 좋은 와인을 선호하는 편. 가격 대비 품질이 좋기로 유명한 보르도의 샤스 스플린(Chasse Spleen)을 즐겨마신다.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은 보졸레 누보의 팬으로 유명하다.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 보졸레 지방의 햇와인으로 11월 셋째 주 목요일 전 세계에 일제히 배급된다. 이 회장은 회사 임원들에게 보졸레 누보 파티 참석을 권하고, 보졸레 누보 와인을 직접 선물할 정도다.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과 서경배 태평양그룹 회장은 학구파로 알려져 있다. 서 회장의 한 지인은 “프랑스 관련 사업을 많이 하니까 아무래도 프랑스 와인을 선호하는 것 같다”며 “옆에서 보면 와인 내공이 상당하다”고 귀띔했다. 담 회장은 한 모임에서 최근 뜨고 있는 뉴질랜드 와인의 매력을 전도할 정도다.
전문경영인 중 손꼽히는 와인 매니어는 허태학 삼성석유화학 사장이다. 평소 와인을 즐길 뿐 아니라 프랑스 현지 양조장을 직접 다니면서 와인을 공부한다. 프랑스 고급 와인 샤토 무통로실드부터 상대적으로 저렴한 칠레 와인 ‘1865’까지 다양하게 섭렵하는 편. 최근엔 미국 와인 캔달잭슨에서 소량만 생산하는 ‘스테이처(Stature)’의 매력에 푹 빠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5’의 경우 칠레 와인업체 산페드로사의 설립연도를 뜻하지만 국내에서 골프를 좋아하는 CEO들에겐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18홀, 65타’를 달성하기 위해 마시는 와인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오남수 전략경영본부 사장은 40쪽 짜리 와인 가이드북까지 펴낸 와인 전문가다. ‘와인 전도사’를 자청하는 그는 아시아나CC 대표 시절 국내 골프장 레스토랑에 처음으로 와인 리스트를 갖출 정도다. 캘리포니아 와인을 즐기는 그가 최근 빠진 와인은 칠레 콘차이토로사의 ‘돈 멜초’. 미국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는 돈 멜초 2003년산을 ‘2006년 올해의 와인’ 중 4위에 올려놓으며 가격 대비 빼어난 품질의 칠레 와인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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