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신문을 춤추게 하나
누가 신문을 춤추게 하나
내가 만난 멋쟁이 신문기자 선배는 여럿이지만, 서울신문 함정훈(73)국장을 빼고 생각할 순 없다. 용광로 같은 에너지와 함께 ‘신문쟁이’ 정신으로 똘똘 뭉친 그는 내로라는 호랑이 편집부장이다. 엉터리 제목을 뽑은 기자의 면전에 거침없이 내뱉는 절정의 욕설이라니! 편집부 기자들이 짜낸 제목에 그는 일단 퇴짜부터 놓는 걸로 시작한다.
그래서 별명이 ‘빠꾸’인데, 그한테서 유난히 자주 혼쭐났던 한 기자는 1년 새 머리털이 하얗게 변해버렸다는 으스스한 괴담이 1980년대 신문 편집국을 오갔다.‘빠꾸’의 육두문자란 실은 편집국 공간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마술의 언어였는데, 국민일보로 옮긴 뒤 더욱 파격의 지면을 선보였다.
유명한 게 1991년 3월 ‘글자 없는 컷 제목’이다.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동강 페놀 방류를 전하는 기사에 시커먼 ‘빼다 컷’ 제목을 1면에 세웠다. 그런데 팔뚝막 한 검은색 컷에 활자가 단 한 자도 없었다. 제작 실수? 아니다. 부제 ‘낙동강 그 푸른 물 페놀로 온통 오염…’이 붙어 있다.
더럽혀진 낙동강이라는 시각적 이미지에 호소하면서, 환경재앙이 실어증 수준임을 암시한 실험적 지면이다. 보는 순간 빠꾸의 작품임을 직감했다. 신문사에 남을 이 지면에 대한 혹독한 비평이 권도홍(78·전 동아일보 편집부장)의 저널리즘 이야기 ‘날씨 좋은 날에 불던 바람’에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권도홍은 ‘빠꾸’의 선배 뻘인데, 무책임한 무자(無字)컷이란 “파격이 아니라 편집의 파멸”(46쪽)이라고 쏘아붙였다. 추상같다. 왜? 일간지란 대중매체다. 현대미술·문학 같은 극한의 실험이 제한됐다. 또 언어로 승부하는 상황에서 언어를 버렸다는 건 ‘줄 없는 거문고(沒絃琴)’의 경지일지 모르나, 만인을 위한 메시지로는 실수다.
60~70년대 언론 상황과 그 안의 기자상을 담은 그의 책 ‘날씨 좋은 날에 불던 바람’은 귀중한 증언이다. 그래서 신문기자로서는 ‘백조의 노래’다. 매일 접하는 게 신문이고, 언론사가 ‘말 공장’이라지만 지면을 놓고 이렇듯 진지한 논의를 본 적이 있는가? 물론 이 책은 자전적 기록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사회의 빅뱅에 발맞춰 진화하던 언론상황의 증언도 꽤 볼 만하다. 장기영이 이끄는 젊은 신문 한국일보의 약진, 한약방으로 불렸지만 썩어도 준치인 동아일보, 방우영의 지휘로 펄펄 날던 조선일보, 막 창간된 다크호스 중앙일보…. 당시 상황을 전해주는 장기영·방우영의 단행본 등이 있지만, 권도홍의 기록은 또 다르다.
그의 기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부 기자의 시선이다. 편집기자의 증언은 그동안 아예 없다시피 해왔는데, 그건 편집국 내에서 편집부가 맡는 직능 탓이다. 지면 제작의 핵심인 게이트키핑을 하지만, 막상 사회적 조명을 받는 건 정치·사회·문화 등 취재 분야이기 십상이다.
한국신문에서 편집부는 정리부로 불리는 일본과 다르고, 또 다른 메커니즘의 서구 언론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10자 내외의 제목과, 지면의 얼굴(레이아웃)로 승부하는 핵심 부서라는 건 근대 신문의 공통점이다. 사실 편집부 기자로 명성 날린 기자도 꽤 되며, 이쪽에 장기 투자해 재미를 본 매체가 조선일보다.
어쨌거나 이 책을 보면서 새삼 멋진 건 장기영의 풍모다. 그는 편집을 꿰뚫어보았다. 부산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저자를 불러 올린 것도 장기영이지만, 참으로 호방했다. 한국일보로 옮긴 지 얼마 안 돼 그를 사장실로 불렀다.
“야전사령관의 천막 같은 좀 살풍경한 방에 덩치 큰 장기영 사장이 앉아 있었다. 야전침대가 놓여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 ‘거기 앉게.’ 눈은 빛나고 목소리는 걸걸했다. …그는 뒷벽의 책장에서 꺼낸 (위스키) 화이트호스를 맥주잔에 가득 부어 내밀었다. 안주는 없었다. …‘열심히 하게. 편집이 괜찮아.’ 그의 책상 위에는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내가 만든 지면의) 대장(인쇄 전의 신문 지면)이 놓여 있었다. …그때가 1959년 6월로 기억된다.”(66쪽)
권도홍에 따르면, 자신은 장기영 목장에 새로 영입된 작은 경주마였다. 다른 이들은 자칭타칭 명마다. 오종식·천관우·홍승면·김용장·예용해·김중배·남재희·송기상·최병렬·김영희 등 노장과 신예는 장기영이라는 그늘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들을 거느린 사실상의 편집국장 장기영은 넉넉했다.
초년병 기자인 저자가 실수를 해도 허허 웃으며 넘겼다. 저자의 수사(修辭)대로 밟아도 터지지 않는 지뢰밭이다. 기개를 살려준 것이다. 한데 그와 사람 욕심의 쌍벽을 이룬 이가 방우영이다. 훗날 동아일보로 옮긴 저자에게 조선일보로 옮기라며 마음을 거듭 흔들어댄 것이 그였고, 그런 인연으로 실제로 저자는 1년여를 그곳에서 일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새롭게 밝혀지는 대목은 지면 제작의 숨은 꽃인 편집기자에 대한 조명이다. 저자는 당시 ‘편집기자 빅 4’로 에너자이저 김경환, 뛰어난 언어구사의 조영서와 함께 최정호·김성우를 꼽았는데, 이는 전에 없던 자리매김임이 분명하다. 이 중 입버릇처럼 “눈맛 나는 신문, 입맛 다시게 하는 신문”을 만들려고 고심했다는 조영서라는 존재에 나는 필이 꽂혔다.
조선일보에 근무할 당시 그는 인류의 달 착륙을 전하면서 이런 제목을 뽑았다. “달이 숨쉬기 시작했다”. 우와! 참신하다. 50년대 그가 부산에서 활동하던 당시 희대의 살인마 김선경이 체포됐다. 당시 조영서는 통단 컷으로 응수했다. “잡혔다 김선경”. 왜 이게 좋은 제목이냐고? 당시 다른 신문은 이런 제목을 뽑던 시절이었다.
“희대의 살인강도 遂(드디어) 체포”. 이 때문에 권도홍은 조영서의 이 6글자가 “신문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고 평가한다. 그는 신문 제목의 요체를 ‘구속과 해방의 이중주’로 푼다. 기사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구속될 수만도 없는 양면성이다. 좋은 제목과 그렇지 못한 제목의 차이를 마크 트웨인의 말대로 번갯불과 반딧불로 구분하는 대목도 참신하며, 저널리즘이 조락(凋落)하는 2000년대 더욱 빛나는 노병의 조언이다.
동아일보 근무 시절인 68년 삼선개헌 때 지면의 마지막 게이트키퍼로서 “개헌안 통과” 대신 “개헌안 변칙처리”로 바꿨던 저자의 고군분투도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영웅적 기개다. 그러나 아쉬운 대목도 많다.책이 좋기 때문에 더욱 아쉽다. 신문계가 빅뱅하던 상황, 그리고 신문제작의 주인공인 기자와 언론 사주의 역동적 움직임 등에 포커스를 더 선명하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이 경우 자전적 기록은 뒤로 돌려도 무방했으리라.
그 반대로 이 책은 너무 많은 이질적인 정보가 섞여 있어 좀 난감하다. 다소 생경하게 끼어드는 신문제목에 대한 강의조의 설명 한편에 건강양생술 정보까지 끼어든다. 결정적으로 책 제목이 양에 안 찬다. 제목만으로는 수필집인지 회고록인지 가늠이 안 된다. ‘제목 귀신’ 권도홍의 천려일실이다. 책 제목이 어설퍼 책이 안 팔린다면, 손해 보는 건 한국 사회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필자는 문화평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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