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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영화 ‘화차’ - 빚이라는 지옥행 수레는 멈추지 않는다

[Culture] 영화 ‘화차’ - 빚이라는 지옥행 수레는 멈추지 않는다

2000년에 국내에 번역본으로 나온 미야베 미유키의 추리 소설 『인생을 훔친 여자』의 원래 제목은 일본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화차(火車)’다. 화차는 말 그대로 불타는 수레라는 뜻이다.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을 향해 달린다고 전해지며, 한번 올라탄 자는 두 번 다시 내릴 수 없다. 신용카드와 지옥행 수레 화차. 소설의 자세한 내용을 모를 지라도, 직관적으로 두 단어가 동의어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필수품이 된 신용카드가 왜 지옥행 수레인가. 미야베 미유키는 특유의 잔잔하고 섬세한 문체로 ‘빚 권하는 현대사회’의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일본에선 2011년에 아사히 TV가 이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었는데 각색 과정에서 생략이 많아 소설의 치밀함을 제대로 살리진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오히려 한국에서 ‘화차’의 영화화라는 쉽지 않은 도전을 시작했다. 도전자는 변영주 감독이다. 변영주 감독이 ‘발레교습소’(2004) 이후 실로 오랜만에 내놓는 차기작이 화차라는 소식을 듣고 기대를 품었다. 인물의 농밀한 심리묘사에 탁월한 그라면 화차의 공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봤다. 지난 3년 간, 시나리오를 스무 번이나 다시 썼다는 철저한 각색도 신뢰를 높였다.

무엇보다 화차는 한국 사회의 현재를 무서우리만치 그대로 투영하는 거울이다. 아주 적절한 시점에, 꼭 필요한 ‘대피 사이렌’의 역할을 할 작품이다. TV 채널을 돌리면 쉴 새 없이 대부업체 광고가 이어지는 나라, 대학교 앞에 온갖 종류의 대부업체가 ‘친절상담’이라는 팻말을 걸고 성업 중인 나라, 대학졸업자의 평균 부채가 1000만원에 육박하는 나라에 사는 우리에게 화차는 귀 기울일만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영화는 추리 소설다운 화두로 포문을 연다. 문호(이선균)의 삶은 평범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 선영(김민희)과 결혼을 약속한 그는 결혼 준비를 하다가 아주 사소한,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마주한다. 선영에게 신용카드를 만들어주려던 그는 카드 회사로부터 그녀가 신용불량자라는 통보를 받는다. 전산착오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부모님에게 청첩장을 전하러 가던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문호가 커피를 사러 간 사이 선영이 사라진 것이다. 황망한 그는 사촌 형이자 전직 형사 종근(조성하)에게 선영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종근이 선영을 찾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숨기고 있었던 비밀이 하나씩 드러난다. 강선영이라는 이름도, 주민등록번호도, 경력도, 출신 지역도, 모든 과거가 거짓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사라진 당일 모아둔 돈을 모두 인출하고, 집 안의 지문까지 말끔히 지운 채 사라졌다. 선영은 실종된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흔적을 지우고 도망친 것이었다. 선영의 뒤를 쫓던 종근은 그녀의 이름은 차경선이며, 강선영이라는 여자의 신분을 도용해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더불어 경선이 선영으로 신분을 바꾼 시점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증거를 포착한다.



실종된 약혼녀가 살인범?어쩌면 사촌동생 문호가 애타게 찾는 약혼녀는 살인범일지도 모른다. 종근에게 이 사건은 형사의 본능을 자극하는 범죄사건이지만, 문호에겐 진짜 사랑에 관한 물음이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완벽하게 속았다는 사실에 문호는 좌절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선영이든 경선이든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이다. 문호는 반드시 그녀를 찾아야 한다. 모든 것이 거짓이라도, 그들이 나눈 사랑만은 진실된 감정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두 남자의 모든 촉각은 그녀를 향해 있다. 과연 사라진 그녀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화차가 사연을 파고들수록, 공포와 연민이 동시에 밀려온다.

미야베 미유키가 『화차』를 일본에서 발간한 건 1992년이다. 일본 경제의 거품이 막 꺼지기 시작한 무렵 일본 사회는 개인부채 문제로 독한 몸살을 앓았다. 무분별한 카드 발급으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빚더미에 앉았다. 개인 파산이 증가했고, 빚에 쫓겨 결국 목숨을 끊는 사람도 늘어났다. 그들이 바랐던 건, 대단한 사치가 아니었다. 화려한 TV 광고는 소비를 부추겼고, 신용카드 회사는 친절하게도 ‘할부’로 소비를 가능하게 도왔다. 새로운 상품은 계속 쏟아져 나왔고, 할부로 물건을 살 수 있는 카드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더불어 이자도 함께 불어났다. 소비하지 않으면 남들보다 뒤처지는 듯한 사회적 박탈감은 또 새로운 소비를 부추겼고, 빚을 지는 생활이 익숙해질 때 즈음 빚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불어난다. 이런 상황,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20년 전 일본사회가 앓던 병을 한국사회가 요즘 앓고 있다. 남의 인생을 훔쳐야만 했던 선영의 바람은 의외로 소박하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행복해지고 싶었던 한 여인의 소망이 그녀를 불타는 수레에 올라타게 만들었다. 3월 8일 개봉하는 ‘화차’는 한 번 타면 절대 내릴 수 없는, 빚의 지옥행 수레에 몸을 맡긴 한 여자와 그녀의 행적을 좇는 두 남자를 통해 차가운 범죄 스릴러와 뜨거운 멜로, 슬픈 공감의 드라마를 펼쳐낸다. 이선균 조성하의 쫓는 연기도 매력적이지만, 쫓기는 여자 김민희의 연기도 일품이다. 배우들의 호연과 변영주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화차’는 추리 스릴러로서도, 격정적인 멜로 영화로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사회파 드라마로서도 훌륭하다. 극장을 나서면서 관객들은 자문하게 될 것이다. 과연 나의 소비는 행복을 위한 것인가.



2012년 아카데미 기대작 3

철의 여인

감독
필리다 로이드 |

출연 메릴 스트립, 짐 브로드벤트 |

개봉 2월 23일 | 12세 관람가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 열일곱 번이나 오른, 연기의 화신 메릴 스트립이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 마거릿 대처의 일생을 연기한다. ‘철의 여인’은 정계에서 은퇴한 노년의 대처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스물여섯 살의 야심가 마거릿이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강한 여성 정치가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과 한 여인으로서 일과 가정의 갈등 속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 가감 없이 그려낸다. 명불허전 메릴 스트립의 연기만으로 두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 만한 영화.



마릴린 먼로와 함께 한 일주일

감독
사이먼 커티스 |

출연 미쉘 윌리엄스, 에디 레드메인 |

개봉 2월 29일 | 12세 관람가

세계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여인, 하지만 단 하나의 사랑만을 원했던 여인, 마릴린 먼로가 영화 속에서 부활한다. 세기의 섹스 심벌로 명성을 누리던 마릴린 먼로는 영화 촬영을 위해 영국을 방문한다. 남 모를 외로움에 지쳐가고 있던 그녀는 영화의 젊은 조감독 콜린에게 끌려들고, 두 사람은 촬영장을 벗어나 일주일 간의 밀월 여행을 떠난다. 배우 마릴린 먼로가 아닌 여인 마릴린의 내면을 들여다 볼 기회. 이 작품으로 미쉘 윌리엄스는 올해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휴고

감독
마틴 스코시즈 |

출연 아서 버터필드, 클로이 모레츠, 벤 킹슬리 |

개봉 2월 29일 | 전체 관람가

영화 역사를 향한 거장 감독의 3D 연애편지라 부를 만하다. 파리의 기차역에 숨어사는 소년 휴고는 장난감 가게에서 부품을 훔치다가 주인 할아버지에게 잡힌다. 뭔가 심상치 않은 과거를 숨기고 있는 듯 보이는 장난감 가게 조르주 할아버지는 휴고가 애지중지하던 수첩을 빼앗아가고, 소년은 아버지가 남긴 유품을 지키기 위해 조르주 할아버지의 집에 숨어든다. 조르주 할아버지의 과거가 서양 영화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엄청난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올해 아카데미시상식 영화제는 거장 감독 마틴 스코시즈의 따뜻한 판타지에 최다 부문 노미네이트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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