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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맡기되 잘못은 ‘내 탓’

믿고 맡기되 잘못은 ‘내 탓’



상위권 팀을 우승시키는 것과 하위권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올려놓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힘들까. 야구 전문가들은 대부분 후자를 꼽는다. 아무리 감독의 용병술과 선수단 장악 능력이 좋아도 전력이 떨어지는 팀을 강팀의 반열에 올려놓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SK를 세 차례 우승시킨 김성근 감독이 과거자신이 지휘한 약체 쌍방울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도 그래서다.올 시즌 프로야구에선 김기태 LG 감독과 김시진 넥센 감독이 하위팀의 반란을 이끌고 있다. 시즌 전만 해도 꼴찌 후보로 지목받은 LG와 넥센은 6월 14일 현재 28승1무25패로 나란히 공동 2위에 올라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팀을 선두권에 올려놓은 김기태 LG 감독과 김시진 넥센 감독은 “난 한게 아무 것도 없다. 다 선수들과 코치들이 잘해준 덕분”이라고 공을 돌린다. 하지만 조직의 변화와 발전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100여 명의 선수와 코치를 이끄는 선장 격인둘은 어떻게 만년 하위팀을 강팀으로 만들었을까. LG와 넥센은 무엇이 바뀐 것일까.

김기태 감독은 지난해 10월 LG의 사령탑에 공식 취임했다. 어깨가 무거웠다. LG는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9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하는 굴욕을 맛봤다. 팀 내개인주의가 강하다고 알려져 있어 선수들을 결집시킬 지휘력이 새 감독의 요건을 꼽혀왔다. 선수 시절부터 ‘보스’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카리스마가 있는 김기태 감독이 적임자였다는 게 LG의 설명이었다. 김기태 감독은 취임 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 않나.팬들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는다”며 선수들에 강한 정신무장을 강조했다.

김기태 감독의 행보는 처음부터 파격적이었다. 그는 1월 신년 하례식에서 구단 직원과 선수들 앞에서 “60패만 하자”고 선언했다. 일반적으로 각 팀 사령탑은 개막에 앞서목표 승수를 밝힌다. 그러나 김 감독은 거꾸로 ‘60번 지자’고 했다. 왜 그랬을까. “우리 팀은 지는데 너무 큰 스트레스를 받고 그에 대한 두려움이 컸습니다. 한 번 지기 시작하면 자기 플레이를 못 하며 위축됐고 걷잡을 수없이 무너지기를 반복했어요. 패배에 대한 압박감을 덜어주고 싶었습니다.”


김기태 감독 파격적인 60패 공약프로야구는 한 시즌에 팀 당 133경기를 치른다. 60패 목표는 73승을 거두고 포스트시즌에 가자는 말을 돌려서 말한 것이었다. 김기태 감독은 “야구는 1위도 승률이 7할이 안 되고 꼴찌 팀도 승률이 4할은 된다. 어느 팀이든 133경기 중 3분의1은 지고 3분의1은 이긴다고 봤을 때 나머지 3분의1에서 결정이 난다. 승리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자신 있게 했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말을 그렇게 했지만 사실 60패 목표는 달성하기 쉬운 게 아니었다. 지난해 59승2무72패로 공동 6위에 머문 LG는 지난해 마무리 캠프 이후 5명의 주축 선수를 잃었다. 주전 포수 조인성, 주전 외야수 이택근, 불펜의 핵심 송신영이 프리에이전트(FA) 계약으로 팀을 떠났다.

여기에 승부조작 사건으로 주전 선발 투수 2명이 추가로 유니폼을 벗었다.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은 LG를 최하위 후보로 꼽았다.이런 위기를 김기태 감독은 오히려 기회로 봤다. “5명의 선수가 나갔으니 다른 선수들의 자리가 생겼다. 능력 있는 선수는 많다”고 했다.

김기태 감독은 주전 선수라고 매 경기선발 출전을 보장하지 않았다. LG는 1군과 2군 사이의 선수 교체가 가장 빈번한 팀 중 하나다. 그만큼 많은 선수들이 경기에 뛴다.지금까지 선발로 등판한 투수만 해도 9명이나 된다. “선수들이 감독을 납득할 수 있어야한다. 열심히 하면 누구나 1군 경기에 뛸 수있게 해준다”는 게 김 감독의 철칙이다.

2009년부터 약 2년 동안 LG의 2군 감독을 맡았던 김기태 감독은 “선수들의 노력과 간절함을 잘 알고 있다. 기회를 주지 않으면 내가 무책임한 것”이라고 했다. LG는 그동안 주전에 대한 의존도가 큰 팀이었다. 비주전 선수가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결코 작지 않았다. 주전은 안이했고, 다른 선수들은 의욕을 잃었다. 김기태 감독이 팀을 맡은 올해는 선수 기용의 경직성이 사라졌다. ‘잘하면 내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은 선수들에 큰 동기 부여가 된다.

젊은 선수들이1군에 올라와 잘 하면 기존 선수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후보 선수나 2군 선수를 쓰는 건 성적을 내야 하는 감독 입장에서 쉬운 일은 아니다.하지만 김 감독의 생각은 확고하다. “인위적인 리빌딩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팀이 강해지려면 젊은 선수가 커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한 경쟁은 희망을 낳고 희망은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김기태 감독은 설령 선수가 못하더라도 “나중에 기회를 줄 테니 준비 잘 하라”고 격려한다. 선수층이 얇은 것이 약점으로 지적된 LG는 현재 어느 팀보다 가용 인원이 많아졌다. 그것도 다 1군에서 통할만한 선수다.


“누구나 1군에서 뛸 수 있다”LG는 경쟁을 통한 시너지 효과로 5할 승률이 무너질 위기를 10차례나 넘기며 쉽게 무너지지 않는 팀이 됐다. 그렇다고 김기태 감독의 스트레스가 없는 건 아니다. 팀이 어이없이 지거나 역전패를 당할 땐 그도 사람이기에 부글부글 끓는다. 하지만 김 감독은 화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웃으며 선수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김기태 감독은 5월 24일 넥센전에 앞서 경기 전 그라운드 훈련을 취소하고 자율 훈련을 지시했다.

전날 LG는 넥센에 6-10으로 져 2연패했다. 중요한 순간 결정적인 실책이 연거푸 나와 와르르 무너졌다. 흔히 말하는 가장 안 좋게 지는 경기였다. 김기태 감독이 초보 사령탑이 아니라는 게 이런 일에서 나타났다. 감독이 열을 받으면 다음날 훈련량이 많아지는 게 일반적이다. 감독의 눈치를 봐야 하는 코치 입장에서도 선수들을 더 채찍질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분위기가 더 무겁게 가라앉고 선수들이 위축돼 또 지는 게 연패 팀의 특징이다. 이날은 경기 전미팅도 하지 않았다. 경기 전 나름대로 몸을 푼 LG 선수들은 타선의 집중력을 앞세워 5-3으로 승리하고 연패를 끊었다.

김 감독은 선수들이 잘 할 땐 격려해주고 못 할 땐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는다. “다들 프로다.누구보다 자신이 괴로워하고 반성하고 있을 것이다. 난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김 감독의 쓴소리는 근성이 부족하거나 기본을 지키지 않았을 때 나온다. 야구는 단체 스포츠. 선수 한 명의 나태함과 해이함이 팀 전체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5월30일 롯데전에 앞서 이병규(등번호 7번)가 “아파서 오늘은 못 뛰겠습니다”라고 하자 “만약 오늘이 시즌 마지막 경기이고 넌 정규타석에서 4타석이 모자란다. 다 채우면 타격 1위가 되는데 지금 몸이 그 상태야. 그러면 못 나간다고 할거냐”라고 물었다. 이병규는 묵묵부답이었다. 김 감독은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뒤 이병규를 쉬게 했다.

다음날 경기에도 빠진 이병규는 6월부터는 전 경기에 나와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무릎이 안 좋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LG 선수들은 ‘오늘 안 나가도 내일 뛸 수 있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뛴다. 김기태 감독은 “경기에 지고 나면 선수들 얼굴에서 아쉬움이나 투지 같은 것이 보인다. 이걸 보면서 ‘우리 팀이 쉽게 처지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올해는 순위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넥센의 돌풍은 더 드라마틱하다. 넥센은 5월에 2008년 팀 창단 이후 최다이자 올 시즌 8개 구단 중 가장 긴 8연승을 달리며 프로야구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최하위 후보라는 평가를 무색하게 만든 약체의 반란이었다. 김 감독은 2009년 부임 후 세 시즌을 스트레스 속에 보냈다. 2009년 60승으로 6위에 머물렀고 2010년엔 7위로 내려갔다. 성적만 떨어진 게 아니라 구단 사정으로매 시즌 주전 선수를 다른 팀으로 떠나 보내야 했다. 결국 지난해엔 처음으로 최하위의 수모를 맛봤다.

넥센은 객관적인 전력 자체가 약한 팀이다. 돈이 궁해 이적시킨 주전의 공백을 다른 팀에서 외면 받거나 방출된 선수들이 메우 다 보니 층도 얇아졌다. 김시진 감독이 택한 길은 믿음과 인내를 통한 선수들의 성장이었다. 그는 “다른 팀 같으면 기다려주지 않았을 선수들이 우리 팀에선 기회를 얻었다.

못한다고 바로 빼면 자신감이 없어 더 못했을 텐데 우리는 계속 기용했다”고 설명했다.때마침 구단도 선수 팔던 이미지를 씻고 투자에 나서기 시작했다. 넥센은 지난 겨울 FA이택근과 메이저리그 출신 김병현을 데려와 전력을 보강했다. 김 감독은 “둘이 왔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박병호를 비롯해 장기영·정수성 등 기존 선수들이 잘하니까 그 영입이 플러스 알파로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감독이 타자들에게 하는 주문은 딱 하나다. “못 쳐도 좋으니 마음껏 휘둘러라.” 이런 전폭적인 지원 속에 넥센 선수들은 거침없이 방망이를 돌린다. 늘 당당하고 스윙을 도중에 멈칫하는 법이 없다. 코칭스태프의 주문대로 삼진을 당하더라도 고개 숙이고 더그아웃에 들어오지 않는다. 넥센은 지난해 79홈런으로 8개 구단 중 최하위에 머물렀다.

올해는 54경기를 치른 14일 현재 53홈런으로 SK와 공동 1위를 달리고 있다. 넥센은 팀 타율이 뒤에서 두 번째이지만 득점은 앞에서 두 번째다. 타자들이 주자가 나간 기회에서 주눅들지 않고 타격한 것이 이런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투수 운용에선 상식을 거부한 뚝심이 드러난다. 김시진 감독은 투수가 안타를 맞더라도 좀처럼 바꾸지 않고 1이닝 이상 맡긴다.

자기가 내보낸 주자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에서다. 왼손 타자가 나오면 왼손 투수를 내보내는 ‘원포인트 릴리프’는 거의 쓰지 않는다. 왼손 투수가 왼손 타자에 강하다는 속설이 크게 들어맞지 않기도 하거니와 한 타자만 처리하고 내리면 선수가 자신감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시진 감독은 “믿고 맡기니 투수들의 책임감이 더 생겼다. 오히려 성적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넥센 투수들은 위기를 스스로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성장하고 깨닫고 성취감을 느낀다. 책임감 부여를 통해 얻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바로 전력의 절약이다. 멀리 내다본 김시진 감독은 “여름이 되면 투수의 체력이 관건이다. 우리 투수들은 출전 경기 수가 적어 부하가 적다”며 “이렇게 하면 연패가 와도 빨리 벗어날수 있다”고 자신했다.

김시진 감독은 선수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투수에겐 볼넷을 내줄 바엔 차라리 안타를 맞으라고 주문하고,타자들에겐 적극적으로 뛰어 한 베이스를 더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실패를 하면서 실력이 는다. 도루하다 처음 2m 앞에서 아웃됐다면 다음엔 1m 앞에서 죽는다. 그 다음에 성공하면 자신감이 생겨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패나 패배에 대해 어떠한 질책도 하지 않기에 선수들은 더 흥이 난다. 김시진 감독은 “선수들도 하나의 인격체다. 마음을 다치게 해서 뭐가 좋겠나. 어차피 매일 야구 경기를 한다. 자신이 문제를 잘 알고 해결책을 찾고 있을 것”이라며 신뢰를 보냈다. 김감독은 졌을 때 미팅을 하지 않는다. 자신감을 잃었을 때 다그치기보다 아무 말 안 하면서 기를 살려주는 게 그의 원칙이다.

묵묵히 선수들을 챙기는 김시진 감독 덕분에 넥센 선수단은 지고 난 다음날에도 분위기가 처지지 않는다. 평소와 다름없이 활기차고 즐겁게 훈련하고 경기를 준비한다.지난 겨울 LG에서 친정팀 넥센으로 돌아온 이택근은 “그동안 성적이 안 나 스트레스가 심했다. ‘집중, 집중’만 생각하다 오히려 흐트러졌다. 올해는 ‘릴렉스, 릴렉스’하다가 경기하는 3시간만 집중하자는 분위기다. 그게 가장 크다. 한마디로 말하면 긍정의 힘”이라

고 설명했다.


실패해라, 그러면 성공한다김시진 감독이 선수들의 믿음을 얻는 또 하나의 비결은 ‘내탓’이다. 김시진 감독은 선발20승을 두 차례나 거두는 등 통산 124승을 올린 명 투수 출신이다. 가끔 선수들의 플레이가 못마땅하게 여겨질 때가 있을 것이다.김시진 감독은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는다.경기에 패하면 무조건 “내 실수다”, “감독이 잘못해 졌다”며 자책하고 승리했을 땐 “선수들이 잘 해줘 이겼다”고 공을 돌린다. 실책한 선수나 난타당한 투수에겐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다”고 힘을 불어넣기도 한다.

김시진감독은 “성적에 따른 모든 책임은 내가 질테니 매 경기 최선을 다해 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이런 사령탑 밑에서 뛰는 선수들은 더 분발하게 마련이다. 그동안 우승한 팀을 보면 감독이 선수를 믿고, 선수가 감독을 따랐다. 올 시즌 넥센은 성공하는 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구단의 한 감독은“넥센과 붙어보니 쉽게 이기기 힘들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력도 전력이지만 무엇보다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넥센은 “올 시즌 치열한 4위 경쟁을 해서 내년에 우승하기 위한 교두보를 만들겠다”는 김시진넥센 감독의 계획대로 전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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