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찾아 삼만리 ‘2015 이민 가이드’] 인생 대전환기 철저한 위기관리 필수
[희망 찾아 삼만리 ‘2015 이민 가이드’] 인생 대전환기 철저한 위기관리 필수
“자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지 않을 텐가?” 삶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면 누구나 한번쯤 ‘처음부터 다시’를 외치게 마련이다. 그럴 때면 ‘이민’이란 단어를 검색해 본다. 이민 잘하는 법, 나는 이렇게 이민에 성공했다. 이민으로 부자 되자…. 이런 이민 가이드 흔하다. 그러나 이민은 재산·집·직업·이웃·법률·문화 심지어 나라까지 모든 환경을 바꾸는 일생일대의 일이다. 인생 최대의 위기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11개 나라·지역을 골랐다. 현지 한인 이민자와 주재원 등으로부터 이민 전략, 도전할 만한 업종, 생활 여건 등을 들어봤다. 잠재 성장률마저 3% 밑으로 추락하기 직전이다. 명예퇴직 바람이 거센데 은퇴 준비는 꿈도 못 꾼다. 사교육비 부담에 허리가 휜다. 기껏 대학을 졸업해도 번듯한 일자리 구하기는 하늘을 별 따기만큼 어렵다. 공식 청년 실업률만 두 자릿수에 이른다. 월급은 급여통장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저물가라는데 지갑은 늘 얇다. 고령화 사회를 넘어 고령 사회, 초고령 사회가 목전이다. 돈 벌 사람은 적은데 돈 쓸 사람만 많다. 삶의 질도 팍팍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노동시간이 가장 길다. 일과 삶의 균형이 중요하다는데 저녁이 있는 삶 따윈 잊은 지 오래다. 전세·월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지만 내 집 마련의 꿈은 꿈일 뿐이다.
적지 않은 한국인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정말 이민이라도 떠나야 하나? 사실 글로벌 시대에 국적은 큰 의미가 없다. 꿈과 용기, 돈과 능력만 있다면…. 아니 그게 충분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희망을 찾아 훌쩍 떠나보는 건 어떨까? 과거와 달리 해외 여행이나 유학을 경험한 사람이 늘어 지구촌 어디라도 그리 낯설진 않은 시대다.
이민-. 이민은 그러나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 미국의 유명 드라마 [소프라노스]에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한국인 사장이 등장한다. 그는 출소한 이탈리아인 마피아 직원에게 조언한다. “열심히 일하라고, 여기 한국 사람들처럼 말이야. 난 한국에서 왔어. 신발 한 켤레랑 삼촌 주소만 달랑 들고 이 먼 곳까지 왔지. (자네가 겪은) 감옥살이보다 더 열악했지. 하지만 난 이렇게 자수성가했어. 이렇게 (감옥에서 고생한) 당신보다 더 고생해서 사장(boss)이 됐잖아?” 이탈리아인은 자신의 마피아 친구들에게 한국인 사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인 이민자는 자기 가게를 갖는다는 걸 무슨 종교처럼 신성시하더라구. 생각해보니 감방생활이란 게 결국 이민생활이랑 별로 다를 바 없거든. 그걸 견디고 회사를 차려? 코리안 피플, 대단한 사람들이야.” 그의 말이 그리 틀리진 않다. 각 국에 흩어진 한인 이민 1세대들은 이민이 마치 창살 없는 감옥 같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이민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두렵게 느껴진다. 망명처럼 한국을 떠나 영원히 외국에서만 살아야 할 것 같은 부담으로 밀려온다. 한 번 결정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기분 때문에 이민을 꺼리기 일쑤다.
이제는 좀 달라졌다. 세계화가 진척된 최근엔 이민이라는 개념의 무게는 예전보다 가벼워졌다. UN에서 정한 기준에 따르면 1년 이상 국경을 넘어 거주지를 옮기는 것을 ‘장기 이동’이라고 한다. 3개월에서 1년 사이 외국에 나가 있는 것은 ‘단기 이동’이다. 둘 다 ‘해외 이주’ ‘해외 이민’이라 지칭한다. 그래서 통상 3개월 이상만 외국에 나가 있으면 UN이 볼 땐 모두 ‘이민’이다. 3개월 내 외국에 체류하는 것만 ‘여행’이라고 구분한다.
몇 개월 해외에서 사는 걸 가지고 뭘 거창하게 이민이라고 하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삶의 터전을 온전히 옮겨야 진정한 의미의 이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건 고리타분한 생각이다.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고, 해외 부동산과 자산에도 마음대로 투자할 수 있는 시대다. 영어만 어느 정도 구사하면 세계 어느 곳에서든 큰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다. 이민을 위해 국적을 굳이 바꿀 필요도 없다. 세계화가 제법 진행된 국가라면 세율이나 법률로 외국인을 크게 차별하지도 않는다. 한국을 제외한 많은 나라에 차별금지법이 제정돼 있다. 불법 체류나 세금 포탈 같은 위법 행위만 저지르지 않으면 어느 나라에 가든 눈치 보며 살 필요가 없다. 이민은 개인이 경제적 터전과 정부를 스스로 선택하는 행위다. 같은 재산으로 더 나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나라, 내가 내는 세금만큼 복지혜택을 돌려받을 수 있는 정부를 고를 수 있단 의미다. 물론 잘못 선택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면 당초 꿈꾼 삶의 질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돈만 쓰고 추방당할 수도 있고, 현지인들로부터 배척당할 수도 있다. 자녀 교육이 불안정해질 수 있고 소득이 쪼그라들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야 한국에서 살면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역시 개인의 판단·도전·선택의 문제다.
이민정책은 나라별로 천차만별이다. 이민을 적극적으로 반기는 나라가 있는 반면, 이민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어 배타적인 곳도 있다. 이민을 반기다가도 경기 침체 등으로 일자리가 줄면 돌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민국을 결정하기 직전까지 정책과 조건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늘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으로 이민 유입국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미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이민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진 ‘전통 이민국’이 있다. 여기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초청 노동자를 받아들인 독일 등 서유럽 국가 중심의 ‘초청 노동자 유입국’,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외국인 노동자를 들이기 시작한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 중심의 ‘후발 이민국’이 있다. 일본이나 대만, 한국은 남유럽 국가와 비슷한 후발 이민국에 속한다. 전통 이민국은 이민정책이 잘 마련돼 있고 이민자를 고려한 법제가 튼튼한 편이다. 초청 노동자 유입국은 자국 실업률에 따라 이민정책이 탄력적이다. 후발 이민국 중엔 이민법을 계속 정비하는 나라가 많아 이민 분위기가 자주 달라지는 편이다.
이민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거나 몸만 달랑 옮기는 유학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생활터전을 모두 옮기고 재산도 새로 형성해야 한다. 자녀 교육 계획도 재고해야 하고 이웃까지 모두 새로 만들어야 한다. 전문직과 달리 직장만 다닌 봉급생활자라면 직업까지 새로 구해야 한다. 외국계 현지 회사에 바로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취업이 어렵다면 현지에서 회사를 내거나 스스로 일자리를 만드는 투자이민을 준비해야 한다. 거주 비자, 영주권, 시민권 등을 장기간에 걸쳐 마련해야 한다.
이민을 꿈꾸는 사람은 적지 않다. 시장조사전문기업 마크로밀엠브레인이 전국의 만 19~59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올 초에 조사한 결과, 10명중 7~8명(76.4%)은 이민을 한번쯤 생각해 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이민을 고려하게 된 원인은 ‘한국 사회의 지나친 경쟁 구조’(동의율 84.2%) ‘자녀에게 더 나은 교육환경 제공’(82%) ‘점점 심해지는 소득불평등 구조’(78%) 등이었다. 이민을 고려한 나라에 대해 응답자들은 캐나다(복수응답 60.8%)를 첫 손에 꼽았다. 그 뒤로 뉴질랜드(59.5%)·호주(58.1%)·미국(43.2%) 순이었다. 이와 반대로 요즘엔 한국으로 오려는 외국인도 적지 않다. 특히 부유한 중국인 사이에선 한국의 부동산을 사서 영주권을 받으려는 수요가 꾸준하다. 외국인에게 한국 영주권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한국 정부는 현재 투자이민 활성화를 정책 기조로 잡고 있다. 투자이민을 통해 자본을 유치하고 경제활성화를 유도하겠다는 복안이다. 황교안 총리는 법무부장관 시절 “투자자 편의를 도모하고 적절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등 투자이민 정책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법무부는 ‘출입국관리법시행령’ 등을 통해 거주의 체류자격(F-2) 비자 발급을 고시하고 있다. 지난 1월 26일 개정 고시된 바에 따르면 강원평창·인천경제자유구역·제주도·전남여수·부산시 등 5개 지역에 투자이민을 허용하고 있다. 투자 하한 금액은 5억~7억원 내외다. 외국인의 거주(F-2) 혹은 영주(F-5)는 매년 1000여명씩 늘고 있다. 거주 외국인은 법무부의 이민활성화 정책, 제주도 부동산 이민이 활성화되면서 2011년 2만여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2428명(2012년), 2776명(2013년) 규모로 늘어나고 있다. 영주(F-5)도 늘고 있다. 2011년 2741명 수준에서 2012년 3928명, 2013년에는 5064명으로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결혼이민을 제외한 숫자다.
- 박상주 기자 park.sangjoo@joins.com 한국은 과거부터 이민이 흔한 나라였다. 1980년대 말을 기점으로 이민하는 나라(이출국)에서 이민을 받는 나라(이입국)로 변모했을 뿐이다. 누구나 한두 다리만 걸치면 해외 곳곳에 면식이 있는 친구나 친척이 있을 정도다. 한국인의 해외 이민 역사는 조선 말기인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중국 만주지방과 러시아 연해주, 일본으로의 이주가 크게 늘었다. 정치적 박해와 경제적 궁핍, 혹은 강제 이주 등이 주요 이유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엔 파독 광부·간호사 등 노동이주 이민이 주종을 이뤘다. 영화 [국제시장]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주한독일대사관에 따르면 1977년까지 8000여 명의 한국인 남성이 광부로 독일로 이주했다. 그 뒤를 이어 1만여명의 여성이 간호사로 독일 병원에 파견됐다. 독일로선 이례적인 이민 수용책이었다. 독일이 유럽권 밖 국가와 체결한 첫 협정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은 30%에 달하는 실업률을 줄였고 독일은 광부 인력 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다. 본래 파독 간호사들은 3년 후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절반 이상이 독일에 남았다. 독일인이나 파독 광부와 결혼해 정착했다. 한국에 있는 남편을 불러들여 독일에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남은 이들이 재독동포가 됐다. 한국인의 현대적 의미의 첫 이민이다.
이런 이민사는 1970~1980년대 중동 건설 붐과 함께 중동 노동이주로 이어졌다. 1965년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부터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한국인 이민이 줄을 이었다. 대규모 영주이민으로 만들어진 것이 미 서부 한인타운이다.
한국인의 노동이주와 영주이민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돼 1976년 4만6000여명으로 정점에 달했다. 그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매년 3만여명씩 국외로 이민을 나갔다. 하지만 1993년에는 2만명 미만으로 감소했다. 한국 경제가 최대 활황으로 치달아 굳이 외국보다 한국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해외 취업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일어난 ‘중동붐’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그 결과 1982년 해외 취업자 규모는 20만명에 달해 정점을 찍었다. 그 후 1994년에는 2만5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말부터는 한국인의 해외 유출보다 외국인 노동자의 국내 유입이 더 느는 새로운 현상이 발생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실업률이 증가하면서 해외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이 다시 늘었다. 정부도 국외취업활성화방안 등을 마련해 이출을 적극 도왔다. 해외 여행이 자유화되면서 장기 해외 체류 형태의 이민도 주목 받기 시작했다.
최근에도 해외 취업을 장려하는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정부는 청년실업률 해소 등을 목적으로 청년들의 해외 취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한국이 원조국가가 된 것을 치적으로 삼으며 코이카 등을 통해 저개발국으로 젊은이들을 파견했다. 중동을 다녀온 박근혜 대통령은 중동으로 해외 취업을 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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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한국인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정말 이민이라도 떠나야 하나? 사실 글로벌 시대에 국적은 큰 의미가 없다. 꿈과 용기, 돈과 능력만 있다면…. 아니 그게 충분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희망을 찾아 훌쩍 떠나보는 건 어떨까? 과거와 달리 해외 여행이나 유학을 경험한 사람이 늘어 지구촌 어디라도 그리 낯설진 않은 시대다.
이민-. 이민은 그러나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 미국의 유명 드라마 [소프라노스]에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한국인 사장이 등장한다. 그는 출소한 이탈리아인 마피아 직원에게 조언한다. “열심히 일하라고, 여기 한국 사람들처럼 말이야. 난 한국에서 왔어. 신발 한 켤레랑 삼촌 주소만 달랑 들고 이 먼 곳까지 왔지. (자네가 겪은) 감옥살이보다 더 열악했지. 하지만 난 이렇게 자수성가했어. 이렇게 (감옥에서 고생한) 당신보다 더 고생해서 사장(boss)이 됐잖아?” 이탈리아인은 자신의 마피아 친구들에게 한국인 사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인 이민자는 자기 가게를 갖는다는 걸 무슨 종교처럼 신성시하더라구. 생각해보니 감방생활이란 게 결국 이민생활이랑 별로 다를 바 없거든. 그걸 견디고 회사를 차려? 코리안 피플, 대단한 사람들이야.”
이민생활은 창살 없는 감옥살이?
이제는 좀 달라졌다. 세계화가 진척된 최근엔 이민이라는 개념의 무게는 예전보다 가벼워졌다. UN에서 정한 기준에 따르면 1년 이상 국경을 넘어 거주지를 옮기는 것을 ‘장기 이동’이라고 한다. 3개월에서 1년 사이 외국에 나가 있는 것은 ‘단기 이동’이다. 둘 다 ‘해외 이주’ ‘해외 이민’이라 지칭한다. 그래서 통상 3개월 이상만 외국에 나가 있으면 UN이 볼 땐 모두 ‘이민’이다. 3개월 내 외국에 체류하는 것만 ‘여행’이라고 구분한다.
몇 개월 해외에서 사는 걸 가지고 뭘 거창하게 이민이라고 하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삶의 터전을 온전히 옮겨야 진정한 의미의 이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건 고리타분한 생각이다.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고, 해외 부동산과 자산에도 마음대로 투자할 수 있는 시대다. 영어만 어느 정도 구사하면 세계 어느 곳에서든 큰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다. 이민을 위해 국적을 굳이 바꿀 필요도 없다. 세계화가 제법 진행된 국가라면 세율이나 법률로 외국인을 크게 차별하지도 않는다. 한국을 제외한 많은 나라에 차별금지법이 제정돼 있다. 불법 체류나 세금 포탈 같은 위법 행위만 저지르지 않으면 어느 나라에 가든 눈치 보며 살 필요가 없다.
스스로 새로운 생활터전 선택할 기회
이민정책은 나라별로 천차만별이다. 이민을 적극적으로 반기는 나라가 있는 반면, 이민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어 배타적인 곳도 있다. 이민을 반기다가도 경기 침체 등으로 일자리가 줄면 돌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민국을 결정하기 직전까지 정책과 조건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늘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으로 이민 유입국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미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이민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진 ‘전통 이민국’이 있다. 여기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초청 노동자를 받아들인 독일 등 서유럽 국가 중심의 ‘초청 노동자 유입국’,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외국인 노동자를 들이기 시작한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 중심의 ‘후발 이민국’이 있다. 일본이나 대만, 한국은 남유럽 국가와 비슷한 후발 이민국에 속한다. 전통 이민국은 이민정책이 잘 마련돼 있고 이민자를 고려한 법제가 튼튼한 편이다. 초청 노동자 유입국은 자국 실업률에 따라 이민정책이 탄력적이다. 후발 이민국 중엔 이민법을 계속 정비하는 나라가 많아 이민 분위기가 자주 달라지는 편이다.
이민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거나 몸만 달랑 옮기는 유학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생활터전을 모두 옮기고 재산도 새로 형성해야 한다. 자녀 교육 계획도 재고해야 하고 이웃까지 모두 새로 만들어야 한다. 전문직과 달리 직장만 다닌 봉급생활자라면 직업까지 새로 구해야 한다. 외국계 현지 회사에 바로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취업이 어렵다면 현지에서 회사를 내거나 스스로 일자리를 만드는 투자이민을 준비해야 한다. 거주 비자, 영주권, 시민권 등을 장기간에 걸쳐 마련해야 한다.
이민을 꿈꾸는 사람은 적지 않다. 시장조사전문기업 마크로밀엠브레인이 전국의 만 19~59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올 초에 조사한 결과, 10명중 7~8명(76.4%)은 이민을 한번쯤 생각해 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이민을 고려하게 된 원인은 ‘한국 사회의 지나친 경쟁 구조’(동의율 84.2%) ‘자녀에게 더 나은 교육환경 제공’(82%) ‘점점 심해지는 소득불평등 구조’(78%) 등이었다. 이민을 고려한 나라에 대해 응답자들은 캐나다(복수응답 60.8%)를 첫 손에 꼽았다. 그 뒤로 뉴질랜드(59.5%)·호주(58.1%)·미국(43.2%) 순이었다.
마음은 가볍게, 준비는 치밀하게
법무부는 ‘출입국관리법시행령’ 등을 통해 거주의 체류자격(F-2) 비자 발급을 고시하고 있다. 지난 1월 26일 개정 고시된 바에 따르면 강원평창·인천경제자유구역·제주도·전남여수·부산시 등 5개 지역에 투자이민을 허용하고 있다. 투자 하한 금액은 5억~7억원 내외다. 외국인의 거주(F-2) 혹은 영주(F-5)는 매년 1000여명씩 늘고 있다. 거주 외국인은 법무부의 이민활성화 정책, 제주도 부동산 이민이 활성화되면서 2011년 2만여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2428명(2012년), 2776명(2013년) 규모로 늘어나고 있다. 영주(F-5)도 늘고 있다. 2011년 2741명 수준에서 2012년 3928명, 2013년에는 5064명으로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결혼이민을 제외한 숫자다.
- 박상주 기자 park.sangjoo@joins.com
[박스기사] 고단한 한국의 이민사 - 일제강점기 강제이주, 파독 광부·간호사
1945년 광복 이후엔 파독 광부·간호사 등 노동이주 이민이 주종을 이뤘다. 영화 [국제시장]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주한독일대사관에 따르면 1977년까지 8000여 명의 한국인 남성이 광부로 독일로 이주했다. 그 뒤를 이어 1만여명의 여성이 간호사로 독일 병원에 파견됐다. 독일로선 이례적인 이민 수용책이었다. 독일이 유럽권 밖 국가와 체결한 첫 협정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은 30%에 달하는 실업률을 줄였고 독일은 광부 인력 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다. 본래 파독 간호사들은 3년 후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절반 이상이 독일에 남았다. 독일인이나 파독 광부와 결혼해 정착했다. 한국에 있는 남편을 불러들여 독일에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남은 이들이 재독동포가 됐다. 한국인의 현대적 의미의 첫 이민이다.
이런 이민사는 1970~1980년대 중동 건설 붐과 함께 중동 노동이주로 이어졌다. 1965년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부터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한국인 이민이 줄을 이었다. 대규모 영주이민으로 만들어진 것이 미 서부 한인타운이다.
한국인의 노동이주와 영주이민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돼 1976년 4만6000여명으로 정점에 달했다. 그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매년 3만여명씩 국외로 이민을 나갔다. 하지만 1993년에는 2만명 미만으로 감소했다. 한국 경제가 최대 활황으로 치달아 굳이 외국보다 한국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해외 취업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일어난 ‘중동붐’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그 결과 1982년 해외 취업자 규모는 20만명에 달해 정점을 찍었다. 그 후 1994년에는 2만5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말부터는 한국인의 해외 유출보다 외국인 노동자의 국내 유입이 더 느는 새로운 현상이 발생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실업률이 증가하면서 해외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이 다시 늘었다. 정부도 국외취업활성화방안 등을 마련해 이출을 적극 도왔다. 해외 여행이 자유화되면서 장기 해외 체류 형태의 이민도 주목 받기 시작했다.
최근에도 해외 취업을 장려하는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정부는 청년실업률 해소 등을 목적으로 청년들의 해외 취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한국이 원조국가가 된 것을 치적으로 삼으며 코이카 등을 통해 저개발국으로 젊은이들을 파견했다. 중동을 다녀온 박근혜 대통령은 중동으로 해외 취업을 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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