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한국을 흑백에서 컬러로 바꾸다] 1993년 ‘신경영’ 선언, 한국 경제 변화의 시작
[이건희, 한국을 흑백에서 컬러로 바꾸다] 1993년 ‘신경영’ 선언, 한국 경제 변화의 시작
개방형 문화로 자기 혁신하는 조직 만들어... 끊임없는 성찰과 성별·나이·국적 불문 인재 등용 1980년대 한국은 취해 있었다. 저유가·저금리·저달러가 불을 댕긴 삼저 호황으로 수출은 날로 불어났고, 경제성장률은 매년 10%대에 달했다. 1987년 시민들의 힘으로 쟁취한 직선제 개헌과 1988년 올림픽 개최, 1990년을 전후한 냉전종식, 1993년 문민정부 출범 등으로 사회 분위기도 한껏 달아올랐다.
‘잘 살아보자’는 열망을 이루려 그간 얼마나 아끼고 노력하며 희생했던가. 시민들의 억눌렸던 욕망이 사회·경제적 여건에 휩쓸려 분출했다. “한국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해외 언론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제 호황이 절정으로 치닫던 1993년 한 기업인이 위기와 변화를 외쳤다.
“15년 전부터 위기를 느껴왔다. 지금은 잘 해보자고 할 때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갈림길에 서 있는 때다. 우리 제품은 선진국을 따라잡기에는 아직 멀었다. 2등 정신을 버려야 한다.”
이 발언의 주인공은 10월 25일 세상을 떠난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다. 직접적으론 삼성 전 임직원을 향해 한 말이지만, 지나친 낙관주의에 빠진 한국 사회에 대한 질타이기도 했다. 이 전 회장이 ‘경영의 신’으로서 면모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신경영’ ‘1등 정신’을 주장하면서다. 삼성전자 제품의 품질 문제가 잇달아 제기된 것이 그 실마리를 제공했다.
당시 이 전 회장은 사내방송 SBC의 한 고발프로그램에서 세탁기 생산 근로자들이 결함이 있는 세탁기 뚜껑을 칼로 깎아 본체에 붙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본인도 VCR·TV 불량을 빈번하게 경험했다. 같은 해 2월에는 미국 전자제품 양판점 ‘베스트바이’에 방문해, 먼지 쌓인 삼성 TV가 구석에 진열된 모습을 보고 크게 상심하기도 했다.
1987년 회장 취임 일성으로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 경영을 통해 90년대까지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라는 포부를 밝힌 이 전 회장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이런 문제는 비단 삼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사회 전반에 일을 얼렁뚱땅 처리하는 ‘적당주의’가 깔렸다. 적은 인력과 자원으로 많은 양의 제품을 생산해야 하므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기업 운영방식과 제조시스템 역시 후진적이라 품질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낮은 인건비 덕에 제품 가격이 저렴해 수출이 잘 됐다. 인건비가 높아진 일본이 1970년대부터 첨단산업과 원천기술에 집중하기 시작하며, 한국에 기회가 생긴 측면이 있다. 다만 한국을 대체할 수 있는 중하위 제품 생산국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기업들의 혁신 유인은 떨어졌다.
이 전 회장에게 전달된 ‘후쿠다 보고서’에는 90년대 초 삼성 조직 문화의 문제가 잘 드러난다.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이었던 후쿠다 타미오 일본 쿄토공예섬유대학 명예교수가 자기 자리를 걸고 쓴 보고서로 “경영진과 디자인 부서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 업무가 비효율적이고 경영진이 디자인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 골자다.
이에 이 전 회장은 200여명의 삼성전자 임직원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불러 모아 삼성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신경영’을 선언한다.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하게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 한국 경제가 성장하며 경쟁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어 사고방식과 업무 관행, 생산 방식,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가 없으면 생존이 어렵다는 것이다.
삼성의 신경영 선포는 재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에는 큰 라인을 지어 대규모 생산량을 유지할 수 있는 영업에만 열중하는 기업 운영 방식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 회장은 임직원들이 안주하기 쉬운 제조업적 사고방식에 일침을 놓으며 질적 변화를 주문한 것이다.
이 전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불량은 암이다. 삼성은 자칫 잘못하면 암의 말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며 “생산 현장에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고, 3만 명이 만들고 6000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 낭비적인 집단인 무감각한 회사”라며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제품의 불량을 줄이는 미시적 접근부터 나섰다. 생산 과정에서 불량이 생기면 라인을 멈추고, 신속히 문제를 해결해 재가동하는 ‘라인스톱제’를 도입했다. 불량의 원인을 찾아내 생산 체계를 단계적으로 선진화했다.
또 강렬한 퍼포먼스로 임직원은 물론 소비자들에게 품질 향상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각인시켰다. 1995년 ‘불량제품 화형식’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이 전 회장 지시로 불량 무선전화기와 키폰·팩시밀리·휴대폰을 교환해줬다. 이렇게 수거된 15만대 가량의 불량제품을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쌓아 산산이 부순 뒤 불태운 것이다.
카타야마 히로시 와세다대 교수는 2013년 ‘삼성 신경영 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 “삼성의 품질경영은 스피드·타이밍은 물론 완벽을 추구하고 인재를 중시해 시너지를 지향한다”며 “프로엑티브(사전 대책 강구)·리엑티브(후속 조치)의 융합형 방식이 삼성의 질 경영 성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또 제품 생산과 의사 결정에 있어 불필요한 프로세스를 제거하고 표준화된 개발 프로세스를 마련함으로써 의사결정의 속도를 높였다. 속도는 물론 혁신성·모험심을 향상하기 위한 조치다.
기업 문화와 조직 체계는 업무의 관성과 임직원들의 습관 때문에 바꾸기 어렵고, 이는 생산성 향상·신사업 추진과 같은 기업의 전환에 발목을 잡는다. 삼성경제연구소가 1994년 내놓은 ‘삼성의 특성’과 관련한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그간 의사결정 과정은 프로세스에 의지해 관료주의적이고 기술·설비·인력에 폐쇄적이며 소유 의식이 강했다.
모든 프로젝트가 절차에 얽매여 인사·재무 같은 관리부서가 힘을 갖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기업 문화는 모험심이 필요한 신사업 진출을 어렵게 했다. 규정과 절차는 합리적이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지만 신속한 의사결정과 창조적 도전의식이 중요할 때에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개방형 체계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임직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했다. 과거 경영은 임직원이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면 됐지만, 현대 경영은 축구처럼 선수들의 개인기와 협동심, 상황변화에 대한 순발력 등이 좌우한다는 것이 이 전 회장의 생각이다.
중견기업학회장을 맡은 이홍 광운대 경영대 교수는 ‘삼성그룹의 재창조: 조직변화 과정의 이해’ 보고서에서 “경영자의 특성은 기업의 조직구조뿐만 아니라 기업의 전략적 선택, 전략 시행의 완급에도 영향을 미쳐 기업의 외부환경에 대한 변화 노력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설명했다.
이 전 회장은 관리형 창업자인 이병철 선대 회장과 달리 위험감수형이다. 그는 1970년대 부친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반도체 사업에 진출했다.
당시 반도체 사업은 위험성이 크다는 평가가 많았다. 한국 반도체 사업의 역사를 다룬 [외발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다]를 보면 반도체 산업 관계자가 “D램사업은 도박판과 다름없다. 때를 노린 절묘하고 과감한 배팅이 승부를 좌우한다. 수천억원은 기본 배팅이다”란 말까지 나온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은 이미 1970년대에 안전 위주의 성장전략에 변화가 생겼음을 예상하고, 반도체 등 첨단 산업으로 뛰어들었다고 마음먹었다. 이 전 회장은 2004년 화성 반도체사업장에서 열린 반도체 전략회의에서 “천연자원이 없는 한국과 기업이 앞으로 살아남을 길은 머리를 쓰는 하이테크 산업밖에 없다고 생각해 과감히 투자를 결정했다”고 말한 바 있다.
반도체는 삼성전자의 성장에 빼놓을 수 없는 제품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페어차일드를 시작으로 산요·NEC 등으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았다. 1980~90년대 국내 기술자들이 주말을 이용해 일본을 방문, 현지 기술자들에게 수십만 엔의 사례비를 주고 기술 지도를 받았다. 1993년 신경영을 선포한 뒤로는 미국·일본 등 해외 기술자들을 기술 고문으로 영입했다.
D램 기술과 생산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일본을 제조 장비·소재의 공급창으로 활용했다. 반도체 생산의 공급사슬을 구축한 뒤부터 국내에 대규모 라인을 설치해 세계 각지로 수출에 나섰다. 반도체 진출은 성공적이었다. PC의 세계적 보급으로 반도체 판매가 많이 늘어난 것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기술 노하우와 수익을 바탕으로 액정표시장치(LCD)패널·스마트폰·유기발광다이오드(OLED)·제약 등 신사업으로 확장할 모멘텀을 확보했다. 신경영을 제시한 뒤부턴 적극적인 아웃소싱 전략으로 조달, 생산의 속도를 높이는 한편 공급 사슬을 공고히 했다.
반도체 사업 확장과 해외시장 개척이란 급진적 변화를 수행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인재경영을 펼쳤다. 이 전 회장은 여러 어록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서도 유독 인재·인사와 관련된 게 많다.
그중에서도 2002년 6월 인재 전략 사장단 워크숍에서 했던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 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가장 유명하다. “인재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2003년 5월 사장단 직후 기자들과 만나 한 얘기도 잘 알려졌다.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천재를 양성하는 한편, 신규 사업에 뛰어든 회사의 의사결정을 이해하고 목표를 향해 뛸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삼성전자는 일찌감치 종신고용·연공서열제를 폐지했다. 탄력적이고 민첩한 조직 운영과 환경 변화에 따른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실력주의·성과주의를 도입해 40세 안팎에도 관리직에 오를 수 있다. 이런 제도·문화의 변화로 2005년 삼성전자 임직원의 평균 근속연수가 6년에 불과했던 적도 있다. 그 대신 최고 수준의 급여와 일한 만큼 수당을 지급하는 보상 체계로 임직원들의 능동적 업무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의 조직문화가 엘리트주의고, 명령전달 체계는 하향식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더불어 ‘인력개발원’을 도입해 신입·중견·간부 등 직급 단계별로, 석박사 및 어학 지원, 해외 인력 양성 등 체계화된 교육시스템을 만들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삼성의 성장 배경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삼성에서 일하면 퇴사 후에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인맥이 생기기 때문에 창업하거나 중소기업 경영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며 “일본처럼 자회사를 만들어 퇴직자를 알선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평가했다.
패트릭 라이트 사우스캐롤라이나대 경영대 교수는 ‘삼성 신경영 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신사업을 추진할 때 일반 기업들이 자본·기술 보유 여부를 우선시하는 데 비해 이 전 회장은 인재 확보부터 확인한다”며 “비즈니스 전략과 연계한 인사는 삼성의 성장에 기폭제로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해외 무대에서 활동할 인재 영입과 판로 확대에는 남다른 공을 들였다. 국제적 연구성과가 있거나 해외 시장 확대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들을 대거 채용하고 있다. 마치 종합상사처럼 매년 250~300명의 직원을 ‘지역 전문가’로 양성해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 지구 반대편 지역에서 연수를 보낸다. 연수를 마친 지역전문가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판로 확대 및 조달 창구 확대 활동을 펼친다.
삼성전자 ‘지속가능경영보고서 2020’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진출한 국가는 총 74개국(2019년 기준)으로 지역총괄 15개, 생산거점 37개, 판매거점 52개, R&D센터 38개, 디자인센터 7개, 판매지점·서비스센터·물류법인 81개를 두고 있다.
이 전 회장은 여성인재 등용에도 남다른 철학을 가졌다. 그는 1997년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다른 나라는 남녀가 합쳐 뛰고 있는데, 우리는 남자 홀로 분투하고 있다. 마치 바퀴 하나는 바람이 빠진 채로 자전거 경주를 하는 셈이다. 인적 자원의 국가적 낭비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에 여성에게 채용·승진의 불이익을 없애고, 어린이집 등 인프라를 늘려 보육 부담을 줄였다.
삼성은 이 전 회장이 재임하는 기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성장했다. 1987년 12월 1일 삼성 회장에 취임한 이 전 회장은 2014년 5월 11일 심근경색으로 쓰러질 때까지 9659일 동안 삼성을 이끌었다. 취임 당시 약 9조9000억원이었던 삼성의 그룹 전체 매출은 2018년 약 387조원으로 39배 늘었다. 이 기간 영업이익은 2000억원에서 72조원으로 259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기업가치는 1조원 수준에서 396조원으로, 자산은 10조4000억원에서 878조원으로 뛰었다. 10만명이던 삼성 임직원 수는 52만명이 됐고, 계열사 수는 59개가 됐다. D램 등 메모리반도체와 스마트폰, TV 등 20개 품목이 시장 점유율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90년대 초 포항제철·현대자동차와 각축을 벌이던 삼성전자는 이제는 넘볼 수 없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 전 회장이 지금에 만족하지 않고 혁신을 지향하며 대전환의 시대를 준비한 결과다. 삼성은 능동적으로 변화하며 외환위기를 무사히 넘겼지만, 기존 경영 방식을 고수하던 기업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혁신과 변화하는 기업은 자기 주도의 생태계를 꾸릴 수 있는 데 비해 안주하면 잡혀 먹히고 만다. 간명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이 법칙을 삼성은 신경영으로 성공했다. 2000년대 이후 삼성의 성공 방정식은 국내 대부분 기업들로 전해졌다. ‘이건희 효과’가 한국 경제 전반의 경쟁력을 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전 회장의 부고를 전하며 “삼성에 전문경영인(CEO) 체제가 들어선 뒤에도 큰 틀의 전략적 방향을 제공하는 ‘삼성의 큰 사상가(Samsung’s big thinker)‘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전 회장을 보필한 전직 임원은 이 전 회장을 ’은둔의 철학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집에서 많은 양의 책과 잡지를 읽으며 묵고한 삼성의 미래를 경영진들에게 공유했다는 것이다.
현대 기업의 경영자는 행동하는 철학자다. 경영자는 세상의 변화를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과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 기술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 조직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혜, 고난을 돌파할 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고, 스스로 혁신하는 조직을 만들었으며,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은 이 전 회장은 현대 경영자의 표상과도 같다.
이 전 회장은 2010년에도 ‘위기’를 언급했다. 임직원들을 다잡기 위한 전략적 수사가 아닌, 객관적 상황 인식이다. 삼성을 글로벌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 한국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기업가 곁을 떠난 것은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메시지와 철학, 열정을 통해 한국 경제에 새로운 씨앗을 뿌렸다. 한국 경제의 또 다른 ‘신경영’은 현재를 살아가는 경영자들이 풀어가야 할 숙제다.
#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90년대까지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다.”(1987년 12월 1일 취임사)
#남의 발목은 잡지 말아라
“뛸 사람은 뛰어라. 바삐 걸을 사람은 걸어라. 말리지 않는다. 걷기 싫으면 놀아라. 안 내쫓는다. 그러나 남의 발목은 잡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왜 앞으로 가려는 사람을 옆으로 돌려놓는가?”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
#출근부 찍지 마라, 놀아도 제대로 놀아라
“출근부 찍지 마라. 없애라. 집이든 어디에서든 생각만 있으면 된다. 구태여 회사에서만 할 필요 없다. 6개월 밤을 새워서 일하다가 6개월 놀아도 좋다. 논다고 평가하면 안 된다. 놀아도 제대로 놀아라.”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
#고통극복 후 쾌감, 그때 바뀐다
“한손을 묶고 24시간 살아봐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극복해보라. 나는 해봤다. 이것이 습관이 되고 쾌감을 느끼고 승리감을 얻게 되면 그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다음달, 오사카에서 사장단 불러 지시하며)
#모든게 바뀌어야 초음속
“제트기가 음속(1마하)의 두 배로 날려고 하면 엔진의 힘만 두 배로 있다고 되는가. 재료공학부터 기초물리, 모든 재질과 소재가 바뀌어야 초음속으로 날 수 있다.”(2002년 4월 사장단 회의)
#탁월한_천재가 20만 먹여 살린다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 (2002년 6월 인재 전략 사장단 워크숍)
#사과나무를 심어라
“인재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2003년 5월 사장단 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나)
-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잘 살아보자’는 열망을 이루려 그간 얼마나 아끼고 노력하며 희생했던가. 시민들의 억눌렸던 욕망이 사회·경제적 여건에 휩쓸려 분출했다. “한국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해외 언론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제 호황이 절정으로 치닫던 1993년 한 기업인이 위기와 변화를 외쳤다.
“15년 전부터 위기를 느껴왔다. 지금은 잘 해보자고 할 때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갈림길에 서 있는 때다. 우리 제품은 선진국을 따라잡기에는 아직 멀었다. 2등 정신을 버려야 한다.”
이 발언의 주인공은 10월 25일 세상을 떠난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다. 직접적으론 삼성 전 임직원을 향해 한 말이지만, 지나친 낙관주의에 빠진 한국 사회에 대한 질타이기도 했다. 이 전 회장이 ‘경영의 신’으로서 면모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신경영’ ‘1등 정신’을 주장하면서다. 삼성전자 제품의 품질 문제가 잇달아 제기된 것이 그 실마리를 제공했다.
당시 이 전 회장은 사내방송 SBC의 한 고발프로그램에서 세탁기 생산 근로자들이 결함이 있는 세탁기 뚜껑을 칼로 깎아 본체에 붙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본인도 VCR·TV 불량을 빈번하게 경험했다. 같은 해 2월에는 미국 전자제품 양판점 ‘베스트바이’에 방문해, 먼지 쌓인 삼성 TV가 구석에 진열된 모습을 보고 크게 상심하기도 했다.
1987년 회장 취임 일성으로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 경영을 통해 90년대까지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라는 포부를 밝힌 이 전 회장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임직원 200여명 독일로 불러 “다 바꿔라”
그런데도 낮은 인건비 덕에 제품 가격이 저렴해 수출이 잘 됐다. 인건비가 높아진 일본이 1970년대부터 첨단산업과 원천기술에 집중하기 시작하며, 한국에 기회가 생긴 측면이 있다. 다만 한국을 대체할 수 있는 중하위 제품 생산국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기업들의 혁신 유인은 떨어졌다.
이 전 회장에게 전달된 ‘후쿠다 보고서’에는 90년대 초 삼성 조직 문화의 문제가 잘 드러난다.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이었던 후쿠다 타미오 일본 쿄토공예섬유대학 명예교수가 자기 자리를 걸고 쓴 보고서로 “경영진과 디자인 부서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 업무가 비효율적이고 경영진이 디자인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 골자다.
이에 이 전 회장은 200여명의 삼성전자 임직원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불러 모아 삼성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신경영’을 선언한다.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하게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 한국 경제가 성장하며 경쟁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어 사고방식과 업무 관행, 생산 방식,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가 없으면 생존이 어렵다는 것이다.
삼성의 신경영 선포는 재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에는 큰 라인을 지어 대규모 생산량을 유지할 수 있는 영업에만 열중하는 기업 운영 방식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 회장은 임직원들이 안주하기 쉬운 제조업적 사고방식에 일침을 놓으며 질적 변화를 주문한 것이다.
이 전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불량은 암이다. 삼성은 자칫 잘못하면 암의 말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며 “생산 현장에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고, 3만 명이 만들고 6000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 낭비적인 집단인 무감각한 회사”라며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제품의 불량을 줄이는 미시적 접근부터 나섰다. 생산 과정에서 불량이 생기면 라인을 멈추고, 신속히 문제를 해결해 재가동하는 ‘라인스톱제’를 도입했다. 불량의 원인을 찾아내 생산 체계를 단계적으로 선진화했다.
또 강렬한 퍼포먼스로 임직원은 물론 소비자들에게 품질 향상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각인시켰다. 1995년 ‘불량제품 화형식’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이 전 회장 지시로 불량 무선전화기와 키폰·팩시밀리·휴대폰을 교환해줬다. 이렇게 수거된 15만대 가량의 불량제품을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쌓아 산산이 부순 뒤 불태운 것이다.
카타야마 히로시 와세다대 교수는 2013년 ‘삼성 신경영 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 “삼성의 품질경영은 스피드·타이밍은 물론 완벽을 추구하고 인재를 중시해 시너지를 지향한다”며 “프로엑티브(사전 대책 강구)·리엑티브(후속 조치)의 융합형 방식이 삼성의 질 경영 성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업무 관성 끊고 혁신할 수 있는 조직 문화 도입
기업 문화와 조직 체계는 업무의 관성과 임직원들의 습관 때문에 바꾸기 어렵고, 이는 생산성 향상·신사업 추진과 같은 기업의 전환에 발목을 잡는다. 삼성경제연구소가 1994년 내놓은 ‘삼성의 특성’과 관련한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그간 의사결정 과정은 프로세스에 의지해 관료주의적이고 기술·설비·인력에 폐쇄적이며 소유 의식이 강했다.
모든 프로젝트가 절차에 얽매여 인사·재무 같은 관리부서가 힘을 갖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기업 문화는 모험심이 필요한 신사업 진출을 어렵게 했다. 규정과 절차는 합리적이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지만 신속한 의사결정과 창조적 도전의식이 중요할 때에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개방형 체계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임직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했다. 과거 경영은 임직원이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면 됐지만, 현대 경영은 축구처럼 선수들의 개인기와 협동심, 상황변화에 대한 순발력 등이 좌우한다는 것이 이 전 회장의 생각이다.
중견기업학회장을 맡은 이홍 광운대 경영대 교수는 ‘삼성그룹의 재창조: 조직변화 과정의 이해’ 보고서에서 “경영자의 특성은 기업의 조직구조뿐만 아니라 기업의 전략적 선택, 전략 시행의 완급에도 영향을 미쳐 기업의 외부환경에 대한 변화 노력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설명했다.
이 전 회장은 관리형 창업자인 이병철 선대 회장과 달리 위험감수형이다. 그는 1970년대 부친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반도체 사업에 진출했다.
당시 반도체 사업은 위험성이 크다는 평가가 많았다. 한국 반도체 사업의 역사를 다룬 [외발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다]를 보면 반도체 산업 관계자가 “D램사업은 도박판과 다름없다. 때를 노린 절묘하고 과감한 배팅이 승부를 좌우한다. 수천억원은 기본 배팅이다”란 말까지 나온다.
선대 회장 반대에도 과감히 반도체 진출해 성공
반도체는 삼성전자의 성장에 빼놓을 수 없는 제품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페어차일드를 시작으로 산요·NEC 등으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았다. 1980~90년대 국내 기술자들이 주말을 이용해 일본을 방문, 현지 기술자들에게 수십만 엔의 사례비를 주고 기술 지도를 받았다. 1993년 신경영을 선포한 뒤로는 미국·일본 등 해외 기술자들을 기술 고문으로 영입했다.
D램 기술과 생산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일본을 제조 장비·소재의 공급창으로 활용했다. 반도체 생산의 공급사슬을 구축한 뒤부터 국내에 대규모 라인을 설치해 세계 각지로 수출에 나섰다. 반도체 진출은 성공적이었다. PC의 세계적 보급으로 반도체 판매가 많이 늘어난 것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기술 노하우와 수익을 바탕으로 액정표시장치(LCD)패널·스마트폰·유기발광다이오드(OLED)·제약 등 신사업으로 확장할 모멘텀을 확보했다. 신경영을 제시한 뒤부턴 적극적인 아웃소싱 전략으로 조달, 생산의 속도를 높이는 한편 공급 사슬을 공고히 했다.
반도체 사업 확장과 해외시장 개척이란 급진적 변화를 수행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인재경영을 펼쳤다. 이 전 회장은 여러 어록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서도 유독 인재·인사와 관련된 게 많다.
그중에서도 2002년 6월 인재 전략 사장단 워크숍에서 했던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 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가장 유명하다. “인재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2003년 5월 사장단 직후 기자들과 만나 한 얘기도 잘 알려졌다.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천재를 양성하는 한편, 신규 사업에 뛰어든 회사의 의사결정을 이해하고 목표를 향해 뛸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삼성전자는 일찌감치 종신고용·연공서열제를 폐지했다. 탄력적이고 민첩한 조직 운영과 환경 변화에 따른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실력주의·성과주의를 도입해 40세 안팎에도 관리직에 오를 수 있다. 이런 제도·문화의 변화로 2005년 삼성전자 임직원의 평균 근속연수가 6년에 불과했던 적도 있다.
인재경영·협업문화로 변화에 능동적 대응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삼성의 성장 배경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삼성에서 일하면 퇴사 후에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인맥이 생기기 때문에 창업하거나 중소기업 경영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며 “일본처럼 자회사를 만들어 퇴직자를 알선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평가했다.
패트릭 라이트 사우스캐롤라이나대 경영대 교수는 ‘삼성 신경영 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신사업을 추진할 때 일반 기업들이 자본·기술 보유 여부를 우선시하는 데 비해 이 전 회장은 인재 확보부터 확인한다”며 “비즈니스 전략과 연계한 인사는 삼성의 성장에 기폭제로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해외 무대에서 활동할 인재 영입과 판로 확대에는 남다른 공을 들였다. 국제적 연구성과가 있거나 해외 시장 확대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들을 대거 채용하고 있다. 마치 종합상사처럼 매년 250~300명의 직원을 ‘지역 전문가’로 양성해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 지구 반대편 지역에서 연수를 보낸다. 연수를 마친 지역전문가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판로 확대 및 조달 창구 확대 활동을 펼친다.
삼성전자 ‘지속가능경영보고서 2020’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진출한 국가는 총 74개국(2019년 기준)으로 지역총괄 15개, 생산거점 37개, 판매거점 52개, R&D센터 38개, 디자인센터 7개, 판매지점·서비스센터·물류법인 81개를 두고 있다.
이 전 회장은 여성인재 등용에도 남다른 철학을 가졌다. 그는 1997년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다른 나라는 남녀가 합쳐 뛰고 있는데, 우리는 남자 홀로 분투하고 있다. 마치 바퀴 하나는 바람이 빠진 채로 자전거 경주를 하는 셈이다. 인적 자원의 국가적 낭비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에 여성에게 채용·승진의 불이익을 없애고, 어린이집 등 인프라를 늘려 보육 부담을 줄였다.
삼성은 이 전 회장이 재임하는 기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성장했다. 1987년 12월 1일 삼성 회장에 취임한 이 전 회장은 2014년 5월 11일 심근경색으로 쓰러질 때까지 9659일 동안 삼성을 이끌었다. 취임 당시 약 9조9000억원이었던 삼성의 그룹 전체 매출은 2018년 약 387조원으로 39배 늘었다. 이 기간 영업이익은 2000억원에서 72조원으로 259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기업가치는 1조원 수준에서 396조원으로, 자산은 10조4000억원에서 878조원으로 뛰었다. 10만명이던 삼성 임직원 수는 52만명이 됐고, 계열사 수는 59개가 됐다. D램 등 메모리반도체와 스마트폰, TV 등 20개 품목이 시장 점유율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90년대 초 포항제철·현대자동차와 각축을 벌이던 삼성전자는 이제는 넘볼 수 없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 전 회장이 지금에 만족하지 않고 혁신을 지향하며 대전환의 시대를 준비한 결과다.
‘이건희 효과’ 한국 경제 경쟁력 올라
뉴욕타임스(NYT)는 이 전 회장의 부고를 전하며 “삼성에 전문경영인(CEO) 체제가 들어선 뒤에도 큰 틀의 전략적 방향을 제공하는 ‘삼성의 큰 사상가(Samsung’s big thinker)‘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전 회장을 보필한 전직 임원은 이 전 회장을 ’은둔의 철학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집에서 많은 양의 책과 잡지를 읽으며 묵고한 삼성의 미래를 경영진들에게 공유했다는 것이다.
현대 기업의 경영자는 행동하는 철학자다. 경영자는 세상의 변화를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과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 기술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 조직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혜, 고난을 돌파할 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고, 스스로 혁신하는 조직을 만들었으며,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은 이 전 회장은 현대 경영자의 표상과도 같다.
이 전 회장은 2010년에도 ‘위기’를 언급했다. 임직원들을 다잡기 위한 전략적 수사가 아닌, 객관적 상황 인식이다. 삼성을 글로벌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 한국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기업가 곁을 떠난 것은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메시지와 철학, 열정을 통해 한국 경제에 새로운 씨앗을 뿌렸다. 한국 경제의 또 다른 ‘신경영’은 현재를 살아가는 경영자들이 풀어가야 할 숙제다.
[박스기사] 이건희 회장의 말말말
#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90년대까지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다.”(1987년 12월 1일 취임사)
#남의 발목은 잡지 말아라
“뛸 사람은 뛰어라. 바삐 걸을 사람은 걸어라. 말리지 않는다. 걷기 싫으면 놀아라. 안 내쫓는다. 그러나 남의 발목은 잡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왜 앞으로 가려는 사람을 옆으로 돌려놓는가?”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
#출근부 찍지 마라, 놀아도 제대로 놀아라
“출근부 찍지 마라. 없애라. 집이든 어디에서든 생각만 있으면 된다. 구태여 회사에서만 할 필요 없다. 6개월 밤을 새워서 일하다가 6개월 놀아도 좋다. 논다고 평가하면 안 된다. 놀아도 제대로 놀아라.”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
#고통극복 후 쾌감, 그때 바뀐다
“한손을 묶고 24시간 살아봐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극복해보라. 나는 해봤다. 이것이 습관이 되고 쾌감을 느끼고 승리감을 얻게 되면 그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다음달, 오사카에서 사장단 불러 지시하며)
#모든게 바뀌어야 초음속
“제트기가 음속(1마하)의 두 배로 날려고 하면 엔진의 힘만 두 배로 있다고 되는가. 재료공학부터 기초물리, 모든 재질과 소재가 바뀌어야 초음속으로 날 수 있다.”(2002년 4월 사장단 회의)
#탁월한_천재가 20만 먹여 살린다
“200∼300년 전에는 10만∼20만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 (2002년 6월 인재 전략 사장단 워크숍)
#사과나무를 심어라
“인재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2003년 5월 사장단 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나)
-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KB자산운용, ‘RISE 미국AI테크액티브 ETF’ 출시
2한투운용 ACE 인도컨슈머파워액티브, 순자산액 500억원 돌파
3교보증권, STO사업 위한 교보DTS·람다256 MOU 체결
4"누나는 네가 보여달래서…" 연애한 줄 알았는데 잠적?
5‘이것’만 있으면 나도 백종원...팔도 왕라면스프, 누적 판매 300만개 돌파
6중견기업 76% "트럼프 2기, 한국경제 불확실성 높일 것"
7'비트코인 큰 손' 마이크로스트래티지, 5만5500개 추가 매수
8"오! 야망있네~" 김종민 연하女와 결혼? 역술인 말하길…
9평양간 백지영, 예정에도 없던…北에서 기싸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