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강소기업 육성했지만…목숨줄 쥐락펴락에 정치자금도 뜯어
[전두환 정부 경제통치 평가①] 기업정책
중소기업 진흥 10년 계획으로 전문화 지원
국제·동명그룹 해체, 현대 창원중공업 빼앗아
일해재단 만들어 기업에게서 정치자금 모으기도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23일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굴곡지게 만든 장본인이어서 각계 평가가 엇갈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남긴 명암을 짚어봤다. [편집자]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중소기업 육성에 힘을 쏟기도 했지만, 자신의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대기업의 존폐를 좌우하고 계열사를 빼앗기도 했다.
앞서 박정희 정부가 추진했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한 고도성장의 지속에는 이바지했지만 각종 부작용도 드러냈다. 1970년대 후반들어 한국 경제에 물가상승, 국제수지 악화, 중복·과잉시설 심화 등의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전두환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목표지향적 계획에서 유도적 계획 체제로 바꾸었고, 중소기업 육성을 지원했다. 전 전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뒤 정의사회 구현을 내세웠는데, 대·중소기업 격차 해소도 그가 내세운 ‘정의’ 중 하나였다.
이에 그가 재임하던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2~1986년) 기간 중엔 각종 중소기업 육성정책이 등장했다. 특히 1차년도인 1982년 4월초에 수립한 중소기업 진흥 10년 계획(1982~1991)을 기반으로 중소기업을 지원하며 중소기업의 전문화를 유도했다. 대기업들과 상호보완적 분업체제를 형성할 수 있도록 육성한다는 취지였다.
이는 중소기업의 성장기여율(고용과 생산 등 전체 산업 성장에 기여한 비율) 증가로 이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1963~1979년 사이 중소기업의 수는 전체 기업의 80~90%를 차지했지만 성장 기여율은 20%(제3공화국, 1963~1971년), 33%(제4공화국, 1972~1979년)에 불과했다. 전두환 정부 시기 중소기업 진흥 정책 실시 결과, 생산부문에서 중소기업의 성장 기여율은 41%까지 높아져 대기업(59%)과의 격차를 줄였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경제성장 등을 들어 전 전 대통령의 당시 경제정책에 후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사례도 많다. 전두환 본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제그룹을 해체한 것이 대표적이다. 1949년 왕자표 고무신을 시작으로 1981년 국산 신발 브랜드 ‘프로스펙스’을 만들며 당시 21개 계열사를 거느리던 재계 7위 국제그룹이 ‘부실기업 정리 및 산업 합리화’를 명분으로 해체됐다.
전두환 정권은 중화학공업의 구조재편을 단행하며 재벌 산하의 기업을 빼앗기도 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창원중공업을 빼앗겼다. 아울러 정 회장에게는 1977년부터 맡고 있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 사퇴 압력을 넣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주영 회장의 동생인 고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은 현대양행 창원공장(현 두산중공업)을 넘겨야했다.
동명그룹의 사례도 있다. 동명그룹은 목재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 1965년 국내 재계서열 1위의 재벌이었고, 해체 전까지 해운·중공업·식품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룹은 1979년 원목 가격 상승과 사업 다각화에 따른 자금난을 겪고 있었는데, 전두환 정권은 강석진 회장 등을 악덕 기업주로 지목하고 빼돌린 은닉재산을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동명목재를 수사했다. 이에 동명그룹은 자구노력을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부도를 냈다.
이 밖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경제계에 손을 뻗친 사례로는 일해재단이 있다. 당시 그는 여러 재단을 설립해 국내 주요 대기업 회장을 한자리에 불러 자금 출연을 요청했다. 일해재단은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희생자 유족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으로, 전 전 대통령은 운영비 명분으로 정치자금을 모집했다. 재단은 1984년 3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재벌로부터 약 598억5000만원의 기금을 모았다.
☞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5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육군대장까지 지냈다.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이순자(82)씨를 비롯해 아들 재국·재용·재만씨와 딸 효선씨가 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의 5·16 군사구데타 때 육사생도 지지시위를 주도하고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했다. 1979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조사하면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신군부 정권을 출범시켰다. 1980년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던 전남도민들을 유혈진압했다. 간선제로 1980년 11대 대통령, 1981년 12대 대통령에 취임해 1988년 2월까지 집권하며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대통령직 퇴임 후엔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반란·내란죄, 광주시민 학살, 비자금 조성 등의 죄목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강필수 기자 kang.pils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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