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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서슬에 꼬리 내린 재계

‘개혁’ 서슬에 꼬리 내린 재계

검찰에 출두하는 최태원 SK회장.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지난 1961년 3월4일, 당시 장면 정부는 부정부패로 축재한 기업가들을 처벌한다며 ‘부정축재처리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협의회는 대한상의와 무역협회 등 경제5단체를 꼬드겨(?)공동 성명서를 냈다. 계는 “이 법안이 노리는 것은 사회혁명”이라면서 “김일성 집단의 공산화 음모에 길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휴전된 지 불과 8년밖에 안 된 시점이라 ‘김일성’이란 이름은 그야말로 금기였다. 그런데 재계에서 ‘김일성 운운’하자 국회의원들이 들고 일어났다.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경제협의회에 출석을 요구했다. 재계도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당하게 맞섰다. 조사위원들이 “국회의원들을 김일성 괴뢰의 동조자로 모독한 이유가 뭐냐”고 윽박질러도 그들은 “이 법이 통과되면 잃는 것이 훨씬 더 많다”거나 “수년 전의 경제사범을 소급입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세계 기준에 어긋난다”며 반박했다. 그러자 국회의원들이 수그러들었다. 일리 있는 얘기라서다. 그래서 법안을 완화해 5만여명의 부정축재자를 70개 기업으로 대폭 줄였다. 이로부터 42년 후인 2003년 1월, 비슷한 파문이 일어났다. 한국경제협의회의 후신인 김석중 전경련 상무가 대통령직 인수위더러 ‘사회주의자’라고 지칭했다고 외국 신문이 보도했다. 김상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왜곡보도라고 해명했지만 인수위는 해명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다. 결국 전경련 회장이 나서서 ‘사과 공문’을 보내야만 했다. 지난 2월 새로 취임한 손길승 전경련 회장도 노무현 당시 대통령 당선자를 예방하자 마자 “대단히 송구스럽다”고 밝혀야 했다. 유임이 확정됐던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이 갑작스레 사퇴한 것도 인수위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비슷한 갈등, 처리 방식은 후퇴 40년에 걸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지만, 처리 방식은 오히려 후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일성 또는 사회주의에 대한 알레르기가 40년 새 훨씬 약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당시 재계는 할 말은 당당하게 했다. 문제의 본질을 놓고 얘기했다. 그러나 40년 후 재계는 그야말로 납작 엎드렸다. 문제의 본질은 얘기조차 못했다. 요즘 정계와 재계의 관계가 새로 설정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럴만한 배경이 있다. 우선 정치자금을 매개로 한 ‘정경유착’은 사실상 사라졌다. 정권과 재벌간의 ‘끼리 끼리’문화도 새 정부에선 상당히 약해질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의 분배 중시 성향도 그렇거니와 2월25일 취임사에서도 “사회 지도층은 뼈를 깎는 성찰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새 정부는 이념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DJ정부도 사회적 질서를 강조했고, 이를 통해 신뢰와 사회적 자본을 축적해야만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다는 질서 자유주의에 이념적 기반을 뒀다. 새정부 측 관계자들의 이념도 비슷하다. 다만 그들은 재벌개혁 정책의 후퇴를 비판하면서 “DJ정부가 재계의 시장 만능주의 등과 타협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새 정부 5년 내내 ‘재벌 개혁’은 지속될 것이며, SK사건과 같은 정·재계 마찰도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국민들이 보기에 좀 이상하다거나 변칙적이다 싶은 것까지도 규제하려 들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또 개혁 대상은 그룹보다는 오너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란 시각이다. 그룹은 손대기가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주요 그룹이 해체될 경우 후유증이 엄청날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 그룹 경영 체제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도 논란이 벌어질 소지가 많다. 한국식 그룹 경영에 대해서는 해외에서도 긍정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오너 체제냐, 전문경영인 체제냐의 문제도 새 정부에선 덜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기업 경영의 효율성에 무게를 둘 경우 누가 경영하든 잘 하면 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새 정부가 중점 개혁대상으로 삼는 것은 오너의 ‘황제식 경영’과 ‘변칙 상속’이 아닌가 싶다. 편법적이거나 변칙적인 상속은 막고, 오너 체제는 인정하지만 경영전횡은 없어져야 할 폐해라는 생각이다. 게다가 이들은 국민 정서와 맥이 닿아 있다.

기업은 도덕적 정당성 확보해야 이렇게 놓고 보면 정계와 재계의 관계는 새로 설정돼야 한다. 종전처럼 정치자금으로 풀 성질이 아니다. 개인적인 로비로 풀기도 막막하다. 오히려 공식적인 관계의 재정립에 더 비중을 둬야 할 것이다. 재계 관계자들은 두 가지 측면에 역점을 둬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재계는 당당해야 한다. 논리로 이겨야 한다는 얘기다. 40년 전의 사례에서 재계는 배워야 한다. 물론 40년 내내 재계는 정치권력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였다. 앞으로도 당분간 그럴 것이다. 그러나 40년 전 기업인들은 ‘김일성 운운’했어도 성명서의 본질을 놓고 정권과 토론했다. 5·16 혁명 후 군사정권에 의해 대표적인 부정축재자로 지목됐던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서슬이 퍼런 와중에도 귀국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 설득을 시켰다. 그러나 요즘 기업가들은 너무 꼬리를 내리고 있다. 대통령이 “출자총액제한제와 집단소송제 등은 흥정 대상이 아니다”라고 강조하자 지당한 얘기라며 맞장구를 치는 게 오늘의 재계 모습이다. 지금 논란되는 비상장주식의 평가 문제도 마찬가지다. 최태원 SK 회장이 구속된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비상장기업인 워커힐 주식은 높게 값을 매기고 ▶반면 SK C&C(옛 대한텔레콤)가 보유한 SK(주)(옛 유공)주식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한 후 ▶이를 맞교환함으로써 1천여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이에 대해 재계는 법과 논리로 맞서야 한다. 시세가 있으면 시세대로 평가해야 하지만, 시세가 없으면 상속·증여세법에 나와 있는 대로 평가하는 것은 비상장주식의 합법적인 평가방법이라고 따져야 한다. 그런데도 재계는 “검찰이 잘 하고 있다”며 싸울 생각을 안 한다. 둘째,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오너가 되기까지의 정당성은 물론, 오너가 되고 난 뒤에도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주식지분의 세습과 경영능력의 검증 등에서도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 창업주 세대는 경영능력이 검증됐기 때문에 어지간한 불법행위를 해도 그냥 넘어간 예가 많았다. 그러나 2∼3세는 이게 안 된다. 스스로 일군 부가 아니기 때문에 불법은 물론이고 편법이나 변칙조차 국민들은 고깝게 생각한다. 게다가 도덕성은 이미 우리네 선조 기업가들이 추구한 바이기도 한다. 재계 원로인 김입삼 전 전경련 고문은 “개성상인은 돈보다 신용을 생명으로 했다”며 “재계는 이러한 신용본위 정신을 정착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업경영은 정직과 준법을 바탕으로 한 신용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다. 아무리 법대로 해도 상대방이 납득을 못하는 경영은 해선 안 된다는 얘기쯤으로 해석된다. 새로이 바뀐 정·재계 관계에서 재계는 이렇게 해야만 5년 내내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을 것 같다. 맞기만 하고 대거리할 줄 모르는, 기개없는 사람은 계속 맞는다. 그나마 도덕적 정당성 조차 없으면 구경꾼이 말려주지도 않는다. 기업경영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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