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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현지르포]日 경제 “터널은 끝났다”

[도쿄 현지르포]日 경제 “터널은 끝났다”

일본 경기가 되살아나면서 소비 시장도 활기를 띠고 있다. 사진은 도쿄의 한 할인매장에 몰려든 고객들.
경기는 회복되고 있으나 조기퇴직과 임금하락 등으로 직장인들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지난 1월 도쿄의 한 대형 컴퓨터 제조회사에 근무하는 다카키 사토루(37)는 도심 이케부쿠로(池袋)에 염원하던 ‘성’을 장만했다. 새로 구입한 신축 맨션은 약 60㎡ 넓이의 방 2개짜리. 그다지 넓은 편은 아니지만 혼자 살기엔 충분하다. 가격은 세금을 포함해 4천5백만엔(약 5억원).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 매년 착실하게 저축한 돈 1천5백만엔으로 집값 일부를 내고, 나머지는 30년간 갚는 은행 장기대출로 채웠다. 금리는 연 2.5%. 10년 전이라면 금리 5%에 맨션 값도 6천만엔은 넘었을 것이다. 그가 매월 갚아야 하는 돈은 약 12만엔이다. 지금까지 살았던 인근 임대주택이 40㎡에 월세 12만5천엔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매달 갚아야 할 돈은 오히려 줄었다. 더욱이 구입한 맨션은 입구에 호텔처럼 24시간 프런트 서비스가 있어 출장이 잦은 그에게는 여간 편리한 게 아니다. 1백메가 광통신이 깔려 있어 인터넷 환경도 쾌적하다. 다카키는 이사를 하면서 ‘또 하나의 꿈’을 이뤘다. 구입한 ‘성’의 방 하나에 AV기기를 사 넣은 것이다. 60인치짜리 플라즈마TV를 약 65만엔에 구입했다. DVD 겸용 게임기인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도 8만엔에 장만했다. 내친김에 디지털 카메라도 바꿨다. 캐논의 디지털 카메라는 10만엔.

‘新 3종의 神器’가 디지털 경기 주도 사실 다카기와처럼 AV기기를 갖추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후반부터 도쿄를 중심으로 ‘디지털 경기’라는 말이 완전히 정착했다. 대형 벽걸이형TV·DVD·디지털 카메라는 ‘신 3종의 신기’라고 불리며 경기를 이끌고 있다. ‘3종의 신기’란 본래 ‘거울·옥·검’을 일컫는 것으로, 왕실에서 전해지는 가보를 말한다. 일본에서 고도성장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 흑백TV·전기세탁기·전기냉장고를 ‘3종의 신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시 서민들은 이를 앞다퉈 구입했다. 지금은 새로운 세 가지 AV기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DVD와 디지털 카메라는 비교적 구입하기가 쉽다. 놀라운 것은 30만∼40만엔이나 되는 대형 액정TV나 플라즈마TV가 잘 팔리고 있다는 점이다. 도쿄 아키하바라(秋葉原) 전자상가나 도내 가전할인점의 박막형TV 매장은 주말이면 사람들로 북적댄다. 디지털 경기를 뒷받침하듯 지난해 10∼12월 국내총생산(GDP) 실질성장률은 연율 7%에 달했다. 경제재정백서에 따르면 일본은 2002년 1월에 이미 경기가 바닥을 치고 그후 회복국면에 들어갔다고 한다. 버블 붕괴 후 경기회복은 이번이 세번째인데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의 경기회복은 지금이야말로 진짜”라고 낙관적인 보도를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서민은 아직 경기회복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고용과 임금상승 없는 회복’이 맞는 말일 것이다. 돈을 벌고 있는 것은 ‘디지털 경기’나 중국 수출로 들끓고 있는 일부 기업뿐이다. GDP의 약 60%를 차지하는 개인소비가 상승세이긴 해도 여전히 제한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실업자는 약 3백만명을 넘어 실업률 5%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10%에 가깝다고 말하는 전문가도 많다. 끔찍한 사실은 일본에는 3년 연속 연간 약 3만명이나 되는 자살자가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교통사고 사망자는 약 8천명인데 말이다.

50대 이상의 지갑을 열어라 그러나 ‘인식의 차이’를 풀 수 있는 열쇠는 있다. 키워드는 ‘고령화’와 ‘50대 이상’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 사회에 돌입하고 있는 일본. 버블 붕괴 후 ‘케이타이’(携帶)라는 말이 상징하듯 기업들은 한결같이 젊은이나 20∼34세의 독신여성을 주요 타깃으로 삼았다. 물론 지금도 이들은 중요한 고객이다. 그러나 일본은 내년에 50대 이상이 성인 인구의 절반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는 등 ‘성숙국가’로 급속히 변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가장 민감한 것이 여행업이다. 국내여행 소비는 21조엔, 해외여행 소비액은 4조4천억엔. 동시다발적인 테러 이후 해외여행 감소에 따른 매출 감소로 고전하던 여행산업은 지금 이 흐름을 붙잡으려고 필사적이다.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는 여행, 2박3일 19만8천엔.’ 해외여행상품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1인당 교토(京都)여행 가격이다. 여행은 거의 개인여행에 가까운 감각으로 바뀌었고 명소 견학은 택시를 이용한다. 유서 깊은 고급 여관에 머물고, 이틀간 세 끼는 일본의 사계절을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식사를 제공받는다. 종래의 국내여행과는 한 차원 다른 여행상품을 파는 곳은 일본 최대 여행대리점인 JTB가 지난해 가을 도쿄의 번화가 긴자(銀座)에 오픈한 ‘로열로드 긴자’다. ‘로열로드 긴자’는 본래 격조 있는 ‘특별한 여행’을 모아놓은 ‘여행의 브랜드 숍’. 주문형 여행이나 세계의 바다를 여행하는 ‘크루즈 컬렉션’ 등 국내외 고급 여행상품을 취급하는 곳이다. 수개월 동안 전 세계를 둘러보는 크루즈 등 1백만엔이 넘는 여행상품들도 많지만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이같은 ‘화려한 여행’을 하는 계층은 50대 이상의 중고령자층이다. 이 여행사에는 ‘번호표’나 ‘접수 카운터’가 아예 없다. 실내에는 클래식이 흐르고, 영국의 매너 하우스 같은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찾아오는 손님도 있지만 대부분 예약제다. ‘여행의 카운셀러’를 표방하는 이 여행사에서는 직원이 고객 자택까지 방문하는 일도 흔하다. 50대는 아직 미개척 시장이다. 전쟁 직후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일본에서는 ‘단카이 세대’라고 부름)는 무려 1천만명이나 된다. 조기퇴직 등으로 실업 상태에 있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보통 주택대출 변제가 끝나 저축도 넉넉한 편이다. 지난해 신칸센을 운영하는 ‘JR도카이(東海)’가 모집한 50세 이상의 여행회원 클럽인 ‘50+’(피프티 플러스)에는 불과 6개월 만에 20만명이나 되는 회원이 모였다. 회원이 되면 교토의 긴가쿠지(金閣寺) 등 유명사찰을 남보다 앞서 관람할 수 있는 특전 등이 주어진다. 또 하나 일본 경제 부활을 푸는 커다란 열쇠는 ‘도심회귀 현상’이다. 버블 붕괴 후 땅값의 대폭 하락과 용적률 규제완화 등으로 옛날 같으면 불가능한 대형개발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2002년에는 도쿄역 근처에 마루(丸)빌딩이, 지난해에는 록본기(六本木)에 ‘록본기 힐즈’ 등의 대형 복합상업시설이 잇달아 오픈했다. 특히 대규모 상업시설이나 미술관 등을 병설한 록본기 힐즈는 4일 동안 1백만명이 찾아오는 등 도쿄의 명소가 됐다. 또 도쿄는 땅값 하락으로 세계적인 고급 호텔들이 속속 진출해 격전지가 됐다. 지난해 4월에는 그랜드하얏트가 록본기 힐즈 내에 오픈했으며, 이어 영국 힐튼의 최고급 브랜드 콘랜드·페닌슐라·만다린·리츠 칼튼 등의 진출이 잇따르고 있다. 예컨대 만다린 호텔이 들어설 니혼바시(日本橋)는 에도(江戶) 시대부터 가장 번성한 장소였지만, 지난 97년 야마이치(山一)증권이 파탄하고 도큐(東急)백화점마저 경영부진으로 폐업하는 등 ‘도산의 거리’로 불릴 만큼 피폐한 곳이었다. 이곳에 새로 생긴 고급 호텔들은 모두 좋은 실적을 올리고 있다. 도내 주요 호텔의 평균 객실가동률은 70%대 후반. 외국인 고객의 이용 외에도 경영자층이나 독신여성·커플 등 일본인이 단골 고객이 돼 도심의 리조트로서 사용하는 일이 정착됐다.

지방 부실채권 문제 이제부터 시작 주택 수요도 교외에서 통근이 편리한 도심으로 이동하고 있는 추세다. 땅값 하락으로 도쿄 23구 내에 지난해 공급된 맨션은 약 3만4천호. 내년에는 4만호가 건설될 예정이다. 도심에서 살고 싶은 노인층이나 젊은 독신층의 수요 그리고 투자용 등 목적도 다양하다. 갑자기 늘어나는 인구 때문에 학교나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수용하기 힘들 정도다. 정말로 일본 경제는 바닥을 벗어난 것인가. 한국처럼 부실채권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는 것이 회복의 계기가 된다고 말한 지 오래다. 지난 2월19일 신세이(新生)은행이 마침내 상장됐다. 98년 파탄한 일본장기신용은행의 뒤를 이은 은행이다. 한번 국유화됐던 은행이 재상장한 일은 일본에서 처음이다. ‘부실채권이 적고 자기자본비율이 높다’는 건전성과 수수료 수입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수익모델이 평가를 받아 매수가 쇄도하고 있다. 상장가는 북빌딩의 주가 5백50엔보다 훨씬 높은 8백72엔이었다. 시가총액은 1조엔을 넘어 도쿄증시 1부 1천5백35개 종목 가운데 쉰열곱번째에 올라섰다. 2001년 8%대였던 대형은행의 부실채권 비율도 지난해 9월 말에는 6.5%로 내려갔다. 이는 일본 정부가 2002년 가을에 발표한 ‘금융재생 프로그램’에 따른 것으로, 대형은행은 2005년 3월 말까지 부실채권 비율을 4%대로 줄일 것을 요구해 은행이 처리를 서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국유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금융기관이 있지만 대형은행의 부실채권 문제는 고비를 넘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분명 일본의 경기는 회복되고 있다. 땅값 하락으로 투자가 활성화되고 있는 도심에 있으면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나 지방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처리는 이제부터가 문제다. 버블기에 앞다퉈 실시했던 과대 투자의 상흔이 남아 있다. 지방을 지탱해 온 대형 공공사업도 계속 줄어들어 지방의 경기는 나고야(名古屋)나 호쿠리쿠(北陸)지방 등 자동차나 IT산업의 집적지를 제외하곤 정체된 상태다.

양극화 현상 곳곳에서 벌어져 지금의 일본 경제는 한마디로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경기가 좋은 도쿄 등 도심의 반대편에는 지방이 있다. 개인 중에도 돈을 가지고 있는 세대는 고령자들이다. 여행의 예처럼 고령자들은 예금을 풀어 소비에 나서고 있다.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일본의 저축률은 이제는 6.9%. 90년대 초반 14%로 세계 최고의 저축률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독일이나 프랑스보다 낮아졌다. 반면 돈 없는 젊은층들은 다음 세대의 대립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 사회에서 연금문제는 늘 선거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예컨대 지급액의 8.3배를 받을 수 있는 35년 생에 비하면 75년 생은 불과 2.4배밖에 받지 못한다. 기업 내에서도 ‘승자’와 ‘패자’가 분명히 나뉘고 있다. 「연수입 3백만엔 시대에 살아남는 경제학」은 최근 샐러리맨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 중 하나다. 출세 경쟁에서 진 ‘패자’들을 향해 “무리하여 ‘승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 수입이 줄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 ‘패자’로 불려도 좋다”고 하는 인생 지침서다. 경기회복이라고 하는데 국가와 지방의 장기채무 잔고는 늘고만 있다. 2003년에 7백조엔(개인의 금융자산은 1천3백조엔)을 돌파했다. 일본 정부는 경기회복을 외치지만 중산층은 연금이나 의료비의 부담이 늘어나 매년 조금씩 가처분소득이 줄어들고 있다. 고이즈미 정권이 주장하는 ‘근본적인 개혁’도 어정쩡하게 진행되고 있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세금 인상뿐인데 고령화가 급진전되고 있는 일본 경제에 과연 여력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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