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이윤재 ㈜피죤 회장 경영회고록⑪… “집 못 찾아 올까봐 이사 안 가”

이윤재 ㈜피죤 회장 경영회고록⑪… “집 못 찾아 올까봐 이사 안 가”

고려대 제2경영관 ‘이윤재 강의실’ 앞에서 왼쪽부터 필자, 딸 이주연(李周姸), 외손자 하회민(河會珉), 아내 안금산(安金山)
2000년 고려대 경영대학으로부터 ‘자랑스러운 고대인상’을 받았을 때
아들 정준과 함께
아내인 안금산(安金山)을 만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뒤였다. 아내의 원적은 평안남도이고, 할아버지·아버지·동생 모두가 의사인 집안의 둘재딸 이었다. 처남인 안혁(安赫)씨는 현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당시 아내는 군의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내려와 그곳에서 경북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영문과를 거쳐 소공동에 있던 ‘에버렛’(Everett)이라는 선박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하루는 6·25 동난을 계기로 대구에서 같이 수학한 피난고 양정고 동기생 이원극(李元極)이 자신의 고종사촌을 소개해 주겠다며 나를 불렀다. 그 고종사촌이 바로 지금의 아내다. 그녀를 만나고 나는 보름 만에 ‘이 여자와 결혼해야 겠다’는 결심을 했고, 결혼식을 올린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100일 뒤인 1962년 12월22일이었다.장인인 고(故) 안명훈(安命勳)씨는 경북대 의대(옛 대구의대) 1회를 수석 졸업한 분이다. 장인은 내가 대구로 피난 내려가 있던 시절에 대구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니 우리 부부는 여러모로 ‘대구 시절’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셈이다.

소개 받은 지 100일 만에 결혼 우리는 돈암동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나는 여러모로 부족한 신랑이었다. 자정께나 집에 들어와서 동이 트기가 무섭게 출근했던 터라 나는 가정 일이나 자녀 교육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제 와서야 아내는 가끔씩 “하숙생 같던 당신이 새로 이사 간 집을 찾지 못할 까봐 이사를 가지 않았다”는 우스갯소리를 한다. 아내에게 미안한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일까마는 지금까지도 못내 걸리는 일이 있다. 피죤을 만들 당시 나는 사장이면서 동시에 말단 영업사원이었다. 영업사원에게는 현장을 찾아 다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주부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라’는 지시를 직원들에게 한 이상 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나는 아내의 친구나 친척들의 친구 모임까지 찾아 다니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염치불구하고 그 모임에 나타나 “이 제품이 피죤인데 빨래할 때 넣으면 정전기가 없어지고 보들보들해진다”는 설명을 수백번도 더 했다. 이런 나를 두고 아내는 한 번도 불편한 내색을 한 적이 없다. 천생 막둥이일 뻔했던 내가 형제들을 모두 잃고 졸지에 독자가 됐으니 아내는 결혼 초부터 시부모를 모셔야 했다. 그 많던 재산을 일제말 암울했던 시대적 혼란과 혁명적 변화의 회오리 속에서 모조리 잃은 집안의 가라앉은 분위기도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은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이런 아내를 위해 나는 회사가 안정되면서 해외 출장을 나가면 부부 동반으로 나가곤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름의 재능을 나를 위해 고이 묵혀둔 아내는 해외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곤 한다. 출장 업무를 보느라 바쁜 나는 사실 비행기만 같이 타는 여행 파트너에 불과하다. 아내는 능숙한 영어와 일어를 구사하며 해외 소비자들의 생활 감각이나 생활용품에 대한 기호도를 조사해 우리 제품과 비교해 준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우리 부자는 청와대 오찬 모임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그때 아들이 연세대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그날 오찬은 대통령 내외가 각 대학의 수석 졸업생들을 격려하는 자리였다. 나와 아들은 헤드테이블에 배정되어 대통령 내외와 마주 앉게 됐다. 영부인 김옥숙 여사도 여러 말씀을 했는데 우연히 경북여고 얘기가 나오자 내 아들이 아내의 이름을 언급했다. 영부인은 단번에 “경북여고에서 그 유명했던 안금산이가 네 어머니인가?”라며 아내 이야기를 수도 없이 했다. 영부인과 아내는 선후배 사이였던 것이다. 아내에 대한 칭찬에 우리 부자의 어깨가 올라갔던 것은 물론이다. 우리 부부는 1남1녀를 뒀다. 맏딸인 이주연(李周姸)은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술을 전공했다. 미국 메릴랜드 아트 인스티튜트를 졸업한 딸은 뉴욕 퀸스 칼리지에서 드로잉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귀국해서는 서울여대 등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미개척 분야인 드로잉 전시회도 가졌다.내 부탁으로 회사의 디자인실 업무를 계속 봐주다가 지난해부터는 회사의 관리부문장으로 있다. 피죤에서 나오는 각 제품의 디자인과 마케팅이 그녀의 손길을 거치고 있다. 그녀는 슬하에 아들을 하나 두고 있는데, 외손자 이름은 하회민(河會珉, Ha Eugene)이고 현재 13살이나 월반을 하여 중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다. 아들 이정준(李廷濬)은 연세대 경제학과를 나와 한국은행에 잠시 다녔다. 유학 준비 중에 우연히 치른 입행 전형에 붙은 것이다. 한은 조사부에 2년을 다니더니 이내 예정된 유학을 떠났다.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메릴랜드주립대 타우슨대학에서 경제학과 교수로 있다. 일생의 가장 큰 농사는 자식 농사라는데 별로 대단하게 일군 기억이 없음에도 이렇게 잘 커준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나는 나름대로 엄한 아버지였던 모양이다. 자식에 대한 훈육은 대개가 아내의 몫이었고, 나는 어쩌다 휴일이라도 생기면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로 나가 바람을 쐬곤 했다. 미꾸라지·송사리를 잡던 그때의 자상한 면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아비의 맘과는 달리 성인이 된 아이들은 아직도 나를 어려워하곤 한다.

고려대의 ‘이윤재 강의실’ 자식 자랑이 되겠지만 두 아이는 대학을 모두 수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모두 4년 간 장학금을 받았는데, 자식 둔 부모의 입장에서 흐뭇한 기억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내 아이들이 행여 다른 학생들의 혜택과 기회를 앗은 것이 아닐까 염려가 돼, 나는 두 사람 몫으로 떼어둔 등록금 정도의 장학금을 모교인 고려대에 4년 간 기증했다. 학비를 낼 능력이 있음에도 학비를 면제받아 느끼는 미안함을 갚기 위한 조치였다. 몇 년 전 고려대가 신축 중이던 제2경영관 안에 강의실 하나를 기증했는데, 영광스럽게도 학교에서는 그 강의실에 ‘이윤재 강의실’이라는 이름을 붙여 줬다. 지난 6월에는 이 강의실에서 학교 초청으로 학부생들에게 최고경영자(CEO)로서는 처음으로 마케팅 특강을 하는 기쁨도 누렸다. 1시간 정도의 특강에서 피죤의 성장과정과 경영의 전략적 흐름에 대해 설명했다. 그들의 반짝거리는 눈빛과 젊음이 마치 나를 26년 전의 창업 시절로 돌려 놓은 듯한 착각 속에 빠지게 했다. 그 패기와 도전정신이라면 충분히 정상을 오를 수 있는 준비가 단단히 돼 있음을 의미한다. 나 자신과 우리 아이들이 얼만큼 이 사회에 기여하고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느냐는 아직도 먼 훗날의 이야기겠지만, 이젠 물이 고이지 않고 흐르도록 하는 것이 내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계속>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박지윤-최동석 소송'에 이혼 변호사 일침..."얼마나 이익 보려고"

2의대 교수들 "휴학 미승인한 대학 총장들, 정부에 굴복할 건가"

3오늘 저녁 7시부터 '여의도 불꽃축제'...교통 전면 통제

4여의도 불꽃축제 인파 100만명 예상...경찰 2400명 투입

5 레바논 체류 국민 등 97명... 군 수송기로 긴급 귀국

6"한국도 별로지만... 이 나라가 최악" 중국인 비호감도 1위는 어디?

7'메타'가 '아마존' 제쳤다...저커버그, 세계 갑부 2위 등극

8‘잡식’ 두려워 않았다…김성호 토목 명장의 개발기

9쯔양, 유튜브 복귀..."돌아가도 되나 고민 많았다"

실시간 뉴스

1'박지윤-최동석 소송'에 이혼 변호사 일침..."얼마나 이익 보려고"

2의대 교수들 "휴학 미승인한 대학 총장들, 정부에 굴복할 건가"

3오늘 저녁 7시부터 '여의도 불꽃축제'...교통 전면 통제

4여의도 불꽃축제 인파 100만명 예상...경찰 2400명 투입

5 레바논 체류 국민 등 97명... 군 수송기로 긴급 귀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