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빛나는 코미디언
죽어서도 빛나는 코미디언
서른을 넘긴 한국 사람치고 ‘유머 1번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한국 코미디의 역사인 유머1번지는 코미디의 종합선물 세트였다.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탱자 가라사대’ ‘청춘을 돌려다오’ ‘변방의 북소리’ ‘영구야 영구야’ ‘부채도사’ ‘동작 그만’ 등 질펀한 웃음의 먹거리가 가득했다. 뭐니뭐니해도 백미는 통쾌한 정치 풍자였다. 우리나라 TV에서는 보기 드문 시사코미디의 탄생이었고, 그 중심에 ‘회장님’ 김형곤이 있었다. ‘잘 돼야 될 텐데’ ‘잘 될 턱이 있나?’는 그의 유행어와 ‘저는 회장님의 영원한 종, 딸랑딸랑’이라던 김학래의 추임새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TV의 풍자 코미디는 수명이 그리 길지 못했다. “방송 생리상 정치를 신랄하게 파헤치기란 매우 힘들다”고 유머1번지의 연출을 맡았던 김웅래 인덕대학 방송연예과 교수는 말했다. 거기다 코미디의 환경 또한 급변했다. 코너마다 각기 다른 세트를 세우고 슬랩스틱과 콩트를 뒤섞어 몸연기와 말연기를 동시에 구사하며 웃음을 만들던 시대에서 말재주가 중심이 된 개그의 시대로 변했다. 그렇게 1990년대를 지나며 김형곤, 심형래, 임하룡은 지는 해가 됐고 이경규, 김국진, 김용만이 뜨는 해가 됐다. 거기다 2000년대 들어 탄생한 ‘개그 콘서트’ ‘웃찾사’ ‘개그야’ 등이 나이 어린 개그맨들의 독무대가 되면서 관록의 노장들은 TV에서 사라졌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심형래는 ‘신지식인’ 영화제작자로, 임하룡은 영화배우로 변신했고 김형곤은 대학로로 향했다. 한국 코미디의 대표 3인방이 TV를 떠난 셈이다. TV에서 대학로로 장소만 바꿨을 뿐 김형곤은 코미디를 계속했다. TV가 전부인 줄만 알았던 코미디의 세계를 TV 밖 무대로 확장했다. 김형곤은 대학로에서 물을 만났다. ‘아담과 이브’ ‘애들은 가라’ ‘엔돌핀’ 등을 무대에 올리고 ‘코미디클럽’ ‘하하호호’ 등 극장식 식당을 운영하며 본격적인 스탠드업 코미디를 선보였다. 성(性)이나 정치 등 TV에서는 하기 힘든 소재들을 적극적이고 노골적으로 활용했다. 물론 최근 들어 ‘개그콘서트’ ‘웃찾사’ 등 코미디가 심심치 않게 대학로 무대를 채운다. 하지만 공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TV에서는 보기 힘든 김형곤식 스탠드업 코미디가 아니라 TV 코미디의 연장일 뿐이다. “웬만한 코미디언들은 무대에서 10분, 아무리 길어도 20분 이상 버티지 못한다. 하지만 김형곤은 1시간30분을 너끈히 소화했다”고 김웅래 교수는 말했다. 무대의 맛을 익힌 김형곤은 1995년 본격 코미디 연극 ‘병사와 수녀’를 무대에 올렸다. 호주 작가 찰스 쇼오의 원작을 그가 직접 각색, 주연을 맡았고 지금은 대스타가 된 최지우가 수녀로 출연했다. ‘병사와 수녀’는 초연 이후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 모았다. 2004년의 재공연을 준비하면서 한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김형곤은 “폭소 100번 책임진다. 안 웃기면 환불해 드리겠다”고 큰소리쳤다. 관객들은 그의 호언장담에 매진 사례로 화답했다. 자신감이 붙은 김형곤은 ‘병사와 수녀’의 뮤지컬화를 계획하고 코미디 전용극장을 세우는 등 본격적인 코미디 사업을 하나하나 진행했다. 1인 풍자 코미디 시리즈 ‘엔돌핀’은 미국 카네기홀 공연도 성사됐다. 하지만 미국 공연을 20일 앞둔 지난해 3월 11일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김웅래 교수는 “김형곤처럼 정치 풍자와 시사 풍자에 관심을 쏟는 연기자가 없었다. 설혹 있더라도 그의 아이디어를 따라갈 사람은 없다”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김형곤을 다시 만날 기회가 마련됐다. 후배 코미디언들이 ‘병사와 수녀’를 다시 무대에 올려 그의 1주기를 추모한다(‘병사와 수녀 또 만나다’ 4월 6일∼6월 3일, 르메이에르 김형곤 홀). “예전 공연이 김형곤의 원맨쇼였다면 이번에는 코미디가 강한 정통 연극”이라고 연출을 맡은 정안영씨는 말했다. 그는 파리8대학 연극과에서 공간연출을 전공한 정통파다. 공연을 기획한 서길자 G&A 대표는 “내년에는 미국 진출까지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공포의 삼겹살’ 김형곤은 죽어서도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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