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 스캔들의 몸통은 문화적 아마추어리즘
신-변 스캔들의 몸통은 문화적 아마추어리즘
4년 전 서울대 미대 강단에 섰던 화가 겸 문화이론가 코디 최(47·한국명 최현주)는 강의 초반 주변에서 들려오는 음해성 소문에 질겁을 해야 했다. 자기가 가짜 뉴욕대 교수라는 거짓 정보가 나돌았기 때문이다. “서울대와 뉴욕대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달라”는 김병종 서울대 미대 학장의 권유에 따라 맡은 국내 첫 강의였다. 그만큼 기대도 컸는데, 난데없는 해코지라니…. 이건 아니다 싶어 당시 정운찬 총장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정말 실망했습니다. 10년간 뉴욕대 강단에 서온 제 경력을 흠집 내려고 강의를 맡기셨나요?” “…최 교수를 제가 잘 아는데, 도대체 누가 말도 안 되는 소문을….” 전전긍긍하며 한국 교수사회의 풍토를 함께 개탄하던 정 전 총장이 교직원 수첩을 펼쳐 보였다. 음해의 주인공을 자신도 알아야 한다며 코디 최가 지목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하네, 못 하네’ 하는 실랑이 끝에 코디 최가 두 사람을 지목했다. 순간 정 전 총장이 머리를 감싸 안으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이쿠, 또 이 사람들이구나!” 문제의 두 교수는 소문난 사람이었다. 학력 시비를 걸고 다니던 자칭 타칭 ‘학계의 내부 고발자’였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은 뉴욕대의 시스템이었다. 그곳에는 학사업무를 총괄하는 행정교수(operating professor)가 따로 있고, 코디 최 같은 강의전담 교수인 ‘adjunct professor’가 더 중요한 교수인력이었다. 정교수(full professor), 부교수(associate professor) 식의 구분과는 또 다른 방식이다. 음해 소동은 해프닝으로 깨끗이 끝났다. “뉴욕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Cody Choi’로 검색하면 10년간 내가 맡았던 강좌 제목까지 좔좔 뜬다”면서 두 교수의 이성적 판단을 요구했다. ‘지원사격’도 주효했다. 코디 최와 함께 근무했던 뉴욕대의 낸시 바튼 미대 학장이 프랑스의 거물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를 초청해 서울에서 학술회의를 주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4년 뒤 ‘학계의 내부고발자’ 두 교수는 올여름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신정아·변양균 게이트에 장윤(56·전 전등사 주지) 스님과 함께 문제제기를 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에 내정된 신정아 동국대 교수의 예일대 박사 학력이 의심스럽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이 올린 ‘한 건’의 개가에 경의를 표해야 할까, 개운치 않은 교수사회의 비생산적 풍토에 개탄부터 해야 할까? 쉬 판단이 내려지지 않는다. 다분히 한국적 풍토에서 시작한 신정아·변양균 게이트는 지난 7월 이후 4개월째 도무지 끝이 안 보인다. 가히 쓰나미급의 위력이다. ‘디워’를 연출한 심형래 감독, 탤런트 최수종, 만화가 이현세씨를 포함한 적지 않은 연예계 스타와 유명인사의 거짓학력이 발가벗겨졌다. 그 선에서 멈췄더라도 ‘올해의 10대 뉴스’감이었다. “신정아씨, 참 대단하죠? 검찰이 하지 못한 ‘대한민국 대청소’를 알아서 해주고 있잖아요.” 8월 초 사석에서 만난 김진숙 대검찰청 부대변인의 말이다. 물론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당시만 해도 검찰이 이 사건 수사에 착수하기 훨씬 전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후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신씨 비호의 주역으로 드러나면서 “깜도 안 되는 소설 같은 의혹”이라며 사태의 파장을 경계해온 노 대통령은 큰 수모를 당했다. 사건 초기 한 여성 큐레이터의 거짓학력 사건이 대통령 최측근인 변씨를 낙마시키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씨와 변씨 사이에 오간 ‘낯 뜨거운 연서 e-메일’ 100여 통의 존재를 근거로 둘 사이가 부적절한 관계였음을 검찰이 예단하면서 사건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거짓학력-권력형 비리를 넘어 성 스캔들로 발전한 것이다. 이를 부채질한 것은 신씨 누드사진을 공개한 일부 일간지의 황색 저널리즘이었다. 급기야 신정아 사건은 집단 관음증 징후까지 초래했다. 대하소설 못지않은 스토리라서 추석 연휴 때 모인 사람들이 신정아 사건을 차례상과 밥상머리의 화제로 꺼냈다고 하니 단번에 ‘국민 드라마’가 돼버렸다. 범여권 대선 경선 과정의 흥행에 찬물을 끼얹은 데 이어 한반도의 명운을 좌우할 2007 남북 정상회담에 거는 국민적 관심도까지 물타기 해 버릴지 모른다고 내다볼 정도다. ‘건국 이래 미술 스캔들’의 정확한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실체가 있기는 있을까? 가짜 학력 여성과, 이에 동조한 고위관료 사이의 커넥션을 넘어 이를 총연출한 ‘윗선’은 따로 존재할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사안의 비중에 비춰 지나치게 부풀려지진 않았을까? 질문은 끝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균형을 잡을 때’라는 제3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본질 규명과 달리 대중의 문화 문맹 현상을 부채질하는 ‘문혁(文革)식 저널리즘’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사승 숭실대 교수는 “신정아·변양균 게이트는 출범 이래 우호적이지 않았던 노 정부를 언론들이 공격하기에 딱 좋은 계기였지만, 신문들은 그 게임에 너무 몰두했다. 결정적으로 문화의 가치에 대한 성찰은 부족했다. 그 결과 21세기 생존경쟁의 무기를 버려 스스로 무장해제하는 결과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미술관에 제공되는 기업의 후원금 지원을 옥석 구별 없이 마구잡이로 비판하는 보도 태도가 우선 그렇다. 이런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앞으로 어떤 기업이 감히 미술관에 후원금을 주려 할지 의문이다. 미술관들이 일반 상업 화랑과 달리 사회교육 기능을 맡는 문화 인프라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겨우 몇 해 전이다. 문화관광부도 막 지원을 시작한 참이다. 사립미술관이라도 공공적 가치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게 전 세계적 현상이지만, 국·공립 미술관의 숫자가 절대 부족하거나, 있더라도 부실하게 운영되는 한국적 상황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강원(세계장신구박물관장)씨의 말대로 이번 사건으로 미술관·박물관의 사회적 인식은 크게 후퇴할 전망이다. 한국메세나협회 등이 중심이 된 메세나 활동 역시 타격이 예상된다. 이와 함께 걸음마 단계였던 문화 마케팅 움직임도 당분간 주저앉을 가능성이 불 보듯 뻔하다. 한국 사회는 스포츠 마케팅과 달리 장기적인 문화 마케팅이야말로 기업 이미지 제고에 효과적이라는 사례를 코카콜라나 도요타 등의 문화투자를 통해 막 학습하던 단계였다. 이번 사건 속에 결정적으로 아쉬운 대목은 참신하고 공격적인 정부의 문화정책 수립이 당분간 어렵게 된 점이다. 이를테면 외국의 성공한 미술 정책의 하나로 지목되는 영국의 ‘yBa’ 같은 모색은 지금의 한국적 상황 속에서 언감생심인지 모른다. 1980년대 말 이후 나타난 젊은 영국 미술가들(young British artists)을 지칭하는 yBa는 이미 현대미술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 데미언 허스트, 마크 퀸 등 60년대 산(産)으로 21세기 비전을 모색해 온 이들 작가는 한결같이 끝 간 데 모를 충격적 작품들을 쏟아냈다. 이들은 1950년대 팝아트 운동 이후 별다른 작가를 배출하지 못했던 영국의 국가적 자존심을 살린 일등공신이다. yBa의 배후에는 영국 정부의 지원이 있었음은 문화예술계의 상식이다. 때문에 이번 사건을 통해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21세기 문화전쟁을 치러낼 대한민국 호(號)라는 진단도 나온다. 그동안 이번 사건을 관망해 오던 문화계 사람들이 가장 크게 우려하는 부분이다. 대중은 이미 미술계를 허명과 거짓이 판치는 동네이자 복마전이란 고정관념을 굳혔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한국사회의 부실한 담론 체질에 구조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사건을 둘러싼 논의에 건강치 못한 자해(自害)와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내출혈 생리가 있고, 그 ‘몸통원인’은 문화 마인드 부재라는 말이다.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전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미술의 움직임에 대한 몰이해는 결국 한국사회가 세계 흐름에 10년 뒤처지는 결과를 빚을지 모른다. 미술 장르는 현대예술을 이끌고 가는 견인차라서 각 국가들이 전략적 마인드를 가지고 접근해 온 핵심 장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보인 각종 미디어들의 인식 수준은 실망을 넘어 거의 절망스럽다.”
사건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익명을 요구한 한 미술계 인사와 한나라당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사건의 윤곽이 어렴풋하게나마 잡힌다. 그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진원지는 일단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윗선’ 어딘가로 일단 추정된다. 사실 집권 이래 현정부는 현대미술 분야에서 우호적인 미술정책을 펼쳐왔다. 매우 이례적인 파인아트(고급 예술) 우선주의가 분명했다. 남북관계, 대미외교, 경제정책에서는 기존 권위주의 정권과 다른 ‘유사(類似) 진보’의 길을 걸어왔고, 일부 포퓰리즘 성향까지 보여왔던 데 비춰보면 더더욱 그랬다. 미술 우호적 정책은 2005년을 기점으로 문화관광부의 미술은행 발족, 일부 시중은행의 아트펀드 개시 등으로 나타났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해찬 총리 시절 미술 분야에 각별한 취미를 가진 이해찬 총리-변양균 기획예산처 장관 라인이 주무부처 문화관광부를 제치고 사실상 미술정책을 조율해 온 ‘비선’이라는 혐의를 잇달아 제기해 왔다. 물론 이렇다 할 물증은 없고 ‘설’뿐이다. 8월 중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유력 대선주자가 이 사건과 연루돼 있다”고 공격했다가 나중에 얼버무린 까닭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권영세·박찬숙 의원 등은 신씨와 그가 속해 있던 성곡미술관을 살피면 정부의 ‘전방위 밀어주기’가 눈에 띈다고 지적한다. 2003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현대 속에 살아있는 한국의 전통’전은 부실한 기획서를 써내고도 문예진흥기금 1500만원을 타냈다. 또 문화부는 신씨가 큐레이터로 활동한 스페인 아트페어에 지난해 30억원을 전격 지원했다. 당초 계획했던 금액보다 크게 증액된 이 돈은 노 대통령의 스페인 순방(올해 2월)을 앞두고 급작스레 이뤄졌다. 이뿐만 아니다. 산업은행은 미술 분야에서 유일하게 ‘존 버닝햄-나의 그림책 이야기’전(지난해 7월) 등 신씨 전시회 3건에 후원금을 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지원’에 힘입어서인지 성곡미술관은 사립미술관 중 리움에 뒤이어 뜨는 미술관이 됐다. 2005년의 경우 관람객이 10만 명이나 됐다. 신씨가 활동하던 1~2년 사이 관람객이 갑자기 10배 넘게 늘어난, 거의 기적에 가까운 수치다. 이런 상황의 중심에는 미술계의 젊은 큐레이터 신씨가 있고, 그가 당시 예일대 박사를 앞세워 변씨를 포함한 ‘비선 멤버들’과 안면을 트고 도움을 주고받았다는 것이 사건의 윤곽이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의 이해가 부족했던 호사가 수준의 정책결정자들이 무원칙한 미술 후원을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결격사유가 있는 여성 큐레이터를 만나 모든 일이 난파해버린 게 사건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문만 요란했지 크게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사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 수사가 규명할 만한 영역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비록 ‘윗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미술에 우호적 정책이 잇달아 내려진 과정에는 ‘윗선’의 자연스러운 교감만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잇단 의혹에 물증을 들이대기도 힘들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지난달 12일 일간지 문화부 기자들과 한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권양숙 여사가 “(언론 등에서)윗선, 윗선 이야기하는데, 대통령과 저도 서로 ‘그런데 윗선이 누구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고 말한 일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번 사건은 무원칙과 혼선 속에서 이뤄진 정책 실패임이 분명하지만 정작 책임질 당사자는 없어 보이는 희한한 구조라 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2007년 여름을 달궜던 신정아 사건은 신씨와 변씨가 법정에서 그리 크지 않은 형량의 유죄 선고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경우 대중은 허탈감과 냉소 심리만 남게 된다. 사실 친미술정책은 그 자체로는 방향을 잘 잡았으나 아마추어리즘이 문제였다. 개인적 호감과 선의로 벌인 정책, 그러나 일관성과 안목의 부재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한계라면 한계였다. 만일 주무부처 문화관광부의 국이나 팀 단위에서 체계적으로 입안·추진됐더라면 뒤탈도 없고, 안정적으로 이뤄졌을 일이 공교롭게도 미술계를 망치고 사람들 마음을 크게 어지럽히고 만 셈이다. 미술평론가 류병학씨는 “지금 상황에서 꼭 필요한 것은 20세기 유럽-미국-중국 순으로 바통을 이어온 현대미술 심장부의 움직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그들의 게임은 철두철미하게 국제정치학에서 보이는 파워게임의 축소판이다. 그런 인식에서 한참 먼 ‘주변부 국가’ 한국은 지금도 문화를 장식이나 취향으로 여기는 주변부적 인식에서 맴돈다”고 지적했다. 그의 발언은 음미해 볼 가치가 크다.
현대미술에 대한 전략적 마인드부터 갖춰야 때문에 이번 사건을 문화사의 시야에서 보자면 의외로 간단하다. 사기극과 ‘예술적 동지’ 사이의 남녀관계가 얽혀 돌아가는 이 ‘국민드라마’가 문화 문맹 현상을 한층 더 재촉하는 일만은 막자는 교훈도 필요하다. 이번 기회에 예술을 장식 내지 취향 정도로 아는 데 그치는 섣부른 문화 호사취미를 바꿔 안정적이고 항구적인 예술정책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금까지 시행된 미술정책은 일단 그 자체로 소중한 미술계 인프라였다면, 이를 보다 항구적인 시스템으로 끌고 가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화가 임효(52·홍익대 미술교육원 교수)씨는 “학벌비리 문제는 학벌비리라는 범위 안에서 철저히 처단 받아야 하고, 어리석은 정치인의 서투른 미술계 관여는 별도로 거론돼야 옳다. 따라서 이런 사건이 문화계의 미래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전쟁인 세계 현대미술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최소한 한국사회의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미술사의 상식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미국 미술의 역사는 철두철미하게 전략적 마인드 속에서 움직여 왔다. 때문에 현대미술이야말로 국제정치학 이상의 뜨거운 국제정치학이다. 개항 이후 서구미술을 이식 받은 우리들은 그들이 차려 놓은 밥상(1950년대 추상 표현주의, 팝아트 등 각종 유파와 이즘)에 뒤늦게 뛰어들어 섣부른 학습을 반복하거나 모방해 왔고, 지금도 그 과정은 변치 않고 이어진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미술사 흐름 형성에 미술계-학계-정부는 물론 심지어 CIA 같은 정부기관까지 ‘문화 안보’ 차원에서 개입했던 역사가 있다. 지난 95년 10월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CIA가 20여 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추상표현주의를 지원해 왔다”고 보도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출신의 언론인 톰 울프의 ‘현대미술의 상실’(아트박스) 같은 대중 저작물에서도 그런 사실이 확인됐다. 물감을 질질 흘려서 거대한 화폭을 만들어냈던 액션 페인팅의 화가 잭슨 폴록의 경우가 그 사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배출한 토종 스타 제1호였다. 오랜 유럽 콤플렉스를 키워 왔던 미국은 폴록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대국의 이미지에 걸맞은 ‘메이드 인 USA 작가 탄생’을 자축했다. 그러나 폴록은 CIA를 포함한 미국 문화계가 함께 만들어낸 스타였다. 입체파 순수추상 등 다양한 유럽발(發) 모더니즘을 수입하던 처지에서 벗어나 문화발신국으로 발돋움하는 패를 처음으로 쥐었다. 미국은 크게 안도했다. 냉전 시대 지구촌 헤게모니 유지란 핵무기만으로는 안 되며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대중문화만으로도 부족하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파인아트 분야에서 깃발을 꽂으면서 미국은 명실상부한 대국으로 등장했다. 폴록이야말로 ‘미국적 헤게모니의 완성’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말은 그 때문이다. 한번 월드 스타가 배출되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 잭슨 폴록과 함께 윌렘 데 쿠닝, 프란츠 클라인이 잇따라 나오면서 연승가도를 달렸다. 1960년대 앤디 워홀 등 팝아트의 등장도 마찬가지였다. ‘비문화적 나라’라는 조소를 받아왔던 미국은 그를 전후해 조금도 유럽에 기가 죽지 않았는데, 이런 움직임의 뒤에는 정치 엘리트들의 몸에 밴 문화 마인드 내지 ‘전략으로서의 문화’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당시 상원의원이던 존 F 케네디가 좋은 사례다. 케네디는 앤디 워홀과 대중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야말로 미국 청년문화와 프런티어 정신의 상징이라고 치켜세웠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청년문화· 프런티어 정신과 함께 굳히며, 동시에 미국적 헤게모니까지 완성시켰다. 지금 미국에 깔린 미술 인프라들도 상당수가 그런 배경 속에서 차례로 도입됐다. 첫 출발은 1913년에 열린 아모리 쇼(Amory Show)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르셀 뒤샹 등 당시 유럽에서 활동하던 아방가르드 작가들을 데뷔시켜주는 멍석을 미국 내에 깔아줬다. 존 D 록펠러 부인을 중심으로 한 상류사회 인사들이 앞 다투어 이들의 뒤를 봐줬다. 그들이 보유한 작품은 1929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개관과 함께 항구적인 시설 내부로 들어섰다. MoMA의 개관을 전후해 뉴욕의 인사동 격인 ‘소호’거리도 만들어졌다. 미국 현대미술의 시작은 철두철미하게 패권 전략 아래 움직여 왔는데 ‘문화=전략무기’의 그 게임을 중국이 복사하고 있다. 정준모(51·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씨는 “역시 중국은 천하를 호령했던 대국의 전통이 있고, 지금 시점에서는 미술을 철저하게 문화전략 속에서 움직이는 데서 그 면모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베이징의 ‘따산즈 798예술구’는 군수공장을 개조한 곳인데, 거대한 스튜디오 타운으로 뜬 지 오래다. 세계로 작가를 배출하는 핵심 채널이자 중국미술 1번지로 이미 변신했다. 그리곤 스타 기근현상에 시달려온 미국·유럽 등 1세계 미술계에 작가들을 공급하는 아시아 공장으로 등장했다. 작가들은 중국의 정체성을 가장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전위부대이자 달러를 벌어들이는 1인 기업이다. 이곳에서 배출된 장샤오강과 우에민준, 팡리준 등 중국 현대미술의 ‘빅3’는 세계 미술시장에서 통하는 작가들이다.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에서 최고가 기록을 경신 중이다. 보수적이기로 이름난 프랑스의 컬렉터들조차 이들 빅3의 작품을 손에 넣지 못해 안달이다. 상하이 국제미술전이 열리는 2010년까지는 중국 현대미술 열풍이라는 현상이 지속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중국이 개방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때만 해도 산수화 등 전통 미술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도가 양대 산맥이었다. 그러던 중국의 현대미술 열풍 배후에는 자로 잰 듯한 중국의 ‘전략으로서의 문화’ 접근이 있다. 김이환 이영미술관장은 “1996년 뉴욕의 미술관과 화랑에서 서로 앞 다투어 중국의 이름도 없던 작가들의 전시회를 열어주는 현상을 목격했다. 몇 년 후 중국에 미술 시장과 화랑가를 설립하는 그들을 목격하며 놀랐다. 결국 올해 초 퐁피두 미술관과 구겐하임 미술관이 따산즈 798 예술구 입성을 선언했고,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장도 이곳 입성을 선언했다. 이는 중국 작가를 가지고 중국시장을 장악한 중국의 움직임, 중국 바람을 이용해 문화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속마음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내출혈 한국사회에 필요한 미술 인프라는? 철저하게 전략적 마인드로 움직이는 미국·중국과 달리 한국의 미술계는 지리멸렬이다. 정작 필요한 논의는 실종되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갇힌 국내 미술계의 구조 때문이다. 신정아 사건에서 보듯 별로 많지 않은 호사취미를 가진 애호가들이 무자격자를 만나 끝내 ‘사건’까지 키우고 만다. 사진작가 김아타가 내리 쉬는 한숨은 그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사진의 MoMA’라는 뉴욕 ICP에서 아시아 작가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며 뉴욕타임스의 3개면 리뷰까지 얻어냈던 그는 세계미술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한국이 정상적인 문화국가라면 서울 용산의 미군기지 반환 땅 자리에 ‘한국형 따산즈 798’이 벌써 들어서야 했다. 최소한 이를 위한 사회적 논의라도 한두 차례 있었어야 했다. 따산즈 798이 군수공장이었다면, 용산 기지야말로 따산즈 798 못지않게 전쟁과 폭력의 거대한 상징 아닌가? 20세기적 가치와 21세기 문화가 창조적으로 만나는 이 공간이야말로 창조적 미술이 탄생할 만한 훌륭한 거점이었다. 그러나 몇몇 아파트 업자만 재미 보는 재개발 계획이 거론되는 상황이 바로 우리 예술 정책의 현주소다.” 김아타는 실제로 올봄 이후 미군부대와 예술이 만나는 ‘의정부 798’을 일부 인사와 공론화하려 했고 지역 관계자들을 만나기도 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이런 형편에서 미술시장만 대책 없이 달아오른다. 물론 기형적 구조다. 거품 장세가 분명하다. 희한하게도 신정아·변양균 게이트가 미술시장에 찬물을 끼얹으리라 보는 관측은 의외로 소수다. 그만큼 이번 사건은 ‘소리만 요란했지, 대세와 상관없는 막간 스캔들’로 여긴다는 방증일까? 일반 대중이 미술 동네를 냉소적 시각으로 바라보지만, 눈 밝은 미술 수요자들의 요구는 아직도 적지 않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일부 애호가는 ‘블루칩 작가’를 찾아 뛰는 현상이 계속 벌어지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관계자들은 이번 사건과 상관없이 미술시장은 일단 향후 1∼2년은 ‘묻지마 빅뱅’ 수준의 활황을 거듭한다고 본다. 경매사의 경우 서울옥션, K옥션 두 개의 메이저 회사 외에 서울과 지방에 이미 8개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겼고, 올해 9월 말 현재 미술품 낙찰 규모는 1300억원에 달한다. 지난 한 해 낙찰 규모가 500억원이었으니 벌써 2.6배이며 연말까지는 3배 이상을 훌쩍 넘을 전망이다. 여기에 이달 초 ‘아트레이드(artrade)’라는 격주간 전문잡지까지 창간을 준비 중이다. 이 잡지의 컨셉트는 철두철미하게 시장 중심주의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주식 시세표와 흡사하게 작가·작품별 시장가치를 적나라하게 도표 방식으로 노출, 아직도 여전한 작가 중심주의의 거래 구조를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바꾼다는 계획이다. 장기적으로 국내 시장과 중국 시장을 잇는다는 전략이어서 중국 바람까지 탄다는 계획이다. 이 경우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한 국내 미술시장은 글로벌한 구조로 체질을 바꾸리라 기대된다. 하지만 한계 역시 분명하다. 체질 개선을 통한 기초체력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미술시장에서 활발히 거래가 이뤄지는 작가는 이중섭·박수근·천경자·박생광·김환기·이우환·장욱진을 비롯해 불과 두 자릿수에 불과할 정도로 밑천이 약하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현대미술에 전략적으로 접근할 만한 양질의 엘리트는 극히 드물다. 그 점에서 신정아 게이트는 꼭 100년을 맞는 근현대 미술의 분수령으로 기록될 게 분명하다. 홍역을 치르고 난 뒤 예전보다 건강해질까, 아니면 1~2년 호황을 끝으로 맥없이 주저앉으면서 세계 미술 흐름에서 길을 잃은 미아라는 ‘주변부 미술’의 특징을 뚜렷이 하게 될까? 그것이 관건이다. 큰 사건 속에서 더 큰 것을 배워야 하는 게 한국사회에 주어진 몫이다. [필자는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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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익명을 요구한 한 미술계 인사와 한나라당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사건의 윤곽이 어렴풋하게나마 잡힌다. 그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진원지는 일단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윗선’ 어딘가로 일단 추정된다. 사실 집권 이래 현정부는 현대미술 분야에서 우호적인 미술정책을 펼쳐왔다. 매우 이례적인 파인아트(고급 예술) 우선주의가 분명했다. 남북관계, 대미외교, 경제정책에서는 기존 권위주의 정권과 다른 ‘유사(類似) 진보’의 길을 걸어왔고, 일부 포퓰리즘 성향까지 보여왔던 데 비춰보면 더더욱 그랬다. 미술 우호적 정책은 2005년을 기점으로 문화관광부의 미술은행 발족, 일부 시중은행의 아트펀드 개시 등으로 나타났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해찬 총리 시절 미술 분야에 각별한 취미를 가진 이해찬 총리-변양균 기획예산처 장관 라인이 주무부처 문화관광부를 제치고 사실상 미술정책을 조율해 온 ‘비선’이라는 혐의를 잇달아 제기해 왔다. 물론 이렇다 할 물증은 없고 ‘설’뿐이다. 8월 중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유력 대선주자가 이 사건과 연루돼 있다”고 공격했다가 나중에 얼버무린 까닭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권영세·박찬숙 의원 등은 신씨와 그가 속해 있던 성곡미술관을 살피면 정부의 ‘전방위 밀어주기’가 눈에 띈다고 지적한다. 2003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현대 속에 살아있는 한국의 전통’전은 부실한 기획서를 써내고도 문예진흥기금 1500만원을 타냈다. 또 문화부는 신씨가 큐레이터로 활동한 스페인 아트페어에 지난해 30억원을 전격 지원했다. 당초 계획했던 금액보다 크게 증액된 이 돈은 노 대통령의 스페인 순방(올해 2월)을 앞두고 급작스레 이뤄졌다. 이뿐만 아니다. 산업은행은 미술 분야에서 유일하게 ‘존 버닝햄-나의 그림책 이야기’전(지난해 7월) 등 신씨 전시회 3건에 후원금을 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지원’에 힘입어서인지 성곡미술관은 사립미술관 중 리움에 뒤이어 뜨는 미술관이 됐다. 2005년의 경우 관람객이 10만 명이나 됐다. 신씨가 활동하던 1~2년 사이 관람객이 갑자기 10배 넘게 늘어난, 거의 기적에 가까운 수치다. 이런 상황의 중심에는 미술계의 젊은 큐레이터 신씨가 있고, 그가 당시 예일대 박사를 앞세워 변씨를 포함한 ‘비선 멤버들’과 안면을 트고 도움을 주고받았다는 것이 사건의 윤곽이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의 이해가 부족했던 호사가 수준의 정책결정자들이 무원칙한 미술 후원을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결격사유가 있는 여성 큐레이터를 만나 모든 일이 난파해버린 게 사건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문만 요란했지 크게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사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 수사가 규명할 만한 영역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비록 ‘윗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미술에 우호적 정책이 잇달아 내려진 과정에는 ‘윗선’의 자연스러운 교감만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잇단 의혹에 물증을 들이대기도 힘들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지난달 12일 일간지 문화부 기자들과 한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권양숙 여사가 “(언론 등에서)윗선, 윗선 이야기하는데, 대통령과 저도 서로 ‘그런데 윗선이 누구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고 말한 일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번 사건은 무원칙과 혼선 속에서 이뤄진 정책 실패임이 분명하지만 정작 책임질 당사자는 없어 보이는 희한한 구조라 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2007년 여름을 달궜던 신정아 사건은 신씨와 변씨가 법정에서 그리 크지 않은 형량의 유죄 선고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경우 대중은 허탈감과 냉소 심리만 남게 된다. 사실 친미술정책은 그 자체로는 방향을 잘 잡았으나 아마추어리즘이 문제였다. 개인적 호감과 선의로 벌인 정책, 그러나 일관성과 안목의 부재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한계라면 한계였다. 만일 주무부처 문화관광부의 국이나 팀 단위에서 체계적으로 입안·추진됐더라면 뒤탈도 없고, 안정적으로 이뤄졌을 일이 공교롭게도 미술계를 망치고 사람들 마음을 크게 어지럽히고 만 셈이다. 미술평론가 류병학씨는 “지금 상황에서 꼭 필요한 것은 20세기 유럽-미국-중국 순으로 바통을 이어온 현대미술 심장부의 움직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그들의 게임은 철두철미하게 국제정치학에서 보이는 파워게임의 축소판이다. 그런 인식에서 한참 먼 ‘주변부 국가’ 한국은 지금도 문화를 장식이나 취향으로 여기는 주변부적 인식에서 맴돈다”고 지적했다. 그의 발언은 음미해 볼 가치가 크다.
현대미술에 대한 전략적 마인드부터 갖춰야 때문에 이번 사건을 문화사의 시야에서 보자면 의외로 간단하다. 사기극과 ‘예술적 동지’ 사이의 남녀관계가 얽혀 돌아가는 이 ‘국민드라마’가 문화 문맹 현상을 한층 더 재촉하는 일만은 막자는 교훈도 필요하다. 이번 기회에 예술을 장식 내지 취향 정도로 아는 데 그치는 섣부른 문화 호사취미를 바꿔 안정적이고 항구적인 예술정책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금까지 시행된 미술정책은 일단 그 자체로 소중한 미술계 인프라였다면, 이를 보다 항구적인 시스템으로 끌고 가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화가 임효(52·홍익대 미술교육원 교수)씨는 “학벌비리 문제는 학벌비리라는 범위 안에서 철저히 처단 받아야 하고, 어리석은 정치인의 서투른 미술계 관여는 별도로 거론돼야 옳다. 따라서 이런 사건이 문화계의 미래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전쟁인 세계 현대미술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최소한 한국사회의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미술사의 상식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미국 미술의 역사는 철두철미하게 전략적 마인드 속에서 움직여 왔다. 때문에 현대미술이야말로 국제정치학 이상의 뜨거운 국제정치학이다. 개항 이후 서구미술을 이식 받은 우리들은 그들이 차려 놓은 밥상(1950년대 추상 표현주의, 팝아트 등 각종 유파와 이즘)에 뒤늦게 뛰어들어 섣부른 학습을 반복하거나 모방해 왔고, 지금도 그 과정은 변치 않고 이어진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미술사 흐름 형성에 미술계-학계-정부는 물론 심지어 CIA 같은 정부기관까지 ‘문화 안보’ 차원에서 개입했던 역사가 있다. 지난 95년 10월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CIA가 20여 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추상표현주의를 지원해 왔다”고 보도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출신의 언론인 톰 울프의 ‘현대미술의 상실’(아트박스) 같은 대중 저작물에서도 그런 사실이 확인됐다. 물감을 질질 흘려서 거대한 화폭을 만들어냈던 액션 페인팅의 화가 잭슨 폴록의 경우가 그 사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배출한 토종 스타 제1호였다. 오랜 유럽 콤플렉스를 키워 왔던 미국은 폴록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대국의 이미지에 걸맞은 ‘메이드 인 USA 작가 탄생’을 자축했다. 그러나 폴록은 CIA를 포함한 미국 문화계가 함께 만들어낸 스타였다. 입체파 순수추상 등 다양한 유럽발(發) 모더니즘을 수입하던 처지에서 벗어나 문화발신국으로 발돋움하는 패를 처음으로 쥐었다. 미국은 크게 안도했다. 냉전 시대 지구촌 헤게모니 유지란 핵무기만으로는 안 되며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대중문화만으로도 부족하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파인아트 분야에서 깃발을 꽂으면서 미국은 명실상부한 대국으로 등장했다. 폴록이야말로 ‘미국적 헤게모니의 완성’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말은 그 때문이다. 한번 월드 스타가 배출되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 잭슨 폴록과 함께 윌렘 데 쿠닝, 프란츠 클라인이 잇따라 나오면서 연승가도를 달렸다. 1960년대 앤디 워홀 등 팝아트의 등장도 마찬가지였다. ‘비문화적 나라’라는 조소를 받아왔던 미국은 그를 전후해 조금도 유럽에 기가 죽지 않았는데, 이런 움직임의 뒤에는 정치 엘리트들의 몸에 밴 문화 마인드 내지 ‘전략으로서의 문화’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당시 상원의원이던 존 F 케네디가 좋은 사례다. 케네디는 앤디 워홀과 대중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야말로 미국 청년문화와 프런티어 정신의 상징이라고 치켜세웠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청년문화· 프런티어 정신과 함께 굳히며, 동시에 미국적 헤게모니까지 완성시켰다. 지금 미국에 깔린 미술 인프라들도 상당수가 그런 배경 속에서 차례로 도입됐다. 첫 출발은 1913년에 열린 아모리 쇼(Amory Show)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르셀 뒤샹 등 당시 유럽에서 활동하던 아방가르드 작가들을 데뷔시켜주는 멍석을 미국 내에 깔아줬다. 존 D 록펠러 부인을 중심으로 한 상류사회 인사들이 앞 다투어 이들의 뒤를 봐줬다. 그들이 보유한 작품은 1929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개관과 함께 항구적인 시설 내부로 들어섰다. MoMA의 개관을 전후해 뉴욕의 인사동 격인 ‘소호’거리도 만들어졌다. 미국 현대미술의 시작은 철두철미하게 패권 전략 아래 움직여 왔는데 ‘문화=전략무기’의 그 게임을 중국이 복사하고 있다. 정준모(51·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씨는 “역시 중국은 천하를 호령했던 대국의 전통이 있고, 지금 시점에서는 미술을 철저하게 문화전략 속에서 움직이는 데서 그 면모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베이징의 ‘따산즈 798예술구’는 군수공장을 개조한 곳인데, 거대한 스튜디오 타운으로 뜬 지 오래다. 세계로 작가를 배출하는 핵심 채널이자 중국미술 1번지로 이미 변신했다. 그리곤 스타 기근현상에 시달려온 미국·유럽 등 1세계 미술계에 작가들을 공급하는 아시아 공장으로 등장했다. 작가들은 중국의 정체성을 가장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전위부대이자 달러를 벌어들이는 1인 기업이다. 이곳에서 배출된 장샤오강과 우에민준, 팡리준 등 중국 현대미술의 ‘빅3’는 세계 미술시장에서 통하는 작가들이다.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에서 최고가 기록을 경신 중이다. 보수적이기로 이름난 프랑스의 컬렉터들조차 이들 빅3의 작품을 손에 넣지 못해 안달이다. 상하이 국제미술전이 열리는 2010년까지는 중국 현대미술 열풍이라는 현상이 지속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중국이 개방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때만 해도 산수화 등 전통 미술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도가 양대 산맥이었다. 그러던 중국의 현대미술 열풍 배후에는 자로 잰 듯한 중국의 ‘전략으로서의 문화’ 접근이 있다. 김이환 이영미술관장은 “1996년 뉴욕의 미술관과 화랑에서 서로 앞 다투어 중국의 이름도 없던 작가들의 전시회를 열어주는 현상을 목격했다. 몇 년 후 중국에 미술 시장과 화랑가를 설립하는 그들을 목격하며 놀랐다. 결국 올해 초 퐁피두 미술관과 구겐하임 미술관이 따산즈 798 예술구 입성을 선언했고,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장도 이곳 입성을 선언했다. 이는 중국 작가를 가지고 중국시장을 장악한 중국의 움직임, 중국 바람을 이용해 문화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속마음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내출혈 한국사회에 필요한 미술 인프라는? 철저하게 전략적 마인드로 움직이는 미국·중국과 달리 한국의 미술계는 지리멸렬이다. 정작 필요한 논의는 실종되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갇힌 국내 미술계의 구조 때문이다. 신정아 사건에서 보듯 별로 많지 않은 호사취미를 가진 애호가들이 무자격자를 만나 끝내 ‘사건’까지 키우고 만다. 사진작가 김아타가 내리 쉬는 한숨은 그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사진의 MoMA’라는 뉴욕 ICP에서 아시아 작가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며 뉴욕타임스의 3개면 리뷰까지 얻어냈던 그는 세계미술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한국이 정상적인 문화국가라면 서울 용산의 미군기지 반환 땅 자리에 ‘한국형 따산즈 798’이 벌써 들어서야 했다. 최소한 이를 위한 사회적 논의라도 한두 차례 있었어야 했다. 따산즈 798이 군수공장이었다면, 용산 기지야말로 따산즈 798 못지않게 전쟁과 폭력의 거대한 상징 아닌가? 20세기적 가치와 21세기 문화가 창조적으로 만나는 이 공간이야말로 창조적 미술이 탄생할 만한 훌륭한 거점이었다. 그러나 몇몇 아파트 업자만 재미 보는 재개발 계획이 거론되는 상황이 바로 우리 예술 정책의 현주소다.” 김아타는 실제로 올봄 이후 미군부대와 예술이 만나는 ‘의정부 798’을 일부 인사와 공론화하려 했고 지역 관계자들을 만나기도 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이런 형편에서 미술시장만 대책 없이 달아오른다. 물론 기형적 구조다. 거품 장세가 분명하다. 희한하게도 신정아·변양균 게이트가 미술시장에 찬물을 끼얹으리라 보는 관측은 의외로 소수다. 그만큼 이번 사건은 ‘소리만 요란했지, 대세와 상관없는 막간 스캔들’로 여긴다는 방증일까? 일반 대중이 미술 동네를 냉소적 시각으로 바라보지만, 눈 밝은 미술 수요자들의 요구는 아직도 적지 않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일부 애호가는 ‘블루칩 작가’를 찾아 뛰는 현상이 계속 벌어지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관계자들은 이번 사건과 상관없이 미술시장은 일단 향후 1∼2년은 ‘묻지마 빅뱅’ 수준의 활황을 거듭한다고 본다. 경매사의 경우 서울옥션, K옥션 두 개의 메이저 회사 외에 서울과 지방에 이미 8개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겼고, 올해 9월 말 현재 미술품 낙찰 규모는 1300억원에 달한다. 지난 한 해 낙찰 규모가 500억원이었으니 벌써 2.6배이며 연말까지는 3배 이상을 훌쩍 넘을 전망이다. 여기에 이달 초 ‘아트레이드(artrade)’라는 격주간 전문잡지까지 창간을 준비 중이다. 이 잡지의 컨셉트는 철두철미하게 시장 중심주의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주식 시세표와 흡사하게 작가·작품별 시장가치를 적나라하게 도표 방식으로 노출, 아직도 여전한 작가 중심주의의 거래 구조를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바꾼다는 계획이다. 장기적으로 국내 시장과 중국 시장을 잇는다는 전략이어서 중국 바람까지 탄다는 계획이다. 이 경우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한 국내 미술시장은 글로벌한 구조로 체질을 바꾸리라 기대된다. 하지만 한계 역시 분명하다. 체질 개선을 통한 기초체력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미술시장에서 활발히 거래가 이뤄지는 작가는 이중섭·박수근·천경자·박생광·김환기·이우환·장욱진을 비롯해 불과 두 자릿수에 불과할 정도로 밑천이 약하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현대미술에 전략적으로 접근할 만한 양질의 엘리트는 극히 드물다. 그 점에서 신정아 게이트는 꼭 100년을 맞는 근현대 미술의 분수령으로 기록될 게 분명하다. 홍역을 치르고 난 뒤 예전보다 건강해질까, 아니면 1~2년 호황을 끝으로 맥없이 주저앉으면서 세계 미술 흐름에서 길을 잃은 미아라는 ‘주변부 미술’의 특징을 뚜렷이 하게 될까? 그것이 관건이다. 큰 사건 속에서 더 큰 것을 배워야 하는 게 한국사회에 주어진 몫이다. [필자는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다.]
고정관념을 버려라 변양균(58)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미술 사랑이 유별났다고 한다. 입만 열면 했다는 프랑스 바르비종파 이야기가 그 사례다. “바르비종파 화가인 밀레는 실내에서 귀족을 위해 그리던 화풍에서 벗어나 야외 농촌 풍경을 화폭에 담는 변신으로 미술사에 획을 그었다. 정부 행정도 바르비종파의 전환을 이뤄내자”는 식으로 강조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미술 인식은 19세기 중후반 고전미술에서 딱 멈춰 버렸다. ‘그 이후’ 전개된 현대미술 전반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있는지는 크게 의문이다. ‘곱고 예쁜’ 고전적인 인상파 미술에 열광하는 선에서 그친 한국인들의 평균적 미술 인식에서 크게 자유로웠다고 보기도 힘들다. 때문에 변씨는 호사가 아마추어에 불과하다는 일부의 지적을 피하기 힘들다. 평균적 고정관념의 대표적인 사례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럴듯하게’ 그린 그림이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20세기 현대미술은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손재주 뛰어난 화가가 최고 미술가”라는 고정관념을 버릴 때 눈에 들어온다. 모든 작가 자체가 일부러 못나게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을 출발시킨 앙리 마티스나 루오 등은 주변으로부터 ‘너무 유치찬란하며 재능 없다”는 멸시를 들어가며 자기 세계를 구축했다. 물어보자. 친구 사이인 입체파의 조르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의 모든 그림은 눈앞의 사물들을 전혀 무시 내지는 해체시킨다. 그 이전 고흐 작품도 광기에 가까운 엽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왜 못 그린 그림을 더 치켜세울까? 그것이 핵심이다. 현대미술의 출발은 ‘스토리로부터의 완전 자유’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이전의 그림은 신화·성경의 에피소드를 화폭에 옮기는 데 그쳤다. 그 점에서 옛 그림은 비주얼 언어만 사용했을 뿐 내용은 거의 ‘문학적인 그림’이었다. 100%의 그림들이 ‘그 무엇에 관한’ 그럴듯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현대미술의 최대 특징은 그런 재현(再現)과 판박이 기능과 깨끗하게 작별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색채·내용·스타일의 독립공화국임을 선언했다. 명실상부한 해방구였다. 그게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인데 입체파, 야수파, 미래파 등 초기 모더니즘 미술은 물론이고 1930년대 이후 다다이즘,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개념미술 등 온갖 유파들을 관류하는 특징이다. 20세기 미술은 순수 추상의 해방구에서 벌어진 장쾌한 지적 모험의 역사다. 그 점에서 모더니즘 미술은 현대수학과 닮은꼴이다. 참외나 삽자루의 숫자를 세는 산술(算術)에서 벗어난 수학이 순수 논리의 독립공화국이듯, 현대미술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현대미술을 못 알아먹겠다’는 말은 초등학교 수학만 배워도 세상 사는 데 지장 없다는 배짱에 불과하지만, 첨단과학과 우주를 나는 과학과는 담 쌓고 살겠다는 무지일 뿐이다. 문제는 이 현대미술은 돈과 권력 그리고 명성이 따라 붙는다는 점이다. 국제정치의 파워게임이 벌어지는 뜨거운 전쟁터이기도 하다. 문화전쟁이 벌어지는 지금 주요국들은 미술의 전략적 가치를 알고, 알게 모르게 활용 내지 개입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미국, 유럽 등 제1세계들은 능수능란하게 일을 벌인다. 그것의 표현이 베니스비엔날레 등 유수의 미술잔치판인데 이 ‘미술언어의 견본시장’을 통해 작가와 작품을 띄우거나 돈도 남기고 문화대국의 꿈도 살리는 짭짤한 장사를 한다. “무역거래 세계 12위를 자랑한다는 한국은 여전히 지구촌 문화의 변방이다. 작가들은 주눅들어 모방에만 익숙하고, 화상(畵商)들은 세계미술을 움직이는 이너서클 정보가 없다. 이 판에 정부 관료 중에선 미술의 전략적 가치를 알고 움직이는 사람이 전무하다. 이런 형편에서 문화전쟁에 임하는 큰 그림은 언감생심인지도 모른다.” 독일에서 공부한 미술평론가 류병학의 말은 울림이 크다. 아직도 산업시대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미술계를 복마전으로만 안 채 스캔들로 증폭시키는 한국사회에 내리치는 정문일침의 한 방이다. |
‘한국을 버리고’ 대성공 거둔 김아타 “(작가와 작품가격을) 따지지 말고, 깎지 말며, 현찰 박치기를 하라.” 그게 요즘 국내 미술계 불문율이자 돈 있는 컬렉터의 3대 미덕이다. 돈 바람이 몰아치는 화랑가 표정이기도 하다. 10년을 훌쩍 넘긴 최악의 장기 불황 끝에 찾아온 뜻밖의 호황에 화랑가는 지금 정신을 못 차린다. 이 와중에 한 작가가 ‘작품 판매 중지’를 선언했다. “휩쓸려가기 싫다”는 이유다. “당분간 국내에서는 내 작품을 팔지 않겠다”고 결심한 주인공은 사진작가 김아타(51)다. 지난해 사진의 뉴욕현대미술관(MoMA)으로 통하는 ICP 개인전은 아시아 작가로도 첫 기록이었다. 성공적인 전시 이후 빌 게이츠 재단에서 그의 작품 한 점을 1억원에 구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는 단박에 ‘블루칩 작가’로 떴다. 국내 컬렉터들이 김아타 작품 사재기에 나섰음은 물론이다. 올여름 벌어진 신정아 사건과 상관없이 미술시장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그는 ‘거꾸로주의’를 내세웠다. 대신 그가 뽑아 든 카드는 작품 관리·판매를 전담하는 법인(法人) 설립이었다. 직원만 10명 내외다. 지난 7월 직원들에게 준 첫 봉급액만 수천만원이다. 해외 미술계에서 그만큼 김아타 작품의 수요가 엄청나다는 얘기다. 가수 비나 보아, 탤런트 장동건 같은 연예인들의 1인 기업이 있지만, 미술작가로는 첫 사례다. 법인 설립은 상당수가 쉬쉬하며 이뤄지는 뒷거래 대신 모든 거래를 투명하게 노출하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겠다는 생각이다. “내 경우 지난 20여 년 작품활동 자체가 지리멸렬한 한국사회 구조와 완전히 거꾸로 갔다. 내 스타일이 아닌데 굽실대고 따라갈 필요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독한 ‘왕따’를 당해 왔지만, 후회는 없다. 되레 현대미술 1번지 뉴욕에 나가 성공을 거뒀다. 아직도 학벌·지연 따위의 연줄망으로 전시와 판매가 이뤄지는 한국사회는 견디기 어려운 지옥이다.” 현재 뉴욕에 체재 중인 그의 냉소적인 발언은 괜한 한국 비하가 아니다. 한국미술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거울로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무명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던 시절인 2002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했다지만, 국내에서 철두철미 국외자였다. 유일하게 그를 평가한 이가 평론가 윤진섭씨 등 두세 명이 전부였다. 현대미술에 훤할 법한 서울 강남의 한 갤러리 주인도 숫제 그를 사기꾼 취급했다. “ ‘큰 예술을 하려면 크게 사기 쳐야 한다’는 게 내 판단이다”는 말로 김아타는 그때마다 넘어갔지만, 상처가 없지 않았다. 김아타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손광운 변호사는 “아직도 예술을 장식이나 호사취미로 아는 한국사회 문법을 무시하고 나홀로의 길을 가려는 패기 있는 예술가를 사기꾼 취급하는 작태야말로 한국사회의 참담한 현주소다. 그의 국내 판매 거부는 거품 많은 미술시장을 향한 거부감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방대 출신. 사진은 전공도 안 했다. 1981년 창원대 기계공학과 졸업이 전부다. 부산대 이진오 교수처럼 그를 잘 아는 사람은 ‘창원대 철학과 출신’이라고 말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실존 철학을 비롯한 동시대 담론에 훨씬 공부를 축적한 뒤 부산 지역에서 주로 흑백 다큐멘터리 사진 활동을 하던 그는 10년 전 본명(김석중)까지 바꾸면서 서울에 올라왔다. 세계를 매료시키는 그의 작품의 흡인력은 큰 스케일과 함께 철학적 울림이다. 불교 등 동양철학적 성찰이 카메라 작업의 메커니즘에 잘 녹아 있고, 동시대 권력과 전쟁까지를 작품 안에 녹인다. 그의 또 다른 친구인 디자이너 이명희씨는 “김아타는 비유컨대 큰 붓을 가지고 척척 휘두르는 작가다. 작은 손, 작은 생각을 희롱하는 이에게서 도저히 만날 수 없는 큰 예술, 큰 생각이 있고, 그게 외국 컬렉터나 미술관 관계자에게는 눈에 번쩍 뜨이는 매력”이라고 말한다. |
‘포르노 사진가’ 오명 쓴 황규태 “의뢰인이 억울하지 않도록 하는 게 변호인의 임무다.” 신정아 법정 대리인 박종률 변호사의 이 말은 백 번 맞는 말이다. 사기·횡령 행위의 치죄(治罪)야 당연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씨와 변양균씨가 받아야 할 법률 서비스는 시민적 권리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적 측면에서 두 사람에게 정상 참작의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섣부른 지식을 가지고 사적 이득을 얻으려 함께 움직였던 공범”이라는 미술계 인사 P씨의 독설도 그 때문이다. 특히 고위공직자 변씨야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적용되는 엄격한 도덕적 잣대는 그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에 머물렀던 미술 지식이 좀 더 깊었더라면 좋은 후견인으로 남아 있을 걸” 하는 아쉬움이 약간 남을 뿐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옹호를 받아야 한다. 사건의 와중에 포르노 사진가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사진작가 황규태(69·전 미주 동아일보 대표)씨다. 그의 이름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두 차례나 신문에 오르내렸다. 2년 전 기획예산처가 사들인 사진 작품 ‘큰일났다, 봄이 왔다’의 작가로 잠시 들먹여졌다. 정부 등 공공기관의 미술품 구입은 사회적 의무다. 그럼에도 신씨 사건의 고약한 맥락 때문에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거래’로 비쳤다. 더구나 그는 신씨 누드를 촬영한 당사자로 알려졌다. 합성이냐 아니냐 논란이 있지만, 이미 ‘포르노 사진가’ 딱지가 붙어버렸다. 하지만 미술계는 황씨야말로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라고 입을 모은다. 무엇보다도 그는 현대사진의 선구자다. 때문에 ‘한국의 로버트 프랭크’로도 불린다. 로버트 프랭크는 현대사진의 아버지로 불리는 작가. 한국 다큐멘터리 중심의 흑백사진이 예술사진의 전부로 알던 60년대 후반 그는 벌써 현대적 어법의 천연색 사진을 실험했고, 이후 초현실주의 기법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며 명성을 떨쳤다. 94년 워커힐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후 국립현대미술관(96년), 광주비엔날레(97년), 아트선재센터(2004년)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국립현대미술관·국회 등이 그의 작품을 사들였고, 서울대·이화여대에도 출강했다. 사진작가 주상연씨는 “그분만큼 열려 있는 사진언어를 가진 이는 드물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 서울에 없다. 지난 5월 로스앤젤레스 연방지법 재판부에서 실형 4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다. 당시 담당 판사는 판결문을 통해 “황씨의 감형 탄원서에 수천 명의 한인 교포가 동참한 사실을 안다”고 밝혔고, 교포신문에서는 이 문제를 사설로 다루기도 했지만 그에게 부과된 죄목은 횡령죄. 오래전 미국에서 기업활동을 하며 생긴 의혹 때문이다. 경향신문 사진기자를 거쳐 65년 미국에 건너갔던 황씨는 호텔·은행업을 하며 한인사회에서 성공한 사업가 겸 예술가로 꼽혔으나 87년 동아일보 미주지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미국중소기업청(SBA) 지원금을 유용했다. 횡령액수는 26만 달러. 황씨는 이 사건으로 90년 체포된 뒤 보석금을 내고 석방된 상태에서 귀국해 작가 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한·미 범인인도협정에 따라 지난해 말 한국에서 검거됐다. 재판이 진행 중인데 선고 직전 해외로 도피해 한국에 갔다는 혐의다. 크지 않은 횡령액수, 17년 전 돌연 선고를 회피한 채 귀국을 결심한 배경 등은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한국의 대표적 작가가 사회적 무관심 속에 미 형무소에 복역 중인 사실은 분명 유감이다. 문화관광부 한민호 공간문화팀장은 “그분을 잘 보호하지 못했다. 지난해 11월 미 수사당국이 그를 넘겨 받으러 왔을 때 사진계가 정상참작을 요구하는 탄원서 등을 발표했더라면 효율적 대응도 생각할 수 있었다”고 아쉬워했다. 이남희(미술 웹진 ABC페이퍼 대표)씨는 “황씨 사건은 아직은 충분한 공동체 의식과 작가정신 공유 등이 부족한 국내 사진계의 씁쓸한 현주소를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신씨 사건으로 불필요한 덤터기까지 쓰게 돼 더더욱 유감이다. 궁극적으로 황씨의 명성을 되살려내느냐의 여부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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