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사랑] 하숙생의 프리섹스
예전부터 ‘국민의 성적 능력이 그 국가사회를 왕성하고 강건하게 만든다’는 말이 있다. 언뜻 보면 큰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이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주변을 봐도 성적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 사회 진출이 빠르고 승진 또한 남보다 앞서간다. 강한 섹스가 강한 국가를 만든다는 주장의 한 가지 근거로 자주 제시되는 사례가 독일의 대학사회다. 18세기 중엽 독일 서부의 대학도시(예나, 괴팅겐 등)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최상의 청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대학생 태반이 하숙하고 있었는데, 하숙집에서 ‘세 끼 식사와 처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작가 마기스텔 타우크하르트는 자신의 한 저서에서 당시 대학생활의 풍속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예나에서 대학생은 이른바 샤르만트라고 불리는 여성의 서비스를 받으며 하숙생활을 시작한다. 이 샤르만트는 천민 출신 처녀로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유지하다 공부를 마치고 이 도시를 떠날 때는 후배 대학생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 미망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는 서너 명의 남자 대학생이 순서를 정해 놓고 하숙집 주인과 동침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라고 했다. 유부녀도 남편보다 싱싱하고 정력이 넘치는 대학생을 선호해 이 새로운 풍속에 기꺼이 동참했다고 한다. 이처럼 대학도시의 모든 동네에서 대학생은 큰 환영을 받는 침대의 손님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들을 비난하지 않았으며, 비도덕적 행위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자유의 구가였고 우애정신의 발로였다.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사랑하는 친구여! 술을 마셔라. 싸움을 해라. 마음껏 놀아라. 그것은 모두 제군의 자유사상과 마찬가지로 제군의 명예를 조금도 손상하지 않는다”는 말로 그들의 방종을 고무했다. 지금의 독일인조차도 이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독일이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와 젊음이 양성됐다고 말한다. 또 한 가지 근거로 동프로이센의 소국에 불과했던 프러시아(현재 독일의 기초)에서도 찾을 수 있다. 프러시아 군주 빌헬름 1세는 국토 확장을 위해 침략과 정복을 일삼았다. 병력과 탄약의 소모는 엄청났다. 빌헬름 1세는 지원병과 용병으로 모자라 징병제를 실시했고 이웃 나라에서 젊은이를 납치했지만 부족한 병력을 채우는 데 역부족이었다. 한 번 전투를 치르면 최대 2, 3만 명의 병사가 전사 또는 전상으로 소멸했다. 여러 방안을 찾던 빌헬름 1세는 결국 인구증산 정책을 발표한다. 그는 “앞으로 10년간 60세 이하의 남자는 수도원에 들어가지 못한다. 모든 남자는 아내를 두 사람씩 거느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포고령을 내리면서 증산을 독려했다. 다음 왕인 프리드리히 2세는 도덕법전과 형법전을 따로 만들어 애욕과 관련된 범죄의 규제를 전부 삭제했다. 축첩은 물론 근친상간, 처녀 능욕까지도 형사적 처벌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또 젊은 처녀가 교회에서 간음죄로 참회하는 것도 금지했다. 섹스에 대한 자유가 무한히 허락되자 결국 중혼까지 합법화됐다. 프리드리히 2세는 끝없이 일련의 명령을 하달했고, 병력 확보에 일조한다는 이유에서 출산 능력이 있는 여자를 위한 정책도 여럿 펼쳤다. 그리고 창녀가 사라졌다. 창녀가 아니더라도 섹스의 공급원이 늘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 시책에 힘입어 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했고 남자는 군인으로, 여자는 방적공장 여공으로 국방과 산업 등 각 분야에서 국가의 발전을 주도했다. 빌헬름 1세의 정책이 주효한 것이다. 현재 독일의 기초인 프러시아는 이런 과정을 통해 활기가 넘치는 부유한 유럽의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현재 독일인이 18세기 중엽의 대학사회를 욕하지 않고 빌헬름 1세의 정책을 인정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오늘날 유럽 사회의 프리섹스 사조가 널리 퍼져 있고 간통이란 말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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