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홀로서기
오바마의 홀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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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날 버락 오바마는 머리 옆에 자기 표현으로 ‘달걀만 한 혹’을 붙이고 귀가했다. 친구의 축구공을 훔친 아이와 싸우다 그 아이가 돌로 오바마의 머리를 쳤다.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자존심이 상한 오바마는 집에 오자마자 의붓아버지 롤로 소에토로에게 뛰어갔다. 소에토로는 마당에서 애지중지하는 모터사이클을 닦고 있었다.
오바마는 “그 애가 비겁했어요”라며 칭얼댔지만 소에토로는 아무런 위로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4시간 뒤. 소에토로가 권투 글러브 두 쌍을 들고 나타났다.
하나는 자기가 끼고 하나는 오바마에게 주었다. 소에토로가 스파링을 시작하며 “자신을 보호하는 게 관건이야”라고 말했다.
그는 오바마 주변을 빙빙 돌며 “한시라도 양 손을 내려선 안 돼”라고 소리쳤다. “계속 움직이되 늘 몸을 낮춰 상대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해.” 오바마는 상하좌우로 계속 날렵하게 움직이며 펀치 날리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30분간의 스파링 도중 단 한 번 손을 내렸다가 호되게 당했다.
“곧바로 턱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정신이 멍해서 소에토로의 땀방울 맺힌 얼굴만 쳐다봤다”고 오바마가 돌이켰다. “한시라도 긴장을 풀어선 안 되는 거야”라고 소에토로가 말했다. 오바마가 1995년에 펴낸 회고록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Dreams From My Father)’에서 회상한 이야기다.
소에토로는 스파링을 끝내고 악어 연못 곁에 둔 물병에서 물을 마시며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힘들고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드를 내리면 끝장이다. 남자는 말이야, 다른 남자의 약점을 이용한단다. 국가도 마찬가지야. 강한 자가 약자의 땅을 차지하지. 또 그 약자를 자기 밭에서 일하게 만들잖아. 약자의 여자가 예쁘면 자기가 차지하려고도 해.” 소에토로는 다시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물었다. “그렇다면 넌 어느 쪽이 되고 싶니?”
오바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는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오바마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40년 전 지구의 반대편에서 먼지가 풀풀 날리는 무더운 날 복싱 교습을 받던 날을 두고 오바마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이라고 8월 21일 인터뷰에서 내게 말했다.
“의붓아버지는 내게 큰 깨달음을 주셨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이었다.”지금 오바마는 미국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고 있지만, 유권자들은 그가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와의 싸움에서 반드시 필요한 강인함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우려한다(케네디 형제도 ‘강인함’이라는 단어에 집착했고, 그런 면모를 보이려 애썼다).
호전적인 성향의 조셉 R 바이든 주니어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선정한 사실이 그나마 민주당의 사기를 진작시켰지만, 오바마(‘오밤비’라고 불린다)가 최종 승리를 쟁취하기엔 너무 지적이고, 너무 엘리트적이며, 너무 부드럽다는 것이 유권자들의 평가다.
그러나 정치 철학이 뭐든 간에 오바마의 이력을 공정하게 살펴보면 그가 강인한 인물이란 점을 알 수 있다. 그의 강인한 복원력은 가정을 버린 아버지가 남긴 공백을 메우려는 투쟁에서 비롯됐다. 오바마는 케냐인인 아버지를 1971년 성탄절에 딱 한 번 만났다.
오바마가 유아였을 때 그의 아버지는 하버드에 가기 위해 뉴욕대의 장학생 제의를 거절했다. 장학금을 받았다면 가정을 꾸리는 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야심만만한 아버지에게는 아내와 아들보다 아이비 리그가 더 중요했다.
1971년 오바마와 아버지가 호놀룰루 공항에서 잠시 만났을 때의 사진이 있다. 검은 양복에 붉은 넥타이를 맨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통통한 아들의 왼쪽 어깨를 팔로 감싸고 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사진 밖의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다.
당시 배리로 불렸던 오바마도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는 딴 곳을 쳐다보지 않고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그 순간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다. 배리는 팔짱을 낀 채 아버지의 큰 손을 가슴에다 꼭 누르고 있다. 영원히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는 듯이.
오바마는 다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아버지의 정을 받지 못한 오바마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경솔함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보이지 않는’ 중심을 구축했다. 오바마 자신도 그 문제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남자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하든가 아버지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애쓰게 마련”이라고 오바마는 말했다. 그는 자주 그러하듯 이렇게 덧붙였다. “내 경우는 두 가지가 전부 옳은 것 같다.”
그러나 오바마에게는 그 두 가지가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홀로 서는 법을 찾아야 했다. 대부분의 기간을 백인 외조부모의 손에 성장하면서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의 혈통을 조화시키려 애썼다. 생부가 곁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혼자 힘으로 자신이 선택한 세계를 뚫고 들어가야 했다.
그렇다고 어머니와 외조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보살핌은 오바마가 필요로 하는 기준에 크게 미흡했다. 물론 그들의 탓은 결코 아니었다. 오바마는 아무도 말하지 않은 진실, 인정되지 않는 복잡성, 감춰진 과거사의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오바마에게는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방랑아로서 혼돈의 나락으로 빠져드느냐, 아니면 그 속에서 분연히 일어나기 위해 세상을 상대로 자신을 단련하느냐?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 때문에 47세의 나이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버락 오바마의 삶은 생존과 자기 방어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가 받은 충고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어쩌면 그의 부상과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늘 자신을 보호하라”는 소에토로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자신의 삶을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독특한 모험담으로 생각한다.
▶하버드 로스쿨에 다니던 시절. |
그러나 아버지 없는 아들이 야심과 장악력에 대한 굶주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바탕으로 세속적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드라마는 미국 정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대통령들, 그리고 대통령 후보들은 아주 독특한 두 부류의 가정 중 하나에서 나오는 경향이 있다.
가문의 중심에 강하고 걸출한 아버지가 있는 경우(애덤스 가문, 케네디 가문, 부시 가문, 매케인 가문)와 아버지가 허약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다. 생각보다 많은 경우가 후자다. 앤드루 잭슨과 빌 클린턴은 태어나기 전에 부친을 여의었다.
제럴드 포드는 17세가 돼서야 생부와 대면했다. 나는 오바마에게 강한 아버지를 두었거나 아니면 아버지가 없어야 강인한 정치인이 되는 이유를 물었다. “대통령 출마라는 혹독한 과정을 견뎌내려면 스스로 높은 기대치를 설정해야 한다”고 오바마는 대답했다.
“어떤 계기가 필요한데 내 경우는 아버지가 곁에 없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나 자신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이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졌다. 나는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자랐다. 그래서 나도 거기에 뒤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환경에 너무 잘 적응하면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게 된다.”
나는 빙긋이 웃었다. 언론인 사이에서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농담을 자주 하는데, 대통령 자리를 원하는 사람에게서 그 말을 듣는 게 재미있었다. 오바마는 정치의 가능성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가 내세우는 ‘희망’이라는 메시지가 그렇다. 그러나 오바마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그의 실용주의는 그의 과거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나 오바마의 회고록 두 편을 전부 구입한 사람들에게는 이제 그의 생애가 익숙할 것이다.
그래도 여기서 반복할 필요가 있다. 아직 세부 사항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캔자스주 출신 백인이고, 그의 아버지는 케냐 출신 흑인이다. 두 사람은 하와이 대학에서 만나 결혼했다. 1961년 오바마가 태어났다.
이미 아프리카에서 결혼한 적이 있었던 아버지는 하버드대로 가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난 나 자신을 연쇄 일부다처자로 생각한다”고 오바마의 아버지가 한 친구에게 말했다. “연쇄라는 말은 동시가 아니라 한 번에 한 아내씩 뒀다는 얘기다.”
오바마의 아버지는 4명의 아내에게서 8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바마의 어머니 앤 던햄 오바마는 인도네시아인 롤로 소에토로와 결혼해 아들을 데리고 자카르타로 갔다. 오바마는 나중에 하와이로 돌아가 외조부모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소에토로와 사이에 딸 마야를 낳았지만 얼마 안 가 소에토로와 헤어지고 하와이로 돌아왔다. 오바마는 LA의 옥시덴털 칼리지에 2년을 다니다가 동부의 컬럼비아대로 전학했다. 그 뒤 시카고에서 지역사회 운동가로 일하다가 하버드 로스쿨에 들어갔다(생부의 초기 여정과 흡사하다).
거기서 승승장구해 하버드 로 리뷰지의 편집장으로 선출됐다. 오랫동안 정체성이 흔들렸던 오바마는 하버드에서 피부색의 경계선을 뛰어넘는 법을 배웠다. 오바마는 원래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정치에서 성공하면 아버지 없는 아들이 열망하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얻을 수 있고 권위와 성취라는 보상이 따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바마는 시카고로 돌아가 강인한 아버지를 가진 여성과 결혼했고 곧 공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를 이끄는 힘은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 “어떤 차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을 끌어올려야 했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어머니가 내 삶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또 내게는 이붓아버지가 있었고 외할아버지도 있었다. 두 분이 나의 성장에 도움을 많이 줬다. 좋은 분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상당히 험난한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은 나 스스로의 판단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우는 법을 배웠다.”
오바마의 아버지(오바마 시니어)는 1960년대 초 하와이 대학 캠퍼스에서 이름을 날렸다. 키가 크고, 목소리가 굵으며, 카리스마가 넘치고, 고집이 셌다. 그는 케냐 같은 나라들이 식민 지배에서 독립하면서 아프리카의 차세대 지도자를 위한 장학 프로그램에 선발돼 하와이 대학에 들어갔다.
닐 애버크롬비(현재 하와이 출신 하원의원)가 경제학을 전공하던 그와 곧바로 친해졌다. 오바마 시니어는 세계를 개조해 낼 현대 사상가들의 장점을 모아놓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방에 들어오면 금방 알 수 있었다”고 애버크롬비가 말했다. “그는 대범하고 명석했다.”
오바마 시니어와 애버크롬비는 맥주와 피자로 흥을 돋워 가며 밤늦도록 대화했다. 오바마 시니어와 그의 친구들은 아프리카의 식민지 탈피 독립운동과 미국의 민권운동 등 세계 정치와 국제 자유운동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케냐 같은 나라에서 고개를 드는 민족주의가 부족과 개인적 갈등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고 크게 우려했다”고 애버크롬비가 말했다. 그에게는 그런 부족주의가 강 건너 불이 아니었다. 그의 가족은 소수인 루오 부족에 속했다.
그러나 당시 부상하는 케냐의 지도자 케냐타는 다수인 키쿠유 부족이었다. 케냐가 독립하자 곧 두 부족 간의 갈등이 악화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오바마 시니어는 케냐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하버드를 거쳐 케냐로 가겠다는 그의 결심 때문에 앤과의 결혼이 파경으로 치달았다. 앤은 부상하는 민권운동에 열정을 가진 똑똑하고 젊은 학생이었다. 러시아어 수업을 들으면서 오바마 시니어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직 10대였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오바마 시니어의 야망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다. 애버크롬비는 “아주 모험심이 강한 여자였다”고 돌이켰다. “하지만 그가 말이 많은 반면 그녀는 아주 차분했다. 그냥 지켜보며 조용히 참여하는 스타일이었다.
버락 오바마가 태어난 뒤 오바마 시니어가 하버드로 갈 기회가 생기자 그녀는 자신의 야망이 그의 야망과 엇갈린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1950년대에 성장하면서 가부장적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그는 이 운동에 참여해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하버드에 갔다. 그것이 최고의 영예였기 때문이다.” 앤은 결국 오바마 시니어와 이혼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오바마는 특별히 인상에 남는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오바마가 성장하면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남성은 외할아버지 스탠리 던햄이었다.
애버크롬비는 하와이에서 어린 오바마가 스탠리와 함께 있는 것을 자주 봤다고 말했다. 둘은 같이 산책을 하거나 해변을 찾았다. “스탠리는 아주 자상하고 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애버크롬비가 말했다. “그는 오바마를 무조건 좋아해 어디든 데리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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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1920년대에 석유를 생산하던 도시였지만 대공황 시절 크게 쇠락했다. 그 자신도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어머니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여덟 살짜리 스탠리가 어머니의 시신을 발견했다).
오바마처럼 스탠리도 조부모의 손에 자라났다. 그러나 독실한 침례교 가정인데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때문에) 스탠리는 반항적이고 방랑적으로 변했다. 고교 시절 교장을 구타한 뒤 퇴학을 당했고 다음 3년 동안 험한 육체노동을 했다.
그는 위치토의 여자친구 메이들린(오바마는 그녀를 ‘투트’라고 부른다)에게 구혼했다. 그러나 감리교 신자이며 형편이 나았던 그녀의 부모가 반대했다. 두 사람은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곧 진주만 공격이 있었다.
스탠리는 육군에 입대했고, 메이들린은 폭격기 조립공장에서 일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엘도라도에서 가구점 영업사원으로 일하다가 텍사스주의 작은 도시를 거쳐 시애틀로 갔다가는 결국 하와이에 정착했다.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그는 딸이 오바마와 결혼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손자를 귀여워했다. 곧 앤은 다른 외국 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인도네시아의 지질학자인 소에토로였다.
소에토로는 테니스를 좋아했고, 스탠리와 서양장기를 두었으며, 오바마와 장난 레슬링을 즐겼다. 그가 먼저 자카르타로 돌아갔고, 앤과 오바마도 그 뒤를 따랐다(외할머니 투트는 늘 실용적인 사람이라 국무부에 인도네시아의 정정을 묻곤 음식을 많이 싸가야 한다고 고집했다. “거기 사람들이 무엇을 먹는지 알기나 해?”라고 그녀는 말했다).
인도네시아는 수 세기의 식민주의에서 벗어나 수카르노가 새로운 정부를 세운 뒤로 사회적 긴장이 팽팽했다. 오바마와 함께 학교에 다녔던 이웃 친구 로니 아미르는 납치, 실종, 공산주의자의 머리 베어가기 등에 관한 이야기를 기억했다. 오바마의 집안에도 긴장이 흘렀다.
앤과 오바마 둘 다 소에토로가 하와이에 있을 때와는 달리 냉담해졌다고 생각했다. “의붓아버지는 스스로 어둡게 가려진 곳으로 들어가 밝은 면이 사라진 듯했다”고 오바마는 회고록에 적었다. 어떤 날 밤엔 소에토로가 “수입산 위스키 병을 들고 집 안을 돌아다녔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 진실은 피의 숙청기간에 그가 인도네시아로 소환 당해 뉴기니로 보내졌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행운아였다”고 한 친척이 앤에게 말했다. 다른 학생들은 투옥되거나 실종됐다. 그가 의붓아들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듯하다.
오바마는 어려서부터 보스 기질이 있었다. 자카르타에서는 매일 수업 시작 전 학생들이 교실 밖에 줄을 섰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오바마는 줄 앞에서 지휘를 했다. “줄 서” “준비” “똑바로 서”라는 구령을 붙이고 줄이 똑바로 되면 학생들을 교실로 들여보냈다.
3학년 땐 담임교사가 지휘를 돌아가면서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아이는 늘 자기가 맨 앞에 서고 싶어 했다. 심리적으로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때로는 다른 급우에게 차례를 넘기라고 지시해야 했다.” 그러면 그는 기꺼이 양보했다고 그 여선생님이 말했다.
오바마는 어머니와 여동생에게도 모질게 굴었다고 스스로 돌이켰다. “동생 마야가 내가 사준 소설을 읽지 않고 TV만 봐서 혼을 내줬다”고 오바마는 적었다. “어머니에게도 그녀가 일하는 외국인 기부기관들과 국제개발기구가 제3세계 사람들의 의존심만 키운다고 여러 차례 훈계 조로 말했다.”
자카르타 시절 오바마는 학교 운동장에서 평화의 중재자 역할도 했다. 이웃 친구였던 하몬 아스키아르는 “친구들이 말다툼을 하면 배리가 화해를 주도했다”고 말했다. “한 친구의 손과 다른 친구의 손을 하나씩 잡고 강제로 악수하게 했다.”
앤은 결국 서로 떨어져 살더라도 아들이 미국에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바마는 하와이로 돌아가 외조부모와 생활했다. 매우 중요한 시기에 조부모의 세계가 오바마의 세계가 된 것이다. 스탠리는 가구 판매를 그만두고 보험회사에서 일했다.
한편 메이들린은 하와이 은행에서 간부가 됐다. 인도네시아에서 어머니와 있었던 시절이 객지 생활이었다면 하와이에서 오바마의 삶은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의 생활이었다. 오바마는 만화책을 사서 보고, 밤늦게까지 몇 시간씩 TV를 보다가 라디오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오바마는 생부에 관한 험담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늘 훌륭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머리가 비상하며, 매력적이고, 케냐의 새로운 역사를 쓸 위대한 사람이 되겠다는 야심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러다가 1971년 성탄절에 오바마 시니어와 앤(그때도 인도네시아에 있었다)이 호놀룰루에 온다는 전갈을 받았다.
“대단한 성탄절이 되겠군”이라고 스탠리가 말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마침내 아들을 보려고 오는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오바마는 세월이 흐르면서 늘 실제보다 더 훌륭하게 일컬어지는 아버지에 관한 좀더 복잡한 진실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심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었다”고 오바마가 내게 말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또 바람둥이였다. 자녀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
오바마 시니어는 케냐 서쪽 국경 부근 빅토리아 호수의 은빛 물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기장, 밀, 사탕수수가 뒤섞여 자라는 밭에 둘러싸인 작은 집에서 성장했다.수레바퀴 자국이 난 흙길은 우기가 되면 진흙탕으로, 건기가 되면 마른 붉은 땅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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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가면 어머니 사라에게 시험 성적과 배운 것을 한껏 자랑하고 부풀렸다. 사라는 아들이 어려서부터 이 척박한 시골 땅에서 벗어나 큰일을 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자부심이 강했고 사라도 그런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는 생존이 지식에 달려 있는 듯 배움에 열중했다. “오늘 내가 일등을 했어요”라고 그는 어머니 사라에게 말했다.
“내가 우리 학교에서 가장 똑똑해요.”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최고 점수를 받지 못하면 심통을 부렸다. 그 역시 자기 아버지와 복잡한 관계에 있었다. 그가 퇴학을 당하자 그의 아버지는 그의 등이 터져 피가 나도록 매질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책임감 있게” 행동하도록 하는 데 집착했다. 그래서 아들이 아프리카인 아내를 버리고 앤과 결혼했을 때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오바마 시니어는 하버드를 졸업할 때 반드시 사진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양복에 타이,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뿔테 안경을 쓰고 10×12인치의 흑백사진을 찍었다. 사진에서 그는 느긋하면서도 심각한 표정으로 멀리 중간지점을 보고 있다. 그는 졸업 후 그 사진을 고향의 어머니에게 보내며 벽에 걸어 두라고 말했다.
“사진을 볼 때마다 나를 생각하며 내가 이룬 모든 것을 기억하세요.” 뉴스위크의 아프리카 지국장 스콧 존슨이 최근 사라를 찾아갔을 때 그 사진이 사라가 가장 좋아하는 의자 맞은편에 지금도 걸려 있었다. 오바마 시니어는 케냐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목표 의식을 실천에 옮기려 했다.
그는 국가개발계획부에서 일했다. 하지만 그는 늘 좌절했다. 변화의 기미가 없다는 데 대한 실망만이 아니라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일한 월터 오초로는 “그에게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어주는 관대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를 만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했다.” 그때 이미 그는 오바마의 곁은 떠난 뒤였다. 그에게는 오바마가 장남도 아니었고 미국인 어머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완전한 루오족 혈통도 아니었지만 아들에 대해 느끼는 특별한 자부심이 있었다.
오바마의 이복 여동생 중 한 명인 힐바 웨레 이스마엘은 이렇게 돌이켰다. “아버지는 오바마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배리(오바마)처럼 되려면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해’라고 말했죠.” 오바마 시니어는 오바마가 자신처럼 지식인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즐겨 이야기했다.
그는 지갑에 오바마의 학창 시절 흑백사진을 넣고 다니며 형제자매 사촌들, 그리고 자신의 미국인 아들에 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내 아들을 보세요”라고 그는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녔다. 적어도 자신이 버린 아들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 스냅 사진 속의 아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아들이 아니라 수만 리 떨어진 곳에 사는 진짜 아들이었다. 그 아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아버지의 이상화된 이미지를 안고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현실을 직시할 때가 찾아왔다. 성탄절 방문이었다.
메이블 헤프티는 호놀룰루의 일류 푸나호우 초등학교 교사로서 5학년 조례시간을 특별하게 계획했다. 한때 케냐에서 교사생활을 한 그녀는 국제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특별강사로 오바마 시니어 박사를 초청했다. 동료 교사 팰 엘드레지도 자기 학생들을 데려왔다.
엘드레지의 기억에 따르면 그날 아침 오바마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바마가 54명의 학생이 가득 찬 교실에서 아버지를 소개했다. 케냐의 전통 의상 차림의 오바마 시니어는 교육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마치 교환 교수 같았다”고 엘드레지가 말했다.
오바마 시니어는 30분 정도 이야기를 한 뒤 아이들의 질문을 받았다. 엘드레지는 오바마가 감격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아버지의 오른쪽에서 팔을 붙들고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오바마의 기억은 달랐다. 오바마 자신은 아버지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그는 아버지가 아프리카의 왕족이고 왕자라고 주변에 자랑하고 다녔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부족장이셔”라고 오바마는 친구들에게 말했었다. “미국 인디언처럼 그는 부족의 왕이시거든. 그러니 아버지는 왕자시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버지가 왕이 되실 거야.”
그러나 오바마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루오족은 유목인으로 “소를 키우며 진흙으로 만든 집에 살았고 옥수수와 고구마, 기장 같은 것을 먹고 살았다”고 오바마는 돌이켰다. “전통 의상은 사타구니만 가리는 가죽끈뿐이었다.”
오바마는 헤프티 선생님이 아버지를 초청해 케냐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말을 듣곤 망연자실했다. 왕족이라는 거짓말이 들통날까 두려웠다. “정말 너무도 끔찍했다. 그 전날 저녁과 그날 아침 나는 너무도 답답했다. 내 거짓말이 탄로나고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감전된 듯이 몸이 떨렸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오바마는 엘드레지의 말과 달리 자신은 아버지를 소개하지 않았고 그냥 겁에 질려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 뒤쪽의 칠판 빈 곳에 눈을 두려고 고개를 꼿꼿이 쳐들었다”고 오바마는 회고록에 적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말 멋진 강의를 했다. “그가 한참을 이야기한 뒤에야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헤프티 선생님의 두꺼운 참나무 책상에 기대어 인류가 최초로 등장한 아프리카 땅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평야에 거니는 야생동물, 남자임을 증명하려면 사자를 죽여야 하는 부족의 관습을 이야기했다.
그는 나이 든 사람들이 존중 받으며, 거대한 나무 아래서 모두가 따라야 할 법을 제정한 루오족의 역사를 설명했다. 그러고는 케냐인들의 독립운동에 관해 이야기했다. 과거 미국처럼 영국인들이 계속 점령하며 부당하게 통치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또 과거의 미국에서처럼 단지 피부색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예가 됐는지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케냐인들은 당시 교실에 있었던 우리 모두처럼 자유를 갈망했고, 노력과 희생을 통해 일어섰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그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참 나중에 그 일에 관해 회고록에 기록하면서 오바마는 자신의 부끄러움과 두려움 외에는 별다른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아버지가 학생들을 매료시킨 데 대해 양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한편으론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만큼 인기를 얻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었던 듯하다. 지난주 오바마는 그 일에 관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시엔 고문을 당하는 듯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모두 아버지에게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 내겐 큰 안도였다.
아버지는 내가 생각하던 사람과는 달랐지만, 인류 공통의 관심사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내겐 아주 좋은 공부였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아버지는 2주 뒤 하와이를 영원히 떠났다. 그 일에 대한 오바마의 기억이 엘드레지 선생님의 기억보다 훨씬 냉철하고 현실적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떠올리는 아들들은 대개 당시의 일을 엘드레지 선생님처럼 더욱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바마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눈을 감지 않는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눈을 자랑스럽게 쳐다보지 못하고 칠판을 뚫어지게 바라본 것을 뼈아프게 묘사한다.
최악의 순간은 외조부모 스탠리와 메이들린의 집에서 가진 저녁 모임이었다. 오바마는 1년 내내 고대하던 ‘크리스마스를 훔친 그린치’라는 특별 드라마를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바로 그 순간 난생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권위를 세우려 했다.
그는 오바마에게 TV를 끄고 방에 들어가 책을 읽으라고 명령했다. 그러고는 집 안 전체에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언성이 한참 오간 뒤 오바마는 겨우 그 드라마의 마지막 부분을 봤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아버지와 함께 1주일을 지내자 차라리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아버지 모습은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었고, 싫으면 무시하면 됐다. 실제로 만나본 아버지가 나를 완전히 실망시키진 않았지만 그는 알 수 없고 변덕스러우며 어렴풋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오바마 시니어는 실제로 변덕이 심했다. 케냐에서 그는 자신의 지식과 인맥을 자랑하기 좋아했다. 1970년대 초 현 대통령 음와이 키바키는 케냐의 재무장관이었다. 한번은 그가 아이들을 데리고 사무실로 갔다. 그는 “장관님 제 아이들 좀 보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키바키 장관님을 봤지.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란다”라고 농담했다. 그러나 하버드 학위와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 기회를 얻었지만 그냥 날려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알코올 중독이었다. 실제로 그는 명석했다”고 힐바가 회상했다. “하지만 자신을 입증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케냐인으로 처음 하버드에 갔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술로 좌절감을 달랬다. 자신이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니라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
힐바는 때로는 아버지에게 맞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자처럼 그런 게 아니라 성적이 나쁜 데 대한 벌이었다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늘 우리에게 ‘나는 너희들이 나처럼 되도록, 아니 나보다 뛰어나도록 가르치려 한다’고 말씀하셨다.”
1982년 오바마 시니어는 나이로비의 인프라 개조에 착수했다. 그해 어느 날 밤 그는 칼로레니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식민 시절부터 있던 술집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 다른 모든 손님과 여급에게도 몇 잔을 연거푸 샀다. 며칠 뒤 우간다로 출장을 갈 계획이었다.
재정부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승진할 것이라는 얘기도 돌았다. 그러나 그날 밤 집에 혼자 차를 몰고 가다가 도로를 벗어나 커다란 고무나무를 들이받고는 즉사했다. 케냐의 가족들은 오바마가 아버지의 삶 한가운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가 과장이고 어느 정도가 실제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오바마는 자신의 삶에 대한 냉철한 시각을 갖고 있다. 지금 ‘할머니’는 벽에 걸린 아들의 사진을 보며 미국에 있는 손자를 생각한다. 그 할머니는 자신을 찾아온 뉴스위크 기자 스콧 존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손자를 보면 똑같은 것이 보인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빼어 닮았다. 가문은 건재하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원했던 모든 것을 실현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꿈이 아들에게도 살아 있다. 그 부자는 서로 너무 사랑했다. 오바마가 여기 왔을 때 그는 아버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 먼 길을 찾아와서 아버지를 묻었다.”
사실 오바마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1987년이 돼서야 케냐를 찾았다. 한 친척이 아버지의 사망을 전화로 알렸을 때 오바마는 뉴욕의 자기 아파트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에게 아버지는 “훌륭하기도 하고 형편없기도” 했다. 그는 결국 신화 뒤에 있는 현실과 꿈 뒤에 있는 진실을 찾아 케냐를 방문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너무도 인간적인 아버지였다. 오바마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을 흑인으로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그의 경험은 전형적인 흑인들과는 많이 달랐다. 하와이 생활이 도움이 됐다. 할아버지가 소개한 프랭크 마셜 데이비스는 그가 젊은 시절에 만난 가장 흥미로운 스승이었다. 데이비스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선도적인 흑인 운동가이자 작가였다.
캔자스주에서 자란 데이비스는 5세 때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린치를 당할 뻔했다. 그는 시카고에서 기자와 시인으로 활동하며 인종차별 철폐를 소리 높여 외치다가 백인인 둘째 부인과 하와이로 이주했다. 그의 정치적 행동주의 특히 민권과 노동문제에 관한 그의 저술은 하원 비(非)미국적행동위원회로부터 매카시즘(공산주의자 추방 운동) 냄새를 풍기는 비난을 받았다.
오바마와 만났던 1970년대의 데이비스는 괴짜였지만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나는 노인 데이비스, 그의 저서, 입에서 풍기는 위스키 냄새, 축 처진 두 눈 뒤의 갖은 노력을 통해 얻은 지식의 흔적에 이끌렸다”고 오바마는 썼다.
이 시기를 전후해 오바마는 독자적으로 흑인 문학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오바마로서는 마치 박물관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었다”고 오바마와 같은 시기에 데이비스를 처음 만난 캐스린 타카라 박사가 말했다(하와이의 정치학자로 요즘 데이비스의 전기를 집필 중이다).
“데이비스의 집은 문화로 충만한 지적 환경이었다. 항상 음악과 뉴스가 들렸으며 TV도 늘 켜져 있었다. 그의 집은 책과 음반, 낡은 앨범과 고가구로 가득했다. 그의 집 베란다는 거의 인도와 맞닿아 있었는데 거기 앉아 거실에서 들려오는 재즈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대화를 주고받았다. 항상 무슨 일이든 벌어지고 있었다.” 오바마의 10대 시절 가장 오래 남는 교훈 하나를 그에게 가르쳐준 것도 데이비스였다. 흑인 걸인이 오바마의 외조모에게 겁을 주고 간 뒤 외조부모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오바마는 데이비스를 찾아가 위스키 몇 잔을 주고받으면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외조모가 겁을 먹어 마땅하며 “흑인은 남들을 미워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데이비스의 말을 들었을 때 오바마는 자신이 가장 가까운 가족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깨달았다.
“발 밑의 땅이 마구 흔들리면서 곧 꺼질 듯한 기분이었다”고 그는 썼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지독한 외톨이임을 알았다.” 그 후 오바마는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로 항상 주변에 진을 쳤다. 물론 그들 중 누구라도 언젠가 자신을 실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시카고 시절 트리티니 연합교회 그리고 제레미야 라이트 목사를 찾아갔다. 올해 초 라이트의 ‘갓댐 아메리카(God Damn America)’ 동영상이 등장했을 때 오바마의 친구 짐 월러스가 그에게 위로 편지를 보냈다. 월러스는 어느 날 밤늦게 e-메일 답장을 받았다.
“하느님에겐 목적이 있다”는 요지였다. 좌익 성향의 복음 저술가 겸 운동가, 기독교 잡지 소저너스(Sojourners)를 창간한 월러스는 “찬물 세례를 받은 듯했다”고 말했다. “59세인 나에겐 아직 어려 보이는 46세 젊은이가 그런 말을 하다니. 다른 정치인들과는 생각이나 행동이 달랐다.”
오바마가 월러스에게 보낸 답신은 링컨과 비슷한 일종의 운명론을 담고 있었다. 사람들(오바마의 경우 가까운 사람들)이 종종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슬프지만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오바마를 처음 실망시킨 사람은 라이트는 분명 아니었다.
트리티니 교회의 신도인 드와이트 홉킨스 시카고대 신학교수는 오바마가 라이트의 아버지 같은 면모에 이끌렸다고 믿는다. 트리티니 교회가 오바마가 속해 보지 못한 하나의 거대 가족이라면 라이트는 가장이었다. 트리니티 교회의 ‘아프리카 중심주의(Africentrism)’를 지적한 글이 많다.
교회 로비에 걸려 있는 흑인의 만찬 그림과 그 제단을 덮은 천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대한 라이트의 생각은 단순히 그런 장식에 그치지 않았다. 흑인들은 자신의 혈통, 노예의 역사 그리고 조상들이 성취해 전승된 자유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라이트는 가르쳤다.
아프리카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경제적·사회적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도 설파했다. 식량과 물이 없는 사람, 만성 질환이나 불치병을 가진 사람, 교육받지 못한 사람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오바마가 로스쿨을 나와 시카고로 이사한 뒤 다른 교회를 다닐 수도 있었다.
트리니티 교회로부터 10블록 떨어진 곳에 제임스 믹스 목사가 운영하는 시카고 살렘 침례교회가 있다. 도시 남쪽의 이 또 다른 대형 흑인 교회에는 제시 잭슨 목사가 자주 걸음을 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시카고의 다른 어떤 교회에서도 트리니티처럼 아프리카에 강한 유대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오바마의 아버지가 아프리카계였기 때문에 아프리카와의 연관성에 이끌렸을 것”이라며 “믹스에겐 그런 면이 없었다”고 월러스가 말했다. 뉴스위크 기자 리자 밀러와 가진 인터뷰에서 오바마는 라이트와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나의 목사이자 친구였다.”
하지만 ‘정신적 조언자’라는 정의엔 이의를 달았다. “내가 그와 마주 앉아 신학을 논하거나 내 믿음에 관해 길게 토론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그를 만난 건 예배 후 가족들과 닭고기를 함께 먹는 자리였다. 그리고 아마 가족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믿음이 더 두터워진 것은 분명하다.”
두 사람이 정말 얼마나 가까웠을까? 라이트와 친한 오베리 헨드릭스 목사는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하진 않았다고 말한다. “서로 부담 없는 친구는 아니었다”고 ‘예수의 정치학(The Politics of Jesus)’의 저자이자 뉴욕 신학교 교수인 헨드릭스가 말했다.
“라이트와 가까운 사람들이 몇 명 있는데 오바마는 그 안에 들지 못했다.”스티븐 그레이 목사는 그리스도 합동교회 인디애나-켄터키 연합의 연합 목사다. 오바마가 상원의원이 된 뒤 라이트와 만났을 때 그가 오바마에게서 온 휴대전화를 받으러 방을 나간 적이 두 번 있었다고 그레이는 돌이켰다.
“다른 건 모르지만 통화를 마쳤을 때 그의 얼굴이 활짝 피어 있었다”고 그레이는 회고했다. “ ‘우리 상원의원님이야’라고 그가 말했다. 우리가 ‘어떤 친군데?’라고 물으면 ‘내가 교육시켰지. 제법 괜찮은 친구야’라고 대답했다.”
이 일화는 선거운동 중 라이트가 오바마의 미움을 사게 된 허장성세의 예고편이었다. 라이트 목사는 논란의 초점이 된 설교 동영상 파문을 잠재우려 내셔널 프레스 클럽을 찾아갔다. 그는 기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인종문제를 자극하는 일장 연설을 하며 가장 논란이 됐던 발언들을 옹호했다.
오바마는 처음엔 그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편을 들어주려 했지만 프레스클럽에서의 발언은 도를 넘었다. 그런 충돌은 세대차에서 비롯된다. “그들의 인종관은 아주 다르다”고 헨드릭스가 말했다.
“오바마는 그의 경험 때문에 라이트 세대의 다수가 가졌던 관점과 적개심이 없다. 그리고 라이트는 흑백분리가 미국의 법이었던, 나와 가까운 시대에 살았다. 그는 아직도 그런 불평등을 향한 분노를 간직하고 있다. 오바마도 물론 그런 감정을 의식하지만 경험하진 못했다.”
라이트의 친구들은 결별 선언 이후 오바마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거론한다. “오바마는 아버지 없이 자랐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헨드릭스는 덧붙였다. “담임 목사와의 결별은 다시 황무지에 내던져지는 격이다.” 그러나 오바마를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이 여기서 알아둬야 할 한 가지가 있다.
그는 더는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라이트의 편을 들어주며 그를 구하려 애썼다는 점이다. 그리고 관계를 끊을 때가 되자 주저 없이 인연을 끊었다. 시카고 정치활동기 초반, 그리고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시절 오바마가 자신의 하버드대 로스쿨 학위에 관해 좀 심하게 자랑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하버드는 오바마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요소다. “오바마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실용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어서 효율적으로 목표들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오바마가 시카고에서 참여한 지역사회운동 단체의 상사였던 제리 켈만이 말했다.
“로스쿨은 일종의 안정을 얻는 수단이었다. 오바마는 로스쿨을 지원하기로 결정할 때 효율성을 키운다는 관점에서 판단했다고 말했다.”오바마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냥 로스쿨이 아니라 다름 아닌 하버드대 로스쿨이었다.
“로스쿨에 갈 거면 가장 좋은 로스쿨에 가야 한다는 지론이었다”고 켈만이 말했다. “그것은 아주 실용적인 사고였다. ‘내가 법학을 공부할 거라면 여기서 올바른 대인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식이다.” 그가 아버지의 업적에 필적하는 것(그리고 하버드 로 리뷰 편집장에 당선되어 그를 능가한 것)은 오바마의 인생행로와 궤를 같이한다.
그는 목표가 확고했다. 고상한 법적 유명인사가 아니라 정계의 스타가 되는 것이었다. 로 리뷰 편집장 선거 직후 담임 교수 중 한 명이었던 데이비드 윌킨스가 어떤 대법원 판사 밑에서 일하면 좋을지 얼마든지 정보를 주겠다고 오바마에게 말했다.
“그의 답변은 ‘교수님, 고맙습니다만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는 것이었다”고 윌킨스는 떠올렸다. “그리고 대강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이번 기회에 책을 한번 써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시카고로 돌아가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다가 공직에 출마하고 싶습니다.’”
시카고에서 그는 프레이저 로빈슨의 딸 미셸 로빈슨에게 청혼해 승낙을 받아냈다. 프레이저는 30세에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고도 정수장에서 계속 근무하며 두 자녀를 프린스턴에 보낸 인간승리의 신화다(그 뒤 미셸은 하버드 로스쿨까지 진학했다).
미셸의 오빠 크레이그 로빈슨은 “라이트 목사가 젊은 시절 오바마의 삶에서 한자리를 차지했다면 우리 아버지도 그에게 큰 영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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