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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서 펀드의 ‘ㅍ’도 꺼내지 마!

내 앞에서 펀드의 ‘ㅍ’도 꺼내지 마!

딱 1년 전이다.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본격적으로 터진 것이 딱 1년 전 이맘때다. 추석 연휴를 마치고 출근한 직장인들은 명절 증후군이 채 가시기도 전에 비상 근무를 해야 했다.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모인 가족들은 무슨 얘기를 할까? 역시 ‘돈’이다. 하지만 투자하는 것보다는 지키는 게 아직은 우선인 듯 보이는데…. 추석을 맞아 3대가 모여 하는 경제 이야기를 꾸몄다.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오랜만에 사람 소리로 시끌시끌하다. 이제 칠순을 눈앞에 둔 이순호씨와 부인, 그리고 3남매에 손자까지 추석을 맞아 한자리에 모여서 그렇다. 안방에서는 신문을 보는 이씨 옆에서 두 아들이 맞고를 치고 있다. 둘이서 하다 보니 게임에 집중하지 못하고 얘기는 금세 다른 데로 흘렀다.



#1. 안방

“1년 동안 암울했지, 2차 위기? 설마~”
“이번 추석 연휴는 왜 이렇게 짧데. 우리 회사 직원 중에 고향에 안 내려가는 사람도 많더라고. 나는 그래도 아버지 보러 왔지요~.”

평소 자주 연락 못한 게 죄송했던지 이씨의 30대 중반 둘째 아들은 나이에 맞지 않은 응석을 부렸다.

“이 녀석이 징그럽게 왜 이래. 10시간씩 차 타고 가서 부모 얼굴 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래도 너희는 복 받은 줄 알아라.”

첫째 아들은 은퇴하고서 부쩍 늙은 아버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찡했지만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으니 안심이 됐다.

“형님네 회사는 이제 괜찮아요?”

둘째 아들이 오랜만에 만난 형에게도 안부를 물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첫째 아들은 지난해 회사가 키코(KIKO·통화옵션상품)에 가입했다가 큰 손실을 본 기억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직원들이 두 팔 걷고 나선 덕에 위기를 잘 넘겼지만 회사 일에 매달리느라 소홀히 한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은 여전하다.

“그러고 보니 1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네. 지난 추석에 모였을 때만 해도 이 나라에, 아니 온 세계에 그 난리가 날 줄 누가 알았겠어. 요즘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 가장 빠른 경기 회복세를 보인다고 하니 참 옛날 일 같다만, 지금도 코스피지수가 900까지 떨어지고 중소기업 사장에, 증권사 간부들 줄줄이 자살한 거 생각하면 아찔하지. 암 아찔해.”

옆에서 듣고 있던 대학생 손자가 말을 이었다.

“서브프라임인지 뭔지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난 처음엔 그게 뭔가 했어요. 학교 선배들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에요. 부모님 사정이 어려우니까 등록금 때문에 전부 알바(파트타임) 뛴다니까요. 아, 물 건너 온 위기 때문에 맥주는 꿈도 못 꾸고 막걸리만 마신 걸 생각하면….”

“야, 이놈아. 어렵게 공부해 대학 들어가서는 술만 먹고 있으면 어떡하니. 그리고 너 학점 그 모양에 한 학기 다니고 덜컥 휴학하면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

작은아버지의 구박에 조카의 얼굴이 붉어졌다.

“전 그래도 군대라도 갈 때가 있으니 다행이죠. 그리고 요샌 군대 안 가는 여자애들도 다 휴학한다고요. 바로 졸업하면 누가 어서옵쇼 하면서 모셔간데요? 진짜 작은아버지는 잘 알면서 그래요. 선배들 보면 단군 이래 취직하기 제일 어렵다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고요. 박사 졸업자 절반이 비정규직이라는 기사도 못 보셨어요? 선배들 전부 도서관에서 공무원 시험 공부하고 있는 거 보면 정말 속 터진다고요!”

손자는 한참 연설을 늘어놓더니 거실로 나가버렸다.

“아니, 저 녀석이.”

“놔둬. 제 딴에 속상해서 그러지. 쟤 말도 맞지 뭘.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게 잘못이지. 너네 땐 외환위기(IMF) 때문에 그렇게 어렵더니. 쯧쯧. 요새 대학생들 안됐어. 그나저나 정부가 돈 풀어서 그 힘으로 시장이 돌아가고 있다는데 요즘 환율을 보면 심상치가 않아. 다시 1100원대로 내렸잖아. 달러 약세가 계속되면 원자재 투기가 늘어서 인플레이션이 온다는데 이렇게 맘 편히 있어도 되나?”

“형님은 또 나라 걱정이우. 신도 아니고 사람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어떻게 알겠어. 내로라하는 전문가들 전망도 엇갈리는데. 그런데 인플레이션은 아직 그렇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라고 하더라고. 그래도 이제 경기가 바닥을 지났다는 의견에는 다 동의하는 분위기야. 내년에 미국 상업용 부동산인가 뭔가가 터져서 제2의 서브프라임 사태가 온다고도 하는데 소수 의견인가 봐.”

“미국의 높은 양반들도 이제 경기 회복기라고 얘기했다니까 아무래도 부정적인 의견이 사람들 귀에 들어오겠어? 참 1년 사이에 분위기 많이 바뀌었어. 그래도 아직 몰라 출구전략, 출구전략 하잖아. 본격적으로 금리를 올리게 되면 분위기가 달라질걸.”

답이 없는 논쟁을 벌이던 두 아들은 다시 맞고에 열중했다.

“어이쿠, 이게 몇 점이야. 아이고 그만하자.”

돈을 잃은 첫째 아들이 화투판을 물리고 거실에 있는 TV를 보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쨌든 우리나라 참 대단해. 이 어려운 때 삼성전자, 현대·기아차, LG전자 같은 대기업들이 글로벌 브랜드로 승승장구하잖아. 미국에서는 현대차만 점유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는데. 재벌이라고 하면 무조건 안 좋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잘한 건 잘했다고 칭찬해줘야지. 근데 이거 뭐 원화 강세가 계속되면 기업 실적 좋아진 거 도로아미타불 되는 거 아닌지 몰라. 나라도 한 대 팔아줄까? 아버지, 펀드 수익률 회복한 걸로 TV 바꿔드릴까요? 요새 LCD TV 값도 많이 내렸다는데.”

둘째 아들이 무릎을 탁 치더니 형에게 대들 듯한 기세로 목소리를 높였다.

“아, 삼성전자~~~. 요새 100만원 갈 거라는 얘기도 있어. 겁 먹고 팔아버린 게 화근이여. 하여간 주식 하려면 용기, 인내력이 있어야 하는데. 근데 요즘 주가도 외국인들이 쥐락펴락하는 것 같아. 앞으로도 외국인이 몰릴 거라는데 그럼 1700대에서 좀 더 오르려나?”

“넌 겁도 없이 주식 계속하냐? 난 그때 니 형수랑 대판 하고는 이젠 손도 안 댄다. 아예 주식 사이트에 들어가질 않아요. 너도 맘 편하게 펀드나 해.”

“아 형님은 모르는 소리 말아요. 요새 다 펀드 환매하는데 뭐 하러 새로 가입해요. 요샌 주식이라고요. 특히 러시아펀드, 브라질펀드 이런 것처럼 한 나라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상품은 위험하다던데. 하긴 원자재펀드나 중국펀드는 괜찮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주식이나 펀드나 하기 나름이지, 그걸 어떻게 뭐가 더 좋다고 얘기하냐. 목표 수익률이랑 투자 기간이 다 다른데. 하기 싫음 관둬라. 제수씨는 펀드에 푹 빠진 것 같던데.”

둘째 아들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옆에서 신문을 보던 이씨가 소리를 꽥 질렀다.

“골 아픈 소리 그만해라. 내가 작년에 그 증권사 직원 말만 철썩같이 믿고 펀드에 가입한 게 한이다, 한. 내 앞에서 펀드의 피읖도 꺼내지 마!”

두 아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씨는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하지만 은근히 미련이 있는 눈치다.



#2. 거실


“동서네, 집 산다며?”“형님도 오피스텔 하나 봐두세요.”

거실에서는 오순도순 앉아 두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송편을 빚고 있다. 아무래도 첫째 며느리는 손이 재빠른데 둘째 며느리는 일이 하기 싫은 양 이렇게 저렇게 자세만 고쳐 앉기를 벌써 몇 번째다.

“넓은 거실 차지하고 있으면 뭐 해. 올해 추석도 집안일은 죄다 여자들 몫인데.”

털털한 둘째 며느리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분위기를 몰아간다.

“동서는 참 간도 커. 어떻게 시집온 지 3년도 안 돼서 시어머니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나. 시집살이 9년은 해야 한다는데. 우리 어머님은 마음도 좋지. 우리가 시집 하난 잘 왔어.”

눈치 빠른 첫째 며느리가 시어머니 표정을 살피면서 선수를 쳤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둘째 며느리의 ‘돌발 행동’에 이미 익숙한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시집 잘 온 건 알고 있었니? 너네만 잘 왔다고 좋아하지 말고 쟤 좀 어떻게 해봐라. 딸내미 쟤 나이가 올해 몇이니. 오늘은 잔소리 좀 해야지 안 되겠다니까. 둘째 애기랑 저 화상이랑 동갑인데 둘째는 벌써 결혼해서 살림도 척척이잖니. 둘째 너는 집에서 살림하면서도 뭔 테크? 재테크? 그래 재테크도 그렇게 잘한다며?”

“어머, 어머니.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났어요? 별로 한 거 없는데. 그냥 펀드 몇 개 한 게 좀 잘됐죠. 호호호. 그런데 어머님, 아버님은 펀드에 얼마나 넣으신 거예요? 손실을 꽤 보셨다면서요?”

둘째 며느리가 또 눈치없이 나서자 시어머니가 포기한 듯 대답했다.

“몰러. 저번에는 얘기하는 거 보니까 무신 다른 나라에 투자하는 펀드에 가입해가지고 절반은 까먹은 거 같더니만 그게 또 요새는 괜찮다는데 이 양반이 덜컥 팔아버렸다는거 아냐. 나야 뭐 은행 근처에도 안 가봤으니 아나. 난 뭐라 해도 저기 저 이자 많이 주는 새마을금고에 넣어 두는 게 최고로 마음 편하다.”

송편을 빚던 손을 멈추고 첫째 며느리가 진지하게 묻는다. 이때 거실로 나온 아들이 익히지도 않은 송편에 눈독을 들였다.

“아니 평생 가계부만 적으시는 어머님도 따로 돈주머니를 관리하세요? 어휴, 저는 정말 모르고 살았네요. 동서, 송편을 입으로 빚어? 그렇게 자신 있으면 어디 나도 좀 가르쳐줘. 애 아빠만 믿고 있자니 요즘 100살까지 산다는데 불안해서 말이야. 아직 절반도 안 살았잖아.”

“형님, 금융상품은 누구한테 들어서 되는 게 아녜요. 자기가 공부를 해야죠. 가만 보자, 아, 요새 유행하는 증권사 종합자산관리계좌(CMA) 아세요? 그 상품이 예금처럼 넣었다 뺐다 할 수 있으면서 금리가 높아서 인기라고요. 2.5%가 기본이고 5% 이자를 주는 상품도 있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모든 금융상품에는 다 함정이 있어요. 그러니까 펀드, 예금, 적금 모두 가입할 때 설명을 단단히 들으셔야 한다고요.”

정신없이 듣고 있던 첫째 며느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CMA? 광고만 봤지, 난 뭔지 몰라. 에고, 뭐 쉬운 게 없네.”

그때 안방 쪽에서 ‘펀드’ 뭐라고 하는 시아버지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 조용해졌다. 잠시 후에 둘째 며느리가 참지 못하고 또 소곤거린다.

“아버님, 또 흥분하셨네. 근데 형님, 언제까지 전세로 사실 거예요?”

“자네 이번에 집 산다고 자랑하는 거지? 진짜 자네는 그런 능력을 어디서 타고났데?”

둘째 며느리가 아예 손을 닦고서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형님. 요즘 집 살 때래요. 형님도 전세 빼고 하나 장만해요. 아 강남이면 뭐해요. 내 집이 있어야지. 아니면 괜찮은 데 조그만 오피스텔 하나 마련해서 월세를 주든지. 그것만 해도 노후자금 마련으로 든든하다니까요.”

“글쎄, 근데 요새 뭐 애들 아빠 회사도 아직 그렇고. 또 대출 내야 하는데 무슨 규젠가 그게 더 강화됐다며. 여기서 빚을 또 내면 어쩌라고. 내가 밥주걱만 들고 있는 것 같아도 뉴스는 꼬박꼬박 봐. 금리가 오른다는 거 아냐, 지금? 계속 오르는데 지금 대출 받으면 나중에 어떻게 갚아. 안 그래? 근데 자네는 어떻게 마련한 거야 정말?”

“형님, 무슨 규제가 아니고 총부채상환비율(DTI)이오! 처음에는 장기전세주택이나 신혼부부주택 같은 쪽으로 찾았는데 그것도 조건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애 아빠 친구 중에 은행에서 부동산 담당하는 친구가 있는데 얼마 전에 지하철이 새로 뚫려서 교통도 편리하고 개발호재가 남아서 앞으로 집값도 더 오른다는 곳이 있어서. 그래서 눈 딱 감고 대출 받아서 장만했어요. 주택금융공사의 보금자리론 이용하면 고정금리라서 금리가 올라도 걱정 없다고요. 날씨 더 추워지기 전에 이사해야 하는데. 형님, 형님. 대출 낸 김에 가구랑 전자제품도 싹 바꾸려고요. 형님도 아시죠? 우리 결혼할 때 다 그이 쓰던 거 그냥 쓴 거. 저 그때 말은 안 했지만 정말 서운했거든요.”

얄미워서 핀잔을 주려고 잔뜩 벼르던 첫째 며느리는 둘째 며느리가 갑자기 우울해하자 말을 돌렸다.

“옆집은 차 바꾼다고 하더니 요새 정말 경기가 좋아지긴 했나 봐. 이번에는 이웃들끼리 선물도 좀 돌렸어. 올해 초에 설 생각해봐. 어휴. 그땐 아예 엄두도 못 냈지.”

“그렇긴 해도 요새 물가 오른다고 하니까 난 장보기 겁나던데요. 이번 추석 때는 얼마나 들었어요? 신문에선 16만원 정도 예상했던데, 우리 집은 항상 오버되잖아요.”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시어머니가 갑자기 말을 자른다.

“그래도 차례상에 올리는 건 최고 좋은 것으로 해야 한다. 돈 아낀다고 조상님한테 못난 거 올리는 법은 없다.”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근엄한 말에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는 송편 빚는 일에 집중했다.


#3. 작은 방


“추석 선물로 효 보험을?”일손을 돕는다고 부엌을 어슬렁거리다가 진작에 발을 뺀 막내딸은 친구와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그래? 너네 집은 그러면 이번 추석에 부모님 제주도 여행 보내드린 거야? 아, 그렇지. 신종플루 때문에 해외여행은 좀 겁나지. 이야. 제사 안 지내니까 편하긴 한데 돈 좀 들었겠다. 뭐? 야, 내가 그럴 돈이 어디 있어? 시집갈 돈도 없구먼.”

시집간 친구가 친정 부모님에게 효도여행을 선물했다는 말에 막내딸은 괜히 부모님께 죄송하다.

“넌 은행원한테 시집도 갔지, 거기다 여행까지. 난 뭐니? 아니, 오빠들이 효 보험 하나 들어드리자고 나한테 알아보라고 하는데 내가 뭘 알아야지. 실버보험 같은 거 요즘 약관이 엄청 복잡하잖아. 뭐? 70세 전에 가입하는 게 좋다고? 요샌 간병비, 장례비까지 다 보장한다고? 넌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니? 역시 주부가 다르긴 다르다 얘.”

“고모, 거실로 나오래요.”

한창 수다가 이어지는데 조카가 급하게 불렀다.

“어, 잠깐, 통화 중인데. 왜?”

“왜긴, 알면서. 얼른 와서 광 팔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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