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식 테러전쟁의 필요조건
오바마식 테러전쟁의 필요조건
미국 신보수파의 거두인 딕 체니 전 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을 두고 “우리가 테러리스트들과 전쟁 상황이 아닌 체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미국의 정책연구소인 뉴아메리카 재단의 피터 버겐과 캐서린 티더만이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오바마 행정부는 취임 1년도 채 안 된 기간 동안 테러리스트 거점을 목표로 한 무인항공기 프레데터 공격을 50차례 이상 결행했다.
이는 전임자인 조지 W 부시가 전체 임기 동안 실시했던 횟수보다 오히려 많다. 다른 한편으로 진보 진영에서는 오바마가 자신의 이상과 법치를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렸다고 지적한다. 이 비난 역시 옳지 않다. 사실 오바마는 국가 안보의 위험부담보다는 적절한 사법 절차와 정의를 중시하는 여러 가지 결정을 내렸다(정확히 말하자면 에릭 홀더 법무장관이 그렇게 하도록 승인했다).
이런 절충식 대테러 정책은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 첫해를 겪으면서 우리가 알게 된 그의 성격과 고스란히 맞아떨어진다. 그는 현실주의자이고 중도 노선을 추구하는 절충주의자이지 결코 진보주의 이론가가 아니다. 대다수의 반테러 전문가는 오바마의 접근 방식을 높이 평가한다.
대체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반테러 정책이 정치적으로 가장 구미에 맞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바마는 공공 안전을 보장하는 상식적인 판단에 정치나 법적인 개입을 허용했을 때는 종종 발을 헛디뎠던 적도 있다. 우익과 좌익의 비판은 얼마든지 거부하거나 무시해도 좋다.
그러나 법치와 국가 안보의 균형을 맞추는 문제에서 오바마는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려는 신중함이 도를 약간 지나쳤다. 어떤 경우에는 현행 법제도에 기대기보다는 법을 뜯어고치려고 노력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TV 토크쇼나 실권자 대책회의 테러 위협 대책이 논의될 때는 언제나 두 가지 상반되는 시각이 팽팽히 맞선다.
전사(戰士)와 법률가의 사고방식이다. 전사들은 원초적이며 인정사정 보지 않는다. 생각이 깊은 전사들은 비극적인 세계관을 갖는다. 전쟁에선 일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고,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될 가능성이 항상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아무리 민간인을 보호하고 부수적인 피해를 줄이려고 애써도 어쩔 도리가 없는 현실을 말한다.
전쟁은 국가의 생존 문제다. 절멸(테러의 경우 ‘절멸’이란 미국의 한 도시에서 핵폭탄이 터져 삶의 방식이 바뀌고 수십만 명의 인명 피해가 일어나는 상황을 말한다)을 피하려면 어느 정도의 인명 피해와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반면 법률가는 정반대 입장이다.
그들은 공정한 절차와 개인의 권리에 신경을 쓴다. “무고한 한 명을 처벌하기보다 죄인 100명을 방면하는 게 낫다”는 속담을 믿는다. 모든 점을 감안할 때 오바마는 법률가에 속한다. 하버드 법대를 나와 시카고대에서 헌법을 가르친 배경이 말해주듯 오바마는 임의적인 완력 행사보다 권리장전을 보호하는 전통을 중시한다.
또 오바마는 분석적인 사고가다. 최상의 경우 법률가는 형평성을 고려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주장을 거부한다. 오바마도 사고와 실제 정책에서 흑백 논리를 배격하려는 성향을 나타냈다. 오바마의 참모들은 선동적인 표현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종종 있다(예를 들면 테러리즘을 ‘인위적 재난’이라고 순화시켜 말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오바마 행정부가 국가안보 정책에 기여한 점은 ‘표현’ 그 자체에 있었다. 부시 대통령 시절의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표현을 자제했고, 전직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말한 ‘대형 파이프 오르간(the Mighty Wurlitzer: 미국의 노력과 우월성을 선전하는 도구를 말한다)’의 음량을 줄였다.
오바마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매우 민감하다. ‘십자군 운동(crusade)’이니 ‘이슬람파시즘(Islamofascism)’이라는 언급이 이슬람권 청소년들을 성전주의자로 만드는 지름길이었으며, 미군이 운영하는 쿠바 관타나모 기지 수용소가 오히려 알카에다의 신규 대원 모집소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사실을 익히 안다.
이런 사고방식이 오바마만의 특성은 결코 아니다. 부시 전 대통령도 관타나모 수용소가 득보다 실이 많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의 행정부는 수감자들을 석방하고 수용소 폐쇄를 목표로 단계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다만 부시는 신임을 너무 잃어 그런 조치의 홍보 이득을 별로 얻지 못했을 뿐이다.
오바마는 테러리즘과 싸우는 문제에서 외길을 고집하지 않았고 신중하고도 다양한 방안을 고려했다. 그의 반테러 정책은 사실상 부시의 2기 정책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는 물고문 등 잔혹한 심문 방식을 2005년부터 사용하지 않았다. 오바마는 고문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강압 수단(심지어 고성이나 협박도 포함된다)까지 공식적으로 금했다.
하지만 예리한 법률가들은 오바마가 입법이 아닌 행정 명령으로 그렇게 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의회의 승인 없이도 언제든지 번복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9·11 직후 도입된 ‘영장 없는 감청’ 제도는 좀 더 개선된 내용으로 입법화됐다. 오바마는 체포된 테러 용의자들을 자국으로 송환해 조사케 하는 부시 행정부의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대신 해당 국가가 용의자들을 고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여러 면에서 오바마는 중도 우파의 입장에서 국가안보 정책을 폈다. 백악관 출입 기자 피터 베이커가 뉴욕타임스 매거진에서 지적했듯이 오바마는 참모들에게 CIA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제공하라고 지시했다.
이념이 아니라 실효성 때문이었다. 오바마는 효과 없는 정책이라면 언제든 바꿀 용의가 있다. 예컨대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에 1년이라는 시한을 설정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진정으로 위험한 수감자와 비교적 덜 위험한 수감자를 가려내는 일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마찬가지로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성전주의 세뇌를 당한 수감자를 외국 국가가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바마가 한 번도 오판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취임 직후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은 알카에다 대원에게 사용된 고문 방식을 담은 CIA 문건을 공개하라는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오바마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려는 의도에서 참모들에게 판결에 불복하지 말라고 명했다.
또 9·11 직후의 테러 용의자 심문에 관련된 정보 관리들을 수사하겠다는 홀더 법무장관의 결정에 동의했다. 그렇게 하면 정보기관의 사기가 크게 저하될 위험이 있다는 마이클 헤이든 전 CIA 국장의 경고를 무시하거나 거부한 처사였다. 사실 CIA의 사기를 가볍게 생각해선 안 된다. 정보 관리들은 일이 잘못될 경우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굳이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는다.
현재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예멘까지 비밀 작전의 수위를 높여간다. 따라서 정보기관들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작전들이 성공하려면 정보관리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오바마는 9·11 공격의 배후 인물인 할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정보기관에선 그를 ‘KSM’이라고 부른다)를 맨해튼의 연방 법원에서 공개 재판하겠다는 홀더 법무장관의 결정을 지지했다.
이 역시 오판이었을지 모른다. 오바마는 아무리 광적인 테러리스트라도 미국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는 점을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던 듯하다. 홀더 장관의 결정은 부시 행정부의 법무부 관리였던 짐 커미와 잭 골드스미스의 지지도 얻었다. 그 두 사람은 2004년 고문과 영장 없는 감청에 관한 문제에서 체니 진영에 반기를 들어 유명해졌다.
지난 11월 워싱턴포스트의 기명 칼럼에서 커미와 골드스미스는 맨해튼에서 KSM을 재판한다고 해서 “뉴욕이 더 큰 테러 표적이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논리는 이랬다. “늘 그랬듯이 알카에다는 뉴욕을 공격할 능력이 되면 언제든지 그렇게 한다. KSM 재판 때문에 새삼스럽게 뉴욕을 목표 삼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재의 진정한 위협은 파키스탄의 산악지대에 숨어 지내는 알카에다 지도부보다는 그 무장단체의 다양한 분파, 그리고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어 하는 분자들(일부는 뉴욕에 살지도 모른다)에게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영생의 약속에 혹한 자살폭탄 테러범에게 9·11 주모자의 재판을 뉴욕 지하철 폭파로 앙갚음한다는 발상은 아주 강렬한 유혹 아닐까?
이 부분에서 오바마는 중도 노선을 찾으려고 좀 더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테러리스트 재판을 목적으로 부시가 설립한 군사재판 위원회를 존속시켰다. 대신 규정을 고쳐 강압에 의해 확보한 증거를 제시하기가 더욱 어렵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군사재판 위원회의 적법성과 용의자들을 무한정 구금하는 관행은 현재 연방 법정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연방 판사들은 적합한 지침이 없어서 그때 그때마다 규정을 만들어 왔다. 오바마는 재판 없이 용의자를 구금하는 방식과 기간을 규정하는 법제정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와 시민 자유주의자들의 압력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들은 어떤 형태든 예방 차원의 구금 법제화엔 반대한다.
이제 오바마는 그런 신중함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속옷 자폭테러’ 용의자 우마르 파루크 압둘무탈라브는 체포 30시간 만에 변호사 선임을 허용 받고는 묵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보수 진영의 비난이 비등했다. 하지만 사실 부시 행정부도 2001년 ‘신발 자폭테러’ 용의자 리처드 레이드의 경우 같은 조치를 취했다.
조사관들이 미국에서 체포된 테러 용의자를 변호사가 개입하기 전에 특정한 시간(예컨대 2주) 동안 심문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그랬더라면 압둘무탈라브는 묵비권 행사 전에 CIA에 다른 음모나 관련자에 관한 정보를 털어놓았을지도 모른다. 보수 진영은 압둘무탈라브를 불법 전투원으로 취급해야 하며 군 교도소에 수감해야 마땅한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 기존의 군사재판 위원회 지침으로도 수감자는 일반 형사 용의자처럼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를 지닌다. 따라서 군사재판에 회부되든 그렇지 않든 압둘무탈라브는 변호사를 들여 입을 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예방 차원의 용의자 구금이라는 어려운 문제 전반을 다루는 새로운 법제도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TV에선 논평가들이 고함치며 손가락질을 하겠지만, 의회나 행정부의 누군가는 정보 수집의 필요성과 법치 두 가지 모두에 부응하는 해결책을 찾아내야 한다. 어쩌면 법학 교수인 오바마가 그런 법을 입안하는 데 적임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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