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이희진] 스포츠 흥행의 연금술사
[CEO 이희진] 스포츠 흥행의 연금술사
이 남자 ‘매의 눈’을 가졌다. 김연아를 발견해 대박을 치더니 이번엔 손연재다. IB스포츠 이희진(46) 대표의 얘기다. 김연아는 그래도 상품성이 있을 때 발탁했다. 손연재는 다르다. 흙 속에서 진주를 캐냈다. 그것도 피겨보다 더 척박한 리듬체조 선수였다. 이 대표는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선 동메달에 그쳤지만 손연재의 가치는 김연아를 훌쩍 뛰어넘을 것”이라고 했다. 후일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키우겠다는 플랜도 세웠다. 사람들은 이제 그의 눈을 인정한다.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명도 주저 없이 붙인다.
감각은 절로 생기지 않는다. 신이 아닌 이상 예지력을 가질 수 없다. 그의 귀신 같은 눈썰미는 노력의 산물이다. 이 대표는 KBS 영상사업단(현 KBS미디어) 출신이다. 역할은 해외 프로그램 수입. 한 편을 고르기 위해 적게는 100편, 많게는 200편을 봤다. 그냥 본 것도 아니다. 히트 가능성을 점쳐야 했다. 이 대표는 떡잎부터 달랐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엑스파일’을 수입한 게 그다. 1997년엔 메이저리그 중계권도 따냈다.
김연아 떠나도 실적 ‘이상 무’그라고 성공일로만 걸었을까. 아니다. 쓴잔을 마신 적도 있다. 2002 한·일 월드컵 직전, 그는 이벤트 업체 SNE미디어를 설립했다. 생애 첫 CEO. 출발은 상큼했다. 아니 대단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FIFA(국제축구연맹)와 ‘퍼블릭 뷰’ 계약을 체결해 일반 시민이 어디서든 중계를 볼 수 있게 했다. 옥외광고판 중계권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붉은 악마의 거리응원은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한·일 월드컵 이후에도 호황을 누렸다. ‘스포츠 이벤트를 함께하자’는 제안이 쏟아졌고,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이게 패착이 될 줄은 그도, 주변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했다. 연달아 계약했던 대규모 이벤트가 흥행에서 참패했고, SNE미디어는 2004년 간판을 내렸다. 대박을 노리고 무리하게 자금을 당겨 쓴 탓이었다.
실패는 뼈아팠다. 남의 사무실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책상은 단 한 개, 직원은 없었다.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비즈니스는 사람 장사’라는 말이 있다. 인맥이 두터우면 기회가 찾아오게 마련이다. 신뢰가 쌓였다면 말이다. 이 대표가 그랬다. 1997년 인연을 맺었던 사무국에서 연락이 왔다. 한 방송사와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중계권 계약이 틀어질 무렵의 일이다. “한국 측에서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다. 상황을 알아봐 달라.” 제안은 점차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차라리 당신과 계약하고 싶다.”
문제는 돈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요구한 중계권료는 2005~08년 총 48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500억원에 가까웠다. 분할납부 방식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1년에 100억원은 족히 필요했다. 바로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는데, 인터불고그룹 윤준식 상무였다. 윤 상무는 인터불고 권영호 회장의 맏사위이자 이 대표의 중학교·대학교 동창. 윤 상무는 “네가 한다면 믿고 투자하겠다”며 돈을 선뜻 빌려줬고, 이 대표는 천신만고 끝에 메이저리그 판권을 따냈다. IB스포츠가 설립(2004년 말)된 것도 그때다.
남은 일은 방송사에 판권을 파는 것. 순조롭게 풀리는 듯했다. 곧장 스카이라이프와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하지만 웬걸, 갑자기 파기됐다. 지상파 방송의 압력 때문이었다. 서둘러 CJ미디어·온미디어와 MOU를 맺었지만 이마저 파기. 이 대표가 2005년 3월 IB스포츠의 자회사 ‘썬TV’를 설립하고 채널(엑스포츠)을 직접 운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전망은 불투명했다. ‘신규 PP(프로그램 공급업자)가 SO(종합유선방송국)에 진입하는 건 어렵다’ ‘광고 수입 가능성이 없다’는 비관론이 많았다. 그의 판단은 달랐다. “이번엔 제대로 승부를 할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야말로 잭팟이 터졌다. 개국한 지 4개월 만에 1000만 가구를 확보했다. 당시 케이블업계의 총 가구수가 1500만이 채 안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눈부신 실적. 광고수입은 종합스포츠 채널PP 중 1위에 올랐다. 이 대표는 “당시 기록은 누구도 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궁금한 게 있다. 이 대표는 승승장구하던 썬TV의 경영권을 설립 1년 만인 2006년 CJ미디어에 넘겼다. 이유는 뭘까. IB스포츠의 대주주 인터불고의 선택 때문이었다. 인터불고는 미디어와 무관한 기업이다. 국내에 호텔인터불고 대구·엑스코·원주, 인터불고경산컨트리클럽 등을 보유하고 있다. 스페인·프랑스·네덜란드·앙골라·가봉에선 조선·수산업 등을 영위한다. “인터불고 권영호 회장은 미디어에 관심이 없는 분이에요. 상황이 좋아졌으니 투자금을 회수했으면 한다는 의견을 비쳤고, 응했죠. 실은 CJ미디어의 투자를 받을 수밖에 없었죠.”
IB스포츠의 성격은 이때 변했다. PP보다 스포츠 판권 사업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현재 MLB(메이저리그)·AFC(아시아축구연맹)·이종격투기·KBL(프로농구연맹) 등 국내외 킬러콘텐트의 독점중계권을 보유하고 있다. 2006년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직후엔 김연아 등 스포츠 스타를 키우는 데 매진했다. IB스포츠의 사업 포트폴리오가 다양한 건 이런 이유다. 자회사인 IB미디어넷은 IPTV(인터넷TV) 방송사다. IPSN ·IGOLF 등 두 개 채널을 운영한다. 지분 51.7%를 보유한 에브리쇼는 스카이라이프·KT와 공동투자해 설립한 미디어 콘텐트 유통업체. 엔터테인먼트·미디어 콘텐트에 투자하는 에버그린컨텐츠그룹도 있다. 지분율은 19.3%.
IB스포츠 하면 십중팔구 선수 매니지먼트를 연상하지만 매출 비중은 그렇지 않다. 스포츠 판권 사업(44%)의 비중이 가장 크고, 다음은 스포츠 마케팅 사업(32%)이다. 선수 매니지먼트 비중은 24%에 불과하다. 김연아라는 걸출한 스타가 떠났음에도 IB스포츠가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다.
IB스포츠는 지난해 3분기까지 53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2009년 영업이익(22억원)을 3분기 만에 뛰어넘었다. 추이를 봤을 때 영업이익 70억원 돌파가 무난할 전망이다. 달성하면 사상 최대다. 매출은 종전과 비슷한 450여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불황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징조다.
IB스포츠는 지금껏 지상파와 싸우며 성장했다. IB스포츠가 지상파를 따돌리고 독점 중계권을 확보한 건 국내 방송 역사에서 전무후무하다. 요즘은 SBS와 법정 다툼을 벌인다. SBS의 올림픽·월드컵 단독중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 중이다.
얼핏 보면 이 대표는 공격적 CEO다. 실제론 반대다. 차분하고 조심스럽다. CEO보다 스페셜리스트에 가깝다. 자신도 “그게 더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능력 있는 선수를 발굴하고, 흥미로운 미디어 콘텐트를 찾는 데 전념하고 싶다”고도 했다. CEO가 아닌 스페셜리스트 이 대표에게 물었다. 당장 계약하고 싶은 스포츠 선수는? 독일 분데스리가를 누비는 손홍민이다. 손연재를 위협할 만한 IB스포츠 소속 선수는? 테니스 유망주 전남연이다. 이 남자의 눈, 매를 닮았다.
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1900조 대왕고래' 기대감…한국도 석유 생산국 될까
22025 기업 임원 인사 흐름 살펴보니…대규모 변화 및 조직 슬림화가 특징
3우리은행 찾은 김난도 교수, 내년 소비트렌드 10대 키워드 공개
4이역만리 우즈벡서 내 휴대폰이 왜…술이 문젠가 사람이 문젠가
51기 신도시 볕 드리우나…'선도지구' 매수 문의 '활활'
6해외촬영 중 비보…'티아라' 함은정 모친 별세
7청강문화산업대학교, '日 웹툰시장 진출전략 세미나' 진행
8‘오너 4세’ 허서홍, GS리테일 이끈다…“신성장동력 창출 기대”
9곽튜브, 부산까지 가서 "감칠 맛이…" 동공 커진 까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