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 경영자로 산다는 것 >> 4인의 2세 경영자 대담
2세 경영자로 산다는 것 >> 4인의 2세 경영자 대담
2월 14일 서울 63빌딩 58층에 있는 레스토랑 터치더스카이. 대담 시간인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엄신철 팀장과 윤지영 상무가 먼저 도착했다. 둘은 지난해 가을 서울과학종합대학원의 2세 경영자 과정을 함께하며 알게 된 사이다. 2시 정각이 되자 박고은 과장이 도착했다. 가장 늦게 도착한 이는 라윤환 실장. 라 실장이 “여의도에서 일하는 사람이 늦어 미안하다”고 말하자 엄 팀장이 “원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가장 늦는 법”이라며 농담을 건넸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20년 만에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세상의 좁음과 인연의 신기함에 놀라며 자연스럽게 얘기가 시작됐다.
사회 오너 자녀가 입사하면 주변에서 낙하산이라고 말하곤 하죠. 처음 입사해 어떤 일을 겪으셨습니까?
박고은 입사 석 달 후 직원 평가 점수가 발표됐는데, 내가 신입사원 중 최하점을 받았어요. 점수가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죠. 처음 석 달간 거의 하는 일 없이 지냈으니까요. 억울한 점은 정말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마땅히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기회도 못 얻고 나쁜 평가를 받아 상처를 입었습니다.
윤지영 신입사원 때 부서원들이 잘못해 모두 혼난 일이 있어요. 이때 나만 꾸지람을 듣지 않았습니다. 미안하고 민망하더군요. 사람 사이에 벽도 느꼈어요. 화장실에 들어가면 갑자기 조용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내가 근처에 나타나면 모두 입을 다물더군요. 직원 대부분 남자다 보니 술 한잔 하자며 터놓고 이야기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박고은 그냥 ‘왕따’라면 차라리 편해요. 황당한 루머에 시달린 일도 있어요. 어려서부터 ‘경영에 참여해야 하나’ 고민 많이 했습니다. 입사 뒤 ‘대학원 졸업 후 취업 안 되니까 회사에 왔다’는 루머가 돌았어요. 억울했지요. 회사 카탈로그를 번역한 일이 있었습니다. 영어 번역이라는 것이 직역과 의역 사이를 적절히 오가야 합니다. 그런데 단어 하나를 트집 잡으며 미국 유학생 출신이 영어도 못한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어요. 또 일하다 모르는 것이 있어 질문하면 반응이 둘로 나뉘곤 했어요. ‘이런 것도 모르나 봐’와 ‘내가 이거 아는지 모르는지 시험하나 봐’였습니다. 사장 딸이지만 회사 다니기 쉽지 않구나 생각했어요.
라윤환 모두 겪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회사 생활하며 저도 좌절이 많았어요. 업무 파악이 부족한 상태에서 조직생활을 시작했고, 사장 아들이다 보니 마음 열고 쉽게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직원보다 더 실력을 키우고 싶어 이를 악물고 일했지만 결국 한계에 부닥쳤어요. 그래서 회사를 나와 다른 곳에 취직했습니다. JP모건이란 금융사에서 리서치 일을 시작했습니다. 3년간 다양한 기업 자료를 분석하며 시야를 넓혔습니다.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면서 조직생활에 자신이 생겼습니다. 다시 회사로 돌아와 일을 시작했습니다.
회사 생활하며 여러 번 좌절
엄신철 기존 조직에 낙하산으로 내려온 건 사실이지요. 모두 나를 다르게 대했습니다. 속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다가갔습니다. 말도 걸고 식사도 같이 하면서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서로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바보 토론’도 해 봤습니다. 틈틈이 공장 곳곳을 다니며 청소도 했고 마무리 작업에도 참여했습니다. 내가 주로 하는 일은 수출 관련 업무입니다. 우리 제품을 하나라도 더 많이 해외에 팔아 수익을 올리는 일이지요. 하지만 좋은 CEO가 되기 위해서는 맡은 일뿐 아니라 공장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라윤환 회사에 다시 입사한 후에는 새로운 도전을 했습니다. 일본 고급 브랜드 자전거를 수입 보급하는 사업이었습니다. 기존 사업은 이미 시장이 포화상태라 치고 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회사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제가 찾아보겠다고 나섰습니다. 이 분야는 회사에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직접 개척했고, 직원도 직접 뽑아 가르쳤습니다. 작은 기업에서 새로운 사업 하는 길은 하나입니다. 경영자가 직접 뛰어야 합니다. 마케팅, 구매, 유통, AS와 물류 관리까지 챙겼습니다. 창업하는 마음으로 피땀 흘리며 일했습니다. 다행히 성과가 좋게 나타나자 조직에서 존중 받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기업에서는 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박고은 힘든 경험을 하면서 정신 바짝 차리고 회사 다녔습니다. 여기저기서 일을 구걸했고, 간단한 서류정리나 잔심부름까지 나서서 맡았습니다. 내가 ‘차도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옷은 깔끔하게 입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회사에 들어간 후로는 똑같은 작업복에 운동화 신고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남들 하기 싫어하는 일을 솔선수범해 맡았지요. 시간이 지나자 나를 인정해주는 직원들이 생겼고 경영이 무엇인지 조금씩 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사회 요즘은 가업을 잘 잇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주주로 편하게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요. 왜 어려운 길을 선택했습니까?
엄신철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 손잡고 공장을 자주 찾았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부터 잘 봐 두라’며 공장을 보여주시곤 했습니다. 좀 자란 다음에는 공장 주요 공정에서 직접 일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윤지영 저희 집은 굉장히 자유로운 분위기입니다. 공부하라는 압박도 거의 없었어요. 아주 어린 시절 르누아르 같은 화가를 꿈꿨습니다. 고등학생 때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는데, 부모님이 강하게 반대해서 포기했습니다. 대학 다니며 조금 철이 들었습니다. 일하느라 수고하시는 아버지를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자 대견해 하셨어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표정은 얼굴에 금세 나타나거든요.
라윤환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뒤를 이어 기업을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 시절 무엇을 할까 고민한 시기도 있었지만, 결국 내 갈 길은 사업이라고 마음먹었습니다.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아버님께서 ‘이제 일 시작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로 입사해 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박고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일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자라면 아빠처럼 사업하겠다”고 말한 기억도 있어요. 아빠는 크게 웃으며 반가워 하셨지요. 고등학교 시절 방학이면 공장에 데려가 일을 시켰습니다. 조립공정인데, 제품을 본드로 붙이는 작업이었습니다. 나름 열심히 했는데, 서툴다 보니 실수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작업 도중 순간접착제가 눈에 튀는 사고로 병원에 실려간 일도 있었습니다. 방학이면 제조 라인에 투입돼 일을 배웠습니다. 우리 회사는 센서 같은 전자부품을 제조해 대기업에 납품합니다. 여러 작업이 있는데, 아버지는 이런 과정을 내가 알기 원하셨기에 고등학생 때부터 공장에 데리고 다니신 것 같습니다.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회사에서 업무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작업복에 운동화 신고 일해
사회 부모님은 자수성가하신 분들입니다. 그분들만의 경영수업 비법은 없었나요?
윤지영 입사하면 아버지가 데리고 다니며 자상하게 가르쳐주실 줄 알았습니다. 1년이 지나도록 부르지 않는 겁니다. 찾아가 물어봤습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무관심하신가요?” 아버지는 “이미 가르쳐주고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한가” 반문하셨어요. 조직에 들어왔으면 스스로 보고 배워야지 과외는 없다는 말씀이셨어요. 다음부터는 내가 어떤 일을 해야 잘했다 소리 들을 수 있는지 항상 생각하며 일했습니다.
박고은 아버지는 늘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어울리고 상대를 아우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직생활을 시작하니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경영자가 됐을 때 직원을 이끌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했습니다. 아버님이 조직 이끄는 모습을 보며 많이 배웠습니다. 매사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고, 책임지며 묵묵히 일하시더군요.
라윤환 집에서 아버지는 자상하고 이해심 깊은 분입니다. 하지만 직장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막내라 귀여움 받으며 자랐는데 회사에서 아버지는 매우 엄격했습니다. 자식이 아니라 회사 일원으로 대한 거죠. 아버지 모습에 놀라 적응에 시간이 좀 걸렸죠. 시간이 지나자 이렇게 일하며 가족을 돌보셨구나 알게 됐습니다. 그게 큰 가르침이었습니다.
엄신철 아버지는 평생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내 기억에서 아버지는 일만 아는 공장장입니다. 아쉬운 점은 가족과 함께 해외여행을 한번도 못 갔습니다.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제주도 다녀오신 것이 전부지요. 휴가도 없이 30년 일하신 분입니다. 어릴 때 왜 아버지는 휴가가 없는지 아쉬워했습니다. 공장에서 사고가 나 크게 다치신 일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일에 매달리는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나이를 먹고야 그것이 책임감이고, 리더의 의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공장에서 직원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오랜만에 당진 공장에 가면 나이 드신 직원들이 동료 대하듯 반깁니다. 나도 그런 경영자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공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고 있죠.
사회 MBA나 따로 참석하고 있는 2세 경영인 모임이 있나요?
박고은 지난해 한국능률협회에서 진행하는 2세 경영자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다른 2세 경영자를 만나 서로 고민을 나눈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짧은 기간에 경영에 필요한 점을 속성으로 배울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연세대 글로벌 MBA에서 경영기법을 공부한 것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본받고 싶은 여성 경영자가 너무 적어요. MCM 김성주 회장 같은 분이 계시지만 보다 많았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엄신철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차세대경영자 과정이 기억에 남아요. 비슷한 또래의 2세들과 모여 공부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노력하는 다른 2세를 보면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죠. 2세 모임은 MBA와는 또 다른 하나의 교육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고민을 이해하는 속도가 빨랐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윤지영 지난해 성균관대 최고경영자과정과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차세대경영자 과정 두 곳을 다녔습니다. 배워야 하는 것도 많았고 배우고 싶은 욕구도 강했어요. 개인적 네트워크를 넓히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성균관대에서는 부모님 세대 경영인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경험 많은 경영자들의 고민과 문제해결 능력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는 같은 또래와 공부했습니다. 고민이 비슷했고 말이 잘 통해 괜찮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께 월급 받아 쓰는 처지
라윤환 언젠가 MBA를 다녀오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2세 프로그램을 한번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기회가 되면 공부해 봐야겠습니다.
사회 2세 경영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윤지영 학교 다닐 때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이나 시기의 대상이 된 적이 여러 번 있었죠. 하지만 우리 회사를 믿고 있는 많은 고객과 직원, 직원 가족을 생각하면 그 부담감 역시 만만치 않아요. 기업인은 퇴근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깨어 있는 시간에는 회사 걱정을 할 수밖에 없거든요. 차세대 경영인이기 때문에 분명 사회적으로 받은 혜택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보답하는 의미에서라도 더욱 열심히 베풀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합니다.
엄신철 솔직히 내 환경은 하늘이 주신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업의 생존과 발전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은 정말 무겁습니다. 주어진 환경을 발전시켜 회사와 사회, 그리고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이 늘 내 머리에 맴돌고 있어요.
박고은 회사에 가면 유리 상자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공인으로서 말과 행동에 더 많은 책임이 필요한 자리랍니다. 모든 조직원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요. 이를 이겨내며 조직을 성장시키는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라윤환 차세대는 1세대보다 많은 사회적 책임이 있습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사회에 보답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 같아요. 경영 측면으로 이야기하면 아버지 세대가 이룬 업적에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좋은 환경이지만 책임과 부담도 만만치 않은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일반인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재벌 2세들의 일상을 엿봅니다. 멋진 레스토랑에서 양주 마시고, 외제차 타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실제 그렇나요?
박고은 채널을 돌리다가 나오는 장면들을 보면 지나치게 과장된 모습들이라 웃음이 나옵니다. 대중의 이목을 끌기 위해 과장은 어느 정도 필요한 요소겠지요. 하지만 쓴웃음으로 넘기기에는 솔직히 억울한 기분도 듭니다. 하하하. 너무 다르거든요.
윤지영 저는 스트레스 풀 때 친구들이랑 수다 떨어요. 분위기 좋은 카페나 식당 가는 일도 가끔 있지만 누가 그렇게 공주님처럼 살겠어요. 일하고 공부하고 사업 관계자들 만나는 데도 시간이 모자란 걸요.
사회 방에 돈을 쌓아 놓고 쓰는 분들도 계신 것 같은데요?
라윤환: 그런 사람도 있긴 하겠죠. 하지만 대부분 2세는 일에 매여 산답니다. 사회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죠. 중견기업이라도 트렌드 잘못 읽고 경영전략 잘못 만들면 단번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외제 차 타고, 좋은 술 마시고, 비싼 옷 입고 놀러 다닐 시간 없어요.
엄신철 솔직히 저녁에 일 마치고 좋은 곳에서 술 한잔 하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월급 받아 가정 꾸려나가는 처지입니다. 친구들은 제가 부자라 쉽게 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렇다고 다른 친구에게 사달라고 하기도 그렇고요. 그래서 저녁만 먹으면 사라지곤 했습니다. 회사 직원들과 간단히 소주 마시거나, 친구들과 편하게 맥주 한잔 하며 이야기 나누며 살아요. 방송국 PD들이 그런 것 좀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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