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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y] 어떻게 배울 건지 가르친 우리시대 學人

[Biography] 어떻게 배울 건지 가르친 우리시대 學人

유민 홍진기 전 중앙일보·동양방송(TBC) 회장과 평전 『이 사람아, 공부해』



유민 홍진기(1917~1986) 전 중앙일보·동양방송(TBC) 회장의 생애를 기록한 평전 『이 사람아, 공부해』가 최근 출간됐다.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가 수많은 증언과 사료를 꼼꼼히 취재·정리해 집필한 평전을 꿰뚫는 화두는 ‘학인(學人)’이다. 평전은 신생 대한민국의 초석(礎石)을 깔고 일본의 ‘식민지 망언’을 통렬히 반박하는 등 유민의 생전 활약상과 발자취를 객관적으로 그려냈다. 반도체·반(反)물질에서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관심 분야와 남북·좌우를 아우르던 인맥도 새롭게 조명했다. 『이 사람아, 공부해』 출간 기념회는 11월17일 오전 한국언론진흥재단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됐다.유민은 1917년 경기도 고양군 하왕십리(현 서울 왕십리1동)에서 태어났다.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7년이 더 지난 시기였다. 동년배의 모든 이들처럼 유민도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탓에 온갖 풍상을 겪어야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왕십리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다. 경성제일고보(경기고의 전신)를 거쳐 193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경성제일고보 시절 유민의 학업성적은 1학년 때 전교 200명 중 19등, 2학년 때는 192명 중 12등, 3학년 때는 173명 중 6등, 4학년 때는 162명 중 8등이었다. 전국에서 쟁쟁한 수재들만 모이던 경성제일고보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기록한 것이다.

경성제대 예과를 거쳐 법문학부에 들어갔지만 유민 본인은 생전에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법대는 절대 안 갔지”라고 회고했다. 사실 유민은 문인이 되고 싶어 소설 습작도 했고, 화가·바이올리니스트를 동경하기도 했다. 학자 기질을 타고난 그는 1940년 당시 최고의 출세길로 꼽히던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뒤에도 판·검사의 길을 가지 않고 교수가 되고자 모교 경성제대 조수(조교수 아래 직책) 자리를 선택했다. 그는 법률 중에서도 상법, 특히 회사법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유민은 불과 25세이던 1942년 경성제대 『법학회논집』에 ‘주식 합병에 있어서의 교부금’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끌었다. 생전의 유진오(전 고려대 총장) 박사도 “(논문을 보고) 유민이 경성제대가 낳은 준재(俊才)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회고했다.

유민의 논문에 주목한 도쿄제대 교수(다나카)가 논문 해설을 도쿄제대학보에 실었고, 이를 본 일본 상법학계의 원로 다케다(竹田省) 규슈제대 교수가 상법학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 『민상법잡지』에 유민의 논문을 비판하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에 유민도 『민상법잡지』에 ‘주식회사 합병의 본질-다케다 박사의 고교(高敎)에 대하여’라는 재반박 논문을 실음으로써 경성제대 조수 출신과 일본 제국대학 교수 간에 논쟁이 벌어지는 극히 이례적인 상황에 이른다.

그러나 그즈음 유민은 그토록 갈망했던 학자의 꿈을 타의로 접어야 했다. 한 조선인 조수가 공산당 사건에 연루되는 사태가 일어나 경성제대에서 조선인 조수 전원이 쫓겨났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젊은 지식인의 비애이자 한(恨)이었다. 어쩔 수 없이 유민은 판사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일제 말 전주지방법원에서 22개월가량 재직했다. 짧았던 판사 시절 유민은 자신이 간여한 재판의 판결문들은 모두 모아 두었다. 판결문들은 지금도 유족들이 유품으로 보관하고 있다.

유민의 삶은 그 자체가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교분을 쌓은 국내·외 인사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지만, 적지 않은 이가 식민지·분단·전쟁 등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유민과 인연이 엇갈리고 만다. 유민의 모친(이문익)은 아들이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하자 서울 청량리로 집을 옮기고 생활의 방편으로 하숙을 친다. 이 때 하숙생들이 같은 경성제대 예과생 황산덕(전 법무·문교부장관)·문홍주(전 문교부장관)·김봉관(전 농림부차관)·선우종원(전 국회사무총장)·계창업(전 대법원판사) 등이다.

1972년 중앙일보 창간 7주년을 맞아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오른쪽)이 유민 홍진기 회장(왼쪽), 손자 이재용(가운데 어린이)과 함께 윤전기를 살펴보고 있다.

유민은 문학청년 기질에서 의기투합했던 이항녕(전 홍익대총장)과 함께 자하문 밖 홍지동의 춘원 이광수(1892~1950) 집도 자주 찾았다. 이항녕이 1935년 동아일보 현상 공모에 응모했다가 낙선한 소설 ‘일륜차’를 춘원에게 보여주자 춘원이 “문학에는 소질이 없으니 아예 단념하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했다.



신생 대한민국의 초석 놓는데 큰 기여훗날 춘원의 부인이자 의사인 허영숙은 유민의 차녀 출생 때 직접 아기를 받기도 한다. 유민은 외솔 최현배 선생이 강의하던 한글강습소에도 다녔다. 1939년에는 평북 선천의 계창업 본가에 갔다가 계창업의 외사촌 처남인 작가 정비석(1911~1991)을 만나 평생 우의를 다지게 된다.

유민은 경성제대 시절 사회주의 사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사회주의를 동경하는 풍조는 당시 청년지식층의 일반적인 분위기이기도 했다. 당대 조선 최고의 경제학자이던 백남운(1894~1979, 전 북한 최고인민회의의장)의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탐독하고 친구들과 토론하곤 했다. 이상주의적 기질이 다분했던 유민은 일제 말기 한때 러시아 유학을 꿈꾸며 러시아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유민은 1945년 8·15 해방 직후 경성대학(서울대 전신) 법문학부 구성 문제를 논의하느라 백남운·백낙준·유진오와 함께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곤 했다. 백남운은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연석회의에 참가한 길에 아예 북에 눌러앉았다. 1954년, 유민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극동평화회의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했다가 북한 대표단 차석으로 온 백남운(당시 교육상)과 다시 마주친다.

이 때 백남운은 “북에 가서 민족을 위해 보람된 일을 하자”며 월북을 권유했고, 유민은 “나는 남에서 할 일이 있다”며 거절했다. 월북 후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이강국(1906~1955)은 경성제대 선배, 북한 사학계의 거두 김석형(1915~1996)은 동기생이다. 유민은 죽산 조봉암(1898~1959)의 불행한 죽음을 평생 가슴 아파했다. 유민의 주도로 1974년 5월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난에 ‘진보당 사건’편 연재가 시작됐다. 그러나 유신 치하 서슬 퍼런 정권이 칼을 들이댔다. 연재는 딱 첫 회분만 실린 채 중단되는 필화사건으로 끝나고 말았다.

해방 후 타계할 때까지 유민의 삶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전반부는 신생 대한민국 건설(nation building)에 매진한 시기였다. 특히 대일 외교에서 활약이 눈부시다. 후반부는 언론사 최고경영자이자 대기업(삼성) 2인자로서 삶이었다. 전반기·후반기 사이에 4·19와 5·16이 놓여있다.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형선고를 받는 등 골이 깊은 시기였다. 파란만장한 격동의 시대를 유민은 오로지 공부하는 사람, 학인의 자세로 버텨냈다.

유민은 신생 대한민국의 초석(礎石)을 놓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항상 공부하고 준비하는 삶’이 해방된 조국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미 군정청 시절에는 곧 태어날 대한민국의 법전 편찬 작업에 매진했다. 굵직한 업적만 추리더라도 일제가 한국에 남기고 간 귀속재산(적산) 소유권 확립, 대일청구권 준비, 일제 망언에 대한 국제법적·논리적 응징, 평화통일 원칙 기초 등 하나같이 중요한 일들이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미국은 대일강화조약 초안을 발표했다.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조약이었다. 초안에는 한·일 관계 조항이 단 한 줄도 없었다. 패전 후 일본인이 한국에 남기고 간 동산·부동산·사업체 등 ‘적산(敵産)’은 당시 국내 총자산의 80%나 됐다. 적산 처리, 재일교포, 어업 문제 등 한·일간 현안이 미·일 강화조약에 포함되지 않으면 큰 후환이 될 게 뻔했다. ‘당연히 우리 것 아니냐’는 말은 지금 시점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신생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갓난아이였고, 강자 위주로 짜인 국제법 역시 우리 편이 아니었다.

유민 홍진기 전 중앙일보·동양방송(TBC) 회장의 삶을 기록한 평전 『이 사람아, 공부해』(민음사) 출간기념회가 11월 17일 오전 한국언론진흥재단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이홍구 유민문화재단 이사장(전 총리), 백선엽 장군(한국전쟁기념재단 이사장), 홍라희 리움미술관장, 유민 선생 부인 김윤남 여사, 송인상 한국능률협회 명예회장, 노신영 전 총리, 박맹호 민음사 회장,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

더 큰 문제는 아무도 심각성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 유일하게 법무부 법무국장이던 유민 홍진기가 나섰다. 김연준 법무장관에게 건의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상황을 알리게 했다. 이승만은 건의를 외면했다. 홍진기는 포기하지 않고 당시 초대 법제처장에서 물러나 전시연합대학 일에 분주하던 유진오를 찾아갔다. 심각성을 깨달은 유진오가 장면 국무총리 등을 설득한 덕분에 마침내 대책반 격인 ‘대일강화회의 준비위원회’가 꾸려졌다. 우리 측의 적극적인 외교 노력으로 미국은 귀속재산 소유권 등 한국의 권리를 인정한 조항을 샌프란시스코 미·일 강화조약에 포함시켰다. “초창기 외교의 값진 큰 수확”(김동조 전 외무장관)이었다.

유민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엔 일본과의 국익을 건 ‘외교 전쟁’을 예감하고 일본에 요구할 식민지 피해 배상 목록(배상청구조서) 작성을 건의해 성사시켰다. 부동산·문화재, 인적 손실, 강제공출 피해 등 총 3권의 청구조서는 이후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에서 지렛대 역할을 했다. 완성 직후 6·25 전쟁이 터졌기에 미리 대비하지 않았더라면 근거자료 부족으로 일본의 주장에 휘둘릴 수도 있었다.



구보타 망언 통렬하게 반박한·일 회담 대표로 활약한 유민은 1953년 3차 회담에서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의 ‘구보타 망언’을 통렬하게 반박한다. 구보타는 “식민지지배 시절 유익한 일을 했으므로 일본에도 청구권이 있다”는 궤변을 폈다. 유민은 전통 국제법에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의 권리가 추가돼야 한다는 ‘해방의 논리’로 반박했다. 일본은 몇 년 후 결국 구보타 발언을 취소하고 역(逆)청구권 주장도 접었다.

유민은 ‘북진통일’ 주장이 대세이던 당시 ‘평화통일’ 원칙을 최초로 기초한 공적도 남겼다. 1954년 5월22일 제네바 극동평화회담에서 한국 대표단이 제안한 ‘한국 통일에 관한 14개 방안’이 바로 그것이다. 유민은 법무부차관 시절 동료 차관들과 함께 독도에 접안시설·등대를 설치하고 태극기를 게양하자고 건의해 관철시킨 일을 두고두고 자랑스러워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 후 불과 8일만인 3월23일 내무장관으로 발령받은 유민은 인생 최대 시련기에 접어든다. 시위대에 대한 발포 금지를 부하들에게 지시했지만 정치적 책임마저 면하기는 어려웠다. 4·19, 5·16 후 두 차례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5·16 혁명재판 1심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김정렬(전 국무총리·국방부장관)의 선처 요청을 김종필이 박정희에게 전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고 평전은 기록하고 있다. 수감 중에도 유민은 독서와 공부에 열중했다. 동료 수감자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치고 자신은 프랑스어를 배웠다. 산스크리트어 문법까지 공부했다. 1963년 말 석방된 유민을 당대의 거목(巨木) 호암 이병철이 찾았다. 후반부 인생의 시작이었다. 동양방송(TBC)·중앙일보 최고경영자이면서 삼성그룹의 굵직한 사업에도 간여하는 언론인·경영인의 삶이었다. 피땀 흘려 일군 TBC가 1980년 군부독재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공중분해 된 일은 그의 마지막 시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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