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심야 게임 이용 제한 - “‘스타(블리자드사의 온라인게임)’는 밤새 할 수 있는데 왜 우리만”
청소년 심야 게임 이용 제한 - “‘스타(블리자드사의 온라인게임)’는 밤새 할 수 있는데 왜 우리만”
심야에 청소년의 게임 이용을 제한하는 ‘셧다운제’가 시행된 다음 날인 11월 21일 밤 8시.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위치한 한 PC방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중·고등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몇몇 중학생에게 셧다운 제도 시행에 관해 물었다. “어차피 부모님이 자정 이후에는 컴퓨터를 못하게 한다”는 답변이 많았지만 한 학생은 “부모님 주민등록번호로 손쉽게 성인 계정을 만들 수 있어 별 문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11월 20일 시행된 셧다운제는 만 16세 미만의 이용자가 밤 12시~오전 6시까지 온라인 게임에 접속하는 걸 금지한다. 이를 어긴 사업자는 2년 이하의 징역형,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한다. 청소년보호법시행령 개정안을 발의해 셧다운제를 실시한 여성가족부는 인터넷게임 중독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2004년 10월 일부 시민단체가 온라인게임 이용시간을 제한하자고 주장한 걸 시작으로 몇몇 국회의원도 나서 셧다운제의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그러나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고, 게임업체가 자발적인 노력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지지부진한 분위기였다. 2009년 4월 여성가족위원회 소속인 민주당 최영희 의원이 여야 의원 21명의 동의를 받아 개정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며 이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됐다. 4월 29일 국회에서 셧다운제 원안이 찬성 117표로 가결돼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시행이 최종 결정됐다.
게임업계는 셧다운제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제한 대상이 아닌 일부 이용자의 접속이 끊기는 등 오류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기업이 제도의 틀을 깨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엔씨소프트·넥슨을 비롯한 대형 게임업체 관계자는 “셧다운제를 준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아직 이용자들로부터 특별한 반응은 없다”며 제도와 관련한 공식적인 언급을 피했다. 속이 타는 건 중소 게임업체다. 한 중소 게임회사는 인력이 부족해 한 팀이 꼬박 일주일 밤을 새워 셧다운 제도에 맞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실명인증이 필요 없던 게임도 이용자 나이를 알기 위해 실명인증을 다시 도입하거나 접속 방식을 바꾸는 방법을 택하는 등 기업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노력을 해야 했다.
중소 게임업체 “인력 없는데 죽을 맛”여성가족부는 강경한 입장이다. ‘청소년을 유해매체 환경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원론을 고수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자정에서 오전 6시까지 게임을 하는 만 16세 이하 이용자가 워낙 적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과 게임 중독으로 고통을 겪는 초등학생과 청소년의 상담 사례가 많고 이를 막아 달라는 학부모의 청원이 빗발쳐 관할 부처로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9~19세 청소년 중 인터넷중독 증상이 나타나는 비율은 12.4%로 87만7000명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런 증상을 보이는 청소년 중 대다수가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발표한 ‘청소년 유해환경 접촉 종합 실태 조사’에서 중·고생의 26.5%가 하루 평균 2시간 이상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으며, 인터넷 중독률은 12.4%나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초등학생의 중독률(13.7%)이 지난해 대비 2.9% 높아져 게임에 몰두하는 어린 청소년이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
게임업계에 제도 시행에 따른 변화를 물었다. 대부분 “아직 이용자가 눈에 띄게 줄거나 매출이 감소하는 등의 변화는 없다”고 대답했다.
셧다운제 제한 대상자는 유료 상품을 많이 결제하는 16세 이상 이용자와 비교해 매출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문화연대가 여성가족부에 전달한 질의서 자료에 따르면 만 16세 미만 청소년 중 심야에 게임을 즐기는 비율은 5%에 불과했다.
사업에 큰 지장은 없지만 셧다운제를 보는 게임업계의 시선을 싸늘한 편이다. 실효성이 있겠냐는 분위기다. 한 유명 게임 개발자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쓸데없는 짓이라는 게 업계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일부 게임 장르에선 계정을 돈으로 사고 파는 거래가 활성화돼 있어 개인정보를 차단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설명한다. 오히려 부모 명의로 계정을 몰래 만들거나 타인의 계정으로 접속하는 식으로 탈법을 부추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게임중독에 빠진 청소년이 누구인지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셧다운제를 실시한 나라로 태국을 꼽을 수 있다. 2003년 태국은 밤 10시부터 다음날 6시까지 게임 이용을 제한하는 셧다운제를 실시했다. 권고사항일뿐이었지만 사용자를 식별하는 게 쉽지 않고 다른 사람의 계정을 빌리는 사람도 많아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2년 만에 무효화됐다.
베트남에는 3월부터 강력한 셧다운제를 실시하고 있다. 청소년은 물론 성인도 밤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 온라인 게임을 할 수 없다. 그러자 청소년들이 온라인 게임 대신 PC게임으로 몰렸다. 중국은 2007년부터 ‘피로도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게임 이용시간이 2~3시간을 넘을 경우 접속을 제한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지난해에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신분을 확인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게임업계 관계자들은 “우리와 달리 외국 콘텐트가 자국 시장을 잠식하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셧다운제 때문에 대형 게임회사가 시장을 독식하는 현재의 구도가 더욱 고착될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중소 업체로선 새로운 규제가 하나 더 생겨 진입장벽이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게임 컨설팅 업체인 ‘와일드카드’를 운영하고 있는 김윤상 대표는 “업계에는 유학파나 교포 출신 사업가가 많다 보니 짐 싸서 해외로 나가야겠다고 푸념하는 중소 게임업체 사람이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국내 게임업체에 대한 투자도 셧다운제의 영향을 받고 있다. 모바일 게임을 기획하고 있는 한 개발자는 “해외 벤처캐피털의 자금을 끌어오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정부의 규제가 강화돼 투자 유치에 악영향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해외 게임업체가 국내 개발사를 통해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보류된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기업이 해외기업과 비교해 역차별을 받게 된 것도 불만거리다. 셧다운제는 ‘영리를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인터넷 게임물’을 대상으로 한다. PC 온라인게임은 국내 시장의 64%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 셧다운제 영향권에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비디오 게임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마이크로소프트의 X박스는 현재 셧다운제의 영향권 밖에 있다. 셧다운 제도의 기준이 모호해 네트워크 대전이 가능한 비디오게임 서비스를 규제 적용 대상물로 분류할지 여부를 두고 여전히 논란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해외 게임업체는 규제 영향 밖에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는 “일부 사용자만 특정 시간에 접속을 차단하는 게 기술적으로 어렵다”며 해당 시간대에 모든 접속자를 차단하거나 만16세 미만 사용자 계정 생성을 중지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들 기업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 자칫 엉뚱한 이용자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비디오 게임은 셧다운제 규제에서 제외하자는 입장을 고수해온 문화체육관광부와 여성가족부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PC 온라인 게임의 원조 개발사인 블리자드의 대표 게임인 ‘스타크래프트1’ ‘블리자드2’는 셧다운 규제에서 아예 제외됐다. 셧다운제 시행 계획을 들은 블리자드는 옛 버전인 배틀넷을 통해 접속하다 보니 사용자의 연령 정보를 수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규제에 대처하기 어렵다며 해당 시간대에 모든 한국 접속자를 차단할 수 밖에 없다고 단호하게 나왔다. 법리적으로도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여성가족부는 결국 시행령에서 “일부 PC패키지게임물을 셧다운제 대상에서 유예한다”고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이들 게임이 제외된 이유로 “영리를 목적으로 한 게임이 아니라 예외가 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영리’가 정확히 어떤 범위를 지칭하는지 모호했다.
이렇게 한 가지 규제를 두고 원칙 없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자 국내 게임업체에선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국내 기업만 쥐어짠다”는 불만이 고조됐다. 이런 와중에 중국·대만 게임업체가 한국에 몰려오고 있어 중소 게임업계의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중국 1위 업체인 텐센트와 창유, 더나인이 한국에 법인을 설립했고 올해 안에 서비스를 시작하는 중국과 대만 온라인 게임은 6개나 된다.
국내 게임 개발자들은 “게임이 마약이나 술, 담배 취급을 받아선 곤란하다”고 하소연한다. 가뜩이나 개발 인력이 모자란 상황에서 사회 전반에 부정적 기류가 흐르면 우수 인력이 게임업계에 모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게임산업은 지난해에만 해외에서 1조 9932억여 원을 벌어들인 효자산업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11년 2분기 콘텐트 산업 수출액 규모를 살펴보면 게임이 6058억원으로 전체의 56.5%를 차지했다. 여성가족부는 “2년 후 심사를 통해 규제 대상을 다시 확정 지을 것”이라고 밝혔다. 게임업계는 지금보다 더 강화된 규제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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