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취임 25주년 맞은 이건희 회장
변방에서 중심부로
수성 넘어 제2 창업
[CEO] 취임 25주년 맞은 이건희 회장
변방에서 중심부로
수성 넘어 제2 창업

이건희 회장이 올해로 삼성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한 지 25주년을 맞았다. 그는 그 사이 삼성을 글로벌 초일류기업 반열에 올려놨다. 단순한 수성을 넘어 제2 창업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올해로 70세인 이 회장 앞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삼성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여전히 존재하고 구글·애플 등과 피 말리는 싸움도 벌여야 한다.15~16세기 일본 전국(戰國)시대를 다룬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우리말 번역서 『대망』)는 일본은 물론 국내 기업인들이 꼽는 경영 필독서다. 난세의 정국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보인 탁월한 용인술과 처세술은 기업 경영에 시시하는 바가 크다. 지금은 은퇴한 삼성그룹 L사장도 현역 시절 이 책을 후배들에게 자주 권했다. L사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업인에게 주는 시사점 중 하나는 창업(創業)과 수성(守城)의 중요성을 잘 짚었다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전국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막부체제를 도입한 이에야스. 그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막부의 기반을 공고히 다진 아들 히데타다. 이들 부자(父子)의 절묘한 바통터치가 도쿠가와 막부의 265년 역사를 만들었다는 게 L사장의 설명이다.
창업과 수성. 국가든 기업이든 창업은 항상 위대하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업보다 어려운 게 수성이다. 많은 국가 혹은 기업이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간 뒤 불과 십 수년을 못 버티고 몰락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멀리서 찾자면 시황제의 진나라, 가깝게는 대우그룹이 그랬다.
국내 기업사에서 성공적인 창업과 수성의 사례를 찾자면 단연 삼성그룹을 꼽을 수 있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1938년 대구상회(현 삼성물산)를 세워 대그룹의 기초를 닦았고, 아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의 대도약을 이뤘다. 특히 이 회장은 수성을 넘어 제2 창업이라 할 만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건희 회장이 올해로 삼성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한 지 꼭 25주년을 맞는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삼성은 국내 재계 서열 1위 기업으로, 세계 전자산업의 맹주로 올라섰다. 국내외 경제계에선 이 회장을 ‘경영의 신’으로까지 평가하는 이들도 많다. 지난 4반세기 동안 이 회장은 어떻게 글로벌 초일류 기업 삼성을 만들었을까. 또 국내 경제계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그리고 앞으로 이 회장이 만들 삼성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1987년 11월 19일 고 이병철 회장이 타계했다. 이 회장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해 12월 1일 삼성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만 45세 때다. 당시만 해도 삼성은 국내 1등 기업은 아니었다. 그 해 삼성그룹의 총자산 규모는 11조원, 매출은 17조원. 임직원 수는 국내외를 포함해 16만명이었다. 당시 국내 재계 서열 1위는 현대그룹이었고, LG그룹과 대우그룹도 삼성의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그나마 국내에선 대그룹으로 인정받았지만 해외에서 삼성의 인지도는 형편없었다. 연간 수출액은 9억 달러에 불과했다. 세계적 브랜드 조사기관인 인터브랜드가 매기는 기업브랜드 가치도 100위권에 한참 못 미쳤다. 한마디로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던 시기였다. 내세울 사업도 없었다. TV를 만들기는 했지만 일본과 미국 기업들로부터 하청업체 정도로 평가 받을 때였다. 지금 세계 시장을 좌우하고 있는 반도체 사업은 걸음마 단계였고, 휴대폰 사업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그렇다면 이 회장 취임 후 25년, 삼성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먼저 총자산은 2011년 말 기준으로 440조원으로 껑충 뛰었다. 25년 전에 비해 44배나 늘었다. 이 회장 취임 이후 1991년부터 1997년까지 한솔그룹과 새한그룹, CJ(옛 제일제당), 신세계그룹, 보광그룹이 잇따라 계열분리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경이적인 기록이다. 그룹 전체 매출은 2010년 259조원, 2011년 316조원으로 꾸준히 늘면서 25년 전보다 19배 가량 증가했다. 2011년 말 임직원 수는 해외 사업장을 포함해 37만명에 달한다.
이뿐만 아니다. 인터브랜드가 조사한 삼성의 브랜드가치는 지난해 기준으로 234억달러(28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 세계 기업 가운데 17위였다. 국내 기업 가운데 최고 기록이며 오랜 경쟁상대인 소니(35위), 파나소닉(69위) 등 일본 기업을 크게 앞선 기록이다. 결과적으로 이 회장의 재임기간 삼성은 모든 면에서 환골탈태에 가까운 변화를 이뤘다. 삼성 관계자는 “중요한 사실은 삼성의 성공이 결코 거저 얻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라며 “기업가, 경영자로서 이 회장이 보인 리더십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결과”라고 말했다.
삼성 사람들에게 1993년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삼성의 미래를 바꾼 ‘신(新)경영’ 선언이 나온 해이기 때문이다. 해외 한 언론은 신경영 선언을 두고 ‘이건희 회장이 진정한 문화혁명을 일으켰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신경영 이후 삼성이 겪은 변화는 컸다.
1993년 신경영이 출발점

이 회장은 신경영을 시작할 당시 상황을 1997년에 발간한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1987년 회장에 취임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1979년 부회장이 된 이후 경영에 부분적으로 관여해왔지만 그 때는 선친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다. 이제는 내가 모든 걸 짊어져야 하는데 세계 경제는 저성장의 기미가 보이고 있었고 국내 경제는 3저 호황 뒤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고 ‘내가 제일이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신경영은 조직에 위기의식을 불어넣기 위한 충격요법이란 설명이다. 나아가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물려받은 기업이 없어질 수 있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1993년 6월 7일. 이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로 삼성그룹 핵심 경영진 200여명을 소집했다. “수년간 질경영을 강조했는데도 변한 게 고작 이것인가”라며 경영진을 강하게 질타한 이 회장은 곧바로 신경영을 선포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는 말로 요약되는 신경영 선언은 한마디로 삼성그룹의 체질개선 프로젝트이자 정신개조 프로젝트였다. 20만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을 강제로 바꾼 7·4제(7시 출근, 4시 퇴근)가 대표적이다. 외부 충격으로 직원들의 의식을 바꿔 신경영의 의미를 체화하도록 만들겠다는 이 회장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1995년의 이른바 ‘불량제품 화형식’도 마찬가지. 삼성전자는 이 회장의 지시로 그 해 3월 9일 경북 구미사업장에서 2000명의 임직원이 모인 가운데 휴대폰, 카폰, 팩시밀리 등 시가 500억원 상당의 제품을 망치로 부순 뒤 태워버렸다. 질경영에 대한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질경영을 핵심으로 한 신경영은 1993년부터 약 10년간 강도 높게 추진됐다. 그 10년의 기간 동안 삼성은 반도체를 비롯해 TV와 휴대폰 분야에서 ‘글로벌 톱 플레이어’의 반열에 올라섰다.

신경영으로 체질을 바꾼 삼성은 거침이 없었다. 반도체에 이어 액정표시장치(LCD), TV, 휴대폰 등 전자산업에서 질주를 시작했다. 현 시점에서 반도체는 부동의 1위이며 LCD와 TV, 휴대폰 분야에서도 선두에 올라있다. 삼성이 뛰어드는 사업마다 쟁쟁한 경쟁자를 압도하는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힘은 뭘까.
끊임없는 위기의식, 주마가편의 리더십2005년 1월 15일. 일본 최대 경제신문인 니혼게이자이는 ‘삼성, 1조엔 이익의 충격’이란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삼성전자가 2004년 10조원(약 1조엔)이 넘는 순이익을 달성했다는 소식이 나온 직후였다. 요미우리 신문도 마쓰시타, 도시바, 히타치 등 일본 10대 IT·전자업체들의 순이익을 합한 것보다 삼성전자 순이익이 많다고 보도했다. 당시 니혼게이자이 사설의 내용은 이렇다.
“삼성전자가 세계 IT업계 최고의 기업으로 자리매김 한 것은 반도체와 LCD 등에 집중 투자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일본 전자·전기업체들이 리스크를 꺼려 투자를 태만히 한 결과다…(중략)…삼성은 오너가 경영하기 때문에 리스크가 큰 투자를 과감하게 결단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강력한 리더십과 빠른 결단은 배워야 한다.”
한마디로 일본 기업들이 이 회장의 리더십과 결단력을 배워야 한다는 게 니혼게이자이의 주문이었다. 니혼게이자이의 주문처럼 이 회장은 중요한 사업결정의 순간마다 역전의 명수이자 승부사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왔다. 반도체 사업이 대표적이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건 1983년. 그 해 삼성그룹 부회장을 맡고 있던 이 회장은 일본 도쿄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당시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인텔, 도시바, NEC, 히타치 등은 “무모한 도전”이라고 폄하했다. 고작 브라운관 TV나 만들던 삼성이 최고 기술 집약산업인 반도체에 뛰어든다는 게 말도 안 되는 도전이란 얘기였다. 삼성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생산라인 하나 건설하는 데 수 조원이 들어가는 반도체 사업 특성상 실패할 경우 그룹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러나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단순 조립에서 하이테크 산업으로 빨리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이 회장의 승부수는 보기 좋게 경쟁사들의 콧대를 눌렀다. 1992년 삼성전자는 세계 1위였던 일본 도시바를 제치고 당당히 D램 업계 1위로 올라섰다. 이후 삼성전자의 독주 속에 독일 키몬다는 몇 년 전 파산을 선언했다. 한 때 10곳이 넘던 일본 반도체 업체들도 삼성과의 경쟁에서 뒤쳐지면서 잇따라 사업에서 발을 뺐다. 최근엔 유일하게 남은 일본 D램 업체인 엘피다마저 파산을 선언했다.
2001년 낸드플래시 사업 초창기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당시 이 회장은 낸드플래시 1위였던 도시바로부터 합작 제의를 받고 고심을 거듭했다. IT 버블이 꺼지면서 IT업체들의 수익력이 악화되고 있었다. 실패의 부담을 감안하면 합작에 응해야 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자체 경쟁력과 향후 시장 전망 등에 대한 참모들의 보고를 토대로 독자 추진을 결정했다. 결과는 대박. 삼성전자는 휴대폰 디지털카메라 MP3플레이어 등으로 급성장한 낸드플래시 시장의 절반 가량을 장악하며 도시바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반도체 분야에서 보인 이 회장의 과감한 결단력은 다른 분야에서도 통했다. 200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이 선점했던 대형 LCD패널 분야에 뒤늦게 뛰어들어 세계 1위에 올랐으며, TV 분야에서도 2000년대 중반 소니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경영자로서 이 회장에게는 또 다른 별칭이 붙는다. 바로 ‘위기경영의 대가’다. 그는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 이익을 낼 때도 늘 위기를 강조한다. 위기론에 입각해 매년 새로운 경영 화두를 던지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항상 그가 던지는 화두는 당시 삼성과 국내 기업들의 상황에 꼭 들어맞았다.
신경영 선언 이듬해인 1994년 그는 이른바 ‘천재경영론’을 주창했다. “21세기는 천재 한 명이 1만 명,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게 요지다. 천재경영론에 따라 삼성은 이후 핵심인재 영입에 막대한 공을 들였다. 핵심인재를 ‘S(Super)급’과 ‘A(Ace)급’, ‘H(High potential)급’ 등으로 나누어 각종 특전을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천재경영론은 지금 와서 보면 삼성은 물론 국내 많은 기업 경영자들이 벤치마킹 하고 있다.
1996년에 나온 디자인경영론도 그 시작은 위기의식에서 비롯했다. 그는 경영진들에게 “소니나 벤츠는 멀리서 봐도 소니나 벤츠임을 알 수 있는데 삼성 제품은 모방만 하다 보니 삼성만의 아이덴티티가 없다”고 지적했다. 2005년 4월 이 회장은 이탈리아 밀라노에 핵심 경영진을 불러모아 또 한번 ‘디자인 경영’에 박차를 가할 것을 주문했다. 월드베스트 제품을 만들기 위해 독창적 브랜드와 디자인을 갖춰야 한다고 역설했다. 삼성이 소니를 앞질러 세계 TV 1위에 오르는 결정적 역할을 한 보르도 LCD TV가 디자인경영의 결과물이다.
이건희 회장 없는 삼성은…삼성전자가 소니 등 일본기업을 제치고 전자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2006년에도 그는 예의 위기론을 꺼내 들었다. 그 해 9월 전자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창조경영’을 화두로 제시하면서 변화와 혁신을 강조했다. 당시 그는 “잘 나간다고 자만하지 말고 항상 위기의식을 갖고 변화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 한다”며 “과거에 해오던 대로 하거나 남의 것을 베껴서는 절대로 독자성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원점에서 보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창조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샌드위치론도 있다. 2007년 1월 이 회장은 “우리 경제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여 성장 잠재력이 떨어져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이룩한 성장에 안주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 얘기였다. 2010년 3월 경영복귀 직후에는 “지금이 진짜 위기다. 토요타 같은 글로벌 일류기업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2009년 삼성전자는 휴대폰 시장에서 애플이란 막강한 ‘적수’를 만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삼성에 이 회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2008년 이런 가정은 실제가 됐다. 그 해 4월 22일 이 회장은 경영일선 퇴진을 발표했다. 삼성 비자금 특검수사 결과가 나오자 그는 법적·도의적 책임을 지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도 해체하고 특검 과정에서 불거진 차명재산도 ‘유익한 곳’에 쓰겠다고 약속했다.
그 때부터 삼성은 2년간 계열사 독립경영 체제로 운영됐다. ‘선장 없는 경영’이 시험무대에 오른 셈이다. 독립경영에 나선 삼성은 지지부진했다.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 실적에서 당장 드러났다. 2007년 삼성전자는 매출 98조원, 영업이익 9조원을 기록했다. 2008년 매출은 121조원으로 급증했으나 영업이익은 6조원으로 추락했다. 다행히 2009년엔 매출 139조원, 영업이익 11조원으로 실적이 다시 반등했지만 그룹 차원의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게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무엇보다 그룹 전체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게 문제였다. 반도체는 수익 악화를 감수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치킨 게임’을 벌였지만, 승자독식의 과실을 따내지는 못했다. 도시바와 엘피다 등 일본 기업들의 반격도 점점 거세졌다. 휴대폰도 세계 2위에 올랐지만 스마트폰이라는 암초를 만났다. 애플이 3년 전 아이폰을 내고 대만 HTC조차 수년 전부터 준비를 해왔지만, 삼성은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했다. 스마트폰이 휴대폰 시장의 대세가 되면서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2000년대 중반까지 효자종목이었던 LCD 분야는 점점 수익성이 약화되고 있었다.

2010년 3월 24일. 삼성그룹은 이 회장의 경영복귀를 전격 발표했다. 이 회장의 경영복귀 일성은 이랬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
당시 이인용 삼성커뮤니케이션팀장은 기자간담회에서 “(리콜로 한 순간에 몰락한) 토요타 문제가 굉장한 충격이었다. 글로벌 톱 기업이 저렇게 흔들리고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것에 사장들이 많은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경영에 복귀한 지 올해로 2년, 삼성은 제대로 방향을 잡았을까. 이 회장이 경영복귀 이후 던진 첫 승부수는 19조원을 투입해 반도체 공장을 증설하라는 것이었다. 일본 기업의 추격을 따돌리고 반도체 분야에서 인텔, MS와 같은 아성을 구축하자는 전략이다. 5대 신수종사업도 발표했다. 태양전지, 자동차용 2차전지, LED(발광다이오드), 바이오·제약, 의료기기 등 5개 분야에 총 23조3000억원을 투자해 2020년까지 매출 50조원을 올리겠다는 그랜드 플랜이다.
애플과의 스마트폰 경쟁은 왜 이 회장이 삼성에 필요한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초창기 스마트폰 시장에서 밀려 좀처럼 주도권을 쥐지 못했던 삼성은 이 회장의 지휘 아래 재작년부터 애플 추격전에 나섰다.

애플과 경쟁에서 진가 발휘그 와중에 애플이 특허소송을 제기하자 삼성 내부에선 맞대응을 해야 하느냐를 두고 이견이 많았다. 애플이 삼성전자 반도체를 가장 많이 구입하는 고객사란 점에서 강경대응은 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애플의 소송제기는) “못이 튀어나오면 때리려는 원리”라며 “애플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우리와 관계없는, 전자회사가 아닌 회사까지도 삼성에 대한 견제가 커지고 있다”고 했다. 결국 삼성은 맞소송으로 대응하면서 스마트폰 시장 주도권을 잡기 위한 총력전을 펼치게 된 계기가 됐다.
느슨해진 조직기강을 다잡는 노력도 시작했다. 지난해 초 삼성전자 서초사옥으로 정기 출근을 시작하면서 경영현안을 직접 챙겼다. 과거 서울 한남동에서 ‘원격 경영’을 하던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조직개편과 인사를 통해 내부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삼성테크윈의 내부비리를 강하게 질책하면서 그룹 감사팀장과 인사팀장을 교체하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총체적인 메스를 든 그의 노력으로 삼성은 과거와 같은 성공방정식을 재정립했다. 그룹 주력계열사인 삼성전자는 지난해 매출 164조원, 영업이익 16조원을 거뒀다. 매출은 사상 최대이고, 영업이익은 2010년 17조원보다 소폭 줄었지만 글로벌 경쟁 격화와 경기 불안을 고려하면 놀랄 만한 실적이라는 게 시장 평가다. 지난해 삼성전자 매출을 달러로 환산하면 1500억달러 규모로 글로벌 IT업계 중 1위다. 사업부문별로 보면 반도체 분야에선 더 이상 적수가 없을 정도로 독주체제를 갖췄다. 스마트폰 분야에서도 애플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10월 “삼성은 아시아의 새로운 기업모델”이라며 현재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늘 도전에 나서는 게 ‘삼성의 힘’이라고 분석했다. 이 회장의 경영복귀가 삼성이 새로운 도전에 나설 힘이었다는 분석이다.
경영자로서 뛰어난 업적을 쌓았지만 이 회장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는 엇갈린다. 경제계를 중심으로는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 기업의 위상을 높였다는 점에서 이 회장에 대해 후한 평가를 준다. 학계에서도 이 회장의 혁신과 창조적인 경영 리더십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이 회장은 늘 ‘닮고 싶은 경영인’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다.
그러나 이 회장을 향한 외부 비판도 많은 게 사실이다. 경영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논란, 재벌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등이 지난 10여년간 이 회장과 삼성의 발목을 잡아왔다. 삼성 비자금 특검은 급기야 ‘삼성공화국’이란 말까지 만들어냈다.
돌이켜보면 삼성의 최대 위기는 이 시기에 집중됐다. 2004년 삼성이 사상 최대 이익을 내고 일본 기업들을 압도하기 시작한 순간, 삼성에 대한 비판도 덩달아 거세진 셈이다. 이 회장은 이를 두고 “국제경쟁이 하도 심해 상품 1등 하는 데만 신경을 썼는데 국내에서 (삼성이) 비대해져 느슨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삼성은 2006년부터 사회공헌과 외부 커뮤니케이션에 주력하면서 비판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삼성과 이 회장에 대한 비판 공세는 좀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연초에 불거진 이른바 재벌빵집 논란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사회양극화가 심각해지면서 재벌체제에 대한 비판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고, 그 비판의 핵심 타깃은 또 다시 삼성이 될 것이란 게 중론이다.
삼성그룹은 이에 따라 올해 전국의 저소득층 가정 중학생을 위한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전략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삼성에 대한 비판의 칼날이 무뎌질 지는 두고 볼 일이란 게 삼성 내부의 생각이다. 이 회장의 고민 역시 깊어질 수 밖에 없는 형국이다.
다시 ‘창업과 수성’으로 되돌아가 보자.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자서전 『호암자전』 제8편 제5장 제목은 ‘창업과 수성’이다. 그 중 한 대목을 소개하면 이렇다.
“내가 삼성을 창업하고 발전시켜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삼성이 나 개인의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주주가 누구이든, 회장과 사장이 누구이든 삼성은 사회적 존재이다. 그 성쇠(盛衰)는 국가, 사회의 성쇠와 직결된다….”
올해로 70세인 이 회장의 고민 또한 아버지인 고 이병철 창업주와 다르지 않을 듯 하다. 취임 후 25년간 삼성을 성공한 글로벌 기업으로 만든 그 앞에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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