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IST] 은세공 장인 리차드 폭스
[SPECIALIST] 은세공 장인 리차드 폭스
“저는 의심할 여지없이 완벽주의자 입니다.”
영국의 은세공 장인 리차드 폭스(Richard Fox·57)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빛은 맑았고 말할 때는 차분한 템포를 유지했다. 섬세하고 안정적인 모습에서 내면의 견고함이 느껴진다. 그의 작품들처럼 말이다. 외유내강 외골수인 그가 자신의 커리어와 영국의 은세공 역사를 친절하게 들려줬다. 그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은세공 작업이 생각보다 많은 곳에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롤스로이스의 맞춤주문 인테리어와 보닛 앞쪽의 심볼, ‘Spirit of Ecstacy’의 세공을 맡고 있다. 29년 째 F1 트로피를 제작하고 있고, 로얄살루트·발렌타인 등 유명 위스키 브랜드의 스페셜 에디션 병을 디자인했다. 불가리 홈콜렉션을 위해 만든 촛대들은 현재 런던의 불가리 호텔을 장식한다. 1990년에는 영국 램버스 궁전의 주문으로 존 폴 2세 교황을 위한 성배를 제작하기도 했다. 최고급 퀄리티의 은세공이 필요한 곳에는 리차드 폭스가 있었다.
혼자 조용히 갈 길 갔다폭스는 “내가 은세공에 발 디딘 것은 우연”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어보면 운명에 더 가깝다. 폭스와 은세공의 조우는 그가 17세 때 이뤄졌다. 당시 기술전문대학으로 진학하길 원했던 그는 예비진학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이 때 우연히 주얼리 과목을 선택했다. 재미있는 점은 2000명의 학생 중 유일하게 이 과목을 골랐다는 거다. 덕분에 일대일 강습을 받는 혜택을 누렸다. “은세공이 제 인생을 사로잡았어요. 사랑에 빠졌죠. 재료들을 다루는 작업이 너무 좋았어요.”
그는 미들섹스 폴리테크닉 대학에 진학해 3D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리고 저명한 영국왕립예술학교에 진학해 은·금세공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혼자였다. 같은 전공에 총 3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 중 유일하게 과정을 수료해 졸업장을 받은 것이다.
외로운 학교생활이었지만 졸업 후 탄탄대로를 달렸다. 작품을 판 돈으로 워크샵을 만들어 조금씩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모교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1982년엔 ‘Fox Silver’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차렸다. 드디어 1984년 ‘큰 건수’ 두 개가 들어온다. 그 중 하나가 F1 트로피 제작이었다. 그때 맺은 F1의 창립자 버니 에클레스톤(Bernie Ecclestone) 회장과의 인연이 이어져 지금까지 F1 트로피를 만들고 있다. 폭스는 F1, 월드랠리(World Rally), 나스카(NASCAR) 등을 위해 지금까지 600여 개의 트로피를 제작했다. 2010년 F1 코리아 그랑프리에서도 폭스가 만든 트로피를 수여했다.
또 하나는 골드스미스 컴퍼니(Goldsmith Company)를 위한 촛대 제작이었다. 이로 인해 폭스의 작품은 골드스미스 컬렉션에 들어가 있다. 골드스미스 컴퍼니는 14세기에 왕실의 공식허가를 받은 동업조합(Livery Company)이다. 런던 안에서 금·은세공 장인들의 장사를 허가하는 상인길드로 그 역사가 깊다.
그는 옷깃에 꽂힌 금으로 된 작은 표범머리 모양의 핀을 가리키며 “이게 골드스미스 컴퍼니의 멤버라는 표시”라고 알려줬다. 그는 1989년 프리맨(Freeman), 2005년 리버리맨(Liveryman), 2011년엔 30명에 불과한 코트멤버(Member of Court)로 임명됐다. 중세시대의 계급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폭스는 자신이 영국의 전통과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골드스미스 컴퍼니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을 들려줬다.
“약 700년 전 영국 왕실은 위조된 동전들 때문에 골치가 아팠어요. 이를 막기 위해 골드스미스 컴퍼니의 장인들을 모아 동전들의 진위 여부를 가리게 했죠. 또 진짜 동전에는 품질 보증 마크(hallmark)를 찍게 했어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형식의 소비자 보호입니다.”
디자인 프로세스가 어떠냐고 묻자, 갑자기 멈칫 하더니 “언제나 고통스럽죠”라고 말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끈기 있는 자세를 강조했다.
“먼저 디자인할 대상을 완전하게 리서치해요. 이 과정이 절대적으로 중요하죠. 정보가 다 모이면 컨셉트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요. 컴퓨터도 있지만 스케치를 할 땐 종이와 연필을 선호해요. 긴 시간 동안 머리를 싸매고 디자인 구상을 하다 보면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요. 하지만 이 영감은 미리 리서치를 해두었기 때문에 떠오르는 거예요.”
부인은 주얼리 디자이너폭스는 현재 주얼리 디자이너인 부인과 함께 런던 근교의 서리(Surrey)에 거주하며 일하고 있다. 부인과 만나게 된 일화를 얘기했다.
“은세공인을 찾고 있던 지금의 부인에게 면접을 보러 갔다가 눈이 맞았죠. 그녀는 직원뿐 아니라 남편도 얻은 셈이에요. 저는 면접에 통과했고요(웃음).”
현재 폭스와 부인은 디자이너 부부로서 업계 사람들과 서로 도우며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다. 서리에 위치한 그들의 스튜디오에서 다른 장인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학생들도 견학할 수 있게 했다.
“저의 학창시절 은세공 업계는 매우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웠어요. 이런 식으로는 아무에게도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죠. 사람들과 은세공에 대해 최대한 공유할수록 이 산업이 더 확장되지 않겠어요?”
폭스는 은세공의 가장 큰 변화로 기술의 발전을 꼽았다. 컴퓨터로 인해 원형 제작이 쉬워졌고 레이저 용접 같은 기술도 실현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진보적, 수평적 사고를 신봉한다”며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미술관에 전시 중이다. ‘Fit for Purpose’라는 이름의 그룹전시로, 영국의 근현대 은세공 작가들의 실용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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