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 이제 무엇을 꿈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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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이제 일반시민으로 돌아갔다. 20년 만에 처음이라 별 재미난 생각도 든다. 차를 직접 몰까? 동네 마트에 가서 식료품을 살까? 동네 영화관 앞에 줄을 설까? 물론 전직 국무장관으로서 계속 경호를 받고 쇼핑 심부름을 시킬 만한 재력도 충분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제 그녀는 진짜 오랜만에 보통사람이 됐다.
하지만 분명 힐러리 클린턴은 보통사람이 아니다. 지난 20년 동안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 받는 여성이었다. 지난해 12월 갤럽 조사에서 클린턴은 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로 꼽혔다. 물론 모두가 클린턴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들끓던 증오도 세월이 흐르면서 힐러리 전설의 일부를 장식했다. 클린턴을 둘러싼 논란은 언제나 미국인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잣대로 귀결됐다.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속으론 그 점을 인정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일지 모른다. 나중에 판명되겠지만 이번 은퇴가 영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퍼스트레이디를 거쳐 상원의원, 국무장관까지 지낸 미국 여성이 어디 있는가? 클린턴 외에는 없다. 그처럼 고위직을 두루 역임하며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한 남성도 소수에 불과하다.
직무 외에도 클린턴은 여성으로서 장벽을 허무는 역할도 했다. 어쩌면 그 일이 훨씬 어려웠을지 모른다. 클린턴은 보수적인 자영업자의 딸로 태어나 고교시절 공화당 보수파 대통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지지했고, 대학 시절을 보내면서 민주당으로 돌아섰다. 운명은 결국 그녀를 해방과 오만함, 문화적 변화의 상징으로 선택했다. 클린턴은 그 모든 짐을 오랫동안 짊어져야 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욕하고 비난했고 갖가지 혐의를 씌웠다(범죄 행위와 테러리스트 동조 포함). 게다가 일상적인 성차별도 숱하게 당했다. 클린턴은 그래도 계속 웃으며 미끼를 물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클린턴 외에 미국 여성 중 어느 누가 그 모든 부담을 안아야 했던가?
대표적인 인물이 엘리너 루스벨트다. 프린스턴대 역사학 교수 숀 윌렌츠는 클린턴을 칭찬하면서도 “엘리너 루스벨트가 없었다면 힐러리 클린턴이 그러기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19세기의 여성 선구자들도 거론했다. 엘리자베스 스탠턴, 수전 B 앤서니, 루크리셔 모트, 프랜시스 윌러드같은 여권 운동가들이다. 그러나 윌렌츠는 그들은 실질적 권력을 가진 적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공직은 없었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현대 여성도 있다. 좌익에선 글로리아 스타이넘, 우익에선 필리스 쉴라플라이가 대표적이다. 이런 여성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미국 사회를 바꿔 놓았다. 그러나 “클린턴은 미국의 새로운 이념적 또는 지식적인 방향이나 변혁적 비전을 제시하진 못했다”고 뉴욕대 역사학 교수 킴 필립스-페인이 말했다.
옳은 지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클린턴은 그와 달리 여성이 남성과 똑같거나 어쩌면 더 강한 도덕적 힘으로 공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엘리너 루스벨트도 남편에게 압력을 넣거나 독자적인 대중 영향력을 통해 그렇게 했다. 많은 사람이 잊었지만 엘리너는 백악관을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그 역할을 계속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채택을 주도했고, 1950년대와 60년대 초 민주당 개혁파를 이끌었다.
컬럼비아대 역사학 교수 앨런 브링클리는 엘리너를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미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은 클린턴인 듯하다. 그녀는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백악관에서 2인자였고, 부시 대통령 시절 가장 영향력이 큰 상원의원 중 한 명이었으며, 존 포스터 덜레스 이후 가장 막강한 국무장관 중 한 명이었다.”
대다수 미국인은 처음엔 힐러리 클린턴을 잘 몰랐다. 1991년 빌 클린턴과 관련해 해럴드 이키스를 인터뷰했을 때였다. 당시 이키스는 클린턴 부부를 워싱턴 정계에 입문시킨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빌 클린턴을 한참 칭찬한 뒤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 힐러리를 만나보면 더 감탄할 거요. 어떤 면에선 그녀가 더 대단해요.”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수첩에 ‘힐러리’라고 적을 때 ‘Hilary’라고 썼던 기억이 난다(‘Hillary’가 맞다).
물론 모두가 이키스의 열렬한 칭찬을 수용하진 않았다. 또 클린턴은 실수도 많이 했다. 너무 강하다는 인상도 주었다. 빌 클린턴은 1992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저에게 표를 주시면 한 개 값으로 둘을 가질 수 있습니다(If you vote for me, you get two for the price of one)”라고 말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대통령후보인 남편의 성추문 전력과 관련해 CBS 대담프로 ‘60분’에서 “난 태미 와이넷의 노래처럼 내 남자 곁을 다소곳이 지키는 여자가 아니다”고 말했다. 와이넷의 히트곡 ‘Stand by Your Man’은 남편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해도 보듬어 주며 그 곁을 지키라는 내용이다. 도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미국인들은 깜짝 놀랐다.
바로 그 시점에 ‘여성이 자기 본분을 알았던 시절’로 미국을 되돌리려는 선동가들이 나타났다. 보수 논객 러시 림보에겐 그때까지 공격할 수 있는 민주당 대통령이 없었다. 그러나 1993년 클린턴 부부가 정권을 잡자 림보를 비롯한 여러 모방자들은 욕설을 쏟아낼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 히스테리는 주류 언론까지 번졌다.
빌 새파이어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클린턴 부부를 향해 근거 없는 비난을 퍼부으며 힐러리를 “타고난 거짓말쟁이(congenital liar)”라고 불렀다. 시사지 뉴리퍼블릭은 그녀가 주도한 건강보험개혁 법안을 두고 터무니없는 비판 기사를 실었다. 힐러리 클린턴은 무방비 상태였다. 건강보험개혁의 실패는 큰 충격이었다.
그러다가 클린턴은 서서히 독자적인 ‘독립선언서’를 쓰기 시작했다. 1995년 베이징 유엔 여성회의 연설[“인권이 여권이고 여권이 바로 인권 그 자체입니다(human rights are women’s rights, and women’s rights are human rights once and for all)”]이 그 신호탄이었다.
현실 세계에 실질적으로 개입하는 퍼스트레이디로서 입지를 다진 계기였다. 그러나 건강보험개혁에 실패한 뒤로 클린턴 행정부는 알맹이 있는 정책 입안을 그녀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째 임기를 거의 따분하게 보냈다. 그러다가 1998년 1월 21일 남편 빌 클린턴의 모니카 르윈스키 성추문이 터졌다.
지금 그 일을 다시 구체적으로 돌이킬 생각은 없다. 중요한 점은 클린턴이 그 힘든 시기를 꿋꿋이 잘 버텨냈다는 사실이다. 논객들은 마치 자신의 일인 듯 이혼을 요구했다. 워싱턴 주류는 빌을 맹비난하며 힐러리를 비웃었다. 다른 여성이었다면 현실도피를 택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때(상원이 남편의 탄핵안을 부결시킨 날이었다) 그녀는 이키스의 도움으로 독자적인 진로를 모색했다.
2000년 힐러리 클린턴은 뉴욕주에서 상원의원에 출마했다. 처음엔 어설픈 후보였다. 패트 모이니핸 상원의원의 농장에 그와 함께 후보로 등장한 첫날 그녀는 몹시 초조한 모습이었다.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타블로이드판 신문 뉴욕포스트는 그녀를 하차시키려고 애썼다. 클린턴은 공화당 후보인 루디 줄리아니 뉴욕 시장을 두려워했다. 그는 클린턴을 조롱하며 온갖 터무니없는 좌익운동에 그녀를 연관시켰지만 클린턴은 그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못했다.
그러나 뉴욕시에서 벗어나 뉴욕주 북부에 가서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지됐다. 그때도 클린턴은 평범한 유세를 했지만 그녀를 만나는 여성들과 그 딸들의 눈빛이 심상찮았다. 그들은 클린턴을 만나려고 몇 시간 동안 기다렸고, 만나서는 어쩔 줄 모르고 압도당했다. 클린턴은 모두를 참을성 있게 대했다. 몇 시간 동안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사진 포즈를 취해주고 서명을 해주었다.
힐러리의 오랜 지지자인 니라 탠던 미국진보센터(CAP)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가장 특이한 점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갖는 유대감이다. 기이할 정도다.” 과장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뉴욕주 북부 유세를 취재한 기자들과 나도 그런 유대감을 느꼈다.
아무런 기반이 없던 뉴욕주에서 클린턴은 완승을 거뒀다. 그 선거가 그녀의 성공을 이해하는 열쇠다. 바로 그 ‘기이한 유대감’이 강하게 표출됐을 뿐 아니라 클린턴은 그 선거 운동을 통해 진정한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클린턴은 막강한 위원회를 맡거나 주요법안을 상정할 정도로 상원에 오래 머물진 않았다. 그렇지만 뉴욕주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공화당은 다음 선거에서 클린턴을 격파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2006년이 되자 그녀에 맞서 출마하려는 진지한 정치인이 아무도 없었다. 클린턴은 쉽게 재선에 성공했다.
그런 클린턴이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선 참패를 당했다. 그때 처음 클린턴은 아주 그녀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우선 준비가 부족했다. 선거광고 비디오에서 그녀는 소파에 앉아 “승리하려고 출마했다(I’m in it to win it)”고 말했다. 오만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2000년 상원의원 첫 출마 때와 정반대였다. 만약 클린턴이 다시 대권을 원한다면 그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클린턴이 경선에서 패하자 지지자들은 오바마를 거부하며 당의 결속을 비웃었지만 클린턴은 늘 그렇듯이 올바르고 책임 있게 행동했다. 오바마를 적극 지원하며 덴버 전당대회에서 단결을 호소했다. “우리는 한 팀입니다. 어느 캠프에 있었든 방관자가 돼선 안 됩니다.” 클린턴은 마음만 먹으면 본선에서 오바마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자존심을 죽였다. 부시 시절 민주당 상원의원을 지내면서 백악관 탈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오바마는 클린턴을 국무장관에 기용했다. 냉소주의자들이 추측했듯이 클린턴 캠프가 앞으로 4년 동안 교묘하게 오바마를 약화시키려 할 가능성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런 면도 배제할 순 없지만 오바마는 클린턴에게서 도움을 훨씬 많이 받았다.
퍼스트레이디와 상원의원 시절 클린턴은 내면의 힘으로 좌절과 논란을 극복했다. 그녀를 역경 속에서 구해준 건 굳은 신념과 현명함이었다. 세계적인 혼돈의 시기에 미국 국무장관직을 수행하는 데는 바로 그런 자질이 효과적인 도구가 됐다.
동시에 새로운 현상도 나타났다. 퍼스트레이디도, 햇병아리 상원의원도 아닌 외교수장으로서 클린턴은 권위 있는 지도자로 떠올랐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첫 2년 동안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을 지낸 앤 마리 슬로터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클린턴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21세기 들어 외교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새로운 외교는 국가 간만이 아니라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이뤄진다는 사실을 간파한 첫 국무장관이었다.”
오늘날 외교는 조지 마셜이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했던 식으로 수행될 수 없다. 국가도 문제도 과거보다 훨씬 많아졌고, 개도국 세계에서는 너무도 많은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며 과거와 달리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클린턴이 국무장관을 맡은 동안 세계를 뒤흔든 격동을 보라.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 미국이 치르는 전쟁, 극적인 오사마 빈 라덴 급습, 아랍의 봄과 그에 뒤따른 혼돈, 이란과 서방의 대치, 중국 관계에서 일어난 여러 위기, 지속되는 테러 위협 등. 이런 일은 과거처럼 4개 강대국 수반이 파리의 거대한 탁자에 둘러앉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난 1월 31일 클린턴은 미 외교협회(CFR) 고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트루먼과 애치슨은 고전 기하학과 말끔한 선으로 파르테논 신전을 지었습니다. … 그러나 지금 같은 세계에선 새로운 건축이 필요합니다. 고대 그리스 형식주의보다는 프랭크 게리 같은 건축이 필요합니다.”
리비아 사태를 예로 들어 보자. 리비아 개입은 대다수 미국인에게 대단한 성과로 간주되지 않지만 이런 다극화 세계에서 외교와 개입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좋은 본보기가 된다. 이웃나라들의 지지를 업고 신속하게 군사적으로 개입한 뒤 곧바로 빠져나와 될수록 적은 발자국을 남기는 전술이다. 클린턴은 공들여 그 방식을 고안했고, 유엔 안보리에서 러시아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리비아의 미래를 알 순 없지만 일단 무아마르 카다피는 사라졌고 수많은 인명을 구했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브루스 라이델 연구원은 클린턴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2009년 조 바이든 부통령과 행정부 관리들이 아프가니스탄 미군증파를 반대했지만 클린턴은 지지했다. 라이델은 클린턴의 지지가 미군증파 성공에 “결정적”이었다고 추정했다. 또 클린턴은 파키스탄 문제도 냉철한 시각으로 봤다. 클린턴은 파키스탄 특사였던 리처드 홀브룩을 스승으로 삼았다. 그러나 라이델에 따르면 시간이 흐르면서 클린턴은 “스승을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렀다.
라이델은 빈 라덴 급습에서도 클린턴이 주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파키스탄에 빈 라덴의 소재를 알리는 일은 국무부의 고유 임무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통보하면 파키스탄이 빈 라덴에게 알려 도피할 시간을 줄 수 있었다. “클린턴은 통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라이델이 말했다. 외교 결례이긴 하지만 “관계자 대다수가 동의할 만한” 판단이었다.
그 외에도 업적이 많다. 클린턴은 미얀마를 설득해 군사독재 탈피를 도왔다. 클린턴이 아웅산 수치 여사를 두 차례나 만나 그녀가 미얀마 미래에서 중심 역할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했다. 또 ‘아시아로 중심 이동(pivot to Asia)’ 정책을 통해 태평양 연안국들이 중국을 견제하도록 하고, 태평양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역할을 확고히 다졌다.
클린턴은 글로벌 이니셔티브도 추진했다. 우선 국무부의 소셜미디어(SNS) 활용을 크게 늘렸다(미 국무부는 현재 트위터에서 11개 언어로 브리핑을 한다). 어쩌면 ‘인터넷 자유’ 프로젝트가 가장 오래 남는 업적이 될지 모른다. 세계 전역에서 첨단기술과 개방성을 증진하고 검열과 싸우는 프로그램을 만드려는 계획이다. 앤 마리 슬로터는 2010년 초 그 문제를 언급한 클린턴 연설을 지적했다. 당시 클린턴은 세계 분쟁지역에서 용감한 인터넷 저널리스트 6명을 워싱턴에 초청해 압제를 극복하는 길은 IT 기술뿐이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클린턴의 영향력은 스스로 오랫동안 열정을 가졌던 분야에서 가장 크게 발휘됐다. 세계 여성이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이다. 1995년 베이징 유엔 여성대회에서 시작한 그 운동을 국무부에서도 적극 추진했다. 오바마 대통령을 설득해 세계여성문제 전권대사직을 신설했고, 백악관 시절 자신을 보좌했던 멜란 버비어에게 그 직책을 맡겼다.
클린턴과 버비어는 다양한 문화권을 대상으로 여성의 경제적 역할, 여자아이들의 교육, 여성 건강, 가정 폭력, 전쟁과 분쟁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문제에서 사고방식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클린턴은 2011년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권 확보는 21세기의 미완성 사업이다. 동등한 인간으로서 권리를 빼앗기고, 억압 받고, 폭행당하며, 모욕 받고, 비하되는 여성이 세계에 너무도 많다.”
버비어는 2011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예멘의 타와쿨 카르만이 클린턴과 나눈 대화를 돌이켰다. “타와쿨은 ‘클린턴 여사님, 우리나라 여성들은 여태껏 잠만 잤습니다. 이제 그들이 깨어나 다시는 잠들지 않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클린턴은 CFR 고별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먼 나라 수도에 ‘미국’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힌 비행기가 착륙하면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나라를 대표하는 무한한 영광과 막중한 책임을 느낍니다.” 클린턴은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나라(the world’s indispensable nation)’가 지닌 임무를 수많은 방식으로 확대하고 변화시켰다.
클린턴은 국무장관 임기 동안 정치판에서 발을 뺄 수 있었다. 국무장관에 임명되지 않았다면 여전히 상원에서 사사건건 어느 쪽으로든 입장을 취하면서 편협한 이념에 사로잡힌 의원들에게 인내심을 잃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국무장관으로서 그런 일은 멀리할 수 있었다. 매일 워싱턴 정가의 ‘서커스 단장’이 될 필요도 없었다. 과거 수십 가지 머리 스타일로 유명했지만 이제는 머리 손질에 5분 이상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 대학 시절처럼 안경도 다시 썼다.
이제 그녀는 책을 쓰려고 앉았다. 그 외 어떤 다른 일을 할까? 아무도 모른다. 측근에 따르면 2016년 대선 출마엔 확신이 없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 생각이 있다면 민주당 후보 지명은 따 놓은 당상일지 모른다. 경제가 좋아지고 공화당이 여전히 지리멸렬 상태라면 본선에서도 승산이 크다.
그런 일이 없다고 해도 클린턴은 현시대에 가장 주목할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무대에 올랐던 지난 20년 동안 미국은 처음엔 여성이 그처럼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의구심을 가졌지만 결국 그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단한 문화적 변화다. 한 세대 전만해도 당연시되던 장벽이 이제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지금은 수많은 여성이 최고위직을 목표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 변화에 힐러리 클린턴보다 더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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