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째라 채무자’ 급증 우려
‘배째라 채무자’ 급증 우려
국민행복기금의 윤곽이 드러났다.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 국민행복기금은 빚 갚을 능력이 없는 개인 채무자의 빚을 정부가 대신 갚아주는 것이다. 금융위원회와 금융업계에 따르면, 이 기금은 금융회사의 연체 채권을 정부가 적정 가격에 매입해 원금의 50~70%를 탕감하는 게 핵심이다.
역대 정부에서도 한마음금융(자산관리공사)·프리워크아웃(신용회복위원회)·개인워크아웃(신용회복위원회)·개인회생·개인파산(법원) 등 채무조정 정책이 있었지만, 이번 국민행복기금은 가장 포괄적이고 파격적인 부채 탕감 정책이라는 평이 나온다.
첨예한 관심사였던 채무조정 대상도 사실상 확정됐다. 금융위는 “기금 지원 대상은 올 2월 말 기준으로 6개월 이상 연체 채무자”라고 밝혔다. 또한 “고금리 대출을 저금리로 전환해 주는 혜택은 2월 기준으로 이전 6개월 동안 성실히 상환한 사람만 받을 수 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기금 운영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채무자를 일괄 구제하기로 했다. 금융위가 3월 14일 각 금융업 협회에 전달한 ‘국민행복기금 신용회복지원 협약’ 초안에 따르면, 정부는 1억원 이하 6개월 이상 연체 채무자가 개별적으로 신청하지 않아도 채무를 탕감해 줄 방침이다. 다만, 개별적으로 신청할 경우에는 비신청자보다 높은 부채 탕감율(감면율)을 적용 받는다. 재산이 채무보다 많거나 법원이나 신용회복위원회가 시행하는 기존 채무조정 프로그램을 신청한 채무자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금융위 관계자는 “정부가 금융회사에서 사들이는 연채 채권의 매입 가격은 협의 중”이라며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고 밝혔다. 금융업계에서는 은행 연체 채권은 8~9%, 보험·캐피탈은 7% 안팎, 대부업체는 5%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한다. 가령 1000만원짜리 은행 연체 채권을 기금이 80만~90만원에 사들여 채무자의 빚 50%(기초수급자는 70%)를 탕감해 준다는 것이다.
수혜 대상 추정 40만~200만명 고무줄기금 출범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논란은 끊이질 않는다. 개인 빚을 정부가 갚아주면 도적적 해이를 부를 수 있다는 주장부터 이 기금이 사실상 금융권의 부실채권을 정부가 해결해 주는 ‘은행행복기금’이라는 말도 나온다. 무엇보다 역차별 논란이 거세다.
국민행복기금의 혜택을 받는 대상자는 2월 기준으로 6개월 이상 원리금 상환이 연체된 1억원 이하 채무자다. 연체 기간이 5개월 이하거나 빚이 1억원이 넘는 채무자는 대상에서 제외된다. 또한 빚을 성실히 갚아온 채무자는 상대적으로 억울할 수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모든 채무자를 껴안고 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수혜 대상자 계산도 복잡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씽크탱크로 새 정부에서 5명의 장관을 배출한 국가미래연구원의 김광두 원장은 “어차피 빚 갚을 능력이 없는 322만명 금융채무 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의 빚을 탕감해 재기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하나금융연구소에 따르면, 2월 15일 기준으로 제도금융권의 6개월 이상 연체자는 약 94만2000명이다. 대부업체에서 연리 20% 이상으로 돈을 빌린 채무자도 지원 대상이다. 금융권에서는 행복기금 수혜자가 대략 150만~200만명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계산도 있다.
민주통합당 김기식 의원이 전국은행연합회로부터 제출 받은 ‘금융채무 불이행자 등록현황’에 따르면, 2003년 1월 말 기준 금융채무 불이행자는 123만9188명이다. 채무 금액은 157조8374억원이다. 우리나라 가계부채의 16%다. 가계부채 부실의 뇌관으로 불리는 다중 채무자 실태도 심각하다. 등록된 채무 불이행자 중 2개 이상 금융회사에 연체돼 있는 다중 채무자는 55만 8093명, 채무액은 90조7500억원이다.
김 의원은 “국민행복기금 대상자가 될 가능성이 큰 6개월 이상 장기 연체자는 112만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들의 채무금액은 136조원이다. 일각에서는 수혜자가 40만~50만명에 그칠 것으로 본다. 은행·보험·카드·캐피탈 등 제도권 금융회사가 보유한 6개월 이상 연체 채권 중 중복되는 다중 채무자를 감안하면 약 20만명이고, 대부업체 등 비제도권 금융사 연체자 중 제도권 금융사와 중복되는 연체자를 고려해 계산한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정부는 이번 채무조정은 일회성으로 종료된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하지만, 가계부채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버티면 정부가 갚아 준다’는 나쁜 선례를 남긴다는 점이 심각하다.
국내 가계부채는 1000조원에 육박한다. 앞으로 다중·연체 채무자는 더 늘 것이 뻔하다. 통계청 기준으로 국내 저소득층은 412만 가구다. 이 중 38%인 145만 가구가 금융권에 빚이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저소득층 가구의 금융대출 잔액은 평균 7229만원으로 가처분 소득 대비 8.3배에 달한다.
저소득층 금융대출 가구 중 자영업자의 월 가처분 소득은 평균 58만원인데, 매달 갚아야 할 원리금은 145만원이다. 또한 저소득층 대출 가구 중 32%는 최근 1년간 연체 경험이 있다. 이들이 대거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 이준협 연구위원은 “저소득층의 연체 비율이 매우 높은 수준이며 비연체 가구의 채무상환 능력도 매우 취약해 연체 가구가 더욱 증가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행복기금은 수혜 대상이 신용대출자에 한정돼 있다. 국내 다중 채무자 중 상당수는 담보 대출자다. 이들이 더 심각하다. 지난해 11월 우리은행이 원리금을 한 달 이상 상환하지 못한 고객 550명의 등기부등본을 확인했더니, 97.6%가 은행에 담보로 맡긴 주택을 제 2금융권에도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린 다중 채무자였다. 가계부채 문제 중 가장 심각한 다중 채무자 실태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1월 말 현재 국내 가계의 대출 연체율은 0.99%로 전달에 비해 0.18%포인트 높아졌다.
특히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은 0.94%로 전월 대비 0.2%나 증가했고, 주택 집단대출 연체율은 1.98%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이 올 1월 발표한 ‘금융기관 대출행태 서베이’결과에 따르면, 수도권 주택가격 하락과 경기 부진 영향으로 다중 채무자 등 취약계층의 채무 상환 능력은 갈수록 떨어진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가계 신용위험은 카드사태 이후 최고 수준으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매월 4만~5만명 채무 불이행 나오는데…요즘도 매월 평균 4만~5만명의 채무 불이행자가 발생한다. 실제로 지난해 10월엔 5만 4400명, 12월에는 4만900명, 올 1월에는 4만1700명의 신규 채무 불이행자가 등록됐다. 김기식 의원은 “정부가 올 2월 기준으로 이전 6개월 이상 장기 연체자로 대상을 한정했는데, 기존 연체자와 새로 발생하는 연체자 사이의 차별을 낳게 되고, 이들이 결국 추가적인 조치를 강하게 요구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 민간경제연구소 연구원은 “때만 되면 정부에 부채 탕감을 요구하는 노골적인 시위를 자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채 탕감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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