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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골료의 회심

베르골료의 회심

그는 여러 모로 그녀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훗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될 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성당의 장엄함과는 전혀 다른 초라한 미사를 집전하려고 왔다. 그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빈민가를 찾았다. 아르헨티나인들이 ‘고통의 마을(villas miserias)’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구불구불하고 혼란스러운 골목길을 걸어서 그곳에 도착했다. 수도관과 전선이 뒤엉켜 있고 비가 오면 악취가 진동하는 하수로가 이어지는 길이다. 울퉁불퉁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적갈색 콘크리트벽돌 집들 사이에서 그는 중년의 여성과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비참한 빈민가의 삶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유럽과 미국으로 밀수되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유층에게 팔리는 코카인을 만들고 남은 싸구려 부산물인 ‘파코’를 파는 갱들이 공포로 장악한 곳이다. 그 찌꺼기를 등유, 쥐약, 또는 잘게 부순 유리와 섞어 빈민가 사람들에게 1회분에 1달러에 판매한다. 중독성이 너무도 강해 어느 날 공짜로 하나 얻어 흡입하면 잠시 황홀경을 맛본 뒤 계속 원하게 된다. 편집증과 환각도 동반한다. 할 일이 없어 그냥 배회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밀매업자들의 표적이다.

그 여인은 추기경인 그를 바라다보며 아들이 미사에 나가지 않는다며 용서를 빌었다. 나중에 ‘빈자들의 성자(the great saint of the poor)’라는 뜻을 가진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될 그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의 세계엔 그녀밖에 없는 듯했다. “하지만 착한 아이죠?” 그가 물었다. “그럼요. 착한 아이죠, 호르헤 신부님.” 그녀가 추기경이라는 경칭을 쓰지 않고 대답했다. 그가 말했다. “무엇보다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교리보다 사람이 우선이다
아르헨티나 추기경 시절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빈민촌의 성당을 찾아가 마약중독자들의 발을 씻어준 뒤 입을 맞추고 있다(2008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 초 2주 동안 임기 중 처음으로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소집했다. 지난 30년 이상 그런 회의가 없었다. 교황은 그 회의에서 천주교 지도자들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 빈민가에서 만난 그 어머니에게 자신이 보여준 것과 같은 접근법을 채택하도록 설득하려고 했다. 지난 30년 동안 그의 목회가 추구한 이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개인의 보살핌이 교리에 우선한다는 믿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 후 처음 발표한 권고문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현실이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Realities are greater than ideas)”고 강조했다. 자신의 임기 중에 최우선 과제가 무엇인지 선언한 글이다.

세계주교대의원회에서 천주교 지도자의 절반 이상이 신임 교황의 노선에 따라 ‘변화’를 지지했다. 동성애와 이혼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말한다. 그러나 소수의 보수파 반발로 그런 변화 노선이 3분의 2 과반수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천주교회 전체를 자신의 새로운 포용적 접근법으로 끌어안으려면 아직 할 일이 많다는 뜻이다.

천주교의 영혼을 구하려는 투쟁을 위해 그가 선택한 주제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주교 250명, 그리고 직접 선택한 신학자, 법률가, 일반인들이 참석한 그 회의에서 그가 논의할 만한 시급한 문제는 숱했다.

기능 장애에 걸린 교황청 관료체제의 개혁. 지난 20년 동안 가톨릭계를 괴롭힌 아동성학대 문제. 비밀주의에 빠진 바티칸 은행의 개혁 등.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보다도 모든 신도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주제를 선택했다. 바로 ‘가족과 가정’이었다. 신도 중 다수가 피임, 혼전 성행위, 동거, 이혼, 동성애에 관해 교회의 공식 지침을 무시하는 이유를 그는 대담하게 다뤘다.
 권위적 반동주의
어린 마리오 호르헤 베르골료 (가운데)와 부모.
그러나 19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하층 거주지인 플로레스에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에겐 가정의 개념이 그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지만 파스타를 먹으며 이탈리아의 문화와 신앙 전통에서 성장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6년 전 이탈리아 서북부 도시 피에몬테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민했다. 그들은 무솔리니의 독재와 싸우다가 탈출했다.

호르헤는 5남매 중 장남이었다. 근처에 사는 할머니는 어머니의 수고를 덜어주려고 호르헤를 매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조부모는 집에서 피에몬테 방언을 사용했다. 호르헤는 자연스럽게 그 언어를 배웠다. 그래서 그는 스페인어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어도 유창하다. 그의 집에는 자동차가 없었고 휴가 여행을 떠날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집안은 늘 친척들로 붐볐고 요리와 오페라, 웃음과 사랑이 넘쳤다.

가족이 호르헤에게 남긴 주된 유산은 신앙이었다. 할머니는 그에게 성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묵주 기도를 가르쳤다. 그의 가족은 매일 저녁 함께 기도했다. 함께 기도하고, 행진하고, 성지를 순례하는 농민의 종교였다. 지금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보통사람들의 단순한 신앙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가족이란 반드시 한마음인 건 아니다. 호르헤는 의학을 공부한다고 해놓고는 신학을 택했다.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 진노했다. 호르헤는 어머니에게 이런 궤변을 늘어놓았다. 나중에 그가 들어간 예수회(Jesuit)가 흔히 그러듯이 결의법 (casuistry, 구체적인 사건에 일반적・추상적 원리를 적용한다)을 사용했다. “전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전 의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다만 영혼의 의학이죠.” 어머니는 너무도 화가 나 3년 뒤 그가 19세에 신학교에 들어갈 때 혼자 보냈다. 어머니는 수년이 지난 뒤에야 장남이 성직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호르헤에겐 가족의 개념이 예수회를 포용하는 것까지 확대됐다. 예수회는 16세기 이냐시오 로욜라가 창설했다(그는 군인으로 1521년 팜플로나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뒤 회복을 위해 병상에 누워 치료받는 동안 여러 종교서적을 탐독하면서 깊은 회심을 했다). 호르헤는 신학교에서 예수회 신부들로부터 철학과 신학을 배운 뒤 예수회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예수회는 자신들을 ‘행동하는 묵상가들(contemplatives in action)’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가족 안에는 사랑과 보살핌만이 아니라 긴장과 경쟁도 있다. 아르헨티나의 예수회는 1960년대와 70년대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의 도래로 분열됐다. 해방신학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정치적 권리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예수회 내부의 진보파(아르헨티나 예수회 지도자 리카르도 오파렐 신부 포함)는 그런 신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보수파는 부유층 자녀의 교육이라는 전통적인 임무를 고수하고자 했다. 그들은 오파렐 신부에 관해 교황청에 이의를 제기했고, 아르헨티나의 예수회 지도부는 오파렐을 면직하고 젊은 보수파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를 지도자로 선임했다. 베르골료는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아르헨티나 예수회를 이끌게 됐다.

그러나 베르골료는 예수회 내부의 분열을 치유하기는커녕 미숙한 권위주의로 상황을 악화시켰다. 분열의 골이 너무도 깊어 한 예수회 주교는 교황 선출 전날 베르골료가 교황이 되면 천주교회에 재앙이 일어날 것이라고 비난했다. “우리는 그가 남긴 혼돈을 수습하느라 20년이나 허비했다.”
 내면의 위기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거중인 커플을 포함해 20쌍의 합동결혼식에서 주례를 섰다 (9월 14일).
그가 아르헨티나 예수회의 지도자였던 15년 동안 분열상은 극에 달했다. 드디어 1986년 바티칸의 예수회 지도부는 그를 내쫓았다. 일종의 '유배'였다. 먼저 그는 독일에 갔다. 거기서 가족이라는 주제가 다시 등장했다. 베르골료는 아우크스부르크에 있는 성 베드로 암페를라흐 성당에서 18세기 초 요한 슈미트너가 그린 ‘매듭을 푸는 마리아(Mary Untier of Knots)’라는 성화를 봤다. 17세기 바이에른 귀족의 파경을 구제한 나이 많고 현명한 예수회 신부의 공로를 치하한 그림이었다. 그 귀족과 신부의 결혼을 축하하는 데 사용된 긴 리본에 지어진 매듭을 성모 마리아가 푸는 장면이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성 베드로 암페를라흐 성당에 있는 그림 ‘매듭을 푸는 마리아’. 베르골료는 이 그림을 보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 그림을 보고 베르골료는 자신이 미숙한 리더십으로 아르헨티나 예수회 신자들 사이에 매듭을 더 많이 지어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성급하고 권위주의 적이었으며 그 때문에 극단적 보수주의자로 간주됐다고 나중에 인정했다. 베르골료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갔지만 다시 오지 도시 코르도바로 파견됐다. 국내 ‘유배’인 셈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약 650km 떨어진 코르도바에서 “엄청난 내면적 위기”를 겪었다고 그가 나중에 돌이켰다. 물론 다른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볼 순 없지만 특별하게 부여 받은 임무가 없었기 때문에 베르골료는 이 유배기에 자신의 영혼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베르골료는 언제나 기도를 중시했다. 새벽 4시 반과 5시 사이에 일어나 두 시간 동안 묵상 기도를 한 뒤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게 습관이었다. 한 보좌관은 그 기도 시간에 그가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고 전했다. 또 베르골료는 코르도바에서 예수회 창시자 이냐시오 로욜라가 고안한 ‘영신 수련(spiritual exercises)’도 했다. 자기정당화와 자기기만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자신의 행동과 동기의 핵심에 들어가는 영적 운동을 말한다.

지금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베르골료가 그런 영적 위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이다. 이전과 달리 하느님이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이해하려는 깊은 개심을 거쳤다. 그 결과 리더십의 새로운 모델을 개발할 수 있었다. 듣고, 참여하고, 협력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좌 주교로 임명됐을 땐 과거의 베르골료는 흔적조차 없었다. 그는 권위적인 반동주의자(authoritarian reactionary)에서 급진적인 겸양주의자(figure of radical humility)로 바뀌었다. 그런 그가 지금 바티칸을 뒤엎고 있다.
 충격적인 변신
천주교인과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채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미사’를 드리고 있다(8월 16일).
주교로 귀향했다는 것은 베르골료가 더 큰 가족을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그는 빈민촌을 찾아 가난한 사람들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빈민가의 주교(Bishop of the Slums)’로 알려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주교와 대주교를 맡은 18년 동안 베르골료는 그곳 빈민가 주민 절반 이상을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 신부가 전했다. 그는 골목길을 누비며 주민들과 담소를 나눴고, 아이들과 그들 집의 축복을 빌어주었으며 그들과 함께 마테 차를 마셨다. 기예르모 마르코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베르골료는 가난한 사람을 자신이 도와줄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가르침을 받는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는 일반 사람들보다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과 더 가깝다고 믿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기념품을 전하고 있다(10월 17일).
베르골료의 변신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그의 옛 예수회 제자로 현재 코르도바 가톨릭대 총장인 라파엘 벨라스코 신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베르골료는 과거 너무도 보수적이어서 수 년 뒤 그가 가난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당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그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주교가 되면서 그들을 포용한 게 확실했다. 그의 내면에서 뭔가 달라졌다.”

사실 베르골료 자신만 바뀐 게 아니었다. 다음 20년 동안 베르골료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천주교회의 얼굴을 바꿔 놓았다. 그는 빈민가에서 봉사하는 신부를 네 배로 늘렸고, 교회의 성수만큼이나 수도관의 수압에 관심을 가졌다. 또 자조단체, 협동조합, 정치단체를 지원했다. 20년 전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일이었다.

아르헨티나 예수회에서 해방신학의 천적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카르토네로스(cartoneros, 매일 밤 쓰레기를 뒤져 재활용 물건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빈민들)의 조합 결성을 지원했다. 베르골료의 오랜 대변인을 맡아온 페데리코 월스는 “그는 그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베르골료는 폴란드 출신의 반마르크스주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아래서 해방신학이 교황청과 갈등을 빚게 된 사안이었던 경제적 이념의 대부분을 수용했다. 그는 억압적인 경제 시스템을 ‘죄악을 부르는 구조(structures of sin)’로 규정하는 해방신학의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001년 아르헨티나가 세계 최대의 채무불이행국이 되면서 인구의 거의 절반이 빈곤선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베르골료는 “부의 부당한 배분(unjust distribution of goods)”을 비판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이며 “부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서 부를 훔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베르골료는 해방신학자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정치적 급진주의자가 됐다(네스토로 키르치네르와 뒤이어 그의 아내 크리스티나가 이끈 페론주의 정부의 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천주교회가 신자들을 돌보는 방식에 대한 태도도 바꿔 놓았다. 빈민가의 고달픈 삶은 높은 실업률과 범죄, 마약 사용, 매춘을 양산하면서 이혼, 재혼, 동거도 많아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빈민가에서 그는 세상을 달리 보는 법을 깨쳤다고 그곳의 신부 아우구스토 잠피니가 말했다(그는 베르골료가 총장을 지낸 콜레지오 막시모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베르골료는 이혼했거나 재혼한 신자들의 영성체를 금하는 것 같은 문제에선 정통 교리를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교리 때문에 빈민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위한 목회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잠피니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빈민가에서 목회를 할 때는 신자의 90%가 독신자이거나 이혼자다. 그 문제를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곳에선 이혼자와 재혼자의 영성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두가 영성체를 받는다.” 베르골료는 엄격한 규율에 따르기보다 가난한 사람이 직면하는 문제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사는 사람, 천주교회에서의 삶에서 소외됐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특히 민감했다. 빈민가 ‘빌라 21’에서 목회를 하는 후안 이사스멘디 신부는 “베르골료는 사소하고 어리석은 일에 절대 엄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 깊은 문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청에 반기를 들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스페인, 아이티, 칠레 추기경들에 둘러싸여 세계주교 대의원회의장에 들어가고 있다 (10월 9일).
그러나 그런 그의 행동을 모두가 곱게 보진 않았다. 예로니모 호세 포데스타는 진보적인 주교로 1960년대 급진적인 가르침으로 교황청의 분노를 샀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보수주의 주교들의 요청에 의해 로마로부터 주교직을 박탈당했다. 그는 잊혀진 채 가난하게 살다가 2000년 사망했다. 교회에선 아무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은 달랐다.

베르골료는 추방된 포데스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를 찾아가 병자성사를 받게 해주었다. 그 다음 그의 아내 클레리아 루로와 자녀들이 재정지원을 받도록 도왔다. 그녀는 천주교에선 상상하기 힘든 급진적 여권주의자였다. 그럼에도 베르골료는 지난해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매주 일요일 그녀에게 안부전화를 했다.

교황청은 추방된 주교와 접촉하는 베르골료를 당연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베르골료는 그런 일을 ‘연민의 의무(duty of compassion)’로 간주했다. 그는 이미 교황청의 언짢음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 시절 그는 세계 각지의 추기경들을 얕보며 무시하는 교황청의 젊은 관리들을 혐오했다. 한 추기경은 “그들은 우리가 마치 복사(服事)인 양 대했다”고 나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베르골료의 주교 추천은 번번이 거부당했다. 교회의 보수파는 교황청에 그를 헐뜯는 이야기를 전했다.

지난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전격적으로 자진 사임하면서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그의 후임을 선출하려고 모인 추기경들은 투표 전 며칠 동안 비공개 토론을 가졌다. 그 회의에서 세계 각지에서 온 고위 성직자들은 베르골료가 그랬듯이 교황청의 부당한 대우에 불만을 표했다. 교황청은 그들의 종(하인)이 돼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주인처럼 행세했다.

추기경들은 새 교황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두 가지로 꼽았다. 스캔들로 얼룩진 바티칸 은행과 문제 많은 관료체제를 개혁하는 일이 그 첫 번째요 중세 시대의 군주처럼 군림하는 교황보다는 주교들이 집단으로 교회를 이끌 수 있도록 지배구조에 동료간 협력정신을 회복하는 일이 그 둘째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하자마자 신속히 바티칸 은행과 관료체제 개혁에 나섰다. 관리자문팀을 구성하고 비효과적인 규제 담당자들을 파면한 동시에 의심스러운 계좌 1000개 이상을 폐쇄했다. 또 교황청을 견제할 수 있는 추기경자문단도 구성했다. 자문위원은 각 대륙에서 선발되며 온건파만이 아니라 보수파도 포함시켰다(그러나 모두 과거 바티칸의 거만한 중앙집권주의를 비판한 추기경들이다).

그러나 그런 개혁과는 별도로 최근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거론된 문제들은 교회 내부에서 논란이 더 많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변화를 원한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며 회의를 신중하게 준비했다. 우선 20쌍을 합동 결혼시켰다(교황으로선 드문 일이다). 교회의 공식 가르침과 달리 그중에는 이미 동거하는 여러 쌍도 포함됐다. 또 토의가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도록 회의를 준비했다. 재혼한 가톨릭신자의 영성체 금지 문제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영성체를 혼인의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 교리와 분리시킨다고 독단적으로 선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교황은 전임자들처럼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인 독주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교회가 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바꾸고 싶어했다. 군주제 형식에서 교황, 성직자, 신자들이 협력적인 집단 지도체제로 바꾸는 것이다.

그는 일반 신자들에게 피임, 혼전 성관계, 동거, 이혼, 동성애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설문서를 보냈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과거엔 신자들이 수동적으로 기도하고 헌금만 하도록 요구받았다. 그 다음 그는 그들의 반응(아주 비판적인 답변이 많았다)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의제로 삼았다. 회의 전 날 밤 그는 회의 참석자는 누구나 솔직하고 기탄없이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전 교황들 아래서 반대 의견이 나오지 않도록 억눌렀던 분위기와는 정반대였다.
 변화는 시작됐다
세계주교 대의원회의장에 도착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원과 악수하고 있다 (10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결국 원하는 바를 얻었다. 진보파와 이념적 보수파 사이에서 자유롭고 열띤 토의가 벌어졌다(그중 가장 목소리가 큰 레이먼드 버크 미국 추기경은 교황이 자신을 사도좌 대심원장직에서 쫓아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파는 두 편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동성애자 포용에 관한 문제는 가결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동의에 단 2표가 모자라 동의를 얻지 못했다.

지금 바티칸에선 분명히 변화가 진행 중이다. 문건들이 잇따라 작성됐다. 중간 보고서, 소그룹 보고서, 그리고 최종 보고서. 최종 보고서는 동성애자와 이혼자 문제와 관련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원한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문제들은 앞으로 1년 동안 치열한 토론의 주제가 될 것이다. 그 다음 내년 10월 가족과 가정에 관한 더 큰 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그 다음 교황이 최종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교황은 이번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마치며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파의 “적대적인 경직(hostile rigidity)”과 진보파의 “파괴적인 선의(destructive good will)”를 배격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물론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니다. 어쩌면 상당히 지저분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가족과 가정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게다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누구보다도 가정적인 남자다.

- [필자 폴 밸럴리는 ‘프란치스코 교황: 매듭을 풀다(Pope Francis: Untying the Knots)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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