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식스의 부활 비결] 런닝화·스니커즈로 세계를 매료시키다
[아식스의 부활 비결] 런닝화·스니커즈로 세계를 매료시키다
10년에 걸쳐 ‘뚝’하고 성장이 멈춘 스포츠슈즈 명문 브랜드가 있었다. 그대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새 힘차게 세계 시장을 향해 뛰고 있었다. 바로 아식스다. 도쿄 오모테산도 한쪽 골목길에 서있는 검은색 건물로 외국인 관광객들이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빨려가듯 들어간다. 외벽에 검은 먹으로 호랑이 무늬가 그려진 건물에선 일본풍의 모던함과 화려함이 느껴진다. 이곳은 바로 ‘오니츠카타이거 오모테산도점’이다. 오니츠카 타이거는 일본 최대 스포츠용품 기업인 아식스가 왕년의 명작 스니커즈를 복원해 내놓은 제품이다. 이곳은 오니츠카타이거의 플래그십 스토어다.
1층 중앙에 설치된 대형 소파엔 신발을 신어보려는 외국인들로 붐빈다. 영어·중국어·태국어 등 외국어가 난무하는 매장 안은 에어컨을 가동해도 열기가 가득하다. 그들이 앞다퉈 구매하려는 오니츠카의 스니커즈는 1만엔(9만4000원)대가 대부분이다. 세부적인 곳까지 일본에서 가공한 ‘니폰 메이드’ 시리즈는 3만엔(약 28만원)을 호가한다. 그럼에도 외국인 관광객은 스니커즈가 담긴 쇼핑백을 한아름 안고 가게 문을 나선다. 월 평균 방문객 수가 3만~4만명에 이를 만큼 인기다. 엄청난 인기몰이에 아식스는 올 봄 시부야에도 매장을 열었다. 소비자를 매료시키는 것은 오니츠카뿐만 아니다. 아식스 브랜드로 판매하는 런닝화도 최근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최고 점유율을 자랑한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민 마라톤 대회인 뉴욕 시티 마라톤에서는 올해 아식스 제품 착용률이 전년 보다 50% 가까이 늘었다(아식스 자체 조사).
오니츠카와 아식스 두 브랜드의 세계 시장 진격으로 매출은 착실하게 늘었다. 최근엔 과거 일본 내 선두를 다퉜던 미즈노의 1.8배까지 확대됐다. 또한 미즈노는 해외 판매 비중이 30% 정도에 머무는 탓에, 엔화 하락이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실적이 악화됐지만 해외 판매 비중이 80% 이상인 아식스는 엔화 하락이 순풍으로 작용했다. 올해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매출 4000억엔(약 3조7500억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세계 스포츠용품 시장 3위권인 독일의 퓨마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다.
올 1월에는 오니츠카·아식스에 이어 제3의 브랜드인 ‘아식스 타이거’를 투입했다. 1980~90년대 인기였던 경기용 슈즈를 새로 디자인해, 패션에 중점을 뒀다. 오니츠카만큼 유행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아식스보다 일상에서 착용할 수 있는 이미지다. 미국 스포츠 캐주얼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 브랜드다. 프랑스와 일본의 유명 편집샵과 협업한 모델이 출시 당일 매진되는 등 빠르게 인기를 모으고 있다.
오야마 모토이 사장은 “케냐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며 “그곳에 회사를 짓고 수출을 시작하는 것이 어떨지 생각 중”이라고 이야기한다. 취임 이후 시가총액을 3배로 늘린 리더의 시야에는 아프리카라는 미지의 소비 시장이 들어온다. 그는 창업자 오니츠카 기하치로의 사위다. 주로 비주류 부문이나 적자 사업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던 그는 2008년 사장에 취임한 이후 아식스가 명성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니츠카는 1949년 일본에서 첫 농구화를 발매했다. 이 시기 아식스는 고품질의 신발로 전 세계 운동선수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업계 공룡인 나이키의 출발점 역시 오니츠카의 미국 판매 대리점이었다. 그러나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이 전설적인 회사는 1990년 초반부터 약 10년간 긴 침체에 빠졌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버블 붕괴의 영향으로 스키, 골프용 품을 비롯해 스포츠 용품 판매가 전반으로 부진했던 것이고, 또 하나는 수익원인 학교 대상 체육용품의 쇠퇴였다. 사실 이것은 아식스의 기업문화를 좀먹는 원인이기도 했다. 체육용품은 기본적으로 도매상을 통해 전국 스포츠용품점으로 팔려나간다. 학교나 지도자에게 한번 지정되면, 안정적으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강력한 판로다. 이 때문에 아식스를 포함한 모든 스포츠용품 브랜드가 대리점 루트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나이키 에어조던이나 아디다스 스탠 스미스와 같은 해외 브랜드의 신발이 크게 히트했다. 이후 일본 젊은이들은 학교나 시합에서 아식스를 착용해도 밖에서는 해외 브랜드를 애용하게 됐다. 그럼에도 아식스는 예전처럼 묵묵히 체육이나 경기용 신발만 판매했다. “당시 우리 회사의 최고 고객은 대리점이었다. 대리점 창고로 골판지 상자에 상품을 실어 보내면 매출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리점의 눈치를 항상 살폈고, 백화점 등 새로운 판로 거래는 잘못된 것이라는 분위기가 짙었다.” 과거 일본 내 판매에 관여했던 사원은 그렇게 회상한다.
실적 위기에 몰리자 아식스는 정리해고를 실시하고, 골프용품 시장에서 철수하는 등 구조조정에 나섰다. 덕분에 적자는 어느정도 해소됐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매년 연 매출 1300억~1400억엔을 맴도는 암흑기를 보냈다. 완전히 구식으로 치부돼 되살아나긴 힘들어 보였다. 이 암담한 시대에 오야마 사장은 워킹슈즈 사업총괄부장을 담당했다. 런닝슈즈와 달리 비주류의 신규 영역이었다. 그만큼 스포츠용품 도매 외에 새로운 판로를 개척할 여지가 있었다.
바로 그 때 오야마 사장은 신주쿠 이세탄(도쿄의 대형 백화점) 본점의 이탈리아 구두 담당 바이어가 “오니츠카를 부활시켰으면 좋겠다”고 한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세탄의 바이어는 트렌드를 읽어내는 능력이 유통 업계 제일이라고 정평이 나있었다. 이 말을 가슴에 새긴 채 그는 2001년에 유럽 법인 사장에 취임했다. 때마침 이탈리아 현지 매니저도 “오니츠카를 다시 만들자”고 이야기했다.
아식스는 2002년 일본을 포함한 글로벌 시장에서 오니츠카를 되살렸다. 브랜드는 예전과 같았지만 판로 통제를 철저히 했다. 판매처를 부티크나 편집샵에 한정해 패션 신발이란 이미지를 키웠다. “대형 스포츠용품 체인에서 사고 싶다고 말해도 팔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일본이라면 빔즈(BEAMS, 일본의 유명 편집숍) 정도면 괜찮다는 정도랄까?”(오야마 사장). 이듬해인 2002년, 할리우드 영화인 <킬빌> 에서 여주인공인 우마 서먼이 노랑색 오니츠카(상품명 타이치)를 신고 나와, 오니츠카는 해외 트렌디세터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사실 해외에서의 존재감 회복에는 사전 작업이 있었다. 바로 1998~2000년에 히지카타 마사오 상무가 판매 촉진 부문을 담당할 당시 전개한 런닝슈즈 판매 확대 프로젝트 ‘트라이 윈즈’가 그것이다. 일본과 미국, 유럽 시장에서의 판매 확대를 목표로 독자적인 충격 흡수재를 탑재한 ‘겔 1050’를 전략 모델로 내세웠다. 가격은 8900엔(약 8만7000원). 당시 보통 런닝슈즈가 1만엔대였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저렴했다. 아식스는 이 제품을 스포츠용품점보다 백화점, 대형 편집숍에 대량으로 판매했다. 매장 집기도 세계적으로 통일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였다. 덕분에 ‘겔 1050’은 단일 상품으로 100만족 이상을 판매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 도전 때문에 ‘아식스는 끝난 브랜드’라는 생각을 어느 정도 불식시킬 수 있었다. 오야마 사장이 오니츠카 복원과 함께 힘쓴 것이 유럽 법인의 흑자화다. 흑자화를 가로막은 것은 바로 거액의 미수입금. 매출이 늘어도 대리점으로부터 회수가 늦어져 수천만~수억엔의 자금을 못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통 과정이 복잡한 유럽에서 자금 회수를 고민하는 일본 브랜드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오야마 사장은 ‘(원래) 그런 시장이니까’라고 포기하지 않았다. 담당자를 교체하고, 재무를 일원화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고, 단 2년 만에 유럽 법인은 흑자로 전환했다.
개혁이 결실을 맺으면서 2005년 아식스는 처음으로 해외 매출이 일본 매출을 웃돌게 됐다. 사람도 조직도 한번 성공을 체험하면, 도전을 주저하지 않게 되는 모양이다. 이후 아식스는 뉴욕·도쿄·파리 등 인기 마라톤 대회에 잇따라 스폰서를 자청하고 나선다. 동시에 브랜드 매장과 자주 경영 매장(본사가 상품 진열대 등을 통제할 수 있는 매장) 출점 등에 힘을 쏟았다. 특히 플래그십 스토어는 지하철 역에서 도보로 5분 내에 도달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하는 등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런던은 하이드파크, 뉴욕은 센트럴파크 가까이에 매장을 내 아식스에 익숙하지 않은 러너들을 대상으로 쇼룸 효과를 노렸다. 스스로 판로를 관리하게 되면서 비용은 크게 늘었지만 그만큼 새로운 고객이 생겼다. 덕분에 지금의 아식스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 엄청난 성공스토리를 쓰고 있는 올 3분기 아식스는 의외로 19년 만에 정리해고에 착수했다. 일본 국내 사업 담당 직원이 대상이다. 이 부문 종업원의 20%에 달하는 350명에게 희망 퇴직 의사를 물었다. ‘이렇게 실적이 좋은데 어째서 사람을 자르는 것인가?’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종업원 사이에서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정리해고는 스포츠용품 톱 브랜드로 가겠다는 오야마 사장의 결단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아식스가 일본 1위, 세계 3위 수준이라 해도, 매출 약 3조8000억엔(약 37조원) 규모인 나이키, 2조엔(약 19조원) 규모의 아디다스와는 격차가 크다. 2강뿐만이 아니다. 현재 세계 스포츠용품 시장은 라이징 스타인 미국의 언더 아머(UNDER ARMOUR)를 주목하고 있다. 1996년 창업한 신흥 브랜드지만 적당한 가격과 독특한 디자인을 무기로 쑥쑥 성장하고 있다. 매출이 과거 5년간 3배로 늘었다. 지난해 매출은 약 3700억엔(약 3조5000억원)에 달한다. 아식스가 상위 기업을 따라잡으면서 신흥 세력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제품이나 매장에 지속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수익력이 필수적이다. 앞서 말한 정리해고에 의한 비용절감 효과는 연 25억엔(약 235억원) 정도로 예상된다.
사실 아식스가 과감하게 개혁에 나선 곳은 일본만이 아니다. 호주에 있는 스포츠용품점 점주 부부가 지난 7월, 오야마 사장에게 탄원할 목적으로 아식스 본사가 있는 고베를 방문했다. 이 매장은 아식스 제품을 30년 동안 판매해왔는데, 올해 들어 상품 공급이 중단됐다고 한다. 아식스 측은 ‘염가 판매 등을 계속하며 (회사 측에서) 요청한 시책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공급을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 부부는 오야마 사장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비추어볼 때 오야마 사장의 경영 판단은 ‘운명공동체’라는 말로 종업원이나 거래처와의 결속력을 강조한 창업자 오니츠카와는 다른 면이 있는 듯하다. 시대가 변하고, 공격 대상도 달라지는 가운데, 강함과 유함을 동시에 지닌 오야마 사장의 수완은 어디까지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
- 일본 경제 주간지 주간동양경제 특약, 번역=김다혜
이번 분기 실적도 좋다.
“미국에서 실적이 좋아진 게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 중국을 비롯한 대만·홍콩·싱가포르·인도 등 신흥국 시장 매출도 좋아졌다.”
특히 중국에서 급성장 중인데?
“미국에서 인기를 끈 상품을 중국에서도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일련의 흐름이 멈추면 언제든 적자로 돌아설 우려가 있다. 조만간 현지 생산, 현지 판매 전환을 검토 중이다. 3년 전 기용한 홍콩인 리더와 또 다른 홍콩 출신 인재를 투입해, 관리 계열과 판매 계열로 역할을 나눠 공동 경영을 하고 있다. 앞으로는 중국 전 지역에서 골고루 선전할 수 있도록 마케팅 투자를 늘려갈 방침이다.”
현재 아식스 회생의 기반이 된 것은 유럽 재건이다. 2001년 유럽에 갔을 당시 매우 힘들었을 텐데.
“2003년 누적 적자를 전부 해결했다. 대리점의 미수금이 쌓여있었다. 처음 2년 정도는 매일 같이 그걸 회수하러 다녔다. 그다음은 사람 관리였다.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출장을 다니는 직원들이 꽤 있었다. 나라별로 관리 체제도 제멋대로였다. 본부가 제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게 주요했다.”
2002년 오니츠카타이거 브랜드를 부활시켰는데.
“부활까진 3단계가 있었다. 우선 미국에서 돌아온 1991년 봄에 있었던 일이다. 가죽 구두도 소재나 모양을 바꿔 일본에서 발매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제안했더니, 가죽구두 부문은 스트라이프(아식스 특유의 마크)를 쓰지 말라는 경영진의 말에 물거품이 됐다. 도쿄 구두 담당 바이어에게 부활 조언을 들은 게 그 다음이다. 이 때도 담당 부서에 건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유럽 법인 사장에 취임하고 나서 다시 제안했고, 부활이 정식으로 결정됐다. 그 이후 유럽 주도로 브랜드 방향성이나, 판매 전략을 결정해갔다.”
올림픽 골드파트너 계약도 했는데 광고선전비 비율은 어느 정도까지 끌어올릴 생각인지?
“나이키나 아디다스의 광고선전비 비중은 2000년 이후 줄곧 10%를 넘는다. 아식스도 12% 이상 사용한 적이 있기 때문에, 10% 이상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다.”
미국의 언더 아머가 위협적이다.
“그들은 의류가 중심이다. 우리는 신발로 확실히 기반을 다지고 있는 것이 강점이다. 최근 투입한 아식스타이거도 틀림없이 잘 될 것으로 본다. 오니츠카타이거가 유럽형이라면 아식스타이거는 미국의 스포츠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제품이다. 상품군을 다양화해 아식스와 오니츠카에서 취급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것이다.”킬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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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중앙에 설치된 대형 소파엔 신발을 신어보려는 외국인들로 붐빈다. 영어·중국어·태국어 등 외국어가 난무하는 매장 안은 에어컨을 가동해도 열기가 가득하다. 그들이 앞다퉈 구매하려는 오니츠카의 스니커즈는 1만엔(9만4000원)대가 대부분이다. 세부적인 곳까지 일본에서 가공한 ‘니폰 메이드’ 시리즈는 3만엔(약 28만원)을 호가한다. 그럼에도 외국인 관광객은 스니커즈가 담긴 쇼핑백을 한아름 안고 가게 문을 나선다. 월 평균 방문객 수가 3만~4만명에 이를 만큼 인기다. 엄청난 인기몰이에 아식스는 올 봄 시부야에도 매장을 열었다.
자존심 회복에 성공한 일본 스니커즈의 전설
오니츠카와 아식스 두 브랜드의 세계 시장 진격으로 매출은 착실하게 늘었다. 최근엔 과거 일본 내 선두를 다퉜던 미즈노의 1.8배까지 확대됐다. 또한 미즈노는 해외 판매 비중이 30% 정도에 머무는 탓에, 엔화 하락이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실적이 악화됐지만 해외 판매 비중이 80% 이상인 아식스는 엔화 하락이 순풍으로 작용했다. 올해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매출 4000억엔(약 3조7500억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세계 스포츠용품 시장 3위권인 독일의 퓨마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다.
올 1월에는 오니츠카·아식스에 이어 제3의 브랜드인 ‘아식스 타이거’를 투입했다. 1980~90년대 인기였던 경기용 슈즈를 새로 디자인해, 패션에 중점을 뒀다. 오니츠카만큼 유행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아식스보다 일상에서 착용할 수 있는 이미지다. 미국 스포츠 캐주얼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 브랜드다. 프랑스와 일본의 유명 편집샵과 협업한 모델이 출시 당일 매진되는 등 빠르게 인기를 모으고 있다.
오야마 모토이 사장은 “케냐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며 “그곳에 회사를 짓고 수출을 시작하는 것이 어떨지 생각 중”이라고 이야기한다. 취임 이후 시가총액을 3배로 늘린 리더의 시야에는 아프리카라는 미지의 소비 시장이 들어온다. 그는 창업자 오니츠카 기하치로의 사위다. 주로 비주류 부문이나 적자 사업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던 그는 2008년 사장에 취임한 이후 아식스가 명성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리점 의존 줄이고 소비자 직접 공략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나이키 에어조던이나 아디다스 스탠 스미스와 같은 해외 브랜드의 신발이 크게 히트했다. 이후 일본 젊은이들은 학교나 시합에서 아식스를 착용해도 밖에서는 해외 브랜드를 애용하게 됐다. 그럼에도 아식스는 예전처럼 묵묵히 체육이나 경기용 신발만 판매했다. “당시 우리 회사의 최고 고객은 대리점이었다. 대리점 창고로 골판지 상자에 상품을 실어 보내면 매출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리점의 눈치를 항상 살폈고, 백화점 등 새로운 판로 거래는 잘못된 것이라는 분위기가 짙었다.” 과거 일본 내 판매에 관여했던 사원은 그렇게 회상한다.
실적 위기에 몰리자 아식스는 정리해고를 실시하고, 골프용품 시장에서 철수하는 등 구조조정에 나섰다. 덕분에 적자는 어느정도 해소됐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매년 연 매출 1300억~1400억엔을 맴도는 암흑기를 보냈다. 완전히 구식으로 치부돼 되살아나긴 힘들어 보였다. 이 암담한 시대에 오야마 사장은 워킹슈즈 사업총괄부장을 담당했다. 런닝슈즈와 달리 비주류의 신규 영역이었다. 그만큼 스포츠용품 도매 외에 새로운 판로를 개척할 여지가 있었다.
바로 그 때 오야마 사장은 신주쿠 이세탄(도쿄의 대형 백화점) 본점의 이탈리아 구두 담당 바이어가 “오니츠카를 부활시켰으면 좋겠다”고 한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세탄의 바이어는 트렌드를 읽어내는 능력이 유통 업계 제일이라고 정평이 나있었다. 이 말을 가슴에 새긴 채 그는 2001년에 유럽 법인 사장에 취임했다. 때마침 이탈리아 현지 매니저도 “오니츠카를 다시 만들자”고 이야기했다.
아식스는 2002년 일본을 포함한 글로벌 시장에서 오니츠카를 되살렸다. 브랜드는 예전과 같았지만 판로 통제를 철저히 했다. 판매처를 부티크나 편집샵에 한정해 패션 신발이란 이미지를 키웠다. “대형 스포츠용품 체인에서 사고 싶다고 말해도 팔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일본이라면 빔즈(BEAMS, 일본의 유명 편집숍) 정도면 괜찮다는 정도랄까?”(오야마 사장). 이듬해인 2002년, 할리우드 영화인 <킬빌> 에서 여주인공인 우마 서먼이 노랑색 오니츠카(상품명 타이치)를 신고 나와, 오니츠카는 해외 트렌디세터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사실 해외에서의 존재감 회복에는 사전 작업이 있었다. 바로 1998~2000년에 히지카타 마사오 상무가 판매 촉진 부문을 담당할 당시 전개한 런닝슈즈 판매 확대 프로젝트 ‘트라이 윈즈’가 그것이다. 일본과 미국, 유럽 시장에서의 판매 확대를 목표로 독자적인 충격 흡수재를 탑재한 ‘겔 1050’를 전략 모델로 내세웠다. 가격은 8900엔(약 8만7000원). 당시 보통 런닝슈즈가 1만엔대였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저렴했다. 아식스는 이 제품을 스포츠용품점보다 백화점, 대형 편집숍에 대량으로 판매했다. 매장 집기도 세계적으로 통일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였다. 덕분에 ‘겔 1050’은 단일 상품으로 100만족 이상을 판매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 도전 때문에 ‘아식스는 끝난 브랜드’라는 생각을 어느 정도 불식시킬 수 있었다.
“잘 나가는 지금이 구조조정 적기”
개혁이 결실을 맺으면서 2005년 아식스는 처음으로 해외 매출이 일본 매출을 웃돌게 됐다. 사람도 조직도 한번 성공을 체험하면, 도전을 주저하지 않게 되는 모양이다. 이후 아식스는 뉴욕·도쿄·파리 등 인기 마라톤 대회에 잇따라 스폰서를 자청하고 나선다. 동시에 브랜드 매장과 자주 경영 매장(본사가 상품 진열대 등을 통제할 수 있는 매장) 출점 등에 힘을 쏟았다. 특히 플래그십 스토어는 지하철 역에서 도보로 5분 내에 도달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하는 등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런던은 하이드파크, 뉴욕은 센트럴파크 가까이에 매장을 내 아식스에 익숙하지 않은 러너들을 대상으로 쇼룸 효과를 노렸다. 스스로 판로를 관리하게 되면서 비용은 크게 늘었지만 그만큼 새로운 고객이 생겼다. 덕분에 지금의 아식스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 엄청난 성공스토리를 쓰고 있는 올 3분기 아식스는 의외로 19년 만에 정리해고에 착수했다. 일본 국내 사업 담당 직원이 대상이다. 이 부문 종업원의 20%에 달하는 350명에게 희망 퇴직 의사를 물었다. ‘이렇게 실적이 좋은데 어째서 사람을 자르는 것인가?’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종업원 사이에서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정리해고는 스포츠용품 톱 브랜드로 가겠다는 오야마 사장의 결단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아식스가 일본 1위, 세계 3위 수준이라 해도, 매출 약 3조8000억엔(약 37조원) 규모인 나이키, 2조엔(약 19조원) 규모의 아디다스와는 격차가 크다. 2강뿐만이 아니다. 현재 세계 스포츠용품 시장은 라이징 스타인 미국의 언더 아머(UNDER ARMOUR)를 주목하고 있다. 1996년 창업한 신흥 브랜드지만 적당한 가격과 독특한 디자인을 무기로 쑥쑥 성장하고 있다. 매출이 과거 5년간 3배로 늘었다. 지난해 매출은 약 3700억엔(약 3조5000억원)에 달한다. 아식스가 상위 기업을 따라잡으면서 신흥 세력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제품이나 매장에 지속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수익력이 필수적이다. 앞서 말한 정리해고에 의한 비용절감 효과는 연 25억엔(약 235억원) 정도로 예상된다.
사실 아식스가 과감하게 개혁에 나선 곳은 일본만이 아니다. 호주에 있는 스포츠용품점 점주 부부가 지난 7월, 오야마 사장에게 탄원할 목적으로 아식스 본사가 있는 고베를 방문했다. 이 매장은 아식스 제품을 30년 동안 판매해왔는데, 올해 들어 상품 공급이 중단됐다고 한다. 아식스 측은 ‘염가 판매 등을 계속하며 (회사 측에서) 요청한 시책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공급을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 부부는 오야마 사장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비추어볼 때 오야마 사장의 경영 판단은 ‘운명공동체’라는 말로 종업원이나 거래처와의 결속력을 강조한 창업자 오니츠카와는 다른 면이 있는 듯하다. 시대가 변하고, 공격 대상도 달라지는 가운데, 강함과 유함을 동시에 지닌 오야마 사장의 수완은 어디까지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
- 일본 경제 주간지 주간동양경제 특약, 번역=김다혜
[박스기사] 오야마 모토이 아식스 사장 - 아식스타이거로 새 영역 개척
이번 분기 실적도 좋다.
“미국에서 실적이 좋아진 게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 중국을 비롯한 대만·홍콩·싱가포르·인도 등 신흥국 시장 매출도 좋아졌다.”
특히 중국에서 급성장 중인데?
“미국에서 인기를 끈 상품을 중국에서도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일련의 흐름이 멈추면 언제든 적자로 돌아설 우려가 있다. 조만간 현지 생산, 현지 판매 전환을 검토 중이다. 3년 전 기용한 홍콩인 리더와 또 다른 홍콩 출신 인재를 투입해, 관리 계열과 판매 계열로 역할을 나눠 공동 경영을 하고 있다. 앞으로는 중국 전 지역에서 골고루 선전할 수 있도록 마케팅 투자를 늘려갈 방침이다.”
현재 아식스 회생의 기반이 된 것은 유럽 재건이다. 2001년 유럽에 갔을 당시 매우 힘들었을 텐데.
“2003년 누적 적자를 전부 해결했다. 대리점의 미수금이 쌓여있었다. 처음 2년 정도는 매일 같이 그걸 회수하러 다녔다. 그다음은 사람 관리였다.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출장을 다니는 직원들이 꽤 있었다. 나라별로 관리 체제도 제멋대로였다. 본부가 제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게 주요했다.”
2002년 오니츠카타이거 브랜드를 부활시켰는데.
“부활까진 3단계가 있었다. 우선 미국에서 돌아온 1991년 봄에 있었던 일이다. 가죽 구두도 소재나 모양을 바꿔 일본에서 발매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제안했더니, 가죽구두 부문은 스트라이프(아식스 특유의 마크)를 쓰지 말라는 경영진의 말에 물거품이 됐다. 도쿄 구두 담당 바이어에게 부활 조언을 들은 게 그 다음이다. 이 때도 담당 부서에 건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유럽 법인 사장에 취임하고 나서 다시 제안했고, 부활이 정식으로 결정됐다. 그 이후 유럽 주도로 브랜드 방향성이나, 판매 전략을 결정해갔다.”
올림픽 골드파트너 계약도 했는데 광고선전비 비율은 어느 정도까지 끌어올릴 생각인지?
“나이키나 아디다스의 광고선전비 비중은 2000년 이후 줄곧 10%를 넘는다. 아식스도 12% 이상 사용한 적이 있기 때문에, 10% 이상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다.”
미국의 언더 아머가 위협적이다.
“그들은 의류가 중심이다. 우리는 신발로 확실히 기반을 다지고 있는 것이 강점이다. 최근 투입한 아식스타이거도 틀림없이 잘 될 것으로 본다. 오니츠카타이거가 유럽형이라면 아식스타이거는 미국의 스포츠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제품이다. 상품군을 다양화해 아식스와 오니츠카에서 취급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것이다.”킬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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