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일 관계, 동북아 小 패권 경쟁] 균형자(한국)·중재자(일본) 외교의 충돌, 실리보단 명분 싸움
[위기의 한·일 관계, 동북아 小 패권 경쟁] 균형자(한국)·중재자(일본) 외교의 충돌, 실리보단 명분 싸움
일본제철 자산현금화 가시화에 日 ‘강경대응’ 예고… 관계회복 답 안 보여 외교는 수 싸움이며, 감정싸움도 일종의 전략이다. 외교 관계에서 실제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막말이나 폭언을 일삼는 정치인·외교관은 없을 것이다. 감정싸움이나 극단적 대처는 모두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다.
감정싸움은 대외적으론 일을 풀어낼 명분이 없다는 점을 알리고, 국내 정치적으론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 사용한다. 리더십 위기를 맞은 정치 지도자들이 외교 관계 악화를 지렛대 삼아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경우도 많다. 실제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적성 국가와의 관계 악화는 대개 국내 정치에는 유리하게 작용한다.
한·일 관계가 실타래처럼 점점 더 꼬이고 있다. 한국에 압류된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자산이 현금화를 앞둔 가운데, 일본이 거센 반발과 함께 실력 행사를 예고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양자 간 합의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본의 수출 규제 문제를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 절차에 올리기로 했다. 일본이 한국에 반도체 소재·부품 수출을 처음 금지한 지난해 7월 이후 상황이 더욱 악화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2018년 11월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다. 피해자 보상을 위해 미쓰비시중공업의 자산은 동결된 뒤 처분 절차를 밟게 됐다. 이에 일본 정부는 “징용 피해자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당시 한국에 제공된 5억 달러 상당의 유무상 경제협력을 통해 모두 해결됐다. 한일청구권협정 위반이자 국제법 위반”이라고 반발했다.
일본 정부는 외교 경로를 통해 한국 정부에 항의하는 한편, ‘대항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실제 일본은 한국의 핵심 수출 품목인 반도체·디스플레이에 타격을 주기 위해 지난해 7월 고순도 불화수소·포토레지스트·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핵심 소재·부품의 수출을 제한했다. 더불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제외하며 갈등을 더욱 키웠다.
이와 관련해 일본 기업 관계자는 “사유재산은 불가침의 영역이며, 전후 일본에서 공적 영역이 민간 자본을 침해한 적이 없다”며 “일본 정부는 물론 민간에서도 해외 정부가 자국 기업의 자산을 빼앗아 갔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일본이 중국·러시아와 영토 분쟁 중이며, 북한이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식민지 지배 청산을 아직 해소하지 못했다는 점도 강경 대응의 배경으로 해석된다. 한국 대법원의 판단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가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수 있어서다.
한·일 관계는 올해 들어서도 냉각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일본 자유민주당(자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뒤로 양국 갈등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올해 들어 다시 갈등이 재점화됐다.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은 월간 분게이슌슈(文藝春秋)와의 올해 초 인터뷰에서 “한국이 (일본) 민간기업 자산 현금화를 실행한다면 한국과의 무역을 재검토하고 금융제재를 단행하는 등의 여러 (대응) 방법이 있다”고 언급했다. 산케이신문도 지난 4월 징용피해 배상판결 보도에서 “일본 정부는 신속히 대항 조치를 취한다는 방침이다. 두 자릿수에 이르는 옵션을 검토 중”이란 일본 당국자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 한국 법원이 일본제철에 대한 공시송달을 결정하면서 다시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강제징용 피해자 측은 지난해 5월 일본제철의 한국 내 자산에 대한 압류 및 매각 명령을 신청했는데, 일본 측이 압류명령 결정문 수령을 거부해 왔다.
이에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은 1일 해당 결정문의 공시송달을 결정했다. 공시송달이란 법원이 보낸 서류가 소송 당사자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때 법원이 일정 기간 보관하고 있다가, 이 기간이 지나면 서류가 당사자에게 송달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다.
이에 8월 4일부로 일본제철 자산 압류명령 결정문 송달 효력이 발생한다. 이후엔 국내 사법절차에 따라 압류 중인 일본제철의 한국 내 자산 강제매각 및 현금화가 가능하다. 더불어 한국 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세계무역기구(WTO) 분쟁 해결 절차를 재개하기로 했다.
나승식 산업통상자원부 무역투자실장은 6월 2일 브리핑에서 “일본 정부가 문제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으며, 현안 해결을 위한 논의는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며 “당초 WTO 분쟁 해결 절차 정지 조건인 정상적인 대화의 진행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지난해 일본이 수출 규제에 나서자 9월 WTO에 제소했으나, 두 차례의 한·일 WTO 협의 끝에 정상적 대화 진행을 전제로 지난해 11월 22일 제소절차를 정지한 바 있다. 산자부는 3대 품목 수출 규제, 화이트리스트 제외 결정과 관련해 일본에 5월 말까지 입장을 밝히라고 통보했지만, 일본은 내용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공시송달 절차가 시작되면서 일본도 강경한 대응을 예고하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6월 4일 정례 브리핑에서 “압류 자산 현금화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므로 피해야 한다는 점을 전날 외무장관 전화를 포함해 한국에 반복해서 지적했다”며 “일본 기업의 경제 활동을 보호한다는 관점에서 모든 선택지를 시야에 넣고 의연하게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이 일본 기업 자산을 현금화하면 보복 조치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한국산 제품 관세 인상 등 무역 재검토와 송금 금지 등 금융 제재, 한국인 입국 비자 발급 제한, 주한대사·총영사 일시귀국,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등을 대응 조치로 거론해 왔다. 산케이신문은 일본 외무성 간부를 인용해 “한국에 어떤 조치를 내릴지는 정치적 판단을 통해 결정할 것”이라고 전했다. 아소 부총리는 “한국의 경제 규모가 일본보다 작기 때문에 한국이 먼저 피폐해질 것”이라며 위협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다만 일본이 이런 보복카드를 쉽게 꺼내긴 어려워 보인다. 일본 자국 피해도 큰 것은 물론 실효성이 떨어져서다. 예컨대 일본이 한국 제품에 관세를 올릴 경우 WTO 제소 가능성이 있다. 한국이 자국법에 따라 내린 자산 매각 결정을 일본의 관세 인상 사유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일본은 꾸준히 “한국의 사법 절차가 국제법 위반”이라는 주장을 펼쳐왔지만, 설득력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2010년 일본이 동중국해에서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싸고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였을 당시, 중국은 일본에 희토류 수출을 제한했다. 일본은 이를 불공정 무역보복이라며 2012년 3월 WTO에 제소했고 결국 승리한 바 있다.
이번 한·일 갈등에서는 한국이 과거 일본과, 일본이 중국과 입장이 비슷하다. 특히 WTO 무대에서 한국의 입김이 강하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섣불리 실력 행사에 나서기는 어려워 보인다.
비자발급 중단이나, 금융제제 역시 일본도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은 소재·부품 등 중간재를 중심으로 한국에 막대한 무역흑자를 올리고 있기 때문에 수출 규제 조치는 자국 기업에 주는 피해가 더 큰 상황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지난달 일본의 수출규제로 한국 기업들이 탈일본에 나서고 있다고 소개하며 자국 소재 산업의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일례로 LG디스플레이에 불화수소를 수출하던 일본 스텔라케미파는 2019 회계연도(2019년 4월~2020년 3월) 결산에서 순이익이 전년 대비 18% 감소했다.
일본 정부가 수출을 규제하자 LG디스플레이가 지난해 11월부터 한국 기업 솔브레인의 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해서다. 세계 최대 불화수소 생산기업인 모리타화학공업도 수출 규제 이후 한국 수출이 30%가량 줄었다.
마찬가지로 수출 규제 품목인 EUV용 포토레지스트도 미국 종합화학기업 듀폰이 한국에 직접 공장 건설 계획을 밝히는 등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닛산자동차도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판매 부진에 최근에 결국 한국 철수를 결정했다.
한국 기업들은 오랜 거래 관계 때문에 관습적으로 일본의 소재·부품을 사용했는데, 수출 규제를 계기로 이런 관행이 깨질 수도 있다. LG전자 관계자는 “소재·부품 조달 리스크는 경영에 치명적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로 조달의 다변화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수출 규제가 원래대로 돌아가도 한국 기업들이 소재를 다시 일본산으로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도 중국 화웨이에 대해 스마트폰 핵심 부품 수출을 금지했지만, 글로벌 공급사슬을 자르지 못한 것과 비슷한 결과가 나타난 셈이다. 글로벌 공급사슬에서 소재·부품·조립 등 중간 단계에는 이미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대만·독일·러시아 등 첨단 기술을 가진 나라들이 적지 않다.
대체할 수 있는 기업과 소재·부품이 많기 때문에 수출 규제로 올릴 수 있는 효과는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도 중국의 희토류 수출 금지에 애를 먹으며 미국·베트남·카자흐스탄 등지로 수급처를 다변화했다. 또 희토류 사용을 줄일 수 있는 기술 개발에 나서며 중국 의존도를 낮췄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되레 자기 발등을 찍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여기에 한국이 일본 제품 통관검사 강화, 항만 지정 등의 조치를 취하면 일본 수출 기업에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일본은 국내 정치적으로도 섣불리 규제 카드를 꺼내기 어려운 실정이다. 벚꽃 스캔들과 미숙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대응 등 문제로 아베 신조 총리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어 외교적 대응에 한계가 생겼다.
아베 총리 지지율은 2012년 취임 이후 가장 낮은 20%대까지 하락했다. 지지율이 낮기 때문에 수출규제나 금융제재 등 추가 카드를 펼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커진 상황이다.
양국 관계가 나빠질 때는 외교·안보 전략 파트너로서 미국이 중재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고립주의, 불간섭주의를 고집하고 있어 미국의 중재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 대선을 앞둔 9~10월께 한국과 일본을 연달아 방문, 화해의 명분을 제시할 가능성은 있다. 다만 대중국 견제에 나산 미국이 미·일 동맹 강화를 추진하고 있어 제3국이 제안하는 카드를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때문에 당분간은 양국 간에 실체 있는 보복 조치보다는 감정싸움이나, 외교적 대응 등 견제가 주를 이룰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외교적으로 한국은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독자 노선을 추진하고 있고, 일본은 한·미·일 외교·안보 체제를 지키며 동북아 거점 역할을 지향하고 있어 한·일 간에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측면도 있다. 이번 한·일 관계 악화가 일종의 동북아 소패권 경쟁으로 비치는 이유다.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교수는 지난해 본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균형자 외교에 대해 “중·일 관계가 개선된 뒤 북·미 협상이 펼쳐지면 한국은 역할이 없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패권국가 간에, 동북아 근린국가 간의 갈등을 지속하면서도 인내심을 갖고 많은 전략적 카드를 확보하는 측에 유리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후카가와 교수는 또 “한국이 현재 어느 쪽에도 끼기 어렵다는 애매한 태도지만 미국이냐, 중국이냐 양자택일을 받게 되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자칫 고립되거나 따돌림을 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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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싸움은 대외적으론 일을 풀어낼 명분이 없다는 점을 알리고, 국내 정치적으론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 사용한다. 리더십 위기를 맞은 정치 지도자들이 외교 관계 악화를 지렛대 삼아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경우도 많다. 실제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적성 국가와의 관계 악화는 대개 국내 정치에는 유리하게 작용한다.
한·일 관계가 실타래처럼 점점 더 꼬이고 있다. 한국에 압류된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자산이 현금화를 앞둔 가운데, 일본이 거센 반발과 함께 실력 행사를 예고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양자 간 합의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본의 수출 규제 문제를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 절차에 올리기로 했다. 일본이 한국에 반도체 소재·부품 수출을 처음 금지한 지난해 7월 이후 상황이 더욱 악화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2018년 11월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다. 피해자 보상을 위해 미쓰비시중공업의 자산은 동결된 뒤 처분 절차를 밟게 됐다.
韓과 분쟁에서 ‘불리한 선례’가 두려운 日
일본 정부는 외교 경로를 통해 한국 정부에 항의하는 한편, ‘대항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실제 일본은 한국의 핵심 수출 품목인 반도체·디스플레이에 타격을 주기 위해 지난해 7월 고순도 불화수소·포토레지스트·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핵심 소재·부품의 수출을 제한했다. 더불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제외하며 갈등을 더욱 키웠다.
이와 관련해 일본 기업 관계자는 “사유재산은 불가침의 영역이며, 전후 일본에서 공적 영역이 민간 자본을 침해한 적이 없다”며 “일본 정부는 물론 민간에서도 해외 정부가 자국 기업의 자산을 빼앗아 갔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일본이 중국·러시아와 영토 분쟁 중이며, 북한이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식민지 지배 청산을 아직 해소하지 못했다는 점도 강경 대응의 배경으로 해석된다. 한국 대법원의 판단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가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수 있어서다.
한·일 관계는 올해 들어서도 냉각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일본 자유민주당(자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뒤로 양국 갈등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올해 들어 다시 갈등이 재점화됐다.
8월 일본제철 압류 효력 발생 앞두고 갈등 고조
이런 가운데 최근 한국 법원이 일본제철에 대한 공시송달을 결정하면서 다시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강제징용 피해자 측은 지난해 5월 일본제철의 한국 내 자산에 대한 압류 및 매각 명령을 신청했는데, 일본 측이 압류명령 결정문 수령을 거부해 왔다.
이에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은 1일 해당 결정문의 공시송달을 결정했다. 공시송달이란 법원이 보낸 서류가 소송 당사자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때 법원이 일정 기간 보관하고 있다가, 이 기간이 지나면 서류가 당사자에게 송달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다.
이에 8월 4일부로 일본제철 자산 압류명령 결정문 송달 효력이 발생한다. 이후엔 국내 사법절차에 따라 압류 중인 일본제철의 한국 내 자산 강제매각 및 현금화가 가능하다. 더불어 한국 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세계무역기구(WTO) 분쟁 해결 절차를 재개하기로 했다.
나승식 산업통상자원부 무역투자실장은 6월 2일 브리핑에서 “일본 정부가 문제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으며, 현안 해결을 위한 논의는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며 “당초 WTO 분쟁 해결 절차 정지 조건인 정상적인 대화의 진행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지난해 일본이 수출 규제에 나서자 9월 WTO에 제소했으나, 두 차례의 한·일 WTO 협의 끝에 정상적 대화 진행을 전제로 지난해 11월 22일 제소절차를 정지한 바 있다. 산자부는 3대 품목 수출 규제, 화이트리스트 제외 결정과 관련해 일본에 5월 말까지 입장을 밝히라고 통보했지만, 일본은 내용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공시송달 절차가 시작되면서 일본도 강경한 대응을 예고하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6월 4일 정례 브리핑에서 “압류 자산 현금화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므로 피해야 한다는 점을 전날 외무장관 전화를 포함해 한국에 반복해서 지적했다”며 “일본 기업의 경제 활동을 보호한다는 관점에서 모든 선택지를 시야에 넣고 의연하게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이 일본 기업 자산을 현금화하면 보복 조치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日은 무역보복·금융제재 검토중, 실효성은 의문
다만 일본이 이런 보복카드를 쉽게 꺼내긴 어려워 보인다. 일본 자국 피해도 큰 것은 물론 실효성이 떨어져서다. 예컨대 일본이 한국 제품에 관세를 올릴 경우 WTO 제소 가능성이 있다. 한국이 자국법에 따라 내린 자산 매각 결정을 일본의 관세 인상 사유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일본은 꾸준히 “한국의 사법 절차가 국제법 위반”이라는 주장을 펼쳐왔지만, 설득력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2010년 일본이 동중국해에서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싸고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였을 당시, 중국은 일본에 희토류 수출을 제한했다. 일본은 이를 불공정 무역보복이라며 2012년 3월 WTO에 제소했고 결국 승리한 바 있다.
이번 한·일 갈등에서는 한국이 과거 일본과, 일본이 중국과 입장이 비슷하다. 특히 WTO 무대에서 한국의 입김이 강하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섣불리 실력 행사에 나서기는 어려워 보인다.
비자발급 중단이나, 금융제제 역시 일본도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은 소재·부품 등 중간재를 중심으로 한국에 막대한 무역흑자를 올리고 있기 때문에 수출 규제 조치는 자국 기업에 주는 피해가 더 큰 상황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지난달 일본의 수출규제로 한국 기업들이 탈일본에 나서고 있다고 소개하며 자국 소재 산업의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일례로 LG디스플레이에 불화수소를 수출하던 일본 스텔라케미파는 2019 회계연도(2019년 4월~2020년 3월) 결산에서 순이익이 전년 대비 18% 감소했다.
일본 정부가 수출을 규제하자 LG디스플레이가 지난해 11월부터 한국 기업 솔브레인의 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해서다. 세계 최대 불화수소 생산기업인 모리타화학공업도 수출 규제 이후 한국 수출이 30%가량 줄었다.
마찬가지로 수출 규제 품목인 EUV용 포토레지스트도 미국 종합화학기업 듀폰이 한국에 직접 공장 건설 계획을 밝히는 등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닛산자동차도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판매 부진에 최근에 결국 한국 철수를 결정했다.
한국 기업들은 오랜 거래 관계 때문에 관습적으로 일본의 소재·부품을 사용했는데, 수출 규제를 계기로 이런 관행이 깨질 수도 있다. LG전자 관계자는 “소재·부품 조달 리스크는 경영에 치명적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로 조달의 다변화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수출 규제가 원래대로 돌아가도 한국 기업들이 소재를 다시 일본산으로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도 중국 화웨이에 대해 스마트폰 핵심 부품 수출을 금지했지만, 글로벌 공급사슬을 자르지 못한 것과 비슷한 결과가 나타난 셈이다. 글로벌 공급사슬에서 소재·부품·조립 등 중간 단계에는 이미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대만·독일·러시아 등 첨단 기술을 가진 나라들이 적지 않다.
대체할 수 있는 기업과 소재·부품이 많기 때문에 수출 규제로 올릴 수 있는 효과는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도 중국의 희토류 수출 금지에 애를 먹으며 미국·베트남·카자흐스탄 등지로 수급처를 다변화했다. 또 희토류 사용을 줄일 수 있는 기술 개발에 나서며 중국 의존도를 낮췄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되레 자기 발등을 찍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여기에 한국이 일본 제품 통관검사 강화, 항만 지정 등의 조치를 취하면 일본 수출 기업에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아베 대응 한계, 대선 앞둔 美도 중재 어려워
아베 총리 지지율은 2012년 취임 이후 가장 낮은 20%대까지 하락했다. 지지율이 낮기 때문에 수출규제나 금융제재 등 추가 카드를 펼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커진 상황이다.
양국 관계가 나빠질 때는 외교·안보 전략 파트너로서 미국이 중재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고립주의, 불간섭주의를 고집하고 있어 미국의 중재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 대선을 앞둔 9~10월께 한국과 일본을 연달아 방문, 화해의 명분을 제시할 가능성은 있다. 다만 대중국 견제에 나산 미국이 미·일 동맹 강화를 추진하고 있어 제3국이 제안하는 카드를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때문에 당분간은 양국 간에 실체 있는 보복 조치보다는 감정싸움이나, 외교적 대응 등 견제가 주를 이룰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외교적으로 한국은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독자 노선을 추진하고 있고, 일본은 한·미·일 외교·안보 체제를 지키며 동북아 거점 역할을 지향하고 있어 한·일 간에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측면도 있다. 이번 한·일 관계 악화가 일종의 동북아 소패권 경쟁으로 비치는 이유다.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교수는 지난해 본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균형자 외교에 대해 “중·일 관계가 개선된 뒤 북·미 협상이 펼쳐지면 한국은 역할이 없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패권국가 간에, 동북아 근린국가 간의 갈등을 지속하면서도 인내심을 갖고 많은 전략적 카드를 확보하는 측에 유리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후카가와 교수는 또 “한국이 현재 어느 쪽에도 끼기 어렵다는 애매한 태도지만 미국이냐, 중국이냐 양자택일을 받게 되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자칫 고립되거나 따돌림을 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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