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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만들어지기까지...제작자의 끝없는 고민[백세희의 컬쳐&로]

하나의 공연, 풀어야 할 법리적 문제 산적
해외 공연, 번역가-제작자-원작자간 이해관계 해결 필요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백세희 디케이엘파트너스 법률사무소 변호사] 좋은 공연은 노래·무대·의상 모두 환상적이다. 완성도 높은 스토리와 빈틈없는 동선을 만들어낸 훌륭한 연출도 좋은 공연을 만드는 요소다. 관객은 이런 요소들로 해당 공연이 좋은 작품인지 아닌지 직접 눈과 귀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공연이 만들어지기까지 관객의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노력이 존재한다. 특히 공연 제작자의 고민은 공연물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생각보다 많은 이해관계가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해외 공연 계약 문제, 그리고 제작자의 고민

해외에서 흥행성을 검증받은 라이선스 작품을 국내에서 공연하고 싶을 때 해외 작가의 공연 대본을 우리말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만만치 않은 문제가 시작된다. 

일단 ‘번역자의 선정’부터 원작 저작권자(Licensor)가 개입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유명한 공연물의 라이선스 계약일수록 원작자는 세부적인 개입을 원한다. 특히 브로드웨이처럼 상업성이 강한 곳은 저작권 관리 시스템이 매우 정교하고 엄격하다. 원작에서 사투리가 쓰일 때 그 뉘앙스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반영한 번역 능력을 지닌 번역자를 구해오라고 하거나, 드라마나 코미디 등 특정 장르에서의 풍부한 번역 경력을 가진 번역자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는 당연히 제작자의 몫이다.

‘번역 대본의 저작권’을 번역자가 갖지 못하고 원작자에게 귀속하게끔 요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라이선스 계약에서 번역본의 저작권을 원작자가 갖기로 합의했다고 해서, 이 합의가 자동으로 번역자에게까지 효력을 갖는다고 할 수는 없다. 제작자와 번역자 간 계약에서 저작권 귀속 부분을 명확히 밝혀놔야 추후 번역본 권리 분쟁을 막을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실력 있고 유명한 번역자일수록 납득하기 어려워한다. 예컨대 뮤지컬 가사는 멜로디와 함께 공연에서 활용된다. 이에 멜로디와 음절수를 맞추는 번역을 위해서는 상당한 창의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저작권이 원작자에게 간다면 번역자 입장에서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원작자와 번역자 사이에 낀 제작자 입장에서는 번역자를 설득하는 것이 그나마 쉬운 일이다. 원작자의 요구가 상당히 부당하지만, 그런 요구 자체가 불법적인 것은 아니다. 또 공연물 시장은 원래 ‘권리자 중심의 시장’(seller’s market)이 되기 쉬워 번역자나 제작자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실정이다.
 
번역자를 설득해 원작자에게 번역물 저작권을 넘기기로 합의했다해도 제작자의 고민은 끝이 없다. 십중팔구 원작자가 번역 결과물에 간섭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원작자는 까다로운 조건을 부가해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곤 한다. 원작자는 번역이 원본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본격적인 연습에 앞서 한국어 번역본을 원작자에게 제출해 검수 받을 것까지 요구한다. 이런 요구사항은 모두 계약서에 상세히 반영돼 있을 때가 많다. 

번역자가 초벌 번역을 마쳤지만 연출자가 보기에 국내 관객의 정서에 맞지 않아 대사 수정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이때 수정 여부는 원작자와의 협상에 달려있다. 연출자와 번역자가 적절한 합의점을 찾아 대본을 수정해도, 원작자가 계약상 거부권을 행사하면 방도가 없다. 저작권은 배타적 권리이기 때문이다. 제작자는 저작물 이용을 포기하거나, 연출자와 번역자를 설득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기존 국내 소설이나 만화 등 원작을 이용해 공연물을 만드는 경우 원작자와의 지식재산권(IP) 협상도 제작자가 기획 단계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최근에는 업계에서 저작권 이해도가 높아져 원작자 동의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여기서 말하는 동의란 합의된 저작권료의 지급을 의미) 하지만 동의를 구해야 하는 원작자의 범위 문제는 제작자가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예를 들어 만화 원작의 경우 만화의 그림 작가뿐만 아니라 스토리 작가의 동의도 필요하다. 다만 스토리 작가가 스토리 저작권을 그림 작가에게 모두 넘기는 매절계약을 체결했다면 그림 작가의 동의만 받아도 된다. 

연극 대본을 뮤지컬 대본으로 각색하는 경우 뮤지컬 제작자는 원저작물인 연극 대본 권리자가 누구인지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연극 ‘친정엄마’는 대본이 두 명의 손을 거친 공동저작물임에도 이중 한 명의 의견을 배제하고 뮤지컬 대본으로 각색을 해 소송으로 비화되기도 했다.(대법원 2014. 12. 11. 선고 2012도16066 판결)

제작자 책임은 어디까지 인정되나

또한 공연물은 법리적으로 ‘결합저작물’이다. 기획 이후 제작과정에서 음악, 의상, 무대 등 각 분야의 책임자가 따로 존재한다. 작곡가, 의상 디자이너, 무대 디자이너가 각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자가 되는 만큼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한 데 따른 책임도 당연히 부담한다. 그렇다면 제작자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일본에서 진행된 제작자 책임에 대한 판결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러시아에서 초청한 발레단이 타인의 안무저작권을 침해한 공연을 일본에서 진행한 뒤 출국한 사례가 발생했다. 일본의 공연 제작자는 초청 발레단과 무용수의 책임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제작자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공연을 관리하고 그 공연에 따른 영업상의 이익을 수수하는 자도 저작권침해의 주체로 볼 수 있다는 논리였다. 

또한 제작사의 책임이 무과실책임도 아니다. 저작권침해 사실을 알거나 알 수 있었고, 작가나 작곡가 등에 대한 관리책임을 충실히 다하지 못한 경우 제작사의 책임이 인정된다. 제작사가 무과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공연물 제작의 전 과정에서 여러모로 꼼꼼하게 관리업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제작자가 들이는 노력을 생각하면 모든 공연예술계의 문제를 ‘자본 대(對) 창작자’의 프레임을 씌워 바라보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작자와 개별 창작자가 서로 존중 하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작품이 비로소 관객의 눈 앞에 펼쳐진다. 오늘 내가 본 작품은 이런 상호 합의에 따른 진통의 과정을 거쳐 태어났다. 이 과정을 소비자가 함께 지켜본다면 조금씩 더 합리적인 계약 풍토가 조성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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