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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 시간 단축과 저출산 해소의 인과관계 [EDITOR’S LETTER]

[이코노미스트 박관훈 기자]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종종 안부를 주고받던 지인이 새해 인사로 연초에 내게 건넨 말이다. 적당히 일하면서 돈은 많이 벌길 원한다니. 주변 어딜 봐도 ‘많이 일하고 적게 버는’ 사람투성이인 현실 세계에서 가당키나 한 말인가 싶으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슬며시 입꼬리가 씰룩이는 자신을 발견하곤 평소 남몰래 품고 있던 ‘은밀한 소망’을 들킨 것 같아 민망한 기분마저 들었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벌자’는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2000~2010년대 초반 성인이 된 세대를 가리킨다) 직장인들이 ‘최고의 덕담’으로 치는 말이라고 한다. 사실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자 하는 마음을 나무랄 수는 없다.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서 보면 매우 바람직한 모습이다. 적은 인풋(In Put)으로 큰 아웃풋(Out Put)을 창출해 낸 셈이니 효율성 측면에서 칭찬받을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향후 노동시장의 근로 시간 단축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본다. 인공지능(AI), 스마트팩토리 등 노동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기술과 도구들이 발전을 거듭하는 요즘 시대에 단순히 오래 일하는 것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짧은 시간을 일하더라도 전과 같거나 혹은 그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다면 근로 시간을 줄인다고 해서 문제가 될 일은 없지 않을까. 더군다나 삶의 수준이 높아지고 개인의 여가 시간이 중요한 사회로 변화할수록 근로 시간 단축에 대한 요구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올해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이 요구하고 있는 주 4.5일제 시행도 시대적 상황과 부합하며 대중의 공감을 끌어낼 가능성이 있다. 특히 금융노조가 근로 시간 단축을 위한 구실로 ‘저출산 문제’를 끌어 온 점은 주목할 만하다. 금융노조는 저출산 극복을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 주 36시간 4.5일제 근무를 요구하고 있다. 금융노조는 “이른 출근시간으로 아이들 아침밥 먹일 수 없는 환경,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환경으로 아이들 돌보는 게 너무나 어려운 노동 환경 속에서 누가 아이를 더 낳을 수 있겠는가”라며 “주 4일제를 시행하면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고, 지방에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 지방 소멸 위기도 해결 가능하다”고 했다. 사측과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 9월 25일 ‘10만 금융노동자 총파업’에 들어간다는 방침이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저출산·고령화가 이뤄지고 있는 나라다. 그런 만큼 누구도 ‘저출산 문제 해결’을 명분으로 삼은 금융노조의 요구를 반대하기는 쉽지 않을테다. 실로 뛰어난 계책이 아닐 수 없다. 세계적인 인구학자 데이비드 콜먼 옥스퍼드대 명예교수가 “저출산 문제가 지속된다면 한국은 2750년에 소멸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 것처럼 인구 문제는 우리 사회의 오랜 근심거리다. 정부가 지난 20여년간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340조원 이상을 쏟아부었지만 그 효과가 미미할 정도로 병이 깊다.

물론 금융노조의 주장에 공감의 시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평균 연봉 1억원이 넘는 은행원들의 ‘배부른 소리’라며 근무 시간 단축에만 목을 맨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금융노조의 근로 시간 단축 요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2년 주 5일제를 도입할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금융노조는 최초로 주 5일제 실현을 요구했고 전 은행권이 이를 도입했다. 이후 상황은 우리가 아는 바다. 개인적으로 근로 시간 단축과 저출산 문제 해소 사이에 어떠한 인과관계가 있는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금융노조가 20여 년 만에 쏘아 올린 근로 시간 단축 요구가 좋은 의미의 나비효과가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국민과 정부의 공감을 얻으며 다시 한번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는 발걸음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 6월 윤석열 대통령이 경기도 성남시 HD현대 R&D글로벌센터 아산홀에서 열린 2024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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