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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펌이야기(10)]성장의 발자취 주식회사 한국의 40년 성장 축소판

[로펌이야기(10)]성장의 발자취 주식회사 한국의 40년 성장 축소판

한국 최초의 국제변호사라 할 수 있는 김흥한 변호사는 60년대 초 울산에 정유공장을 지으며 진출한 미국의 걸프 오일사를 첫 고객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어 웨스팅 하우스, 코카콜라, IBM 등 내로라하는 거대기업들이 모두 김변호사의 손을 거쳐 한국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은행도 뒤를 이었다. 가장 먼저 김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은 은행은 체이스맨해튼은행.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도 60년대 중반의 비슷한 시기에 김변호사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으나 김변호사가 체이스맨해튼을 맡자 ‘김, 신, 유’의 설립자인 김진억 변호사를 찾아갔다. BOA는 김진억 변호사의 첫 고객이 됐다. 두 은행 모두 경쟁관계에 있으면서 같은 변호사에게 사건을 의뢰했을 경우 기업비밀이나 노하우 등이 새나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국내 로펌이 싹을 틔워 모습을 갖춰가던 60년대 후반 ‘김, 장&리’나 ‘김, 신, 유’에 쏟아진 일거리는 이처럼 외국기업의 직접투자 또는 은행 등의 국내진출에 따른 뒷치다꺼리가 대부분이었다. 이렇다 할 산업기반이 없었던 당시 국제변호사 사무실을 찾는 국내기업은 거의 없었다는 게 두 원로변호사의 회고다.

국내진출 외국기업이 첫 고객 특히 주목할 것은 초창기의 로펌고객 중 외국은행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선 은행 자체의 일이 만만치 않았다. ▶지점설립 인가신청 ▶지점설립 ▶대출 등 관련서류 작성 ▶담보설정 및 일반계약체결 대행 등 로펌이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여기에다 은행을 고객으로 확보함으로써 부수적으로 생기는 일감이 적지 않았다. 외국에 나가 사업을 하자면 은행을 찾지 않을 수 없는 이치인데 어떤 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정하면 고문변호사도 은행이 소개하는 사람을 쓰는 게 보통이기 때문. 김진억 변호사는 “BOA가 ‘김, 신, 유’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며 “유니온 카바이드(UCC), 유니온 오일 오브 캘리포니아 등이 모두 BOA를 통해 소개받은 고객기업”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국내 경제의 성장과 함께 로펌의 중점분야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또 이같은 변화에 순발력있게 대응해 가는 과정에서 로펌간 경쟁도 치열해 질 수밖에 없어 업계내의 판도변화가 반복됐다. 70년대 중반 이후 10년간은 산업·외환은행 등 국책은행과 일부 우량기업을 중심으로 차관도입이 봇물을 이루던 시기. 이와 함께 조선업의 발달에 따른 선박금융·수출입은행의 수출금융·중동건설경기에 따른 해외건설공사계약과 건설금융 등의 법률서비스가 주요 로펌에 의해 앞다퉈 개발됐다. ‘김, 장&리’‘김, 신, 유’외에 73년 설립된 ‘김&장’이 76년 시티은행 고문을 맡은 이후 빠른 속도로 성장하며 업계의 다크호스로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차관도입 붐 타고 급성장 77년 조중훈 한진그룹회장의 사위인 이태희 변호사가 설립한 ‘한미’는 한진을 배경으로 해상·보험·항공법과 항공기·선박금융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는 모든 것이 처음으로 시도되던 초창기라 이때 만들어진 양식 등은 이후 업계의 모범계약서로 남아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한미의 김수창 변호사는 “80년대 초 한미가 한국외환은행에서 국적취득조건부나용선(BBC)방식에 의한 선박금융을 주선, 한라그룹에 제공한 이후 당시의 선례가 한국해운업계의 독특한 선박금융 양식의 모델이 됐다”고 강조했다. 또 80년대 중반엔 각 로펌의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외국로펌에 의존하던 외화금융관련 각종 계약서류가 국산화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수확으로 평가되고 있다. 80년대 중반 이후는 한국경제의 발전과 함께 로펌업계도 본격적인 성장기를 맞은 시기라고 로펌변호사들은 입을 모은다. 국내기업들은 외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에 열을 올렸으며 외국기업의 국내합작투자가 줄을 이었다. 또 국내기업의 신용증가에 따른 해외증권발행 등 국제금융조달과 국내기업의 해외투자 상담도 꾸준히 로펌의 문을 두드렸다. 83년 신영무 변호사가 김두식 변호사와 함께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문을 연 세종과 86년 12월 합동법률사무소로 확대되며 로펌의 형태를 갖춘 태평양이 가세하는 등 로펌업계 내부적으로도 경쟁이 한층 치열해졌다. 86년 11월엔 국무총리실 조정관을 지낸 김찬진 변호사가 동서종합법률사무소를 열며 합류했고, 89년엔 미국의 ‘베이커&매켄지’에서 활약하던 윤호일 변호사가 윤세리·정영철 변호사 등과 함께 나중에 우방으로 바뀐 ‘윤&파트너즈’란 이름으로 가세했다. ‘김&장’의 경우 국내에 진출하는 외국기업을 많이 대리, 섭외파트에서 선두로 부상하기 시작했으며 다른 로펌들도 각각의 특징을 살려 경쟁력을 키워 나갔다. 한 변호사는 “많을 때는 국내진출 외국고객의 80% 이상을 ‘김&장’이 독차지 했다”고 ‘김&장’의 발전을 평가했다. 또 예일대 증권거래법 박사출신인 신영무 변호사가 이끄는 세종은 증권특수를 누리며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런가 하면 태평양이 6공말기 봇물처럼 터진 법정관리사건을 가장 많이 처리하는 등 송무사건에서 두각을 보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동서는 얼마전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 김찬진 변호사가 이끌 때만 해도 김변호사의 행정부경험을 장점으로 내세우며 대정부 인·허가 사건에 강하다는 평을 들었다. 이어 90년대 들어 6공 정부의 국제화추진으로 물을 만난 로펌은 93년 문민정부 출범이후 제각각 몸집을 최대한 불려 가며 무한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업무영역도 로펌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만큼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정보통신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어느 로펌이나 정보통신팀에 정예 변호사들을 포진시키고 있으며 통상마찰, 지적재산권분야도 각광받는 분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경제가 곤두박질치며 법정관리, 화의, 기업 인수·합병(M&A) 등 이른바 불황사건이 로펌의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사건으로 등장한 것은 주목할 부분.

‘불황사건’이 주요 수익원으로 이들 사건은 사건자체가 워낙 복잡하고 품이 많이 들기도 하지만 하나 같이 기업과 기업인의 생사를 가를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라 수임료도 다른 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고액이다. 반면 정부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요청에서 알 수 있듯 최근 들어 일반기업 등의 해외금융조달이나 신규사업진출 자문 등은 뚝 끊어졌다는 게 로펌변호사들의 하소연. 로펌의 한 변호사는 “불황사건도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고 오히려 다른 사건에 비해 수임료가 비싼 측면도 있지만 이처럼 불황이 계속되면 결국에는 로펌도 불황을 면할 수 없을 것”이란 말로 앞으로를 우려했다.

[명칭논란]국제변호사냐, 기업변호사냐? 그 동안 로펌의 변호사들을 흔히 국제변호사로 불러 왔지만 사법시험처럼 국제변호사가 되는 무슨 자격시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국제관련 사건을 주로 처리하는 변호사를 일컫는 말이다. 대부분의 로펌변호사들은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외국에 유학, 외국변호사 자격을 겸하기도 하나 이 또한 국제변호사의 필수요건은 아니다. 외국변호사 자격이 없더라도 국제관련 사건을 다룰 수 있으며 외국변호사 자격만으로 외국법정에 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목할 것은 로펌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미국의 경우 국제변호사보다 기업변호사가 먼저 발달했다는 점이다. 즉 미국내 기업에 관련된 사건을 주로 처리하다 국제거래의 발달로 국제관련사건으로 영역을 넓혀온 것. 반면에 국내로펌의 변호사들은 국제변호사로 출발, 국내기업의 법률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기업변호사로 무게중심을 옮겨 왔다. 이 때문에 로펌변호사들은 국제변호사보다 기업변호사란 말을 더욱 선호하기도 하나 기업관련 일만 처리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 모두를 포괄하는 말로 로펌변호사로 부르자는 의견도 있으나 아직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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