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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가전 다듬어 '일등진주' 만든다

백색가전 다듬어 '일등진주' 만든다

“창원에서 배워라.” 지난 8월31일, 경기도 이천에 있는 LG그룹 연수원 인화원(人和院). 구본무 회장을 필두로 LG그룹 계열사 사장 50여명이 CEO전략회의를 하기 위해 모였다. 말이 전략회의지 사실상 경기침체에 대비한 비상경영회의였던 셈이다. 이 심각한 자리에서 LG전자 디지털어플라이언스(舊 백색가전) 부문 김쌍수(56) 사장은 성공사례를 발표했다. 정보통신·금융·디지털 등 내노라 하는 첨단산업의 수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물간 ‘백색가전’ 사장이 ‘어떻게 하면 1등을 하는가’를 강의한 셈이다. LG그룹 계열사의 수장들은 김사장의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이 날 구회장은 “1등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는 상황이다. 불굴의 노력과 추진력으로 각 부문에서 1등이 되라”고 압박했다. ‘LG는 만년 2위’라는 세간의 인식를 의식했는지 구회장은 이 날 유난히 ‘1등’에 대해 강조했다. 이에 앞서 김사장이 성공사례를 발표한 것. 사실상 LG전자 창원공장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좀더 좁히면 바로 LG전자의 에어컨 ‘휘센’이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세계 에어컨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한 ‘휘센’. 마쓰시다·GE·캐리어 등 내노라 하는 업체들을 누른 값진 승리다. 2000년 4백10만대에 이어 올해는 4백90만대를 팔았다. 4천2백36만대 규모의 세계시장 중 11.6%에 해당된다. 15억 달러(원화 약 1조8천억원)나 되는 돈이다. 한국은 물론 미국·러시아·사우디 등 31개 국가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1백48개국에서 생산·판매되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상품이다. 지난해 초 새롭게 런칭(launching)한 브랜드 ‘휘센’이 어떻게 일거에 세계 톱 브랜드로 올라설 수 있었을까? 뭐니 뭐니 해도 일등공신은 김사장의 공격적 수출전략이다. 90년대 들어서면서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에어컨에 대한 수요가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때마침 93∼94년에는 엘니뇨 현상으로 여름 기온도 올라가 에어컨 판매에 도움을 줬다. 하지만 95년에 나타난 라니냐 현상으로 여름 날씨가 서늘해지면서 에어컨 판매에 타격을 입었다. 80대까지는 수요가 없어서 못 팔았고, 90년대에 들어서는 천수답(天水沓) 업종이 돼 버린 것이다. 게다가 95년에는 가전사들에 가격파괴 바람이 불어서 거의 모든 가전제품의 가격이 20% 정도 떨어졌다. 수익성 악화는 불 보듯 뻔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에어컨뿐만 아니라 가전사 자체가 보수적 경영에 돌입했다. 반도체나 정보통신기기 등 신규사업에 힘을 쓰고, 큰돈이 안 되는 백색가전은 현상유지나 내수시장 챙기기에 급급했다. 전통가전 제품은 일본이나 미국이 워낙 강세를 보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사실 그룹에서도 백색가전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눈치였다. “LG전자가 디지털쪽으로 가면서 가전은 조금 소외될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보수적으로 나올 때 공격적으로 김사장은 이때 수출을 생각했다. “그렇다고 명색이 본부장이라는 사람이 날씨 탓·상황 탓만 하며 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요?” 우선은 물량확대가 절실했다. 제조업체의 특성상 어느 정도 볼륨이 돼야 원가 경쟁력이 생기는데, 국내 시장만으로는 도저히 경쟁력이 생기지 않았다. 에어컨의 경우 해외 시장을 개척하면 계절에 상관없이 4계절 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중동·인도·독립국가연합(舊 소련) 등 신흥시장의 수요도 기대할 수 있었다. 국내 시장이 어렵다고 수세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오히려 공격적으로 수출 드라이브를 걸었다. 뒤집어 생각한 것이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브랜드도 알려져 있지 않았고, 한국 제품에 대한 이미지도 좋지 않았다. 가전제품 중 고가에 해당하는 에어컨의 경우 일본과 미국 기업 제품의 시장 지배력이 확고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해외 영업망을 총동원했다. 국내 영업인력들도 해외로 내보냈다. ‘수주 못 해오면 태평양에 빠져 죽어라’는 뼈있는 농담도 했다. 그만큼 절박했었다. 정상가격보다 15% 정도 싸게 받아와도 납품했다. 그 정도 가격협상권은 협상자에게 줬다. 대신 내부 생산에서 원가절감을 통해 이윤을 맞춰나갔다. 수출 초기이기 때문에 이윤보다는 판로개척이 우선이기도 했다. 일단 96년에는 중남미 지역을 위주로 ???정도 물량이 들어왔다. 97년에는 이보다 조금 더 는 ??정도였다. 조금씩이긴 하지만 점차 수출물량이 늘어나고 있던 차에 외환위기가 닥쳤다. IMF체제가 되면서 환율이 급속히 올랐다. 전화위복(轉禍爲福). 말 그대로였다. 환율이 오르니 가격경쟁력이 커졌다. 수출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던 셈이다. 이때부터 수출이 급속히 늘어났다. 97년 ??대이던 수출물량이 98년에는 ??대로 99년에는 ??대로 급증했다. 95년부터 추진한 수출드라이브가 때를 만나 LG에어컨을 단번에 세계 1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세계최대 시장인 미국에서도 일본 업체들을 누르고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남들은 일감이 없다던 IMF때 창원공장은 더 바빴다. 97년을 기점으로 내수·수출 비율이 6:4였던 것이 3:7로 바뀌었다.

라인 줄여야 생산 는다 얼핏 운이 좋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수출 드라이브를 걸던 중 마침 외환위기가 닥쳐 환율 덕을 본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사장이 수출드라이브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밖으론 수출드라이브를 걸고 안으론 혁신을 거듭했다. 혁신은 그가 세탁기사업부 담당 이사였던 89년부터 시작된다. 우선 불필요하게 긴 라인부터 줄였다. 당시 세탁기 생산라인은 2백40m. 그때까지만 해도 공장의 라인은 일종의 ‘세 과시’와 같은 의미가 있었다. 긴 라인을 보유할수록 대규모 공장이라는 자부심 같은 게 있었다. 김사장은 라인부터 줄였다. “연구 끝에 부품공정을 최대한 압축했더니 라인은 40m로, 라인당 인원은 기존의 3분의 2로 줄었습니다.” 생산성이 올라간 것은 당연했다. 만들어내는 물건은 같았다. 라인이 길고 공장이 커야 많은 제품이 나온다는 것은 ‘착각’이라는 게 김사장의 생각이다. “흔히 제조업체 사장들이 공장의 핵심경쟁력은 라인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건 틀린 얘기죠. 라인은 시스템만 갖춰 놓으면 저절로 돌아갑니다. 부품과 재료 갖다주면 누구나 물건을 만들어 냅니다. 진짜 경쟁력은 라인 밖에서 나오죠.” 즉 어떻게 하면 좀더 간단하게, 쉽게, 질 좋은 제품을 만드느냐를 고민하는 것이 경쟁력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라인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문제를 풀어줘야 공장의 경쟁력이 올라간다는 뜻이다. LG전자 백색가전의 메카인 창원공장은 지난 95년 이후 건물 한 동, 땅 한 평 늘리지 않고 연평균 22% 정도씩 매출이 커지고 있다.

5%는 불가능해도 30%는 가능하다 95년, 가전회사에 가격파괴 바람이 불었다. 업체들이 소비자 가격을 20%씩 인하한 것이다. 원가압박이 뒤따랐다. 이때 김사장은 ‘5%는 불가능해도 30%는 가능하다’라는 비논리적인 구호를 내세웠다. “생산성이든, 원가절감이든, 매출이든 5%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거나 30%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거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5%씩 높이면 1년 뒤에 또 5% 높여야 하고, 이런 일이 해마다 반복됩니다. 아예 30% 정도 확 점프를 하면 그 다음부터는 변화를 주도할 수 있습니다.” 시장추세에 뒤따라가기보다는 시장의 변화를 앞서나가자는 얘기다. 얼핏 무모한 것 같지만 이렇게 목표를 높게 책정하고 집중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김사장의 스타일이다. “우리와 경쟁하는 기업 치고 1년에 5% 정도 혁신 안하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혁신이라는 게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면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으로 해야죠. 보고용으로 5% 했다고 하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이런 캐치프레이즈 아래 ‘3BY3 운동’(3년간 생산성을 3배로 끌어올리기)과 ‘6시그마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그 결과 공장을 더 늘리지 않고, 인원은 오히려 줄이면서도 매출액은 점점 늘어갔다. 95년에 ??이던 디지털어플라이언스 매출액인 2001년에는 4조2천억원에 이른다. 6시그마 프로그램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관리·경영 체제를 구축했다. 모토롤라·GE·소니 등 세계 초우량기업의 수준인 6시그마 프로그램 도입에도 성공했다. 1백만개당 10만개의 내부단선불량이 나왔던 청소기와 1백만개당 6천개의 불량제품이 나왔던 가스레인지의 불량률이 제로로 떨어졌다. 95년 말 GE로부터 전수받은 6시그마 프로그램을 지금은 GE가 오히려 벤치마킹을 하고 있다.

효율 높이려면 일 줄여라! LG 창원공장에 가면 건물 구석구석에 ‘TDR OO팀’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허물고 다시 짜라’라는 의미로 ‘TDR(tear down & redesign)’이란 명칭으로 테스크포스팀을 조직해 상시로 운영하고 있다. 기존의 업무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좀더 다른 방법으로 혁신할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는 조직이다. 여기에는 신제품 개발이나 마케팅뿐 아니라 회사조직·생산합리화·구매과정·조직운영 등 모든 것이 대상이다. TDR 운영요원을 기존 부서에서 지원받는다. 조직의 반발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김사장의 생각은 확고하다. “일이 열개라고 이걸 다 할 필요는 없어요. 사실 몇 개는 안 해도 상관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과감히 몇 개를 포기하고 나머지에 집중하는 게 효과가 더 큽니다.” TDR은 바로 숨어 있는 유휴인력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팀별로 짧게는 1개월짜리 조직부터 18개월짜리 조직까지 다양하다. 인원도 3∼4명부터 10여명이 넘는 조직까지 있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 중 일부는 자기 부서의 일을 하면서 TDR에 참가하는 사람도 있고, 일부는 TDR에만 전념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 팀을 만들면 재무·설계·마케팅·생산·홍보 등 다양한 부서의 사람들이 같이 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처음 TDR을 운영할 때는 ‘혹시 부서에서 밀려나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 경력에 장점이 되자 오히려 서로 TDR에 지원하고 있다. 김사장은 “TDR이야 말로 LG 창원공장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자랑했다. 지금도 1백10개 정도의 TDR팀이 가동되고 있다. 한 달에 최소한 이틀은 TDR팀을 둘러보는 데 쓴다. 보통 하루에 40개 정도를 돌아보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현장직원들과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고 결정을 내린다. 사원·대리·과장급 직원들과도 격의 없는 대화를 할 뿐 아니라 토론에도 막힘이 없다. 결정도 바로 그 자리에서 한다. “스피드 경영을 하려면 현장경영을 해야 합니다. 문제가 제기된 그 자리에서 바로 판단하고 지시를 내려야 일을 두 번 안 하죠. 만약 1백개가 넘는 TDR팀을 제 방으로 불러들이면 한 달 내내 만나도 다 못 만날 겁니다.” 33년간 백색가전에서 일해온 전문가다운 면모다.

33년간 매달린 백색가전 귀신 남들이 감히 할 수 없는 ‘뒤집기’를 통해 ‘퇴물’로 취급받던 백색가전을 ‘옥동자’로 만든 김쌍수 사장. 그는 69년 LG그룹에 입사한 뒤로 쭉 가전분야에서만 일했다. 기계공학과를 나와 엔지니어로 입사한 그는 초기에 냉장고 설계를 맡았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33년간 백색가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가전업계 최고의 ‘짠밥’이다. 특히 창원공장과 인연이 깊다. 33년간 창원공장에 몸담아 왔다. 창원공장은 한마디로 그의 손바닥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디에 어떤 라인이 있고, 어디에 무슨 창고가 있는지 훤하다. 그의 집은 창원이다. 서울에 본사를 둔 대기업 CEO들이 대부분 서울에 집을 두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김사장은 ‘창원이 디지털어플라이언스의 본사’라고 당당히 말한다. “창원에서 근무하다가 서울로 승진해 간 사람도 많습니다.”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지방으로 좌천오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 성과를 내 서울로 승진해 가는 경우가 많다는 설명이다. 회사가 잘되다 보니 김사장도 종횡무진이다. 한 달 중 열흘을 각각 창원·서울·외국에서 보낸다. 96년 이후 거의 그렇게 지냈다. 멕시코·브라질·일본·중국·미국·독일·인도·사우디 등 안 가는 곳이 없다. 현지시장 분석·신기술 동향·현지 판매 독려 등을 위해 간다. 시차는 이미 초월했다. 건강관리를 위해 틈나는 데로 ‘야깅’을 한다. 밤에 주로 뛰기 때문에 ‘야깅’이라고 부른다. 김사장이 평소 강조하는 것은 ‘현장경영’. 잭웰치와의 몇 차례 만남에서 현장경영의 중요성과 효과를 알았다고 한다. “흔히 사장은 자질구레한 것 많이 알면 안 좋다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입니다.” 사장이 구체적으로 알아야 문제가 생기면 즉시 해결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많이 알아야 현장경영이 가능하고 그래야 스피드 경영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제 에어컨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한 김사장의 다음 ‘뒤집기’는 뭘까? 우선 에어컨 부문에서 확고한 1위 굳히기를 준비하고 있다. 상업용 에어컨시장에서 경쟁력 강화가 바로 그것. 가정용에 비해 시장이 급속히 커지고 있는 상업용 에어컨 시장이 미래의 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에어컨 총 매출에서 15%에 불과했던 시스템에어컨 비중을 2005년까지 40% 선으로 늘릴 계획이다. 또 에어컨 전체 매출액도 2005년까지 35억 달러로 확대해 명실상부한 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해 11월 마쓰시타와 전략적 제휴를 하는 등 글로벌 전략도 구축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에어컨·냉장고·세탁기·전자레인지·청소기 등 5가지 제품에 집중 투자해 세계 가전업계의 톱3가 되겠다는 야심적인 계획도 세웠다. 또 매년 12%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보이는 중국 시장 공략을 위해 텐진(天津) 생산법인의 생산능력을 올해 1백만대 수준에서 1백40만대 수준으로 늘릴 계획이다. 또 인터넷을 접목한 가전제품을 개발함으로써 디지털 시대를 주도하는 생필품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창원공장 사무실·복도·화장실에는 ‘그레이트 컴퍼니, 그레이트 피플(Great company, Great people)’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6년 전 ‘혁신’ ‘생산성’ 등 생존차원에서 시작한 구호가 한결 웅장해지고 여유로워진 것이다. LG전자의 백색가전이 적어도 생존을 걱정하던 단계는 지났음을 말없이 웅변하는 셈이다. 하지만 생존경쟁에서 막 살아남은 LG전자가 정말 ‘위대한 회사’로 진입할지, 그래서 김사장은 물론 6천명이 넘는 직원이 위대한 직원이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지금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 아니겠어요?” 자신만만한 김사장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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