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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低로 日 생활물가 '들먹'

엔低로 日 생활물가 '들먹'

가끔씩 점심을 가볍게 햄버거로 때우던 스즈키는 얼마 전 맥도날드 햄버거의 계산대에서 작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햄버거 값을 평일 반액으로 받아오던 맥도날드에 익숙한 탓에 1백엔을 내고 거스름돈을 기다렸으나 점원은 웃으며 “값이 다시 원상태로 올랐으니 돈을 더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점원은 “엔저로 원재료 조달비용이 올라 가격을 원상회복하기로 한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곁들였다. 비싸진 햄버거를 먹으며 신문을 뒤적이던 스즈키의 눈에는 ‘엔저로 수입물가 연쇄상승 전망’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더욱 큼지막하게 들어왔다. 돈까스를 좋아하는 미나미씨도 새해 첫 출근날 사무실 지하의 돈까스 체인점에서 점심식사를 하다 메뉴판이 새로 바뀐 것을 깨달았다. 식사메뉴는 거의 그대로인데 가격이 조금씩 달라진 것이다. 돈까스·모듬까스 정식이 대체로 30∼50엔 정도 올라 있었다. 작년 12월 중순 이후의 엔저로 원재료인 수입 돼지고기와 부재료인 수입 양배추 값이 오르는 바람에 이를 가격에 반영했다는 것이 점원의 설명이었다. 일본이 경기부양을 위해 추진중인 엔저유도 정책은 일본인들의 일상생활에 여러 가지 영향을 안겨다 주고 있다. 거시경제적으로 본다면 엔저로 수출이 살아나 경기회복을 이끈다는 점에서 수출업체 근로자들에게는 심리적인 안도감이 될 수 있다. 혹독한 감원태풍을 다소나마 비껴갈 수 있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산요전기를 필두로 대기업들이 잇달아 일자리 나누기인 워크셰어링을 도입하고 있는 것도 엔저 기간 중 구조조정의 부담을 덜어보자는 계산이다. 노조도 임금인상 요구를 포기하고 고용안정을 당면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엔저로 하반기부터는 어떻게든 경기가 풀리지 않겠느냐는 기대로 일단은 참자는 것이다. 이와 함께 주식에 투자하고 있는 개미군단은 연초부터 힘찬 출발세를 보인 도쿄증시를 엔저바람이 더욱 불을 지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 일본인들의 실생활에 와닿는 엔저는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다. 오래간만에 자국 통화가치 하락을 당해보는 일본인들은 다소 의외라는 반응도 한다. 지난 연말연시 한국에 관광을 다녀온 호리카와씨는 “인천공항의 환전창구에서 5만엔을 바꿨는데도 50만원이 채 안 됐다”고 투덜거렸다. 1년 전만 해도 55만원 정도는 됐지만 지금은 1백엔당 1천원선이 깨진 것이다. 호리카와씨가 서울에서의 씀씀이에 제약을 느낀 것은 물론이다. 물가를 단순 비교해도 교통비 빼고는 대부분 도쿄 물가와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외식을 하거나 술을 마시려면 오히려 도쿄보다 더 비싸게 든 경우도 많이 겪었다. 하찮은 양말만 해도 서울에선 한켤레에 보통 1천원을 줘야 하지만 도쿄에서는 98엔짜리로 한철 잘 신을 수 있다. 엔의 위세를 호쾌하게 보이던 과거를 떠올리면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라고 한다. 도쿄에 돌아온 뒤에도 그는 생활이 만만찮게 돌아가고 있음을 실감해야 했다. 광우병으로 수입 쇠고기만 사먹고 있는데 여기에도 엔저의 유탄이 날라오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미국에서 수입돼 들어오고 있는 쇠고기 값이 슬슬 들먹거리고 있는 것이다. 광우병을 무서워한 일본 주부들이 수입쇠고기로 몰려 수요가 늘어난 것도 원인이지만, 가격인상의 주범은 역시 급격한 엔저다. 수입 쇠고기뿐 아니라 수입농산물 값도 움직이고 있다. 특히 중국산 및 한국산 야채 값이 움직이고 있어 이들을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는 외식업체들이 연초부터 가격조정에 나서고 있다. 의식주와 무관한 외국의 고급브랜드들의 값도 오를 전망이다. 가격을 워낙 높게 책정해 놓고 있는데다 몇% 정도의 엔저를 반영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아직까지는 눈에 띄는 인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엔저가 장기화되면 인상러시는 불가피해진다. 엔저에 따른 수입물가의 상승은 결국 일본 국내물가를 끌어올리게 된다. 한국에서는 물가상승하면 번쩍 놀라지만 일본 정부는 오히려 반가와하고 있다. 그동안 물가가 계속 하락하고 이것이 기업의 수익을 저해해 다시 경기를 위축시키는 악순환, 즉 디플레의 연속선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엔저에 따른 수입물가의 상승은 이 악순환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고 일본 정부는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물가가 앞으로도 계속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면, 즉 디플레가 더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되면 지금 소비를 하기보다는 더 기다린 뒤 소비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일본 정부는 지금의 일본의 민간소비 위축이 바로 이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반대로 향후 물가가 오를 것이라고 예상되면 장래의 소비를 현재로 앞당기는 것이 합리적이다. 엔저는 바로 이런 소비촉진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노림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실생활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교과서적으로 소비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일본인들은 10년간의 불황에 익숙해 있어 한두푼의 가격변화에 지갑끈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오무렸다 하지를 않는다. 또 가옥면적이 좁아 내구성 소비재를 신규로 사들이는 수요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제한돼 있다. 게다가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검약한 천성 탓에 한 번 물건을 사면 닳도록 쓴다. 제품의 소유 및 사용 기간이 무척 길다는 것이다. 1991년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한 일본의 백색가전제품 시장에서는 사용기간의 증가로 좀처럼 판매가 늘지 않고 있다. 신규교체 수요가 있기는 하지만 교체이유도 ‘신제품을 쓰고 싶어서’보다는 ‘쓰던 것이 고장나서’가 훨씬 많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인들의 소비패턴이 이미 디플레 경제환경에 맞춰 종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진화(進化)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책 읽는 것 이외에는 다른 취미가 없는 아오야마씨는 책 사는 데 들이는 돈을 2년 전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이면서도 더 많은 책을 사보고 있다. 비결은 간단하다. 중고서점이나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중고책을 사보는 것이다. 그의 단골은 일본 전국에 5백50여개 체인점을 거느린 일본 최대의 중고서적 전문점 북오프(BOOK-OFF)다. 깔끔한 성격의 아오야마씨는 원래 퀴퀴한 곰팡내 나는 헌책방을 싫어해 좀처럼 중고책을 사보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의 권유로 북오프를 가본 뒤 생각을 바꿔먹었다. 밝은 형광등 조명, 스피커에서 기세좋게 흘러나오는 최신 유행가, 10∼20대의 젊은 점원들,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붙여져 있는 가격표, 쇼핑객들을 위한 카트 등이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금상첨화는 가격이다. 무조건 정가의 50%인데다 좀 오래된 책은 모두 1백엔이다. 잘만 고르면 1년 전의 베스트셀러 문고판(정가는 대개 7백∼8백엔)을 동전 한닢으로 살 수도 있다. 그렇다고 책이 너덜너덜하거나 누렇게 바랜 것도 아니다. 북오프가 자체개발한 헌책 청소기가 말끔하게 다듬어주기 때문에 아오야마씨는 저항감을 느끼지 않았다. 헌책뿐만이 아니다. 일본의 중고시장은 급속히 확대돼 중고자동차의 판매대수는 신차의 1.5배 나 된다. 골프용품 전문점도 급속히 늘어 유명한 혼마 드라이버를 1만∼2만엔에 파는 곳도 있다. 중고품의 개인간 거래가 중심이 되는 인터넷 옥션사이트의 등록회원수는 1백만명으로 불어났다. 일본국민 1백명당 1명이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출품된 품목도 상시 1백만개를 넘고 있다. 그만큼 개인간의 중고품 거래가 활발하다는 얘기다. 이런 소비풍조 때문에 엔저가 물가상승을 유도하고 이것이 민간소비를 촉진해 수출과 함께 경기회복의 쌍두마차로 삼겠다는 일본 정부의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지는 의문이다. 특히 불황에 적응해 발전한 중고시장은 통계상으론 국민소득(GDP)의 증가에 기여하지 못한다. 신품 구입의 필요성을 줄이므로 거시경제면에서는 오히려 전반적인 소비를 저해하는 요소로 비춰질 수도 있다. 일본인들의 일상생활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기 시작한 엔저이지만 그 효과를 간단히 예측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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