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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자금 잉여시대…달라진 돈 관리 非常!

기업자금 잉여시대…달라진 돈 관리 非常!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 요즘 국내 주요 대기업들의 재무담당자들은 때 아닌 돈 고민에 휩싸여 있다. 하지만 고민의 내용이 과거와는 다르다. 예전에는 없어서 난리였지만 최근에는 넘쳐서 고민이다. 한국은행의 박승 총재는 기업들의 여유자금을 16조원이라고 추산했지만 시장 관계자들은 이보다 더 많은 수십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증권사 사장은 “국내 기업들이 단군 이래 최대의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삼성전자 한 기업만 보더라도 올 연말 현금보유가 무려 10조원에 육박할 것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그냥 많다가 아니라 돈 ‘처치’문제가 현안이 되는 형국이다. 기업들의 자금이 이렇게 넘쳐 나는 것은 경기 회복으로 장사가 잘 돼 돈을 벌었지만 투자할 곳이 마땅히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탓에 기업 자금 담당자들의 역할은 ‘자금 끌어오기’에서 ‘자금 운용 및 관리’로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 재무담당자들의 주된 역할은 어떻게 하면 원활하게 자금을 조달할 것인가에 집중돼 있었다. 회사채 만기가 되거나 은행대출 상환기일이 닥치면 이리저리 돈을 돌려 급한 불을 끄는 게 재무담당자들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과거 자금 담당자들은 은행 대출이든 사채(私債)든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이제 1백80도 바뀌었다. 돈 구하는 것보다는 있는 돈을 어떻게 굴리는가가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한마디로 국내 기업들도 ‘기업자금 잉여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자금 잉여시대의 가장 도드라지는 풍경은 기업들의 자금 운용이 극히 보수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점. LG그룹 계열사의 한 자금 담당자는 “첫째도 안정성, 둘째도 안정성”이라고 자금운용 원칙을 밝혔다. 주식이나 부동산은 쳐다 보지도 않는다. 부동산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삼성그룹의 한 자금담당자도 “본업과 관계된 것이 아니면 부동산을 쳐다볼 일이 없다. 외국인 주주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어떻게 쓸데없는 짓을 할 수 있겠느냐. 필요하다면 부동산을 팔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위험자산은 아예 처음부터 고려 대상도 아니라는 것. 대부분의 기업들은 아예 ‘회사자금으론 주식투자를 못 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놓고 엄격히 지키고 있다. 문어발식 확장도 이제는 사절이다. 마구잡이로 사업영역을 넓혀가다 IMF를 맞았고, 그 이후엔 대우그룹의 말로와 그 후폭풍을 너무도 뼈저리게 경험했다. . SK그룹의 카드업 진출·KT지분 인수, 롯데그룹의 미도파 인수 등 기업 인수 및 합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본업과 관련이 있는 회사들이다. 사세를 무작정 키우기 위한 용도로는 돈을 잘 쓰지 않는다. 여유자금을 금융상품에 운용할 때도 이런 보수적인 특성은 잘 드러난다. MMF(머니마켓펀드)와 MMDA(수시입출금식 예금)등의 초단기상품과 3개월물인 기업어음 그리고 1년미만의 산금채 등 우량채권이 아니면 아예 손을 대지 않는다. 돈 운용을 단기적으로 하는 것은 유동성 확보를 위해서지 재테크 목적이 아니다. 한 중견 기업체의 자금 담당자는 “돈이 있지만 수익률 극대화를 자금을 운용하지는 않는다. 현금흐름을 좋게 만드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주로 단기 금융상품에 돈을 넣어두고 있다”고 말한다. 한 증권사 채권운용팀장도 “최근 대기업 자금 담당자들에게 주로 문의를 받는 것은 머니마켓펀드와 은행 예금 중 어디에 넣는 것이 좋느냐가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요즘 채권시장의 큰손은 은행도 아니고 기관투자가들도 아니다. 바로 대기업들이다. 대기업들은 유통시장에서 물량확보가 여의치 않자 발행시장에서 입도선매식 물량떼기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안전성을 추구한다고 금리를 따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금리 수준은 탐탁치 않지만 1%라도 악착같이(?) 따진다는 게 금융시장 관계자들의 얘기다. 조흥은행 관계자는 “과거에는 주거래은행과의 관계를 생각해 이자가 거의 없는 보통예금이나 당좌예금에도 돈을 넣어 주곤 했다. 지금은 이런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 1%라도 금리를 더 주는 곳을 찾아서 돈이 옮겨간다”고 말한다.

보유 현금 범위 내에서만 투자한다 투자 패턴도 과거와는 다르다. 과거에는 여기 저기서 돈을 끌어다 신규 투자하기에 바빴다. 대출이든 어음발행이든 자금 조달 통로만 있으면 돈을 끌어댔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투자수익기대치가 자금운용수익률보다 크지 않는 한 투자를 삼가하는 게 요즘 기업들이다. 지금은 경기회복기라 하지만 불확실성이 높아 그 기대치가 매우 낮다. 저금리기조로 인해 쥐꼬리만한 이자를 받지만 금융기관에 넣어두는 것이 투자하는 것보단 낫다. 금융기관에 묻어두었다가 여차하면 빼다 쓸 수 있게 현금화가 보장된 단기 채권을 선호한다. 투자를 하더라도 보유현금 내에서만 투자하거나 심지어 일부 기업들은 감가상각비 범위 내에서만 투자하겠다는 입장이다. 지난 6월 말 현재 3조7천억원의 현금을 보유한 현대자동차그룹은 올해 1조4천억원가량을 투자할 계획이지만 나름대로 엄격한 기준을 정해놓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자금운용의 핵심은 여전히 유동성 확보와 수익성 관리”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IMF 사태를 거치면서 확실히 배운 것은 유동성 확보를 못하면 위기를 관리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며 “현금흐름을 좋게 만드는 것은 모든 기업들의 공통된 관심사”라고 덧붙였다. 그 나마 투자계획을 갖고 있는 기업들도 최근 들어서는 주춤하는 모습이다. 특히 수출 비중이 높은 기업들은 그 정도가 심하다. 삼성전자와 함께 삼성그룹내에서 알짜배기로 꼽히는 삼성코닝이 그렇다. 이 회사의 자금팀 관계자는 “삼성코닝의 주력제품인 칼라전면유리의 매출 중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95%에 이르기 때문에 미 경제상황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며 “매일 아침 출근해서 인터넷으로 미 경제 관련 뉴스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 업무”라고 말한다. 기업들의 이런 투자패턴으로 인해 주식·채권 등 신규 유가증권의 발행도 급격히 줄었다. 오히려 채권 등의 부채는 만기가 돌아오는 즉시 갚거나 저금리의 채권을 발행해 상환해 버리고 있다. 증권사에서 채권 발행 업무를 하는 한 직원은 “채권을 발행하고 싶어도 발행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대기업들의 신규 채권 발행은 어림도 없고, 신용도가 떨어지는 기업들의 채권 발행을 찾아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친 현금 확보전략, 부메랑 우려도 기업들의 부채 줄이기·현금 확보·안전자산 선호 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곳은 금융기관들이다. 금융자본은 산업자본의 젖줄 노릇을 한다. 그런데 기업들이 젖을 찾고 있지 않다. 채권 발행도 필요 없고, 대출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한 대기업 여신 담당자는 요즘 자신이 하는 일이 대출 제의를 거절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는 “하루에도 3~4명의 외국계 은행 기업여신 담당자와 국내 은행 담당자들이 찾아 오지만 서로 대화만 나눌 뿐 신규 대출을 아예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기업 돈이 금융기관의 단기상품에서 맴맴 돌고 있는 셈이다. 기업들의 유동성 확보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급변하는 국내외 경영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업부문의 현금흐름이 잘 돌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현금보유 증가는 나쁘게 볼 것만도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계속 기업(going concern)’으로 성장하기 위해 끝임없이 엔진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엔진은 신규 투자나 설비 확충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기업들이 금융업이 아닌 이상 이자만으로 기업을 경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영도 경영이지만 국가경제에도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기업이 투자를 해야 다른 나머지 경제주체들, 가계나 정부부문들이 굴러가게 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돈이 기업과 금융시장사이만을 맴돌게 되면 경제의 균형 있는 성장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지나친 현금확보전략은 나중에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부메랑 효과를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들이 자금 잉여시대를 맞아 가장 우려하는 바가 바로 이 점이다. 자칫 투자시기를 놓치면 기업 경쟁력 강화를 이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근 기업들은 설비투자를 크게 늘리지 않고 있다. 그동안 세계 경제의 기둥인 미국 경기에 대한 불안감·환율 하락 등 불안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 2~3년간 국내 경기를 이끌고 온 것은 국민들의 호주머니였다. 즉, 건설 및 부동산과 내수업종이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다. 주식시장이나 기업들이나 모두 바라는 것은 수출 경기의 회복이다. 하지만 미국 시장의 불안으로 수출 경기 회복세는 더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 외국계 은행 지점장은 “지금과 같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투자를 늘리지 않는 것은 심정적으론 이해가 된다. 하지만 향후 기업들의 경쟁력을 생각해 볼 때, 지나치게 수출 경기가 회복되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문제”라며 “내수 성장만의 성장은 곧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어쨌든 기업들은 현금흐름을 기업경영의 최대 덕목으로 여기고 있는 만큼 앞으로 투자 성수기가 돌아온다 하더라도 외부차입은 가급적 삼가하고 자체 자금동원 능력 범위 내에서 투자금을 마련할 것인 만큼 자금 잉여 상태는 지속될 전망이다. 기업자금 잉여시대는 기업들에게 새로운 시험대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수 몇몇 기업들을 제외하곤 기업들이 이런 유동성을 확보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를 흔히 ‘도요타 뱅크’라고 불린다. 막강한 현금 보유능력으로 웬만한 금융기관 이상의 파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이 도요타 뱅크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돈뿐만 아니라 도요타처럼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기업자금 잉여시대를 맞아 국내 기업들이 어떤 모습으로 활로를 개척할지 두고 보는 것도 한국 기업사(企業史)를 보는 주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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