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현대그룹]“장사를 하기 위해 정상회담이 필요했다”
[秘話 현대그룹]“장사를 하기 위해 정상회담이 필요했다”
남북 정상회담은 정몽헌의 작품 “현대가 하면 역사가 된다.” 현대맨들이 자주 하는 말 가운데 하나다. 결국 정회장도 현대맨으로서 역사를 좇아가기보다는 역사를 직접 만들려고 했다. 정회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했던 또 다른 측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정회장은 2000년 5월24일 북한의 금강산 관광을 위한 장전항(일명 고성항) 부두공사 완공식 행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자에게 말했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곧 열릴 예정이다. 정회장이 이 회담을 위해 막후에서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나는 돈을 버는 장사꾼일 뿐이다.” (대북사업가로서 볼 때 통일은 언제쯤 될 것으로 보나) “5년 내 남북한이 함께 사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남북한의 ‘경제적인 통일’이 되는 것이다. 북한도 곧 중국 정도의 경제교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그때가 되면 남북간 이산가족의 자유로운 왕래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법률적·정치적인 통일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정회장은 당시에도 남북 정상회담의 막후 역할설에 대해 적극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다. 다만 우회적으로 ‘나는 장사꾼이다’고 표현했을 뿐이다. 그리고 정회장의 이 대답은 당시 ‘나는 남북 정상회담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말로 해석됐다. 그러나 정회장은 속으로 ‘나는 장사꾼으로서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역할을 다했다’는 이중적인 의미로 답변했던 것이다. 그는 현대그룹이 대북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외교적인 장애물까지도 직접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독특한 ‘장사꾼론’이었다. “현대가 하면 역사가 된다” 이런 사고는 그의 부친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측면이 많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후계자인 정회장이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대북관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재계에서는 정주영 명예회장과 그의 후계자인 정회장의 ‘장사꾼론’을 무모한 것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롯데그룹 고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신격호 회장은 당시 일본에서 가까운 사람을 만나 현대그룹에 대해 우려했다.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회장이 대북사업을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봤던 것이다. 현대그룹이 하는 대북사업은 장사꾼이 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매우 잘못된 거라는 얘기다. 신회장의 판단은 장사꾼이라면 아직은 북한에 수혈할 때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신격호 회장은 굳이 왜 이 같은 말을 했을까? 당시 롯데그룹은 삼성그룹과 함께 대북사업 참여설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신격호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을 독대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런 이야기가 급속하게 퍼졌다. 청와대는 대북사업에 롯데그룹도 참여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한때 롯데제과가 북한에 과자공장을 추진하면서 4,500억원의 초기 자금까지 준비했다는 소문이 구체적으로 떠돌기도 했다. 현대그룹이 자금난으로 홍역을 치를 때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인수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확산됐다. 어찌 됐든 정회장은 장사꾼으로서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앞당기는 역사의 한 장을 쓴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정회장은 이에 앞서 이미 남북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을 짐작하고 있었다. 98년 11월6일. 정회장과 정주영 명예회장은 바로 직전인 10월30일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정회장 일행은 당시 김위원장에게는 금 150돈쭝의 학(시가 500만원)을, 김용순 아태위원장에게는 50돈쭝의 행운의 열쇠(시가 200만원)를 선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회장은 이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의 통일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비공개 증언을 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백화원 초대소로 찾아와 우리 일행을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지난 94년 합의됐던 남북 정상회담이 김일성 사망으로 무산된 데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 말을 들은 한나라당 이세기 의원이 “김정일의 발언이 정상회담을 희망하는 것으로 보였느냐”고 묻자 그는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며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회장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뒤 정상회담 가능성을 항상 머릿속에 두고 있었다는 게 현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정회장은 이런 엄청난 국가 대사를 어떻게 성사시킬 수 있었을까? 정회장이 특검에서 한 말이다. “99년 12월 말께 나는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에게 ‘우리(현대그룹)가 남북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익치 회장은 98년부터 대북사업을 위해 북측과 접촉했습니다. 그는 한국계 일본인인 요시다의 중계로 북측의 아시아태평양 부위원장인 송호경과 접촉을 했습니다. 이후 이익치 회장으로부터 북측에서 남북 정상회담 추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정회장의 말에 따르면 그의 최측근인 이익치 회장에게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라고 지시한 지 한 달 만에 일을 성사시켰다는 설명이다. 이익치 회장도 일치되는 진술을 하고 있다. “정회장은 저에게 ‘이런 일은 보안을 요하는 사안이니까 요시다를 다시 만나 북한 측의 의사를 타진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익치 회장은 요시다를 만나 이 같은 뜻을 전했다. 이익치 회장의 진술은 이어진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데, 무슨 일 때문에 요시다가 국내에 들어왔을 때다. 당시 나는 그를 만나서 ‘정회장님께서 남북 정상회담을 알아봐 달라고 한다’고 했다. 얼마 뒤 요시다로부터 가능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요시다는 ‘저쪽(북한)의 조건이 안기부 사람(임동원 국정원장을 지칭)을 대표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정회장은 박지원 장관을 앞세우는 것이 제격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서울 플라자호텔 로비 커피숍에서 정회장과 박지원 장관의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첫 만남은 이렇게 이뤄진 셈이다. 그런데 이익치 회장은 어떻게 이 일을 쉽게 추진할 수 있었을까? 정회장의 남북 정상회담 성사 뿌리를 찾아보면 역시 정주영 명예회장이 서 있다. 한국 재계의 ‘왕회장’으로서 정주영 명예회장의 북한 인맥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 셈이다. 그렇다면 왕회장의 북한 인맥은 누구일까? 그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시절(77∼87년) 한국 주재 일본 특파원인 고바야시를 알게 됐다. 고바야시는 북한의 대남 공작 비서인 김용순 아시아태평양위원회 위원장을 잘 알았다. 고바야시는 당시 왕회장을 김용순 위원장과 연결시켜 줬다. 그의 중재로 허담의 초청을 받게 된 셈이다. 결국 왕회장이 89년 역사적인 첫 방북(평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고바야시의 역할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왕회장은 북측과 교류가 거의 끊겼다. 김영삼 대통령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부 주도로 대북교류를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 정권이 출현한 98년부터 다시 민간교류에 물꼬가 트였다. 왕회장이 첫 방북한 지 10년 만이다. 왕회장은 98년 1월 초 집무실로 이익치 회장을 불렀다. 그는 이익치 회장에게 편지 한통을 내밀었다. “일본에 가서 고바야시를 찾아가 편지를 전달하시오.” 고바야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왕회장이 89년 첫 방북을 할 때 김용순 아시아태평양위원회 위원장을 소개해 줬던 인물이다. 편지 내용은 김용순 위원장에게 다시 평양을 방문해 대북사업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익치 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고바야시는 이미 김용순 위원장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다. 그는 한국 특파원을 마친 뒤 기자를 그만두고 일본 규슈대학의 교수를 하고 있었다. 고바야시는 대신 요시다라는 인물을 이익치 회장에게 소개시켜 줬다. 그런데 이익치 회장은 당시 요시다를 처음으로 소개받았지만 왕회장은 이미 그를 알고 있었다. 왕회장은 89년 북한을 첫 방문할 때 고바야시가 당시 요시다를 소개해 줬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북한에서 잡은 꽃게 등을 일본에 파는 무역중개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시다의 아버지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매우 가까웠다. 요시다는 자연스럽게 김용순 위원장 등 북측 고위급 인사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더구나 요시다는 김일성 주석과의 관계뿐 아니라 김정일 위원장과도 끈이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의전비서인 전희정(당시 이집트 대사)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현대아산 관계자의 설명이다. “요시다의 아버지는 그를 ‘조국에 바친 아들’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는 김일성과 혁명동지였다. 그래서 「문예춘추」에서는 ‘내가 사랑한 스파이’라는 제목으로 요시다의 내력을 소개하기도 했다. 왕회장이 대북사업과 관련해 북한 사람들을 만나는 10번 정도의 접촉 때 항상 그 옆에는 요시다가 있었다. 이후 현대아산은 아예 요시다와 자문 계약을 맺어 매달 돈을 지불해 줬다.” 정주영과 정몽헌, 그리고 요시다 99년 현대그룹은 대북사업을 전담하는 창구회사로서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이때 요시다를 현대아산의 고문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상당한 돈을 그에게 매달 지불했다. 요시다는 현대와 북한 양쪽에서 보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정회장과 이익치 회장은 요시다의 도움을 받아 대북사업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얼마 뒤 이익치 회장은 요시다의 연락을 받았다. 북한 측과 중국에서 첫 접촉을 갖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회장이 98년 2월 베이징에서 만나 대북사업과 관련해 회담을 했다. 이 시기는 정회장이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익치 회장이 98년부터 북한과 접촉했다’는 내용과 일치되는 대목이다. 정회장은 “98년 2월 하순께 북경에서 이익치 회장, 요시다가 북측의 조선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송호경, 황철 참사를 만났다”며 “이때 금강산 관광사업을 북측에 제의하니까, 북측은 물자 지원을 요청했다”고 특검에서 말한 바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은 왕회장의 일본과 북한 인맥을 통해 대북사업의 물꼬를 튼 뒤 후계자인 정몽헌 회장이 본격 추진했던 셈이다. 그러면서 정회장은 대북사업 전면에 이익치 회장을 앞세운 것이다. 대북사업은 바로 정회장과 이익치 회장의 운명적인 연결고리가 된 셈이다. 두 사람은 이후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무리수를 둔다. 결국 정회장은 남북 정상회담 대가로 지불한 대북송금과 비자금 관련 수사를 받다가 끝내 투신자살했던 것이다. 이익치 회장은 특히 2000년 정회장의 형제간 경영권 분쟁인 이른바 ‘왕자의 난’ 때도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익치 회장이 정회장을 ‘비운의 황태자’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지적하는 이유다. <계속>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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